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내 삶의 길잡이 (성찬성)2018-12-21 11:10:06
작성자

내 삶의 길잡이

성 찬 성/번역가

 

윤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태가 지난 지금, 다시 기억 속을 헤집으며 그이를 떠올려야 하는 일이 우선 내 마음부터 아리고 스산하게 만든다. 이미 서른다섯 해를 넘긴 1974년 소위 민청학련 사건 때부터의 인연이라 희미하고 생생한 기억이 뒤섞여 갈피를 잡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설령 그이와의 체험이 비슷한 동지들이 여럿이라 이야기가 겹치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차피 나와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내게 큰 흔적으로 남아 있는 사실들을 중언부언 나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첫 기억은 첫 인상이나 마찬가지로 또렷하게 남는 법인지, 광주경찰서(지금은 광주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그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다 적발되었다고 하니 세간이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고래잡이 그물에 아가미가 걸린 멸치꼴로 유치장에 갇혀 지내다 그이를 만났으니 그 만남이 근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 한두 번 화장실 갈 때 감방 문을 따주는데, 방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도록 한 방문만을 따고 그들이 볼 일 보고 다시 다 들어가면 다른 방문을 따주고 해서 서로 얼굴을 대면할 수 없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간수가 무슨 일인지 유치장 방문들을 한꺼번에 열어준 적이 있었다. 그 때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좁다란 화장실 통로에서 처음 그이를 대면할 수 있었다.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그때 마주한 그이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다부지고 시국과는 무관하게 매우 희망적이었다. 전남대학 수괴다운 비범한 풍모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를 만난 그 짧은 순간에 그이는 초면부지의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이의 진지한 모습은 당시 그이의 처지와 어울리지 않아 나는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좋은 세상이 올 테니 열심히 살자고 했다. 하지만 어디 그럴만한 세상이었던가? 그때가 744월이었다.

그 해에 얼굴을 대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았는가 싶다. 묘하게도 나와 박진 등 잔챙이 세 사람이 가장 먼저 서울로 이송되면서 그이와는 떨어졌다. 재판 과정에서도 급수가 달라 법정과 재판 날짜가 엇갈리니 얼굴을 대할 틈이 없었다.

윤선생 문집 때문에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 40년 번역을 하느라 글을 다루어본 내가 글이 안 돼 여러 날을 고민했다. 글로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나 보다. 왠지 이번에는 윤선생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픔과 아쉬움과 고결한 무엇이 겹쳐 이를 표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데 독일에서 최권행이 전화했다. 형 글이 있어야 한다고. 이 글은 어차피 삼십오 년 전의 이야기고 그때 우리는 이십대였으니 다들 형 동생 하던 때라 존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최연석 목사 말마따나 인품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내가 형보다 나은데 나한테 이놈 저놈 하지 마쇼가 맞지만, 그래도 그때만은 살아서 부끄럽던 진실한 때라서 말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내 아집일까? 난 중학생한테도 말을 올리는 사람인데 말이다.

차일피일 미루던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그 동안 살아오면서 주변에 훌륭한 사람들로 꽉 차 있던 내 인생이었다. 어찌어찌 해서 소위 운동권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 덕분에 마주하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귀한 인재들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한평생 사는 것도 복이려니 여기며 지금껏 후회 없이 살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고 내가, 달라졌다. 윤선생 말마따나 변질된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혼자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수복이 형이 갑작스럽게 소설을 써야 한다고 해서 3년간 월간지에 연재할 때도 쓸 글이 떠오르지 않고 마감은 다가오고 할 때 달리 길이 없어 두어 차례 술을 마시며 고민했던 때를 빼고는 혼자 술을 마신 적이 결코 없다. 술은 사람들끼리 마주 앉아 마음을 주고받을 때 닫힌 마음을 여는 촉매제라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은 윤선생 이야기를 하기 위해 혼자 술을 마셨다. 그래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듯했다. 내 삶을 돌아보았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인지 혼자 자문해 보았다. 지금처럼 행복한 시절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늘 행복해서 미안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 가슴 한쪽은 늘 불만에 차 있었던 것일까? 지금 이 순간은 줄곧 괴로웠던 그 까닭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보는 유익한 시간이다. 죽어서도 내게 고마운 사람이 윤선생이다.

