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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2-징역살이2018-12-2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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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징역살이


면담자: 어디 교도소에 있었어요?

구술자: 안양 교도소에서. 안양에서 잠깐 있다가,  다음에 인자 대전. 대전 교도소 특사로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대전 교도소가  교도손데 일제  건물 그대로 독립운동  사람들, 사상범들 때려잡았던 4동이라는 것이 그거여. 교도소 안의 교도서소. 그래가지고 완전히 철망도 없고 식구통만 있는, 그래갖고 바깥에서만 열어보고 닫아브니까 방은 전부 독방, 운동장도 대전교도소는 이라고 보믄 독방이 이러고 있다고 하면은  앞에 이런 식으로 운동장이 콘크리트로 사방이 높게 그래가지고 가운데 나무 하나씩 있는 거여. 그라고 인제 요쪽 구석지에 배수구 하나씩 있고, 그라믄 여가 문이 있어가지고, 여기다 넣ㅇ느 거지. 혼자 넣어놔. 그라고 혼자 가브러.

면담자: , 혼자 운동하셨어요?

구술자: 그러지, 대전 교도소에 특사에서는 혼자 운동해. 그라고 여기 들어가서 사방은 4미터 . 4미터. 바닥도 콘크리트 높은 담장. 나무 가운데 하나. 여기 인자 혼자서 뺑뺑이 도는거지. 이제 그러다가 어지러우면 요쪽으로 돌고. (웃음) 아주 무서운 곳이야 이거. 근디 교도소마다 분위기라는  있는데, 음산해. 대전 교도소. 거기서 이제 출소했는데 아무리 그때만 해도 교도소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준다고. 가마니 깔고, 바닥에 가마니 깔고 있고. 화장실 유리창이 dqjtdj. 비닐로 덧창같이 해서 막아주고. 가마니 깔고 앉었고.  근디 피부병이 인제 교도소에 가면 제일 어려운  피부병인데 영양상태가  좋으니까 온갖 피부병이  있잖아. 피부광「p서도 모르는 피부병이 있다고 그래. 교도소 안에서는 그렇게 종류가 다양한데. 거기서 살고 나와 갖고 일년, 이년이 자나도  나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바깥에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근데  약을 바를 수가 있나. 혼자 있으니까 그라믄 인제 혼자서 약을 발라야하니까 벽에다가(약을)칠해요 먼저. 벽에다 칠해놓고 인자 몸으로 가서 상의 벗고, 인자 등을 발라야 하는데 손이  다니까. 그래갖고 인제 몸으로 인제 벽을 문지르는 거지. 근데 겨울에 얼마나 콘크리트가 차요. 섬뜩섬뜩하지. 그러니 제대로 발라지지도 않고. 제대로 낫지도 않고 그래서 피부병으로 고생들 했고. 그렇게 해서들  어떻게 살고 나오는데.

면담자: 선생님 통방 같은  안하셨어요? 특사에 있는 선생님들과.

구술자: 아니 대전교도서에서는 특사가 구조가 여기가 우리가 들어가 있는 여가 특사 병실이여. 병실이었어. 그란데 병실도 한명씩 들어가게  있는 거야.  다음에 특사가 요쪽에가 있고 운동장이 여가 운동장이 있고 그래갖고 여기서 나와서 여기서 운동을 하고 그랬던 거야. 긍게 옆에 사람들하고 통방을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 여가 철창도  닫아져 있으니까 만날 수도 없고, 이건 말만 들었지. 우리는 특사 병실에만 있었으니까.

면담자: 민청학련 관련된 사람은 여기 특사 병실에 있었던 거예요?

구술자: 그러지. 여기 특사 병실에.

면담자:  선생님 병실에 있어요?

구술자: 공간이 없으니까. 독방에다 널라도 보니까. 그러니까 전국  교도소로 나눠졌는데 우리는 대전으로 가서 거기서 있다가 나왔는데.

면담자: 대전으로   가셨어요?

