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목숨을 건 미국 밀항, 순수와 강인한 의지의 승리 (최동현)2018-12-21 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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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미국 밀항, 순수와 강인한 의지의 승리

 

최 동 현/()코아시스템 기술 대표이사

 

윤한봉의 미국 밀항은 영화처럼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덧붙여지고 부풀려지기도 했지만 전설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한 인간의 지고지순한 인간미와 강철 같은 정신력은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원래 무역선 선원이었던 나는 한봉이 형의 밀항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그 때 겪은 사건과 그 때 본 윤한봉을 있는 그대로 말하겠다.

 

윤한봉은 시민군의 도청 점거를 제안했다는 이유로 군부에 의해 광주폭동의 수괴로 지목됐다.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려 1년여 동안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805월 중순에 휴가차 귀국했다. 그 때 광주에서 5·18 현장을 직접 생생하게 경험했다. 5·18이 끝나고 고향 보성에 내려가서 조계선, 박형선 선배와 만나 광주항쟁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당시 두 선배는 나에게 뭐든 시키면 할 정도로 믿고 따르던 정신적 지주들이었다. 그들은 “5·18의 진실이 묻혀 있다. 광주를 전 세계에 알리고 해외에 운동거점을 만들기 위해 수괴로 몰려있는 윤한봉 외 한 두 명을 해외로 도피시키자. 한봉이 형을 살려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상황에서 민주화투쟁에 기여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을 제안한 것이다. 외항선 선원인 나는 한두 명 밀항시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밀항 모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어디로 도피시킬 것인가. 작전이 쉬운 일본이 먼저 거론됐다. 그러나 일본은 사민당에 협조를 구해야 되고 그러다 북조선에 선이 연결되기라도 하면 간첩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또 박관현이 오랫동안 잡히자 않자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소문도 나돌던 때였다. 결국 일본을 포기하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기로 했다.

나는 그 해 10월부터 미국에 정기적으로 취항하는 배들을 알아보러 다녔다. 해가 바뀌어 812, 내가 아는 해양대학 교수의 소개로 한국-미국 시애틀-칠레를 정기 운항하는 무역선을 탈 수 있었다. 본래 2등 항해사인 나는 월급을 깎이면서까지 3등 항해사로 취업했다. 밀항 때 화장실이 붙어있는 선내 병실(환자격리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3등 항해사였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 갈 배는 35천톤급 무역선 표범호. 진해에 입항해 있는 이 배에 처음 승선하니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후배 정찬대가 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반갑기도 했지만 우연한 조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봉이 형을 미국에 밀항시키려고 이 배를 탔다고 하자 정찬대도 같이 하기로 했다. 윤한봉의 미국 밀항을 하늘이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찬대는 그전에도 한봉이 형을 밀항시키자고 나와 여러 번 얘기한 후배다. 결국 우리 둘은 한봉이 형을 배에 태워 미국까지 모셔가는 실제적인 밀항 추진자가 되었다.

출항 전 광주로 올라가 정찬대 친형인 정찬용 선배에게 우리의 뜻을 말했다. 그리고 812월 답사를 위한 출항 길에 올라 2개월 뒤 귀국했다. 선내구조와 식사, 건강, 안전문제 등 여러 가지를 신경 쓰며 밀항계획을 면밀하게 세울 수 있었다. 밀항 중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선원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81420일경 인천항에 입항한 나와 찬대는 기다리고 있던 정찬용, 최권행 선배를 부둣가 식당에서 만나 밀항을 모의했다. 밀항 가능성도 있고 해외망명의 의미도 있다고 최종적으로 판단 내렸다. 오케이, 밀항시키자.

