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내가 만난 윤한봉, 93, 길지2018-12-26 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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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 망명객 윤한봉 12년만의 귀국 ①

내가 만난 윤한봉

황광우/노동운동가 1993.7 월간 길(82~91쪽)

지난 5월 13일 정부는 80년 5월항쟁의 주모자로, ‘이적단체’인 ‘재미 한국청년 연합’의 대표로 수배돼 있던 윤한봉씨의 귀국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5월20일, 미국 망명 12년만에 윤한봉씨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보름간의 바쁜 나날을 보냈다. 광주일고 후배이자 지난해 광주에서 윤한봉씨 귀국을 위한 시민서명운동을 펼쳤던 황광우씨가 그 짧은 동안의 만남을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6월 3일 돌아간 윤한봉씨는 7월말경 완전귀국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1993년 5월의 망월동은 그리운 사람을 맞이했다. 언제부턴가 5월이 오면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망월동을 찾아들게 되었다.

타지에서 오는 이들은 성지 망월동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리고 이곳 광주 사람들은 웬지 허전해 망월동을 들르는 것 같다. 그러나 목련꽃 지듯 북적이는 발걸음은 이내 쓸쓸함으로 변한다.

성지 망월동이 정적의 묘역으로 돌아서는 길목에서, 5월 21일 아침 7시, 한 사람이 국화꽃을 바치고 있었다. 가끔씩 플래시가 터질 뿐 주위는 사뭇 조용했다. 13년만에 이루어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이 만남에는 통곡도 오열도 들리지 않았다.

“망월동의 흙을 모시고 괴로울 때면 언제나 망월동의 넋들과 이야기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적인 감회는 들지 않았습니다.···”라고 윤한봉씨는 그날 8시에 있었던 광주 그랜드호텔 기자회견 석상에서 참배소감을 피력했다.

망월동의 먼저 간 후배들, 그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내가 망월동에 첫발을 디딘 것은 벌써 14년전이다. 그때는 망월동을 우리의 사랑스런 누이 박기순 홀로 지키고 있었다. 대학에서 시위를 하고 수배를 받고 공장에 들어가고 하는 일들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려는 젊은이가 걸었던 공통된 길이었지만, 이 길 위에 섰던 많은 형제들 중에서도 유달리 박기순은 시골 아줌마처럼 부지런했고 강가의 조개처럼 순결했다. 그 박기순이 광주 광천동에서 노동형제들과 함께 공부하고 함께 노래부르고 함께 춤추다 먼저 갔다. 1978년 12월 26일 새벽 4시 연탄가스 중독.

우리는 1979년 7월에 ‘노동자의 누나’라고 쓰여 있는 박기순의 묘역에서 오열한 적이 있다. ‘일배 일배 부일배 허면,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일배 일배 부일배 허면 우리와 자연이 하나가 된다’는 시를 읊으며 상원, 관현형과 술을 부었건만 그후 1년이 넘지 않아 상원형이 가고 상원형이 간 지 또 1년이 지나자 관현형이 뒤를 따르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신영일 형이 87년에 이들의 뒤를 따랐다. 언제나 산 자의 깊은 고뇌를 이고 살다, 정말 열심히 살다 어린 아들 새벽이를 두고 먼저 갔다. 박기순, 윤상원, 박관현, 신영일. 그리고 80년 5월의 항쟁 한가운데서 전사한 용준형, 잡혀 감옥에서 머리를 벽에 처박아버려 지금은 일상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 김영철 형을 또 잊을수 없다. 모두가 70년대말 광주에서 들불을 일으키고자 불씨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윤한봉씨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예의 잠바차림을 하고 사뿐사뿐 걸어 이제는 고인이 된 후배들의 묘 이쪽 저쪽을 찾아 인사를 올리고 묵념을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학살자라 했을 때 양심이 있는 자가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요, 감옥이요, 무덤이다”라고 김남주 시인은 읊었는데 그는 먼저 간 후배들 앞에서 무엇을 약속했을까?

임수경의 방북에 한청련이 개입되어 있다는데

이어 자리는 기자회견장으로 옮아갔다.

