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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재단 미국 인터뷰2018-10-24 09: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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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준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최영준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5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네 그럼 지금부터, 지금 최영준 선생님을 모시고 5·18, 해외에서, 해외의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구술 채록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5일이구요. 장소는 LA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이 구술 녹음은 5·18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5·18 기록물 조사 및 수집 사업의 결과물로 제출될 예정입니다. 너무 이렇게 부담 갖지 마시구요, 그냥 옛날 선생님 살아오셨던 좀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준다라고 좀 생각을 하시고, 편안하게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그 선생님 언제 태어나셨나요. 어디에서?
구술자 : 1962년 12월 달에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대구에서 계속 군대 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대구에서 자랐고 이사는 뭐 많이 다녔지마는 거의 대구 토박이라고 할 수 있죠.
면담자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가족관계는 아버지, 어머니 계시고 그 다음, 지금도 삼형제 중에 차남..
면담자 : 둘째시고. 형제분들은 다 이곳에, 미국에 다
구술자 : 아니아니, 형님은 한국에 계시고동생은 시카고에 있고 저는 시카고에 집이 있지만 지금 현재 제가 트럭을 운전하고 있기 때문에, 마이애미, LA에서 마이애미까지 왔다갔다 노숙 생활을 하고 있죠.
면담자 : 부모님도 다 지금 그러면 시카고에 계시구요.
구술자 : 네 시카고에 계세요.
면담자 : 뒤에 쫌 있다 다시 좀 여쭤보긴 하겠지만 미국 이민 들어오신 것은 언제
구술자 : 예, 1989년도에 오게 됐고 제가 그, 그때 제가 대학 마치고 졸업하던 당시핸데. 아버지 어머니가 2년 전에 먼저 오시고, 동생하고, 그 다음에 아버지 어머니가 저를 초청하게 되가지고 그렇게 오게 된 케이스죠.
면담자 : 그, 3형제가, 3형제라고 하셨는데 나이 터울이 좀 어느 정도 나시나요.
구술자 : 위로 형하곤 두살차이나고 동생하고는 여섯살 차이 나요.
면담자 : 어, 동생하고 좀 차이가 있으시네요. 어렸을 때 좀 형제들만 있는집은...
구술자 : 많이 싸우죠. 많이 맞고 자랐어요. 내가 (웃음)
면담자 : 어렸을 때 그러면 아버지는 부모님은 뭘 직업 하셨나요.
구술자 : 뭐 다양한 직업, 직업을 하셨죠. 좀 아버지같은 경우는 열심히 살아오셨던건 같은데 경제적으로 뭐 여유롭진 않았어요, 않았고. 사실 첨에 제가 알기로는 어릴때 유년시절에 보며는 지금 코롱의 전신 한국 나이롱이라고 대구에 공장이 있는데 거기서 근무를 하셨고 근무 하시다가 뭐 좀 나오셔가지고 사진관을 하신걸로 알고 있는데 그 사진 계통으로 쭉 하셨는데 경제적으로 뭐 어렵, 아주 풍족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뭐 그냥 늘 가족들 바램이 뭐 없이 살아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즐겁게 살아가자 그런, 뭐 그렇게 살아왔었어요.
면담자 : 69년 초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가 대부분 60년대를 보내오셨던 부분인것 같은데요. 특별히 뭐,이때는 다들 한국의 경제 상황이라는게 좀 어려웠었고, 아직까지 이때까지만 해도 좀 그런 부분이 있었는데...
구술자 : 그나마 그래도 뭐 아버지 어머니가 좀 문화적인 면에서 좀 음.. 다른 분들보다 좀 해박하셨던 것 같애요. 뭐 영화라던가 뭐 이런거 팝이라던가 그런거. 집에 음반 있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데 접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예.
면담자 : 어머니는 그러면 가정주부셨나요, 아니면 따로 일을 하셨나요
구술자 : 같이 사진관했으니까 같이 일하시고 그렇게...
면담자 : 형제들, 형님이나 좀 동생은 어땠습니까. 어렸을 때 같이 이렇게 많이 어차피 형제간들이니까 싸우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은데
구술자 : 그거뭐 그렇죠. 장난, 항상 장난으로 시작해가지고 싸우고 결국은 끝은 내가 우는 걸로 끝나고 그랬는데 동생하고는 뭐 원래 뭐 부모님이 그 계획을 해서 낳아야겠다 그래서 난 게 아니고 뭐 어쩌다 보니까 딸인줄 알고 났는데 또 아들이고 그렇게 된 케이스고. 근데 삼형제간에 뭐 자라면서 참 우애는 참 있었고 그렇죠.
면담자 : 근데 지금 형님만 한국에 좀 남아계신 건가요?
구술자 : 그니까 저같은 경우에는 대학교 졸업한 다음에 나의 선택이었고 그러니까 원래 미성년자들은 이민갈 때 따라갈 수 있고 그런데 20세가 지나면 미국에서 이게 안 받아줘요. 그 다음에 초청한 사람 혹은, 부모가 다시 초청을 해야되기 때문에 형님같은 경우는 뭐 서울에서 좋은 직장 다니고 있었으니까 굳이 미국에 올, 그 당시 가정도 있었고. 그러니까 올 뭐 그런, 그게 없었죠. 이유가 없었죠.
면담자 : 그, 초등학교 좀 들어가기 전까지 유년시절 동안 특별하게 좀 기억에 남는 뭐 그런 사건 사고 같은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어...뭐 사건이랄게. 어렸을 때 성향같은 약간 남이 피해를 본다던가 이런 경우 좀 작은 애가 뭘 알겠어요. 그렇지만은 남이 피해를 본다던가 좀 불이익이다 그러면 그거를 좀 대들고 항의하고 그런 성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
면담자 : 어렸을때부터 외향적이셨나요, 동네 친구들하고 좀 같이 이렇게...
구술자 : 어...외향, 그렇게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건 좋아해는데 성격은 좀 내성적이고 그랬었죠.
면담자 : 불의에는 못참고 좀 그런...
구술자 : 좀 그러니까 남들 가만있을 때 가만 있으면 되는데 대든다든가 뭐 그런게..
면담자 : 그럼 선생님 계속 대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초등학교는 어디에서 나오셨나요? 어디 초등학교.
구술자 : 초등학교는 일학년 때는 어...동성국민학교라고 뭐 그때 수성동이라는데 있었는데 거기 새로 생긴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일학년까지 다녔었고 그다음에 또 이사하는 바람에 동도 국민학교라고 거기에서 한 십, 한 오키로 정도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거기서 다녔죠.
면담자 : 동성국민학교로 처음에는 수성동에 있는 동성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셨는데 일학년까지 마치시고 동도국민학교로 이렇게 옮기고. 그 때가 70년인가요?
구술자 : 80, 아니 69년도, 69년도 정도, 내가 아마 내 기억으로 68년도에 초등학교 들어갔을 것 같은데 68년, 69년도에 예 그랬던 것 같아요.
면담자 : 7살에 학교를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 7살, 8살, 기억이 안 나네. 하여튼 뭐.
면담자 : 7살이면
구술자 : 7살, 8살, 8살
면담자 : 8살에 들어가셨으면 69년도에 입학을 하셨네요.
구술자 : 예, 예 그런 것 같다.
면담자 : 학교다닐 때는 좀 어땠나요, 국민학교.
구술자 : 어, 국민학교 같은 경우에는 그때는 뭐 정부 시책 이런데 잘 따르는 그런 아주 얌전한 학생, 어...그랬었죠. 2학년때 전학 갔는데 그때가 사실 저희 어머니가 절 생각해서 원래 옮기거나 전학하고 나면 왕따같은거나, 옛날에도 그런게 있었을찌도 모르니까 원래는 이사를 겨울방학때 갔었어요. 겨울방학때 갔었는데 봄방학 동안에 전에 있던 학교를 다녀라. 다시고 2학년 딱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전학을 2학년으로 그냥 편입해버리면 다들 모르는 사이니까 그게 괜찮을거라고 그래 생각해서 그렇게 다녔는데 그것때문에 생긴 하나 트라우마가 있어요. 나같은 경우에 그때가 아주 추웠거든, 겨울, 겨울에. 그러니까 봄방학 때 전에 다니던 학교를 다녔는데 한 아홉, 여덟살 아홉살짜리 꼬마가 혼자서 한 사오키로 정도 이렇게 왔다 갔다 다니는게 쉽지가 않았거든요. 추위에 많이 떨기도 했었고 뭐 유괴 비슷한 경험도 당하기도 했었고
면담자 : 유괴 비슷한 경험이요? 누가...
구술자 : 뭐 누가 귀엽다고 데려가가지고...그게 유괴였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땐 꼬마였으니까 굉장히 공포감, 공포고 공포감같은게 있었죠. 그런 경우도 있었고 뭐 2학년때 전학가서 그냥 진짜 아무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같이 어울리면서 2학년때 사귄 친구 중에 한명이 아직도 제일 친한 친구로 남아 있는...
면담자 : 아, 국민학교 2학년때 사겼던 친구가...
구술자 : 아직도 친한 친구가 있고 그렇죠. 근데 내가 일학년땐가 2학년땐가 장기자랑이라고 했는데 뭐 노래잘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잘하는게 없어요, 나는. 근데 그 당시 기억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앞에 나가서 외웠던 기억이 있어요.
면담자 : 그때 어렸을 때 다 그걸 외우고, 외워야됐었죠?
구술자 : 외워야됐었는데 그 이전에 발표나고 난 담에 그냥 이렇게 외워가지고 머리가 또 나쁜데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는데 뭐 하여튼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던 그런...
면담자 : 초등학교 다닐때는 특별한 어떤 기억나시는 부분들이 있나요,
구술자 : 전학가고 그런거 외에 외에는 그냥 얌전한 학생이었어요. 그냥 보통 평범한 학생.
면담자 : 그 아까 아버지께서 코롱, 코롱 전신이었던
구술자 : 네
면담자 : 한국 나일론 하고 사진관을 이렇게 하셨다고 하셨는데 초등학교 다닐때는 사진관을 하고 계셨나요.
구술자 : 초등학교때 사진관 하고 계셨죠.
면담자 : 사진관은 어디에서 하셨나요, 수성동이, 동성국민학교가 수성동에 있고 동도 국민학교가 어디에 있었나요.
구술자 : 범어동이라고 있어요.
면담자 : 그러면 사진관도 범어동 쪽에 있었나요?
구술자 : 사진관은 아마 수성, 어렸, 아주 어렸을 땐 수성동에서 했었고 그 다음에...아마 쫌 시내 다운타운에서 했을거에요.
면담자 : 그렇게 뭐, 초등학교 다닐때는 그냥 얌전한 말 잘 듣는 그런...
구술자 : 그렇죠. 뭐 있는듯 없는듯.
면담자 : 말썽을 피우셨다거나 그런 부분들은 없으셨습니까.
구술자 : 뭐 그런건 없었고 주로 뭐 공부도 그만그만, 뭐 중, 중간정도, 그 다음에 뭐 눈에 안 띄고 그냥, 대신 하루에 한, 한번씩 만화가게는 계속 가서. 책읽는거 아주 싫어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때 만화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어렸을 때 인생공부는 만화로 했다고.
면담자 : 중학교는 어디 중학교를 다니셨나요
구술자 : 중학교, 대구 중학교 나왔어요.
면담자 : 그때는 중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갔나요? 아니면...
구술자 : 추첨이죠 추첨이었고. 아, 한가지 내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평범한 삶이었는데, 한가지 꿈은 있었어요. 그 꿈이 뭐냐 그러면 아주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그런 꿈이었었는데 우주 비행사가 되겠다는.
면담자 : 그냥 막연한 생각,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마지막, 막연한 생각
구술자 : 그렇죠, 쪼, 쪼끔 막연하기도 했지마는 그때 아버지가 뭐 형보라 이고 뭐 위인전집하고 과학, 뭐 잡, 전집 이런걸 해서 갖고 오셨는데 또 아버지가 공군출신이고. 예. 그때 그런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겠는데 어렸을때부터 우주비행, 초등학교 국민학교 가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 내 꿈은 과학자다, 우주 비행사다.
면담자 : TV에서 뭔가를 봤나요. 그때 어디 뭐 우주선이 올라갔었는지 싶은데
구술자 : 그 당시 내가 봐도 그, 과학 잡지 같은 게, 그때 1969년도에 아폴로 그게 때였죠. 그 이전부터 이렇게, 글씨를 모를 때부터 전집을 보면서 사진을 보고 그랬, 그랬었거든요. 책을 보면서. 근데 그 지식들이 뭐, 여러가지 우주 과학적인 항공기라던가 엔진에 관한 이런 것들을 그때서부터 알았어요. 내, 나는 내 갈길은 저기다, 그런 한가지 목표는, 초등학교 평범하게 자랐지만 하고 싶은 그런 목표는 있었죠.
면담자 : 중학교는 그럼 아까 대구 중학교에...
구술자 : 예, 대구 중학교에 입학했었고.
면담자 : 그때가 그러면 천구백. 칠십년 초반이죠?
구술자 : 오년, 육년쯤 됐을 것 같은데요.
면담자 : 예, 공일이삼사, 칠십오년도에.
구술자 : 음..,그정도에, 예. 왜냐면 내가 고등학교를 81년도에 졸업했거든요.
면담자 : 예. 칠십오년도에 입학을 하셨고, 대구중학교, 계속 삼년간 대구중학교를 다니셨나요.
구술자 : 예, 그렇죠. 예
면담자 : 대구중학교는 어디에 있었나요.
구술자 : 대구중학교가 대봉동인가. 뭐, 모르겠어요.
면담자 : 지금도 있는 학교죠.
구술자 : 지금도 있는, 대구에서는 명문 중학교죠. 뭐 추첨해서 갔지마는.
면담자 : 이때가 어찌보면 좀 박정희 정권 말기 였었고 또 유신...
구술자 : 그 유신, 그 유신이 뭐 초등학교에서도 그랬었고 뭐 한국적 민주주의의 뭐 톡착, 토착화니 이런 거 표어 붙여가 오라 그러먼 뭐 그럼 그런가 보다 그러면서 정부 시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그런 학생이었으니까. 그게, 그게 올바른 건줄 알았고. 근데 중학교때도 거의 마찬가지였고. 대구, 대구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면담자 : 대구라는 지역이 정치적으로 좀 인제 박정희 정권하고는 친했던, 쫌 이제 그런 좀
구술자 : 뭐 그렇죠.
면담자 : 당시에는 시국 상황에 대해서 중고등학생들의 시위도 많았던 시기인데, 선생님 사시던 지역이나 학교에서는...특별한 어떤...그런 시위는 없었습니까. 긴급 조치에 반대하는 중고등학생 시위랄지.
구술자 : 그런 건 듣도 보도. 그런 게 있는 건지도 몰랐죠.
면담자 : 그러면 중학교도 그냥 평범하게 이렇게, 사고 없이 사춘기때였던 것 같은데 다른 뭐가 없었습니까. 가출이나 (웃음)
구술자 : 그런 것도 없었고. 그 당시 아, 자란 배경에서 아마 중학교 때부턴가 아버지가 사진관 하시고 다운타운에 계시고 그러니까 가끔, 저 할머니하고 저하고 따로 떨어져 살았었어요.
면담자 : 할머, 할머니요?
구술자 : 할머니하고, 예. 예.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그런 적이 있었고. 중학교 시절 그냥 평범했어요. 그냥 내 갈길은 그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한가지 참. 내 인, 인생에서 가장 어떻게, 하튼 전환점이랄까 그런게 저 초등학교때 과학관을 자, 자주 갔거든요.
면담자 : 과학관이요?
구술자 : 예. 도, 도립 뭐 과학관 이런 데가 있는데 뭐 여러가지 뭐 전시하고 그러는데 뭐 어떤 애들은 단체로 갈때 한번 갈까 그러는데 거는 몇 번을 갔었어요. 혼자서, 요러케 가고 그러는데 그럴때마다 과학관 큰 뭐, 운동장에 보며는 뭐 전투기들 있었고. 비행기도 뭐 전시되 있었고. 내 기억에는 그랬는것 같아요. 경비행기에 뭐라고 붙여있었냐면 대구공고라고 적혀 있었어요. 비행기 날개에다가. 초등학교 때 내 갈길은 저거다. 우주 비행사니나 우주 항공쪽으로 하고 싶었으니까.
면담자 : 전투기 전투
구술자 : 경비행기였던가
면담자 : 근데 왜 경비행기에 대구공고라는 말이...
구술자 : 모르죠.
면담자 : 대구공고에서 기증을 했을까요.
구술자 : 날개, 적혀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난 거기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거기 가면 비행기 만드는 줄 알고.
면담자 : 그러셨구나.
구술자 : 그래서 뭐 대학교, 대학교란다, 중학교 때 뭐 대구공고가 그래도 공고 중에서는 경북 지방에 제일 좋은 학교였기 때문에 커트라인이 꽤 높았어요. 높았는데 뭐,
면담자 : 고등학교는 시험봐서...
구술자 : 고등학교 시험봐서, 원서 잘 안써줄라 그러드라구요 선생이, 왜냐 삼학년때 공부를 아주 잘하진 않앴지만 중상적으로 더더 들어갔는데 한번은 모의고사를 칠때 누가 시험지를 답안 채점 잘 못해가지고 점수가 좀 한번 낮게 나온 적이 있었서 안 해줄라 그러는데 그냥 어떻게 하다 됐어요. 그럼 원서 쓰고 대구공고 시험 쳐서 합격은 했는데 학교에서 딱 들어가보니 그게 아니드라구요. 비행기는 없고 (웃음) 저 건축과로 들어가가게 된거에요.
면담자 : 건축가로.
구술자 : 예, 성적순으로 뭐 그렇게 나눠, 예. 근데 뭐 기계과 있고 건축과있고, 뭐 토목과, 죽 자동차과 이렇게 있었는데, 뭐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뭐 그때만 해도 뭐 그 학교가 전두환이 나왔던 학굔지, 그런지는 전혀, 그건 나오지도 않았었고 난 내인생 최대 시련이었죠.
면담자 : 생각했던 것과는 아예 다른 어떤 과정때문에 그런건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예. 그래서 한번 적응을 할라구 한 일년 이년 정돈, 일년동안 적응할라고 그랬는데 그게 안되드라구요. 자기 꿈이 있고 꿈이 있는데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이게 건축이라는데. 적응할라 그래도 원래 글씨를, 보시면 알지, 글씨 잘 못쓰고 그림도 잘 못그리고 재능도 없는데 할래니까 안 되드라구요. 그래서 어...2학년까지는 그래도 뭐 그냥 착하게 그냥 다녔어요. 다니고 건축 기능사 시험, 2학년때 시험을 치거든요. 그래 2학년 시험칠 땐 아, 이론은 알죠. 이론은 합격했는데 실기가 안 되는거야. 그래서 참 어려움을 많이 겪었죠. 고3 때는 그래서 방황도 많이 했었고 심적으로 많이 방황하고 하...죽었으믄 좋겠다, 꿈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한숨) 고3때부터 삐어, 삐뚤어지기 시작했었죠. 그때 뭐 아니, 삐뚤어진다고 해가지고 남들처럼 가출하고 그런 건 아니고. 공부에 대해서는 완전히 손을 놔버린 케이스.
면담자 : 그래도 대학을 입학을 하셨,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대학은 고등학교랑 상관 없는 어떤 다른 과로 갔나요?
구술자 : 그렇죠. 고등학교 시절에, 고2때 그때 광주에, 광주 일어나고 (한숨) 내 인생이 너무 고달펐으니까, 고등학교때 자취해 사는게 너무, 견디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그래서 그런 것도 있엇지만. 광주가 일어나고, 그런가보다.
면담자 : 고등학교 2학년때인가요.
구술자 : 아마 2학년때일거에요.
면담자 : 3학년때...
구술자 : 2학년때, 3학년때, 예. 아니다, 전두환이 대통령됐을 때가 3학년때였어요. 그러니까
구술자 : 그러니까 3학년. 그때가 3학년이었는가?
면담자 : 80년 9월에 정식으로 취임을 했기 때문에. 80년 5월, 3월, 예, 3학년때...
구술자 : 아 그렇지, 3학년때, 3학년때. 81년 3월달에 졸업했으니까.
면담자 : 그전까지는 그 대구 공고에 전두환씨가 졸업한지 모르고 있었나요?
구술자 : 몰랐죠, 광주 일어나기 전까지는. 광주일 일어나고 그 다음에 국보위 어쩌고 저쩌고 전두환 소장 이러는데, 저 새끼가 뭐 대구공고 나왔다더라 그런 이야기가 차츰 들리기 시작하드라고. 고3때. 그러나다 어느날 대, 대통령 딱 되니까 동창회에서 가급, 그...뭐 산업 (?) 141106_최영준 00:25:20 의 기수 이러면서 박정희가 그렇게 많이 해서 공고에 많은 혜택 같은게 있었어요. 빵 같은 것도 주고 그러는데, 하튼 동창회에서 기념빵 같은게 나오드라고요. 그럼 뭐 별 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고. 그러다가 이, 이따가 보니까 없던, 전두환이 다닐때 축구부가 있었는데 축구부가 없어졌어요. 없어졌는데 갑자기 축구부가 생기더라구. (웃음) 생기고 그 다음에 또 뭐, 또 강당이 없었는데 강당도 지어지고. 그, 그런걸 보면서 대구공고 인물 났네. 솔직히 나 대구공고 이런거에 대해서 내 인생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부분인데 그렇게 전두환하고 나하고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죠.
면담자 : 80년 5월 광주 소식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보통 뭐 TV죠. TV라디오에서, 언론 매체가 그게 다였으니까 그게 전부다고 생각했었고 그 다음에 뭐 80년 지나고 난 다음에 잊혀졌잖아요.
면담자 : 뭐 당시에 언론보도라는게 폭동, 폭도, 뭐 이렇게.
구술자 : 북에서 내려온 사주를 받아서 뭐 했다, 폭동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래 생각했었고. 나도 뭐 그렇게 생각했었죠.
면담자 : 크게 뭐 이렇게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것이죠?
구술자 : 아니죠.
면담자 : 그냥 지나가는 사건 사고 중에,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지나간...
구술자 : 뭐 안타까운 사건 중에 하나다. 아직은 사회에 대해서 그렇게 눈을 뜰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살면서 나혼자도 사는게 너무 힘들었던 그런 시기였으니까. 예.
면담자 : 그럼 대학은 선생님, 어디로 가셨나요?
구술자 : 예, 그니까 고3때 뭐 막연히 말썽은 아니었지만 그런 애들이 몇명이, 반에서 몇 명이 있었어요. 그니까 그 부적응자들이. (웃음) 그래서 끼리 내기를 했어요. 누가 꼴찌하나, 꼴등하나. 그렇게 해서 했는데 62명 중에서 58등으로 졸업했어요. 꼴등은 뭐 안되드라구. 아는 거는 틀리게 썼는데 모르는 건 찍었으니까. 그러, 그보다 시험 안 쳐버리는 친구가 나오고 그러니까. 내신은 그때 15등급이었는데 14등급으로 졸업했어요.
면담자 : 일부러 공부를 안하시고 시험 점수를 못 받으려고...
구술자 : 하나의 객기나 반항이죠.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 생각해요, 그거는. 그렇게 해서 하고, 사실 뭐 부모님도 어...쫌 안타까워 하셨죠. 그런 그런 대학교 진학은 그래서, 그 중에서도 좀 가깝게 쫌 하고 싶어서 대학교 전자과로 바꿨어요. 전자과로 해서 일년 재수하고 재수하고 난 다음에 영남대학교 전자과에 입학하게 됐죠.
면담자 : 영남대학교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영남대학교면 꽤, 당시 지역 학교에서는 좀 좋은 학교, 명문
구술자 : 명문 학교죠, 간신히.
면담자 : 공부를 고등학교때 그렇게 안하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시험봐서 들어가시
구술자 : 간신히 갔어요.
면담자 : 일년 재수해서 그럼 82년도에
구술자 : 예, 82학번이에요.
면담자 : 입학을 하신거네요. 전자, 전자공학과였죠. 대학생활, 대학 분위기는 쫌 어땠나요?
구술자 : 뭐 대학 분위기, 뭐 그, 그 당시에는 대구에는 뭐 데모같은게 별로 없었어요. 없었고 그러고 한가지, 대학교때 옛날에는 우리 써클이라 그랬던 동아리 활동을 했거든요. 뭘 했냐 그러면 아마추어 무선 했었어요.
면담자 : 햄? 햄이라고...
