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남편의 선배, 합수 형은 내게도 형님이었다 (한윤희)2018-12-21 10: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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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선배, 합수 형은 내게도 형님이었다

 

                                                                                                                                                                                                          한 윤 희

남편(고현주)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한봉이 형 돌아가셨어."

"? 누구?"

"윤한봉 형 말야."

"어머! ?"

"수술 후 돌아가셨어."

한 달 전, 목포로 요양차 이사 가신 한봉이 형님 댁을 다녀왔었다. 연세가 59세인데도 남편이 형이라 부르니 나도 덩달아 형님이라 부르곤 했다. 실제론 선생님이라 불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우리에겐 선생님, 아저씨, 형님, 형이셨다. 나이가 어린 나에게도 늘 오시었어요~” 하고 존댓말로 말씀해주셨다. 우리 석제, 가빈이 많이 컸다고 신기해하시고 목포집 자랑도 하시고 부인인 신경희(소화라 부르곤 하셨다) 언니가 맛있게 해준다고 낚지도 사다놓고, 바지락, 방게도 사다 놓고

우리가 목포에 왔다니 광주 사는 막내 여동생(울 애들은 광주 큰엄마라 부른다)경자 형수가 무안 별장으로 우릴 불렀다. 우린 그날 맛난 음식과 바다가 보이는 매실 농장 앞에 세워진 오래된 고택을 리모델링한 별장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형님은 폐기종으로 고생하시면서도 늘 환하게 웃으시면서 "나 이식수술하면 괜찮아걱정들 말어" 하시곤 했다.

늘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시던 분웃는 모습을 보면 순박한 시골 소년 같았다. 하지만 그의 민주운동의 역사를 보자면 대쪽 같았다. 구부러짐이 없었고, 호남사람이면서 유일하게 김대중의 욕심을 꼬집곤 하셨다. 그래서 난 그분이 좋았다. 종종 운동권들을 가까이서 대하면 그들의 편협함에 실망스럽곤 했지만 이 분 만은 달랐다. 물론, 세간의 운동권의 폄하에 동조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유신정권시대의 무력함과 불안감, 전두환의 정권 탈취 무렵의 긴장감과 두려움, 분노,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의 분노감, 좌절감 등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그 시절 젊은 혈기로 철옹성 같았던 권력에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같았던 그 약한 힘들이 모여 민주화를 이루었는데 언론에서 떠드는 경제가 어렵다는 말에 (우린 지금 경제대국에서 산다. 외국에 나가봐라 돈쓰고 다니는 사람들 다 한국사람들이다.) 놀아나고 있다.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전두환 시절이 좋았다면서 한국 사람은 잡아 눌러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무지렁뱅이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됨을 시작으로 그의 민주화 운동은 굽힘이 없었다. 그러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나고, 전두환은 수배를 내리자 도피생활을 마감하고, 배에 오른다. 이때, 미국으로 이주하게 도와주신 분이 바로 여수 형님 최동현 선배이시다(우리 애들은 여수 큰아빠라 부른다).

미국에 가서도 우리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또 고생하고 있는 동지들을 잊지 않기 위해 침대에서의 잠과, 잘 때도 허리띠를 풀고 자는 법이 없었다 한다. 미국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활동하실 때 만난 분이 현재의 부인이다. 나이는 14살 차이나고, 연약하지만 미국에서 인연으로 두 분이 결혼하셨고, 울 아들 간난쟁이일 때 광주 무슨 공원에서 전통혼례로 했었다. 이때도 손님이 무척 많았다.

유난히 울 남편을 이뻐하셔서 늘 호칭이 우리 현주였다. 그런 형님이 떠나가니 울 남편 어깨가 많이 쳐진 듯하다. 우리 부부는 참 많이 울었다. 그 분의 따뜻함, 순수함, 순박함, 열정, 정의감 등도 그립고 환한 미소도 그리워서 울었고, 혼자 남아 아이도 없이, 한 움큼의 나약한 몸을 가지고 남편 없이 살아야 할 형수가 불쌍해 울고오직 이 세상에 존경하는 사람은 오빠뿐이고, 오빠가 필요로 하는 건 다 해주고 싶어 하고,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 오빠가 싫어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 남편보다도 더 오빠를 사랑한, 경자 형수가 불쌍해 울었다.

장마가 주춤한 광주 5·18 묘역은 너무 뜨거웠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까지 우리를 다 녹일 듯했다. 그 뜨거움에 마음도 녹았고, 눈물도 녹았다. 우린 그렇게 한봉이 형님을 보냈다. 본인조차 죽음을 느끼지 못하고 가신 (수술 후 회복 단계에서 돌아가셔서 마취가 안 풀렸었음) 그 분을 우린 보냈다. 또 한 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아까운 사람! 그 한분을 우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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