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두 남자 이야기 (박광숙)2018-12-21 10: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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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 이야기

 

박 광 숙/소설가

 

봄날에 그리운 사람들

 

윤선생님, 당신에 관해 쓰려니 먼 옛날, 남주 시인이 세상 떠나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삼오재를 치르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회의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글을 쓰라며 원고 청탁을 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후 민예총에서 상을 준다기에 갔지요. 그곳에서 원고청탁 얘기를 했더니 누군가가 잔인한 사람들하며 원고 청탁한 사람을 나무라더군요.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그리움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적셔주지만 시간이 지나도 닳아지지 않는 그리움은 얼마나 잔인하던지요. 윤선생님을 눈앞에 떠올리니 포도넝쿨에 포도송이 매달리듯 알알이 그리운 이와 그리운 것들이 엮어져 나타납니다.

우리 집 텃밭 한쪽에 인큐베이터 밭이 있어요. 생장이 부실하거나 증식시키고 싶은 나무나 꽃이 있으면 일단 그곳에 심어놓지요. 흙이 좋아 죽어가던 것들도 거기에 옮겨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생명을 회복하지요. 그곳을 저는 인큐베이터 밭이라고 부르지요. 겨우내 죽어있던 생명들이 지금 그 밭에서 다투어 숨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서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참나무 숲은 마치 호화로운 연두색 커튼을 드리운 듯 죽었던 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들로 눈이 부십니다. 겨우내 죽어있던 나뭇가지들이 펼치는 찬란한 생명과 환희에 찬 잔치에 초대받은 새들이 요란하게 아침을 여는 요즘입니다. 버리고 떠났다 돌아온 생명들이 펼치는 환희그 환희가 문득 문득 서늘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참나무 숲이 하필 서쪽이기 때문이지요. 윤 선생님도, 남주 시인도, 문익환 목사님도, 한열이의 유월도터져 나오던 울분과 환희와 승리도민주주의도, 아이들의 미래도죽음 같은 서편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온통 암흑, 눈물자국을 지우듯 그리움을 가슴에 새기며 시간을 견딥니다. 자연은 떠났다 돌아와 검고 굳었던 산야를 생명과 환희로 채색하는데 인간 세계는 온통 어둠뿐입니다. 새들의 노래는 메마른 산하를 녹색으로 채색하지만 그리운 이들과 함께 했던, 칙칙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리울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은 고통스런 기억의 파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형제로 지내는 남도 사람들

 

남도를, 아니 광주를 모르던 내가 해남 남자, 날강도 같고 능청스런 광주 남자를 면회 다니면서부터 남주 형이야기와 한봉이 형이야기가 한 묶음으로 엮어져 내게 전해졌다. 한 남자는 어마어마한 사건의 주범으로 징역 15년을 받아놓았고 (그래서 이미 남주 시인의 얘기는 공개적이었지만), 한 남자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과 은밀한 눈빛으로 풍문이 되어 전달되곤 했다. 윤선생님의 얘기는 어둠속을 날아다니며 사람들 가슴을 파고들었다. 80년의 공기는 질식할 듯한 팽팽한 긴장감과 한숨, 알 수 없는 살기와 그리움, 활활 타오를 것만 같은 열망과 숨죽인 적의, 그런 것들이 온 도시와 사람들 가슴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바로 80년 가을이었고, 내가 광주와 맺은 인연, 아니 남주 시인과 윤선생님 일가와 광주의 형제들과 맺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남주 시인을 만나며 집이 어디예요?” 하고 지하 생활을 하는 조직원에게 아무 개념 없이 묻자 지하 생활에 이골이 난 남주 시인이 하던 말 집 없어요.” 한 마디 말에 귀가 얇은 나는 그만 그가 천애고아인 줄로 착각하고 15년 밥상을 받아놓은 그를 덜컥 면회를 하겠다고 했다. 그 연으로 광주라는 도시를 들락거리다 이제는 빼도박도 못하는 형수가 돼버렸다.

천애의 사고무친이기는커녕 광주 시민 모두가 그의 남동생이고 여동생이던 시절. 그 여동생들과 남동생들의 부모들까지, 광주의 노소가 남주 시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고 형제자매가 되어 내 손을 부여잡고 한숨 쉬고 눈물자락 훔치며 등을 두드려 주는 바람에 호적까지도 남도로 퍼 옮겨 그들의 형수와 언니가 돼버리게 하던 그 시절 그 사람들. 얼굴도 모르는 한봉이 형과도 태평양 양쪽에서 그렇게 상견례를 한 셈이었다.