구술자 : 예, 그 당시엔 완전 최첨단이고 요즘엔 구닥다리였지마는. 그 아마추어 무선 하며는 아무래도 다른 지역 학교하고 교류가 있으니까. 다른 지역, 일학년인가 이학년때 다른 서울에서 대학 학생이 와가지고 써클 룸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데모가 뭐...그 사회 문제에 대해 잠시 비쳤던 것 같애요. 그때 생각, 그런 거 왜 해? 이런 생각 했었죠. 했었고 그때...
면담자 : 정치적인 학교 분위기는 쫌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었나요? 영남대학교가
구술자 : 전혀 무관심하고 데모하고는 거의... 내가 일이 학년때는 그런 거 없었어요.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냥 일이 학년때는 많이 놀아, 햄 동아리 써클 애들하고 생긴지 딱, 그 전해에 동아리 생겼더라고. 속아서 들어갔는데 난 뭐, 개인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인줄 알고 들어갔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무전기도 없고.
면담자 : 그럼 뭐 이론을 공부하셨나요, 여기서?
구술자 : 어 거기서 이론 공부했죠. 왜냐하면, 햄 자격증 딸라하면 이론 공부 하고 그래서야 됐거든요. 이론 공부, 말이 이론 공부지 그냥 이렇게 모여 가지고 내가 일년 재수 했기 때문에 재수하고 써클을 들어가다보니까 일학년 친구하고는, 내가 이학년하고 어떻게 말을 놓게 되고 일학년 아이, 애들이 형이라고 그러는 쫌 이상한 관계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거기서 쫌 재밌게 지냈는데 일학년 말쯤 되가지고 같은 일학년 애들이 이렇게 쫌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친구 먹자. 그렇게 해서 일학년하고 친하고 이학년하고도 이렇게 친하고 뭐 그런 상황 이었는데. 그때 그 친구들이 아직도 이렇게 친하게 지내고 그러죠.
면담자 : 일학년 이학년하고 다 말을 놓고 편하게 지내셨으면, 모이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구술자 : 뭐 그렇게 됐어요. 일년동안 그렇게 지냈으니까 어떻게 해 (웃음) 이학년하고도 말 놓고 일학년하고도, 일학년 말 되가지고 여학생이 먼저 이렇게 말을 놓기 시작하더니 일학년들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진짜 제가 그니까 3대, 1대, 2대 있었고 3대였는데 3대 간의 그, 결속력, 단합력 이런 것들이 다른 기수, 다른 대수 불허할 정도로 아직두 잘 지내고 있죠. 그러면서 하,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다들 공부 못하고 이학년때 군대, 이학년 마치고 군대 갈때 학사 경고 맞고 갔거든요. 나만 맞고 간줄 알았는데 다 이학년 거의 한 칠십퍼센트가 학사경고 맞았더라고.
면담자 : 이학년을 마치시고 군대를, 그럼 84년도에...
구술자 : 예, 그렇죠.
면담자 : 입대를 하신거네요?
구술자 : 입대하게 된 동기가 84년대, 도쯤에 미국갈줄 알았어요. 그니까
면담자 : 아 그 전부터 이게 이민을 좀 생각을 하고...
구술자 : 그렇죠, 오래전부터 가족들은. 외삼촌 먼저 오게 됐었고 외삼촌 초청하게 됐는, 이민간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이민간다는 생각 항상 갖고 있었어요. 근데 이 서류가 어떻게 잘못되고 그래가지고 어...그렇게 항상 이민간다, 간다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교서도 뭐 난 가겠지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래서 공부도 좀 약간 등한시 한 그런 경우도, 어차피 미국 가면 다시 공부할꺼니까. 그때 진짜 내가 하고 싶은거 하자 그런 생각도 있었구. 그렇게 했는데 어떻게 뭐 좀 잘못 되가지고 결국 그때까지 못가게 된거죠. 난 군대 가리라고는 생각 못했거든. 근데 형이 군대 제대하고 난 다음에 복학하게 되고. 그니까 한 집에 대학생이 둘이면 등록비가 장난이 아니잖아요. 그 당시는 넉넉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군대 가게 되게 생겼죠, 잠깐만
(전화 통화로 중단)
구술자 : 그렇게 군대를 갈수, 그니까 갈 수 밖에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어...공군도 지원해, 이왕 뭐 맞는거 빨리 가서 공군도 지원했구 육군도 지원했었어요. 뭐냐며는 저가 뭐 아마추어 무선 했으니까 통신병으로 지원하게 된 거죠. 지원하게 되 시험 쳤는데 시험치고 합격발표 난 다음에 한달 보름 만에 군대 가게 생겼, 됐어요.
면담자 : 어디로 가신건가요?
구술자 : 논산으로 가가지고
면담자 : 아니, 그, 공, 육군으로.
구술자 : 육군으로. 육군이 먼저 나왔더라고요. 공군도 시험 합격됐는데.
면담자 : 84년 언제쯤에...
구술자 : 84년 2월달이었을꺼에요. 2월달인가 1월달인가.
면담자 : 예. 그냥 초에 바로 시험 보고...
구술자 : 예, 보름 만에 그냥 얼떨결에 가게 된 거죠.가게 됐고 논산에서 그 추울 때, 하 추운거 굉장히 싫어하는데 추울 때 훈련 받고
면담자 : 2월이면 그러셨겠네요.
구술자 : 자대 배치 됐는데 자대 배치 될 때 보며는 논산에서 훈련받고 의정부로 보충들어갔거든요. 그래 의정부 거기서 전방으로 가느냐 후방으로 가느냐 그게 갈라지거든요. 군용트럭타고 가면 전방이고 버스 타고 가면 후방이고. 운 좋게 후, 버스 타게 된 거에요. 버스타고 딱 가는데 그때 인솔하던 사람이 쭉, 이렇게 인솔자들 병들 쭉쭉 보더니 나 딱 보고, 군번이 틀리거든요, 일반병들하고 지원병들하고. 군번이 틀리는데 딱 보더니, 이 새끼 누구야, 내 이름 최영준 부르니까 딱 하더니, 이 새끼 너 지원했어? 지원했지 너 특공대야. 그러드라구.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특공대 가게 된 거에요. 그때 그 당시 주특기가 특공대 필요한 주특기였고 내가 개겨서 진짜 못간다고 그랬으며는 안 갈수도 있던 상황이었든거 같은데 또 자존심은 그, 그런거 싫드라구.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특공대 끌려가게 됐어요. 끌려갔고 논산에서 훈련받고 나니까 또 그러니까 수특공훈련이라고 또 4주간 받아야되는 상황. 그 훈련 받으면서 보니까 그때 알게 됐어요. 그때 훈련 교관들이라든가 그, 그 전부 하사관이니 이런 사람들이 광주 때 투입됐던 공수부대 출신이란걸.
면담자 : 맷, 몇 공수에서...
구술자 : 뭐 여러, 칠공수 뭐 쭉 있잖아요. 그 공수, 내 생각에는...
면담자 : 공수, 교육은 같이 받습니까?
구술자 : 아니 그게 아니고, 광주 때 진압했던 공수부대 사원, 공수부대 병력들을 그대로 놔두는거 보다는 특공대를 만들어, 그때 한창 북한에 김보병 사단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대치하는 남한의 공수 특전단 말고 특공여단을, 특공대를, 만들어라, 만든다 이러면서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저 대학교 다닐때, 군대 가기 전에 그런 특공대 만든, 만든다는 이야기 들었었고, 에이 씨, 기왕 가는거 특공대 가자 이라믄서 그런 얘기를 친구들끼리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근데 내 생각에는 아마 광주 때 투입됐던 공부 부대 병력들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또 아마 특공대를 만든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거던요. 그래서 공수 부대에서 특공대로 교환, 그...그렇게 된 거죠. 공수부대가 별도로 있고, 예전에 있던 공수부대는 그대로 있는거고, 또 다른 어떤... 특공대라는 부대를 창설하게 된 거죠. 경, 예.
면담자 : 그 부분은 아마 확인을 한번 해봐야될 것 같네요.
구술자 : 81년, 82년 뭐 이럴 때 창, 쭉 창설이 됐어요. 특공대가. 그래서 수, 거기 수도군단으로, 수도군단으로 갔는데 수도군단 산하 708 특공대라는 특공대를 가게 된 거죠. 특공대를 가게 되서 거기서 특굥, 특공 훈련을 받고 그러는데 이 사람들 밑에서 훈련을 받으니까 아...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그 사람들이
면담자 : 이 분들이, 교관들이 특별히 광주 부분에 대해서 뭐 언급을 했다거나 그런 부분들이 있었습니까?
구술자 : 그러니까 지내오면서 정당한거죠, 자기들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거는 구체적으로 뭐 내가 사람 죽이고 뭐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폭동들, 거 뭐 그럴 수 밖에 없다 합리화 그런 걸 한 걸...
면담자 : 교관들이 직접 내가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출신이었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구술자 : 밧데리가...
면담자 : 쪼금만...
면담자 : 군대 이야기, 그, 수도 군단 산하의 708 특공대로 들어갔다가 교관이 공수부대 출신이었는데, 광주에 됐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 부분까지 이야기를 했는데요.
구술자 : 그리고 부대 생활에서 어...뭐야, 내 위에, 위에 고참, 내가 일,이병으로 갔을 때 한 상병 정도 되는 고참이 내 직속, 주특기의 직속 고참이 전라도 출신이었어요. 예. 근데 뭐 지금도 외모가 그렇지만 그 당시에 아주 어렸고 그러니 앳되 보이고 어...그랬으니까 그 고참이 나를 참 귀엽게 잘 해줬어요. 봐주고 그러면서, 그랬는데. 경상도 사람들 다 죽여야된다, 나쁜 것들이라고 얘기를 하드라고요. 내가 경상도 출신이지만 나한테는 어떤 해꼬지는 안 했는데 경상도에 대한 그런 증오감 같은 게 그때 그냥 느꼈죠.
면담자 : 어디 출신...
구술자 :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면담자 : 여기 아까 수도군단 산하 708 특공대라고 하시는데 이건 어디에 있는건가요?
구술자 : 수원에 있어요. 수원에 있었고, 젤 첨에 부대, 부대가, 군단 자체는 수원에 있었지마는 우리 부대는 김포공항 바로 뒤쪽에 있었어요. 김, 김포 공항 뒤에, 보자, 공병대가 있었는데 창설된지 내가 한달도, 아니 일년도 안 되가지고 갔거든요. 수도군단이라는 군대가 창설된지 일년도 안 되가 갔기 때문에 그때 부대도 없었고 그냥 공병대, 공병대 안에 얹혀서 사는, 예. 있었고. 철책 너머 바로 오면 비행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떴는거 보고 그렇게 한 일년, 일년 가까이 거기서 생활을 했었어요.
면담자 : 통신주특기를 가지고 가셨는데 그러면 거기에서 주로 맡았던 임무 같은게 뭐였나요?
구술자 : 특공대 연, 특공연대였는데 연대 본부 통신을 맡았죠.
면담자 : 무선, 무전병...
구술자 : 예, 무선, 무전병이었죠.
면담자 : 등에, 제가 그거, 그건 잘 모르겠는데 등에 메고 다니는 거였나요?
구술자 : 아니요, 그런게 아니고. 연대 본부기 때문에 상황실에서...
면담자 : 아, 상황실 무전 담당을 하셨나요. 아까 그 고참 이야기를 좀 계속 해보면, 특별히 따로 해꼬지를 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는데 인제 그런 이야기들을...
구술자 : 그니까 아 이 사람, 내가 알고 있던 광주하고 뭔가 틀린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그때 어렴풋하게 하게, 하게 된게
면담자 : 광주 이야기도 쫌 이야기를 하던가요?
구술자 : 안 해봤죠, 안 했고 뭐. 상병하고 이병하고 차이니까 그런 이야기, 군대에서 그런 얘기 안 하잖아요.
면담자 : 이때는 군생활이 몇 년 몇 개월이었죠?
구술자 : 그때가 30개월이었어요. 군대 30개월이었는데 2년, 그때 교련이 있어가지고...
면담자 : 대학에서 교련을 받고 가면...
구술자 : 3개월 혜택이 있거든요. 그래서 27개월이기 땜에, 저 군생활 진짜 힘들었어요. 왜냐하며는 내 바로 위에 고참 나보다 제대 늦게 했거든.
면담자 : 아... 딱 가니까 교련 혜택받은 이 새끼, 나보다 먼저 제대하네, 이러면서 갈구드라고요. 그러니까 왕고 노릇 한번 못 해보고 제대했죠.
구술자 : 그러면 이게 대학에서 교육을 일정정도, 교련이라는 과목을 받는 거였죠. 1,2학년 때 그걸 필수적으로 다 필수였고
면담자 : 해야되는거였나요?
구술자 : 네
면담자 : 그럼 교련 수업은 몇 시간? 주...
구술자 : 일주일에 두시간 그랬던 것 생각되요. 그걸 받으면 일년에, 일년 받으면 일년, 한달 반 정도 그렇게 혜택 주고. 이년 받으면 삼개월 혜택, 그렇게 됐으니까요.
면담자 : 그럼 그걸 다 받고, 4학년때까지 받고 가면 그만큼 또...
구술자 : 아니, 2학년, 내 때에는 2학년 까지 받았었고 우리 형 또래는, 형은 3, 3학년까지 받았어요. 교련을 그래서 45일 혜택받았죠.
면담자 : 쫌 이제 그런 것 때문에 대학에서 교련 그런 걸 쫌 못 받고, 대학 안 나온 고참들이 있으면 또 그걸로 갈군다.
구술자 : 그래, 대학교때, 군대가서 느꼈던게, 또 전부다 대학생들이니까. 군대가니까 대학교 안 나온 사람들이 많구나, 그런 생각이 첨으로 하게 됐죠.
면담자 : 그러면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을 바로 하셨나요?
구술자 : 어...그니까 오월달인가 육월달에 제대를 했어요. 제대하고 난 다음에 복학을 할라그러면 한 학기가 있어야되니까 한학기 그냥 빈둥빈둥 놀았죠. 놀면서 제가 군대에서 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워낙 그냥 심성이 내성적이고 여리다 보니까 진짜 뭐 의지할 데, 의지할 데가 없더라고. 의지할 데가 없고 그래서. 절에 다녀볼까, 성당에 다녀볼까 이래 기웃기웃 거리다가 성당에, 성당에 갔는데 뭐앉아 있으라 그러고 서가 있고, 잠시 졸다 보니까 혼자 서가 있고, 이건 이건 내가 쫌 성당은 다니고 싶은데 적응이 쫌 쉽지 않더라구. 그때 논산 때 다음에 교회를 갔는데 분위기 착, 있잖아요. 뭐 올간반주 쭉 하고 가는데 딱 앉아 눈물이 팍 나는게 막, 진짜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눈물이, 끝날때까지 계속 눈물이 흐드, 흐르드라고. 그래서 그때서부터 이렇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거던요. 이렇게. 어...자대에 가서도 참 많이 은혜받았다 그러나? 뭐 하튼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힘든 군대 군 생활에. 그리고 뭐 항상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그런 위안, 그런 걸 받아가지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했었죠. 열심히 하고 그랬는데 그것도 참 그게 우연인가, 제대할 때쯤 되가지고 군종하사관이 있는데 나한테 이야기를, 두 손 꼭 잡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 최병장, 사회 나가서도 신앙생활 하실꺼죠? 예, 그럼요 해야죠 그러니까. 자기가 부탁이 딱 두개가 있대요.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다른 건 좋은데 어...이 교회는 가지 마라 그러더라고요. 그 교단을 가지 마라그래. 하나는 도시산업선교고, 하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가지 말라 그러더라구.
면담자 : 기독교 장로회요? 기장... 왜 그 이유가 뭐였나요?
구술자 : 모르죠, 나 교회에 대해서 뭐 그때 군대에서 처음 이렇게 가게 됐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알아요. 뭐 부탁이니까 알겠다고. 대구 제대하고 난 다음에 5월달인가 제대하고 한 학기 놀아야되니까 뭐 신앙생활은 해야되겠고. 진짜 어느 교회 다닐지 막막했어요. 교회 다닐까 말까 뭐 그러다가 뭔가 큰 교회 같은데 쫌 안 맞는것 같애. 나한테. 그래서 어...옛날에 형이 다니던 교회가 있었는데 형은 인제 서울에 직장생활하고 있었을 때니까 그 교회한번 가볼까 싶어서 그래서 그 교회를 가게 됐는데. 그 교회가 대구 중심가에 있었는데,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데에. 근데 그 교회가 YMCA가 있고, YMCA에서 한 이삼십메타, 골목길에 있었어요. 골목길 딱 드가면 판자집 교회였거던요. 그 교회 쫌 만만해 보이기도 하고, 교회도 뭐 대형교회도 아니고 그래서, 형 다니던 교회고 그러니까 아뭇소리 안하고 그냥 갔죠. 다니기 시작했는데 웬걸, 목사가 설교하는데 전두환이가 어떻고 뭐 (웃음) 그런 이야기 하고, 목사 설교하면 뭐 뒤에서 사찰 형사들이 뭐 있고 뭐 그런 교회였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다니고 보니까 괜찮은 느낌이 들어가지고 계속 다녔어요. 한달 두달 다니다가, 그때가 5월달인가, 뭐하여튼 그렇게 YMCA 교회당을 지나갔는데 그 광주 5·18 사진전을 하는데
면담자 : 그때가 86년
구술자 : 86년도였죠. 86년도. 그때 이게 충격을 받았죠. 충격을 받았는데 그게 뭐냐 그러면, 어...뭐야 내가 역사 속에서 역사 공부는, 공고 다니고 이랬기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마는 뭐, 우리 민족의 아픔이 6.25라든가 양민 학살사건, 제주도 4.3 이런 거 있었던 그 가슴 아펐던 그런 사건들은 하나의 역사구 그냥 옛날 가슴 아픈 사건 있었다, 그걸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대학, 아니 고등학교 3학년때, 어느정도 사리 판단할 수 있었던 그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매스컴에서 그냥 폭동으로 기억하고 있던 그 사건이 광주 민주화 항쟁이고 그때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 고난을 당했다는거, 그걸 그때 알고 난 다음에는 진짜 (울음)
면담자 : 선생님 그 사진전을 보신게 팔십, 그 제대하고 팔십육년인가요? 그게 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했던...
구술자 : 공개적으로 전시했었어요.
면담자 : 86년에요?
구술자 : YMCA 그것도 실내가 아니고, YMCA 본관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 다 보게 그렇게 전시했었어요.
면담자 : 혹시 89년도가 아니라요.
구술자 : 86년도요. 그때 사진을 처음 보게 됐죠.
면담자 : 아직까지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데요.
구술자 : 그렇죠. 예. 그때 진짜 그...난 죄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드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모르고 있었다는거 하고 (한숨)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거.
면담자 : 혼자 사진을, 그 사진을 보셨나요?
구술자 : 그렇죠, 교회 가다가 뭐 보게됐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대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진을 봤어요. 중심가에 있기 때문에, YMCA가 중심가에 있었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었고.
면담자 : 이때가 정확히, 기억이 쫌 안 나실 수도 있겠지만 제대하고 86년, 한 언제쯤, 전시, 사진 전시를 대구 YMCA...
구술자 : 그니까 5월경이었을거에요.
면담자 : 그럼 제대하고 얼마 안 되서.
구술자 : 얼마 안 됐어요.
면담자 : 그...사진을 쫌 봤던 다른 대구 좀 시민들의 반응이랄까 그런 건.
구술자 : 놀람과 분노와 그랬던 것 같애요. 나만 그랬겠어요. 그 봤던, 봤던 사람들이... 그 분노와 죄책감, 뭐. 그러면서 이렇게 교회다니는데 솔직히 교회 간판도 모르고 이렇게 다녔었어요. 다녔는데 내가 이 교회를 다녀야되겠다 결정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보니까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라고 그렇게 있드라구.
면담자 : 수성교회요?
구술자 : 수석교회, 머릿돌.
면담자 : 수석교회요.
구술자 : 네.
면담자 : 혹시 지금 있는지 없는지는...
구술자 : 지금 있어요. 있어요. 있는데 그 장소가 아니고 다른 장소로 이렇게... 그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민주화 운동하는 중심지였죠. 그 목, 목사님이. 거기에서 신앙적인 거라든가 쫌 알게 되고 그러면서 어...사, 내가 몰랐던 부조리 이런 것들, 그런 것들을 좀 알게 됐죠. 뭐 청년회 활동하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87년도에 복학해가지고 진짜 공부 열심히 할려고 그랬는데 그게 안 되드라구요. 바깥에서 이렇게 북소리 들리고 그런데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드라구 .3월달, 4월달 그렇게 있었는데 그렇다구 뭐 그 당시 뭐 NL, PD, PD 난 몰랐는데 조직체 그런게 한참 있었는데 내가 조직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어요. 참가하진 않고 수많은 학생, 그때는 복학하고 초기에 가니까 자기 밭에 이렇게 모여서 데모하고 그러면 한 삼십명에서 오십명 정도 그렇게 앉아 있던, 그 중에 한, 한 학생으로 앉아있고 그랬는데 한 오월 정도 되니까 그때 뭐 앉아있던, 집회하고 난 다음에 가두나가서 뭐, 돌을 뭐, 떤지는 걸 원래 못해가지고, 바로 앞에 떨어지거든. 돌도 못 던지고 뭐 돌 좀 날라주고 그런 일 쫌 하다가 한 오월달 유월달 됐을까? 이렇게 당연히 집회에 앉아있던, 한 삼사십명 앉아 있다가 집회 가두 투쟁 나간다고 갔는데 보니까 뒤를 딱 돌아봤는데 오십명 육십명이 아니고 수백, 한 천여명 정도가 뒤에 있는 거에요. 그때 진짜 그 감동, 감동같은 거는 그때서부터 하여튼 87년 6월 항쟁까지 예...
면담자 : 대구에서도 그 열기가 다른 지역 못지 않게 좀...
구술자 : 아, 그쵸, 그러면서 국내 안에, 학내에서 일어나다가 그 다음에 대구 중심가로 가서 가두 투쟁 대학생 학생들하고 다 해서 가두투쟁하고 그렇게...
면담자 : 시민들도 많이 참여를...
구술자 : 많이 참가 했고 그때 학생들 하며는 뭐 빵도 사주고 물도 사주고 뭐 그렇게, 예. 그때 그 당시 어떤 해방 세상에 대한...
면담자 : 복학을 하시고 바로 맞이하셨네요. 87항쟁을, 그때 같이 인제 하고.
구술자 : 그렇게 하면서 뭐 그때 혁명이 어떻고, 혁명을 해야된다든가, 여러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던 때 난 87년 6월 항쟁을 어느 정도 마모되는 단계에 들면서 이런 생각이 들드라고. 야 이거 씨, 평생 해야되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평생 해야되는 생각, 일인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든데. 그러면서 4학년때, 4학년 초 들어가지구 취업도 준비해야되고 아니면 뭐 미국 와야되는 그런, 서류 너놓고 언제 될지 모르는데 와야되는 그런 상황, 언제, 였고 그래서 공부 열심, 공부 할라고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공부만 잘 안 되죠. 그때 또 아...분신자살하시는 학우들도 있었고 투신자살하는 학우, 뭐 있을 때마다 진짜 가슴이 아팠어요. 어떻게 함께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 보고. 그러면서 하여튼 졸업하고 졸업하고 육월달에 그 당시 뭐 졸업하자마자 이렇게 이민 서류가 진척이 되 간다, 언제쯤이면 간다 그럴 때니까 아 인자 가는갑다, 이민. 뭐 큰 데서 공부도 쫌더 하고 싶었고 그랬었어요. 공부 뭐. 미국이란 데가 대체 어떤 덴지 어릴 때부터 가슴설레게 했고 그런 데니까 결국은 한번 가보자. 그런 생각에 직장 생활하는거 보다는. 그래서 시카고로 오게 된 거에요.
면담자 : 그러면 지금 88년도에 4학년이셨구요, 89년 2월에
구술자 : 졸업하고...
면담자 : 졸업을 하셨는데 미국은 언제...
구술자 : 육월달에 오게 된 거에요.
면담자 : 89년 6월달에. 결정이 언제난건가요? 이민이...
구술자 : 계속 뭐 서류 프로세스됐다 그러고 89년 초에 결정되서 언제쯤 올거다 구체적으로 이게, 건강검진 받고 이런게 나오드라구요.
면담자 : 그 이민이 부모님께서 이민을 결정하시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뭐 있으신가요? 뭐 어떤 연고가...
연고가 있었고. 외삼촌이 먼저 왔었고. 외삼촌 초청으로 오게 됐는데 아무래도 뭐 어려운 경제 사정이죠. 잘 먹고 잘살았으면 왜 왔겠어요.
