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귀국 10년 맞은 윤한봉의 쓴소리2018-12-2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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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2003.06.말지인터뷰.hwp (32KB)

출처: 월간 말 2003.6

인터뷰주제:

인터뷰

귀국 10년 맞은 윤한봉의 쓴소리

(150쪽 ~ 155쪽)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광주는 긍지와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

글:이오성 기자 dodash @ digitalmal.com 허태주 기자 tjheo @ digitalmal.com

광주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버이날이자 부처님오신 날인 5월 8일. 서울을 떠날 때 맑고 화창하던 날씨는 광주가 가까워 올수록 흐려지더니 시내로 접어들자 아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5 ․18 광주민중항쟁 23돌을 열흘 앞둔 휴일의 광주거리는 한산했다. 택시기사에게 요즘 5 ․18분위기에 대해 물었더니 “그냥 축제죠. 뭐” 라며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광주에서 윤한봉 소장(55 ․ 민족미래연구소)은 하나의 섬이다. 5 ․18 광주항쟁의 주모자. 한국인 정치망명객 1호. 미국에서 해외동포운동을 부흥시킨 장본인. 이런 윤소장이 12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1993년 귀국한 후 한국의 민중운동진영에 대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해대자 이 나라 운동권의 일부는 그를 경원했다. 특히 그가 광주를 향해 쏘아붙인 반 DJ, 그리고 이른바 ‘호남지역주의’라고 표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상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경원은 곧 그에 대한 비판과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의 정치적, 물리적 고향인 광주에서 그는 어쩌면 ‘제2의 망명생활’을 자초한 셈이었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의 대답은 “나한테서 무슨 말을 듣겠다고···” 였다.

수창초등학교 부근의 낡은 3층 건물에 있는 그의 ‘민족미래연구소’사무실은 단정하고 깨끗했다. 우리는 ‘호남소외론’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호남소외론, 부끄럽고 황당하다

“황당한 이야기죠. 웃음이 나오는 게 호남이 노 후보에 대해서 90% 이상 절대적 지지를 해놓고 그게 지역주의라고 비판을 받으니까, 어떻게 합리화했느냐. ‘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산 출신 노무현에게 90% 이상 지지를 보낸 것이다. 그래서 자랑스럽다. 역시 광주다. 경선때 광주에서 노 후보 당선이 혁명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렇게 대가없이 노무현을 찍었다고 자랑했었거든. 그런데 지금 지역언론들이 호남소외론을 주장하면서도 그때 이야긴 안 해요. 부끄러운 게 뭐냐면 역대차별을 해소한다며 디제이 정권 동안 다른 지역의 반발까지 불러일으키면서 호남출신들을 각계 요직에 상당히 많이 발탁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들이 영남정권 때보다 잘했어야죠. 그런데 그들이 부패특권 정치의 주연 내지 조연으로 활약한 거예요. 지금 인사문제는 정권이 바뀌었었으니까 정리되는 과도기를 봐야 하는데, 초기 인사 몇 건 보고 당장 들고 나오는 건 설득력도, 정당성도 없어요.”

그는 “권력의 단맛을 본 극소수가 반대급부를 노리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광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호남소외론과 맞물리는 게 바로 요즘 나오는 문화수도론이에요. 노 대통령이 후보 당시 광주에 와서 유세하며 즉흥적으로 광주를 문화수도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 후에 노 후보는 문화도시 육성를 문화수도라고 했다며 말을 철회했어요. 그런데도 노 후보가 공언을 했고, 우리가 지지해 줬으니 육성을 해달라 이거예요.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나는 문화수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문화에 수도가 있어요? 그런데 언론에서 행정수도는 만들면서 왜 문화수도는 안만드냐고 떠들고. 문화수도 특별법을 만들어달라, 문화관련 기관을 광주로 옮겨달라,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겁니다. 이런 게 호남소외론하고 맞물리는 거죠. 그만큼 광주가 긍지와 자존심을 잃어버린 거예요.”

지역차별의 희생양인 만큼 노무현 정부가 조금 더 신경 써서 호남을 챙겨줬어야 되는 건 아닌가요?

“챙겨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죠.”

대북송금 특검 문제는 어떻습니까?

“나는 잘했다고 생각해요. 진상을 안 다음에 판단해야지. 진상을 알아보지도 않고 통치행위니 남북관계니 뭐니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면 안 되죠. 광주에서도 다수는 일단 관망하고 있어요.”

아직 초기입니다만,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를 해주신다면요?

