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윤한봉과의 인연 (김동근)2018-12-2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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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과의 인연

 

김 동 근

 

내가 김상원이라는 수줍은 표정의 삼십대 젊은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805월의 광주항쟁의 살벌함이 채 가시지 않은 그해 말이나 그 다음해 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에서 자유당 시절에 야당 국회의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시고 민주당 정부 때에는 초대 민선 서울시장을 하신 김상돈 장로님이 보호하고 있었다.

김상원은 김상돈 장로님을 따라 다니면서 이 곳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동포 사회의 형편을 살펴보고 있었다. 얼마 뒤에 그의 망명 사실이 알려져서 김상원은 윤한봉이라는 자기 이름을 되찾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활동의 시작으로 한국에서 탄압을 받고 어렵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을 좀 도와주자고 해서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사는 다섯 사람이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이 모임은 이름도 없이 시작해서 뒤에 우리끼리 광주수난자돕기회라고 불렀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이 그의 첫 번째 활동이었던 것이다. 이 모임은 매달 만나는 날과 시간을 처음 시작할 때에 정한 대로 매달 연락을 하지 않고 만나서 일정한 금액을 걷곤했다. 거의 삼십년 전의 일이서서 매달 몇째번 토요일이었는지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한 번도 어김없이 처음 시작한 다섯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끝까지 함께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이 조금씩 쌓이면 광주여성기독청년회(YWCA)의 조아라 장로님 앞으로 송금을 했다. 우리는 조아라 장로님을 만나본 적도 전화로 얘기를 해본 적도 없지만 윤한봉이 추천한 분이어서 믿고 송금을 하곤 했다. 지금도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 모르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썼을 것으로 믿는다.

송금은 로스엔젠로스에 있는 Unitarian Church라는 아주 진보적인 미국 사람들의 교회를 통해서 했는데 처음에는 그 교회의 이름이 통일교의 Unification Church와 비슷해서 받는 쪽에서 무슨 문제가 될 돈이 아닌가 해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미리 설명을 하지 않고 송금한 탓이었다. 워낙 작은 돈을 매달 겨우 다섯 명이 모아서 보낸 것이어서 1988년까지 6년 동안에 삼만불을 보냈다는 윤한봉의 얘기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아마 이런 것이 티끌 모아 태산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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