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1970년대 광주, 그리운 기억들(이학영)2018-12-2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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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광주, 그리운 기억들

- 부패하지 않는 양심, 합수 윤한봉 형을 추모하며

 

이 학 영/시인

 

돌아보는 일이 싫다. 돌아보면 아련한 기억들. 아련하게 보이는 것들은 아름답다. 고통스러웠던 것들까지도 아름다워진다. 왜 지나가버린 것들은 다 그렇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일까? 지독하게 고통스럽던 일들까지도 아름답고 그리워지니 말이다. 그것은 자기 체험에 대한 배반이다. 그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나? 지독한 고통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돌아보면 떠오르는 사람들, 생각하면 눈물 나고 미안하고 그리워서 싫다. 그래서 돌아보는 일이 싫다. 죽을 때나, 그들을 돌아보며 울고 웃고 보듬어줄 수 있을 때나 돌아보고 싶다. 그런데 돌아보란다. 한봉 형을.

 

봄날 잔디밭 광장에 그가 웃고 있다. 윤한봉. 당시 이십대 후반의 젊은이,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대단한 어른이자 선배로 보이던 그. 후배들에게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를 써가며 씩 웃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1975년 어느 봄날일 거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그 해 봄날, 우리는 자주 전남대학교 교정을 들락거렸다. 거기 아니고는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마음은 학생인데 학교에서 받아주질 않으니 어디 갈 데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다니던 학교니 거기밖에 갈 데가 없어 자주 학교에 들락거리고 있었다. 학교에 가면 함께 출소했던 동료들을 만나게 마련이었는데 그곳에서 한봉 형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한번 만나봄 적도, 함께 일을 해본 적도 없었건만 참으로 좋은 느낌을 주는 선배였다.

당시 나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시위계획을 주위 친구들에게 알려주었다는 것만으로 잡혀갔다가 생각지도 않은 감옥까지 살고 나온 직후였다. 따라서 내가 무슨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 스스로는 어쩌다 우연히 시절의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간 그야말로 운 나쁜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어렵사리 대학에 갔으니 어떻게 해서든 빨리 졸업하고 취직이나 할까 궁리하던 학생일 뿐이었다. 그러니 설령 감옥을 살고 나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 없는 평범한 청년학생이었다. 나름대로 세상을 염려할만한 경륜이나 용기도 없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이 참 좋았다. 그들은 내가 갖지 못한 용기와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한봉 형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니 그 속에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후배들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감옥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일상의 내 생활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말이다. 당시로서는 그들이 훗날 내 인생을 살아가는 길목 여기저기에서 꾸준히 만나고 함께 일할 줄은 몰랐다. 윤한봉 형은 그런 사람 중에서 가장 든든한 선배 중의 한 분이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내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선배요 운동가였다. 준비 없이 세상을 맞았던, 그래서 수동적으로 끌려갔던 나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결단으로 시대의 장벽에 맞선 사람이었다. 이미 그때도 강한 결단력과 의지로 후배들을 흡입하고 있는 선배였다.

 

197549일이었다. 유독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나는 한봉 형과 함께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아있었다. 그때 돌연 어디선가 무슨 소식을 듣더니 그가 결연히 일어났다. 무언가 말을 했는데 기억은 없다. 다만 그날 그의 표정이 어두웠지만 단호했던 기억은 난다. 그날이 바로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사형집행 한 날이었다. 그 전날 재판이 끝났는데 바로 다음날 새벽에 사형을 집행한 것이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재판한 지 하루 밤 지나고 나서 바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서울구치소에서 인혁당 관련자들과 가까운 방에서 생활했던 나로서는 그들의 얼굴이 생생히 떠올라 믿을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시절이 무서웠고 권력이 무서웠다.

 

그날 한봉 형은 분노와 결연한 다짐의 의지로 가득 찼던 모습으로 내게 남아있다. 아마 그날 그는 무도한 권력, 무도한 지배자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투쟁을 마음속에 다짐하지 않았을까. 이후 더러 계림동에 있는 작은 그의 자취방에서 모이기도 하였다. 친목을 다지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논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 내가 한봉 형과 함께 했던 일은 별로 없었다. 무작정 세월을 보낼 수 없었던 나는 생계를 위해 양계장에 취업을 하기도 했고, 그해 겨울에는 함께 나왔던 동료들, 고영하, 정환춘, 이기승 등과 함께 충장로에서 포장마차를 하기도 하였다. 추운 거리에서 뜨거운 홍합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보냈던 그해 겨울의 추억은 당시로서는 삶의 밑바닥에서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임에도 지금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 광주의 기억들은 가물가물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도모하고 꿈틀거리던 시절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뚜렷이 갈 길은 모르겠지만 단순한 학생운동만으로는 더 이상 박정희 정권과 싸울 수 없다는 생각, 새로운 사상,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던가 그 이후던가 광주경찰서 부근에 김남주 선배가 카프카 서점을 냈고,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판한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등 당시 젊은 학생들을 사로잡았던 책들을 가져다 놓아 새로운 앎의 욕구, 운동의 욕구에 갈급해 있던 광주의 청년들을 끌어 모았다. 골방 할아버지처럼 카프카 한구석에 씩 웃으며 앉아있던 남주 형도 이미 우리를 떠나 추억 속으로 가버렸지만 지금도 생생히 내 마음 속에서는 웃고 있다. 하하 형 잘 계시나요? 보고 싶소.

