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합수 윤한봉 형을 생각하며 (유홍준)2018-12-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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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수 윤한봉 형을 생각하며

 

유 홍 준/명지대교수, 전 문화재청장

 

내가 합수 형을 알고 지낸 것은 30년이 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합수 형을 세 번 다르게 만난 것 같다. 한번은 교도소에서 감방 동기로, 한번은 미국 민족학교 초빙강사로, 또 한번은 귀국 후 주로 전화로 만난 것이다.

 

1

 

살아생전 나는 합수 윤한봉 형을 한봉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그를 생각하는 글을 쓰려니 나도 모르게 합수 형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당신 생전에 내가 비록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지만 그 때에도 내 마음속의 감정은 항시 한봉이 형이었다. 그에게는 내가 형이라고 느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합수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744, 서울구치소에서였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구속되었는데 당국이 워낙에 중죄인 다루 듯하여 긴급조치 사범에게는 플라스틱 세모 딱지를 가슴에 붙여놓고 요시찰로 철저히 감시하였다. 감방의 배방에서도 두 방 건너 하나씩 배치하여 서로 통방을 못하게 하였다.

그 때 나는 5사하 9방에 수감되었고, 합수 형은 같은 5사하 4방에 있었다. 당시 내 옆방인 9방에는 문인간첩단의 누명을 쓴 임헌영 선생이 계셨고, 7방에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백기완 선생과 함께 들어온 방배추 형이 있었다. 1방에는 김낙중 사건과 연루된 노중선 형이 수감되어 있었고, 12방에는 박형규 목사님이 계셨으니 우리 사방은 꾀나 주목받는 요시찰 중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도 교도소 안에서 얼굴을 마주 칠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통방의 달인이어서 각 방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고, 교도소 안의 소식통이어서 한봉이 형의 이름도 알 수 있었고, 밖에서 들어온 소식을 각 방에 전달하느라고 항시 감방 안에서도 분주했다.

그래서 나는 교도관에게 자주 주의를 받곤 했다. 당시 교도관이 순찰할 때면 쇠창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이 놈이 도대체 무엇을 하나 살피고 무슨 동향보고를 쓰는 것 같았는데 나는 통방을 하려고 뺑끼통에 있다가 자주 들켰다. 그 때마다 교도관은 똑바로 앉아 있으라는 주의를 주면서 하는 말이 같은 학생이라도 4방 학생은 항상 정좌하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는데 자네는 왜 궁둥이를 붙이지 못하고 똥마린 강아지처럼 오가느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게 합수 형과 나의 차이점이다. 합수 형은 몸가짐과 매사에 항시 그렇게 진득했다. 그러면서도 농사꾼같은 천진성과 인간미 넘치는 가벼운 미소, 그리고 말과 몸짓과 행동에 전혀 가식이라는 것이 없어 합수 형을 한번 만나면 누구든 그의 진실성에 매료되거나 존경을 표하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놈의 통방 때문에 마침내 징역이 깨져’ 5사를 떠나 9사로 전방 가게 되었다.

‘4방 학생윤한봉의 얼굴을 내가 본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출소한 뒤였다. 합수 형의 이름은 교도소에서 알게 됐고,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으면서 그가 전남대 총책이라고 들었지만 서로 만난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었는데, 나중에 출소해서 만나니 서로 교도소 같은 사방에 있었다는 사실과 같은 67학번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만나자마자 말을 놓고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 얼굴을 대했을 때, 그가 내게 하는 첫 인사가 자네가 9방에 있던 홍준이인가, 아이고 이 징한 사람, 자네가 전방가고 나니까 5사하 사방이 얼마나 조용하던지 적막강산이더라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리고 합수 형이 남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나하고 감방 동기인데 이 자는 하도 통방을 많이 해서 쫒겨간 친구라는 말을 매김씨처럼 붙이곤 했다. 그런 말속에서 나에 대한 그의 정이 깊은 것을 느끼곤 했다.

 

2

 

내가 합수 형과 깊은 정을 나눈 것은 미국에서였다. 내가 합수 형을 뉴욕에서 만난 것은 198612월이었다. 당시 미국의 아세아문화재단에서는 아시아의 미술평론가 몇 명에게 6개월간 미국 미술계를 자유롭게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는데 한국에서는 나를 초청하여 미국에 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 갈 때 혹시 몰라서 80년대 민중미술의 진행과정과 주요 작품들을 담은 슬라이드 약 300장과 내가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강좌 때 사용한 한국미술사 슬라이드 약 1천 장을 짐 보따리 속에 넣고 갔다.