정찬용 선배의 지시로 광주에서 정용화 선배를 만나 윤한봉의 밀항을 의논했다. 정용화 선배는 출발항인 마산항까지 윤한봉을 책임지고 모셔가는 국내 이동책임을 지기로 했다. 나는 당시 한봉이 형이 어디에 피신해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조계선, 박형선 형에게 최종적으로 결정된 밀항계획을 밝혔다. 맨 처음 나에게 밀항을 제안한 조계선이 형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형은 밀항을 성공시킬 수 있느냐. 실패할 확률이 1%라도 있으면 포기해라.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며 심지어 몇 명은 죽을 수도 있다.”며 만류하는 것 아닌가. 나는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형들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81427일 밀항 출정식 참가자들이 마산에 모였다. 윤한봉, 정찬용, 김은경, 정용화, 최동현 부부, 정찬대 부부. 8명은 대담하게도 마산경찰서 앞 여관에 방을 잡고 보리밥 백반으로 최후의 만찬을 했다. 윤한봉은 죽을 각오로 투쟁하겠다고 했다 그는 “5·18때 현장에 없었던 죄의식이 있다. 그런데 또 해외로 도피하는 것이 광주항쟁 희생자와 주변 동료를 버리고 잡혀서 죽기 싫어 도망가는 것 아닌가 싶어 망설였다. 그러나 나의 미국 망명이 국내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데 작은 밀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온 몸을 바쳐 투쟁하겠다.”며 비장하게 결의를 밝혔다. 모두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온다.” “반드시 광주의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한봉이 형은 특히 나와 정찬대 마누라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가 자원한 것인데도 형은 자기 때문에 신랑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사지로 몰아넣었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후배 찬대 부부는 이날이 결혼 1주년 기념일이었고 내 집사람은 임신 6개월이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내 첫아들의 이름을 어둠을 걷어내고 새벽을 밝히라는 의미로 서영(曙暎)이라 지어주었다.

그날 저녁 윤한봉 선배는 나와 찬대의 계획된 각본에 따라 배에 몰래 탑승했다.

 

당초 출항예정일은 428. 우리 배는 마산항 외항에서 하루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문을 모르고 당황해 하고 있는 우리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멀고 먼 밀항 길에 벌어졌던 극적인 사건들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원래 항행계획은 마산항에서 곧바로 미국 시애틀 부근 벨링햄항으로 가는 것으로 17일 일정이다. 그런데 호주 헤이포인트항을 경유해 알누미늄 광석을 싣고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당초 17일에서 35~40일로 늘어난 일정인 것이다. 우리는 눈앞이 캄캄했다. 항해 일정이 그렇게 늘어나면 장기간 항해에 따른 식사문제와 건강문제가 필수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항해일정이었다면 애초 밀항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한봉이 형은 배에 타고 있어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쩔 것인가. 운명의 시험대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한봉이 형이 배에서 몸을 숨긴 곳은 환자격리실에 붙어있는 화장실. 그 곳은 다른 선원 방과 복도를 마주하고 최소 2m 밖에 안 되는 거리다. 미세한 소리만 나도, 미세한 냄새만 나도 일반 선원들에게 들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위험한 장소를 기나긴 밀항에 몸을 숨길 장소로 선택했다는 게 무모한 건지 대담한 건지

한봉이 형은 이 불편한 공간에서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텼다. 내가 주먹밥을 가져다주면 김밥 냄새나 운반과정에서 선원들에게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나는 견딜 수 있다고 단호하게 먹기를 거절했다. 어쩌다 구해다 준 선내 음식들도 번번이 퇴짜를 맞아야 했다. 형은 한국에서 준비해 간 냄새가 나지 않는 밀항음식물(, 멸치, 생라면 등)만으로 한 달을 넘게 버텼다. 또 대변을 보고 물소리를 내면 발각될 우려가 있다며 신문지로 덮어 놓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면 처리했다. 주로 낮에는 화장실에 있는 형을 밤 시간을 이용해 내가 가서 환자격리실로 모셨다. 말소리를 극도로 줄인 상태에서 소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긴 나날을 누구의 눈치도 채지 못하게 몸을 숨긴 것은 형이 수배생활이 몸에 밴데다 강인한 정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형은 적도를 통과하면서 찌는 듯한 더위도 대수롭지 않게 버텼다.

음식물 냄새도 발각 우려가 있다며 선내 음식을 거절하던 한봉이 형이었지만 담배는 무지 피웠다. 양놈이라면 학을 떠는 형이 말보르 같은 독한 양담배를 하루 2~3갑씩 피워대는 것이었다. 물론 화장실 변기 밑으로 연기를 내보내 냄새가 나지 않도록 신경은 썼지만 거의 하루 종일 담배를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몰려 긴장했으면 피신자의 철칙까지 어겨가며 담배를 피워댔을까. 그 때 한 달 넘게 피워댄 독한 담배와 부실한 음식, 극한에 몰려 받는 스트레스가 지병을 얻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한 것 아닌가 싶어 마음 아프다.

 

마침내 5월 중순 호주 헤이포인트항에 입항.