“아직 기대가 많이 남아 있지만, 이제 어떤 우려가 구체적으로 생기고 있어요. 예를 들면 이라크 파병 결정이라든지, 신뢰의 문제와 지혜의 문제는 다른 거예요. 노 대통령은 자꾸 현명한 판단이라며 지혜를 이야기하는데, 문제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겁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그의 우려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남북관계나 대미관계가 불안해지고 있는 겁니다. 이를테면 북이 베이징 3자회담에서 핵 보유를 시인한 가운데 지난달 열린 장관급 회담의 공동보도문 내용이 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요. 비핵화선언도 없고. 핵 문제가 남의 일인 것처럼 지나가고 있어요. 우리의 의사만 관철시키면 되는 게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도 사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제네바합의 때도 그랬지만 정보마저도 제때 받지 못했어요. 미 ․일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만으로 국민들은 혼란에 빠져 있잖아요. 그러면서 뭘 관철을 시켜요. 이러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결정이 내려진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미국에 전군을 위임한 셈인데. 그 어려운 시기에 9차례나 만나서 남북합의서가 만들어졌는데, 비핵화선언은 지금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그는 제네바합의문을 보여주며 주요한 2개 사항을 상기시켰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일관성 있게 취한다. 양측은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

제네바 합의에도 이렇게 돼 있잖아요. 어떻게 하든지 북이 핵을 포기하도록 해야죠. 그때 당시 합의문 내용 중엔 ‘본 합의문이 대화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남․북대화에 착수한다’는 내용도 있어요.”

북핵문제 못 풀면 남핵 무장 요구 거세질 것

노 정부의 미국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당선자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은 분명히 친미적 자주를 하겠다고 밝혔잖아요. 그게 이라크 파병 등으로 관철된 거지요. 북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됐을 때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처해야 하는데, 지금 정부가 대책이 있는가. 이를테면 필연적으로 일본은 핵 무장을 할 거고, 대만 역시 핵무장이 가능할 텐데 우리는 대책 없이 평화나 외치거나 미국의 핵우산 보호 아래서 안주할 겁니까? 미국은 이제 핵을 소형화시켜 실전무기로 사용하려 할 겁니다. 그럼 핵무기 제조과정에서 새로운 군비경쟁이 심화되는 거예요. 결국 사회복지 예산이 삭감되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로 이어지겠죠. 그렇게 되면 남에서도 핵 무장 요구가 강력해질 겁니다. 그 요구는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6 ․ 15 기본 합의서에서 이야기한 대로 국가연합 같은 단계적 접근이 가능하겠는가. 끔찍한 예로 서해교전이 다시 벌어질 경우 어느 한 쪽이 핵을 가졌다면 어떻게 전개됐을까. 무섭고 끔찍하죠.”

6 ․ 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확실히 경색되었는데요.

“불안해요. 핵 보유 자체를 어떻게든 막아야지요. 미국의 강경정책에 강력히 저항하면서도 전쟁을 막기 위해 북에 압력을 넣어서라도 핵을 포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건 정말 판도라의 상자예요. 일본은 자고 나면 언제라도 핵을 가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잖아요.”

최근 폭발적인 반미분위기를 보시면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대단히 고무적이죠. 이번 이라크전을 통해서 처음으로 우리의 반전반미운동이 국제사회에 얼굴을 든 거죠. 다만, 이라크와 북은 다를 것이라는 점이에요. 북에 대해선 반미 ․ 평화운동의 가능성이 굉장히 낮아요. 우선 유럽쪽이 북의 인권문제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니까. 프랑스는 아직도 북과 수교하지 않고 있어요. 미국 의회에선 이라크 문제에 있어서도 비판은 있었지만, 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만장일치로 강경해요. 진보적인 상원의원들도 탈북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얼마 전 설문조사에서 30%정도가 미국에 위협을 줄 곳으로 알카에다와 북한을 꼽았고 또 53%가 북에 대한 공격을 찬성했습니다. 미국처럼 여론에 민감한 나라가 없어요. 이걸 어떻게 바꾸느냐. 국제연대하고 해서 막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미국 의회와 미국 시민사회를 어떻게 바꿔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해요. 이를 위해선 미주에 있는 1.5세, 2세들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미국 사회의 영향력이 있는 이들과 접촉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반전, 반미는 성과가 없습니다. 지난 2월에 민족학교 설립 20주년 기념식 때문에 미국에 갔더니 굉장히 우려하는 거예요. 우리 동포들이 영세한 자영업을 주로 하는데, 손님들이나 직장 상사들이 시비조로 북의 핵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는 거예요. 혹시 불매운동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요. 상대적으로 북에 대한 반감이 커지게 되는 거죠.”

정권의 대미 강경발언은 결국 해결책이 안 될뿐더러 재외동포 사회의 경우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북의 외교적 발표도 부시 정권을 상대로 하는 것과 시민을 상대로 하는 것을 달리해야 하는데 너무 싸잡아서 강경하게 나오는 게 많아요. 상식이 안통하는 이상한 나라로 인식하게 하지요. 북의 강경한 입장이 심정적으론 이해가 되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부시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은 미국의 시민사회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호남의 보수화?

다시 대화의 주제를 광주로 돌렸다. 윤한봉 소장은 광주의 ‘진보성’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대단히 강경한 어투였다.