“도망간 사람을 이렇게 환대해 주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별명인 합수(거름으로 쓰는 똥오줌 -편집자주)처럼 거름이 되어 열심히 살겠습니다.” 윤한봉씨의 조용한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망명과 귀국을 도와준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단체를 일일이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망명을 도와준 강신석 목사님, 조아라 장로님, 후배 정용화씨, 최권행씨···,

귀국을 도와준 이부영씨···, 광주전남연합 동지들, 광주 진정추 동지들···“

그랜드 호텔에서 가진 척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은 한청련이 행한 미국에서의 활동이 실정법에 위배되지 않는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윤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정보사찰이 우리의 상상을 넘어 치밀하게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리고 북한은 휴전중에 있는 미국의 적대국가다. 현재 한청련은 비영리법인단체로서 미정부에 세금보고까지 꼬박꼬박 하고 있는데, 한청련이 북한의 도움을 받고 있는 단체라면 어떻게 미 정부가 비영리법인단체로서의 한청련을 인정하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남북의 정권 모두에 대해서 자주적인 입장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임수경씨의 방북에 한청련이 개입했다는 비방은 정말 오랫동안 익히 들어온 근거없는 모략의 일부일 뿐이다····.

문신부의 방북에 대해서는 일조를 한 사실이 있다. 문신부의 일본행을 도와준 사실이 있는데, 이런 인간적인 배려까지를 친북활동이라고 매도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싸울 용의가 있다.”

노총각의 기자회견

기자회견에서는 여러 가지 질문이 나왔는데, 한가지 인상깊은 질문을 소개한다면 윤한봉의 결혼에 관한 것이다.

“나이 40이 훨씬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특별히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도 결혼할 의사는 없는가?”

이에 대해 윤한봉씨는 확고히 답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날 나는 결심했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이 자리에 저보다 선배되시는 분이 많이 있어 외람된 이야기지만 조국의 민주와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해 앞으로도 모든 힘을 다해 살고 싶다. 늙어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을 때에는 양로원에 들어가 쉴 것이다.”

여담이지만 윤한봉 선배의 이 발언은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될 성 싶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이 발언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십인십색의 반응이 나왔다.

그러니까 결혼을 했으면 아무리 운동가라 할지라도 가정을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반응, 그러니까 가정을 가지면서 운동에 열심히 복무한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반응, 아니 가정을 남자 혼자 책임지간디 결혼 못하겠다고 말하는 거냐고 따지는 여자 후배의 반응, 그 반쪽의 책임도 그만큼 어려운 것이 아니냐는 반응, 아마도 가정에 대한 책임을 통째로 책임지겠다는 여성 동지가 있다 해도 윤한봉씨는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는 반응, 우리에게도 베트남의 호지명처럼 죽을 때까지 홀로 사는 혁명가가 있어 만인의 형이 되고 오빠가 되고 삼촌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주는 분이 한명 정도 있으면 좋지 않냐는 반응···.

산천은 의구한데

그날 저녁에는 광주전남연합 주최로 열린 귀국환영대회가 광주 YWCA 1층 강당에서 있었다. 김정길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 자리에는 광주의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문병란 교수, 명노근 교수, 정동년 선배··· 자리를 둘러보니 14년전 광주에서 민주의 꽃을 가꾸기 위해 윤선배와 더불어 뛰어다녔던 많은 지기들이 와 있었다. 여수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최연석 선배, 사업을 하고 있는 최철 선배, 그 당시의 광주 노동운동을 이끌고 또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이양현 선배, 산천은 의구했다. 짧고 소박한, 그러나 떨리는 음성으로 환영사를 마친 주인공에게 꽃다발이 뿌려졌다.

미국에서 윤을 도와주어왔고 이참에 함께 귀국한 모선생(치과의사)께서 간단한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윤한봉 선생은 몸을 드러내면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명의 동지를 위해서라면 수천리 떨어진 산 속이라도 찾아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분이었습니다.”

고향에서의 공식 환영대회를 마친 윤선배의 일정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이 빽빽했다. 나는 작년에 형의 귀국을 위한 서명운동에 땀흘린 노동형제들의 이름을 빌어 겨우 저녁식사시간을 얻어낼 수 있었다.

5월 26일 오후 5시, 윤선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침내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형이 ‘전남대 본관 방화미수’사건 배후조종 혐의로 돌연 체포되어 없어졌던 1979년 10월초, 그때 어는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대면한 이래 처음 갖는 기회였다.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의 패배를 보고

“선생님, 무척 보고 싶었어요···”

어느 간호사 형제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꽃다발을 안겨드렸다. 그녀는 얼굴도 음성도 들은 적이 없는 윤선생의 귀국을 위해 작년 봄 증심사 입구에서 충장로 복판에서 부끄럼을 잊은 채 “광주시민 여러분, 광주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우리 모두 서명운동에 동참합시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지나가는 청춘남녀들을 억지로(?) 붙들어 서명을 강요했던 여성이었다.