미국에 가서 얼마간 내가 볼 일을 보고 합수 형을 만나보려고 수소문한 끝에 뉴욕의 민족학교로 찾아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사람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합수 형은 나 역시 그런 자세로 대하여 처음엔 다소 당황스러웠다. 기분 나빠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가 미국에 망명한 이후 겪었을 여러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듣던 말던 내가 출소한 이후 살아온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풀어놨다. 그리고 내가 현장에 있었던 민중미술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준비해간 민중미술 슬라이드를 보여주자 합수 형은 그제사 반색을 하면서 내 얘기에 홀딱 빠졌다. 신학철 <한국근대사>를 보면서 입을 쩍 벌리기도 하고, 임옥상의 <들불>을 보면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고, 박불똥의 <끌려가는 전두환>을 보면서는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더니 이것을 우리 민족학교 청년들에게도 보여줄 수 없냐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 나의 민족학교 순회강연이 시작되어 워싱턴,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센프란시스코, 심지어는 덴버까지 가게 되었다.

합수 형이 미국에 망명하고서 그곳 청년들을 규합하여 만든 조직이 한청련이었다. 그리고 각 도시의 한청련 본부에는 민족학교가 있었다. 합수 형은 미국 동포사회에서 고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 운동을 지원하면서 마치 일제시대에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듯이 미국에서 민주·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합수 형은 역시 조직의 명수였다. 청년들을 추동하여 운동에 앞장서게 하고 어른들은 물심으로 이를 지원하는 체제를 만들어 동포들에게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길을 같이 찾아가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합수 형은 특히 문화운동에 마음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것은 합수 형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 광주의 문화운동에서 얻은 경험을 그대로 실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합수 형은 미국의 민족학교에서 베푸는 모든 행사에 항시 마당극, 깃발, 그리고 걸게그림을 동원하고 있었다. 오윤과 홍성담의 그림을 복제하여 행사장 주위를 두르기도 했다.

더욱이 당시는 6월 항쟁 직전이어서 동포사회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고국에 관심이 많았다. 또 그 때 민중미술가인 김용태(현 민예총 이사장) 형과 판소리 소리꾼 임진택 형도 마침 뉴욕에 와 있어 합수 형은 우리 세 사람을 묶어 문화강좌 프로그램을 만들어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동부지역 각지로 순회공연을 시켰다. 나중에는 통일운동가 조성우 형도 민족학교에 합류했다.

6월 항쟁도 끝나고 나도 초청기간이 다되어 서울로 돌아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합수 형이 나에게 3개월만 더 미국에 머물며 미주 민족학교에서 한국문화사를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합수 형 말이 동포 사회의 고국에 대한 인식은 주로 즉흥적이고 정치현안적이어서 그 때뿐인 면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일꾼을 일구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심성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예술 프로그램이 제격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합수 형 하는 말이 해외 민족운동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민주화운동에 긴장감이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고국에서는 데모하다 잡혀가면 유치장도 가고, 감옥도 가고, 고문도 당하고, 군대로 끌려가기도 하며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인데 미국에서는 데모한다고 누가 꼴밤 한방 때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입으로만 민주와 투쟁을 소리 높이 외치면서 허풍떨며 자기 과시를 일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즉 진정성의 문제, 심성의 문제가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교포사회에 여러 분파가 생기고, 회원들의 이합집산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동포사회에서는 데모에 많이 참가해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자신의 심성을 민주·민족·통일의 정신 속에 깃들게 하는 일꾼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화 예술운동과 학술 중에서도 역사인식에 대한 강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각지의 민족학교를 돌며 역사 문화 강의를 해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합수 형의 그런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에 다시 한 달을 머물며 순회강연이 아니라 강의를 하게 되었다.

로스엔젤레스 강의 때 일이다. 나의 강의에는 언제나 슬라이드가 동반되었는데 다산 정약용을 이야기할 때면 으례 강진의 다산초당 사진을 비추었다. 다산초당에서 내려다 본 구강포를 내려다보는 풍광은 풍광 자체가 아름답고 편안한 가운데 처연한 분위기가 있어 관중들이 좋아하는 슬라이드이다.

그날 강연이 끝나자 합수 형은 새삼스레 내 손을 꼭 잡고는 고맙네, 자네 덕분에 내가 미국으로 망명온 뒤 처음으로 고향 사진을 보았네, 다산초당에서 내려다본 구강포 건너 칠량이 바로 내 고향이라네.” 그 말끝에 그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것이 내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남도답사 일번지에서 윤한봉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쓴 이야기의 내력이다.