면담자 : 아니 그래도 외삼촌이 여기 계시긴 했어도 이민을 결정한다는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구술자 : 그 당시만 해도 기회였으니까.
면담자 : 거기 미국을 간다는 부분에 대해서, 이민을 간다는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 크게 걱정이라든지, 가기 싫다거나, 뭐 그런 두려움이나 그런건 없었습니까?
구술자 : 뭐 두려움 같은 건 별로 없었고, 한번 가보자, 뭐 기회니까 그렇게 생각했죠.
면담자 : 89년 6월에 인제 이곳에 시카고로 들어오게 됐는데 그때가 처음이었죠, 미국은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러면 시카고로 처음 들어오셔서 부모님이 하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신일은
구술자 : 먼저 아버님 오셔가지고 아버지는 건물 청소 하셨어요 제니터(janitor: 경비원)
면담자 : 아, 그게 지금.
구술자 : 아버지는 87년도에 오셨죠.
면담자 : 아, 아버지, 부모님은
구술자 : 아버지하고 동생하고 먼저 와갖고
면담자 : 87년도에 먼저. 예. 그럼 선생님만 서류가 좀 준비가 늦고 그래가지고 89년도. 그러면 그 한 2년간 어디서 사셨나요?
구술자 : 2년 동안 학교 다녔으니까 학교에서 자취했죠.
면담자 : 아버지가 인제 뭐 건물 청소하는 뭐 그런 청소 일을 하시고,
구술자 : 어머니 세탁소에서 바느질 하시고. 동생은
면담자 : 동생은, 그 학교 다니면서 주유소 알바하고 뭐 그런 상황이었어요.
구술자 : 대학, 대학은.
구술자 : 그때 대학교.
면담자 : 시카고에 있는 대학이었나요?
구술자 : 예,예.
면담자 : 선생님은 들어가서 뭐 어떤, 졸업, 취업을 생각을 하셨겠네요.
구술자 : 그러니까 공부는 더 하고 싶지만, 실력이 있든 없든 공부는 더, 전자학하는, 그냥 꿈이 그거였으니까. 공부를 더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어서. 잘 하지 못하지만 그래 생각했었는데, 또 나이 스물일곱에 갔었으니까 부모에게 손벌리기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러면 누가 직업을 소개시켜줘가지고 첨에 잡었던 직업이 카 스테레오 같은거, 카 스테레오나 엠프 뭐 무전지 이런 것 수리하는데 한인 업체에 들어갔어요. 그니까 원래 제품을 미국서 사서 맘에 안 들어가 고장나거나 그러면 반환하거든요. 반환하면 그걸 모아가지고, 회사에서 모아서 그걸 또 수리해서 또 B급으로 파는 게 있어요. 여기서는 리퍼비쉬(refurbish)라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일하게 된 거죠. 한 이년 정도. 예.
면담자 : 어제 말씀 하실 때 처음 87년, 89년 6월에 들어오셨을 때 임수경씨가...
구술자 : 그니까 일을 하면서 뭐, 쫌 은젠간 하게 되겠지만 사회에 대해서 쫌, 일단 앞가림을 해야되니까, 언젠간 하게 되겠지만 좀 접어두자,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한청련의 존재는 알았어요.
면담자 : 아, 그 한청련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알고 계셨구나.
구술자 : 언젠간 조인하겠지마는 그냥 좀 앞가림부터 먼저 하고 그런 생각들을 했었거든요. 왜냐하면 그것도 우연인지 모르겠는데 미국오기 전에 바로 공항에서 심심해서 비행기타면 심심하니 책을 두 권 샀는데 하나는 영어 회화책이고, 하나는 문병란 시인이 쓴 그, 문병란 시인이 광주 와서 어...합수 형님 만나고 뭐 하면서, 하고 난 다음에 후기로 시집을 발간했드라고요. 그 시집을 샀거든요. 그걸 사서 이렇게 비행기에서 이렇게 보면서 죽 이렇게 한청련에 대해서 알게 되구 언젠간 조인해, 해야지, 그런 마음을 먹고 왔엇어요. 그래 되서 왔었고, 왔는데 그때 보니까 국제평화대행진하고 보고대회한다 이러면서 포스터가 이렇게 붙어있드라고요. 그래서 가까마까 가까마까 망설이다가...
면담자 : 그게 시카고에서 했었습니까?
구술자 : 왜냐면 시카고에도 있었으니까. 여기 마당집이, 마당집이라는게 LA에만 있는게 아니고. 그때 당시만 했어도 여기 LA에 있었고, 뭐 북가주에도 있었고, 시애틀, 뭐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 뭐 뉴잉글랜드 이렇게 죽 많이, 합수형님이 조직하고 다녔으니까. 그때 그렇게 있었거든요. 그렇게 있어서 시카고에 그렇게 직접 갔다 오신 분들, 뭐 보고 대회 한다고 그러니까 그때서부터 조인하게 된 거죠. 마당집 같은 데 조인하게 되고 어... 그 계, 계기로 인해가지고 여태까지 오게 된거죠.
면담자 : 그게, 그게 몇 년도 인가요?
구술자 : 89년.
면담자 : 9년.
구술자 : 89년. 그러니까 이민 오자마자 한달만에 뭐 활동 조인하게...
면담자 : 그럼 들어와서 그, 카 스테레오, 엠프 수리하는 한인업체는 바로 들어가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 예, 그것도 한 한 달만에 이렇게 들어가게 됐어요.
면담자 : 그럼 그것도 거의 동시에 뭐 이런...
구술자 : 일하고 일하고 그래서 동시에, 낮에는 거기서 일하고, 일도 마치고 나면 마당집 와서 같이 있었고.
면담자 : 이 앰프 수리점에서는 어느 정도 버셨나요, 벌이는?
구술자 : 그때 한달에 처음에 5불 받았어요.
면담자 : 한달에?
구술자 : 시간당.
면담자 : 시간당 오불이요?
구술자 : 초보니까, 초보, 초본데, 초보가 아니니까. 그때만 해도 전자 지식이 있고 바로 이렇게 고치고 일을 하니까 쪼금 올려주더라고요. 그렇게 했는데 그 당시에 경기가 팔십구년도, 구십년도에 미국 경기가 안 좋을 때였어요. 안 좋을때라가지고 한 이년 일하고 나니까 그...일거리가 떨어지고 그래서 더이상 그 오너가 유지하기 힘들게 됐거든요. 그러...한 일년인가 이년하다가 그렇게 되서 얼핏 누가 복사기가 괜찮다고 그래가지고 복사기 사업 하는 한인 업체에 취직하게 됐죠. 그래서 아마 시카고에서 그 이후에 한, 한 삼년 정도 미국회사, 사년 정도 미국회사 일하다가 삼, 내 개인 사업 하게 됐어요. 복사기. 그래서 생계는 뭐 복사기 고치는 걸로 생계(?)141106_최영준_02 00:36:06 이어지고.
면담자 : 엠프 수리점에서 한 이년 정도 일 하시고.
구술자 : 그 나머지는 전부다 시카고에서 복사기 관련 일을...
면담자 : 개인 사업으로 본인이 직접 이렇게 사업으로 시작한건 언제셨나요?
구술자 : 미국 가서 한 시카고에서 한, 사, 사오년 정도.
면담자 : 그 복사기를 고치는 그런. 오너셨나요
구술자 : 예, 복사기 출장 수리. 주로 출장 수리.
면담자 : 사시는 데 크게 뭐 지장이 있다거나 그런
구술자 : 그런 건 그런건, 없었고 하튼 뭐 어... 첨에 일년 동안에 그렇게 뭐 그냥 왔다 갔다 했지마는 중심, 그냥...관여안하고 있으니까 일년동안 한 만불정도 모았아요. 그래서 나중에 집살때 이렇게 좀 보태기로 했는데 그 다음 일년부터는 광주 5·18이고 본격적으로 한청련에 가입하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한청련 회비가 그 당시에 한 백불 정도 했어요. 오십 불 정도 하고 이것 저것 내다보면 백 불정도.
면담자 : 한 달에요?
구술자 : 한달에 천불도 못 버는데 이야, 이건 너무 쎄다.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조직 그거였으니까. 조직원으로서 회비 정도는 내고 뭐 이것저것 활동 하다보니까 난 나중에 보니까 첨에 분명히 나 미국 일년 동안 직장 생활했을 때 한 만불 모았는데 그 다음부턴 돈이 없더라구. 모아진 돈이 없드라구. 분명히 나 딴데 술마시고 그런 짓도 별로 안 하고 그랬는데.
면담자 : 그 재미 한청련이, 이게 그 도시 별로 어떤 지부 형식에 그렇게 있엇습니까?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시카고, 한청련 시카고 지부였던 거에요?
구술자 : 예. 그니까 여기에 그, 여기에 이제, 이제는 제가 한청련이 없어졌지만 마당집이라는, 여기 민족 학교가 있고 그 다음에 별개로, 정치 조직으로 그 다음에 한청련이란 게 있었죠.
면담자 : 그러면 거기, 시카고에 계셨던 거에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시카고에 한청련 소속되어 있는, 쫌 소속원들이 한 몇 분정도 계셨습니까, 활동하실때?
구술자 : 한 열명 미만이었던거 같애요. 그렇고 뭐, 내가 갔을 때 보니까, 아시죠, 뭐 조직 사건이 일어나고 그런 것들이 있어가지고 초창기에,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도 그렇고 다른 데도 그렇고 초창기에는 좀 나름 이렇게 인재들이 있었어요. 공부, 가방 끈도 길고 머리가 좋고 그런 사람들이, 일단 광주에 대한 이게 아니다 싶어서 이렇게 많이 활동하셨던거 같아요. 에리뜨들 있었고 그 다음에 호남 향우회나 이런 데, 쫌 의식있는 외국의 매체를 통해가지고 광주의 실상을 보고 이렇게 있던, 있었던 사람들 반면에 한청련 같은 경우에는 아주 똑똑한 에리뜨들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합수형님의 카리스마나 이런거에 의해서 쫌...글쎄 그...자기 살아온 습관이라든가 그런게 쫌 안맞는 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나가신 분도 꽤 되고. 뭐 서재정 교수라든가. 이런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한두차례 그러게 나가고 난 다음에 89년도에 난, 나가고 어느 정도 정리되고 뭐 쫌 어떻게 보면 우직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남아있었고. 그 다음에 시카고 같은 경우에는 특히 뭐, 중학교, 고등학교, 학, 고등학교 애들이 몇명 남아가지구 쫌 있었고 고등학교 성장해서 지금 대학교 다니고 그러고. 어른들 몇 명하고 한 열명 내외 그렇게...
면담자 : 그러면 전체적으로는 몇분 정도나 있었을까요?
구술자 : 전체적으로 LA는, LA는 상당했었고 뉴욕도 그렇고. 한번 대회 하며는 마 그때 80, 2년마다 한번씩 이렇게 같이 모였거든요. 뉴욕이나 LA이렇게 모였을 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 이, 이백여명은 모이고 그랬어요. 그때만해도 일본에서도 오고, 호주에서도 오고, 유럽에서도 대회할때 90년대 같이 와가지고 해외 한청련 대회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만, 단순히 어...광주를 잊, 그냥 잊지 말자, 그런게 아니고. 물론 해마다 광주에 대한 주도적으로 시위에 나갓었고 뭐 호남향우회하고 같이 그렇게 했었지만 어...타민, 미국과 관련된 평화적인 시위라든가 그런 것도 같이 참여했었고 특히 한반도 평화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해외 동포 역할로 꽤 많이 활동해왔었죠.
면담자 : 그럼 선생님이 시카고 한청련 회장을, 회장을 맡으셨...
구술자 : 어...그때가 함 보자, 80, 91년돈가, 아 90년도 저 되서 일년 활동하다 일년 후에 한청련 회장을 하게 됐었어요.
면담자 : 91년이었던가요?
구술자 : 90년돈가 91년이었던가 그럴거에요. 제가 한청련 활동을 2년 했었어요. 2년 했던, 활동했는데 에, 1년은 그냥 했었고 2년째 접어들면서 아마 한청련 회장을...
면담자 : 가입 기준이 있었습니까?
가입 기준은 없었고 서로 간, 한 몇 개월동안, 서로 간보면서 이렇게. 그것도 가입하려면 좀 구술자 : 까다로웠죠. 이렇게 학습하게 되고, 여러 사람이 이렇게 주위 추천하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어...간보는 기간만 해도 한 육개월 정도 됐나, 그렇게 됐을 거에요.
면담자 : 자격 조건이라든지 그런게
구술자 : 뭐 학력이나 그런 건 없지마는 조직원으로서의 그런게
면담자 : 나이는?
구술자 : 나이는 없었고, 품성이죠.
면담자 : 2년 활동을 하시고 그만 두신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 그러니까, 시카고라는 조직이 좀 특이하드라고요. 이렇게 다른 타, 대회하고 다른 지역에 이렇게 보니까 뭐 괜찮은 것 같은데 시카고란 조직이 보니까, 어...전에 조직을 이끌어왔던 사람이 신상 문제로 그만두고 타주로 가게 되, LA로 오게됐나?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뉴잉, 뉴잉글랜드에서 있던 조직원들이, 뉴잉글랜드의 학교, 좋은 학교 다니시던 분들 많으니까. 의사분, LA있던 분들이 또 갈라져가지고 각 지역으로 뉴욕이라든가, 오게 되고. 시카고 같은 경우에는 의, 최관호라고 의사 하시던 분이 오게 된 거에요, 지역 담당으로.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필라아니라 뉴욕에선가, 그때 제가 시카고 가면 장광민이라고 만나게 될텐데 그 친구가 상근으로 오게 되고. 그 다음에 뭐 한익수란 친구가 있고, 신문기자 하던 친구 있고. 그래서 열명 내외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고, 모여가지고 이렇게 조직 활동을 하게 됐는데 어...회비, 회비는, 경제적으로 좀 그렇다 치더라고 이게 뭔가 인간관계가 이게 좋은 일을 하자고 모였는데 하, 쫌 강압적인 분위기 이런거라든가 그런 걸 느꼈어요. 답답함, 예. 하, 이것 나는 이렇게 조직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마는 친구들끼리 대학때 동아리에서 술마시고 그래도, 그 친구들하고 관계도 그렇게 좋았는데. 이런 좋은 일 하는 조직 안에서 이게 너무, 숨쉴 틈이 없다.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조직 안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도 없어지는 것 같고. 근데 나, 내가 조직, 그 당시에 한청련 회장은 맡고 있었지만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껴가지고 그걸 회장으로 타지역의 그걸 못하겠드라고요. 그냥, 예. 좀 지도부의 좀 문제가 난 느끼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회장 딱 그만 두는 날, 안 한다, 활동 그만 둔다 그렇게 하고 탈퇴하고 연락하지 마라 그러고 나와버렸어요. 나오고 난 다음에 한 몇 달 정도는 아, 신경 끄고, 너무 힘들어, 나도 힘들어가지고 그때 정신과 상담도 받고 그랬거든요. 희사한테 상담받고 그러니까 그 의사가 이런 말을 하드라구. 어떻게 내가 그랬을까, 한국에서도 이렇게 까지 친구 사이도 참 잘 지냈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힘, 하드 타임을 주는지 모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한테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 보니까 내가 못 견디겠더라구. 그래서 그런 얘기 하니까 정신과 의사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거라구. 그 이야길 하는데 이게 이해가 되드라구.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가. 그러구 있었는데.

(DV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면담자 : 혹시 그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
구술자 : 시카고 가면 만날 장광민, 또 그 다음에 김남훈이라고 그, 아마 시카고에서 만날 수 있을 거에요. 아마 그 친구가 고등학생일때부터 봤으니까. 그리구
면담자 : 김남훈인가요?
구술자 : 네, 그리고 나카섹(NAKASEC: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 사무국장으로 있는 윤대중, 이 친구도 고등학생때였었고.
면담자 : 이 시카고에서 같이 활동을...
구술자 : 했었어요.
면담자 : 선생님을 좀 힘들게 하셨던 분은 없나요?
구술자 : (웃음) 의사, 의사 최관호란 사람하고.
면담자 : 지금 말씀하셔도 됩니다.
구술자 : 아니, 괜찮아요. 최관호란 사람하고 그 다음에 신문기자였던 한익수란 사람하고.
면담자 : 한익수 선생님하고, 최?
구술자 : 최관호.
면담자 : 최관호라는 분. 지금 이분들은 지금
구술자 : 지금 최관호씨는 뉴욕에 있을 것 같고 한익수씨도 뉴욕에 있는데 아마 생사가, 지금, 아프다는 소릴 들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참 안타까운 친군데 능력, 다 능력 있는 사람, 사람이고 그런데 음...그래서 이 사람, 조직, 이렇게 조직한테서는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만 조용히 사라지면 뭐 괜찮겠다 싶어서.
면담자 : 활동하는 데 있어서 각자의 생각들이 쫌 다를 수도 있고 욕심, 방향성 문제일 수도 있고 그런...
구술자 : 그게 아니고 은근히 사람을 쫌 하드타임주는 그런 스타일. 못 견디게 하는 그런. 그래서 그만 두고 한 몇 달 정도, 한 서너달 정도 있었는데, 소식 연락 끊고 있었거든. 그때 가까운 지인한테서부터 연락이 왔는거에요. 그때 어, 시카고 마당집이, 마당집 이름이 어...청년교육문화원이었어요, 그 당시에 청년교육문화원이었는데 어...청년교육문화원이 해체됐다는 거에요. 아 그때 번듯하게 뭐 여기처럼 큰데는 아니었지만 사무실 공간도 있었고 그랬거든요. 근데 야, 그거 해체됐는거 아냐? 그러드라구요. 그것도 시간 한달 정도, 시간 한 한달정도 지나고 난 다음에 일았어요. 연락 끊고 있었으니까.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가지고. 그때서부터, 저는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이게 젊은 친구하고 어른들하고 싸워서 나갔다, 떨어졌다 이러게 됐는거에요. 아,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건가 싶어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떨어진, 다 젊은 애들하고 최관호하고 한익수, 최관호 한익수 이 사람들이 그때만해도 어른, 어르신들이 꽤 있었거든요. 어른들 모임만 해도 한 열명 정도 됐을 거에요. 하튼 그 어른들하고 따로 나가, 따로 나간게 아니고 젊은 애들을 쪼까(쫓아)보낸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뜻에 안 따르니까 쫓아버리고, 그 다음에 마당집 폐쇄시키고 그런 상황이었었고. 그래서 이게, 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거의, 근 한달 동안에 이 사람들 저 사람들, 양쪽 사람들 다 만나게 됐죠. 만나면서 이게 하나의, 그러니까 조직 사건이었는데 타, 그 시기에 뭐, 뭐 정기열 어제 나왔던, 박사학위 받았던 정기열이란 사람하고 뭐 이런 사람들이 시카, LA도 그렇고 하튼 조직의 중, 중견, 중견이, 아니 리더그룹들, 리더그룹 중에서 일부가 그렇게 떨어져나가게 된 거죠. 떨어져 나가게 된 그 시기가 아마 합수 형님이 한국에, 한국에 가던, 가시던 그런 시기였나? 아, 그렇지. 형님 한국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그때 났던 조직 사건이었죠.
면담자 : 윤한봉 선생님께서 귀국하신게 김대중 정권때였나요?
구술자 : 아니요, 김영삼 정권 때요.
면담자 : 김영삼 정권때, 그럼 구십사년 오년 그쯤이었던것 같은데요.
구술자 : 구십사년 오년 때였으면 아니다, 뭐 합수 형님 있을 때였든 것 같애요. 아, 있을, 있었을 때. 차 그렇게 나가서 이사람들은 다른 단체 꾸려서 활동하게 됐구, 그러고 그러고 나니까 난 후배들한테 참 미안하게 된 거죠. 난 내 혼자 나가면 모든 게 잘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 뭐, 마당집도 뺏겼고 그 많은 자료들도 다 뺏겼고. 그냥 그 사람, 자기 지금 장광민이란 친구가 그...그때 상근하면서 마당집에서 자고 그랬는데 아파트 하나 얻어가지고 그냥, 작은 스튜디오 하나 얻어서 생활하고 젊은 친구들 거기에 모여가 있더라구요. 그래 이야기 죽 들어보고 내가 정리하고 니들하고 같이 하겠다, 그때 한청련, 그게 한청련이었고 이게 (? 141106_최영준02 00:53:53) 그때서부터 다시 같이 활동하게 되죠, 하면서 어떤 후배가 그러드라고요. 형이 같이 있었음 마당집은 안 뺏겼을텐데 그런 이야길 하드라구요. 아...그게 참 미안한, 나한텐 또 하나의 멍에고 그렇게 했는데. 거기에서 젊은 친구들 한 일년 정도 모여가지고 같이 활동하다가 그...다시 마당집활동, 마당집을 임대하게 됐죠. 임대해서 다시 활동하게 됐는데 그게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라고 지금 아직도 시카고에 있는.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고. 진짜 젊은 친구들이 열심히 희생적으로 해가지고 그렇게 만들게 됐죠. 그렇게 만들게 되고 그 다음, 어...이사장 조직을 만들고 꾸려나가야되니까 이사장 누가 할까, 처음에는 이렇게 이 사람 저사람 좀 명망갈 할라 그래도, 이미 한청련, 뭐 마당집이라면 찍힌 단체니까. 그 누가 빨갱이 단체로 찍혔는데, 누가 뭐 이렇게 대표성을 해줄 사람도 없고. 우리 자체 내에서 하자 그렇게 해서 첨에 제안은 여성 회원중에서 하자 그렇게 해서 뭐 변호사하고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하기로 했었어요. 하기로 했는데 딱 마당집 설립 기념식 하고 딱 띄우기 일주일전인가 이주일 전에 못하겠다 이렇게 된 거에요. 못하게 됐다 되서가지고 한참 얘기하다가 나중에 형, 나보다, 형밖에 없다 그렇게 되가지고 제가 뭐 30대 초반에 능력도 없고 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고 그런데 거절을 못하겠드라구요. 왜냐면 나때문에 그렇게, 내가 없었으면 마당집이 그 당시에 어떻게 됐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켜낼 수 있었는데 싶은 생각이 들어가지고 그때 최초에 한인교육문화마당집 생기고 난 다음에 이상장 맡게 됐죠. 한 육년 동안 이사장 했었어요.
면담자 : 몇 년도에 이게 다시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라는 이름으로
구술자 : 구십, 그..그러니까 93년도 94년 정도 됐을 거에요. 아마 자세한건 시카고에서...
면담자 : 94년도...주로 이러, 이곳에서 했던 일이 뭔가요? 주로 이게,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에서.
구술자 : 그 당시 그렇게 타이밍이, 항상 이게 마당집이란 단체가 우리가 시카고에만 있는게 아니고 뉴욕, 그 담에 LA에, 북가주에 있었으니까 그 당시에 딱 흔히 이렇게 하는 얘기로, 딱 고기로 딱 우리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 뭐 이런것만 생각했었는데 그 당시 고개를 딱 돌려보니까 이민자들의 삶이 척박하드라는 것. 삶 자체도 척박하고, 그 다음에 경기가 안 좋을 때에 무조건 타겟이 어떤 이민자들한테, 미국 정부나 모든 시스템이 오는데. 찍소리도 못하고 있고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이민자 개혁, 이런거에 쫌더 마당집같은 경우에서는 쫌 힘을 쓰게 되고. 첨에 각 지역마다 접근 방식이 좀 대동포 아우르는 층에 활동을 해야된다. 해마다 우리가 뭐 이렇게 2년마다 대회 할때마다 하나의 표어를, 두 개의 표를 이러게 정했어요. 뭐 어떤 날은 ‘한손에는 뭐, 아니지 꾸준한 학습을 하자, 운동의 생활화, 이런 것도 있었고 그 표어 중에서 한 손에는 동포 사회를, 한 손에는 조국을, 이런 표현도 있었고. 그 당시에 나왔던 표어들, 90년대에 이렇게 나왔던 때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이민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당집이 처음 하게 된 게 무료 세금 보고, 여기는 연말 정산, 한국에서처럼 하잖아요. 초에 무료 세금보고를 하게 됐죠. 그렇게 하면서 아, 마당집이라는데 한번 빨갱이 단체 뿐만 아니고 동포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도 하는 구나, 그런 인식을 좀 바꿔나가는 계기. 그렇게 하면서 거...이민자들, 그 당시만 해도 당하고 만 있었지 이민자들의 권리를 대변해하는 단체들이 한인, 거의 없었거든요. 한인 뿐만이 아니고 뭐 있다, 타민족 같은 경우에도 있다손 치드래도 쫌 부족한 상태였었고. 90년대초에는 경기도 나빠지고 그런거, 그런때에다가 자포자기, 뭐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어...마당집들이 이래선 안된다,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좀 적극적인 이민자 권리에 대처해야되겠다 해서 만든게 나카섹이 그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나카섹이 만들어지고 어, 타민족하고 연대해가지고 워싱턴 포스트지나 뭐 이런 데에 우리가 광고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 광고 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서 뭐 꽃도 팔기도 하고, 그 다음에 심, 뭐, 모금함들고 마켓이 가서 모금도 하고, 각지역에서. 그런 일을 활동 하면서 점차 이민자들 권리 옹호를 위해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죠.