 

굼벵이 같던 시간이 흐르고 그 이듬해 1월 금방 죽을 것 같던 사람들이 모조리 풀려났다. 몹시 기뻤다. 나만 그 해 9월에 고등군법에서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나 혼자서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살레시오 신학교의 교육은 선교사 집단이 늘 그렇듯 민족이나 국가 개념은 없고 사랑 사랑만 외쳤다. 나는 무엇인가 빠져 있는 듯한 내 삶과 앞에 놓인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멍하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풀려나자 나도 살판이 났다. 감옥이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함께 싸돌아다녔고, 맨 앞에는 늘 윤선생이 있었다.

윤선생은 사람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싶을 만큼 줄곧 일을 만들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농대 풀뽑기, 전대 용봉축제 때 아이스케키 팔기 등이다. 바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전남대학 한 학기 수업료가 15만원이었으니 농과대학 광장 풀을 뽑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원이면 큰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풀을 뽑았던 윤선생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뭐 앞장 서는 사람은 늘 그런 법이거니 했다. 말이 쉬워 풀 뽑기지 허리 아프고 다리 절리고 그것도 온종일 꼼짝없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영구영 하던 우리와는 달리 윤선생은 풀 뽑는 데도 열정이 서려 있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이스케키를 팔 때는 어디서 구했는지 통 하나씩 걸쳐주고 흩어졌기에 그이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흩어지는 순간 아는 학생 하나를 만나자마자 아이스케키 통을 열던 그이의 모습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 제일 먼저 장사를 시작한 사람이 그이였던 것 같다. 난 얼마치를 팔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많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간 내가 어린 녀석들에게 구걸 비슷하게 하면서 쪽 팔렸던 기억은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일을 한다는 느낌이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이 서운하지는 않았던 듯 싶다.

그 후 군대에 끌려가고 서울로 올라오고 하다가 80년에 접어들면서 그이를 본격적으로(?) 만나지 않았는가 싶다. 그 틈새에는 늘 최권행이 있어 그때 처음으로 잠수함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어쨌든 그이가 나를 만나 하룻밤 묵은 곳은 지금은 고인이 된 홍정경 누나네 단칸방이었다.

홍대 미술과를 나와 조각을 하던 한참 노처녀 누나는 후에 홀로 지내던 경찰 고위 간부와 혼담이 있었는데, 몇 군데 다른 유명짜한 혼처보다는 이 공무원의 사람됨이 비교적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이든 노모가 결혼하지 않은 딸을 두고 눈을 감지 못한다며 늘 걱정하시는 것을 보고 마침내 결혼을 결심하였는데, 기이한 인연이 생긴 셈이다. 일급 수배자를 피신시켜준 분이 경찰 간부의 부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윤선생의 미국 망명이 드러나던 시점에 누님은 도경 국장의 부인이어서 무슨 의도적 접근이 아니었는지 의심까지 받고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인품이 빼어나서 그 분이 이야기하는 진실이 받아들여지고, 또 남편되는 이가 가진 완벽한 신뢰도 작용하여 별 일 없이 조사가 끝나긴 했지만, 여러 모로 고통스러워 하셨다. 전부인의 자식들 모두를 출가시키고 그 자식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사셨지만 게다가 결혼 생활도 힘겨웠던지 결국 위암에 걸려 나중에 신장암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서울대병원 문병으로 생전 대면을 마치고 장례식 때 영정을 대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의리 있고, 운동하는 사람들이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그분과의 추억에는 늘 허전함이 따른다.

이틀 후 그 집에서 나와 우리 큰형 성염네 집으로 옮겨갔다. 한 보름 그곳에서 지냈다. 그때 인연으로 윤선생이 타계했을 때 로마에 가 있던 형이 내게 10만원 조의금을 부탁해왔다. 어지간해서는 없는 일이었다. 늘 조용하기만 하던 형과 형수지만 윤선생에 대한 기억만은 너무도 생생했는지 오랜 세월 나를 만날 때면 가끔 그이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 짧은 기간에 그이가 남긴 흔적이 남달랐다는 증거다. 효선이가 합류한 것이 그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사람은 형네 집이 불안해 다른 자리를 알아보아야 했다. 나에게는 심한 고민거리였다. 최권행의 넓은 발로도 쉽게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은, 한 치라도 알음이 있으면 독을 품고 찾고 있던 수사기관에 걸려들 위험이 있었기에 그래도 그들의 계산속에서 빠져 있는 사람이 나라고 보고 일을 떠맡겨 놓은 건대 말이다.