구술자: 대전에  그때 아홉명인가?  교도소로 나위어. 근데 하여튼 세상 평범하게  사람들이  겪을 것들을 겪으면서 많이 배웠지, 세상사가. 많이 배왔고 지금도 속없이 하루는 인제 출소하기 1 조치 며칠 전에 갑자기 교관들이  가지고 ‘효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근게 나는   효도, 부모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불효고, 부모님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드는  효도다. 나는 불효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 얼굴에 똥칠을 했냐 뭐냐, 당당하니  이야기  소리 하고 그랬는데. 그랬더니 ‘그래?’ 하고 넘어가고,  인자 나중에 나와서 보니까 우리 아버님 돌아가니까 동아일보에 크게 나왔어 이제.  때문에 홧병으로 돌아가셨다고 그래가지고. 인자  기사보고 나한테 물어 보드라고. 그놈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들었을 거여. 저기 아버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해주니까 나와서야 알게됐는데. 교도소 생활 중에서 두가지 것만 내가 이야기  것이 있는데, 하나는 이제 재판과정에서 교도소에서 법정으로 가는데 서대문 구치소에서. 김지하씨랑 모두들 같이 재판을 받았거든. 그니까 지하 형님이 맨날 우리보고 너는  전봉준 닮았니? 너는 김개간 장군 닮았다드니, 그러면 인제 나하고 정길이 강이씨한테 자꾸 인제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유행가 이야기가 나오면은   나훈아보다 뭔진이?

면담자: 남진.