면담자 : 그, 다시 쫌 한청련하고 한겨레 쫌 그쪽 이야기로 약간 다시 돌아와서요. 한청련 활동을 하실 때는 인제 주로 조국의 통일, 민주화, 인제 그런 것에 중점을 인제 활동들을 해오셨던 부분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뭐, 아직까지는 전두환, 노태우, 노태우 정권 하에 있었던 것 같고. 5월 문제가 완,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던 그런 부분도 있는데 인제 꼭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5월 문제 해결을 교민사회에서만, 특히 한국 교민사회에서만 관심을 가져주고 열심히 활동들을 외국에서도 이렇게 진행을 해오셨어요. 주로 인제 한청련에서 선생님 아는 범위 안에서 5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 안에서, 쫌 이렇게, 동포 사회 안에서 그때 당시 활동을 했던 내용들을 쫌 말씀 해주신다면요.
구술자 : 아마 해마다 틀려졌는데, 그때까지, 저저저 90년대 저 기억하기로는 5월 한, 몇 년동안은 계속 그렇게 했던 것 같애요. 광주 비디오, 그 상영회하고 그 다음에 연사를 모시고 뭐, 연설을 듣기도 하고. 특히 시카고에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가 있었고 그랬거등요.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모셔가지고 강연회 한 적도 있었고, 그 행사는 빠지지 않고 호남향우회하고 같이 보통 했었죠, 했는데. 구체적으로 뭐 제가기억이 안 나요. 시카고 활동은 장광민이 잘 알고 있으니까 좀 그렇게...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그럼 한겨레, 저도 한겨레라는 조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조직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한청련과는 또 어떤 다른 점이 있는 건지 저는 그것 까지는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
구술자 : 그러니까 합수형님이 오셔가지고 영향받았던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 뿐만이 아니고 그 당시 형님 오기 전에도 미국서 각 지역에서 민주화 5월 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꽤 있었어요. 뭐 은호기, 은호기 선생님도 계시고, 각 지역에서 계셨는데, 이 분들은 뭐, 극소수죠. 소수의 모임에서 이렇게 그건, 나이 드신 분 전담 붙이고 뭐 열심히 활동 하셨는데. 그 영향력은 쫌 미비하셨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합수형님 오시고 난 다음에 젊은 단체 모임, 뭐 마당집이 갑자기 있고 그 다음에 한청련 조직이 결성되고 그러면서 어...그 어른들 중에서 합수형님하고 연대하셨던 분들이, 뭐 지금 돌아가신 최...까먹었는데, 저기 사진 계시는데, 최진한 박사님 하고 뭐 은호기 선생님도 도와주셨고 그랬지마는. 여러 어른들이 있었으니까 그 어른들을 어...쫌 모아보자, 그래가지고 젊은 사람들은, 원래는 40세 이하 연령제한이 있어요, 한청련은. 40세. 첨에 40세 이하 그렇게 됐을 거에요. 그렇게 연령제한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한 청련이었고. 그거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같은 활동 하지만 그, 쫌, 나이 드신 분들 하고 같이 이렇게 해서 한겨레라는 조직을 만들게 됐죠.
면담자 : 어떻게 보면 한청련 활동을 하셨던 분들이나 쫌 아니면 쫌, 그 연령이 있으신 분들이...
구술자 : 그 전에 활동하시던 분들이요. 예.
면담자 : 주로 그 내용은, 활동하신 내용은, 크게 뭐 한청련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어떤 그런 내용들이셨나요?
구술자 : 네, 일부 지역에서는 활발하게 움직였던 지역도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쪼끔 뭐, 아닌 지역도 있었고 지역마다 이렇게 편차는 좀 있었지만 한겨레 조직이 있었는데 그게 뭐 계속, 한청련에서 계속 지속되다 어느덧 보니까 우리도 청년이었던데 20대 초중반, 뭐 후반 이렇게 시작했던 사람들이 십년이 이렇게 지나가니까 나이가 묵고 30대 40대 되서 자연적으로 어, 35세, 40세였다가 35세로 연령이 한청련이 줄어들면서 그래 또 자연적으로 한겨레로 옮겨나가는 그런 상황이었죠.
면담자 : 선생님 그러면 그런 활동들을 해오셨던 분들을 전국적으로, LA뿐만 아니라 시카고, 뭐 샌프란시스코, 뭐 시애틀, 뉴욕도 있고 워싱턴도 있고 여러지역으로 미국도 나뉘어져 있는데, 이게 하나로 쫌 조직, 물론 이제 그 윤한봉 선생님 오셔서 꾸려진 부분도 있고 기존에 그쪽에서 활동하고 계셨더너 분들을 조직으로 인제 엮어서 하나 되게 했던 부분들도 있는데, 지금 이제 그분들 모임을 제가 90년도까지는 계속 있었더너 걸로 알고 있거든요, 90년도 까지는요.
구술자 : 네, 예. 그렇죠. 90년대 후반까지 있었죠.
면담자 : 지금도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없죠. 한청련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한겨레도 없어졌고.
면담자 : 그럼 인제 지역 거점 이런 단체별로 따로따로 인제 움직이고 있다라고 보면 되는건가요?
구술자 : 아마 따로따로 개인개인이 그렇게 움직이는데, 지금 참 아쉽고 아쉽지마는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고 또 아시겠, 아시죠. LA하고 뉴욕하고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내가 그래서 선배로서 바램이 그것만이라도 좀 다시 관계 복원했으믄 하는게 바램인데. 바램이고, 나는 기다린,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가끔 LA하고도 연락하고 있는, 있는데. 왜냐, 우리가 통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겨우 뭐 개인적인 문제로 쫌 상처받고 상처 주고, 상처받고 그런 교우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해야되나. 그러, 그리고 한가지 더, 이 문제를 해결 못하며는 한국이 진보그룹내에서의 통합진보당사태라든가 그런거에서도 함께하지 못한다. 우리 작은 갈등, 이런 것도 해결 못하고, 진보는 (141106_최영준02 01:08:17) o o 의 정치에 의해서 뭐 없어지고, 보수 저 나쁜 놈들은 이익을 위해서 서로 뭉치고 있는데.
면담자 : 그런 뭐, 선배님으로써 그런 아쉬움은 있으실 것 같애요. 저는 자세한 상황까지는 모르고 약간 저 표면적으로 그런 이야기만 전해들었고 내부 상황까지는 저는 잘 모르는 편인데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좀 많으신 것 같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구술자 : 나는 뭐 주변이 아니고, 있으니까 그냥 (한숨) 늘 바램이죠. 바램으로 있고. 조만간 힘들더라도 그게 내 역할, 지금 현재 조직의, 여기 남아 있는 조직한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면담자 : 뭐 특별히 함께, 당시에 뭐 9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 인제 이민 오셔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 좀 활발하게 좀 활동을 하실 때 뭐 가장 좀 기억에 남으신 일이라든지 사건이라든지, 그런 분들, 혹시라도 사람들이라든지 그런... 말씀해주십시오.
구술자 : 뭐, 글쎄...그니까 시카고에서는 쪼금 그랬지만 타 지역 갈때마다 아 이게, 조직원들이 다들 괜찮았어요. 물론 그 지역에서도 다들 쫌 문제가 있었겠찌만 괜찮았고. 야, 어떤 해방 세상 그런 것들을 같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울려가지고 어떻게 미국, 이 넓은 미국에서, 미국 온지 얼마 안 되가지고 뭐, 어떻게 뉴욕도 가보고 뭐 DC, 워싱턴 DC도 가보고 LA도 가보고. 뭐 그렇게 하면서 여러 사람들 사귀고 이런 것들이 내 인생에서 아주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죠. 어떻게 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LA여기까지 와가지고 이렇게 있겠어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도 그렇고 많은 분을 알게 되고 뭐 또, 쫌 전체적, 세계나 역사를 좀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같은게 생겼는게 인상깊고, 특히 또 시대적으로 봤을 때는 어...그... 남북 동시 유엔가입했을 때 그때 물론 나...그때도 뭐 유엔앞, 유엔청사 앞에서 백악관 이런데 시위에 같이 한 적도 있고 그런 것들도 기억에 남고. 동시가입 했을 때 물론, 어, 전 직전 유엔에 가진 않았지만 같은 조직원으로써 이렇게 뿌듯. 합수형님 그때 그런 얘길 하드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 어, 공식적으로 이렇게 분단이, 분단이 확고하게 된 나라인데 그걸 한민족, 그 안에서 그, 아무도 반대를 안 한다며는 진짜 부끄러운 일일수가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 가는 상황이지만 거기서 많은 조직원들이 그, 그 양국 국기가 올라가는 상황 속에서 반대하고 그랬든게 참 기억에 남고 그러네요.
면담자 : 그, 미대사, 뉴욕에 있는 미국대사관?
구술자 : 유엔 유엔본부.
면담자 : 아 유엔본부 앞에서였나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 5월 진상규명운동할때 피켓들고 시위는 뉴욕에서 할 때는 대사관 앞에서 하셨나요?
구술자 : 같은, 각 지역마다 틀렸죠. 뭐 여기서 했으면 영사, 영사, 영사관에서 했을꺼고. LA에서는, LA에서는 영사관 앞에서 했을 꺼고, 그리고 시카, 뉴욕같은 경우에는 대사관 앞에서 그렇게 했을 꺼고. 뭐 DC 같은 경우에는 그런데. 또 시카고 같은 경우에는 하, 시카고는 어ᄄᅠᇂ게 그렇게 된지 모르겠어요. 영사관이 다운타운에 있어요.
면담자 : 예, 한국영사관이요?
구술자 : 예, 한국영사관이 다운타운에 있는데 다운타운 또, 다운타운의 외곽에 있어요. 인적이, 해변가에, 아주 NBC타워라고 채널 파이브 NBC 방송국이 있는 건물에 들어가 있는데, 미국 주류 사람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미국 주류 사람도 잘 안가는 그런 아주 외곽에 있어가지고 뭐 우리가 데모를 한들 영사관에서 아무런 그게 없었거든요. 효과가 없고 그러니까. 대신 우리는 그 당시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80년대까지만 해도 로렌스(Lawrence) 라는 길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그래서 노라, 로렌스길로 이렇게 진상규명이나 항의하는 시위를 해마다 그렇게 했었죠. 영정사진 들고 가기도 했었고, 뭐 모의 관 들고 시위하기도 했었고.
면담자 : 시카고에 당시에 한인들이 한 몇 분정도 거주를 하고 계셨나요?
구술자 : 그때 뭐 당시 한 십만 정도로 이야기 했었어요.
면담자 : 이민 처음 오셨을 때 88년도, 90년대 초반에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상당히 많은...
구술자 : 그렇죠 제 3의 도시였으니까. 지금도 뭐 규모로 봤을 때 제 3의 도시지마는 한인사회로 봤을 때는 그니까, LA, 뉴욕, 다음 시카고였는데, 그 다음부터 이렇게 변화 추이가 쭉 있어가지고 아트란타가 부흥이 좀, 붐이 일어나고 아틀란타로 많이 움직였다가 지금은 워싱턴 DC, 미국 경기에 따라가지고 워싱턴 DC, 저 버지니아 쪽으로 많이 가고. 그 다음에 또 텍사스가 경기가 좋다 그러니까 텍사스 쪽으로 또 많이 움직였던 것 같애요. 그래서 나놔지고 이렇게, LA, 아니 미주 사회 안에서도 이렇게 왔다갔다 유동인구가 많아져가지고, 아마도 이제는 시카고가 제 3의 도시 아닌 것 같애요, 동포 사회 안에서는.
면담자 : 그 활동 하시면서 쫌 아쉽, 아쉬운 점이나 이런, 한청련 한겨레 활동, 뭐 물론 지금 없어졌지만. 또 인제 시카고 마당집, 어찌보면 설립하는데 가장 큰, 좀 이렇게 공을 세우셨던...
구술자 : 공은 아니고 뭐...
면담자 : 많이 가장 큰 도움을 이렇게 주셨던 분인데, 그런 인제 어...이민 이후에 그런 활동을 좀 하시면서 가장 좀 아쉬웠던 점이나 기억이 남는 뭐 그런
구술자 : (한숨) 정세, 한국도 그렇지만 하나의 정세 파악에서 합수 형님도 그러고 다들 그렇게 실수했던 점. 뭐냐하면, 내 개인적으로 아쉬웠던게, 민주정부, 뭐 김영삼 들어서고 김대중, 노무현 이렇게 들어서면서 한국에서도 이러게 가끔씩 해외 출장 오시고 그러면 만나시고 그런데 그 중에서 한분이 그러드라고. 이제는 뭐 민주 사회가 다 되가지고 앞으로는 뭐 이런, 안 올꺼다, 그런 이명박, 박근혜 같은 건 안 올꺼다. 그런이야기를 하드라고요. 나도 그럴 때는 그런 줄 알고. 그 다음에는 민주 사회가, 아니 어느 정도 동포사회가 되고 그러면, 원래 시카고도 이사장이 2년 임기제거든요. 2년 임기젠데 할 사람이 없어가지고 제가 6년 동안 하다가 마침 하다 좀 좋은 분이 나타나가지고, 같이 활동하던 분인데 계속 몇 년동안 고사하다가 좋은 분 그때 하시겠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나도 개인적으로는 인제 뭐 한국도 민주화되고 그리구 뭐 통일의, 합수 형님이 가시면서 이렇게 미, 미국에 있는 사람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제는 더이상 뭐 한국 일에 관여하지 말고, 통일이나 이런데 관여하지 말고 이 동포 사회 활동에 쫌 열심, 열심히 해라, 중점적으로 하시라고 그랬거든요. 그게 그것 때문에 반발이 있어, 통일 문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래 조직도 사건이 일어 나가게 되고 그렇게 됐는데. 그게 뭐냐 그러면 합수 형님은, 이제는 남북관계는, 민주정부 들어서고 통일관계 이렇게 하면 정부 차원에서도 어, 정부, 움직이고 그러니까 해외 동포의 역량이, 동포로서의 역할이 쭐어, 쭐어드는 것도 있지만 이제는 이제서 나오는 것은 민주화 되고 난 다음에 우리 조직원 하는 거는 어느 정도의 영광이라는 거죠. 그, 뭐냐하며는, 자기 이름 쫌 내세우고 전에보다 통일활동 했으니까 남북관계에서 통일에 끼어들고 그러면 뭔가 거기서 이익을 얻는다든가, 그런게 있잖아요. 뭐 쫌 자기 이름도 날리고. 그런, 그런 일 하지 마라. 우리가 언제 뭐 그런거 생각해가지고 활동했나. 이젠 그냥 놔뚜면 잘 될거기 때문에 그냥 하지 마라, 그러셨던, 그래서 영광이라 이런건 아예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셨던, 이야기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언제 뭐 많은 사람들, 남아 있는 조직원들이 자기 이름 알리고 영광, 그런거 해서 뭐 활동했나 그러면서. 동포사회 활동 좀 치중했고 그런데. 그러면서 한국 단체들하고의 그, 어, 관계라든가 그런거에서도 쫌 소원했죠. 그런 부분, 그런게 좀 아쉽기도 하고. 그러면서 조직력이, 여기서도 한청련 조직력이 약화돼 가고. 약화돼가고 좀 새로운 인원들이 충원은 안 되고. 그러면서 점점 쇠퇴의 길을 쫌 걸었던 게 쫌 아쉽기도 하고 그렇죠.
면담자 : 지금까지 그게 인제 쫌 이어져온 것 같은데 그래도 각 지역별로 뭐 LA나 시카고나 뉴욕이나 지역별로.
구술자 : 나름대로 역할을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위안이고. 그 다음에 이제는 운동의 패러다임이 바꼈다고 생각을 해요. 굳이 이제 미씨 USA(club.missyusa.com) 아시죠? 그, 그냥 일반 미국 사는 주부 내지는 여자들의 모임이거든요, 미씨 USA가. 인터넷에서 그냥 오늘 드라마가 어떻다든가, 뭐 미국에 사는 애들 키우는거 주고받고 그런 사이튼데, 거기에서 뭐 정치방이 있고 뭐 그런가보드라구요. 여자들만 들어가니까. 거, 그, 거, 거기에서 박근혜 뭐, 부정선거가 됐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서 뭐 유권소(유권자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라든가 그렇게 활동하게 되고. 그 다음에 이번 세월호 관련해서도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시분들이 모여가지고 인디고고라는 펀드회사에다가 광고 냈는데 뭐 아이디어를 내가지고 하니까 인터넷에서 원래 광고비 한 오만불인가 하는데 십만불 걷혔다든가, 그 이상 걸려, 걷혀가지고 광고 한 삼천 확보를 했어요. 세번씩이나 그렇게 광고 내고 팟빵(Podbbang) 같은데 도와주고 그런게, 그게 옛날에 우리가 조직활동 했던 것보다 그분들이 더 잘하니까. 그냥 박수쳐주고 그 일원으로써 나도 그런데 가,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 부분에 세월호 진상 규명이라든지 활동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옛날에 뭐 어떤 조직이 했지만 요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이렇게 온/오프 모여가지고 활동하게 되고 그렇게 관심 있음 같이 활동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바뀌는 것 같애요.
면담자 : 지금 선생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을, 트럭을 하셨나요?
구술자 : 트럭은, 보자. 저, 한 오년 전부터 활동하게 됐는데, 저 이사장 그만 두고.
면담자 : 이사장 하실 때는 전임으로 그 마당집 일에만 전념을 하신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예. 마당집. 뭐, 제가 뭐 이사장으로 특별히 큰 역할을 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걱정해주고 뭐 동포사회 얼굴 마담으로 그냥 있었던 거고. 실무 스탭들은 다 열심히 거기서 활동했던 거고. 그렇지만 뭐 어, 6년동안 활동하면서 다 진짜 민주화가 다 됐는 줄 알았어요. 앞으론 이런 옛날, 그런 독재 정권이 들어서리란 생각도 진짜, 과연 그럴까, 아니겠지. 안 들어서겠지 그런 생각 했어요. 그럼 내가 할일은 뭔가 그런 생각 했을 때. 음...환경운동에 관심이 있었어요. 결국 이렇게 죽 생각하다 보니까 결국 운동의 기착진 환경운동이 아닐까. 그게, 그게 왜 그렇게 생각했나 보면, 제가 우주에 관심이 많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초등학교때 이렇게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우주 관련된 책을 딱 보다가 느꼈던게, 우리나라, 아니 이 지구가 있고 달이 있고 크기 있고 그런데 목성 토성 이런 데 보니까, 거기 위성에 보니까 그 위성이 아주 이상하게 생기고 달처럼, 달만큼 크지도 않고 그러드라고요. 그러면서 얼핏 들으니까 내가 우주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우주 비행사가 되고 그런데 과연 그 다음은 뭐지? 거기 가서 우주에 간들 그 다음은 뭐지? 그런 생각이 들드라고요. 가서 뭐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러다가 나중에 어째 커서 보니까 이게 하나밖에 없는 지구, 이 지구에서, 가 있는데 1900년대 초부, 초창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이렇게 인간에 의해, 의해서 훼손되어 가는 이 지구, 인간들만 위해서 사는 게 아닌데. 모든 생물, 무생물이 다 같이 사는데.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파괴되는 지구한테 미안한 생각, 다른 생물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고 그럼서 남은게 야, 광주뿐만이 아니고 인간, 인간은 인간으로서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죄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자연을 훼손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고 그러면, 그때 합수 형님 오셨을 때 그때 몇번 오셔서, 저 이제 환경운동쪽으로 할려고 그럽니다. 그런 생각 해가지고 뭐, 그린피스 쪽으로도 좀 후원하, 그때 후원하기 시작하고 그랬었거든요. 그러면서 또개인적으로는 시카고가 너무 추워서 이사장 그만 두면서 이렇게 바로 LA 옮기, 옮긴게, 옮기며는 쫌 그 당시 뭐 훈련에 처음 오신 분도 많은, 많은, 많았지마는 또 형 가면 어떡해요, 뭐 이렇게 되니까. 그래서 한, 나름 저는 한 2,3년 시간 공백기를 가지면서 차츰 마당집하고도 쪼끔 덜 했어요, 관계를. 그때 행사하고 이러면 나가고 그러면서 추운게 너무 싫어서 LA 왔었어요. LA 와서 부동산 하면서 그때, 그때 부동산 첨에 딱 시작했을때 LA 서브 프라임 터지기, 터졌어요 그래서 뭐 한 몇 년 동안 있는, 뭐 저축해논 돈 다 날리면서 파리만 날리고. 그렇게 하다가 여기 자바 시장이라고 있거든요. 동포 사회 젖줄이나 마찬가진데. 동대문 의류상가하고 비슷한 그런 게 있어가지고 거기에서 뭐, 뭐 딜리버리, 밴 큰 차로 딜리버리 하는 일을, 배달하는 일을 하다가 이왕 하는거 큰, 큰 걸로 해보자 싶어서, 생각 가지고 있다가 어떻게 또 시카고로 다시 가게 됐어요. 시카고로 다시 갔다가 거기서 라이센스 따고 뭐 어떻게 하다보니까 트럭 운전 계속 하게 됐는데. 일단 추운, 추운, 나는 날씨 춥고 흐리며는 좀 우울증이 좀 있어가지고 너무 싫어서 그래서 시카고에 아직 집이 있지마는 마이애미하고 LA 왔다갔다해요.
면담자 :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결혼은, 실례지만 결혼은 하셨어요?
구술자 : 결혼 안 했어요.
면담자 : 그러면 시카고에 지금 집은 부모님이 살고 계신가요?
구술자 : 시카고에 집은 지금 세 주고 있죠.
면담자 : 부모님께서는?
구술자 : 노인 아파트 사니니까.
면담자 : 어디 계신가요? 도시가?
구술자 : 시카고요.
면담자 : 시카고.
구술자 : 집은 시카고 바로 근처에 있고.
면담자 : 예.
구술자 : 아, 뭐활동에 관한 것도 시카고에서 뭐 광민이나 아니믄, 광민이가 소개시켜주는 사람하고 이야기하며는 그 89년도 이전에 그때 여러 활동하셨던 분들, 광주에... 있으니까.
면담자 : 어느 정도 지금 질문이 좀 끝난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좀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5·18 민주화 운동과 운동을 포함해서 선생님이 지금 어...미국에 오셔서 관련 활동들을 계속 전개해오면서 느끼셨던 그것까지 같이 아울러서, 그 5·18 항쟁에 대하 선생님의 소회라든지, 앞으로 이 부분이 한국 사회에서 좀 어떻게 좀 안 풀리는 부분들도 아직 많이 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좀 그런 것을 다 포함해서 한 말씀을 좀 해주신다면 그걸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구술자 : 그니까 5·18에 대해 다들 뭐 느끼겠지만 뭐 대동정신이고, 해방 세상, 진짜 그런 것들을 경험했었, 했는, 그런 정신들을 계속해서 이어갔으면 싶은 거고. 그 다음, 지금하고 마찬가지로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됐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거에요. 요번에 다른 의문사같은 것들도 그렇지만 그러고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진실을 알아야된다는 거. 그 다음에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또 당하게 되니까 가만히 있지 않아야된다는 것. 그거죠. 어떻게 좀 더 힘을 합했으면 좋겠는데 운동의 패러다임도 바뀌고 그랬으니까 어떤 다른 형식으로 쉽게 말해 팟캐스트나 이런 사람들 하는 사람들, 나 개인적으로 좀 후원도 좀 해주고 싶고. 그 사람들이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 같애요. 교육의 진실 교육 같은 것들을. 그니까 여기 동포 사회 일반 어른들 같은 경우에는 여기에서 뭐야, 라디오 방송이 LA만 해도 3개가 되고 24시간 방송하고 그러니까 이 라디오 방송들이 어떤 편에 서냐면 종편과 같은 역할을, 한국의 종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에요. 한국의 보수 언론 인사, 이 사람들이 나와가지고 정신무장을 시켜주고 있으니까. 그런 거를 좀 팟캐스트 이런 것들을 좀더 많이 듣게끔 해가지고 좀 바꿔나갔으면 싶은게 내 개인적인 바램이에요.