공식 석상의 발언은 무척 간결했고 심지어 건조하기조차 했던 윤선배의 발언이었지만 오리탕을 가운데 두고 오고가는 사랑방이야기에서는 그 특유의 서민적 재치가 넘쳐 흘러났다. 50여명이 모인 자리 군데 군데에서 나오던 지방방송이 어느덧 조용해지고 시선은 모두 윤선배의 몸짓 손짓 하나하나로 빨려가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매우 자유롭지요. 그런데 이 자유는 그어진 금안의 자유입니다. 지금도 원주민들 중에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이 나오기만 하면, 왠일인지 교통사고로 죽어버리거나 낚시터의 변사체로 떠오르거나 하죠. 아무도 항변을 못하고 그대로 끝나버립니다.

정말 우리나라는 이상한 나라지요. 학생 한명이 죽었다고 해서 전국이 들썩이는 나라는 전 세계에 찾아볼 수 없어요. 필리핀이나 아랍의 경우 지도자가 죽으면 좀 시끄럽습니다만, 그쪽 운동가들도 우리나라에서 이름없는 노동자, 학생의 장례식을 둘러싸고 전 국민이 날리법석을 피우는 일에 대해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우리 문화를 저는 미국에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제 3세계 운동 전반이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나는 루마니아 사태나 동독의 몰락에 대해서는 사실 별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쪽 사회의 문제점들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었기 때문예요. 오히려 큰 충격을 받은 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의 패배였습니다. 개표 직전까지도 산디니스타 정권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미국의 그 어떤 평론가도 차모로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솔라즈 의원이 차모로의 승리를 예견했었는데, 언제나 그러하듯이 그의 발언은 미친 소리 취급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미국이 니카라과선거에 아주 깊이 개입했다고 그러더군요. 투표권 한 장에 1백 달러씩을 주고 사버렸다고 해요. 미국은 정말 무서운 나라입니다. 부정선거를 자행했는데도 불법으로 몰아붙이질 못했답니다. 왠고 하니 차모로 선거요원들이 워낙 교묘했다더군요. 그들은 주로 혁명정권을 지지하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투표권을 샀는데, 요원들은 투표권을 사서 차모로에게 준 것이 아니라 매매현자에서 유권자가 직접 찢어 버리도록 했다는 거예요. 혁명정권 지지표를 기권표로 만들어버린거죠···.

혁명전권이 선거로 무너지는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 일어난 거죠.

필리핀의 신인민군도 무척 고전한다더군요. 도무지 밀립 속에서 10명만 모여도 포탄이 날아온다는 거예요. 미국의 인공위성이 적외선촬영방식을 이용하여 집회장소를 포착한 다음 지상군에게 정보를 제공 해줘버린다군요···."

좀더 대담한 창조적인 변신이 필요하다

윤한봉의 제3세계 운동에 관한 얘기에는 그의 제3세계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가끔 제3세계 운동가들과 함께 국제정세에 관한 토론을 해왔다고 한다. 우리가 한반도라고 하는 좁은 우물 속에서 세계의 하늘을 쳐다 보았다면 그는 우물 밖에서 세계의 하늘을 보아온 듯. 하지만 국내 운동에 관한 논평을 요청하는 질문 앞에서 그는 일단 발언을 조심했다.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한 사람이 수풀에 대해 뭐라고 떠들 수 있겠습니까? 당분간은 나무를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대체로 87년까지만 해도 우리는 조국의 운동에 대해 열렬히 박수를 쳤더랬습니다. 그런데 이후 열심히 박수를 치다가 보면 간혹 ‘아닌데, 아닌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게 되곤 했습니다···.

광주지역의 의식수준이 높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광주지역에서 진보운동이 뿌리내리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제3세계 운동가들이 질문을 해올 때 답변하지 못했던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역대결구조 운운하며 설명을 하지만 그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지요. 세계사적인 운동에 있어서 한국의 진보적인 운동은 한참 뒤떨어져 있습니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동지들에게 말씀드릴 게 있다면 좀더 대담한 창조적 자기변신이 요구되지 않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대담한 창조적 자기변신’이라는 추상어가 무엇을 담고 있는 것인지 더 묻고 싶었으나, 윤선배와의 대화는 이내 정리되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울에서 찾아내려온 『길을 찾는 사람들』 기자를 보고 ‘길을 찾는 사람들’을 빗대어 자신의 당부를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나도 길을 찾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길을 찾는다면서 전부 뿔뿔이 흩어져버리면 길을 찾아다니다가 사람 찾느라고 볼 일 다 본다는 겁니다. 함께 길을 찾읍시다.”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어가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맺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그분의 분주함을 이해하기에 첫 해후의 짧음을 섭섭해하지는 않았으나, 분위기만큼은 그대로 버리기 안타까워했다. 나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결례를 무릅쓰고 선배가 잠자는 장소로 쳐들어가기로 합의했다.