80년 남민전 사건의 2심 재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남민전 가족 모두는 광주로 이감이 되었다. 그때부터 면회를 다니기 시작한 나는 광주에 내려가자마자 곧바로 윤선생님의 가족, 더 넓게는 광주사람에 편입된 셈이었다. 남주 시인과 윤선생님의 여동생 윤경자의 남편인 박형선 선생과는 소시적부터 맺어진 의형제란다. 그들 사이는 입다 벗어놓은 팬티까지 뺏어 입을 정도로 각별했단다.

웬만해서 쉽게 마음을 풀어놓지 못하는 서울내기인 나로서는, 같은 옥중 동지로서 간단히 옥바라지만 하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광주행이었는데 광주사람들의 끈끈한 형제애, 동포애, 감옥애의 끈끈이 주걱 같은 질긴 연분이 그만 나를 옭아매고 말았던 것이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과 혹독한 감옥살이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르며 광주의 기둥뿌리 같이 버티며 함께 몸 부비며 저항하며 싸워왔던 그들이고 팬티까지 나눠 입고 신혼방 한 가운데 끼어들며 뒹굴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저렇게 광주일가에 편입되고, 윤선생네와도 각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 많기로 유명한 윤선생의 여동생인 경자씨가 내게 각별하게 대했다. 그녀가 각별하게 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그녀는 내게 정말 각별히 대했다. 그 각별함이 물론 내겐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또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남주 시인은 그의 광주의 형제와 시민들이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는 그 힘으로 광주 감옥에서 전사의 울분을 씹으며 광주의 학살을 시로 써내었다. 광주에서 남주 시인이 시의 깃발을 휘젓고 있었다면, 태평양 건너편에선 윤선생님이 조국의 독재를 향해 싸움의 깃발을 내저으며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남주 시인의 메이드 인 ‘0.7짜리 시편들과 윤선생님의 종횡무진이 숨막히던 이 땅의 지평을 여는 데 조금 일조했을까. 군부독재가 끝나가고 있었다. 감옥에 갇혀있던 시인은 밖으로 나왔고, 얼마 후 시인과 나는 진짜 가족이 되어 광주 형제의 한 일원이 되었다. 윤선생님은 여전히 태평양 건너편에서 건너올 수는 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만날 것이다.

 

해남의 두 어머니

 

결혼식을 마치고 해남 집에 머물 때 윤선생님의 어머님께서 해남집을 방문하셨다. 윤선생님의 어머님은 키가 훤출하고 단아하며 기품이 있으셨다. 두 어머니들은 반가이 손을 잡으셨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신 두 어머니, 자신들의 입신출세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나라 걱정에 감옥을 들락거리던 아들들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아야 했던 두 어머니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은 가슴을 아리게 했다. 한 겨울임에도 남도의 잔치집 마당은 햇빛이 따사로웠다. 그 잔치의 주인공은 나였다. 아마도 나는 신혼 며칠 째라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고 있었을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도 화사한 새색시의 눈부신 노랑저고리도 한없이 무색하게 하던 그때의 광경.

한 어머니는 아들을 십여 년 간 감옥에 보내놓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돌아와 혼례를 치렀으니 얼마나 마음이 흡족했겠느냐만, 한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조차 본 지 오래다. 한 어머니는 당신의 처지는 잊으신 채 혼례를 치른 다른 어머니를 치하하셨고, 한 어머니는 아들을 멀리 두고 있는 다른 어머니를 위로하고 계셨다. 쪽진 머리에 녹두 빛 치마를 입고 계셨던 윤선생님 어머님의 의연하고도 단호한 모습에서 그때 난 윤선생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셨다. 내 손을 잡아주시던 윤선생 어머님의 따스한 손과 다정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려 목이 메인다. 그때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아리셨을까, 그런데도 어머니는 웃고 계셨다.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신기하게도 우리는 결혼 일 년 만에 아들을 만들어 이 세상에 내놓았다. 윤선생님, 토일이가 벌써 스무 살이 되었어요.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아들을 보면 눈이 부시다. 서울 물을 먹어선지 촌 놈 같은 검은 테도 많이 스러지고 콧등이 반들반들 빛난다. 빛나는 시절을 구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번 주일에 집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에 당부를 한터라 내려와 투덜거리지 않고 뜰의 잔디를 뜯어내고 나무를 옮겨 심고 물을 주고 올라갔다. 공부를 잘하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농구도 열심히 하고, 열심히 놀며, 제 아버지는 잘 마시지 못하던 술도 잘 마시며 청춘을 한껏 누리고 있다. 참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난 별 근심 없이 아들을 바라본다. 우리 시절엔 머리를 싸매며 나라 걱정에 사회 걱정에 머리가 무거웠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질 게 없는 세상인데도 고민 없이 사는 아이의 모습이 참 보기에 좋다. 돌이켜보면 우리 때는 너무 일찍 사회를 알아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아이들은 나름대로 인생이 무엇이며 그 나름으로 주어진 길을 엮어가며 살아갈 터인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무슨 소용이랴 하는 생각이 들어 닦달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고민 없이 사는 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럴 때 문득 윤선생님과 소화씨가 떠오른다. 사람의 타고난 운명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윤선생님이 자녀를 두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된 것이 꼭 내 탓인 것만 같아 홀로 남겨진 소하씨를 보게 되는 마음이 편치 않다.

