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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황광우 작가의 광주를 빛낸 의인들 (4)토박이 대표 박효선의 자백2019-07-1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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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 작가의 광주를 빛낸 의인들 (4)토박이 대표 박효선의 자백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망월동으로…
항쟁 마지막 날 도망자 멍에 짊어지고 ‘치열한 삶’
죽음의 시대 딛고 일어나기 위해 매일밤 극본 작업
극단 토박이 대표로 오월 진실 알리고자 미국까지


박효선 수배사진

광주민주화운동화 운동 관련 박효선 수배 사진.


뜨겁던 날이었다. 1980년 5월 25일, 도청 앞 분수대에서 시민들은 궐기대회를 하고 있었다. 이 대회를 민중의 축제로 연출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항쟁지도부의 홍보부장을 맡았던 박효선이다.


1994년과 1996년 태평양을 건너 일단의 연극 배우들을 이끌고 미국까지 달려가 오월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연출가가 있었다. 그가 극단 토박이 대표 박효선이다.

그랬다. 우리는 어두운 죽음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1980년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한 사나이는 이 죽음의 시대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매일 밤 극본을 썼다. 1998년까지 20년의 세월 속에서 스무여 편의 극본을 창작한 이가 있었다. 그가 극작가 박효선이다.

백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의 후손들이 오월 그 날의 광주를 기억한다면, 그 광주는 ‘금희의 오월’에서 극화된 광주일 것이다.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의 후손들이 오월 그 날의 비극을 기억한다면, 고문을 견디다 못해 벽에 머리를 짓이긴, ‘청실홍실’의 주인공 김영철의 비극일 것이다.

여기 빛바랜 수배 사진 한 장이 있다. 박효선의 지명 수배 사진이다. 수배 사진에는 ‘자칭 도청 홍보부장’이라는 별칭이 적혀 있다. 박효선은 ‘광주항쟁의 영원한 홍보부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때 살아남았다. 자백한다. “어쨌든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은 내가 5월 광주로부터 도피했다는 사실이다. 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 야심한 밤 총을 든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달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며 집으로 향했다. 난 골방 속에 숨어서 총소리가 멈출 때까지 오들오들 떨며 앉아 있었다. 난 어쩌면 살인자다. 그날 밤 도청 전투에서 〈금희의 오월〉의 주인공이었던 ‘이정연 군’도 죽었다. 상원 형도 죽었고 용준이도 YMCA에서 죽었다. 고아였던 용준이는 그렇게 고아로 죽어갔다.”

5월 27일 새벽 YWCA에는 청년 학생과 여학생 등 50여 명이 있었다. 새벽 2시쯤 도청으로부터 비상이 떨어지자, 여학생들이 건물 뒤쪽 가정집 담을 넘어 피신했다. 남은 사람들은 총을 들었다. 그 날 새벽 박용준은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모든 걸 용서하시고 세상에 관용과 사랑을!.....” 박용준이 쓴 일기다. 그는 그렇게 갔다. 스물다섯이었다.

박효선은 80년 6월부터 81년 9월까지 서울에서 숨어 지냈다. 윤한봉과 함께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81년 4월, 윤한봉이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고, 이후 혼자 도피한 것이다. 1981년 12월 효선은 자수를 하였다.

서울에서 오월을 보낸 우리들도 괴로웠는데, 효선의 경우 그 아픔이 얼마나 깊었을까? 효선의 영혼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악마의 속삭임은 얼마나 집요했을까? “너 도망자지?”

자수한 효선,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가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망월동이었다. 그땐 지금의 5·18 국립묘지가 없었다. 1982년 당시 망월동 묘역은 그야말로 공동 묘지였다. 망월동 가는 길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우리는 ‘꿈속을 가듯 걸어’ 갔다.

효선의 정처 없는 발걸음이 가는 곳은 망월동이었다. “아내와 망월동 묘지(墓地)에 갔다. 상원이 형(兄)과 용준이에게 담배나 한 대씩 붙여주었다.” 윤상원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죽었고, 박용준도 YWCA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김영철 씨다. 김영철 씨는 살아남아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는데, 이후 조사과정에서 당한 고문과 이어지는 자해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도피생활을 정리한 박효선은 정신이상 증세를 겪고 있는 김영철 씨를 자주 찾는다. “형은 또 삽을 들고 어머니의 무덤으로 갔다. 형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고 주장했다. 고문은 형을 죽였다.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모서리에 이마를 찍었다.”

네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미쳤고 한 사람은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죽은 두 사람은 윤상원과 박용준이고, 미친 한 사람은 김영철이며, 살아남은 이는 박효선이다. 1982년 1월 4일 효선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어제 저녁에 광천동 영철 형 댁엘 갔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살아 있는 자가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있을까? /황광우(합수 윤한봉 기념 사업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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