“너무 외롭고 배고푼 시절이었지”

윤한봉씨에겐 여동생이 한분 있는데 여동생의 남편되는 분이 박형선씨다. 앞에서 말한 ‘노동자의 누이’ 박기순의 오라버니되는 분이며 이른바 민청세대다. 감옥에 처음 들어갔던 스무살 때, 깡패들이 신고식을 강요하자 그 자리에서 깡패 세명을 주먹으로 두들겨패준 호남아. 윤선배와 젊은 시절 고락을 같이하면서 선배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윤의 귀국을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뛴 그였으나, 불행하게도 그는 김포공항에 나갈 수가 없었다. 신장결석수술이 잘못되어 쓸개에다 호스를 대고 액즙을 빼내고 있는 ‘곰 신세’가 되어 있다.

“형님 이번에 잘 들어왔어. 미국에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흔들의자에 누운 상태에서 튀어 나온 박선배의 한마디는 나의 뇌리를 꼬챙이로 꿰는 듯했다. 중학생들이 학교에 총을 가지고 가서 장난하다 친구를 죽이고,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총으로 경찰을 위협했다 하여 경찰이 어린아이를 사살해도 무죄가 되는 사회, 베트남전쟁 당시 반전운동에 참여한 경력이란 별 좌익적인 것도 아닌데도 이런 사람들까지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그 사람의 생계를 망쳐놓는 미국. 낚시터에 시체로 발견되는 원주민 지도자. 이런 사회에서 10여년간 동포들의 민족운동을 이끌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외쳐왔다는 윤선배의 발걸음이 갑자기 팽팽한 긴장으로 다가섰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은 벨을 눌렀다. 거기에는 윤한봉 선배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재미 한청련 부회장(이제 윤한봉 선생 귀국 해외대책위원회 대변인이기도 한)강완모씨가 함께 서 있었다. 미국 어디를 가나 한 사람이 동행하는 까닭은 운전과 통역의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란다.

내가 윤선배의 인격을 존경하게 된 것은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광주일고 재학 시절 유신반대시위를 예비하다 17명이 집단퇴학을 먹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에게 점심 한끼를 윤선배가 사주었다. 매우 당연한 일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 점심값이 노가다를 뛰어 번돈이었다는 후문을 나는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후 나는 그 점심이 가슴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심야의 이야기는 어느덧 윤선배의 대학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민청사건으로 복역을 하고 나왔는데, 정말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더군. 너무 외롭고, 배고픈 시절이었지. 나는 농대를 다녔기 때문에 해마다 전대 사료작물을 인부를 사다가 깎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농대 학장을 찾아가 따졌지. 우리한테 일감을 주라. 다른 사람을 사는 일이라면 불쌍한 제적생들에게 잔디 깎는 일을 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마음 속에는 오기가 있었던 것 같애. 느그들 학생 짤라놓고 어디 뱃속 편한가 봐라.

잔디 깎는 일이 다 끝나면 아이스께끼통을 짊어멨지. 일부러 캠퍼스를 누비고다녔더니 하루는 교수 한분이 제발 학교에만 들어조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해. 왜 남의 밥줄까지 끊으려고 하냐고 독을 품고 달려 들었지. 그랬더니 그러면 아이스께끼 한통을 사주겠다고 그러더구만. 좋은 일 생겼다고 한통 팔고 다시 께끼 한통 띠어다가 캠퍼스로 달려갔어.

포장마차를 했어. 도청 앞에서 포장마차를 했더니 이번에는 경찰들이 잡아가더군. 유치장에서 나오면 다시 했지. 돈은 별로 못벌었던 것 같애. 안주만 남으면 형선이랑 남주랑 다 퍼먹어버리고 밤이면 해롱해롱 주정하고 그랬던 것 같애. 형님, 오늘 돈 많이 벌었지라우. 밤늦게 백원짜리 동전을 세면서 형선이는 말했지.“

시계는 두시를 넘어섰다. 곰 신세가 되어 괴로운 박형선 선배는 그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흔들의자를 왔다 갔다 움직이면서 20년전의 자신들의 과거글 듣고 있었다.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옆모습에는 부끄럽지 않은 젊음을 살아온 인간의 여유가 스며 있었다.