민족학교의 한청련 회원들은 심성이 맑고 성실해서 가족 같았다. 그러나 합수 형 말대로 정치의식이 아니라 민족정신을 정서적으로 심화시키지는 못하여 일상의 대화에서는 그 의식과 어긋나는 것이 자주 보였다. 한 예로 그들은 어찌되었든 미국인인데 미국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한국 내에서 일어나는 동향에 대해서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국 내 흑인이나 소수민족의 인권운동 같은 것에 관심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이점을 합수 형 에게 말하자 그는 동감하면서 그럴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시카고에는 제삼세계 미술의 하나로 손꼽히는 시카고 43번가의 존경의 벽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존경의 벽1960년대에 흑인들이 지역사회의 인권을 위해 열심히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벼락에 그린 것으로 나중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20세기 현대미술사에서 저항의 미술로는 1930년대 멕시코의 시케이로스, 독일의 케테 콜비츠, 중국에서 노신이 일으킨 목판화운동, 미국의 벤샨이 벌린 지방주의 미술, 그리고 1960년대 미국의 도시벽화,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이 큰 산맥을 이룬다는 내 생각을 말해주고, <존경의 벽>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합수 형은 즉시 시카고로 연락해서 43번가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했더니 그곳 회원들이 모두 흑인이 사는 위험지역이라 가기 힘들다고 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시카고로 가서 그야말로 위험을 무릅쓰고 43번가로 갔다. 너무 반가와 <존경의 벽>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같이 간 한청련 회원이 황급히 나를 잡아당겨 차에 태우고 줄행랑을 놓았다. 영문을 알 턱이 없는 그 동네 흑인들이 우리를 무슨 첩자나 되는 양 죽일 듯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미국 빈민가의 도시벽화는 우리들이 지향하는 인간적 삶, 평화, 평등의 가치를 그곳 민중들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었다. 민족학교 사람들도 모두 여기에 공감하였다. 합수 형은 각지의 민족학교에 지시하기를 각 도시의 도시벽화를 찾아보라고 했다. 내가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는 이미 그곳 주민들을 만나 우리들이 그곳 빈민가를 답사 온 이유를 설명하고서 찬찬히 벽화들을 견학할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벽화는 살해된 흑인 지도자들의 초상을 벽면 가득히 그려 넣고는 너희들은 혁명가를 죽일 수는 있지만, 혁명은 죽일 수 없다.”라고 써놓은 것이었다. 이후 민족학교 사람들은 자기 도시에 손님이 오면 이 도시벽화들을 구경시켜주는 것이 하나의 일과로 되었다고 한다.

민족학교 순회강연을 마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자 합수 형은 나에게 다시 한 달을 더 머물다 가라고 했다. 이번에는 강연이 아니라 열흘 뒤 그의 은사이신 문병란 시인이 여기로 오시니 선생님 모시고 자네가 좋아하는 미국 원주민 벽화를 보러 열흘간 네바다, 애리조나, 뉴멕시코로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게 내 강사료란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어 열흘간 벤을 타고 아파치, 나바호, 수우 족들이 남긴 700, 500년 전 암각화을 두루 답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찍은 슬라이드가 파일북으로 한 권이 넘어 나는 지금도 미술사 강의에 사용하고 있다.

 

3

 

합수 형이 귀국한 뒤의 이야기는 여기서 다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가 와병 중에도 아침 일찍 내게 전화를 걸었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아침 7시였을 것이다. 잠결에 전화가 와 받으니 합수 형이었다.

 

홍준이, 아이고 고렇게 쉬운 걸 여태 고민만하고 속을 앓았구먼.”

아니 갑자기 쉬운 게 뭐고, 고민은 또 뭔가?”

아침 한겨레신문 잘 봤네.”

무슨 기사가 나왔길래 아침부터 전화야.”

아직 못 봤구먼, , 그놈의 광화문 현판 자네가 떼버린다며.”

, 그게 신문에 났어. 이거 시끄럽겠구먼, 빨리 가봐야겠네.”

. 시끄러우면 어때, 고렇게 톡 떼버리면 그만인 것을 공연히 서울 갈 때마다 저것을 언제 떼나 속을 끓였네 그려. 자네는 확실히 징한 놈일세. 자네 징한 놈이라는 말뜻 아는가. 아무튼 내 30년 체증이 다 뚫렸네. 자네 고생 많네

 

그것이 합수 형이 내게 걸어온 마지막 전화였다. 그리고 합수 형이 타계하기 두어 달 전, 박형선 형이 유인태, 이강철 형 등과 우리 민청학련 사건 때 무료변호 해주신 홍성우 변호사와 고영구 변호사님께 감사의 뜻으로 신안 증도로 여행을 가기 위해 말하자면 민청학련 효도관광을 마련하여 목포에 간 일이 있었다. 이 때 합수 형은 몸이 안 좋아 목포에서 저녁 식사만 같이 하기로 하여 유달산 중턱 어느 한정식 집에서 합류했는데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합수 형이 우리 일행을 보자 반가와 자네들 왔까지만 말하고는 이내 기침을 시작하는데 10분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가리고 기침만 했다. 우리는 합수 형의 기침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합수 형의 기침은 끝내 그치지 않았고, 형수님께서 죄송해요, 안 되겠어요, 집으로 가서 쉬어야겠어요.” 하며 합수 형을 부축해 나갔다. 그것이 내가 합수 형을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합수 형의 부음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나직이 그를 전송했다.

합수 형! 편안히 가슈. 고생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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