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최초의 유럽 문화 선전대 '해방의 소리' (최용탁)2018-12-2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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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유럽 문화선전대 해방의 소리

 

최 용 탁/소설가. 전 재미한청련 회원

 

1991년 팔월, 무덥던 그 여름 뉴욕 한국청년연합 사무실에는 밤낮으로 풍물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잠시 풍물소리가 가라앉은 사이에는 영어로 새로 짠 마당극 해방의 소리연습을 하느라 여전히 마룻바닥에 구슬땀이 떨어졌다. 풍물과 마당극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네 명, 혼자서 몇 사람의 역할을 하는 그들은 재미 한청련의 각 지역에서 문화패를 책임지고 있는 일꾼들이었다. 리더 격인 정승진 뉴욕 비나리 단장과 나성의 김준, 산호세의 이범식, 그리고 뉴욕의 조민선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9월에 유럽으로 파견될 문화선전대원들이었다. 우리나라 민족민주운동사상 처음으로 주요 유럽 7개국에서 지배자의 문화가 아닌 민중의 문화를 제대로 알리겠다는 의지가 땀방울로 흘러내렸다. 모두 이십대 초중반인 대원들은 살인적으로 이어진 한 달여의 연습을 거쳐 마침내 유럽을 향해 모든 준비를 마쳤다. 물론 그 사이에 뉴욕의 회원들은 공연에 쓸 각종 현수막과 걸개그림 등을 만들고 대원들의 연습을 뒷바라지 하느라 대원들 못지않은 구슬땀을 쏟았다. 국제연대요원들과 윤한봉 선생은 한 달여의 일정과 현지 책임자 문제, 경비며 기타 수많은 세부사항을 짜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유럽으로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재미 한청련에서 유럽에 문선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 해의 사업계획을 짜면서 이미 확정된 것이었다. 윤한봉 선생은 그 의의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큰 변수가 없는 한 올해 남북의 조국이 유엔에 분리가입하게 될 것이다. 이 사안은 남부조국의 운동진영으로서는 전력을 다해 반대투쟁을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여건이 있다. 그러나 해외운동을 하는 우리는 유엔 분리가입에 대하여 코리아 문제에 연대하는 많은 타민족 형제들에게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 그 동안 우리는 항상 조국은 하나다, 라는 입장에 서 왔는데 국제적으로 두 개의 조국이 인정되는 사태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하지 않는다면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된다. 조국의 운동권이 할 수 없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전활동을 하자. 그것은 국제사회에서 조국 민족민주운동의 존엄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문선대는 미국에서 다섯 명, 그리고 재유럽 한청련에서 두 명, 총 일곱 명으로 짜여졌다. 미국에서 가는 다섯 명 중에 위의 진짜 네 명 외에 내가 선발되었다. 윤한봉 선생께 은근히 가고 싶은 속내를 비치기도 했지만 낙점을 받은 최종이유는 당시 내가 거의 구십 킬로에 육박하는 거구였기 때문이었다.

용탁이는 한청련에서 최고로 출세한 짐꾼잉께, 그리 알드라고잉.”

실로 한 달간의 유럽일정에 따르는 짐은 많고도 많았다. 두 벌씩 챙긴 풍물에, 프로젝션, 슬라이드 쇼를 위한 장비, 현수막, 타민족 형제들에게 줄 유인물 등속, 선전단추, 개량한복, 경비를 아끼기 위한 고추장, 된장 따위에 개인 짐까지, 만약에 짐꾼이 없다면 선전대원들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래서 풍물도 마당극도 못하는 내가 영광스럽게 대원의 한 사람으로 끼게 된 것이었다.