남주 시인과의 결혼 생활이 만 4년이 다 되어갈 그때, 그는 병실에 누워 죽음의 사신과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들은 겨우 만 세 살이었다. 간신히 말문을 트고 간신히 제 가슴의 말을 하게 된 아이.

여리디 여린 싹은 이제 그 아비를 잃어야 할 판이었다. 백년씩이나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아버지와 겨우 네 해 밖에 살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아이에겐 몹쓸 짓이었다. 홀로 거친 세상을 헤쳐 가며 살아가야 할 아이에게 그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하는 것을 추호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우린 덜컥 애부터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아휴, 토일이가 몇 살이예요? 이제 네 살. 아이가 뭔 죄가 있어서 아버지 없이 살아야 합니까?” 하고 회복할 가망이 없어 보이는 남주 시인을 바라보며 토일이를 걱정을 하고 계셨다. 애비 에미의 철딱서니 없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아버지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 할 아이의 장래를 윤선생님은 걱정하고 있었다.

난 애 안 낳을 거예요. 그게 애한테 못할 짓이지

늙은 엄마 아버지를 둔 것도 서러운데 이제 아버지마저 떠나보내고 말아야 할 아이 일이 내내 자신의 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윤선생님은 그 후 정말 아이를 갖지 않으셨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도 윤선생님네에게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가장 원칙에 철저한 사람이 윤한봉이야.” 하던 남주 시인의 말대로 윤선생님은 네 살짜리 토일이를 보며 남주 시인의 병실에서 새긴 원칙에 자신을 묶어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없이도 잘만 커가는 토일이를 보면서 때때로 윤선생님을 생각하곤 했다. 아빠도 없이, 형제도 없이 혼자 커가며 힘들고 외로워하는 아이를 보는 것이 미안하고 안쓰러우면서도 험난한 세상에 아들이 곁에 있다는 데 힘을 얻곤 했다. 혼자 건너가는 세상이 두려울 적마다 아들을 내게 주고 간 그에게 감사했다. 철딱서니 없으면 어때서남주 시인은 만 4년밖에 못살았는데아빠 없이도 잘 커서 벌써 스무 살이 됐는데하는 맘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마치 우리 때문에 소하씨 혼자 이 세상을 건너가는 것만 같아 소하씨 보기가 미안하고 민망하다.

 

엘에이 거리에는 한국 할머니들의 묵 천지여

 

이제 군부는 물러갔다. 군부에 투항한 꼴이긴 하지만 김영삼씨가 대통령을 하고 있는 바람에 살벌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 잠시 숨을 고르고 훈풍이 부는 시절이었다. 엄혹하던 군사독재에서 자유의 공기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코끝에도 밀려와 마음은 그래도 여유로웠다. 그때 잠시 윤선생님이 귀국하였다. 우리 집은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하는 토일이의 똥기저귀 냄새와 젖내가 온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윤한봉이란 분 어떤 분이지?”

그에 관해 여기저기서 듣기는 했지만 그가 막상 우리 집을 방문한다니 마음이 설레어 남주 시인에게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순결한 사람이야. 자기 자신에 아주 철저한 사람이고.”

