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광주 사람 윤한봉(임재경)2018-12-21 10: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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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람윤한봉

임 재 경/언론인

 

후생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의 이름 앞에 태어난 고장 지명을 붙이는 것은 먼저 가신 이에 대한 예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현재 우리 말 습관으로도 매우 생소하다. 이를테면 남포 사람 안창호’, ‘예산 사람 윤봉길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할 때 받는 느낌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20076월에 작고한 통일 운동가 윤한봉에 대해서는 왠지 광주사람이란 관형사를 꼭 붙이고 싶다. 1994년에 타계한 가톨릭 민주운동가 장일순을 두고 원주 사람이라 부르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 심경에서다. 광주나 원주는 물론 온 나라에 내놓아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그릇이었으며 영달과 출세를 위해 중앙 무대에 나서길 한사코 거부한 사람이 윤한봉이고 장일순아닌가.

그가 성장기를 보냈고 자라고 동무들과 어울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친 고장 광주를 윤한봉이 끝까지 등지지 않은 것은 그를 아끼고 따른 이 고장 사람들의 바람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윤한봉을 아끼고 따르는 광주사람들은 누구이고 윤한봉에 대한 그들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 답은 반세기를 넘는 지금까지 분단 시대의 한반도 남쪽에 드리워졌던 차별과 압제를 규명하는 작업이며 그 억압 구도에 분연히 맞서는 일 아닐까?

저널리스트로서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한 모서리에 섰던 나는 윤한봉의 선성은 일찍이 민청학련사건 직후에 들었지만 그를 대면한 것은 10여 년 뒤 그가 40줄에 들어 선 이후다. 도피, 옥살이, 망명 등으로 윤한봉과 민주인사들이 접할 수 없었던 시절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귀국한 1993년 이후에도 그와 단 둘이 긴 시간 담소를 나누거나 토론을 벌릴 기회를 갖지 못하였던 게으름이 종내 아쉽다. 그런 까닭에 그의 타계 1년 반을 넘긴 이 자리에서조차 인간 윤한봉에 대한 정겨운 회고 윤한봉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화두를 던질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윤한봉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광주사람이 떠오른다. 여기서는 단수(單數)로 표기하였지만 실제로 윤한봉의 얼굴과 뒤엉켜 많은 광주사람들의 모습이 어른어른함으로 이글의 제목을 윤한봉과 광주사람들이라 했어야 옳을지 모르겠다. ‘광주사람이란 행정구역상의 광주시에서 출생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도 지금 광주에서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회의식이 예민하고 그 의식의 표출 양태가 독특하여 다른 고장 사람과 구별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광주사람이다. 광주에서 자라고 거기서 초중고를 다녔으며 반세기 동안 광주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한 서러움과 아픔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광주사람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윤한봉과 그를 아끼고 따르던 사람들을 그런 조건으로만 유형화한다는 것은 아니다. 윤한봉과 그의 동무들에 대해 꼭 몇 마디 더 보탠다면 그것은 수줍음이다. 이를테면 수줍음을 타는 광주사람이다.

 

19805·18 민주항쟁과 전두환 일당의 살육행위를 연상하여 광주사람을 정치적 원한의 화신(化身)으로 여기는 광주 바깥의 고정관념이 널리 퍼져있는 현실에서는 수줍은 광주사람들의 예민한 사회의식을 말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 일반적으로 수줍다는 형용사를 청장년층에 대하여 쓰면 못나니’, 혹은 밥 굶기 딱 알맞은 남자로 받아들이기 쉬워 비방이나 폄하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비방과 폄하와는 전혀 다른 쓰임새로 수줍다는 표현을 선택했다. 뻔뻔스러운 성품, 혹은 여럿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기질과는 대조적인 사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한동안 궁리하던 중 마침내 수줍다는 단어를 찾아낸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웅변대회에 나가 거침없이 가성(假聲)을 써가며 목청을 높이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런 짓에는 닭살이 돋는 사람이 없지 않다. 즉 가성을 쉽게 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나는 수줍은 사람이라 규정한다.

윤한봉이 학교 웅변대회에 나간 적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수줍은 사람의 것이었다. 짓밟히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려는 민중 앞에 섰던 윤한봉의 목소리가 이른바 용병(用兵)의 차원에서는 불리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용병가로서 윤한봉을 자리매김하는 것에 나는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또 우람한 체구와는 전혀 다른 깡마른 중키의 농군 같았던 점에서 민족의 긍지를 지키는 데 성공한 베트남의 호찌민을 떠올리게 한다.