 

나는 바로 그 전 해에 한청련에 가입한 신출내기였다. 괴로운 결과를 낳았던 87년 대선이 끝나고 나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에서 이년 동안 소규모 장사를 하며 지낸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동포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퀸즈칼리지라는 학교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나는 한청련이라는 단체도 윤한봉이라는 이름도 알지 못했다. 학교에 입학한 그 해 가을, 뉴욕에서는 남북영화제가 열렸다. 남북한의 영화인들이 뉴욕에 모이고 내가 다니던 학교 영화관에서도 북한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놀라움과 흥분에 싸여 나 역시 영화를 보러갔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도라지꽃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는 감동과 격정에 휩싸여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데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극장의 맨 뒷줄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의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그들이 부르던 노래는 조국은 하나다라는 노래였다.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는 하나의 조국, 백두산의 정기가 내리어로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마치 서울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일단의 젊은이들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그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내 차에 한 장의 유인물이 꽂혀있었다. 유인물의 제목은 유엔 분리가입 저지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유엔 앞 단식농성이었다. 농성은 101일부터 보름간 진행되었고 내가 유인물을 받은 날은 거의 농성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놀라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반가움을 안고 나는 다음날 유인물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다. 퀸즈의 잭슨하잇이라는 동네, 히스패닉계가 주로 사는 우범지역 거리, 허름한 건물 이층이었다.

뉴욕 한청련과 만나자마자 나는 곧 아, 이들은 진짜구나, 라는 생각이외에는 들지 않았다. 어렵게 들어간 학교 대신 한청련 사무실로 출퇴근을 했고, 회원들 간의 가족과도 같은 끈끈한 동지애에 나도 곧 감염되어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쁨에 빠졌다. 한청련은 실로 놀라운 단체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헌신성이었다. 그들은 늘 조국에서 피를 흘릴 때 우리는 열 배 스무 배로 땀을 흘리자’, ‘뺀들바우가 아닌 곰바우가 되자는 말을 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다투어 몸을 던졌다. 조국에서 학생운동의 맛을 보았던 내게 한청련의 활동모습은 충격과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의 뿌리에 윤한봉이라는 낯선 인물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두어 달쯤 지나 뉴욕에 온 윤한봉 선생을 처음 만나자마자 나는 그 분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며칠 동안 여러 이야기를 듣고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책에서만 본 위대한 혁명가를 만났음을 깨달았다. 왠지 내게는 윤한봉 선생의 모습에 호지명의 이미지가 함께 보였다. 한편으론 어려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때로 보이는 어린애와도 같은 무구함이라니. 그에게서 나는 삶의 모든 순간을 조국의 운명과 함께 하는 진정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보았던 가장 눈부신 사람, 그것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있는 윤한봉 선생, 아니 그 때 불렀던 대로, 합수 형님이다.

 

어쨌든 나는 한청련에 들어간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문선대의 일원이 되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청련의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 했으므로 비행기는 완행 인도행 비행기였다. 완행이라 함은 인도까지 무려 48시간에 걸쳐 가면서 유럽 주요도시마다 멈추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내리고 타는 손님들과 인도까지 가는 승객 모두 제일 값싼 여행을 선택한 이들이 이용하는 비행기였다. 비행기 안은 매캐한 카레 냄새가 퍼져있고 믿기 어렵겠지만 화장실 문은 떨어져 옆에 기대어 있었다. 그 덕에 가지고 타는 짐에는 너그러워 우리는 엄청난 짐을 마치 시골버스에 실 듯이 쌓고 갈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박희원, 이금윤 부부회원이 전 일정을 함께 하기로 했다. 국제연대요원인 두 회원은 독일에 유학 중인 학생이었다.

