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홍시같은 사람, 윤한봉 (나창진)2018-12-21 10: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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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같은 사람, 윤한봉

 

나 창 진/극단 토박이 단원

 

빠알갛게 잘 익은 홍시를 볼 때 마다 선생님이 생각난다. 꽁꽁 얼린 홍시를 천천히 녹여먹는 법을 선생님께 배웠다. 난 손님이 오면 가끔씩 얼린 홍시를 대접하곤 한다. 얼린 홍시는 늘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야 그림이 나온다. 홍시의 운명은 그런 것이다.

선생님은 가끔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해맑게 미소를 날리며 한마디 툭. “쓰잘데기 없는 소리!” 그 나이에 그런 미소를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개가 진주를 품듯, 선생은 격정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 해맑은 미소를 품었다.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신 앞에서 멋진 미소를 지을 수 있는가?

선생님은 시집 한 권 낸 적 없지만 시인이었다. 팔딱 팔딱 살아 숨 쉬는 활어 같은 혀는 늘 싱싱한 언어를 쏟아냈다. 공적인 일에 선생의 혀는 바람을 가르는 칼이었고 사적인 일을 얘기할 때는 소떼를 몰고 가는 피리였다. 대쪽 같은 성품 안에 깃든 지극한 서정. 그 살아있는 언어를 훔치고 싶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의 언어는 생생하고 쉽다. 절묘한 비유와 재치있는 농담에 얼마나 포복절도 했던가?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으면 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들 지당한 공자님 말씀을 하실 때, 죽기를 각오한 선비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이었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후벼팠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내뿜는 포스! 노래 부르는 것을 딱 한 번 봤다. 마이크를 뽀사버릴듯이 꽉 쥐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절규였다. 삶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립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온몸의 핏줄을 쥐어짜며 부르던 그 격정이.

징역살이 할 때 벽이 다가오는 환각을 체험한 분도 있다고 들었는데 선생님은 어떠셨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박정희를 어떻게 쫓아낼 것인가 궁리하고 상상하다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가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다고. 당신은 그렇게 평생을 감옥에서 지낼 수도 있노라고. 그 정도면 병이지 싶은데 아무튼 선생님은 별 희한한 방식으로 억압과 맞섰다.

선생님이 잘 걷지 못하실 무렵, 꽃과 케이크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아내 생일날이었을까. 꽃과 케이크를 수줍게 받으시고 머리를 긁적이시더니 슬그머니 문을 닫으셨다. 그날 밤, 등 뒤에 꽃을 감추고 계시다가 슬그머니 내미셨을까?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셨을까? 설마 그때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르셨을까?

밥 한 번 먹자고!” 선생은 한 번 말을 내뱉으면 기어코 밥을 사고야 만다. 선생님께 얻어먹은 밥그릇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얻어먹은 피자는 또 몇 판인지.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벼라별 티켓들을 팔아주시고, 남들이 꺼리는 온갖 뒷바라지는 도맡아 하시고, 선생님은 별 가진 것 없이도 늘 우리들의 물주였고 비빌 언덕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전생에 빚을 많이 졌나보다. 이승에서는 빚만 갚다 가셨다.

 

세상 살아가면서 멋있는 사람 하나 만나기가 쉽지 않다. 사내로 태어나 세상과 맞짱 뜨고 거침없이 살다가셨으니 멋진 한세상! 홍시를 볼 때마다 늘 자신의 몸을 홍시처럼 대주던 한 멋있는 사내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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