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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민주화 꽃피운 한국사의 거름 고 안병하 - 윤한봉 - YTN 출발 새아침 2019-06-0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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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김호성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5월 17일 (금요일) 
□ 출연자 : 김성신 출판평론가


◇ 김호성 앵커(이하 김호성): 우리 사회의 리더(Leader)의 책을 통해 독자(Reader)로서 그 사람의 시대정신을 살펴보는 시간이죠. ‘더 리더(The RLeader!)’ 책하면 척! 북 칼럼니스트 김성신 출판평론가,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김성신 출판평론가(이하 김성신): 안녕하세요.

◇ 김호성: 오늘의 ‘The RLeader’,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요?

◆ 김성신: 5·18 광주 민주화운동 39주기를 오늘 하루 앞뒀는데요. 그래서 오늘 소개할 두 분의 리더는 5·18 당시 시민들을 향한 발포명령을 거부했던 故 안병하 치안감, 그리고 또 한 분은 5·18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이자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국제연대를 조직한 세계적 활동가인 故 윤한봉, 이렇게 두 분을 소개드릴까 합니다. 

◇ 김호성: 이 분들이 어떤 책을 냈을까요?

◆ 김성신: 故 안병하 치안감의 경우에는 책이 나온 건 아니고요. 비망록이 최근에 공개됐습니다. 고 안병하 치안감의 비망록에는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눈길을 끄는데요. 이 비망록은 안 전 치안감이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작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해 10월,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기록기도 한데요. 최근에 안 치안감의 유족분들께서 최근 8쪽 분량의 비망록과 함께 당시의 사진자료 등을 5·18 기록관에 기증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기로 비망록의 내용이 최근에 언론을 통해서 공개됐습니다.

◇ 김호성: 어떤 내용이죠?

◆ 김성신: 고 안병하 치안감은 신군부의 과격한 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를 5·18 발발의 원인으로 꼽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 퍼졌던 악성루머, 유언비어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속 이런 것들이 시민들을 자극했다, 라고 당시를 기록하고 있었고요.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이 비망록에는 경찰 방침으로 해서 ‘일반 시민들의 피해가 없도록 할 것’ 이런 것들이 치안감에 의해서 다 명령이 만들어졌던 거죠. 또 ‘주동자 외에는 연행하지 말 것’ 이런 것들이 기록돼 있고요. 또 진압 뒤에는 '주동자 검거 등 중지, 군에게 인계받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식사를 제공할 것' 이런 지침들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습니다. 안 치안감은 당시 광주에서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가령 우리가 흔히 외국의 어떤 장면에서 보면 약탈이나 방화나 이런 게 일어날 법한 상황이잖아요. 전혀 그러한 강력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안정적으로 치안이 유지됐다, 라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고요. 그것을 광주의 당시 치안 책임자로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1980년 5월 21일 경찰병력을 철수할 때는 그 당시 광주 시민들이 경찰들에게 사복을 가져다 입히면서 오히려 안전을 보호해 줘서 불상사 없이 철수할 수 있었다, 라는 내용도 비망록에서 증언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의 의식, 정신 이런 부분들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 부분들이 비망록에서 눈에 띄는 부분들이었습니다.

◇ 김호성: 그렇습니까. 본래 이분은 군인이셨다면서요?

◆ 김성신: 1949년 육군사관학교 제8기로 임관했는데, 육군사관학교 8기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김종필도 8기였고요. 쟁쟁했는데요. 그 당시 그렇게 임관해서 제6보병사단 포병대에 근무하던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당시 포병관측장교였던 안병하 치안감은 1950년, 6·25 전쟁 초기였죠. 그때 춘천과 홍천 전투에 참전했고 이때 공로로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그런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전쟁이 끝나고 1962년, 육군 중령이었는데요. 총경 특채로 경찰이 되면서 부산 중부경찰서장, 서울 서대문경찰서장을 역임하고, 이때부터 경찰로서 경력을 만들어나갑니다. 간첩선도 잡고 간첩소통작전도 성과를 올려서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은 이런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1971년 불과 43살의 나이에 경무관으로 승진하고요. 그 뒤 치안국 소방과장 이렇게 거쳐서 1979년도에 전라남도 경찰국장으로 발령받게 됩니다.

◇ 김호성: 그러니까 딱 그 다음 해에 광주 민주화운동이 펼쳐진 거예요.

◆ 김성신: 그렇습니다. 안 치안감은 신군부의 발포라든지 이런 강경진압 명령을 거부합니다. “달아나는 학생을 뒤쫓지 말라”, “공격적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이런 시민 안전을 우선한 지시를 경찰 조직에 내리게 되는데요. 그 당시 적은 메모도 있습니다. 그 메모를 보면 ‘절대 시민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놓고 그 옆에 괄호를 쳐놓고요. ‘경찰 희생자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렇게 적어놨습니다. 경찰이 희생된다 하더라도 시민들을 경찰이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것들을 그 당시에 명령했다는 것이죠.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이틀 앞둔 5월 25일에 정부가 내린 경찰무장 지시까지 거부하게 되고요. 그때 오히려 우발적인 사고를 우려해서 경찰의 총기를 회수하고, 시위대에 부상자 치료와 음식 등을 제공하는 이런 활동을 하게 됩니다.