구술자: 남진 맞어. 남진이가  부른다고 빡빡 우기고, 다른 사람들  나훈아가 낫다고 그러는데(웃음), 그래갖고  전라도 애기만 하는 거여.  나는 처음에  저렇게 편협한  그때는 지역주의니 뭐니 그런 용어도  쓸때니까 그러지만   양반이 저렇게 전라도에 대해서 묘한 집착이 있나. 병적이다 그랬어.  황톳길이 어쩠고 그러면서  김지하씨에 대한 좋은 인상에 상당히 찌그러졌어.  저렇게 편협하노. 전라도 경상도 가르고, 가수까지 빡빡 우기고 앉아있고. 그런데 이제 재판 과정에서  까마귀, 거의 우리 전남대생들 재판할 때는 가족에게만 가족 한두명에게만 방청을 허용했거든. 그때 변호사가 법정에서 구속되고 그럴 판인데  안와, 이쪽은 다른 지역에서는  올라와갖고 있는데 우리는 없어. 그라고 인제 뻔하지. 안양에서는 인제 그때가 10월이면 추울 땐데, 내의도 없지, 런닝 바람에 양말도 없지, 고무신신고 이라고 뛰어 오는데, 그때 일본 하야까시하고  다음에 누군가  사람이 있었는데, 민청학련 관련 사건 관련으로.  사람은 특파원이고  사람은 모르겠는데. 하야까시가  옆방에 있었는데, 내의 양말 이런걸 주더라고. 그때만 해도  전라도 촌놈이 내의는 동내의만 있지. 가을에 입는 얇은 내의는 생각도  해보고  때였는데, 얇은 내의를 주더라고 일찍. 첨봤지 나는 그때만해도 입은 사람도  봤으니까. 그런데 인제 받고 싶은데 아무래도 일본놈들 것은 받아야  어쩌고 생각하다가 돌려줘 브렀어.  그럴  있냐고 고집피우지 말라고,  인자 다른 지역 애들은  양말신고 그냥 내의 입고 뛰는데 그냥 검정 고무신에  양말로 란인구 바람에  다니고, 맨발로  다니고 그러다가 인자 다음 재판  끝난 2, 3차들 인자 서울구치소에  거예요. 인자 온다고들 누구야 그래서 얼른 내다보니까 전대생들 후배들이 오는데 그때 인자 눈물이 나오던데. 내가 서울 구치소에서 이감을 할라고 나오는데. 가지고 있는 짐들을  가지고 나와야   아니에요. 지금도 기억나, 서경석이부터, 서울에 있는 애들은 그걸 범털담요라고 하는데, 호랑이 그려지고 그런 두툼한 우리는 집에서 그걸 본적이 없지. 고놈에다가 온갖 책에다가  갖고 한복 입고 안에서  먹고 운동은 안하니까 디룩디룩 살들 쪄갖고 이러고 매고들 나오는 거야. 근데  나나 정길이 이강씨나 똑같지 그냥 이제 교도소에 인제 구매할  있는 물건들이 있는데, 매점에서 수건도 제일 싼거, 비누도 제일   이렇게 되거든, 란닝구도, 수건도 제일 싼거  요만해. 길기만 하고    갖고  찍어지는 그런건디 고놈을 요렇게 접어서 바느질 하고,  넣어서 그것이 살림 보따리가 되는 거여. 그것이 개털들의 보따리야.  보따리가(웃음). 제일   수건으로. 고놈 하나에다가 인제 빨래비누  쪼가리 세수비누 요만한 반조각, 치약, 칫솔, 빤스, 란닝구 하니씩. 왜그냠느 잠깐 합방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얻은 것들. 그래갖고 그래갖고는  독방에 나머지 기간에 독방에 있는데. 인자 달랑달랑 그것을 쇠불알이라고 오뉴월 쇠불알이라고  들면 요만해가지고 이렇게 늘어져 있으니까, 고놈 하나 달랑달랑 들고 손가락에 끼여 가지고 나가는데 다들 이라고 들고 나오는 거야. 황당해블지 나는. 뭐여 이거 나는 요만한  하나 쇠불알 하나 들고 있고 저놈들이 이렇게. 그래갖고 인자 안양으로 왔었는데,   후배들 온다고 그래서 나가서 티비 창문으로 ~하니 오는데 형선이하고 덕기하고 주먹으로 해갖고 한복 뺏어 입은 , 물건들  뺏었는가 이라고  들고 있고 나머지는 이학영이부터 시작해서, 열댓 명이   같은 쇠불알 하나씩 들고,  먹어 노니까 인제 뻔하지 기미하고 주근깨 하여튼 적당한 표현이 없는데, 꾀죄죄 해갖고  나간 애기들 얼굴 해갖고 그라고 걸어오는데  하얀데,  눈물 나올라고 그러더라고. 아하 지하형이 저래서 그런 소리를 했나 보구나, 전라도. 그거 한번 처절히 느낀  있고. 근디 인자 그걸 나는 배타적인 저라도 지역의식이라던가 그렇게는  받아 들였어. 현실이 이렇구나.  다음에 인자 책들인데 하루 종일 앉아있는데 독방에서, 책이 들어들어오나. 인자 다른  다른 대학생들한테 빌려보는 거지. 그라고 인자 자기들 볼만한 열권 들어오면 그중에서 보고 싶은 책들  빼놓고 인자 나머지를  볼일 없는 것을 주는데, 빌려서 보믄 안에가 인자 은행잎도 들어가 있고,  밑에가  죽는 그날까지 기다리겠어요. 그라고  본게 여자친구들한테  거야.(웃음) 그런 것들이  있는 거여 인자. 그때 인자 느낀  생각한게 뭐냐믄 그래 내가 나가 면은 다음 징역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옥바라지를 충실히 해야겠다.  번째가 우리는 여자가 한명도 없지 인자. 우리 민청학련사건 전남대가 학교로는 서울대 다음으로 숫자가 많은데 17명이 구속되었으니까.  번째로 많아요. 근데 여자들도 운동가를 키워야겠다. 그런 다짐을  하고 나와갖고 그걸 실천에 옮겼는데 그건 나중 이야기고.  다음에 이제  가지가  인생 차원에서 사상적 차원에서 어떤 자그마한 전기가 됐는데 그게 뭐냐믄 내가 농대를 다니면서 어릴때부터 꿈이 있었어요, 나한테. 어린시절부터. 