“1970년대에는 광주지역이 굉장히 지니보적이었어요. 서울보다도 아파서갔죠. 그런데 1980년 이후부터 이지역이 보수화되고 있어요. 그건 5 ․ 18 때 호남인의 가슴에 남은 두 가지 상처 때문이에요. 하나는 전두환 ․ 노태우 학살원흉과 그들이 만든 민정당. 이들은 철천지 원수가 됐죠. 당의 이름이 바뀐다 하더라도 광주에선 절대 안 돼요. 이건 지역주의 이전의 문제예요. 내 가족을 죽인 원수니까 말입니다. 두 번째로 5 ․ 18 당시 호남사람들은 타지역에서도 봉기가 터질 거라고 믿고 기대했어요. 그러면 이길 수 있다. 그런데 기대했던 타지역의 봉기가 없었죠. 그 과정에서 극심한 고립감을 겪으면서 느낀 거지. ‘아무도 못 믿는다, 전라도 사람들밖에 없다.’ 그래서 이 광주가 폐쇄적으로 변한 거죠. 이게 디제이를 등에 업은 정치세력과 한 덩어리가 되면서 호남의 보수화가 진행된 거죠.” 그의 말이 이어졌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당으로 나올 때마다 광주에선 통일교 돈 받았느니, 김영삼 돈 받았다느니 하는 루머가 돌았어요. 1997년도에 권영길 후보가 국민승리 21로 나왔을 때 민주노총 간부들이 권 후보를 앞에 놓고 사퇴하라고 했어요. 이회창의 돈 받고 나왔다고 몰아붙였죠. 권 후보가 수모를 당하고 돌아간 거예요. 상상을 초월해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여기선 진보정당. 진보 이런 말들이 어떤 교란의 언어, 이적의 언어로 받아들여져요. 대안은 오직 디제이니까. 30년 이상 디제이의 정치세력들은 우리 정치사에서 ‘의사진보’의 특수를 누린 거예요. 진보가 아니면서 진보 행세를 하는. 지금도 노동자, 농민,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 인식되잖아요. 이곳에선 진보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용어조차 못 되는 거예요. 권 후보는 1997년에도, 작년에도 표를 엄청 못 얻었잖아요.”

지방선거에선 민노당이 호남에서 2위를 했습니다만,

“이게 마찬가지 논리인데, 처음으로 정당명부제를 실시해서 당을 찍으라고 하니까, 한나라당은 절대 안 돼, 그러니까 민노당 찍은 거지. 앞으로도 한나라당, 민노당 나오면 민노당 찍게 돼 있어요. 비판과 견제, 이런 균형이 없어요. 광주가 시의원이 19명인데, 18명이 민주당이고 민노당은 1명. 전라남도가 51명인데 그 중에서 민노당 하나, 한나라당 하나. 전북도 마찬가지예요.”

“민노당 당선되면 완전히 달라질 것”

그는 지금 민주노동당을 공직적으로 지지 ․ 후원하고 있다. 민노당 광주시지부가 그의 사무실 일부를 빌려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정당개혁은 정치개혁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극우정당들도 정당운영은 제대로 할 수 있어요. 투명하게, 상향식으로 하는 데가 많아. 나는 여기서 민노당 일 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여긴 역사적으로 하도 많이 당해버려서 차 한 잔, 밥 한 끼 사줄 제대로 된 선배들이 없어요. 지금 민노당 지도부가 다 삼십대, 사십대인데 뭐. 다 먹고살기 근근하지. 그런 외로움 속에서 그들 스스로 대중들에게 각인되면서 일정한 성과를 이룬 거지요. 이 땅의 정치개혁에서 진보정당의 힘을 키우는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뜻 있는 정권이라면 건전한 파트너로 진보정당을 키워야지요. 광주가 살 길은 진보성을 찾는 것이고, 그럴 때만이 5 ․ 18 도 사는 겁니다.”

귀국하신 지 올해로 10년째입니다.

“요양 10년, 투병 10년. 호남지역주의, 디제이와 그 추종자, 5 ․ 18 을 농락하는 사람들과의 10년 싸움이었지. 여기서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했는지 몰라. 내 경험에 의하면 개인이나 소수가 과오를 범하면 반성하고, 사과해요. 그런데 주류 혹은 다수가 과오를 범하면 사과도 회개도 없어요. 저희들이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귀국 후엔 그 전에 알던 사람들과는 잘 안 만나요. 대신 새로운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일하지. 광주에선 디제이와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진보’고, 그런 사람들하고만 일을 같이 하는 거지.”

정치 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내가 성격이 좀 극단적인 데가 있어서 미운 놈 있으면 그냥 못 봐요. 정치하다가도 내가 좀 권력을 잡으면 여러 놈 손볼까 봐, 하하. 또 내 병 때문에 화를 내면 안 되거든. 그냥 이렇게 고요히 늙어가는 거지.”

윤 소장은 ‘폐기종’이라는 지병을 오랫동안 앓고 있다. 오랜 도피와 망명생활의 결과였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인터뷰 내내 격정적이었다.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도 잘못된 게 있으면 투쟁할 것”이라는 반골의 천성이 어디가겠는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기자 일행을 보내며 그는 한번 더 ‘진보의 희망’을 되뇌인다.

“내년 총선에서 민노당이 한 10석만 당선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양당을 비추는 거울이 들어가는 거니까. 광주 ․ 전남에도 시의회, 도의회에 한 명씩 들어가 있는데 그들의 활약이 눈부셔부러요. 공무원들도 저렇게 독하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상대하느냐며 손들어 버립디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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