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합수 윤한봉과 해월 최시형 (김수곤)2018-12-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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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수 윤한봉과 해월 최시형

 

김 수 곤/의사. 뉴욕 민권센터

 

(20091015, 지금은 이름이 민권센터로 바뀐 청년학교창립 25주년 기념만찬에서 한 연설을 토대로 상당 부분 고쳐 쓴 글입니다.)

 

이십 오년이면 짧고도 긴 세월입니다. 제 나이 올해 일흔 여섯이니 꼭 제 생애 삼분의 일이 되는 햇수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 청년학교/민권센터가 겪은 일도 많지만 이루어놓은 일도 또한 적지 않습니다.

 

뜻 깊은 창립 스물다섯 돌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 꼭 우리와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할 사람이 한 분 계십니다. 청년학교/민권센터 배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이름인 합수 윤한봉 선생이 바로 그 분입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만났던 인간 윤한봉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한번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윤한봉 선생은 이십오년 전에 먼 앞날을 내다보고 뉴욕에서도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은 퀸즈에 민권센터의 전신인 청년학교를 세워 우리가 일할 튼튼한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루어 놓은 것이 있다면 그 어느 것도 그 분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사람은 가고 없으나 그 분이 우리에게 남겨주고 떠난 가르침은 우리와 함께 살아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내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살아가면서 진정 스승으로 모실만한 분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도 않고 흔한 일도 아닙니다. 합수 선생을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우리는 그런 점에서 퍽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긴 정치적 잠에서 깨어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신 분입니다.

 

청년학교/민권센터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사무실을 들어서면 바로 맞은 편 벽에 자그마한 액자 하나가 걸려 있고 거기 바르게 살자, 뿌리를 알자, 더불어 살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뿌리라는 말을 우리 민족, 우리 전통으로, 더욱이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을 염두에 둔 말로만 짐작했는데 차차 그 차원을 넘어 훨씬 더 깊은 뜻이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윤한봉 선생 말씀이 지금은 역부족이라 이러고 있지만 때가 오면 흑인 형제들은 물론 모든 타민족 형제들을 위해서도 일해야 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짐승이나 자연도 빼어 놓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을 저는 들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합수 선생 얘기가 나오면 늘 동학의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을 떠올리게 됩니다. 두 분 다 쫓기는 몸이 되어 일생의 대부분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며 숨어 살았습니다. 최보따리라는 별명대로 여차하면 보따리와 짚신 꾸러미를 들고 뛸 준비를 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해월 선생을 그대로 닮아 합수 윤한봉이 지녔던 소중한 재산은 운동화와 똥가방이 고작이었습니다.

 

해월 선생은 스승인 수운 최제우의 순교 이후에 풍비박산 난 동학을 거대한 공동체로 재건한 조직의 천재였으며 만나는 사람을 감동 감화시키는 신통력을 가진 분이었던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망명 전이나 귀국 후에 합수 선생이 본국에서 한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도 없고 설사 안다 한들 여기서 얘기할 일도 아닌 것 같고 또한 유럽을 포함한 해외 전반의 운동에 대해서도 아는 바는 아주 미미하기 때문에 내 얘기는 당연히 청년학교와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을 통해서 본 모습에 한정됩니다.

 

그러나 가히 운동의 황무지라고 할 북미주에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잠들어 있던 양심들을 눈뜨게 하고 민족 민주 민중을 묶어내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커다란 공동체로 키워나가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미국에 외톨이로 내동댕이쳐진 그가 가는 곳마다 생면부지 초면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돌려놓을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요. 윤한봉과 해월, 두 분이 가지고 있던 이 마술과 같은 힘은 다름 아니라 그분들의 성실성과 열정, 그리고 사심 없는 마음과, 생명에 대한 한없는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믿습니다. 해월 선생은 사람을 하늘 섬기듯 하라고 하고 부인이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했으며 새 새끼 한 마리, 이파리 한 잎도 새순은 함부로 상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분은 설령 하루를 머물러도 가는 데마다 나무를 심고 몸과 손을 그냥 쉬는 법이 없었다고 하는데 합수 선생도 채소나 화초를 가꾸든 뒷간 청소를 하든 무료하게 허송세월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늘 남자 위주로 일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여성 회원들의 대등한 자리매김에 대한 배려는 섬세하고 철저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더러 들어 보았으나 윤한봉 선생이 해월 최시형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본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합수 선생같이 박학다식하던 분이 해월 최시형의 삶을 몰랐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어떤 때는 이 양반이 혹시 일삼아 그 어른 흉내라도 낸 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만큼 신기할 정도로 서로 닮은 데가 많습니다. 아마 민초를 사랑하는 위인들의 삶이란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요.

 

외세와 평화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윤한봉 선생은 1989년에 뉴욕에서 워싱턴에 이르는 대행진을 통해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핵무기 철거와 미군철수를 요구했습니다. 도가 이루어지는 때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해월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이니라.” <바르게 살자>는 대목에 대한 해석이나 이해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경험에 따라 각인각색일 터이지만 잘못하면 추상적이고 진부한 윤리강령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영어생활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바르게 살자>를 영어로 옮겨놓아야 할 때가 더욱 그런 경우입니다. 아직까지 나는 마음에 드는 번역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사실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안다고 장담할 형편도 못됩니다.

오랜 궁리 끝에 아쉬운 대로 낙점한 번역은 “Do the right thing!”인데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일은 무엇인가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 right now?)를 가늠하라는 뜻으로 새긴 것입니다.

 

합수 윤한봉 선생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는 삶을 살다간 분입니다. 태평양을 건너 밀항탈출하여 망명의 길에 오를 때나 아직도 그 발전단계가 유아기에 있는 폐이식술에 몸을 맡기기로 작정한 때 등이 그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생업이 의사라는 연유로 나한테 폐이식에 대한 의논을 해왔을 때 저는 솔직히 눈앞이 캄캄했으나 이미 말릴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분도 사람인 이상 오판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나 결코 경솔하거나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길을 택하기로 한 번 먹은 마음을 돌려놓기 어려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소식을 다소 알고 있는 제 처가 만류하지 못한 나를 두고 나무랄 때마다 나는 지금도 가슴이 미어질 뿐입니다.

 

우리도 25년 동안 민권센터/청년학교 일을 꾸려나가면서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 때 마다 그 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바르게 사는 길을 찾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그 옛날 해월 선생을 등진 무리들이 있었던 것처럼 합수 윤한봉을 눈물짓게 하고 그 가슴을 멍들게 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월이 가면서 그 중의 어떤 분들은 뉘우치고 있는 기미가 보여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긴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일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내 얘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해월 선생이나 합수 선생을 익히 아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이고 그 분들의 위대함에 견주어 인지도가 낮은 까닭이겠지요, (! 뚱딴지 같이) 외국의 소위 성자 성인들만 추앙을 받거나 자격 없는 국내 인사들이 엉뚱하게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슬퍼집니다.

 

그래서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은 물론 저희들 짐이 무겁습니다. 그 짐이 무거운 만큼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고마운 마음과 거는 기대도 큰 줄을 부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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