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윤한봉 선배에 대한 기억의 편린 (정용화)2018-12-21 1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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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선배에 대한 기억의 편린

 

정 용 화/언론인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서술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았던 윤한봉 선배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주장과 신념, 그리고 권리와 의무 및 부채의식 등이 어우러진 삶을 영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부질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존경하는 사람의 그림자 속에 어두움이 있을 수 있으며, 비난의 뒤안길에도 변명의 소지는 있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사실에 기초해서 윤한봉 선배에 대한 기억을 간략하게 되살리고자 했으며, 이미 오십대 후반이 되어 버린 필자의 삶이 타인의 삶을 논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시절 필자에게 가장 영향을 크게 준 집단이 두 가지가 있는데, 집단으로는 가정은 물론 재학했던 학교를 포함하지만, 그 중에서도 광주서중 3학년 말에 접촉하여 광주일고 3년 동안 활동했었고 지금도 모임에 나가고 있는 광랑(光郞)’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민청학련에 관련된 선배그룹이다. 이 두 집단에 소속된 선후배 제현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인데 그 중에서도 굳이 한 개인을 꼽으라면, 당연히 윤한봉 선배이다. 이 두 그룹과 윤한봉 선배는 필자의 청소년과 청장년을 관통하여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랑 선배들에게 말로만 듣던 윤한봉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19741월 어느 날, 광주공원(?) 인근의 어느 식당에서였다. 재수생 시절이었는데, 광랑 선배인 최철 선배의 안내로 전남대 선배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미 전남대 1학년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는데다가 이미 19726월 고교 3학년 시절에 학생시위를 주도해 무기정학을 받았던 경력이 있었던지라, 그해 봄에 예정된 대학생시위의 준비모임에 참석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해 3월 전남대에 입학한 필자는 당시 문리대 사학과 선배인 윤강옥 선배의 하부 조직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49일 학생시위는 황금마차에서 유인물을 뿌리는 정도로 끝나고 많은 선배들이 구속수감되었다. 세칭 민청학련사건이 터진 것이다. 윤강옥 선배의 배려로 감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해 6월 군대에 입대하였고, 뒤통수가 근질근질했지만, 별 탈 없이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감옥에 안 간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에는 부채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모양이다.

1975215, 민청학련 관련 선배들이 석방되었다. 군대에서 휴가를 오면 선후배들과 어울렸다. 선배들의 고생한 경험담을 듣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군대에서 휴가 온 동안만이라도 선후배들과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러던 중에 윤한봉 선배는 19764월인가에 부활절 예배사건으로 감옥에 투옥되었고, 필자는 19774월 군에서 제대했다. 제대 후에도 여전히 선후배들과 만나면서 시대적 울분을 공유하며 지냈다. 19783월 전남대에 복학한 필자는 그해 6월 민주교육지표 사건으로 구속수감되었다.

필자는 19797월 형 집행정지로 출감, 윤한봉 선배가 소장을 맡고 있는 현대문화연구소에 나가면서 윤한봉 선배와 김희택 선배(광랑)를 보필했다. 그해 9월 윤한봉 선배는 전남대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의 배후로 몰려 또다시 서부경찰서로 끌려갔다. 10.26이 나고 12월 초가 되어서야 모진 고문에 시달렸던 윤한봉 선배가 석방되었다. 그 사이 11월 초(?)엔가 광주 YMCA 시국선언사건의 배후로 김희택 선배가 도피한 뒤로는 필자와 임영희 간사가 연구소를 지켰다. 윤한봉 선배는 12월부터 정국에 대한 비관론을 펼치면서 전국적 조직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윤한봉 선배는 그해 말에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과 현대문화연구소 소장을 필자에게 넘겨주면서, “나는 여러 가지로 바빠서 전국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광주전남지역 일은 네가 맡으라고 지시했다. 당시 필자는 윤한봉 선배와 파트너쉽의 관계라기보다는 세칭 가방모찌(비서)’같은 존재였다. 후에 윤한봉 선배는 민주교육지표 사건의 재판을 보면서 네(필자)가 긴급조치9호를 어미 애비도 몰라보는(헌법을 초월하는) 싸가지 없는 법률로 표현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는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정치적 재판을 방청하면서 후배들과 관련자들을 가늠하고, 요소요소에 배치할 곳을 구상하기도 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윤한봉 선배는 자상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굉장히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선배가 광주시 동구 동명동 동명교회인근에 자취방을 얻어 필자와 6개월 정도 같이 자취를 했다. 윤한봉 선배가 특별히 타 지역 출장이 없으면 뒷수발을 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나서 1980년 서울의 봄과 그해 5, 5·18을 맞게 된다.