서울 생활 2,3년밖에 되지 않던 나에게는 달리 길이 없었다. 그래서 가톨릭대학 교수 신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기왕에 정유아 등 아홉 명의 여성들을 숨겨놓은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회를 가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울산 출신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던 정양모 신부님을 만났다. 신부님은 2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달리 돕지 못해 미안하다며 내놓은 큰돈이었다. 후에 신부님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울산 집을 팔고 건축을 맡겼는데 천주교신자 사기꾼에게 걸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신부님은 혹시 돈이 되면 조금이라도 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늘 빈털터리였던 나는 실로 난감했고, 돈을 전달한 최권행 역시 고단하던 때라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해 마음고생 좀 했던 기억이 있다. 겨우 해드린 일은 신부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왜관 장례식장을 찾은 것이 전부다. 그 부채는 지금도 내게 상흔으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길은 엉뚱한 곳에서 열렸다. 서울주교관이 명동에 있던 그 당시에 간혹 번역거리가 있으면 나를 찾곤 했던 주교관 직원이 있었다. 석달언 씨였다. 그 친구가 나에게 집안 형편상 하숙할 사람을 찾는다고 호소 아닌 호소를 해왔다. ‘이것이다하는 마음에 내가 두 사람을 소개 하마 하여 옮겨간 곳이 그의 집이었다. 지금 기억에 족히 너 다섯 달을 그곳에서 지냈던 걸로 생각된다. 윤선생과 박효선이 얼마나 착실하게 지냈으면 그 동안 불평은커녕 늘 나에게 고마워했던 것이 그 친구였다. 그 사이에 나와 최권행이 두 번밖에 그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윤선생이 말하는 소위 보안 때문이었다. 후에 미국 망명이 들통 났을 때 이 친구도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깨나 받았지만, 그 일을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 만큼 윤선생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아 누군지를 몰랐지만 그 집을 떠난 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얼핏 눈치는 채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집에 들어간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두 사내가 왠지 바깥출입을 하려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속내를 비친 적이 있었다. 자기 아내가 하루 종일 꼼짝 않고 같이 지내건만 아내가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말도 곁들였다. 아무튼 그러다 떠난 남정네 둘이가 5·18 수괴들이었다는 점은 심히 아찔한 일이었음에도 그 친구는 허허했고,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권행이 옮길 거처를 마련해왔다. 너무 한 곳에 오래 있었다는 것이다. 소설가 윤정모씨네 집이었다. 홍정경 누나와 잘 아는 사이였고, 그래서 이리저리 이야기가 되었던 것 같다. 윤정모씨는 남편 김환씨와 함께 서대문 근처 어느 연립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한번은 밤늦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아가니 금방 방에서 나오는 윤선생이 놀랍게도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편한 옷차림을 한 윤선생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발목 양말에는 항상 칼을 지니고 있을 만큼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만났을 때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기억한다. 모든 뒷수발을 들던 김은경과 최권행 그리고 김은경이 언니로 따르던 지금의 김정길 부인 김정숙이 윤선생 때문에 곧잘 얼굴을 맞대곤 했었다. 윤정모씨는 그때 이후로 윤선생 예찬자가 되었는데 흥분에 가까울 만큼 들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윤선생을 만나 자신의 인생이 확 바뀌었다고 서슴없이 토로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중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터졌다. 성염 형님이 알고 지내던 고려대 조광 교수와 이야기되어 독일대사관 망명 안이 불거진 것이다. 국내 정세는 여전히 암울했고, 안전한 피난처가 필요했던 윤선생은 자세한 내막을 듣고 망명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전후사정을 검토했다. 사전답사도 이루어졌다. 어쨌거나 망명 날짜가 정해지고 성염 형님에게서 구체적인 절차를 연락받았다. 지금 기억에는 10시 정각에 빨간 승용차가 구내에 들어와 주차하고, 독일인 한 사람이 내리면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가서 함께 10층에 있는 대사관까지 들어가되, 말은 일체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사관 안으로 따라 들어가 곧바로 망명을 신청한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결행 날짜가 되어 우리 일행은 독일대사관으로 향했다. 