유럽내 이동은 모두 자동차로 하기로 했다. 그게 가장 싼 수단이었는데, 수명이 한 달 쯤 남은 완전 고물 승합차를 사서 이용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헐값에 산 그 고물차는 기적처럼 일정 내내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차에 짐을 싣고 가다가 배고프면 공원에서 라면을 삶아먹고 밥을 지어먹으며 유럽을 떠돌기 시작했다. 행색은 영락없는 집시의 그것이었지만 대원들 가슴 속에는 최초의 문선대 활동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공연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광주천’, ‘임을 위한 행진곡등의 노래로 이루어진 1부와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마당극, 그리고 풍물놀이였다. 공연은 장소와 시간에 맞게 탄력적으로 조절하였다. 예를 들면 첫 번째 공연지였던 룩셈부르크에서는 실망스럽게도 무대가 조그만 술집이었다. 진보적인 인사들이 모이는 호프집 비슷한 곳이었는데 부득이 노래공연만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는 이틀이나 공연했지만 장소의 여건상 풍물을 치며 길놀이 형태의 공연만 여러 차례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 외의 나라에서는 대개 우리가 준비한 내용을 알차게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룩셈부르크를 시작으로 벨기에와 독일, 아일랜드 등지에서 꽤 큰 규모의 실내극장을 이용하여 수많은 유럽 진보 인사들에게 조국의 현실과 문화를 알릴 수 있었다. 현지의 진보인사들은 주로 공산당이나 사회당원들이 많았고 그들은 조국의 학생운동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강경대열사의 죽음과 이어진 분신으로 학생운동은 세계 진보운동에서 가장 놀랍고 뛰어난 한 부분으로 관심의 초점이었다.

공연 시작은 애절하고도 가슴을 에는 광주천의 독창으로 시작되었다. 뛰어난 가창력의 정승진단장이 흘러라, 네 온갖 서러움, 더러운 네 굴욕과 수모라고 노래를 시작하면 나는 준비한 슬라이드를 무대로 비추어주었다. 광주의 학살과 투쟁이 담긴 사진들을 보며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이어지는 마당극에서 미국에 대한 해학과 풍자는 웃음을 터뜨렸고 극 말미의 죽은 영이 흰 천을 가르는 서러운 장면에서는 푸른 눈의 타민족 형제들도 눈물을 뿌렸다. 수없이 많이 공연을 치르면서도 나 역시 이 장면에서는 예외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신나고 박력있는 풍물과 반전반핵, 양키 고홈의 구호를 제창하며 공연이 끝나면 어느새 관객과 우리는 민족과 인종을 넘어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는 뜨거운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우리의 공연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냈다. 작은 규모에 실망하는 눈빛이던 이들도 공연을 보고나면 진정으로 열광하고는 했다. 그것은 우리의 진정성과 더불어 우리 민중문화의 우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 정치색을 거세한 풍물패의 세계진출이 여러 성공을 거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열광적인 반응에 고무된 우리들은 극도의 열악한 환경과 체력적인 한계를 이겨내며 공연을 이어갔다. 자세한 이야기를 쓰자면 한 권의 책이 될 터여서 몇 개의 에피소드만 이야기하겠다.

우리는 공연 중에 몇 차례 필리핀의 민족민주전선(NDF)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유는 그들이 유럽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한 국제연대조직을 건설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진보적 인사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운동이 필리핀 운동이었다. 조국운동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인사들이 NDF의 운동에 간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사들 중 여럿이 우리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아 연대의 초점을 조국으로 돌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아일랜드의 젊은 성공회 신부이며 필리핀 연대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한 분이 적극적으로 그런 의사를 표시하자 NDF 측에서 크게 당황하였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의 공연은 특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무장한 영국군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여전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아일랜드 해방군(IRA)의 근거지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비슷한 민족적 정서로 인해 대단한 감격 속에서 끝났다. 공연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난 신부님(애석하게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의 집에서 그날 저녁을 먹고 잠을 자게 되었는데, NDF의 요원 몇도 함께 자리를 하였다. 식후의 술자리에서 양국의 운동가요들이 불리게 되었는데 우리의 노래가 애절함과 박력으로 필리핀을 압도하였다. 공연의 감격이 가시지 않은 신부님은 몹시 흥분하여 우리에게 적극적인 연대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훗날 들은 바로는 이 일로 유럽 NDF가 긴급히 회의를 소집할 정도였다고 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에서의 일정은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르 휴메니떼가 주최하는 축제 기간으로 잡혀 있었다. ‘르 휴메니떼는 공산당 기관지이면서도 백만 명의 독자를 가진 일간지였고 프랑스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었다. 신문이 주최자이지만 르 휴메니떼 축제는 전 세계 진보진영의 축제였다. 축제장은 파리 한 복판의 공원이었는데 커다란 공원을 통째로 세내어 며칠 동안 흥겨운 잔치를 이어갔다. 공원 한 가운데의 커다란 공간은 팔십 여 개 나라에서 초대되어 온 진보적인 매체나 단체의 부스들이 긴 타원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초대된 단체는 아니었다. NDF의 부스에 곁방살이로 짐을 푼 우리는 흥분에 휩싸였다. 수십만은 될 것 같은 공원의 파리지앵도 그렇고 한꺼번에 팔십여 진보적 국가의 단체들에게 우리의 문제를 알릴 수 있다는 기대에 우리는 조급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풍물이었다. 어느 시위현장에서도 우리의 풍물을 따라올 악기는 없었다.