면담자 : 예, 뭐 동포, 한국의 동포 사회가 지금 거의 뭐 인제 나이를 이미 일세대 분들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되고.
구술자 : 거 이민 1세라기보다 이민 1세가 모시고 온 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죠.
면담자 : 아,예.
구술자 : 따,따지고보며는. 예. 그, 그니까 이민 1세대들이, 그랬던 분들이 인제 많이 돌아가시고 저희 할머니도 또 돌아가셨지마는. 이민 1세대 분들이 인제는 장년 60대, 70대를 바라보는 이르는, 그런 이민 1세대지만 그 이전에 그렇게 또 이민 1세대가 70대 되고. 60, 70을 바라보시는 분들이, 그분들이 흔히들 그래요. 이렇게 이민 첨에 오니까 그 사람의 사고방식은 그 당시 왔던 한국에 대한 인식이나 그런 것들은 그 시기에서 고정이 된다고. 만약에 대학교때 왔다 그러면 대학교때 그 시기의 인식이 고정되고 그렇다고 그러드라고요. 그러니까 쫌 70년대, 80년대 깨어서 오신 분들은 그렇게 극소수지만 그렇게 민주화 운동 하셨지마는, 박정희를 찬양하던 시대에 멋모르고 그냥 했던 분들은 계속 그렇게 미국 와서도 그런 식으로. 우리 아버지도 그랬지마는 그렇게 활동하시는 뭐. 흔히 말하는 까스통 할배 같이. 그렇게 활동하고 계시거든요. 근데 요즘은 이제는, 옛날은 그랬,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신문 한번 볼래도 한달 정도 뭐, 운좋아가지고 비행기에서 오는거 신문 보거나 그렇게 했었는데 요즘은 인터넷에다 다 되니까 그나마, 그, 그런 격차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없어졌지마는.
면담자 : 이건, 뭐 여담으로 한가지 여쭤보겠는데, 선생님께서 그런 활동들을 하실때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다른 말씀 안 하셨나요? 정치적 성향이 좀 같진 않았을 것 같은데.
구술자 : 완전 반대죠. 아버지하고는 집에서 많이 뭐 싸우기도 하구. 울 아부지는 또 재향군인회 활동하시거든요, 시카고에서. 재향군인회 하는 짓들을 보면 때로는 뭐 맞서기도 하고. 내가 워낙 안 물러서니까 그거는 뭐...
면담자 : 그래도 지금은 다 이해해주시고 그러지 않으신가요? 아직도 뭐, 아직도 뭐 그런 활동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만 뭐...
구술자 : 이제는 아니, 그 뭐 시카고에도 마당집 활동이 그렇게 o o (141106_최영준02 01:35:24)활동하고 그렇게 됐잖아요. 그러고 난 다음에 동포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거에요. 더 이상 빨갱이 단체가 아니고, 동포 사회에서 이민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꼭 필요한 단체라는거. 그게 인식이 되가지구,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제가 이사장 활동하고 있는 동안 나중에는 자랑스러워하셨죠. 이것도 또 동포사회에서 인정받는 단체니까.
면담자 : 알겠습니다. 그러면 뭐 제가 준비한 질문은 뭐 다 끝났는데요. 혹시나 선생님께서, 제가 질문 안 한 부분 중에서 뭐 특별히 하시고 싶으신, 꼭 이것과 관련이 없더래도,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면 쫌...
구술자 : 예, 단순히 이 기록들이, 그러니까 광주에서 어떻게 해서 활동했다는 그런, 그런 기록 뿐만이 아니고, 의미가 앞으로 활동해나가는, 앞으로 사람들한테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 그리고 보니까, 여기 나와서 보니까, 비단 광주의 아픔 뿐만이 아니고 남미에도 남미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고, 그 다음에 뭐 동구에서 뭐 인종청소하고 지금도 그렇게 각지역마다 같은 민족끼리 그런 아픔들이 많잖아요. 그런, 그런 것들을 좀 이해하게 되고. 좀 그런 아픔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거를 글쎄, 서로, 서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야 그런 좀 갈등이 좀더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면담자 : 뭐 우리 뿐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이나 그런 부분까지 같이 연대하고 같이 고민해가면서 더불어...
구술자 : 그럴라 그러면 알아야된다는 거죠. 서로 셰어(share)하고, 같이 공유해 나가는거, 다민족들 공유해 나가고. 그 다음에 모른 사람들 한테 이런게 있었다, 그런거 알아야되는데. 요즘 참 생각 드는게. 그렇게 하면서 지금, 쫌 알기 쉽게 만화 같은거나 이런 걸로, 한국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세월호 관련이라든가, 이명박의 나쁜 짓거리들, 이런 것들, 박근혜의 나쁜 짓거리들 이런 것들을 쫌 만화나 이런, 북한에 삐라 뿌리잖아요. 왜 우리는 삐라 못 뿌려요. 그런 걸 했으면 좋겠어.
면담자 : 예, 그 오랜 시간 이렇게 소중한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으로 최영준 선생님의 구술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구술자 : 고맙습니다.
김상일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상일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6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에 관한 김상일 박사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희가 이제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 삶을 쫌 인제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중에서 특히 이 미국 LA, 미국 지역에서 선생님께서 80년 당시부터 5·18과 관련해서 활동하셨던 내용들, 그 이후에 또 그, 뭐 오월 진상규명 운동이라든지 5월 정신 계승 운동 부분들에 대해서 그, 박사님의 그런 활동사항들을 저희가 구술로 쫌 담아서요, 이걸 나중에 저희가 해외에서 있었던 5·18 기록물, 꼭 이제 지금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독일에서도 이런 유사한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일어났었던 5·18 관련 운동들을 다 종합을 집대성해서 이 부분을 따로 인제 자료집으로 인제 저희가 낼 예정에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시고 그냥 편안하게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선생님 그, 출생연도를 쫌 말씀을 해주시면...
구술자 : 1941년 3월 28일
면담자 :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선생님.
구술자 : 만주 길림성. 휘남이요.
면담자 : 휘남현이요,
구술자 : 휘남성. 항일 유격 활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전개되던 데죠.
면담자 : 네. 그, 일제시대 때 태어나신 거네요?
구술자 : 여기 이길주 선생님하고 같은. 이길주 선생님이 길림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길주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면담자 : 예. 아...그럼 부모님은 계속 만주 쪽에서 사셨었나요, 아니면 따른 데서...
구술자 : 할아버지 때 아마 만주에 가서 아버지 어머님들이 다 만주에서 났고. 그 다음에 나도 나고 그 다음에 1945년 해방되고 내려온 거죠.
면담자 : 그럼 해방되고 어디로 오셨습니까?
구술자 : 서울로 왔죠.
면담자 : 서울로 내려오셨습니까? 그러면 그, 아주 어렸을 땐데, 해방되었을 때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 그때 해방됐던 때가 기억에 남으신가요?
구술자 : 남는 게 있죠. 남는게 있는 건 그, 일단은 이, 우리 그때 네 살 반이잖아요. 제가. 이 기차를 타고 철교를 지나온 그게 압록강 철교잖아요. 철교를 타고서 여름이진데, 기차 타고 이렇게 넘어오는 길, 그리고 나는 그게 임진강인줄 알았는데 부모님들한테 물어보니까 예성강이라 그러더라구요. 그 예성강, 강을 건널 때 벌써 그땐 소련군들이 경계를 설 때니까. 막 부모님들이 이불을 막 찢어가지고서 수레바퀴에 감는 거예요, 소리 안 나게 하려고. 그리고 인제 나하고 여동생 있는데 이불을 덮어 씌워서, 인제 울면 안 되니까. 예, 그런, 참 참혹한 기억. 몰랐는데 지금 나중에 지나고 나니까 그런 경험들...
면담자 : 삼팔도, 아니 삼십팔도선 밑으로는 못 내려오게 막았었습니까?
그렇지, 벌써 러시아군들이 그때 다, 그렇지만 그렇게 경계가 삼엄하지는 않았죠. 그러니깐 구르마를 타고, 마차를 타고 내려온 거죠.
면담자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형제 관계가요.
구술자 : 내가 그러니까 4남 1녀 가운데 내가 장남이구요. 네.
면담자 : 장남이시고요. 밑으로 남동생 세 명과 여동생 한 명 그렇게 있겠네요. 부모님은 당시에 어떤 활동을 쫌 하고 하시고 계셨나요?
구술자 : 그때 그니깐 만주 건너간 사람들이 대부분들이 그 보면, 조선조 때 우리,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세조 때 사육신들, 인제 거기에 변절하지 않는 김종서, 그쪽 후예들인데요. 자기 본성을 바꾸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시골 산골에 들어가서 자기 본적도 없이 살은 거예요. 왜냐면 그 당시 그 사육신 관계된 사람들은 다 구족을 멸족하니까. 그렇게 살다가 내가 보니까 그쪽 북만주 쪽으로 길이 트이니까 그래서 대거 이주를 해갔든 것 같애요, 보니까.
면담자 : 그러면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계속 그...
구술자 : 아니에요. 할아버지의 아버님 때로 간 거죠, 그러니까. 가서 그러니까 결국은 그, 이, 아버님, 어버님을 그 쪽 만주에서 났죠. 아주 어릴 때 결혼한 거예요.
면담자 : 만주에서 부모님은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셨나요?
구술자 : 거의 농사죠, 뭐.
면담자 : 농사를 짓고 계셨네요. 선생님께서 어렸을 때 뭐 만주 생활을 쫌 기억나는 부분이 쫌, 어렸을 때이긴 한데, 기억나는 부분들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나중에 그, 이, 김일성 그, 회고록, 󰡔세계와 더불어󰡕, 그걸 읽다보니까 그, 그분이 그쪽 회남, 휘남성, 통화성, 그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많이 했어요. 늘 우리 아버님이 자기는 김일성 항일 유격대들이 이, 마당에 이렇게, 동네에 내려왔을 때 직접 봤다는 거예요. 직접 봤다는. 나는 만날 그거 가짜라고 배워왔잖아요. 그니깐 아버지는 자기가 본 바로는 그게 가짜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그런 추억이 있는데. 그게 어릴 때, 막 네 살 반이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살던 주변에 이 성터들이 있고 호수가 있고 고 담에 막 피난을 내려와야 되니까 전부 추럭을 타고서, 추럭 위에 내려오는 길, 예, 그리고는 집안을 통해가지고 기차를 타고 강계를 해서 예성강까지 와가지고 아마 거기서 인제 걸어서 이렇게 서울까지 내려온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뭐 전부 흐려, 어떤 건 또렷한 게 몇 개 있지만, 뭐 할머니 등에 업혀가지고 이렇게 밤에 가는데, 만주니까 들이 넓잖아요, 밤에 이렇게 불빛이 이렇게 멀리서 보이는 거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 뭐 이런 경험들 외에는 자세한건 뭐 없죠. 서울로 와서 6.25사변 날 때까지 살았거든요. 그니깐 10살까지 살았단 말이야, 9살까지. 그니까 서울에 와서부터 6.25 전쟁이 날 때까지 고때 기억은 뭐 저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사 선생님들까지 그게 뭐, 인민군이 넘어오니까 3일 만에, 학교에 불려가가지고서는 거기 공부하던 얘기, 그런 것들은 기억이 뭐 또렷하죠, 전부다. 그건 열 살 때 일이니까.
면담자 : 박사님 아버지 할아버지 대대로 어찌 보면 만주에서 쭉 거주를 하신 건데 해방 이후로 특히, 특별히 서울로 내려오게 된 계기가 쫌 있으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그 당시에 내가 뭐 어릴 때니까 확실하게는 모르는데 그 당시에 아마, 아마 혁명이, 모택동 군인들이 막 넘어온다고 하니까 가가지고 꽤 오래 살다보니까 농토가 생겼을 거 아니에요. 그 휘남현이라는 게 가장 뭐냐 하면 쌀이 많이 생산되는 데에요. 쌀이. 쌀이 생산되는. 그, 인제 가서 땅을 소유하게 된 거예요. 일단은. 농사를 짓다보니까. 그렇게 일단은 그 이, 만약에 혁명이 일어나며는 가가지고서 자기 농토가 있던 사람들은 다 뺏기게 되잖아요. 아마 그러니까 그때 그 지주는 있을 수가 없죠. 그니까. 농사짓던 사람들이 아마 그러니까 땅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땅이 몰수당할 것 같으니까 대부분이 아마 그래가지고 대부분이 많이 내려왔죠.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께서 서울로 내려오신 게 한 네 살 다섯 살 정도 그때쯤인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 열 살 정도까지는
구술자 : 아홉 살이죠
면담자 : 아홉 살에 학교는, 학교는, 초등학교는 8살에 그냥 그러게 들어가신 건가요, 초등학교는?
구술자 : 그렇죠, 그렇죠. 제때 들어갔어.
면담자 : 어디 국민 학교였나요?
구술자 : 안산초등학교라고 안산. 그니까 바로 뭐냐하며는 거기, 거기가 그, 이, 저기 인제 중부전선으로 인민군이 내려오면 그기에 바로 무학재라고 재가 있잖아요. 글로 통로로 인민군들이 내려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올라갈 때도 글로 올라가고 그러니까 중부전선의 제일 핵심 통로 아니에요. 그니깐 막 인제 전쟁이 나가지고 대포소리가 들려서 그 다음날 점점점점 인민군이 내려오는 거 다 목격했고 고 다음에 후퇴할 때, 후퇴할 때 또 다 그쪽으로 통로로 해서 또 물러가는 거 다 봤고 고 다음 그쪽에 안산이니까, 인천에서 들어온 유엔군하고 이쪽 인왕산 쪽에서 마주 붙어가지고 전쟁하는 것도 어릴 때 다 봤죠. 뭐 눈으로 그냥 사이에 서로 총격전을 하면서 바위에 기어 올라가다가 이 군인들이 그대로 굴러 떨어지는 이런 것을 다 목격했죠.
면담자 : 그 안산국민학교라는 곳이 서울에 있습니까?
구술자 : 서울에 있죠, 서울에. 안산, 연대 뒷산 있잖아요. 그게 바로 안산이에요. 그게 바로, 서울은 그것, 그 산 뺏기면 서울이 함락돼요, 아주 중요한 산이에요. 그쪽으로는 인제 그러니깐 소위 인천 상륙한 미군 부대가 올라오고 그 맞은 편 인왕산이잖아요, 거기는 인제 인민군이 주둔하고. 그니까 서로 불과 간격이 5백 메다(meter)도 안 되잖아요, 서로 막 서로 마주보며 총격전을 하고.
면담자 : 그, 국민 학교일학년 때 그러면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건가요?
구술자 : 아니요, 4학년 때죠.
면담자 : 4학년 때까진가요? 50년...학교를 몇 살에 들어가셨나요, 선생님?
구술자 : 그때가 뭐 일곱 살인가,, 뭐 그때 들어가니 일곱 살이죠.
면담자 : 아, 일곱 살 그때 학교를 들어가셨구나.
구술자 : 모르겠어요, 시골에 내려가서 다시 학교를 들어간 거는 4학년으로 들어가죠, 5학년으로 바로 들어간 것 같애요. 그때 뭐 학교 체제가 뭐 있나요, 가서 내가 몇 학년 다녔다 그러면 그대로 입학 시켜주는 때죠.
면담자 : 그 국민 학교 다녔을 때 좀 기억나시는 게 있나요? 뭐 그때 인제 해방 이후에 물론 인제 일제식 교육이 좀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그래도 해방 이후, 해방 전 교육과 이후 교육은 굉장히 좀 다를 것 같은데, 그, 주로 뭐 4학년 때까지 학교 생활, 국민 학교 때 주로 어떤 걸 좀 이렇게 배우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지금 그때는 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할어버지가, 뭐냐면 외사촌하고 한문을, 천자문을 가르쳤어요. 그걸 가리키다가 들어가니깐 인제 부모들은 천자문만 떼면 다 공부, 학교 들어가도 공부 저절로 될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를 않았어요. 거길 들어가니깐 거기 뭐 벌써 새로운 교육 체계랑이 다르잖아요, 음악도 해야 되고 미술도 해요, 체육도 해야되고 뭐 구구단도 외우잖아요. 아주 난 지금도 악몽인 게, 아주 천자문을 달달 외웠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가니까 그 신식 교육이라 그러잖아요, 그게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생, 생각나요. 그래가지고 그냥 공부, 공부도 못했거니와 그 다음에 학교 간다고 하면 아침에 설사부터 나오고 그랬어요. 근데 6.25라 하는 것이, 전쟁이라 하는 것이, 나에게 아주 굉장히 큰 충격을 줬어요. 그래가지고 시골에 내려가니깐, 시골에 내려가니깐 아무래도 환경이 시골학교가 서울하고 떨어져요. 서울에선 꼴찌했는데 거기 가니깐 1등, 2등을 하더라구요. 어떤 면에선 거기 가서 1, 2등을 한게, 내가 뭐냐면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건 확실해요. 그러니까 도리어 공부를 좀 더 못하는 친구들 하고 하니까 더 자신감이 생겨가지고 그 다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지금까지 학문 해오는데 한번도 자신감은 내가 생각할 때는, 전쟁이라는 게 없었으면 아마 생기지 못했을 거예요. 네. 큰 충격이죠. 그때 뭐 그, 피난 내려갈 때 전부 기차 위에, 우리가 12월 10일에 서울을 떠났는데, 12월 10일에 그때 벌써 눈비가 막 내리는 거예요. 눈비가 내리는데 생각해보세요, 밑에는 기차, 그, 열차 안에 전부 탄약을 다 실었다고요, 대포알, 탄약. 싣고 사람은 그 꼭대기에 타는 거예요. 꼭대기 타고, 12월 엄동설한에 눈비가 내리는데 이불을 뒤집어쓰는데 이불이 다 젖잖아요.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데 9일이 걸렸어요. 9일, 아흐레가.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정말 누가 상상도 못할 모진 경험들이죠. 그래서 아흘 동안 밥을 못먹으니, 기차 우에서 어떻게 밥을 해먹어요? 가족들이 내려가서, 대전 같은 데는 오래 머무니까 밥하다가는 기차가 떠나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가족들이 그대로 생이별하는 거죠. 예.
면담자 : 그, 한국전쟁이, 6.25가 일어나고 한 12월까지는 일단 서울에 있었던 거죠?
구술자 : 서울에 있었죠, 네.
면담자 : 뭐 인민군도 내려와서 서울을...
구술자 : 같이 있었죠, 3개월간 꼬박 같이 있었죠.
면담자 : 뭐 또 그렇게 좀 했는데 그때 좀 기억 남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구술자 : 기억나는 거 그거야 많죠. 일단은 동네, 동네 사람들이 딱 좌우로 갈라지는 것. 그건 뭐 그냥 목사들, 목사가 있었는데 목사가, 목사 부인은 인제 좌익이 되고 목사는 그대로 우익이 되고 이렇게 갈라지드라고요. 동네가 완전히 좌우익으로 갈라져요. 고 다음에 학교에 가니까, 6월 28일에 가니깐 교감선생은, 교감선생님은 완전히 좌익이에요. 우리 불러모아놓고는 “아침은 빛나라”는 인민국 국가하고 그 다음에 김일성 장군 노래하고 그걸 가리키는 거죠. 지금도 머리 속에 가사하고 곡조가 완전히 다 남아 있는 건 그 두곡뿐이에요. 예. 그리고 인제 나중에, 나중에 인제 최근에 와서 우리 담임선생님을 찾았어요. 몰랐죠, 어떻게 지냈는가. 벌써 그때 인제 그, 국방군이죠 그때, 군대에 입대해가지고 뭐 대령 까지 되었다가 양양에 가가지고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드라고요. 그만큼 그니까 그 당시에 학교고 어디고 간에 다 이렇게 갈라졌고요. 그 다음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바로 고 안산 넘어 가면 서대문 형무소잖아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문이 열렸단 말이에요, 문이 열리니까 그 죄수들이 옷을 입고는 그 산 위로 하얗게 기어 올라가는 걸 봤어요. 죄인들이 탈출해갖고 말이죠. 정치범들이겠죠, 주로 그러니깐. 그러니깐 그 감옥 문이 열리니깐 죄수들이 막 산 위로 이렇게 도망쳐 올라가는 건지, 탈출하는 건지 그런 게 눈에 너무 선하구요. 그리고 또 우리 인민군하고 뭐 같이 3개월을 같이 살았으니까. 역시 뭐냐며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면 결국은, 우리가 바깥에서 뭐 공산당, 인민군 얘기하면 뿔 달린 것 같지만 그렇게 같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람들도 밤에 그냥 밀, 밀 같은 호밀이죠, 그걸 한가마 갖다 우리 먹으라고 주면서 그럼 우리는 인민군들 옷 같은 거 우리가 빨아주고 뭐 그렇게 상당히 서로, 서로 협조하면서 살았던 기억이 나고요.
면담자 : 부모님은 좀 어떤, 사상적으로 이념적으로 뭐 이렇게 좀 어디 쪽에 속하셨나요?
구술자 : 우리 부모들 같은 경우는 일단은 뭐냐면, 그렇게 만주에 올라가놓으면 정식, 제도적인 교육을 받을 기관이 없어요. 혼자 전부 뭐 자기들이 자습을 해가지고 그렇게 글을 터득하는 거 외에는 공부를 그렇게 교육적으로 제도적으로 할 수는 없어요. 근데 우리 아버님이 언어 재능이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애요. 예, 그래서 중국말을 그렇게 잘했어요. 나중에 뭐 중국 대사관에서 중국말, 우리말 다 할 수 있는 사람 그때 드물었으니까, 중국 대사관에서 와서 일하라고. 우리는 다 가라고 얼마나 좋냐고. 자기는 이런 이 일제시대 겪으면서, 6.25 겪으면서 전부 이게, 이게 어떤 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우리 부모세대들은 관, 관에 대한 불신이 있어요. 관에 들어갔다가는 불행해진다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런, 그런 관성이 있었던 것 같애요. 그런 일체 뭐 우리 아버님은 그 당시에 저기 호남에 가서 우리 고모부와 같이, 호남에서 쌀을 수백 가마 해가지고 열차로 싣고 올라와서 인제 서울에서 그거 팔고. 근데 행인지 불행인지 6.25사변 인제 호남에 내려갔다가, 쌀사러 내려갔다가 전쟁이 터진 거예요. 올라오질 못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죽은 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아마 집에 있었더라면 아마 국군에 끌려갔던지 인민군에 끌려갔던지 아마 죽었겠죠. 그니까 쌀 사러 그 김제 그쪽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못하고 6.25가 다 끝난 다음에 서로 만났다고요.
면담자 : 아, 그래요, 그러면 피난을 갔을 때도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만...
구술자 : 그렇죠, 우리 어머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만 살았죠. 그러고 우리 할머니는 외동아들이란 말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그니깐 뭐 폭격이 떨어지고 대포가 비행기가 왔다갔다하고 그러니까 백 퍼센트 아들이 죽은 줄 알았죠. 전부다. 그, 그 외지에 나와 있는 아들이 어디에 끌려가든지 끌려갔을거라 생각할 꺼 아니에요 그러니깐. 다 죽은 줄 알았다고요. 근데 희한하게 나중에 알고 들으니깐 인민군이 그쪽 지역엔 들어가지 못했어요. 전라도엔 많이 못 들어갔어요, 호남은. 그쪽 지역에 살아계셨던 거였다고, 보니깐. 우린 죽은지도 모르고, 우리도 인제 만주 들어가기 전에 그 고향이 울진이라는데, 강원도 울진이라는 데에 거길 가니깐 아버지도 거기 와 있고 우리도 글로 가서 만난 거예요. 도대체 이런, 이런 우연이...간발. 우리가 도착하니까 그 다음날 아버님이 서울에 우리 집을 찾아올라고 떠날, 떠날라고 할 참이었어요. 하루 전날 우리가 도착했기 때문에 만난 거예요. 그것도 웬만했으면 길이 또 어긋나가지구선 아버지는 서울, 우리 찾아 올라가고 그럼 또 우리가 어떻게 만나요? 올라가는 도중에 아마 그때 전쟁이 한창중이니까 어디든지 끌려가서 죽었겠죠.
면담자 : 그럼 그때 피난을 가셨던 곳이 대구입니까? 대구로 가셨나요?
구술자 : 아니요, 우리는 만주 들어가기 전에 살던 울진이라고, 울진.
면담자 : 그 피난을 북으로 가신 건가요? 남으로 내려오신 게 아니고요?
구술자 : 강원도 울진이라는 데가 어디냐면 삼척 밑에. 그니까 인제 울진, 울진. 포항 가면 영덕 하고 울진, 울진이라는 데 있어요, 삼척 밑에. 거기가 원래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고향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사륙신 난 때 피해가지고 우리 선조의 선조들이 피난을 가서 살던 곳이에요. 왕피리라는 데 거기도 지금 전기가 안 들어가요. 버스도 없고. 거길 가서 만난 거예요. 6.25때. 서로 그렇게 헤어졌는데 아버님은 거기서 만난 거예요.