 

윤강옥의 대나무 숲 속에 있던 두암동 기와집도 참 중요한 모임장소였다. 당시로서는 서방 시내버스 종점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했던, 변두리에 있던 집이었지만 마당 너른 참 행복했던 집이었다. 우리는 윤강옥의 집에서 자주 모였다. 햇살 비치는 너른 마당에서 우리는 참 즐거워하며 깔깔거렸다. 그때 그곳엔 많은 광주의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들어 밥과 잠자리 신세를 졌다. 윤강옥의 어린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주에 사둔 집이었기 때문에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가 와 계셨는데 할머니는 늘 집안에 몰려드는 우리들에게 싫은 소리께나 하셨다. 전부 모여서 밥이나 축내고 빈둥거리며 놀았으니 평생 일로만 살아오신 할머니 눈에는 우리들이 얼마나 한심한 놈들로 보였을까? 할머니, 할머니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 인사드립니다. 그때 이불 빨래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이불인지 강옥이 작업복인지 가져갔다고 늘 나에게 뭐라고 하셨는데 그건 제가 가져간 게 아니거든요. 담에 뵐 기회 있으면 할머니 잘 모시고 안아드릴게요.

 

바로 그 동네에 탱자나무 울타리 집에 나도 어머니와 어린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고 김상윤 형도 그 동네로 이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상윤 형 집에는 김남주 선배가 가끔 들러서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그 동네 살 때, 이강 선배의 아내가 된 이소라 형수도 만났다. 당시 그분도 열혈 소녀여서 불쑥 신문기사만 보고 나를 찾아왔다. 그러다가 마침 당시 결혼을 해야 했던 이강 선배에게 소개시켜드리기로 하였다. 이소라 형수를 처음 만나기 위해 담양으로 가던 곳도 두암동이었다. 눈 쌓인 겨울 어느 날, 담양 용면까지 찾아가던 날, 당사자인 이강 선배나 남주 형이나 뒷축은 다 닳아빠진 구두를 신고 와서 눈길에 자주 미끄러지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후 일이 잘 되어 이소라 형수도 광주 식구가 되어 모든 이들의 형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후배들이 찾아갈 때마다 싫다하지 않고 뒷바라지를 다해주셨다. 오늘 우리들 삶의 밑바닥엔 그때 우리에게 가난함에도 밥 먹여주고 재워준 그분들의 은공이 깔려있다. 감사 감사, 재배 재배. 돌아가신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험한 세상길 들어선 형과 동생을 둔 죄로 산전수전 고생길을 살아야 했던 우리네 형, 누나, 동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복 받으시게. 내내 복 받으시게.

 

추운 1975년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 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버려서 더 이상 한봉 형과는 함께 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해 겨울 윤강옥과 함께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물론 먼저 부추긴 것은 윤강옥이었다.(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윤강옥 이야기만 나오면 그놈이 솔래솔래 찾아오더니만 내 아들 인생이 그렇게 되었다며 내내 원망을 쏟아놓으셨다.) 서울로 올라가자. 가서 돈을 좀 벌어보자. 운동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서울에 가서 돈을 벌자. 나야 워낙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당시로서는 나주 산포에 제법 부자소리를 들었던 강옥이가 돈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당시 나주에서는 배밭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 소리 듣고 살았는데 강옥이는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했는지 마을 인근에 있던 천 여평 되는 새로운 배밭을 팔았다. 그 당시 아마 6~7백만 원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모래밭에 처음 지어지던 때고 당시 아파트 한 채를 그 정도 돈이면 샀으니까 아주 큰돈이었다. 나도 시골 누나에게 백만 원만 둘러달라고 해서 가지고 갔다.