밥이 없으면 라면을 먹고, 라면도 없으면···

망명자, 조금 좋게 말해 망명 운동가. 냉정하게 평하자면 윤이 지난 12년 동안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것은 없다. 헌데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그를 보고 싶어 한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지면에서 윤한봉이라는 인물에 얽힌 신화에 대해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신화는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역시 살아있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다.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다” 라는 진술로 맺고자 한다.

그는 무척 바쁘다. 부천의 피코 아줌마들이 미국에서 농성투쟁을 했을 때 그곳에 윤선배가 있었나보다. 피코 아줌마들이 만나자고 그러고 전교조 선생님들이 보자고 그런다. 전교조 초창기에 윤선배가 약간의 도움을 보냈나보다. 김포공항에서 마저 포옹을 하지 못한 서울의 많은 민주인사들이 기독교회관에서 자리를 만들었다.

또 노동운동가들이 서울 종로의 한일관에서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선배와 만날 수 있었다.

권영길 업종회의위원장, 한경남 우리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이영순 여성노동자회 회장, 김지선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노회찬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대표,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 전희식씨 등 여러 사람이 모였다. 한 순배 인사가 오가고 한경남, 노회찬씨의 간단한 환영인삿말이 있은 뒤 좌중은 군데군데 이야기 마당을 펼치게 되었다.

요즘 이곳의 운동단체들은 재정 문제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한청련의 경우 재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처음에 미국에 막 떨어졌을 때 캄캄했습니다. 2억 5천의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없었지요. 본명을 공개할 때까지 1년이 걸렸습니다···.

망명생활 처음엔 고생을 했습니다. 밥이 없으면 라면을 먹고, 라면먹을 돈이 없으면 그냥 굶어버렸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한청련 회원들의 사정을 딱하게 본 동포들이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불쌍하다고 쌀 갖다주고, 불쌍하다고 김치 갖다주고, 또 불쌍하다고 옷 갖다주고···.

지금은 미국의 주요 도시 여섯군데에 마당집이라 부르는 회관이 있구요. 이곳에서 상근자들은 숙식을 해결합니다. 잠을 회관에서 자고 나면 후원자들이 자기집에서 먹는 반찬거리들을 가져와 함께 식사를 하지요. 저녁이면 다양한 반찬으로 회원들이 모여 만찬을 벌입니다. 옷은 판매용으로 수입한 중고용품 중에서 골라 입지요. 의식주가 해결되는데 별 돈이 들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돕는 분들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5달러만 도와주어도 반드시 기부자명단에 기재를 하지요. 심지어 빈 깡통 다섯 개만 가져다주어도 기부자명단에 깡통 다섯 개를 기록합니다. 돈을 주시는 분,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분, 책을 가져다 주시는 분, 옷을 가져다주시는 분 모두를 빼지 않고 장부에 올려놓았다가 월말이면 결산을 해 결산보고서를 지원자들에게 모고해 올립니다. 한청련과 각 지역 마당집은 언제 누가 와서 감사를 하더라도 깨끗함을 자랑할 수 있지요.“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무게에 비해 대답은 너무 간결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우리의 재정문제가 해결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으나, 아무튼 윤선배의 치밀함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 같다. 이어 나는 한청련의 학습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언젠가 지면을 통해 한청련이 학슴을 중히 연긴다는 소식을 접했던 터, 이 자리에서 궁금증을 풀고 싶었던 것이다.

“우린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학습을 합니다. 조국에 대한 학습만이 아니라 국제정세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학습을 하지요.”

나는 얼른 가로질러들어갔다. “매달 시험을 치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대체 무슨 시험을 봅니까?”

“매달이 아니라 어쩌다 한번씩 회원들 시험을 보는데 시험문제는 주로 조직생활에 관한 거지요. 예컨대 남의 집 방문할 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냅니다. 답은 ‘첫째 방문할 집의 약도를 정확히 파악한다, 둘째 선물을 준비한다, 셋째 제공할 자료를 준비한다, 넷째 여러대의 자동차가 함께 움직일 때 서로 흩어지지 않도록 연락망을 사전 준비한다’지요. 재미있는 예를 하나 소개할께요. 회관에 불이 났을 경우 무엇을 맨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냈더랬어요. 답들이 가관이었는데, 평소에 하도 보안훈련을 맣이 해선지 가장 많이 나온 답이 ‘회관의 서류들을 안고 튄다’ 였어요. 그런데 정답은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거지요,”

미국의 기능주의, ‘LA폭동’을 보는 눈

윤선배의 입에서는 미국에서 체험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 풀려나오듯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어나가는 건가에 대해 연구 해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그들의 사고와 행태가 철저히 기능주의적이라는 거거든요.