찬대와 배에서 내려 한봉이 형이 먹을 꿀, 햄 같은 음식을 사러 상륙했다가 배를 타니 그 사이에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마약단속반이 배에 들이닥친 것이다. 더구나 형이 숨어있는 병원 격리실 약들을 1시간가량 서치(조사)했는데 운 좋게 화장실을 조사하지 않고 돌아갔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노크 암호를 해도 형은 나오지 않는다. 항상 노크 암호를 하면 나오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형님, 나요하고 소곤거리자 그때서야 얼굴이 하얗게 사색이 된 형이 손에 칼을 움켜쥐고 나왔다. 형은 양놈들이 저희들끼리 영어로 얘기하는 걸 듣고 발각되었구나 생각하고 휴대 칼로 대처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이판사판 일을 저지를 각오를 한 것이다. 큰일 날 뻔한 한 고비가 그렇게 넘어갔다.

호주에서 출항해 미국도착까지는 20여일 걸린다. 도중에 남태평양 지역을 통과하면서 만나는 몬순(계절풍)은 모든 선원들에게 고역이었다. 심한 바람 때문에 선박의 롤링현상(좌우로 흔들림)이 심해 멀미를 하기 때문이다. 10~20년 경력의 베태랑 선원들도 전부 멀미에 시달리는데 윤한봉, 이 양반은 멀미 한 번 안하고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런 형을 보고 문득 인간 독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는 5·18 1주기가 되는 때였다. 형은 배가 크게 흔들리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태연하고 안정된 자세로 혼자 5·18 추모의식을 7일간 치렀다. 멸치 몇 마리와 물뿐인 보잘 것 없는 음식들이었지만 그것을 차려놓고 하루 종일 5·18 희생 영령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묵상에 잠겼다. 형이 때로 눈가에 눈물이라도 비칠 때면 지켜보는 나도 속으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밥도 못 먹고 깡마른 몸에 눈빛만 형형한 형은 야생동물을 닮아 있었다. 지극히 지고지순한 인간미를 갖춘 무공해 인간.

한봉이 형이 배에서 관심을 갖고 공부한 것이 국제정세다. 한국의 민주화는 국제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것이 미칠 국제적 파장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배는 미국 시애틀 밸링햄 하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원래 이 곳 하구에 입항하면서 발각이 될 경우 암호로 노란 기를 단 요트가 대기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런 요트는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요트로 뛰어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안심하고 밸링햄 항까지 입항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밀항과정에서 몇 가지 암호를 쓰기로 했다. 만약 배에서 문제가 생기면 배탈로 진통이 있어 귀국하고자 함이나 부친위독 급거 귀국요망이라는 무전을 서로 날리기로 약속돼 있었다. 또 별일 없을 때는 안항중 방심망(안전항해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와 같은 내용의 무전을 보낸다.

 

길고 길 항해가 끝나고 마침내 6월 초순 밸링햄항에 입항했다. 그런데 입항수속을 하면서 또다시 큰 일이 닥친것이다.

원래 입항하면 이민국, 세관, 검역소, 선박에이전트가 승선해서 간단하게 입항수속을 밟는데 그 날은 이민국 직원 3명이 실탄을 장착한 권총을 착용한 채 뭔가를 찾고 있었다. 이례 없이 3시간가량이나 서류와 사람을 일일이 대조해가며 뭔가 찾고 있었는데 아, 틀림없이 발각됐구나 싶었다. 한국의 정보기관이 냄새를 맡은 것인가. 잔뜩 긴장하고 사태추이를 지켜보고 있는데 이민국 직원들은 뭔가 석연찮은 여운을 남기고 철수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초 우리가 미국에서 첫 접선할 사람은가슴에 성경을 안고 승선하는 한국인 목사부부였는데 가서 보니 외국인 부부와 한국인 부부가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누구도 성경책을 들고 있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우리는 한국정보기관에 노출된 것 아닌가 싶어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접근해서 몇 마디 대화를 해보니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우리의 접선암호는 저쪽에서 “What is your name?"하면 우리 쪽에서 "My name is Mr. Kim" 하는 것이었다. 두 시간 가량 한국인 부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엄청나게 당황스러웠다. 이런 상황을 수시로 한봉이 형에게 보고를 하는데 형은 들킨 것이 틀림없다. 오픈하지 마라. 그 사람들 연락처만 받아 놓아라.”고 지시했다. 그 한국인 부부는 배에 누가 온다고 해서 왔는데 찾을 수 없으니 털어놓고 솔직하게 얘기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김대중 구명운동을 하는 민주인사들이라고 했다. 안기부의 작전에 걸린 것 아닌가 잔뜩 긴장한 채 연락처만 받아놓고 그들을 그냥 보내 버렸다.