말대로 빨간 승용차가 도착했는데, 당시만 해도 빨간색 승용차는 별로 없던 때라 금방 눈에 띄었다. 우리 대여섯은 윤선생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여자들은 앞날이 오리무중인 그이와의 이별이 안타까워 눈물바람을 했다. 윤선생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우리는 머뭇머뭇 허탈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윤정모 집으로 몰려갔더니, 글쎄 놀랍게도 윤선생이 먼저와 있는 것 아닌가! 깜짝 놀란 우리에게 대사관에서 벌어진 일을 자초지종 알려주었다.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함께 올라간 독일인 말고는 대사도 누구도 도통 맞아줄 기미기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이상해서 이것이 아니다 싶었고, 시간을 끌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곧바로 내려와 택시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사람들이 막중한 대사를 그렇듯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말인가? 아무튼 중간에서 심부름한 나로서는 윤선생에게 정말로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아차 하면 그이를 사지로 몰아넣을 뻔했던 것이다. 그 직후 형님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듯 물었다. 형님은 알아보마고 했지만 딱히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해 무척이나 허탈했다. 아무튼 재빠르게 그곳을 떠난 윤선생의 결정은 아주 잘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한바탕 우스꽝스러운 난리가 있고 나서, 얼마 후에 최권행이 나더러 인천에 놀려가자고 했다. 미국행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보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인천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급한 일이 있어 김은경하고만 다녀오라고 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을 통해 승선과 미국 도착, 그리고 밀항과 도피를 도운 사람들 생각에 망명 신청도 미루며 고생고생 하는 가운데, 줄담배는 여전하다는 소식을 듣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광주로 온 나는 황석영 선생 집에서 미국에서 왔다는 젊은이를 만났다. 운동권에 너무도 환하고 해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하나가 나타나 활동하고 있는데 혹시 전두환 정권이 침투시킨 밀정은 아닌지, 윤한봉이 확실한지 확인차 왔노라는 그 사람 이야기에 우리는 침을 튀기며 열심히 설명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안기부에서는 윤선생 미국행을 코웃음 치며 자신들의 철통 같은 방위력을 자랑하고 여전히 국내에 칩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장담한다는 소리를 듣고 배시시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터졌다. 윤선생이 윤정모씨 집에서 칩거하던 시절 홍대를 나온 여자들 몇이 그곳을 드나들었는데, 그 중 미술과를 나와 전주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화가 김문자씨가 있었다. 그런데 군산에서 독서모임 오송회 사건이 터지면서 시인이던 그녀의 남편 이광웅씨가 주범으로 걸려들고, 그 와중에서 윤정모씨와 윤선생 이야기가 흘러나왔던 모양이다. 안기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었다. 어쨌거나 줄줄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나는 최권행이 서울에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날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관련된 인사들이 모조리 불려가 조사를 받던 중에 윤선생의 미국행이 확인되면서 사건이 축소되었다. 일본으로 갔더라면 큼직한 간첩단 사건 하나가 생길 판이었다. 그런데 간 곳이 미국이라 어쩌지 못하고 쉬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3개월 떠돌아다니던 중 조사가 다 끝났는데 나 때문에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고 전해와 보안사로 전화를 했더니 당장 들어오지 뭐하느냐고 큰소리였다. 그래서 이튿날 일찍 호남대학 옆에 있는 보안사로 자진 출두했고, 밤 열두 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모든 이야기가 다 나와 있어 사실 확인만 해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들은 좀체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계속 서울과 연락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강신석 목사님도 같은 날 출두를 했는데 먼저 나갔는지 볼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감옥에 집어넣을 태세였다. 하지지만 역시 허풍이었고 밤 열두 시에 나오니 박형선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조사관 한 사람과 셋이서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 하고 헤어졌던 기억이 난다.

