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죽어서도 말하는 사람 (홍희담)2018-12-21 10: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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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말하는 사람

홍 희 담/소설가

 

해남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우리의 가장은 가재도구와 책을 실은 트럭에 앉아 있었고 어린 아이 두 명과 나는 버스에 앉아 뒤를 따르고 있었다. 뽀얀 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고 버스는 사정없이 덜컹거렸다. 비포장도로였다. 서울내기인 나는 처음으로 시골 생활을 겪게 될 것이었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섞여 들었다.

1977년 가을이었다.

해남의 우리 집은 허술한 한옥이었다. 꽃나무들이 풍성하고 특히 당산나무가 턱 들어앉아 있었다. 멋모르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흉가였다. 바로 전에 살던 주인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 누군가가 알려주었다. 이런 흉가에서 아무 탈 없이 지낸 것은 가장의 장대한 기상과 수 없이 드나들었던 활동가들의 순수한 기운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수없는 발자국들은 지신밟기와 매한가지였다. 회고해 보면 나에겐 가장 풍요한 시절이었다. 소녀 시절부터 꿈꾸던 예술가가 옆에 있었고 아이들은 예쁘고 건강하게 산천을 휘돌아 다녔다.

 

꽃밭에 앉아

꽃잎을 보네

어디서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송이

 

이런 멜로디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일상이었다. 삶의 저편에 얼마나 많고 깊은 고통과 무상함이 도사리고 있을 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해를 넘기고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남편이 한 사나이를 데리고 왔다. 방금 출소했다는데 첫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풍모였다. 깡마른 체격에 비스듬히 휜 어깨는 언제라도 상대방을 받아칠 기세였다. 의외로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했다. 손은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직설법과 공격성, 사실적 표현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성격으로 보이지만 기실은 예민하고 상처받기 쉽고 슬픔이 많은 내밀함을 그 손은 나타내고 있었다.

첫날 합수는 형형한 눈빛으로 장기수라는 단어를 써가며 감옥 생활을 생생히 그려냈다. ‘장기수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내뿜는 처절함과 역사의 모순에 대해 나는 전율을 느꼈다.

 

꽃밭에 앉아

꽃잎을 보네

 

보면서도 이제는 아름다운 꽃송이를 볼 수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온전히 먹을 수가 없었다. 햇살을 눈부시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 컴컴한 감옥 속에 웅크린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밥을 지으려고 부엌으로 들어섰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꽃들, 돌담, 당산나무, 댓돌 위의 신발들, 그리고 하늘. 저렇게 멀쩡히 있는 것이 이상했다.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꽃은 꽃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인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30여 년이 흐른 요즈음에서야 겨우 가능해졌다.

그렇게 그는 우리 일상을 휘저어버렸다. 일상에 안주하고 있으면 쌔려버려’(*‘때려주겠다는 뜻의 전라도 말) 하고 마구 들이대었다.

일상에서 끌어낸 첫 번째 행동은 구치소 방문이었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고 있었고 수많은 양심수들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구치소 가는 길에 일년초들이 피어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 한 송이 꺾어 들었다.

대뜸 합수의 공격이 꽂혀왔다.

쌔려버려

양심수들에게 주려고

나도 모르게 변명이 튀어 나왔는데 그의 눈길이 잠시 멀어지더니 모여 있는 가족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꽃 한 송이씩 꺾어서 면회실에 들고 가세요.”

그 날 몇 몇 양심수들의 눈이 촉촉해졌다. 정용화의 어머니는 언제나 꽃을 들고 면회를 다니셨다.

두 번째 행동은 양말뜨개였다. 겨울에 양심수들에게 넣어줄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뜨개질의 달인이셨는데 솜씨를 전수 받아 예쁜 양말을 수없이 떴다. 한 코 한 코 뜨면서 나는 수많은 양심수들과 함께 한다는 자긍심을 느꼈고 내밀한 무엇인가가 조금씩 구체화 되어갔다. 그런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합수가 그런 조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양심수 가족 중의 한 명이 어느 날 물었다.

누구 윤희라는 이름으로 양말을 넣었어요?”

난데.”

내가 대꾸했더니 실망한 듯 픽 웃었다.

난 또 누구라고. 큰일 났네.”

?”

동생이 양말을 받고 너무 이뻐서 신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고 잔대. 이름이 이쁘니까 얼굴도 이쁘고 처녀인줄 알고 있더라구.”

나는 끝내 그 양심수의 환상을 깨지 못했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와 새롭게 읽기 시작한 역사 인식의 서적들로 인해 내 안에 낭만적 혁명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러한 낭만적 혁명주의는 19805·18을 겪으면서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감옥 면회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우리 여성들은 공분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합수는 적시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했다. 그의 언변과 눈빛과 몸짓은 너무 강력해서 한번 뱉어낸 결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막을 수 없을 뿐더러 결정 자체가 생명력을 갖추어서 사람들 마음속을 여지없이 휘감아 버렸다.

송백회가 결성된 것은 이런 과정이 있었고 막후에 합수가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송백회는 구속자 옥바라지와 자주적 여성 운동의 태동이었다. 그 전까지는 여성 운동이 대부분 종교의 이름을 빌리거나 기관의 한 부문으로서 정립되어 있었다. 송백회는 월 회비와 모금으로 자체 운영을 하게 되었고 더불어서 사회과학 서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소모임도 정기적으로 갖게 되었다. 회원도 꾸준히 증가되었고 타 지역에도 지부가 결성되었다. 갇혀 있었던 여성의 저력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쏟아져 나왔다.

합수는 이 저력을 규합해 주었는데 아직도 나는 이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 질서가 강력히 자리 잡고 있는 전라도에서 합수는 어떻게 해서 여성의 힘을 분출하게 할 수 있었을까. 그의 품격이 남녀평등에서 기초한 것일까 또는 여성의 힘을 제대로 파악해서 억압된 사회 현실에서 운동적 확산을 꾀했던 것일까. 어떠한 것에 기초하든 그의 영향력은 결정적이었다. 그에게서 훈련 받은 여성들은 그 이후에 각계에서 활동가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은 무균실에서 였다. 들고 나는 숨이 끝난 그의 얼굴은 투명하고 평화로웠다. 가볍게 죽음의 관문을 건너간 것 같았다. 삶은 신산했는데 죽음의 순간은 가벼워 보이는 사람을 더러 보아왔다. 남주가 그러했고 효선이, 영철이가 그러했다.

모포 밖으로 그의 손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근육도 없고 오직 뼈만이 남아 있었다. 비록 모포로 가리고 있었지만 신체도 그렇게 보였다. 나는 한순간 FBI가 공개한 체 게바라의 마지막 사진이 떠올랐다. 군살이 다 빠지고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난 사진이었다. 육체가 영혼이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형상이었다. 이제 체 게바라의 사진은 패션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처절하게 슬프다.

합수의 마지막 모습도 그러했다. 근원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제대로 살지 않으면 쌔려버려!”

이런 사람들이 걸은 적이 있었기에 이 행성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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