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오늘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2018-12-22 17: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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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합수정신은 무엇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윤한봉이 연 최초의 마당집이 민족학교였다. 뉴욕 민권센터엔 전봉준과김구와 장준하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두 가지 사실은 윤한봉의 이념이 민족주의였음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또 북한을 북부조국, 남한을 남부조국이라 부르면서, 통일운동에 앞장 선 것을 보아도 그의 심장에 민족의 피가 뜨겁게 흐르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한봉은 민족주의자였나? 나는 이 물음에 대해 긍정도 할 수 없고 부정도 할 수 없다. 귀국하여 광주에 연 연구소의 이름도 민족미래연구소였다. 따라서 윤한봉이 민족주의자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어느 민족주의자보다도 아니 그 어느 사회주의자보다도 국제연대 활동을 열렬히 추구한 이도 윤한봉이었다. 그래서 윤한봉이 민족주의자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정승진의 구술은 합수정신의 실체에 한 발 더 다가선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합수형님이 통일운동가 아니라니까요. 그 분은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에요.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에 있는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만약 미국에서 코리안이 다수가 되고 백인이 소수가 되면, 여기서 백인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된다’고 했어요.

합수정신이 무엇이냐? 윤한봉은 자꾸만 빠져나간다. 당신의 실체는 뭐요? 이것이 아니요, 물으면 윤한봉은 삐긋이 웃으며 아니라고 한다. 당신의 실체는 저것이 아니요, 물으면 또 윤한봉은 삐긋이 웃으며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합수정신을 규정하는 시도를 그만 두고, 거꾸로 합수가 그의 실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의 삶을 관통한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 합수는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조사해 보자.

2004년 5월 18일, 윤한봉은 5.18 아카데미 특강’에서 ‘5월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생전에 행한 많은 강연들 중에서, 윤한봉의 사유를 잘 드러내주는 강연이었다. 시애틀에 도착한 1981년,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피우며 고민했던 것도 다 이 ‘5월 정신’을 정식화하기 위한 숙려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5․18항쟁을 기념하는 사람들은 5․18항쟁의 정신을 정확히 정립해야 합니다. 이 정신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한 차례 기념행사를 치르고 할 일이 없는 거지요. 무엇을 계승발전 시켜야 하는가요? 올바른 계승을 위해서도 5․18 정신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립이 필요합니다. 흔히 5․18항쟁의 정신을 ‘민주, 인권, 평화’라고 하는데요, ‘민주, 인권, 평화’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5․18 정신을 규정하면 사실은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5․18 정신이 ‘민주, 인권, 평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5․18 정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생각하지 못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누구나 빠지기 쉬운 사유의 게으름을 윤한봉은 죽비로 후려치듯 우리를 내리쳤다. 우리 모두 ‘민주, 인권, 평화’라는 좋은 말에 취해 있을 때, 윤한봉은 ‘5.18 정신’이 무엇인지, 정면으로 묻고 깊이 사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5.18 정신’은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이라고 강연의 서두를 열었다. “학살만행은 분노를 촉발시켰고 분노는 저항의 정신, 항쟁의 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정신적 뒷받침 없이는 위대한 항쟁을 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이어 그는 ‘무엇이 그토록 도덕적인 항쟁을 하도록 만들었을까요?’라고 물으면서 또 하나의 정신은 대동정신이라고 제시했다. “‘먼저 가신님들과 같이 우리 모두 다 죽읍시다.’ 이런 비장한 구호를 외쳤어요. ‘같이 죽자’고 울면서 싸우는 거예요. 서로 음식을 나누고, 솥을 걸고, 피를 나누었죠. 이 정신이 대동정신이었습니다. 대동정신은 세상 사람을 다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신이 대동정신입니다.“

그 날 광주시민들의 마음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었던 이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에 대해 나는 한참을 두고 생각하였다. 윤한봉의 정식은 기존의 ’민주, 인권, 평화‘처럼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윤한봉의 정식이, 과연 그날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온전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조심스런 탐색이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어느 날이었다.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을 화두처럼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보았다.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은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기 이전에, 윤한봉이 평생을 걸쳐 따라간 정신이지 않았던가? 유신 쿠테타의 소식을 듣고 윤한봉은 결의하였다. ’국민을 버러지 취급하는 저 독재자, 나는 싸운다.‘ 백주대로에서 벌어진 공수부대의 몽둥이질을 용납하지 않은 광주시민들처럼 윤한봉은 박정희의 유신 쿠테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투쟁에 나선 윤한봉의 첫 출발이었다. 광주민중의 항쟁은 돌이켜 보면 윤한봉의 저항, 그것의 확대판이었다.