이후 윤선생의 귀국 전후를 비롯하여 이후 그이가 세상을 뜰 때까지 혹은 곁에서 혹은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겪었던 그이는 한마디로 자기원칙에 충실하고, 흔들림이 없던 사람이었다. 김대중에 이은 이 지역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귀국을 기다리던 많은 이들은 실망해서 돌아섰고, 그이 자신도 그런 사람들과는 과감하게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모함과 구설이 따랐지만, 그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간단히 생각해도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귀국 후 3년은 입을 다물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그 동안 바뀐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겠다던 그이가 ‘5·18 재단설립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대로는 큰일 난다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로 정치개혁 시민연합창설, ‘민족미래 연구소개설, ‘들불열사기념사업회창립, ‘민주노동당지역당 창설, 등등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한도 끝도 없으리라. 그만큼 부단하게 움직이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같이 하거나 지켜보아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지만 그이 영결식장에서 부탁받고 썼던 미흡하고 감정적인 짤막한 추모글 두 편을 후기하는 것으로 그이를 바라보는 내 심정을 정리하고 싶다.

 

윤한봉, 예수 아니면 미친 인간

 

어제 한 인간이 또 죽었다. 윤한봉. 나의 길잡이였다. 그는 광주사회에서 누구보다 감방을 많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는 옳은 게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으며 살았다. 민청학련 이야기는 대충 들어 알리라 본다. 그는 열일곱 나이에 군대를 자원할 만큼 자신이 할 일을 빨리 결정했다. 그리고 그 능력에 전남대 농대를 자원할 만큼 자신의 미래도 일찍 결정했다. 그러다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책을 덮는 그 순간부터 늘 일에 매달렸다. 많은 운동가들이 군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예수 아니면 미친 인간.” 이것이 내가 늘 쓰던 윤한봉 선생에 대한 평가였다. 분명 예수 같기도 한데 도대체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와 행동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내 따라다닌 나였다. 그는 자신을 5·18과 연관짓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도피자라고 떠드는 인간들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는 절대 자기가 당하는 것이 무서워 도망한 적이 없다. 자기가 잡히면 전두환 일당이 광주항쟁을 허위로 조작할 위험 때문에 붙잡히지 않으려 했을 따름이다.

그이가 서울로 피신왔을 때부터 미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늘 곁에서 노심초사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나였다는 사실은 지금도 자랑스럽다. 그런데 열세 해 동안 처절하게 살았던 그이가, 귀국해서 본 우리의 모습은 한마디로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 군상이었다. 거기에 나도 포함된다. “예수 아니면 미친 인간.”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주문을 하고, 자신은 그쪽 아니면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던 인간. 그래서 나는 그이가 미친 인간이었으면 했고, 고맙게도 그쪽으로 몰아간 인간들이 있었다고 듣고 있다. “악은 악을 먹고 살지 않는다. 반드시 선을 먹고 산다. 그 선은 무지(無知)한 선이다.” 언젠가 직접 듣고 잊을 수 없었던 말이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 빚을 졌다. 민주화투쟁의 초기부터 그랬다. 민주화투쟁을 비웃음으로 대하는 인간들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잃어버린 10이란다. 거기에 박수치는 인간들이 말한다. 놀랍게도 그 10년 정권에서 한 자리씩 하던 인간들의 이야기다. 윤한봉은 묻는다. 진정 실패한 사람은 누구였느냐고.

 

아름다운 바보가 또 하나 있었네

 

외길 밖에 모르는 사람, 많은 사람에게 고민을 안겨주었지. 그러나 그 사람이 길잡이였다네.

743월이었지. 일명 민청학련 사건으로 광주경찰서에서 그를 처음 보았어. 아주 따뜻했네. 서로가 힘든 시간이었지. 하지만 자기 생각보다 남을 걱정하는 모습이 고마웠지.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눈에는 확실한 투사가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그래도 무지몽매한 나는 대충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네. 그런데 우리는 불안할 뿐 조용히 지내는데, 이 친구는 맨날 끌려 다니는 거야. 805월이 오기까지 세 번이나. 그러니 미안하고 맥 빠지고 그랬지 뭐.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는 날이면 오히려 더 팔팔한 거야. 마치 싸울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는 듯이.