◇ 김호성: 어제 저희가 <김군>이라는 영화에 출연한 주옥 씨를 전화로 연결했는데 그분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군인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이잖아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를 증언하셨는데, 안병하 치안감이 진정한 군인정신을 실천한 사람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이 드네요.

◆ 김성신: 네,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 최근에, 오늘입니다. 39주기를 앞둔 오늘 전남 무안 상양읍에 전남경찰청사가 있거든요. 여기에 지금 안병하 공원이 만들어지고 있고 현판식도 오늘 갖게 되는데.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정말 군인정신 그야말로 실천한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호성: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인물이 있어요. 윤한봉, 어떤 분이시죠?

◆ 김성신: 고 윤한봉 선생은 5·18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이이기도 하고, 국제연대를 조직한 세계적인 활동가이기도 한데요. 윤한봉 선생의 엄청난 활동경력에 비해서 이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한 탓에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다행히도 지난 2017년입니다. 윤한봉 선생의 10주기를 맞아서 평전 <윤한봉 -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라는 책이 출간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시 활동상, 또 역사적 의미, 이런 것들이 알려지게 됐는데. 이 책은 이념대립으로 가려진 대한민국의 인물들을 복원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소설가이자 평전작가인 안재성 씨가 쓴 책입니다.

◇ 김호성: 평전의 내용은 그러면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죠?

◆ 김성신: 윤한봉 선생 10주기를 맞아서 기획된 책인데요. 첫 공식 평전이기도 합니다. 유신부터 5·18까지 1970년대 학생운동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자, 또 이후에는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 내에서 한인운동의 기반을 만들고, 이것을 국제연대로까지 발전시킨 그런 세계적 활동가로서 윤한봉 선생의 면모, 이런 부분들을 잘 정리한 그런 내용의 책입니다.

◇ 김호성: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주신다면요?

◆ 김성신: 총 19개 장인데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운동가로서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1971년부터 1993년까지의 이야기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요. 윤한봉을 망명길로 내몬 5·18민주화운동을 비롯해서 민청학련 사건, 또 남민전 사건 이런 굵직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했다라는 부분도 이 책의 특징이고요. 또 굉장히 큰 매력이기도 합니다. 특히 윤한봉이 광주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을 예견한 1980년 5월 15일부터 계엄군이 도청을 장악한 5월 27일까지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아주 긴박하게 이 책 안에서 전개됩니다. 

◇ 김호성: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졌던 바로 그날들이네요, 그러니까.

◆ 김성신: 네. 그리고 이 책에서 보면 미국 망명 이후에 이분의 삶을 그리고 있는 부분인데, 어떤 분인지를 정말 잘 표현하는 이런 대목들이 나오거든요. 정말 강직한 성품 이런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수배자 신분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미국 생활 10년이 넘도록 침대에선 한 번도 올라가서 자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맨바닥에 누워서 혁대도 풀지 않고 잤다. 이런 일화도 있고요. 동지들이 어렵게 모아준 생활비, 돈을 허투루 쓸 수 없다면서 담배를 피우셨는데 땅에 떨어진 꽁초만 주워서, 절대 돈주고 사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이분의 원칙적인 면모 이런 것들을 드러내주는데. 평생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살다 갔는지 보여주는 감동적인 일화가 이 책에는 여럿 소개되고 있습니다.

◇ 김호성: 별명이 ‘합수’라고 하는데 합수라는 별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일화가 참 재밌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이죠?

◆ 김성신: 합수 윤한봉 이렇게 부르니까 멋진 호처럼 보이는데요. 스스로 붙인 별명이랍니다. 그런데 이 합수(合水)라는 말이 호남 지방에서 쓰는 토박이말로, 똥거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름을 자신에게 스스로 붙인 건 평생을 내가 진짜 거름처럼 살겠다, 그런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실제로 언제 어디서나 궂은일을 도맡아 했지만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망명 생활을 마치고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5·18기념재단을 만들 때에도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고, 공식행사에도 일체 나타나지 않았고요. 후배들이 찾아와서 동교동에 한 번 찾아가자. 그런데 그게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 댁, 당시 그 댁에 간다는 것은 공천 받고 국회의원이 된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 의미를 거절하기 위해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라고 얘기하는데. 정말 한국 민주화의 거름으로 살고자 했던 합수 윤한봉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정말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던지는 삶, 이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 김호성: 저는 합수란 뜻이 그런 거름이란 뜻이 있는 건 처음 알았네요. 저쪽 양평 쪽 가다 보면 두물머리 가다 보면 두 개의 물이 만난다고 해서 합수, 물이 합하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해지는 이런 의미로 합수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런 거름이 된다, 이런 뜻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오늘은요. 5·18민주화운동 39주기를 맞아서 故 안병하 치안감과, 역시 고인이 되신 합수 윤한봉 선생을 만나보았습니다. 한 시대를 이끌어 간 두 Reader를 한 문장으로 정의해 주신다면요?

◆ 김성신: 故 안병하 치안감과 故 합수 윤한봉 선생은 ‘민주화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위대한 역사의 거름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김호성: 알겠습니다. 5·18 39주년 하루를 앞둔 오늘 아침에 의미 있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김성신: 감사합니다.

◇ 김호성: 김성신 출판평론가와 함께 했습니다.  


'YTN 라디오 다시듣기 - 김호성 출발 새아침' 5월 17일 가시면 다시듣기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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