수줍은 윤한봉이 예민한 사회의식을 지닌 광주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던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한번 뱉은 자신의 말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 그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의 결과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5·18 유혈 참극에서 살아남은 그가 화물선 선창에 몸을 담아 미국 잠항을 결행한 전후 사정은 그의 저서 운동화와 똥가방’(1996년 한마당)에 이미 소상히 적혀있다. 윤한봉의 동무 최권행(서울대 불문학과 교수)이 이 책의 가철본을 내밀며 좀 더 좋은 책이 되도록 조언을 구했던 적이 있다. 그때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나였지만 윤한봉의 삶의 궤적에 비록 기술(記述) 방식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 생각하여 끝내 코멘트를 사양했었다. 그가 택한 형극의 길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화물선 선창의 밀폐된 공간에 갇혀 한달 가까이 태평양을 건너야했던 윤한봉은 서양 근대 최악의 범죄적 역사(아프리카 대륙과 남북미주를 왕래한 노예선)를 추체험(追體驗) 하는 과정이었다. 그 글을 보며 해직기자 처지로 1983년에서 841년간의 옹색한 미국 체류 기간을 마치 큰 고생이나 한 것처럼 되뇌인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6.25 전쟁 이후 10여 년간 이 땅을 풍미한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키 워드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하지 못했던 내가 윤한봉의 실천을 보면서 그것의 구체적 의미를 깨달았다.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개별인간은 우연한 상황들, 즉 죽음, 고뇌, 투쟁, 죄업 등의 절망적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흔들리게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 인간이 절망적인 상황의 유한성을 알아차리고 좌절로부터 벗어나 인간 본래의 실존을 획득한다는 것을 윤한봉에서 보았던 것이다. 한계상황의 유한성을 알아차리고 좌절로부터 벗어나려 사력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수줍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며 동시에 책무이다. 그러므로 수줍다는 것은 인간사와 세상사를 겸허하게 바로보고 접근한다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

 

윤한봉과 더불어 올바른 삶을 살기위해 힘을 합쳤고 그가 타계한 이후에도 그가 닦은 길을 변함없이 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나이 탓으로 서울을 자주 떠나지 못하는 나는 지금껏 광주를 떠나지 않고 거기에 남아 일하는 사람들의 구체적 면모를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을 격려하는 말은 다른 기회로 미루고 그 대신 지난 30년간 윤한봉 이야기를 나에게 끊임없이 들려주었고 때로는 광주와 서울에서 그를 대면할 자리를 마련해준 그의 동무들(나이로는 몇 해씩 차이가 나겠지만)에 대해 기록삼아 몇 자 적어놓아야겠다.

붓이 먼저 가는 쪽은 아무래도 민청학련과 ‘5·22’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윤한봉 세대의 광주사람들. 이 사건 연루자 전부를 망라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출판사 <풀빛>의 나병식, 참여정부의 인사담당 수석비서관을 지낸 정찬용, <해동건설> 사장 박형선, 미술사학자 유홍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문국주, 그리고 서울대 교수 최권행이다. 또 민청학련 사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제적당했거나 옥살이 한 고영하와 황지우도 여러 번 만났다. 그 중 민청학련 출옥 직후 패들의 소개로 알게 된 나병식이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인데 80년대 중반 내가 <창비>에 나갈 때 마포경찰서 옆 허름한 기원에서 어울린 일이 이날 이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5·18 관련 기록을 출판한 그를 잡아들이려고 기관원들이 혈안이 되어있는 시기인데 경찰서를 지척에 둔 바둑 집에서 만나 바둑을 두잔 연락이 왔다. 그의 설명인즉 기관원들은 평소 수배자와 가까이 지낸 친지나 자주 드나든 장소를 훑지 경찰서 코앞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하루 종일 거기서 바둑을 두고 밤에는 경찰서 근방 하숙집에 잠을 잔다는 이야기였다. 큰 덩치에 어디서 그런 꾀가 나오나 싶어 혀를 찼는데 광주에서 번번이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한 것을 보면 현실 정치에 능하지 못하다는 면에서는 나병식 역시 수줍은 사나이에 틀림없다. 장기간에 걸쳐 한겨레신문 광주-전남 지역의 취재 책임을 맡았던 박화강 기자의 아우이자 윤한봉의 처남인 박형선과는 1995년 겨울 영호남 지역감정 극복을 위한 지식인 연대 모임참석차 광주에 가서 소주를 마시며 이 시대가 안은 고민을 밤늦도록 토론한 적이 있다. 더 생생한 기억은 박형선이 2006년 여름 70년대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 여럿을 불러 해남의 미황사, 목포의 해양박물관, 그리고 흑산도까지 둘러 볼 기회를 마련한 때였다. 이 나들이에는 광주사람들 외에 서울에서 변호사 홍성우와 고영구, 정계의 유인태, 이철, 원혜영, 언론계의 성유보, 유영표, 이근성 등이 합세했고 특기할 일은 유달산 기슭에서 저녁을 같이 할 때 윤한봉이 바로 내 옆에 앉았는데 이것이 내가 생전에 본 마지막 그다. 여기서 둘이 나눈 길지 않은 이야기는 달리 남기고 싶다.