그게 뭐냐면은 세계에서 제일 멋진 정원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고. 정원을. 그래가지고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하고 호수가 어떻게 하여튼  외국 영화를 보거나 시진첩을 보거나  이런 정원을 내가 가져야지. 묘한  있어갖고 대학 다닐  내가 축산학관데 임학과에 조경학이라는  있어요. 고걸  학점 신청해가지고 A학점 맞고 그랬는데. 가서 조경 농촌에 들어가서 목장하고 그러면서 완전히 목가적인  그래갖고 정원을 멋지게 꾸미고. 그래서 인제  정원을 꾸미는데 뭣을 어떻게 꾸미고 뭣을 어떻게 꾸미고, 근데 이제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하고, 생각한  하고 비교해보니까 조경학에가  나와 있는 거여. 내가 생각한 것이 긍게 자존심이  상했지. 근데  가지 없더라고 조경학에가 정원에 이렇게 꾸미는 것에 있어서. 그게 뭐냐면은 내가 인제  호수, 연못 같은 데다가 뗏목으로 만들어서 사방 직사각형이나 원이나  우에다가 흙을 1미터, 2미터를 쌓아가지고, 바위도 놓고 나무도 심고, 화분도 만들고 정자 비슷허니 만들고 일종의 인공 섬처럼 만들어서  썩지 않도록  밧줄을 만들어서, 쇠밧줄을 만들어서. 밑에다가 인자 닷을 놓는거지 그럼은 인자 고게 바람에 따라서 요쪽으로도 밀려가고, 저쪽으로 밀려가고 그럼 인자 이쪽으로 밀려왔으면 내가 나가서 달밤에 피리나 불고(웃음). 그라믄 인자 호수가 바람타고 이렇게 왔다갔다 하고. 꽃을 거기서 얻고 거기서 인자 시나 읊으고 한다는 식으로. 고런 생각을 옛날에 정원생각을 하면서 했었거든. 그건 없는 거야. 책에가. 그런 정원에 다양한 형태의 조경이 있는데 연못이나 호수에 그런 인공 댐을 배처럼 만들어갖고,  속에 이렇게 꾸미고 있는 것은 없는거야. 고것은  자존심을 찾았지. 그래,  다른 것은 있다 하더라도 요것은 나만의 독특한 독자적인 것이다. 그래 나는  그렇게 해야지 그래갖고 조경학을 에이 맞고 그랬는데. 그런데 대전교도소에 있을때, 그때 내가 지금도 확실히 어느 출판산가는 기억이 안나는데, 현암사같았는데 다산 시문선이라는 책이 나왔어요. 다산의 시학 관련 서적이 아니라 다산이 개인적으로  ,  다음에 편지, 자식들에게 자식들하고 교환한 편지 이런 것들을 뽑아서 쓸만한 것을을 모아서 만든 책이 다산 시문선이었어요.  부피가  이렇게  큰책이었는데, 보통책보다.  다산 시문선을 읽으면서 내가 인자충격을 받은게 두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내가 그때까지만 해도 민청학련사건때 썼던 선언문  하나가 민족, 민주, 민중선언 그런게 있었잖애. 민중소리를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것이 아니라 뻔하지  학자들이 쓴거지. 근데 따라서 쓴건데. 나는 어렸을때부터  부잣집만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부잣집이었거든. 배고픈지를 몰랐으니까 인제 아버지가 아버님이 보증서가지고 잠깐 어려울  빼놓고는, 배고픔을 모르고 시골 부자였는데, 몰락한 지주 집안이었으니까. 그래도 정미소하고  창고하고 그랬으니까. 근데 인자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 하면서 강진만 유역에 민중들의 처참한 삶ㅇ르 시로 읊은 것들이 여러  나와요.  시들을 읽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븐거야.  민중들 고달픈 삶에 대해서. . 왜그냐믄 내가  좋아해갖고 온갖 시집은  모아갖고 서양놈들  그냥   허고 우리나라 시인들거  모아놓고 거식하고. 시도 쓴다고 써그랬쌌고 그런데,  그냥 다산 시문선에 나오는  처참한 민중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삶을  비참한 삶의 모습을 그려놓은 시들을 보고는 눈물이 쏟아져 블더라고. 그것이 오늘의 민중들의 삶으로 나한테는 받아들여진거여.  이런거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말로 민중 어쩌고 떠들면서 내가 배고파보지 않아서 몰랐구나. 이런 놈의. 그래갖고 다산이 이제 다르게 보이더라고.  단순하게 학자가 아니었구나  사람이. 이런 민중에 대한 애절함 가지고 있었구나. 그래갖고 인자 거기서 충격을 받은  다시 말해서 ㅁ니중에 대해서 이백년전의 인물의  어떤 작품, 문학적 작품을 통해서 충격을 받은거야.  다음에 인자 그것이 진짜로 나에게는 충격이었는데, 다산이 자녀에게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뭐가 있냐면은  농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는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래서 밭둑에도 콩을 심고  그라고 노는 땅이 없이 그러면서 뭐가 나오냐면은 연못이나 호수 같은데 수면도 뗏목을 뛰워서 이렇게 이렇게 해갖고 거기에 흙을 놓고 거기다도 보리도 심고, 채소도 심어서 생산을 해야한다 이런 대목이 아온거야. 