그때 필자는 20대 후반의 겁많은(?) 청년이고, 윤한봉 선배는 30대 초중반의 사려 깊은 청장년이었다. 겁나는 일을, 겁 없이 해대는 청장년이었다고나 할까? 19805월 초의 민주가족야유회에서의 비관적 예견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이야기이니만큼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1980517일 오후 5~6시가 넘어갈 무렵부터 윤한봉 선배는 좌불안석이었다. 저녁식사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서울의 여러 소식을 수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날 저녁, 민청 선배들의 예비검속을 확인하고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소식을 문병란 선생 댁에서 TV로 보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윤한봉 선배가 문득 필자에게 던진 말이, “이번에 들어가면 죽는데라는 말이었다. 그만큼 새파랗게 질려있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518일 새벽 4시가 넘어 동이 트자마자, 윤한봉 선배를 모시고 필자의 고교동창 김기순(현재 한림대 서양사 교수)의 집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도망자가 되어 있었다. 꼬박 하루를 광주 시내 동정을 살피다가 19일 나주로 빠져 나갔다. 필자도 이번에 윤한봉 선배가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댔었다. 나주에 있는 필자의 친구 집을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어 난감해 하던 차에 윤한봉 선배는 너와 내가 같이 잡히면 다 같이 죽는 셈이니 하나라도 살려면 헤어지자고 했다. 그 길로 윤한봉 선배는 나주역에서 열차편으로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며칠 뒤 522일 또는 23(?) 해질녘에 필자는 고교 은사이셨던 김용근 선생님 댁에서 윤한봉 선배와 약속한 바도 없이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기구하고도 끈질긴 인연이라고나 할까? 3~4일을 노심초사하며 같이 있었다. 당시 전남 도청의 시민군이 폭도로서 모두 진압되고 나자, 윤한봉 선배는 다시 말했다. “같이 있다 잡히면 다 죽는다. 그러면서 정처 없이 대책도 없이 대문 밖을 나섰다. 며칠 뒤, 필자는 김용근 선생님 댁에서 5·18 관련자로 체포되어 전남도경, 보안대 등을 거쳐, 두들겨 맞고 구속 수감되었다가 상무대 군()영창과 광주교도소를 거쳐 1031일에 석방되었다. 이때도 정동년, 김상윤, 정상용, 이양현, 윤강옥 선배 등의 배려로 비교적 빨리 출감하였다. 그 후, 1981년 초 구정() 때 성묘를 가장하고 서울에 가서 윤한봉 선배를 만났으며, 그해 4월 말경 윤한봉 선배는 삼미라인 소속 레오파드호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게 되었다.

윤한봉 선배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윤한봉 선배가 밀항한 뒤에도 필자는 윤한봉 선배가 국내에 있을 때와 똑같이 존경심을 갖고 생활에 임했다. 단지 하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윤한봉 선배가 결혼한 뒤에 결혼하겠다던 필자의 다짐이었다.

1995(?)을 전후해 시절이 좋아져서 윤한봉 선배가 귀국한 뒤로도 사안이 있을 때마다 호출해서 일을 맡겼다.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요즘엔 이런 생각이 가끔은 든다.

광주는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곳이었지만, 나는 광주에 정말 필요한 존재일까?”

마찬가지로,

윤한봉 선배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윤한봉 선배에게 얼마만큼의 비중을 갖는 사람이었을까?”

그러면서,

이 글은 과연 윤한봉 선배를 추념하는 일에 얼마나 보탬이 될까?”

등등.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항상 생각나는 사람이 윤한봉 선배이다. 오늘도 생각해 본다. 윤한봉 선배가 남기고 간 뜻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삼가 윤한봉 선배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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