면담자 : 그럼 울진에 계속 계셨나요? 아님 다른 쪽으로 또 옮기셔서 피난 하셨나요?
구술자 :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기 살다가 나는 인제 울진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오고 그 다음에 서울로 대학 올라오면서부터 그 다음부터는 그만 나는 울진 그 고향하고는 완전히 하직한거죠. 하직하고 서울 살다가 그 다음에 미국 오게 되고. 이렇게 왔다갔다하니까 결국은 나 같은 경우는 특별히 어디가 딱 꼬집어가지고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요.
면담자 : 그럼 울진에서 초등학교 5학년부터 다시 다니시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울진에서 다 다니신 건가요?
구술자 : 다 다니고, 예.
면담자 : 거기는 뭐 한국 6.25 당시 그렇게 크게 피해를 입거나 하진 않았나요?
구술자 : 아니요,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거기 울진, 울진 삼척 공비사태라고 해가지고 그쪽이 그냥 아주 오지고 외진 데에요. 태백산맥 있고 바로 바다잖아요. 간첩들이 와서 숨기가 쉬운 거예요. 나도 울진 내려가니깐 거기 가니깐 우리 외가 집들은, 외가 집들은, 외삼촌뻘 되는 분들은 거의가 다가 이, 좌익으로,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가니까 그만 국군이 다시 들어오니 우리 외숙모들만 살아남았고, 살고 있고 그러니 남편이 없이 혼자들 살고 있는 과부들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대부분이 그니깐 지금으로 말하면 부역이죠, 부역. 부역하다가 다들 그, 인민군이 후퇴하니깐 따라서 어딜 갔는데 그동안 영원히 집으로 못 돌아오고 생사를 모르죠. 다 죽었죠, 뭐 어떻게 살아있겠어요. 그리 나간 사람들이.
면담자 : 그럼 선생님 중학교는 그럼 어디 다니셨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그,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라는데 매화 중학교. 매화. 여기 쭉, 그러니까 7번 국도타고 올라가다 보면 그게, 인제 동해안에는 국도가 하나뿐이에요, 7번. 거기 올라가다보면 영해, 그 다음에 후포, 기승, 평회, 그리 나와 보니까 매화리라는 데가 나와요. 매화, 우리꽃 매화꽃 있잖아요. 바로 그기가 뭐냐면 그, 그 요번에 내가 일본 가서 알았는데 축구 선수 정대세 있잖아요, 정대세가 우리하고, 우리 마을하고 같은 마을에서 그, 일본 갔더라고 보니깐. 내가 인제 그, 나고야에서 강연을 하니까 정대세 이모가 거길 온 거예요. 날보고 자기 고향 말씨하고 같다고 그래? 아, 그래 어디냐니깐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웃음) 아 그래서 나중에 그러드라고요. 자기가 정대세 이모라고.
면담자 : 그, 피난을 울진으로 가셔서 바로 또 거기에서 학교로 바로 그냥 오학년으로 들어가셨나요, 아니면 몇 년 지난 후에 가셨나요?
구술자 : 바로 갔죠.
면담자 : 그럼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에 입학했던 시기가 53년 정도겠네요.
구술자 : 55년도가 되나? 어떻게 되나? 54, 54년에 중학교. 고등학교 얘기하는 거예요?
면접자: 중학교요.
구술자: 중학교는 54년에서, 55년에서 58년까지 다녔는가보다, 가만 있어봐. 내가 60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60년도. 그리고 대학교 바로 들어갔으니까. 그니까 어떻게 되요, 3년씩 거슬러 올라가보세요. 그럼 58년에 중학교
면접자: 54년에 중학교에
구술자: 들어가게 되는 거죠.
면접자: 입학을 하셨구요.
구술자: 그다음에 이제 하여튼 대학교에 들어간 게 1960년도니깐. 고게 거기서부터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제대로 갔거든요. 3년씩 빼 들어가면 뭐 어떻게 될 거야.
면접자: 54년도에 중학교 입학하셨고 57년도에 고등학교를 입학하신 거네요.
구술자: 57, 58, 59 그래 되겠네요, 맞아요, 맞아요. 그래 되겠어. 그래야 60년도에 대학을 가죠.
면접자: 고등학교는 이름이 어떻게 됐나요?
구술자 : 후포.
면담자 : 후포 고등학교요? 이것도 울진에 있는?
구술자 : 울진이죠, 울진 젤 남단에 있죠.
면담자 : 혹시 이 중 고등학교 시절에 쫌 기억이 좀 기억에 남으시는 것이 있나요?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인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반공 교육들이 쫌 강화되는 시점이었었고 쫌 약간 정치적으로도 불안하기도 하고 좀 그런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그건 일단은 뭐냐하며는 그, 그 당시에는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시골에서 전무한 상태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깐 이 중앙정부에서 솔직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요. 더군다나 뭐 중 고등학생, 중 고등학교 때, 이 어른들도. 이 뭐 라디오라는 게 한 집에 하나, 한 마을에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말까 했잖아요. 그러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안 들어왔어요. 그러니깐 일단 이런 사회의식이라든지 이런 게 가질 여유가 없었고 그러니까는 그 당시 맨손으로 이, 한 몇 십 년 만에 고향이라고 찾아가니깐 생각해보세요, 춥고 배고프다는 것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어요. 너무 춥고 너무 배고팠어요, 그 당시.
면담자 : 대학교는 서울로 다시 오라가신건가요?
구술자 : 서울로 온 거죠.
면담자 : 어디로 입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서울 연대.
면담자 : 과는 혹시
구술자 : 신학과 그때 시골에서 뭐 나오고 그때 연변 들어갈 때 내가 그, 이, 그 전교에서 이거 5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입학시험 쳐가지고 5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등록금 다 면제해주고 고 다음에 뭐 삼성 물산에서 교복까지 줬어요, 그것도 그렇게 내가 그 시험, 뭐 그 촌놈이 들어가서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기 때문에 등록금도 면제당하고 교복도 입은 거지. 아마 내가 그렇게 못 됐더라면 입학도, 학교도 들어가지도 못할거예요. 그때 시골에서 대학에 보낸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고 다음에 아버지 어머니들은 날 보고 강릉사범학교 가가지고 빨리, 고땐 고등학교 졸업해도 초등학교 선생 하니까. 전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범학교 가는 게 제일 부모들의 꿈이었어요. 사범학교 가면 금방 경제 문제가 해결이 되잖아요, 일단. 예. 지금 생각해도 그게 우리 부모님들이나 형제들한테 상당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내가 만약에 그때 초등학교 선생이 됐더라면 부모님이나 형제들은 고생을 좀 덜 했을텐데.
면담자 : 예. 공부를 꽤, 중 고등학교 다닐 때 잘 하셨던 것 같습니다. 연대 신학과.
구술자 : 그때 5등 안에 들었어요, 그때 뭐 신문에도 나고 그랬죠. 근데 뭐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들어갈 때 등록금 다 면제당하고 뭐 일 년 동안은 면제당하지만 그 다음부터 고달픈 생활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시골에서 돈 한 푼 안보내주니 계속 그냥, 계속 가정교사죠. 가정교사 그때 얼마 준지 아세요? 만 오천 원 줬어요, 한 달에. 만 오천 원 근데 삼십 원 가지고, 하루에 삼십 원씩, 한 끼 삼십 원씩 배당해. 그때 그 식빵 한줄 사다놓고 그거 아침에 두, 빵 두조각 씩 먹고 이렇게 나눠 먹어가면서 공부 한 거예요. 그거 그건 춥고 배고픈 거 그거 지금 그건 지나간 얘기니까 말로 이렇게 표현하지.
면담자 : 60년대 당시에 만 오천 원이면 지금 화폐가치로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
구술자 : 지금 어우 글쎄요, 그때 뭐 연탄 한 장에 15원, 15월 할 때니까. 연탄 한 장에. 지금 백 오십 만원 될까?
면담자 : 그렇게 넉넉하거나 많은 건 아니었겠네요.
구술자 : 넉넉한 건 뭐, 이상하게 그거, 그 입주한, 입주해서 가정교사 하는 데도 그게 애들 꼴찌, 그냥 60명 가운데 56명, 56번째 되는 애들도 내가 가르쳐 가지구서 뭐 서울에 명문 고등학교 다 입학 시켰거든요. 그때 부모들이 그렇게 인색하더라구요. 그래가지고는 먹는 거 외에는 저한테 돈을 더 안 준 것 같애요. 그러고는 그냥, 입주해 있으니까, 내가 공부를 못하니까 나와서 있으니까 가서 결국은 고 정도 돈 받아가지고서 식빵 사가지고 나눠먹기 바쁘죠. 그니까 뭐 겨울에 방에 추울 때는 연탄불을 뗄 수가 있나 뭐 제일 그냥 막 힘든 게 그때는 뭐 이부자리가 뭐가 있어요, 그냥 방바닥이 완전히 그냥 얼음 덩어리죠.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물, 그 떠논 물이 꽁꽁 얼 때 아니에요. 그때 뭐 난방 시설도 안 되어 있고 이러니까 말이야, 막 춥고 배고픈 거.
면담자 : 그때 근데 선생님 신학과를 들어가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지금 어찌 보면 선생님 사상, 철학 관련된 그런 연구를 계속적으로 하고 계신데...
구술자 :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요, 중요한 건데, 내가 만약 지금 같이 경제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렇게 이 사회가 풍요하고 그랬더라면 안 그랬을 거예요. 희한한 것은, 보세요. 어릴 때 인제, 이게 일제시대, 고 다음에 6.25, 고 다음에 와가지고 춥고 배고픈 것, 이런 것이 도리어 역설적으로 말이에요,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인간이 자기 인간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고민하게 만들고 신이라는 게 뭔가, 이런 거에, 철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실존에 대해 이런 걸 고민하게 되요, 희한하게. 만약에 지금 같으면 차라리 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는 이런 전공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깐. 뭐 의사가 되던지 뭐 선생이 되든지, 뭐 상대를 가던지, 이런 거 해야 되, 법대를 가든지 해야 되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깐 부모님들은 너가 충분히 왜 그런 학과를 갈 수가 있는데 집안도 지금 이렇고 너 형이, 장남이 어떻게 이렇게 돈도 안 되는데 과를 택하냐, 이거예요. 그니깐 집안 문중에서는 난리가 난 거죠. 문중에서 이제 일체 재정적으로 도와주지 못하고 다 끊어버리고. 그렇지만 난 지금 생각해도 이게 제일 내가 잘 했다고 선택 되는 거야, 결론적으로 생각할 때. 지금에서 생각할 때 인문과학이죠, 인문과학 가운데서도 그때는 내가 그때 절실하게 그, 고민하는 그기에 기준하여 난 전공을 선택한 거예요. 물론 들어가 가지고 거기서 내가 만족한 건 아니지만 뭐 철학이나 뭐 이런 신학이나 역사나 문학이나 했지. 부모님, 부모님들이 아무리 강요한다고 해도 난 의사나 상대나 이런, 또 심지어는 선생이나 이런 거는 안 되었을 거예요. 그건 그러니깐 어, 이, 예. 하튼 끝내는 내가 내 이, 적성에 맞는 것, 내가 지금 아주 내 속에서 진정으로 뭘 갈구하고 있는가, 그 기준에 의해서 전공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그니깐 그 이후에 형제들이나 부모님들한테 얼마나 많은 가족적인 피해를 줬겠어요. 지금, 지금 같으면 우리 부모님들 살아계실 때 용돈이라도 많이 드리고 생활비도 보태 쓸 텐데 이, 지금 내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거는요, 부모님들 다 돌아가신 후에야 겨우 가능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예, 좀 그게 늘, 늘 그냥 그게 아쉬움으로 남고 예. 참 후회되는 것도 있고. 부모님에게 늘 그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 정도. 뭐 나는 전공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을 바꿔본 적이 없어요. 바꿔본 건, 바꿔보고, 바꿨다면 인제, 신학을 인제, 그 하다보니까 이런 사대주의, 외서 의존적 사대주의 이게 인제 이게 인제, 그걸 내가 기독교가 반민족적 행위하고 반문화적 행동하고, 불상 때려 부수고 뭐 지금 와가지구는 솔직히 말해서 기독교는 거의 포기한 상태죠, 교회도 안 다니죠. 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처음에 갈구하던 그게 없어진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러한 그런 제도적인 뭐 기독교 교회는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보면 되겠구요. 지금은 나는 나의, 나의 종교와 이념은 민족이에요, 민족. 그거 민족 그거 밖에 남은 게 없어요. 그게 나의 종교에요. 그게 인제 5·18까지 연결되는 거라고 볼 수 있겠죠.
면담자 : 그 60년이면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이 하나 좀 일어나지 않습니까?
구술자 : 들어가자마자 바로 4.19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면담자 : 네 4.19가 일어났는데 그때 뭐 학내 분위기라는 게 있었나요? 4.19 혁명 당시에 뭐 같이 이렇게 움직임이라든지, 뭐 학생 운동 뭐 그런 거라든지요?
구술자 : 그러니까 4.19 일어나던 해가 일학년이잖아요. 일학년인데. 연대가 채플이 있다구요, 채플. 예배 시간이 있다구요. 11시에 예배를 봐요. 그러니까 4.19, 4.19 날 딴 대학들은 벌써 시내 벌써 다 나왔을 때 연대는 아직도 그 시간에 예배가 안 끝났기 때문에 채플을 보고 있은 거예요, 예배는. 11시에 예배를 끝나고 나오니까 벌써 시가지는 온통 그냥 발 틈, 딛을 데가 없을 정도로 학생들이, 고등학생들 막 대학생들 쫙 다 깔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제 연대가 뭐냐면 서대문 고개를 넘어서 아현고가를 지나가지고서 어디까지 갔느냐면은 지금 그 경복궁있죠, 경복궁 들어가는 입구에 내가 앉아있었어요. 바로 거기서 분수대 있는 데까지 한 몇 메다 될까요? 한 500메다 될까? 그게, 여기 지금, 여기 지금, 여기 경복궁이 있으면 경복궁 앞으로 길이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서대문 쪽으로. 바로 고 옆으로 인제 청와대로, 그땐 경무대라 그랬죠, 들어가는 길이 있잖아요. 바로 고 코너에 내가 앉아있었어요, 그러니까. 벌써 그 시간에 벌써 총 맞아 가지고는 부상당한 사람들 죽은 사람들이 막 실어 나르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우리는 그, 그 앞에 더 이상은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게 아마 그러니까 채플 예배 때문에 일찍 나온 고대나 대성고등학교 이런 출신들은 그 앞에까지 간 거죠. 그 앞에까지 간 사람들이 희생들을 많이 당했어요. 연대가 그때 비교적, 한 사람 밖에, 채정, 최정훈 사학과 출신 한 사람밖에 안 죽었잖아요. 그 이유가 채플 때문에 늦게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면담자 : 선생님은 끝까지 4.19 혁명 당시에 4.19 관련 운동을 좀 참여를 하셨었나요?
구술자 : 아니죠, 우리는 다 선배들이 다 주동했지, 우리는 일학년이니까 피동적으로 따라가면서 했고. 그 다음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 이승만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한지는 몰랐어요, 솔직히. 그러니까 역사라는 게 알고 의거에 참가할 수도 있지만, 거의 피동적으로 참가를 했지만 나중에 지나고 나니깐 인제 그 참가했다는 것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러니깐.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의식을 가지고 참가할 수도 있지만 그 이후에 의식을 갖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깐. 나 같은 경우는 일단은 시골에서 올라와서 올라오기 전까지는 정보의 매체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이승만의 그 건국에 5.4 선거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서 단독 정부, 단독 정부 세우면서 결국은 6.25 사변, 6.25전쟁까지 오게 한 이런 것들에 대한 이런 잘못은 지금 와가지고 우리가 공부를 해가지고 이 놈이 진짜 나쁜 놈이구나. 예, 점점점 그 이승만 정권의 그런 악랄한 나쁜 짓 한 거 이게 나중에 와서 반추해서 알게 됐지 솔직히 말해서 4.19 나던 해에 내가 4.19 현장에 참여했지만 내가 그때 뭘 다 알고 했다고는 절대 볼 수 없어요. 그리고는 인제 그 다음, 그 다음 해 바로 인제 5. 16 쿠테타가 났잖아요, 5.16 쿠테타가 나고 고 다음에 진짜로 인제 저항감, 이 저항의식이 생긴 거는요, 이 군대에 들어가서 생겼어요, 군대.
면담자 : 군 입대는 언제 하셨나요?
구술자 : 군대는 내가 68년에 들어갔죠, 스물여덟에 들어갔지.
면담자 : 아 대학을 졸업하시고
구술자 :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면담자 : 아, 대학원까지 졸업하시고.
구술자 : 졸업하고 스물여덟 살에 사병으로 간 거야.
면담자 : 어디서 근무 하셨나요?
구술자 : 그, 철원이라고 최전방에 있죠, 제일 최전방.
면담자 : 군대에서 그런 생각을 좀 갖게 된 어떤...
구술자 : 우선 뭐냐 하면 그 군대에 들어가니깐 이 군대 안에 이 군 사회와 군 장교들이, 내가 공병대에 있었는데 말이야, 공병대. 한 마디로 해서 물자가 막 나오잖아요, 자재들이 나오면 공사는 설렁설렁 하는 척 하면서 그거를 기름이고 피복이고 양복이고 다 빼돌리는 거예요. 다 해먹는 거예요, 군인 놈, 장교들이. 군인, 야, 이 군인 사회가 정말 이렇게 썩었구나. 그러니까 결국은 이 군인이, 군인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예. 그게 인제 내가 인제 그게 군대, 내가 71년도에 제대를 했으니까 삼선개헌이 그때 있었잖아요. 그때, 그때. 삼선 개헌 있을 때 그때 뭐냐면 그, 이, 군 안에서 내가 삼선 개헌 반대했어요, 반대 운동을 했어요.
면담자 : 군 안에서요?
구술자 : 구술자 : 군 안에서요. 그래가지고 뭐 내가 공병단이었는데 공병단 단장이 그냥 나까지, 나한테까지 찾아와가지고는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고, 한번 얘기를 해보자고. 내가 대학원까지 나왔으니깐 뭐 예를 들어서 그런 거 하며는 그대로 잡아넣었을 거예요. 근데 아무래도 내가 대학원까지 나오고 나이가 들고 이러니까 그 예우는 해주더라구요.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 좀 해보자고. (웃음)
면담자 : 혼자 그것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동료들하고...
동료들이 당연히 있죠, 그게
면담자 : 이걸, 이게 군대 안에서 그런, 반정부, 어찌보면 반정부 활동인데 그걸 한다는게 그리 쉬운 결정은, 마음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요.
구술자 : 그거는 인제 주로 뭐냐믄 교회라는 데에 다른 부대에 있는 부대원들끼리 모일 수 있는 장소잖아요. 그니깐 그, 이, 주로 그런 비공식적인 모임을, 그렇다해도 그것도 이거 내, 엄격한 의미에서 내 개인적으로 군대에 있으면서 이 군사 정부에 대한 저항의식이 생긴 거 이외에 군 부대 안에서 무슨 조직적으로 그렇게 활동한다는 거는 불가능해요. 그치마는 아주 확고하게, 철저하게 그때부터 이, 무장이 됐던 거 같애요.
면담자 : 그런 활동들로 인해서 좀 피해를 받으신 거는 없었나요? 무슨 영창을 간다거나 아니면 군기교육대에 보내졌거나 그런 뭐는 없었습니까?
구술자 : 어, 그때 최전방이 되노니까 북에서 말이죠, 삐리가 막 날아와요. 삐리가 마당에 하얗게 떨어진다구요. 그럼 김일성 장군노래가 인제, 악보 가사 까지 다 있는 게 날아온다고요. 그걸 인제 가지고 교회에 가니까 오르간, 품금이라고 그렇죠. 거기다 이제 오르간을 치다, 풍금을 치다가 그게 밑에 보안대에서 소리가 들린 거예요. 그래가지고 끌려가가지고 한번 조사를 받은 적이 있죠. 그, 인제 친구가 그때 군목이었는데 나를 변호해가지고 풀려났고 안 그랬으면 그때 아마 영창 한 번 갈 뻔 했던 기억이, 일은 거예요.
면담자 : 삼선개헌 반대 뭐 그걸로 인해서 뭐 그런 것은 없었나요? 공병단장하고 얘기하고 그냥 끝내... 무슨 얘기를 나누셨어요?
구술자 :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게 되죠. 요주의 인물이 되요, 요주의 인물이, 그, 이, 이, 되는데 인제 그게, 그게 뭐 군 안에서, 군 안에서 그걸 그렇게 내놓고 에, 뭐 조직적으로 할 필요가 없어요. 그 안에서 내가 활동해가지고 뭘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이 군 조직 사회에 이, 군대가 절대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안 된다고 하는, 그리고 이게 군은, 한국 군대라는 썩을 대로 썩은 조직이라는 게 말이죠, 그게 인제 그게 사회에 나오니까 이 박정희가 정북, 경북 고속도로 닦는다고 하면서 돈 해쳐먹는 거, 그 뭐야, 그 김형욱 회고록 보면 나오잖아요, 그게. 그게 장기영이랑 한국일보 사장 놈, 캐비넷을 여니까 그 속에 그냥 돈다발이 이렇게 나온다는. 그 돈이 뭔지 아세요? 경부 고속도로 닦는. 그 돈 갖다가 전부다 해쳐먹은 거예요. 지금 뭐 박정희가 무슨 국가 건설을 하고, 애국자? 천만의 말씀이에요. 만약 그놈들이 그때 외자들이 막 투자가 들어올 때 아니에요? 그걸 다 갖다가 전부 정말 국가를 위해 썼더라면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우리가 더 발전했을 거예요. 그때는 다 해먹어요, 군인 놈들이. 이후락부터 시작해서, 김종필부터 시작해서. 아 김종필 같은 놈은 그거 갖다가 전부 제주도 가가지고 귤 밭까지 사고 그랬잖아요. 박정희도 지금 그 당시 돈 빼돌린 거 예? 지금 스위스 은행에 얼마가 있는지도 몰라요, 지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박정희의 지금 그 당시에 외화 빼돌린 액수는 그, 뭐 영원히 그게 뭐 감춰,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깐. 제일, 제일 독재를 하면서, 독재를 하면서, 그 당시 그 차관이 젤 많이 들어올 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놈들이 그걸 갖다가 국가를 위해 쓴 놈들이에요? 그놈들이? 썼냐고요, 그놈들이. 전부 자기 부정 축재, 부정축재가 제일 많을 때가 유신 박정희 시대 때잖아요. 차라리 그 이후는 우리가 감시 기구도 생겨가지고 없은 거예요. 제일 많이 해먹은 놈들이에요, 박정희, 김종필, 이후락 그놈 군사정부 세력들.
구술자 : 면담자 : 71년도에 제대를 하시고 이때 그 이후는 어떤 활동들을 주로 하셨나요? 학교...
71년도에 제대를 하고는 이대로 간 거예요, 이화여대를. 예.
면담자 : 뭐 강사로 가셨나요?