인자 거기에서 내가 완전히 벼락을 맞어븐, 왜그냐믄 다산의 출신배경이 나보다 훨씬 너무나 훌륭한 가문의 자제였거든. 긍께 굶주림을 모른 가난을 모르는 민중을 모를  있는 그런 계급적 출신 배경인데, 나는 인자 그래봤자 조끔은 부자라고 했어도 형편없는  사람하고 비교하고 아랫계급인데, 나는  위에서 이렇게 해서 호수에 정원만들어갖고 거기서 음풍농월할 생각을 했는데,  사람은 그런 출신배경속에서 고관대장 했으면서 생산을 위해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거기서까지고 놀리지말고  공간도 작물을 키워야 한다고 편지에 써놨던거지. 발상은 똑같애. 거기다  뗏목 ;우는 것은 거까지는 같은데 이거 완전히 다른 차원이여.나는 인자 유한 게급적 발상이고  사람은 민중적 발상이고, 근데 계급적으로 보면 다른 꺼꿀론데,  사람이 유한계급이고 나는 아닌데. 분류한다면은. 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인제 충격적인 질문이 떨어져븐거여. 얼마나 부끄러워블던지. 독방에 앉아서   책을 덮어블고 앉아서 어떤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났는가. 어떻게 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고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는가. 그래가지고 의외로 나는 이제  무슨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맑시즘이 어떻게,   어떻고 하는 그런쪽의 충격을 받은  보다는 느닷없는 다산 시문선을 통해서 이제 내가 충격을 받아갖고 내가 얼마나  심한말로 이제 부르주아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이야기를 하냐면은 가서 재판을 받아보는 과정에서  삽십이명 인자 일차 주모자급 재판인데, 내가 반공 딱지를   어떻게 보면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왜그냐면 인제 내가 쩐남대 선언문을 썼는데 거기에 어떤 대목이 나오냐면은 그때만 해도 인제 가능하면 들어가서 빨갱으로  몰리기 위해서 일부로 북을  까는 내용들이 한줄씩 들어가고 그랬다고, 518직전에도   전남대 시위때도, 북괴는 오판말라 이런 피켓도 들고 그랬는데, 근데 그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대목들이 들어간다고. 선언문에가 인제 전남대가 유일했다고 그것이. 남침야욕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를 의식해서라도 민주정치를 해야하는데, 이런 식으로 한다 잘못했다, 이런 내용인데. 근데 이제 내가 다산 시문선을 통해서  가지,  아까 호수나 연못 위에 그거하고,  다음에 이제 당시에  강진만 유역지역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어찌됐든 관료고, 선빈데  사람이, 학자가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그런데에 대해서 충격을 받고, 그랬던거야. 긍게 인자 ㅁ낳은 것이 생각을 하고 나서  내가 나도 모르게 이러이렇게 형성이 됐구나, 사고나 사상이,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그래갖고 인자  다음부터 다시는 조경이야기 인체 꺼내지도 않기로 하고, 포기. 그러면서 어떻게 마무리를 했냐면은 내가 생각하는  정원을 꾸미라고 하니까 호수도 있어야지, 바다도  있어야지 백사장도  있어야지 산도 있어야지, 어쩌고 하다가 보니까 그것이 자연이 돼븐거야. 그러믄  이건 내가 혼자서 가질  없는거, 이미 나는 다가지고 있다, 언제라도   있다, 긍게 나는 가진 것으로 하고 . 이렇게 정리를  버렸는데,  혼자만 가질  없고 모두가 함께   있는 , 지구상에  있지 ㅇ낳느냐, 이러고 끝냈어. 인제 그런 이제 나름대로 독방에서의 체험이 있었어요. 인자 나왔어. 인자 반공딱지도 상당히 떨어진 채로,  자신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리고 그러니까 하하 관제 빨갱이라는게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관제 공산당이. 많은 생각을 했고. 그래가지고 인자 나와가지고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모두 환영회도 하고 영웅대접을 했지 왜냐믄 어차피  국내외의 압력과 호소에 의해서 정부가 인자 일괄 석방을 했기 때문에, 그때 인자 찍힌 일부  학생이 아니 졸업생들일부하고  사람 빼놓고 다내놨지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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