남주 시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남주 시인 보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남주 시인은 살아보니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자신에 철저하지도 못하고, 문학인들 특유의 눙치는 기술도 있고그런 점은 그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 자기와 달리 윤한봉 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백 프로 순결한 사람, 수십 년을 함께 뒹굴었던 남주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윤한봉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깊었던 것 같다. 그의 말에는 추호의 거짓이나 허황됨, 허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방문을 설레며 기다렸다. 그에게 이렇게 아이의 웃음소리가 퍼져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선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오랜만에 이 땅을 밟아보는 사람이고 나는 그에게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이고 맛난 것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때 이미 강화도를 왔다갔다 했었나 보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앞뒤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지는 상수리를 주워다 묵가루를 마련해 두었다간 귀한 손님들이 오면 묵을 쑤어 내가 만든 묵가루라고, 묵이라고 자랑을 하며 대접하곤 했는데 그때도 그랬던 기억이 난다.

제가 만든 거예요. 아주 맛있어요.”

그때 묵 말고 다른 어떤 것을 준비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그 묵만은 기억이 난다. 사람들마다 강화도 묵이 아주 특이하게 맛있다는 말을 듣곤 했던 터라 나는 아주 아껴서 조금씩 묵을 쑤었고 윤선생님한테도 그렇게 올렸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그는 젓가락도 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묵은 엘에이에는 길에 천지예요. 한국 할머니들이 만들어 맨 길에서 팔거든요.”

한국에 와서 너무나 많이 먹어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다던 그의 말처럼 내가 차린 것들을 그닥 맛나게 들지는 않았다. 대신 미국 해안에 몰려온 오징어 떼를 건져다 세탁기에 돌려 말리던 소동 등 맛난 얘기들을 우리에게 풀어놓아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그와 남주 시인과의 십수 년 만에 만난 회포가 어찌 신산하지 않으랴만 그날 우리는 마냥 웃으며 아픔으로 저며진 공백을 채워갔다. 원칙주의자라는 생각과 달리 그는 딱딱하지도 완고하지도 않은 그저 다정다감한 사촌 오라비 같은 이였다.

 

 

흰 운동화에 달랑 검은 가방 하나 메고

 

그가 엘에이에 있을 때 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던 모양이다. 누구는 **일을 위해서, **누구는 뭐 뭐를 위해서 그를 찾았고, 귀국하지 못하는 그는 조국의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발 벗고 나선 모양이었다. 그는 미국의 동포들 _그가 만든 청년 조직과 조직원들에게 조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을 열심히 소개하고 모금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애쓴 걸로 알고 있다. 내 귀에도 남주 시인과 결혼하기 전 그런저런 소식들이 전해져 오거나 들려오곤 했다.

한봉이 형이 남주형 먹으라고 귀한 한약재를 보냈는데 받으셨어요.” “영치금 넣으라고 돈 보냈는데 받으셨어요.” 라는 말을 듣고는 했으나 내 손에 전달돼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훗날 그 얘기를 윤선생님한테 고자질을 했더니

아무라도 썼으면 됐지.” 하며 고자질한 사람이 무색하게 허허 웃고는 끝이었다.

십 수년 망명자 생활을 마치고 그가 돌아왔다. 공항을 걸어 나오는 그의 어깨에는 검은 가방이 달랑 매어 있었다. 흰 운동화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사진 속의 멋쟁이

 

70년대 어느 시간이 여기 멈춰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게 어마어마한 누명을 뒤집어씌운 독재자가 국민과 세계의 여론에 못 이겨 다시 이들을 풀어줘야 했던 그때. 갈색 홀태바지 입은 멋쟁이 윤한봉이 여기 있다. 누가 이이를 윤한봉이라고 하랴.

우리도 한때 이렇게 멋 부리고 살았다우하듯이 사진 속의 그는 아주 멋있게 차려입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멋진 인생들이었나. 아름다운 꿈도 있었고, 패기도 있었고, 나라를 경영할 큰 뜻도 품고 있었던 그들이었는데 날강도 보다 더한 숭악한 인간들로 인해 이 나라가 망가지고, 인간이 패악스럽게 돼 버린 꼴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도 난도질당해야 했던 그들. 그들이 여기 다 모였다. 얼마나 꽃다운 시절이었던가. 얼마나 예쁜 나이인가.

이제 그는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남주 시인과 딴 세상으로 가버렸다. 앞으로 20, 30년 더 살아 구제불능의 노인네가 되기 전에 다시 전설이 돼버린 두 남자.

우리들 곁에 다가와 꿈인 듯 잠깐 머물렀다 떠나가 버린 두 사람.

우리에게 옛이야기를 되새김질 시키고 있는 그들이 정말 밉다. 그들을 더욱 진하게 추억하게 만드는 더러운 세상이야 언젠가는 거둬지겠지만,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미래가 가끔은 두렵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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