 

내가 깊이 사귄 수줍은 광주사람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이는 김판수씨다. 그는 해직기자로서 정계에 투신한 김태홍과 광주서중을 동문수학한터라 윤한봉보다는 연배가 한참 위다. 그런 김판수가 60년대에 이른바 유럽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에 얽어져 장장 6년간의 옥고를 치루는 고통을 겪었는데 그 역시 수줍음의 전형적 인물이다. 서울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유럽 유학까지 갔으니 달리 맘을 먹었더라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 냉전과 분단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었던 것이다. 그가 갇혔던 동안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은 말할 나위없고 출옥 후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판에 광주의 옛 친구들로부터 김판수 빨갱이라는 따돌림을 받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광주 바닥 사람은 모두 수줍고 인정스럽다는 주장에 절대 동의하지 않기로 작정했으며 여느 고장과 마찬가지로 광주도 사귈만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쓰레기가 한데 섞여 있는 곳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수줍은 광주사람으로 윤한봉보다 열세 해 먼저 간 시인 김남주를 어찌 지나칠 수 있으랴. 창비 주간으로 일하던 시인 이시영 덕분에 나는 김남주와 서 너 번 자리를 같이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는 수줍다 못해 자기표현은 어눌하기 그지 없었는데 인상과 달리 시는 전율할 정도로 강하고 힘찼다. 몇 해 전 최권행의 인도로 해남 땅 그의 생가를 가 보았다. 그곳 철판 위에 새겨진 그의 시구를 읊어보자.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자신이 태어난 19세기 프로이센(독일)의 숨 막히는 관헌(官憲) 국가의 현실을 견디다 못해 파리로 도망친 하인리히 하이네를 김남주는 무척 좋아한 듯했다. <창비> 주변에서 하이네를 좋아하는 문인을 처음 만난 나는 그에게 하이네를 번역해보라고 권했다. 1년이 지났을까 그는 하이네의 장시 아타 트롤’(Atta Troll)의 번역원고를 들고 왔는데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독일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한 게 아니구만요하는 거였다. 다른 출판사와는 달리 번역의 경우 원전(原典)주의를 고집하는 <창비>였지만 김남주의 아타 트롤은 곧장 햇빛을 보았다.

 

윤한봉을 사랑하는 광주의 수줍은 사람들은 나라 안 못지않게 해외에도 적을 것 같다. 숫자를 따지자면 그가 10년 이상 망명생활을 했던 미국에 가장 많지 않을까. 하지만 미국에 거주하는 윤한봉의 동무들은 잘 알지 못하는 터라 직접 만났던 유럽의 수줍은 광주사람을 이야기로 대신해야겠다. 다름 아닌 독일 라인 강에서 머지않은 보쿰(Bochum)에 사는 조기상이다. 1992년 독일 통일 직후 독일에 1년 머물 때 박사학위 취득 연구차 칼스루에에 와있던 최권행의 소개로 알게 되어 조기상과 나는 한국의 민주화와 분단극복에 대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로 만난 조기상 부부, 이역만리 독일에서 힘든 살림을 꾸려가는 가운데서도 모국의 민주화를 위한 일이라면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이 내게 말했지만 그는 자신의 투쟁이력을 한번도 자랑하지 않았다. 내가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 데 참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그로부터 너무나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가신 이 윤한봉과 다시 말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한스럽다. 그의 생전에 왜 더 자주 만나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말보다는 행동과 실천으로 동무들에게 본이 된 사람임으로 기실 말은 부차적인 것일지 모른다. 윤한봉이 없는 지금 윤한봉을 아끼던 수줍은 광주사람을 더 자주 만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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