사람이 반하여 눈에 콩깍지가 씌우는지 모르지만 가끔은 사람에게 아! 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는데, 나에게는 그이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렇게 현대문화연구소니 개인의 역할분담이니 떠들며 세월이 흘러갔지만,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지.

당시에 조선대의 김운기를 빼고는 전부가 전남대 학생 열여덟 명이 머리만 승했지 부모의 돈을 받아 사는 것은 그래도 행복한 편일 정도였어. 내 기억으로는 좀 여유가 있었던 친구가 아버지가 의사였던 고영하와 윤강옥, 김정길 정도였고. 거기에서 경제사관입문입네 뭐네 우리끼리는 꽤 심각했었던 거야. 그때 내가 듣는 바로는 대통령상을 눈앞에 둔 농대 4학년 모든 학점 올 A였던 이 친구가 제안하는 것이 농대 잔디밭 풀 뽑기였어. 솔직히 그래도 명색이 대학생인데라는 개념은 그이에게는 통하지 않았어. 그래서 하루 종일 풀을 뽑고 받은 돈이 내 기억으로는 만 원도 되지 않았지.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나는 몰라. 문제는 그 다음 전남대학 봄 축제가 열렸을 때, 나는 약간 주눅이 들여 있었건만, 이번에는 아이스케키를 팔아 활동자금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다네. 정말 한심스러웠어. 그러나 어쩌랴, 팔기는 팔았는데 진짜 맥은 빠졌고. 아무튼 그것저것 모아 소위 현대문화연구소라는 물건이 만들어졌고, 내 기억으로는 역할 분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어느 분야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세월로 이어졌지.

그리고 80년이 왔어. 나는 내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처음 직장이랍시고 서울로 와야 했어. 지금 말하면 정의구현사제단의 간사 직책이었다네. 오태순 신부 방에서 유인물을 만드는 일이 전부였는데 정말 맥 빠졌어. 그래도 한 달 월급 10만원이 어딘가. 그때는 생명줄이었지. 그리고 그이를 다시 만났어. 그이가 죽은(나는 돌아가신이라고 쓰고 싶다) 이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인연이 거기에서 맺어졌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어. 싸울 때와 피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 가장 먼저 들른 집이 지금 바티칸 대사로 있는 성염 집이었네. 오늘도 그 죽음을 안타까워할 만큼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었어. 그리고 다음이 홍모 여인 집이었네. 그분은 홍대 미술과를 나와 홀로 살고 있다가 이런 인연으로 우리를 일깨워준 분이라네. 뒤에 시경 경무관을 사랑한 끝에 결혼하는데, 우리 이 인물을 숨겨준 죄로, 남편이 제주도 도경국장을 하는 동안 안기부에 끌려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여자로 엄청 고생을 했어. 그리고 그래도 오래 있는 곳으로 어찌어찌 해서 윤정모 집에 자리를 잡았고 거기에서 밀항이 이루어졌고. 정말 여러 사람이 고생 고생했지. 그때 있는 힘껏. 나도 차라리 도청에 있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이는 그 뒤 꽤 긴 세월이 지나 김영삼 정권 시절에 귀국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가장 먼저 그 동안 살아온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완전히 가위표였다네. 자신을 사랑했던 뭇 인간들, 그들에게 도전을 시작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존중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내 형제였다면 모르는 체 하고 싶을 정도였어. “너 왜 살아야이런 말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지.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그의 희생성 때문이었던 거 같아. 모든 조건이 그를 받들어 삶을 엮어갈 때 일판이 벌어질 것 같았어. 그는 그렇지 않았네. 자신을 도와준 그들부터 현재의 삶을 확인하기 시작했었지.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떳떳하게 살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네. 새판잡이였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실 나는 이 글로 돌아가신 그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다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군. 스멀거리는 곤충 한 마리도 사람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납득하겠는가? 그래도 없으면 허전하고 있으면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 사람을 잃은 마음이 굉장히 허전하다. 잃는다는 것이 이런 뜻인가 보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