구술자 : 그때는 전임강사로 들어간 거죠. 네. 그 들어가 가지구서 미국 올 때까지 이제 그 75년도까지 4년 반인가 있었죠, 거기서. 이 기간이 이제 이 기간이 나에게 있어서 아주 정말 중요한 기간이에요. 그 75년도에 나는 그냥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에 그냥, 그냥 벌써 전임강사로 들어갔으니까 그냥 있으면 그냥 그대로 그만 편하게 살 수 있고 교수로 올라갈 줄 알았는데 벌써 생각해보세요, 71년, 75년 사회라는 게 뭐냐 민청련 사건 난리고, 동아특위 사건 그때 그 다음에 인혁당 사태, 전부 이때 났잖아요. 그러니까 그, 그 당시에는 뭐냐, 그 당시에는 학생운동이 아카데미라고 하는 그룹 중심으로 됐어요,. 여러분들은 잘 모를 거야, 아카데미. 이 아카데미가 뭐냐, 흥사단 단체에요, 흥사단. 이 아카데미 학생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NL의 원조에요. NL. 나도, 나도 지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때 인제 그 미군 철수, 미군 철수 주장하고 이, 남북 회담 주장하고 외세 반대, 이 투쟁하던 세력들이죠. 이게 여기에 내가 이대에 있을 때 아카데미 이 단체 지도 교수였어요. 바로 여기에 누가 있었냐면 고광순이라고 모르죠? 고광순이, 사회학과. 이형랑이, 그 다음에 유인태 국회의원 있잖아요. 이혜경이, 그 부인됐죠, 전부다. 이런 학생들이 결국은 뭐냐면 그, 75년도에 내가 그, 미국 올 때가 바로 월남전이 무너지면서 인혁당 사건이 막 있든 그 무렵이잖아요. 결국 뭐 이, 내가 그, 이대 총장 김옥길 총장한테 가가지고서, 내가 여기 좀 학교에 있으면서 여기 국내에서 좀 박사 학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학교 있으면서. 그렇게 하니까. 딱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김옥길이, 김동길 누나잖아요. 그래가지고 이 사람이 나하고 같은 편에 있는 줄 알았어요. 정 반대였어요. 그니까 내가 그 당시 이대 안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미운 오리새끼들, 미운 오리새끼였어요. 내놓고 학생들이 워낙 그냥 데모를 하니까 얘기를 못해도 이 뒤에서 조종하는 게 이게 다 나라고 지목을 해놓고 학생처장, 교무처장, 겉으로는 전부다 나를 위하는 줄 알았죠. 벌써 그러니까 에, 벌써, 그 당시에 기무사. 서대문 형무소, 그 다음에 중앙정보위 세 군데서 사찰을 해요, 그러니까.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요, 이 세 기관에서 다 나와서 문 앞에 기다리고 있어요, 내 방 문 앞에서. 그러다, 그러다간 뭐 그, 그 당시 학과장이 날 보고, 도저히 자기도 인제 보호해주지 못하겠다고 그리고 뭐 벌써 학교 당국에다 나를 짜르라고, 나를 짜르라고 그러고 안 그러면 자기들이 체포해버리겠다고 그렇게 압력을 넣으니 어떡해요. 그래가지고 내가 뭐 진퇴양난이죠. 그때 월드 카운슬러 처치라고 왕복 비행기 표, 다 해결해주고 그 다음에 등록금 다 주고, 그 다음에 포켓머니까지 주는, 아주 그러니까 외국으로 나올 수 있는 장학금 가운데는 제일 좋은 장학금이죠, 그 당시에는. 이렇게 좋은 장학금이 없어요. 왕복 비행기 표, 그 다음에 용돈까지 줬어요. 생활비 다 주고. 그거 인제 시험을 친 거예요. 그거 시험을 치니 오죽이나 많이 그거 응시했겠어요. 그때 인제 독일 쪽으로 최종고라고 하는, 최종고라고 하는, 지금 서울 법대교수죠. 그 사람이 되고 미국은 내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미국을 온 거죠.
면담자 : 이민, 이민을 오신 게 아니고, 선생님 처음에는 인제...
구술자 : 나 유학을,
면담자 : 네 유학을
구술자 : 재원비자로 유학을 온 거예요. 그때 재원비자라 하면 미 국무성에서 초청하는 비자거던요. 이거는 그러니까 신원조회, 이거는 뭐냐 무조건 제일 그, 미 대사관에서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도 안 내줄 수 없는 비자에요, 이거는. 미, 미 국무성 초청으로 되어 있으니까, 미, 그러니까 나오게 된 거죠. 그리되니까 뭐 신원조회도 무사히 잘 걸리게 되고. 쪼끔 기다리고 있어요.
면담자 : 예 (잠시 중단) 그럼 그때 유학을 떠나오실 때가 몇 년도셨나요?
구술자 : 1975년이죠. 7월 10일에 왔나?
면담자 : 그때 오신 학교가 어디...
구술자 : 필립스, 필립스 유니버시티(Phillip's University)라고 오클라호마(Oklahoma)에 있는... 거기 와서 2년 공부하고
면담자 : 과, 전공은 어차피 철학? 신학?
구술자 : 철학으로 했죠. 종교 철학이죠.
면담자 : 필립스 유니버시티
구술자 : 그러다가, 그러다가 여기 1977년에 바로 클레몬트(Claremont)로 왔죠.
면담자 : 그러면 총 지금, 처음에 필립스 유니버시티에서 2년 공부를 하셨고 77년에
구술자 : 2년 공부했죠, 필립스에서
면담자 : 예. 77년도에 클레몬트로
구술자 : 클레몬트로 왔죠.
면담자 : 거기서는 뭘...
구술자 : 똑같은 전공이죠, 필로소피.
면담자 : 거기서도 2년 계셨나요? 몇 년?
구술자 : 아니죠, 박사과정이니까. 그거는 그래도 빨리 마친 폭이야. 바로 이 박사과정 논문 쓸 때 저가 인제 5·18을 맞이한 거예요. 80년도. 그때 내가 한창 박사학위 논문 쓰고 있을 때. 그래가지고 81년도에 졸업은 81년 1월에 했는 것 같애요. 77년 가을에 와가지고. 빨리 한 폭이에요, 그니까.
면담자 : 그때 선생님이 이렇게 오셨을 때는 뭐 지금처럼 한인 사회가 LA지역에서 많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유학생들이 또 많이, 요즘처럼 많지도...
구술자 : 많지도 않았고 그저 뭐, 그저 뭐 한 대학에 열 명 열댓 명 있을 때구요.
면담자 : 생활은 주로 어떻게 하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뭐, 우리, 거,
면담자 : 장학금이니까
구술자 : 아니에요. 지난번 내가 학부 다니는 동안 내가 그냥 뭐 가정교사 한 것도 있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어가지고 학점이 엉망진창이에요, 학점. 근데 박사과정 들어오니까 그게 성적이 나빠놓으니 장학금 하나도 받을 수 없어요. 무슨 말인 줄 알겠죠.(웃음) 그래서,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고생을 예, 정말 고생을 많이 했죠. 그 사람이 번 거 가지고 공부했죠.
면담자 : 아,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하신 줄 알고 안 여쭤봤는데 결혼을 언제 하셨나요?
구술자 : 73년에 했죠, 73년
면담자 : 군... 73년에 서른...
구술자 : 세 살이죠, 서른 둘, 서른 세 살이죠. 73년에 했죠. 한국 나이로는 33살이죠, 그때가.
면담자 : 뭐 공부하다가 아는, 알게 된 분을 만난 건가요? 아니면 선?
구술자 : 그니까 내가 학교 가 있을 때니까 그때 학교에 있을 때 아니에요?
면담자 : 예, 이화여대.
구술자 : 그니까 뭐 거기서 만난 거죠.
면담자 : 연애결혼 하셨습니까?
구술자 : 뭐 그건 내가 아는, 또 위에 교수가 뭐 그 사모님이 소개도 하고 또 그분도 아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뭐 서로 그렇게 된 거죠.
면담자 : 그, 사모님께서 쫌 이렇게 고생을...
구술자 : 많이 했죠. 많이, 그때 우리 해외에 나올 때 돈을 160불 가지고 나왔어요. 정부에서 허용 하는 게 160불이었어요. 지금은 만 불 넘잖아요.
면담자 : 그러면 여기 와서도 한국사회에 대한 정치적 문제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관심을 계속 가지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인제 이, 내가 공부한 대는 여기서 동쪽으로 한 45마일정도 떨어진 데이에요. 그니까 이게 LA 코리아 타운 하고는 약간 좀 멀리 떨어져 있죠. 떨어져 있으니까 비교적 공부하기에는 아주 좋은 분위기에요. 근데 UCLA는, UCLA나 USC 같은 경우는 이 코리아 타운하고 너무 가까워가지고 학생들이 정말 공부하는데 여러 가지 지장이 많아요. 거의 박사과정을 거의 못 끝내요. 인제 나는 그, 약간 저쪽으로 떨어진 데에 있어노니까 공부는 했는데, 요는 중요한건 뭐냐면 그게 내가 한국에서 벌써 박정희 유신시대 다 겪으면서 왔잖아요. 삼선 개헌, 유신시대 다 겪고. 그러다가 거의 뭐 쫓겨나다시피 해서 그땐 뭐, 내가 여기 오기 직전에는요, 거의가 피해 다니느라고 시간 다 보냈어요. 뭐 일산 송추, 이런 대로 교외선 타고, 잡으러 왔다 그러면 피해 다니는 거죠. 그래 하다가 그렇게 하다가 왔으니까 아무래도 여기 이제 반정부 운동하는 사람들하고, 제일 그 사람들하고 만나야 내가 얘기도 할 수 있고 서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내가 참 이게 아주, 이 와이프는 죽도록 이 막노동하면서 일을 하는데 나는 박사학위 공부 하랴, 그것도 한 50마일 떨어진 LA까지 나와 가지고 운동 단체들하고 이, 바로 후, 데모죠, 활동대 하랴, 이게 그러니까 이게 그러니까 바로 인제 이 두 가지를 다, 두 가지를 다 해내는데 이게 어려움이 있었고요. 그 이제 정기열이나 한호석 같은 사람들, 다 나 같이 공부하러 왔다가 고만 이 운동권에 글로 그만 편중되는 바람에. 정기열이는 끝냈어요. 그만 대부분이 그만 이때, 두 개를 다 못하고 하나만, 하나만 한다는 건 고만 이 운동에 고만 빠져가지고 공부를 다 못 끝낸 사람들이 너무 많죠. 예. 우리는 지금 여기 통일 운동한다는 나이 든 사람들 가운데서 이 두 가지를 다 해내기가 여간 어려움이 말할 수 없어요.
면담자 : 당시에 LA에 그런 단체들이 좀 몇 개가 있었나요?
구술자 : 그게 인제 지금부터 중요한데 그 당시가 그 서울시장을 했던 김상돈씨가 있던 조국민주회복국민회의가 있어요. 김상돈. 조국 민주회복 국민회의. 김상돈이야, 서울 시장하던. 그 다음에 차상달. 그 다음에 인제 그 당시 신문으로는 신한민보라고 하는. 김운하가 발행하는 신한민보가 있었구요. 예, 일단은 뭐냐며는 나 같은 경우는 이, 이런 운동 단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어요. 속하진 않았는데 중요한건 뭔가 하면 인제 내가 여기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여기 지금 그, 그 당시 막, 막 이렇게 유학 온 대학생들이 있었어요. 그 대학생들이 한국 대학생 연합회, 미주 한국 대학생 연합회. 그게 바로 뭐냐면 학생들이 얼마나, 전부다 나이가 뭐 20대 말 뭐, 여기 인제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왔거나 고 다음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왔거나 그니까 그때는 1.5세대라던지 2세란 건 거의 찾아보기 없었어요. 거의가 다 그냥 한국에서 바로 온 친구들이죠. 이런 친구들이 그때 이, 내가 뭐냐하며는 그, 이, 이 학생들이 역사공부를 했어요. 그때 읽은 책이 뭐냐며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 역사 공부하는 이 모임이 그땐 순수하게 뭐냐, 이 역사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었어요. 여기 인제 학생 가운데 대표적인 애가 인제 한광호, 그 다음 장태완이, 그 다음에 인제 박무영, 박대영. 이렇게 되는데 한 2년을 아마 순수하게 역사공부만 했을 거예요. 거의 뭐 거의 매주 모였죠. 나로서도 박사 공부하면서 그게 50마일 운전해 와서 학생들 지도하는 게 여간 출혈이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뭐냐면 바로 5·18을 맞은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5·18을, 5·18을 맞아 그때는 우리 역사 공부를 하면서 상당히 학생들이 인제 의식화 된 거예요, 그러니깐.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에서는 이게 인제 전두환 군인 놈들이 학생들이 갖다가 그렇게 학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11가하고 벌몬(Vermont) 코너에 있는 그 적십자 병원을, 아마 이, 이 시간쯤 됐을 거다, 세시 반쯤, 네 시에 우리가 글로 다 몰려간 거예요. 왜 갔냐면 인제 헌혈하러 간다고. 그게 중요, 아주 중요해요.
면담자 : 선생님 그, 한국에서 광주에서 5월 18일 날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그런 것을 그런 사실을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구술자 : 한국일보죠, 아무래도. 그 당시 한국일보가 호외를 막 뿌렸어요. 그때는, 그 당시에는 한국일보하고 한국 일보하고, 신한민보하고 그 다음 미국언론들이 막 보도를 막 한 거죠. ABC, NBC, CBS. 미국 언론들이 그 당시 뭐 자기들이 촬영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보내줬죠, 그러니까. 뭐 군인들이 학생들이 학살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줬으니까.
면담자 : 주로 그, 약간 언론의 논조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것들이 어떤 식이었나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쫌 이렇게
구술자 : 아니죠. 미국 언론들은 전혀 그렇게 보도하지 않았죠. 미국 언론들은. 근데 인제 한국에서 나온 주류 언론들은 그런 식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처음에는 그렇게 못했어요. 아직 전두환이가 아직 정권을 잡을지 안 잡을지도 모르고. 처음에는 이게 이, 이쪽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군인들이,, 이게 이 무모한 학살을 한다, 이런 식으로 나왔고 고 다음에 이런 종이에다가 막 그, 학살하는 장면들, 고 다음에 가장 충격적인 건 뭐냐면 죽은 시체를 싣고 막 시내를 돌아다니는 사진들이 막 나왔어요. 그게, 굉장히 그게 충격이 많이 됐죠. 호외가 발행됐어요, 호외가, 그 당시. 한국일보 호외가 막 나와 가지고서 코리아 타운에 나오면 수도 없이 뿌려지고 미국 주류 언론에서 이 보도를, 그 생생하게 보도를 해주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내가 겪은 광주항쟁이에요, 바로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예, 이 적십자 병원을 간 거예요. 적십자 병원을 가가지고 거기서 우리가 헌혈을 한다고 막 방송을 하니까 저기, 적십자 병원이 그래, 자기들 적십자 병원이 생긴 이래로 단위 시간에 이렇게 많은 헌혈을 한꺼번에 한 적이 없었다는 거야. 한 5백명이 한꺼번에 했어요. 하루 이틀 사이에. 막 줄을 서가지고 와서 헌혈을 했으니까
면담자 : 주로 한국인들
구술자 : 한국인들이죠, 물론. 한국인들. 그렇죠. 한국인이죠.
면담자 : 동포사회의 반응은 쫌 어땠나요?
구술자 : 그때는 굉장히 뭐 정말 이럴 수가 있는가? 누구를 막론하고 그러니깐 우리가 광주에 피가 모자란다, 그렇게 뉴스가 나가니깐 너도나도 막 주 와가지고 그때 뭐 그 당시 그, 왔다가서 적십자 병원만은 꼭 촬영을 해야 되요. 예, 그 줄, 복도, 저기 사람들이 행길가에까지 쭉 늘어서서 헌혈을 했죠. 그때 현혈이라는 게 굉장했어요, 굉장했어요. 그러고 인제 우리는 고만 거기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거기서 농성에 들어간 거죠. 적십자 병원이 거기가 공공기관인데, 공공기관인데 적십자 병원에서 우리한테 그냥 내줬어요. 자기들이 뭐 업무를 거의 마비되가 안 될 정도로 우리한테 모든 방을 다 비워줬어요. 그기 있으라고 말이죠. 자기들은, 자기들은 실적으로 볼 때 한꺼번에 많은 피를 모은 적이 없으니까. 요거는 인제 중요한 게 28일까지 우리가 거기 있었거든요.
면담자 : 몇일날 선생님은 그걸 항의 시위를 시작을 하셨습니까?
그렇지, 학생들하고 나는 학생들하고 같이 들어 가가지고 28일까지 거기에
면담자 : 그러니까 들어가신 날이
구술자 : 구술자 : 18일날 들어갔어요. 18일날 들어 가가지고서는 28일 날 까지 거기 있었던 거예요.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합니다.

(tape 교체)

구술자 : 마침, 인제 뉴스에 막 나오기를,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냐면 지금 그니깐 뭐 여기 시간으로, Dp. 바로 인제 공수부대가, 공수부대가 도청을 향해서 진격에 들어가고 있다, 막 뉴스가, 미국 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그니깐. 그니깐 광주나 그 다음에 서울에선 미처 몰랐겠죠. 그치만 미국 언론들이 공수부대가 지금 광주 도청을 향해가는 것을 텔레비로 막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28일날. 그러니 우리는 뭐 전부다 자다 일어나가지고는 미국 대통령, 뭐 상하의원들, 하원들 전부 인제 붙들고 전화를 하는 거예요. 좀 도와달라고. 만약에 미국에 여기서 만약에 스톱을 시키면 이 공수부대가 절대 못 들어갈꺼다. 도청에는 시민하고 학생들이 있는데 가면 무자비하게 학살, 다 죽지 않느냐, 좀 도와 달라 한 거죠. 나는 그때 누구한테 전화를 했냐 하면 그때 상원의원인 하야까와한테 전화를, 하야까와. 그 유명한 의미론이라 하는 책도 쓴 학자죠, 이 사람은. 일본인 상원의원. 이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에요. 내가 전화한 대상은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면담자 : 그 전부터 좀 알고 계셨나요?
구술자 : 아니죠, 뭐 무작정, 무작위로 막 전화한 거예요. 인제 이게 중요한 거예요. 뭐라 한줄 아세요? “We are still watching.” 무슨 말인 줄 알겠죠? “We are still watching”이에요, 뭐 우리는 그냥 정말 다급해가지고 도와 달라 너희들이 전화한통만 하면, 이 전두환 정부에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지금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죽지 않는다. “We are still watching이에요. 그런 사이에, 그런 사이에 공수부대는 쳐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이게, 이게 광주 항쟁을 경험한 사람하고 안 한 사람하고 달라지는 게 있어요. 우리가 광주 항쟁 이전까지는 우리가 민주 항쟁이라고 붙여야 되나요? 지금 공식 명칭이 어떻게 되요?
면담자 : 그 저희 5·18 민주 항쟁이라고 이렇게 표기는 하고요. 국가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합니다.
구술자 : 민주화운동이라고 하구요? 아 그때 우리가 적십자 병원에서 이 인제, 5월 28일 아침에 말이죠, 전화통을 붙들고. 그땐 휴대전화도 업었죠. 전화통을 붙들고 이렇게 막 미국 정부의 관료 각계에다 호소를 할 때, 호소할 때, 모든 반응은 한마디로 냉담인거예요, 미국 정부가. 그 이후부터 적어도 유신에서부터 광주 5·18까지 계속 지속적으로 투쟁해오다가 바로 이, 이런 걸 경험한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는요, 그 다음부터는 머리를 꽝 치면서 깨달은 것이 있어요. 절대로 우리가 이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거, 절대로 외세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이건 그러니까 체험해봐야 알아요. 나 같은, 내 개인 경험은요. 그 이전까지는 우리가 대통령에도 편지도 쓰고, 상원 의원들한테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뭐 이런 짓들을 했죠. 나 같은 경우는 그 이후부터는 절대 이것은 할 필요도 없고 백해무익한 거고. 지금 오늘 이때까지고 이런 걸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도 무슨 통일 문제, 뭐하면 미국 대통령 오바마 한테 편지 쓰고 가서 뭐 국회 상원 분과위원, 외교 분과 위원장 만나고 미국이 뭐 호소하면 미국 사람, 미국이 우리말 들어주고 해결할 것으로. 이게 아직도 5·18 이전의 의식구조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런, 인제 통일 운동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경험한 바로는,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이, 예, 반미라면 반미를 할까 고 다음에 미국에 대한, 미국에 대한 확실한 체험적인 확신이 생겼어요. 절대 그 다음부터는 미국에 뭐 전화하고, 미국정부에 전화하고 미국에 편지해가지고 하는 이런 것이 그걸로 끝났어요. 5월 28일날 아침으로 끝난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그런 짓 안 해요. 지금도 그런 거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뭔가 이 5·18 같은 경험을 체험으로 해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 적십자병원 그 안에서 한 10일 가까이 항의 시위를...
구술자 : 그렇죠, 열흘간은 꼬빡 거기서, 뭐 물 한 모금 안 먹고 계속 항의, 항의를 했죠.
면담자 : 주로 그때 선생님께서 좀 모임 지도를 했던 미주 한국 대학생 연합...
구술자 : 그렇죠, 저가 지도교수였으니깐요.
면담자 : 그쪽 분들하고 같이 하셨나요, 아니면 다른 데서도 또 동참을 해주셨나요?
구술자 : 아니에요, 그때는 들어간 사람들은 전부다 우리 대학생들 뿐이었구요. 국민회의, 조국민주회의 국민회의 멤버 가운데 누가 들어가 있었냐며는 그 김운하 사장이 그때 들어가 있었어요. 학생이 아닌 대도 인제 이게 중요한 건데, 이게 중요해요. 그 당시에 지금, 지금, 이거 LA오시면 양현성이라는 목사하고 인터뷰하도록 되어 있나요? 지금?
면담자 : 아니요, 지금 그분은 안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 그, 그게
구술자 : 그 사람이 안 들어가 있는 게 이상하네요. 하튼 지금 한국 국내외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연성이라는 목사가, 감리교 목사인데 하튼 LA에서 5·18은 자기가 다 주도했다, 자기가 주동자다 이런 얘기를 해요. 아마 양현성 목사란 사람이, 에, 이게 뭐 접촉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제일 뭐 그래가지고 뭐 한국 가서 노무현 정부때 뭐 상도 받고 그런 줄로 알아요., 우리가 인제 대학생들이 들어갔잖아요. 들어갔는데 국민회의 사람들 가운데 신한민보 김운하 사장이 들어오드라구요. 이 양현성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남동생 하나하고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들어오더라구요. 들어오더니 침대를 갖다 딱 깔더니 모포를 뒤집어쓰는 거예요. 열흘 동안을 딱 뒤집어쓰고는 물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래서 우리는 보지도 못한, 듣지도 못한 사람이 들어 와가지구는. 그 여동생은 지금 덕성여대 교수고요, 그 다음에 남자 동생은 UCLA를 졸업하고 지금 건국대학교 교수가 됐어요. 중국사 공부해가지고서. 양현성 목사란 사람은 클레몬트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된 거죠. 근데 문제가 뭐가 생겼냐면 28일날 인제 적십자 병원을 나가야 되겠는데 또 적십자 병원 측에서도 나가라고 그러고. 뒤집어쓰고 안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깐. 이게, 이게 문제가 된 거야. 행동 통일을 전혀 같이 해주지 않으면서 그러더니 결국은 뭐 끌려나오다시피 나왔죠. 나와 가지고는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그냥 5·18 운동의 주도자였다, LA 바닥에, 이런 말을 하고 돌아다녀요. 아마 그 기록물에도 그렇게, 그 사람이 여러 군데 활동하니까 그렇게 쓰여져 있을 거예요. 내가 아는 양현성 목서라는 사람 형제는, 바로 그거예요. 여동생은 양옥성이에요, 양옥성. 덕성여대 교육과 교수거던요. 그 다음에 인제, 인제 언론에 미국 주류 언론에 알려지니까 막 주류 언론에서 인터뷰 하러 온 거예요, ABC, NBC, CBS에서. 그 인터뷰도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 주류 언론에 그냥 우리가 농성하는 장면까지, 적십자 병원까지. 그때는 하여튼 5·18 그러면 미국에서는, 뭐 지금은 뭐냐며는, 통일운동 이런 게 동부가 중심이 돼있지만 그 당시에는 동부는 거의가 미미했어요, 이 서부 중심이었죠. 아무래도 김상돈이라고 하는 거물급이 있는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그런데 인제 다, 그런데 국민회의라 하는 단체들은 거의가 다 노인들이고 이 조직적으로 움직여가지고서 4, 50명이 적십자 병원에 몰려갈 수 있는 그런 인적 자원도 없었고 그런 동력도 없었어요. 근데 유일하게 인제 내가 인제 그 역사공부반이, 대학생들이 들어가게 된 거죠. 들어가 가지고 피를 받았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서 우리가 이 피를 광주에 보내겠다고 그때 적십자 총재가 누구냐면 이호였어요, 이호. 예. 그래가지고 적십자하고 우리하고 콘택(contact)을 했을거 아니에요. 우리가 피를 보내겠다. 피를 받아달라니까 그 이호 적십자 총재가 답이 온 게 뭔 줄 아세요? 우리는 피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답이 온 거예요. 우리는 피가 충분히 있어서 받을 필요가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그렇게 많은 피를 수혈을 하고 하나도 못 보냈어요. 하나도 보내지 못했어요. 그, 전두환 정부가 그거 받아주겠어요? 생각해보세요. 하나도 못 보냈어요. 결국은. 결국은. 그러니까 어디, 여기, 그 미국에서 다 쓰여졌겠죠. 피가 그러니까 하나도 못 갔어요, 그때. 이호 였어요. 이호. 적십자 총재가. 내가 그때, 그때 안에 있으면서 그 큰 사건은 우리가 피를 모은 걸 보낼라고 그러는데 적십자 총재 이호가 우리는 피가 충분히 있으니까 필요 없다고 답이 온 거 하고 고 다음에 5월 28일날 아침에 카, 그때 카터 대통령이에요. 주류 정치인들한테 우리가 전화, 전화래봤자 15분, 20분밖에 안 했을꺼 아니에요,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그, 그 짧은 시간에 그 당시 전화료로 얼마가 나온 줄 아세요? 800불이 나왔어요. 800불이. 그 당시 전화 요금으로. 그런데도 병원 측에서 우리가 헌혈을 워낙 많이 해놓으니까 그 전화료를 차지(charge: 청구)를, 받지 않더라구요. 그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이, 그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그냥 이, 전화를 도와달라고 말이죠,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완전 냉담. 인권대통령이라는 카터 대통령한테 받은, 우리가 대접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에, 우리가, 예. 절대 우리가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절대 외세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이, 이거는 내가 광주에서 얻은 내 자신의 삶의 산 교훈이에요.