예컨대 공중변소에서 성추행이 많이 발생하고 그러면 우리처럼 ‘성추행의 근본원인’을 따지고 어쩌고 하는 데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중변소 문의 아래쪽을 잘라버립니다. 처음 미국에 온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비쳐지겠지만 그렇게 하니까 공중변소에 두명이 들어갈 수 없게 되더라는 거예요. 예? 거기는 공중변소가 다 좌변기라서 문제(?)는 없어요, 하하.

또 특정 지역에 마약밀매가 성행한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그 지역 전체를 경찰차로 통제해버립니다. 사람의 통행을 막아버리면 마약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나는 거지요. 다른 지역에서 또 마약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겠냐고 물으면 다른 지역에서 마약밀매를 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 않겠느냐고 말하더라구요. 우리 같은 사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인데 이런 기능주의적인 처방이 또 미국에서는 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흑인폭동은 인종폭동이 아니라 미국의 도시빈민폭동입니다. 국내에서 나오는 대다수의 언론들이 이 폭동의 성격을 왜곡보도했는데, 이 폭동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 흑인은 오히려 소수입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중남미 형제들이 더 많이 참가했지요. 이걸 미국의 언론이 흑백간의 인종갈등인 양 부추겼고, 우리 언론들도 그대로 똑같은 접근을 했던 겁니다.”

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국내로 옮겨와야겠다 싶어 미국에서 본 국내 노동운동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87년의 대파업은 세계사적인 전환기와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진보적 운동이 수세로 몰리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한국에서는 거대한 노동자운동이 일어난 거지요.

제3세계의 입장에서 본 한국은 제국주의입니다.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착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필리핀이나 그 외 제3세계에서 한국의 빈민운동을 보기 위해 왔다가는 봉천동 빈민의 집들에 텔레비전이 있고, 냉장고가 있고 짤순이가 있는 것을 보면서 이곳도 빈민촌이냐고 놀랍니다.

이런 나라에서 87년과 같은 대파업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외국에서는 잘 이해를 못합니다. 예외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지요. 역사적으로 너무 억눌리고 탄압을 받아온 사실을 외국인들은 간과한 것인데, 예외는 보편화되기 어렵고 일시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매우 난처한 질문 하나

다음 약속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안 나는 꼭 듣고 싶은 질문 하나를 꺼냈다. “김대중씨와 선배와의 사이가 호의적이지 않는 것 같은데 미국에 있으면서도 특별한 사건들이라도 있었던가요?”

나는 이런 질문이 한 사람에게는 매우 난처한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 던졌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여러 가지 상념이 뇌리를 스친다. 미워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무튼 한 인간에 대해 서로가 편견을 갖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역사는 벌써 우리들의 발걸음보다 훨씬 빨리 달려나가고 있는데 우리가 과거의 일을 가지고 미래의 큰일을 그르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참으로 우리는 지난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왔다. 그리고 아직도 그 찢어진 부위는 아물지 않고 있다. 이 글을 마감하는 자리에 다음의 말들을 옮기는 것은 오직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김대중씨를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80년 봄인가요. 김상현씨쪽에서 김대중씨를 도울 젊은이가 필요하다고 나에게 부탁을 해온 적이 한번 있었지요. 물론 거절했지요.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김대중씨의 직속으로 내가 그림표에 들어가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만 나는, 그리고 광주운동권은 김대중씨로부터 단돈 일원 한푼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하간에 미국에서 김대중씨와 가까이 하는 분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주위의 사람들이 김대중씨에게 저에 대하 편파적인 정보만을 제공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체류했을 때 김대중씨가 보여준 활동은 조국의 자주화와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어요. 하여튼 김대중씨는 ‘주한미군 철수’를 싫어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와 한청련은 이 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좀더 여유를 가지고 비판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엔 눈에 산불이 났더랬습니다.“

더 이상 묻는 것은 결례일 듯싶었다. 만났으니 헤어질 때가 다시 왔다. 돌아와 함께 길을 만들어나가자는 약속을 남기고 윤선배는 일어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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