대동정신이라.... ’세상 사람을 다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신‘은 이미 꼬마 윤한봉이 실천하던 정신 아니던가? 합수의 동료, 임경규의 회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합수형님이 양심 있는 해외청년들의 공동체, 대동 세계를 만든 것 같아요. 해외에 살면서 ‘양심 있게 살자. 바르게 살자. 우리뿐만 아니라 양심 있는 타민족하고도 한 형제가 되어서 살자.’ 매일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우리의 공동체 대동 세계를 만들고, 양심 있는 타민족과 한 형제가 되자. 그렇게 활동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또 보았다. 정승진은 말하고 있었다. “합수정신은 결국엔 광주정신이에요. 감히 외람된 말씀을 드립니다만 5.18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려면 합수정신을 제대로 계승해야 되요.” 나는 그제야 시카고 마당집에서 본 구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바르게 살자’와 ‘굳세게 살자’는 다름아닌 항쟁정신의 표어였다. 그리고 ‘더불어 살자’는 대동정신의 표어였다.

9. 윤한봉은 실패한 것인가?

윤한봉은 귀국하여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윤한봉은 그가 꿈꾸는 민중세상, 대동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강력한 진보정당의 육성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한국은 분단의 특수상황 때문에 우주에 유일하게 진보정당이 없는 나라임을 자주 역설하였다. 그의 꿈은 야무졌다.

“확고한 정책정당, 투명한 민주정당, 분명한 책임정당, 진실한 도덕정당, 기본적인 운영비를 당원들의 당비로 해결하는 튼튼한 자립정당, 지역주의를 배격하고 20-30대와 여성 노동자 농민이 절반씩을 차지하고 장애인들이 10%를 차지하는 각계각층의 국민정당,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창조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며 노동조합, 공무원, 언론인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평화 군축을 추진하는 진보정당, 모든 국민들이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 문화적 안정과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하는 녹색 문화 정당, 민족의 위대한 미래상을 마련하고 진로를 제시하며 냉전 잔재 청산을 위해 적대적인 대북관계를 협력과 공존의 관계로 바꿔 평화통일을 준비해 나가고 불평등한 대미관계를 대등한 우방관계로 정상화시켜 민족의 존엄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치열한 국제경쟁과 동북아 주도권을 둘러싼 미, 중, 일의 대결에서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 민족정당,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고 세계 각지의 울부짖음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국제정당이 이 땅에 창립되어 꿈과 감동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나라, 이 겨레와 국제사회에 은하수 같은 꿈과 아지랑이 같은 감동을 선물로 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이런가?”

윤한봉은 마음을 먹으면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다. <해맞이>를 결성하여 진보정당 건설의 징검다리를 놓고자 하였다. 물론 해맞이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윤한봉은 정치인의 길을 피했다. 한평생 헌신하는 운동가로 남고자했다. 하지만 진보정당에 대한 그의 애정은 늘 따뜻했다.

2000년 1월 윤한봉이 바라던 진보정당은 창당의 기치를 올렸다. 이후 윤한봉은 민주노동당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며 43년만에 원내진출을 이뤄냈다. 살아생전에 이런 기쁜 일도 보는구나라며 누구보다 더 기뻐하였다.

그런데, 윤한봉은 절망한다. 그때까지 보수야당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이들, 시기상조니 뭐니 주장하며 오히려 진보정당의 출현을 방해해왔던 이들이, 2004년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자,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입당하여 계획대로 민주노동당의 지도부를 장악해나갔다. 윤한봉은 민주노동당의 고문직을 내려놓았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넘어서야할 큰 장벽에 또 직면하였다. 윤한봉은 이 고난의 행군에 동참하지 못하였다. 건강 때문이었다. 꿈꾸던 진보정당은 역사에 맡기고, 윤한봉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윤한봉이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이었다. 육교를 건너기 힘들었다. 목포에 칩거하면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며 삶을 연명하였다. 마지막 미국에 건너가 한청련 동료들을 만난 것은 2006년도였다. 이 만남에서 윤한봉이 행한 자기반성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세 가지를 반성하였다. 첫째, 북의 핵 보유가 사실임을 인정하였다. 북한을 평화세력이라고 보았던, 이전의 견해를 정정하였다. 둘째, 남침이냐, 북침이냐, 한국전쟁의 발발 책임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도 윤한봉은 기왕의 견해를 정정하였다. 최근 입수된 소련 측 자료에 의거하여 한국전쟁은 남침이었음을, 부끄럽지만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정정하였다. 셋째, 1987년 KAL기 폭파의 주범 김현희에 대해서도 윤한봉은 기왕의 견해를 정정하였다. 윤한봉은 오류를 반성할 줄 아는 정직한 실천가였다. 마지막 모임이 있던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승진의 회고를 들어보자.

모임이 끝난 다음 제가 차로 모시고 호텔에 모셔다 드렸어요. 그 분이 말하길 ‘이후로 여기 올 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호텔 앞에 내려드리고 보고 있는데, 한봉 형님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시더라고요. 그 분이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사람들 앞에서 울고 그런 분이 아니라니까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깨가 들썩들썩 하면서 쓰러지는 거요.

