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합수 정신 --황광우; 묘한 후회2018-12-22 17:31:47
작성자
첨부파일8-합수정신.hwp (80KB)

합수정신을 논한다

==윤한봉을 그리워하며==  작가 황광우

1. 묘한 후회

나는 좀체 후회하지 않는다. 먼저, 후회할 일을 하지 않으며, 후회해 보았자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선 뒤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후회한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다. 찾을 수 없는 귀중품을 잃었다든가, 우연한 사고로 금전상의 손실을 입었을 경우, 무엇하러 후회하는가. 그냥 잊는다. 그런데 살다보니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후회스런 일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꼼꼼하게 따져 본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록새록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묘한 후회도 있더라.


광주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귀국 촉구 운동을 나는 전개한 적이 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광주 동구의 민중당 후보로 출마하여 나는 연설하였다. 중앙초등학교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광주가 김대중 이후 시대를 준비하려면, 시민 여러분, 윤한봉 선배를 불러주셔야 합니다.’라며 나는 호소하였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나와 동료들은 ‘윤한봉 귀국 촉구 서명 운동’을 벌였다.

당시만 해도 용기 있는 자만이 서명 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서명운동의 의의는 동의를 구한 서명자들의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우리는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부터 증심사 입구까지 광주를 갈고 다녔다. 곳곳에서 외쳤다. ‘시민 여러분, 광주민중항쟁의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 선생의 귀국을 여러분이 촉구해주십시오.’ 서명 운동의 의의는 알리는 데 있다. 쭈뼛쭈뼛하며 서명하기를 주저하는 시민들도 마음속으로 우리의 대의에 공감하였으리라. 서명자가 10만 명에 육박하니, 시민들 사이에서 ‘윤한봉’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었다.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선배는 1년 후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죄수들은 교도소에 입소할 때 입었던 몇 년 전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다. 꼭 그렇듯이 선배는 광주를 떠날 때 입었던 잠바 차림에 꾀죄죄한 행색 그대로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운동화를 신고, 똥가방 하나 맨, 영락없는 시골 농사꾼으로 돌아왔다. 그 맑고 순진한 웃음도 같이 돌아왔다. 이제 그의 몸이 보이지 않은 지가 어언 10년째로 접어든다. 한봉이 형을 생각하면 나는 예전에 갖지 않는 묘한 후회에 잠긴다.


과연 윤한봉 선배가 귀국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그냥 미국에 계셨으면 더 큰 일을 하실 분을 왜 이 저주받은 땅, 한국으로 들어오도록 했을까? 열목어는 맑은 물에서 살아야 한다. 붕어, 메기들이 서식하는 흙탕물에 열목어를 집어넣으면 살 수 없다. 시인 김남주가 출옥하여 몇 년 못 가 이곳을 떠난 것이나, 합수 윤한봉 선배가 육십을 넘기지 못하고 이곳을 떠난 것이나 이 탐욕의 땅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탓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지난 1월 미국을 방문하고 나서부터 갖게 된 후회이다. 로스앤젤레스와 시애틀, 시카고와 프린스턴, 워싱턴과 뉴욕, 가는 곳마다 한청련 회원들이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지금은 친구를 집에 데려와 잠을 재워주는 일조차 낯선 풍습이 되어버린 이 지독한 각자도생의 나라에서 살다가, 공항까지 차를 몰고 와 안내해주고, 호텔까지 잡아주고, 밤늦도록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는 한청련 회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변해 버린 것은 한국 사람들이고, 변치 않고 순수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미국 시민들임을, 합수와 함께 젊음을 불사른 한청련 회원들임을 나는 보았다.


로스앤젤레스의 이길주 여사는 나이 칠십을 헤아리는 고령의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은 시절의 쾌활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할머니가 아니었다. 합수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연 민족학교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젊은이었다. 젊은 활동가, 풍물의 장인 김준은 우리를 로스앤젤레스의 해변까지 데려다 주었다. 합수는 고향이 그리우면 이곳 산타모니카 해변에 와서 태평양 저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우리의 술자리는 밤늦게 이어졌는데, 나는 이 세상에 ‘합수의 없음’을 놓고 저렇게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준이와 동현이는 왜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는지 모르겠다며, 투정도 아니고 원망도 아닌, 비탄의 울음을 그치지 못하였다.