 

어쨌든 배에서 내려 후속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한봉이 형은 입항하기 전 내가 이발도 직접 해주고 목욕도 처음으로 한데다 미리 준비한 양복까지 입어 마음의 여유가 생긴 상태였다. 10시경 형을 배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나는 부두사무실에서 공중전화로 콜택시를 불러 먼저 찬대 후배와 내가 택시를 타고 나중에 한봉이 형을 태웠다. 몇 번 택시를 갈아탔다. 우리는 밀항 성공을 실감했다. 이제 살았다는 감격에 겨워 서로 껴안고 펑펑 울어버렸다. 형은 휴대하고 있는 칼을 바다 멀리 던져버리며 긴 호흡을 내쉬었다.

 

밀항은 여기서 상황 끝이 아니었다. 미국에 있는 사람에게 인수인계하기까지 또 한 번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혹시 모를 정보기관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시애틀까지 가면서 택시를 두 번 바꿔 탔다. 시애틀에 도착한 밤 12시경. 낮에 배에 올라왔던 한국인 부부인 김동권 김진숙씨에게 전화를 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안기부에 신원이 노출된 걸로 알고 암호를 대라.”고 했다. 형에게 전화를 바꿔줬다. 이쪽에서 무슨 꽃을 좋아합니까. 나는 진달래를 좋아합니다.”하니 저쪽에서 나는 봉선화를 좋아합니다고 했다. 암호인 진달래-봉선화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를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하지 않고 집 옆 거리로 오라고 해서 택시를 타고 갔다. 그들이 탄 밴 승용차는 김대중 구명운동 포스터로 도배된 차였다. 비로소 속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차를 타고 그 분들 집까지 가면서 한봉이 형을 1등기관사로 가장했다. 경계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던 것이다.

집에 도착해 한참만의 대화 끝에 서로를 완전히 확인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생겼다. 부부가 안심하고 아들을 나오라고 하니까 아들이 나타나는데 아들은 실탄이 장착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차하면 쏘아버릴 계획이었다고 했다. 다들 뒤집어지게 웃는 가운데 신뢰의 정은 쌓여 갔다.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국내에 계신 찬용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 형님, 시애틀 형님 집에서 술 한 잔 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밀항성공을 알려 안심을 시킨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때 국내와 미국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원래 3등 항해사와 2등 기관사를 찾아서 암호를 교환하고 숨어있는 윤한봉을 구출하도록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와전돼 선원으로 위장 승선한 이기사와 삼항사란 두 사람이 자기들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세계 인권위원회와 국제사면기구 고문이었던 케네디 상원의원측에서 이민국과 세관원들에게 윤한봉을 구명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입항수속 때 이민국 직원들이 설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찾는 사람 두 명이 없으니 전두환 군부독재 정보기관이 이들을 바다에 수장해 버렸거나 그들의 공작에 노출 되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한봉의 미국 밀항은 사안의 중대성만큼이나 긴급성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밀항 직후 망명신청하면 나와 찬대 집안은 정보기관에 의해 난리가 날 것이니 우리들이 미국을 벗어나 완전히 잠잠해질 때까지 미국에 은둔해 있겠다고 했다. 그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역사적 인물이 돼 버렸지만 윤한봉의 밀항을 돕고 함께 한 사람으로윤한봉이라는 사람은 강인한 정신력과 순수한 인간미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싸웠고 순수한 열정을 불사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배자가 지켜야 할 것을 철칙으로 여겼다. 절대 옷을 벗고 허리띠를 풀고 자지 않았다. 편하게 자지도 못하고 호신용 칼을 항상 착용했다. 자기가 머문 자리는 조그마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한봉이 형의 밀항은, 그리고 우리들의 밀항과정은 아무런 사진이나 기록이 없다.

 

윤한봉의 망명은 비상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망명은 악조건 속에서 배에서 40여일을 들키지 않고 이뤄진 것으로, 어떤 망명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망명을 받아들이는 나라와 망명자의 나라는 사실상 주종관계에 있지 않는가.

한봉이 형이 미국에 있을 때 세 번 봤는데 LA 민족학교 마당집에서 만났을 때는 내 아내도 자리를 함께 했었다. 그 때 형은 뱃속에 애기 잘 낳고 잘 크고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잘 키우라고 했다.

그때 봤을 때도 형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깡통을 주워 팔아 활동하면서도 물질적인 무욕, 정신적인 무욕의 삶을 살고 있었다. 너무 순수한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당신인가 싶게 격분한다. 자기 소신을 관철하기 위한 강한 정신력은 독선, 아집으로 보이기도 하고 융통성이 없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원칙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지고지순한 인간미다. 깡마른 몸에도 넉넉한 미소를 띠던 한봉이 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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