 

나는 먼저 올라가 부평 등지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강옥이 돈을 마련하자 서울로 와서 합류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사업이 불과 6개월도 못가서 절단이 났고 지금은 우스개 전설처럼 남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때 정말 사업을 잘하여 세상을 바꿀 힘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사업이 실패하고 그 돈이 모두 날아갔으니 당시 우리가 겪은 고통이야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였다. 특히 강옥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죽어보려고 인천 주안 바닷가까지 몇 번 내려갔으니까 그만하면 어떤 심정인지 설명이 될 것이다. 하여간 그때 그 이야기야 세상을 한번 잘 웃게 해주고 끝났는데, 이후 강옥은 다시 광주로 내려갔지만 나는 그대로 서울에 눌러앉았다. 그러나 가끔 한봉 형과는 연락을 하고 살았다. 새로운 운동,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봉재공장이야 철공소 등등을 전전하던 나는 얼마 되지 않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79년도에는 감옥을 갔고 감옥에서 민주화의 봄과 광주항쟁을 만났다. 한봉 형은 5·18을 맞아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 이후 한국에서 만나기까지 한참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래저래 한봉 형에 대한 기억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광주에서 한 일과 미국에서 한 일은 꾸준히 듣고 있었기에 떠나 있었지만 늘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는 어디를 가나 나를 그렇게 했듯이 사람들을 감화시켰으리라 믿어진다. 나는 한봉 형과 함께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운동의 비전과 전략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가 꿈꾸는 사회가 무엇이었는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의 꿈을 실현하려 했는지. 그의 사상과 전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모두의 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0년대 학번 학생운동 출신 대부분이 그렇듯이 군사독재정권으로 상징되는 부패한 권력, 국민을 억압하는 권력이 아닌 국민을 위한 권력, 민주적인 절차와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꿈꾸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세상, 부당한 권력을 이용하여 부와 권세를 누리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꾼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는 일이 없는 세상. 아마 형도 그런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한봉 형이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후 자주 뵐 수 있었다. 내가 여수YMCA 총무로 취임한 이후, 여수 최연석 목사 댁에서 만났을 때가 아마 개인적으로는 편하게 형이랑 담소를 했던 마지막 기억인 것 같다. 다시 YMCA로 돌아와 일하게 된 것을 축하하시면서 이제 자네가 제대로 일할 그릇을 찾은 것 같네.” 하셨다. 나는 그 말을 이제 제대로 일 좀 하게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형을 떠올릴 때마다 운동가로서, 전략가로서의 형보다는 길가에서 마주치는 소박한 동네 형처럼 생각된다. 내가 질 나쁜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을 때 달려와서 그 놈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 줄 것 같은 형. 내가 살다가 힘들어지면 찾아와서 등 두드려 주는 형, 내가 살기가 팍팍하여 잠시 한 눈 팔라치면 , 이놈아, 니가 그렇게 살면 쓰것냐?’ 하고 꾸짖어주는 형. 마음이 약해져서 돈과 권력의 회유에 무릎 꿇고 싶어질 때, ‘, 나도 있잖냐? 힘들어도 함께 버티자.’ 하고 부추겨 주는 형. 그래, 한봉 형은 그런 사람이야. 운동 이전에 인생의 선배야. ‘, 저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쓰러지지 않을 거야. 아 저 사람이라면 떼돈 뭉치를 들고 와도 회유할 수 없을 거야.’ 그런 믿음을 주는 선배야.

 

한봉 형은 그런 사람이라고 오늘까지도 나는 믿고 산다. 돈이 전부가 되어버린 시대, 모두 이권과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시대에, 썩지 않는 소금처럼 정의감과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 부당한 권력에 대한 꺼지지 않는 분노의 불꽃을 활활 태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랬기에 때로는 답답하다고 욕도 먹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그가 그립다. 우직한 소처럼, 시대의 밑바닥에 단단히 가부좌 틀고 앉아서 시대의 허위를 너털웃음으로 단숨에 벗겨내 버릴 줄 알았던 그의 단순함, 솔직함, 단호함이 그립다.

 

, 힘들어요. 좀 도와주세요. 난 모르겠어요. 우리가 가는 길, 가다보면 정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가 이루어질런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힘센 자들이 한 나라의 권력과 부를 모두 장악하고 그들 뜻에 어긋나는 것들은 무참히 압살하며 나아가는 이 시대 한 가운데서 우리가 정말 무엇을 할 수 있을런지. 당신은 예언자처럼 늘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잖아요. 들판에서 외치는 소리. 불의한 시대를 향해 외치는 당신의 소리 그립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씩 웃는 그 웃음이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당신. 우리의 친구요 형이요 지도자였던 당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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