시애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애틀의 이교준은 공항까지 차를 몰고 와 우리를 영접해주었다. 식당에 가니 이미 여러 회원들이 한 시간이 넘도록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우리를 뭐하러 보러 왔겠는가? 그들은 신소하씨가 왜 동행하지 않았는가 못내 섭섭해 하였다. 시애틀의 한청련 회원들은 윤한봉과 함께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논하던 깊은 산속 공원의 심야 토론을 잊지 못하였다.


이종록의 회고는 인상적이었다. “나는 가장 행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젊음을 바칠 수 있도록 안내해준 것은 윤한봉 선생이었다.” 분명 이종록 회원의 입에선 ‘윤한봉 선생’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나이로는 윤한봉 보다 연장자인데 말이다. 동시에 이종록은 우리에게 당부하였다. “윤한봉을 영웅화하지 말라. 그것이 윤한봉의 뜻이다. 윤한봉은 단 한 번도 사익을 챙기지 않았고,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다. 선생은 오직 헌신만 하였을 뿐이다.“ 나는 또 놀랐다. 이렇게 합수의 마음을 직관하는 분이 있다니!


시카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광민, 이재구, 김남훈은 가장 젊은 한청련 회원들이었다. 그들이 이끄는 마당집은 젊은 기운으로 넘쳐났다. 이재구는 보관하고 있던 한청련 보고 자료들을 집의 창고에서 꺼내와 몽땅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보물처럼 소중하게 보관해온 자료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시카고 대학의 박물관을 보여주었다. 온종일 낯선 이의 길안내를 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나는 안다. 시카고의 한청련 회원들은 미국에 처음 온 이 낯선 일행에게 시카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의 변치 않은 저 순수한 마음씨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시카고 마당집에 걸려있는 벽걸이 프래카드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 프래카드엔 예쁜 그림과 함께 네 개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것이 윤한봉이 미국에 와서 심은 정신의 묘목이었다.


“바르게 살자”

“뿌리를 알자”

“굳세게 살자”

“더불어 살자”


뉴저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법조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완모는 윤한봉과 함께 고락을 나눈 한청련 핵심 간부였다. 그의 회고는 새벽이 되도록 이어졌다. 1992년 한청련은 새로운 정세에 맞는 새로운 노선을 채택한다. ‘일상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로 압축되는 신노선이 있었기에 강완모는 오늘의 자신이 있다며, 윤한봉의 예지를 칭송한다. 뉴저지는 프린스턴대학과 아인쉬타인의 연구실로 유명하다. 강완모가 우리를 프린스턴 대학으로 안내한 것은 대학의 강의실 벽에 걸린 이승만의 기념 동판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한국인 교민 2세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 중이다. 그러면서 그는 KCCP라는 팻말이 박혀 있는 넓다란 공지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한국인 교민 2세들을 위한 민족문화 교육 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란다. Korean Community Center of Princeton. 나는 부지의 광활한 크기에 놀래버렸다.


뉴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주범과 임용천이 우리를 마중하여 주었다. 값싼 호텔을 미리 예약해준 것만도 고마운데, 차주범은 매일 호텔에 와서 우리에게 뉴욕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다. 덕분에 맨하탄도 보고, 브로드웨이도 걸어보았으며, 자유의 여신상 옆에 가볼 수 있었다. 촌놈이 뉴욕 나들이 한 셈이다. 로스앤젤레스의 민족학교는 한청련의 종가집마냥 고풍스러웠고, 시애틀은, 장광선이 최연소 한청련 회원이었듯이, 젊은 패기가 느껴졌는데, 나는 뉴욕의 민권센타를 보고 한청련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민권센타는 뉴욕으로 이주한 아시아계 이주민들의 모든 ‘법률 관련 사무’를 무료로 돌보아주는 곳이었다. 윤한봉과 함께 고락을 함께한 임용천 회원이 우리를 자택으로 초대해주었다. 나는 자택의 한 모퉁이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백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해마다 연말이면 민권센타를 도와주는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잔치를 벌이고 찍는 기념사진이란다. 윤한봉은 그들의 곁을 떠났지만 윤한봉이 뉴욕에 심은 묘목은 뉴욕에 사는 교민들을 돌보아주는 당산나무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오늘까지 무엇을 했나?


마지막 날이었다. 그냥 보면 영락없는 목회자 같은 점잖은 분이 호텔을 방문하였다. 정승진이다. 정승진과 함께 식당에 갔는데, 그곳의 교민들이 모두 정승진을 알아주었다. 차주범의 설명을 듣고서야 민권센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지금 정승진은 뉴욕 하원에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