그날 밤은 윤한봉이 미국에 머문 마지막 날이었다. 최후의 만찬이었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윤한봉은 쓰러지듯 허리를 굽혀 오열을 터뜨린 것이다. 강인했던 한 사나이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상념들이 그의 마음을 출렁거리며 스쳤을까?

윤한봉은 귀국 이후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진보정당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 고대했던 대동세상은 문턱도 밟지 못하였다. 뜻은 변함이 없으나 뜻을 이룰 힘이 더 이상 없다. 어이할 것인가? 윤한봉의 오열 속에는 이역만리 건너와 고생했던 젊은 시절과 뜻을 이루지 못한 귀국 후의 아픈 현실이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꿈을 안고 귀국했으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심과 경계, 비방과 중상, 무고와 음해였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니 윤한봉의 삶은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윤한봉의 삶은 실패했다고치자. 하지만 그의 벗들이 촌놈 합수를 진실로 그리워하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규현-결코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슴과 행위가 투명하게 일치하는 사람,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사람,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울 만큼 열정으로 넘쳐나던 사람. 자신이 꾸리던 ‘민족학교’ 뒤편에 텃밭을 일궈 상추 고추 무 호박 등 채소를 직접 키워먹던 윤한봉, 광주 망월동의 흙을 여러 개의 위패와 함께 모셔두고 있던 윤한봉의 모습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홍희담-그를 마지막 본 것은 무균실에서였다. 들고 나는 숨이 끝난 그의 얼굴은 투명하고 평화로웠다. 모포 밖으로 그의 손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육체가 영혼이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형상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걸은 적이 있었기에 이 행성은 아름답다.

박광숙-그때 윤선생님이 귀국하였다. 나는 남주 시인께 물었다. “윤한봉이란 분 어떤 분이세요?”, “가장 순결한 사람이야. 자기 자신에 아주 철저한 사람이고. 추호의 거짓도 허언도 없는 사람, 백 프로 순결한 사람이야.”

최권행-그 사람 안에는 시인이 있다. 시적 열정과 구수한 달변, 역사에 대한 통찰은 그의 전생이 아마도 호머 비슷한 음유시인이지 않았을까 생각케 한다.

조진태-선배님의 재단 설립에 대한 마음가짐은 고스란히 설립 선언문에 담겨있다. 지금 읽어보아도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고 비장했는지 짐작된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이 아니고 채무이며,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

최동현-마침내 81년 4월 27일 밀항 출정식 참가자들이 마산에 모였다. 윤한봉은 죽을 각오로 투쟁하겠다고 했다. 미국 망명이 국내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데 작은 밀알이 될 수 있다면 온 몸을 바쳐 투쟁하겠다.”며 결의를 밝혔다.

김희택-나는 그를 만나서 청년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으니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를 만난 것은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의 눈에서 뿜어 나오던 광채. 그것은 진실 그 자체였다.

이강-1998년 내 막내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하였다. 합수는 “엄마도 없는 어려운 조건에서 착실하게 성장하고 공부도 잘 했구나, 앞으로 더욱 잘 하여라!”고 말하면서, 등록금에 보태라고 무려 100만원을 주면서 아이의 사기를 살려주었다.

나창진-선생님은 시집 한 권 낸 적 없지만 시인이었다. 팔딱 팔딱 살아 숨 쉬는 활어 같은 혀는 늘 싱싱한 언어를 쏟아냈다. 공적인 일에 선생의 혀는 바람을 가르는 칼이었고 사적인 일을 얘기할 때는 소떼를 몰고 가는 피리였다.

이길주-“그놈의 담배!” 이 말은, 지금도 어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꽁초를 숨기듯 잡고 있을 그를 만나면 내가 할 소리다. 그는 역시 여전히 고개를 이리로 저리로 틀며 비시시 웃기만 할 거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언젠가 내 인생을 뒤돌아볼 때 부끄럼 없는 미소 지우며 눈감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다.

김수곤-합수 선생은 해월 최시형 선생 같은 분이었다. 두 분 다 쫓기는 몸이 되어 떠돌며 숨어 살았다. 여차하면 뛰어야 했던 해월 선생의 소지품이 ‘보따리와 짚신 꾸러미’였듯이 합수 윤한봉이 지닌 유일한 재산은 “운동화와 똥가방”이었다.

최용탁-한청련은 실로 놀라운 단체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헌신성이었다. 그들은 늘 ‘조국에서 피를 흘릴 때 우리는 열 배 스무 배로 땀을 흘리자’, ‘뺀들바우가 아닌 곰바우가 되자’는 말을 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다투어 몸을 던졌다.

강완모-살아있는 예수, 한국의 레닌 그는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 사익이라곤 추구하지 않은 사람, 오직 헌신하길 즐거워하였던 사람, 촌놈의 순결한 영혼을 간직한 이 사람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못다 이룬 윤한봉의 꿈, 이제 살아남은 자들이 맡자. 김남주의 전사2는 선배의 영정에 드린 만사輓詞였나 보다.

오늘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방 투쟁의 과정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한 방울 한 방울의 피는

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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