커다란 걸개그림을 즉석에서 만장으로 개조하여 내가 들었다. 머리띠를 두른 젊은이가 주먹을 뻗어 ‘Us troops out of Korea'라고 외치는 그림 위에 한반도 기를 사이에 두고 구 남녀가 춤을 추는 그림이었다. 그 뒤로 강력한 우리의 풍물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원의 모든 시선이 단숨에 우리에게 쏠렸다. 처음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도 곧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며 우리 뒤를 따랐다. 박수와 터지는 함성, ’코리안 무브먼트 넘버원이라고 외치며 엄지를 들어 보이는 사람 등으로 우리는 유럽 공연 중 최고의 흥분에 휩싸였다. 맞바람을 맞으며 걸개그림을 들고 가는 나도 쏟아지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수많은 부스들을 지나 거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한 무리의 우리를 닮은 사람들이 우리 앞에서 손바닥이 깨지라고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 있는 부스에는 놀랍게도 한글로 로동신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순간, 나도 멈추고 풍물소리도 잦아들었다. 이 갑작스러운 남북의 해후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 눈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 때 어느 타민족 형제가 ‘Korea is one'이라고 구호를 외쳤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파리의 하늘 위에 오랫동안 울린 함성이었다.

그 날 파리에 망명해 있던 홍세화 선생이 오셨다. 전설 같은 이름만 듣던 선생은 마음씨 좋은 국어선생님처럼 편안했다. 흥분과 감격의 공연을 마치고 NDF 부스 뒤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로동신문에서 온 분이 보자기에 무언가를 싸왔다. 열어보니 김치와 인삼주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여야 했다. 문선대 활동원칙에 유럽에서 접할 수 있는 북부조국 인사들에 관한 것이 있었다. 노태우 정권에게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기 위하여 북부조국과는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홍세화 선생은 정으로 가져온 음식이니 고맙게 받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논의 끝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째 김치 맛을 보지 못했던 우리가 비공식(?)적으로 김치의 일부를 섭취했음을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파리에서의 그 해후는 내가 살면서 가진 가장 극적인 한 순간이다. 너무도 압도적인 순간이어서 남은 일정 내내 어떤 열병에 빠진 것 같은 느낌으로 지냈다. 영국에서는 막 유학을 온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씨 집에서 맛있는 커피를 대접받았고 독일에서는 황석영선생의 즐거운 입담에 취한 저녁식사 자리도 가졌다. 모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 달 여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정승진 단장은 호주 공연을 위해 곧바로 떠나고 나는 김준, 이범식 회원 등과 백악관 앞에서 항의 단식농성을 하는 것으로 해방의 소리의 대미를 장식하기로 했다. 사흘간 단식 후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유럽을 가보았고 한 달 내내 유럽에 널린 미술관이며 박물관 따위에는 근처도 못 가본 일정이었지만 내 젊은 날에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세월은 흘러 정승진 단장은 여전히 뉴욕의 문화패 비나리의 단장이면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고 김준 회원은 나성에서 살고 있다. 다른 문선대 동지들은 어느 새 소식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인생의 환한 빛이었던 합수 형님은 병마에 가시고, 형님께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나는 삼류 작가가 되어 덧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괴로운 시절, 한없이 그립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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