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합수정신-촌놈, 윤한봉2018-12-22 17: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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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촌놈, 윤한봉

윤한봉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수괴가 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이다. ‘만일’이라는 접속사가 허용된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5월 광주민중항쟁이 있기까지 광주민주운동 진영의 리더는 윤한봉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경유하면서부터야, 겨우 운동가들의 존재 의의를 인정해주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당신들 덕택에 민주화가 되었구먼...’ 그전까지는 잘 보아주어야 위장취업자였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우리를 불순세력이나 용공세력으로 보았다. 언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티비에 보도되는 장면은 화염병을 투척하는 대학생이나, 붉은 띠를 두른 노동자가 전부였다. 국민들은 이들 과격 투사들을 무서운 존재로 볼 수밖에 없었다.


윤한봉은 그 무서운 투사들의 괴수였다. 정녕 윤한봉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의 소년 시절을 들여다보면, 부모님께 공손하고, 형님들과 우애가 깊고, 동생들에겐 자상한, 모범생 소년이 나온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 해, 6년 내내 반장을 도맡았고, 운동장에서 놀 땐 골목대장 역할을 하였으며, 졸업할 때엔 교육감상을 받은, 모범생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광주일고에 입학한 것은 당연한 코스였다. 호남의 명문고 광주일고를 합격하였으니, 그 다음 서울의 유수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당연히 예정된 코스였다. 부모님이 윤한봉에게 걸었던 기대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윤한봉에게는 광주일고의 흔적이 없다. 광주일고에 재적한 학생기록부는 있다. 헌데 윤한봉의 구술엔 고교 시절의 기억이 없다. 고교 시절은 사춘기 특유의 정신적 특질로 인하여, 회외도 하고, 방황도 하고, 현실의 불의 앞에서 비분강개를 뿜기도 한다. 고교 시절엔 사춘기의 특질을 공유하는 두 세 명의 벗이 있기 마련인데, 윤한봉에게는 벗이 없다.


광주 일고에는 아주 두드러진 교사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고교생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준 스승들이 여럿 있었다. 한문에 조예가 깊어 영어 선생이면서도 수업시간엔 칠판에 제갈량의 출사표를 휘갈기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일필휘지하는 이민성 선생 같은 분이 있었고, 역사 수업을 하면서 교과서는 한 쪽도 나가지 않고서 자신의 역사철학을 학생들에게 역하는 김용근 선생 같은 분도 있었다. 김용근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여러 차례 구금된 강단있는 독립운동가였다. 광주일고생의 상당수가 이들 선생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민족과 사회를 논하는 학생, 좋게 말하자면 의식이 있는 학생, 나쁘게 말하자면 문제 학생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윤한봉의 고교시절엔 이들 스승의 추억이 없다.


윤한봉이 고3이었을 때, 한일정상회담으로 시국이 떠들썩하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6.3 사태라고 불리는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전통을 자랑하는 광주일고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가방에 도끼를 넣고 다니면서 시위를 선동한 안평수란 분이 있다. 그는 광주일고 고교 시절 학생 시위를 세 차례나 주도하여 무기정학과 유기정학과 근신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그 시절 광주일고 학생들은 지성인으로서의 교양과 의식을 키우는 독서 써클을 만든다. 광랑과 피닉스가 이후 오랫동안 학생운동의 중심축으로 활약한다. 그런데 윤한봉의 구술 어디를 보아도 이런 고교 시절의 써클 활동 전력이 없다.


윤한봉의 몸은 광주일고의 정문을 출입하였으나, 윤한봉의 정신은 고향 칠량에 있었던 것 같다. 윤한봉은 도시 광주에 올라와 10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도회지 광주 사람이 아니었다. 여전한 촌놈이었다. 서울 사람이 광주를 도시라고 하면, 광주도 도시냐고 웃겠으나, 광주는 칠량 촌구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도시였다. 광주일고의 학생들 중 상당수는 부모님의 소원대로 검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는 길을 계단 밟듯 착착 밟아갔다. 윤한봉에겐 명문대학의 이면에 자리하는 출세욕도 없었던 것 같다. 도시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전라남도 강진하고도 칠량의 촌놈으로 10대를 통째로 보내고 있었다.


첫 입시에 실패하고 정수사라는 절에서 재수 공부를 했다. 1805년 다산이 아들 정학유가 강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 함께 겨울철 공부를 하려했던 절이 정수사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은거한 일속산장도 이 정수사 입구 근처에 있다. 윤한봉은 정수사 시절 때에도 밤이면 산을 넘어 고향친구들을 만나 놀았다.


그 친구들끼리 평생의 우정을 약속한 모임이 있었으니 바로 해조음海潮音이다. 바다의 파도 소리라는 말이다. 쌀 한 가마니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윤한봉은 10여명의 회원들로부터 거둔 돈을 서울로 가는 회원 한명에게 몽땅 준다. 여기까지가 윤한봉의 10대 이야기다. 그의 10대를 온통 점유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사귄 동네 친구들이었다. 어찌 보면 미련한 소년이었고, 어찌보면 순진한 소년이었다. 죽는 그 날까지 사욕을 챙긴 적이 없는, 미련하기조차 한 그의 순진성은 10대에 이미 깊이 뿌리를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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