면담자 : 그때 선생님이 지도했던 학생들 뭐 그렇게 들어갔던, 같이 항의시위에 참여했던 인원은 대략몇 명 정도 됐었나요?
구술자 : 그때 그, 내가 아까 얘기한대로 3, 40명. 3, 40명 되고
면담자 : 그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인력까지요?
구술자 :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은 학생들 외에는 아까 김운하 사장이란 사람하고
면담자 : 두 세명.
구술자 : 근데 이제 그 학생 가운데서, 학생 가운데서 내가 아까 얘기한대로 한마디로 말해서 변절해가지고 완전히 우익으로 돈 놈도 있어요. 바로 이갑산이라는 놈이에요. 적으세요, 거기 이갑산. 이갑산. 이게 이기택이 조카인가 그래요. 이놈은 뭐냐면 한국 들어가 가지고 완전 깡보수가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깡보수가, 깡보수가 되어가지고 상지대 사건 났을 때 상지대 사건 났을 때 그기 가서 앞장서가지고 강만길 총장 막 퇴진운동 한 놈이 바로 이거예요. 그렇게, 이게 인제 내가 데리고 간 대학생놈, 그놈은 대학생도 아니고서, 그냥 여기와가지고 자기 와이프하고 같이 청소하고 돌아다니면서 대학생 그룹에 섞여있던 놈인데 이게 그러니깐 인제 거기 들어갔던 멤버 가운데 이 김운하라는 신한민보 사장이 이갑산이가 변절한 걸 가지고. 그걸 가지고 나한테 막 매도를 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이런, 극보수, 이런 프락치 같은 놈들을 내가 데리고 들어갔다, 그 책임을 나한테 돌리고 너도 인제 그럼 프락치다, 이런 식으로 몰고 들어간 거예요. 바로 이갑산이가 그런 역할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그러니깐 학생들 가운데서 바로 인제 그러니깐 완전 우익으로 돈 녀석 가운데 하나가 이갑산이고 고 다음에 문제가 거기서 사실은 그 대학생 그룹의 회장과 주모자 노릇을 한 게 누구냐, 한광호에요, 한광호. 한광혼데. 한광호는 지금 말이죠, 그 당시 그 한국 나와 가지고서 결혼을 해가지고 여기와서 송이라는 딸까지 낳았어요. 딸까지 났는데 그 장인이 그 자기 사위가 여기서 반정부 활동을 한다는 걸 알고 그 장인이 육군사관학교 교관이었어요. 막 그대로 이혼을 시켜버렸어요. 완전히 이혼이 되어, 가정이 완전히 파탄된 거예요. 파탄되고는 지금 이 한광호는 완전히 그 이후에 그만 충격을 받아가지고 완전 장님이 됐어요. 내가 꼭 인터뷰를 시키고 싶은 친구가 한광호에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적십자 병원에 인제 자기 동료들을 다 끌고, 내가 물론 광호한테 다 모으라 해가지고 했지만 그 학생들 동원한 거는 한광호가 다 동원했거든요. 그래가지고 완전 가정이 파탄이 되었어요. 완전히 파탄되고. 그 딸 하나가 인제 뭐 공부를 잘했다고 해서 명문대학은 들어갔다고 그러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광호는 비참하게 되었어요. 아주. 고 다음에 이제 그게 장태완이라는 친구는 그 당시 LA CC에 다녔는데, 이 친구가 뭐냐면 리버사이드(UC Riverside) 교수가 됐어요. 교수 되가지고 지금은 무슨 뭐, 인종문제, 흑인문제 연구해가지구 뭐 미국 대학 교수가 됐거든요. 이 친구가 또 한국 나와서 돌아다니면서 이게 광주 팔아먹고 돌아다니는 놈이에요, 장태완이. 아마 그거 쪼금 여러분 보다 쪼금 위에 세대들은 다 알아요. 한국 나나가지고 자기가 무슨 LA 5·18은 전부 자기가 주도한 것처럼 떠들어 대는 친구가 이 장태완이라는 친구하고 바로 양형승이 두 친구에요. 진짜 그때 고생하고 주동자들은 전면에 전혀 안 나타나고 있어요. 이름도 안 내고 이어요, 그러니까 장태완이가 그때 무슨 역할 했냐면 그 외국 언론들이 오면 언론들 상대로 이게 인제 영어를 하니, 잘 하니까 인터뷰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뭐냐며는 통일이나 인권운동에 전혀 나타나지도 않고 지금 여기 가까운 리버사이드라는 데서 인종학 전공으로 교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인제 또 박무영이라고 있어요, 박대영이 이 친구 그 당시에 총무를 했잖아요, 총무를 했는데 이거 참 전부다 정말 이게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사이비들이었어요. 그때 우리가 돈을 전부다 우리가 막 가가호호 다니면서 상가마다 다니면서 모금을 했단 말이에요. 광주를 위해서요.
면담자 : 80년 당시에요?
구술자 : 그 당시에 한 6천불 모았어요, 6천불. 그 당시에 6천불이라면 꽤 많은 돈이에요. 그걸 우리가 몽땅 광주로 보내라, 하나도 안 보냈어요. 전부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뭐 기름 값으로, 돌아다니면서 자기들 식사대로 다 써버렸어요, 이 박대영이라는 인간이. 이 친구가, 그 당시 후회되는 게 그 모금 운동 한 걸 내가 그걸 돈을 관리를 했어야 되는데 그게 지금 지나고 나서 정말 후회 돼요. 지금 그 당시 5,6천불이면 지금 뭐 환율로 따지면 5,6만 불 되는 돈이잖아요. 한 푼도 못 보냈어요. 한 푼도 못 보내고 운동한다는 놈들이 돌아다니면서 그 돈 다 써버렸어요. 예.
면담자 : 광주 수난자 기금 조성이라는 그걸로
구술자 : 한푼도 못 보냈어요.
면담자 : 했던 게 80년도였던가요? 81년?
구술자 : 우리가 그때 모은 돈은 81년. 한푼도 안 갔어요. 나중에 회계보고 하라고 하니까 지들이 돈을 다 써버렸어요. 그, 그래도, 그래도 그냥 운동 하면서 너희들이 모은 돈 다 너희들이 하라고 믿고 맡겨놨더니 운동, 자기들이 여기서 뭐 저기, 자기들이 돌아다니며 기름값들고 밥 사먹는 건 지돈 가지고 사먹어야지, 이제 어떻게 모금한 돈 가지고 다 써버리느냔 말이야. 그러니깐. 그게 지금 정말 참 아쉬움이 남는 것 가운데 하나에요. 고 다음에 거기에 오늘 같이 나오려고 했는데 김영희 라고 하는, 이대 불문과를 나오고, 예. 그 아파트라고 하는 아름다운 그 이름은 사람이어라 이런 드라마 작곡, 작, 드라마를 작곡가라고 그러나 작사자라 그러나?
면담자 : 작가
구술자 : 작가. 드라마 작가죠. 그걸 직접 써가지고서 무대에 올렸는데 대학생들이 그게 전부 무대 배우로 올라가서요, 굉장한 영향력을 주고 큰 감동을 줬죠. 그런 분들은 아직도 여기 살아있고. 지금은 인제 가정주부로서 민족 통신 거기, 노길남이 하는 기자 노릇하고 있고 그러죠. 이건 그 그룹 안에서, 대학생들 그룹 안에서 이갑산이 이런 친구들은 완전히 정말 극구 우익으로 돌아가지고 뭐 일부에서는 프락치로 들어왔다, 이렇게 얘기하고요. 프락치를 그러니까 프락치를 받아들인 것도 나 잘못이라고 나를 갖다가 이, 예. 비난하고 그러니깐 그, 이제 5·18, 5·18을 겪고 나서 그 안에서 내부 안에 있던 군상이에요. 양현성, 그 그룹들은 밑도 끝도 없이 들어와 가지고는 뒤집어쓰고 완전히 그냥, 어떻게 보면 최악으로 극단적으로 싸운 것 같죠. 도대체가 우리가 들어가 있는데 대화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자기는 그냥 자기들은 목침대도 자기들이 들고 들어와 가지고 세 형제가 그대로 이불 뒤집어쓰고는 열흘 동안 꼼짝도 안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러면 들어갔으면 그런데서 행동을 같이 하지 않고는. 나중에 그 적십자 측하고 우리가 다 편의를 봐줬으니까 서로 사이좋게 헤어졌어야 했는데 그 사건 때문에 그만 적십자 측하고도 우리하고도 불미스럽게 헤어지게 된 거죠, 걔들 때문에.
면담자 : 안에 들어가 계실 때 뭐 이야기를 안 나눠봤습니까.
구술자 : 아, 그냥 이야기. 그 안에서 아침마다 모여가지구서 밤새도록 잠을 안 자니까 나중에는 눈이 시뻘게져가지고는 그것도 좋지 않더라구요. 서로들 감정도 격해지고. 이제는 그러니까 김운하라는 신문사 사장이죠,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다 죽어야 돼. 광주 도청 폭파해가지고 다 죽어야 역사가 바뀌어. 이러는 거야. 그런 말해서 되냐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시냐, 함부로 하시냐고? 그랬더니 아니 그냥, 사람들 앞에서 ‘당신 말이야 의식이 모자라서 그런 거야’ 이게 투쟁을 해도 지금 세월호, 그 다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투쟁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런 거나 똑같은 거 아니야. 그럼 뭐 막 열흘 동안 막 먹지 않고 막 긴장 속에 있다 보니까 그 안에서 열흘 동안 서로 또, 광주 같이 도청에서 적을 앞에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이 안에서 그냥 맹숭맹숭하면서 그냥 이념적가지고 말만 가지고만 싸우다 보니까 들어가 잇는 사람들 안에서도 결국 헤어질 때는 꼭 그렇게 사이좋게 헤어지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게 그러니까 어떤 면으로는 내부에 있었던 진상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절대로 뭐 광주를 훼손되는 건 아니고요, 내가 본 바로서는, 나는 김운하의 말에 찬성 안 했어요. 광주 폭파, 도청 폭파해가지고서 다 죽어야 역사가 바뀐다는. 그 말을 나는 도저히, 도저히 할 수었었어요. 양현성이 형제들 들어와 가지고 그 짓 하는 것도. 그 할 수 없었어요. 그 다음에 나와 가지고 장태완이 같이 이런 친구들. 자기 언론에 얼굴 내미니까 자기가 마치 하는 행세주의자들, 그 다음에 이때다 하고 모여들어가지고 그 돈 가지구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술집 여자하고 결혼해가지고서 살고 그랬어요, 박대영이라는 친구는. 그 돈 가지고 전부 그렇게 써버리고. 이건 그러니깐 참, 이 운동권이 가지고 있는 단면이고 어떤 면에선 앞에 적이 없으니까 이런 정말, 그, 참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도 이렇게 인제 이, 남아있었지만 일단 그 광주라는 그 큰 임팩트, 충격이 어쩌면 호외, 한국일보에 돌리는 호외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막 사람이 그대로 죽어가는 장면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을 했고 그건 국내 신문인 게 사실이에요. 그 다음 미국 언론을 통해서 직접 우리가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막, 격정 격렬했던 것은 뭐 이, 굉장했어요. 굉장했는데 아무래도 호남향우회가 인적 동원은 굉장히 많았겠죠. 근데 중요한 거는 그분들이, 그렇게 나온 사람들은요, 결코 오래가지 못했어요. 결코 오래 가지 못하고 고 다음에 거기다 1983년도에 김대중 대통령이 나타나니깐 광주 그때하고는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김대중 후원, 뭐 황길선이다, 최상구다, 이런 친구들. 광주 때는 얼굴도 나타내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김대중 근처를 뺑 그냥 둘러싸버리니까 진짜 그 김대중 내란 음모로 그, 이 투쟁하던 홍동원 목사 같은 사람들은 김대중하고 얼굴 한번 마주치지도 못했어요, 결국은 그러니까. 이, 이건 그러니까 호남향우회 사람들이 자기들이 광주와 김대중 대통령들을 둘러싸고는 현장에서 그런 걸 전혀 느끼질 못하면서 정치적으로 어떤 출세의 발판을 삼으려고 하는 이런 무리 군상들. 뭐 그러다가 결국은 국회의원 할려고 돈 갖다가 바쳤지만 뭐 되지는 않고. 황재성 같은 사람이 가장 대표적인 예잖아요. 그러다가 인제 노무현 정부 들어서고는 5·18 인제 기념상 준다 하니 (웃음) 이런 일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물론 인제 그, 참가하기는 했지만 내가 볼 때는 뭐 한, 중간 이하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상 준다니깐 떼거지로 나타나가지고 상 받으러 나타나는 사람들. 그리고 진짜로 그, 이 광주 항쟁 때 여기서 예, 그렇게 그 한 인물들은 그 이후에 전부 자기들 본업으로 돌아가서 자기 일이 충실했지 뭐 명함내고 상 받으려고 기웃거리지도 않고 상 받으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그 당시에 뭐냐면 박사학위 논문을 그 열흘 동안, 그 논문 지도 교수 퀄리파잉(qualifying: 논문 제출 요건) 오럴 디펜스(oral defence: 구술시험) 다 있는데 열흘 동안 그, 논문을 여기 가져와서 썼어요. 적십자 병원 안에서. 적십자 병원 안에서 단 하루가 나한테 말이죠, 이게 박사학위 논문 쓸 때 시간이 촉박한데 제 시간 내에 박사학위 논문을 내야 하잖아요. 근데 시간은 쫓기고 여기 광주는 나와 있어야겠고. 적십자 병원에서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그래도 결국은 여기, 공부한 누구보다도 박사를 제일 먼저 마쳤어요. 미국박사 한, 뭐 3년 만에 다 마쳤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거예요 .
면담자 : 그럼 선생님 28일날 나오, 어찌됐건 적십자 병원에서 나오셔야 돼서
구술자 : 나왔죠, 네네
면담자 : 나와서 어떤 활동들이 하셨나요?
구술자 : 그 다음부터 여기 아드모어 공원(Ardmore Park)이라고 거기에, 거기는 이제 학생들이 주도는 했지만 인제 일반 시민들이 일반 여기 주민들이 거기에 모여가지고서는 거의 그냥 하루건너 한 번씩 거기 시위 피켓 들고 시위를 하면서 결국은 코리아 타운 내에서 다운타운까지 경찰 허락 하에서 인제 시위를 하고 고 다음에 모금운동을 한 거죠,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강하게 아주 매일 이어졌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미국 주류 언론에서 계속 보도를 해줬고요. 그러니깐 전두환 반대, 전두환 반대, 전두환 찢어죽이라는 게 그 당시 인제 구호였죠. 전두환 반대와 함께 그 다음에 모금운동이고. 그러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이 바로 인제 내란 음모죄로 구속되니깐 김대중 석방하라는 거. 사실은 그러니깐 김대중 석방이, 김대중 구명운동이 그 당시에는 5·18 이후의 핵심주제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가지고 81년도에, 81년도에 전두환이가 1월 24일에 여기 나타났잖아요. 1월 24일에. LA 공항에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대학생 그룹들이 공항으로 몰려간 거예요. 공항으로 몰려가니깐 이 전두환이가 인제 영빈 치레로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뒤차 카고(cargo), 인제 그 저기 화물로 글로 빠져나와가지고서는 빠져나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깐 정보가 우리한테 들어왔잖아요, 이게 전두환이 벌써 빠져나갔다, 그러면 전두환이 빠져나갔으면 여기 국우장이라는 식당이 있었어요. 국우장에 와가지구서 교포들하고 점심식사를 하도록 이렇게 계획이 돼있는데 그러니깐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이렇게 쭉 오는데 바로 요 다음 길이 뭐냐면 여기가 쭉 내려가면 노르만디(Normandie)라는 길이 나와요, 노르망디길. 웨스턴 다음에 큰 길이 노르만디라는 길이 나오는데 그게 10번 프리에서 내려가지고 노르망디 가에서, 올림픽가에서 인제 이렇게 좌회전을 꺾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그 소리를 듣고 그냥 막 속도위반을 하면서, 전두환을 막아야 하니까, 전두환이를 막아야되니깐 오는데, 인제 그 여기 바로 여기 올림픽까지 내려오면 김방앗간이라고 아직 푯말이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옛날 그대로 있어요. 그 앞에다가 인제 관을 갖다가 인제 노르만디에서 꺾어지는데 우리가 정말 이거는 간발의 차이에요. 거 와가지고는 관을 갖다가 인제 또 갖다가 열다섯 개를 깔아놓고 거기다 관에다가 시뻘건 피를 묻혀가지고 해놓으니까 그 전두환 차가 오다가, 그 전두환이하고 이순자가 타고 그 다음에 인제 그 이, 저기, 이석, 그 저저기 아웅산 가서 죽은 패거리들, 그 다음부터 외무장관, 뭐, 비서실장 쭉. 우리가 성공적으로 그걸 막았죠. 그걸 완전 차단했죠, 그러니깐. 해가지고 심지어는 전두환 차 위에 올라가가지고 피켓 가지고 막 차를 찍어 내릴 정도였으니깐.
면담자 : 그, 경호 같은 게 없었나요, 당시에?
구술자 : 한 800명을 깔어 놨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그게 계속 뭐 어떻게 신문에 보도가 되느냐면, 800명을 구석구석 깔아 놨다. 나오면 어떻게 총격을 받을지 모르니깐 나오지 말라, 이렇게 신문에 보도가 막 나왔어요. 그런대도 불구하고 그때 40명 정도가 나왔어요. 많이 못 나오죠, 그러니까 그 무릅쓰고. 그때 인제 그때 그 젊은 청년들 이름이 있어요. 김형준이, 고 다음에 예정웅, 예정웅이라고 지금도 계속 글 쓰는 친구 있잖아요. 예정웅, 김형준이는 김상돈 아들이에요. 예정웅, 홍, 그다음에 홍정웅, 그 다음 문성철, 예. 고 때가 내가 볼 때 한 30대 뭐 쪼끔 중반쯤 되는 나이들이었을 거예요. 고 친구들은 대학생들은 아니었어요. 직장인들이었죠 그때 전부다 여기다 권총 차고 나왔어요, 권총. 예다. 권총을 이렇게 양말에다 넣고 나왔죠, 그니까. 인제 전두환 차가,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 막혔, 그 당시 우리가 볼 때는 요, 미국 정부 미국 경찰이 한번 이놈 혼내노라고 우리한테 내 맡겨논 거 같애요. 원래는 이 대통령 정도 되면 보통 한 20미터 안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거든요. 안 해논 거예요. 5메타 고 앞에까지 그냥 차가 지나가는데도 데모하게 내버려뒀다니까요, 우리를.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4,50명이 완전히 그냥 차를 완전히 포위를 해가지고 그기 차 우에까지 올라가지고는 그냥 밟아대면서 데모를 해대니까 드디어 미국 경찰들이 권총을 빼들고는 막 공포사격을 놓더라구요. 예. 비키지 않으면 총 쏘겠다고. 그러는데 그 그, 김방앗간 맞은편 공목에서 한 4,50명의 백인 젊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백인 젊은 아이들. 우리도 깜짝 놀랐죠. 그 백인들이 누군줄 아세요? 그게 통일교 교인들이에요. 통일교인들. 그니깐 이제 어떻게 됐냐면은 그니깐 백인들하고 백인들하고 우리하고만 달라붙어 싸우는 꼴이 돼버렸다고. 그럼 미국 언론에 보도가 막 됐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백인 놈들 발길로 막 차고. 주먹질 하고 막 때려 부수는 장면들이 막 나오니까 이 여론이 악화된 게, 코리안들이 백인들을 때렸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게 인종 차별이, 감히 어떻게 코리안들이 백인을 때리느냐, 이렇게 여론이 바꿔진 거예요. 근데 그게 통일교 교인들 아무도 몰랐어요. 예. 그래가지고서 그 당시 통일교 교인들한테 발길 차이고서 지금도 허리를 다친 사람이 있어요. 국영길이라고 하는 변호사가 있는데 그 사모님은, 사모님은 지금도 허리를 아퍼서, 그때 다쳐가지고 그, 이, 지금 불편하다 이러더라구요. 그니까 막 통일교 교인하고 막 우리가 뒤범벅이 되가지고서 육박전이 막 벌어졌잖아요. 그러는 사이에 길이 틀려져가지고 전두환이 차가 지나간 거예요. 지나갔으니까 결국은 국우장에서 무슨 놈의 점심식사를 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그 다음부터는 고만 한국 정부에서 전두환 행사를 할 엄두도 못 냈어요. 그 센츄리 프라자(Century Plaza)라고 해서 피코(Pico)하고 거기 호텔에 거기 머무는데 거기 뭐 그냥 우리가 그냥 뭐 꼬리를 따라다니면서 전두환을 추격을 해대니까 결국은 센츄리 프라자 앞에서, 뭐 계속 그 뭐, 전두환이 거기 있는 동안 24시간 밀착 데모를 한 거예요. 여기 와서는 그러니까 하나도, 하나도 행사를 치루지 못했어요. 결국은 전부 호텔 갔은거 갔다가는 정문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밑에 그냥 지하로 내려가서 차타고 도망치고 그 다음에 교포들 모여가지고 리셉션 하는 것도 그것도 하나도 못하고. 그, 그때, 그때 그 여기 LA에서의 전두환 저지는 아주, 아주 그냥 완벽한 성공이었어요. 그때. 그때 주동한 것이 바로 인제 그, 그때도 대학생들이죠. 대학생들하고 그 다음에 그 여기 젊은 청년들은 직장인들인데 나도 몰랐는데 그때 집집마다 권총들이 다 있더라구요. 다 보여주죠. 차고 나온 게. 뭐 그러니까 뭐 죽기 살기로 싸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인제 그, 그거 한거는 적십자 병원에서 우리가 헌혈한 거하고 이런 것들은 전부 미국 주류 언론에 그 당시 필름 찾으면 다 나올 거예요. 그땐 주류 언론들이 매 시간마다 이걸 톱뉴스로 보도했으니까. 이거 우리 데모한 거, 요걸. 그 이건 국내에서는 전혀 그 당시 알려지지 못했겠죠.
면담자 : 당시 여기에서 계셨던 한국분들이, 뭐 유학생이건 직장생활을 하건, 하셨던 분들이 그렇게 5·18과 관련되서 그런 분노들을 느끼고 이렇게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구술자 : 어...학살이죠, 아무래도. 백주 대낮에 그것도 적군이 아닌 아군 군인이 자기 국민들을 갖다가 저렇게. 말만 듣는 게 아니라, 우리는 눈으로 현장에 목격할 때 정말 이래선 안 된다, 이거는 아니다, 이러게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정호영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인제 완전히 저짝에 전두환 쪽으로 완전히 붙었고 가든 그로브(Garden Grove) 시장까지 한 녀석들이에요. 그런 인간들 마저도 이 정도 해놓고 전두환이가 절대 대통령이 될거라고 없다고 생각한거죠. 예. 보고서들마저도. 정호영은 심지어 경상도 사람이거든요. 그런데도 이거는 인간으로서 인륜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때 너도나도 쏟아져 나온 게 사실이에요. 그 사, 그리고 이, 예. 뭐 3.1운동 때 일본 놈들이 그렇게 양민을 학살했다 이러지만 그건 우리가 부모들한테 말로 들은 거구요. 우리는 이거는 정말 눈으로 보도를 통해서 눈으로 목격하는 거잖아요. 여기에 대한 그거 이제 분노죠. 그땐 뭐 처음 이 초창기에는 뭐 이런 걸 느끼고는 너도나도 뛰쳐나왔고 그럼 그 가운데 개중에 뭐 이런 경우에 결국 전두환 반대하면 전두환이 오래 못 갈테니까 반드시 민주화가 될거다, 그러면 그때가면 자기도 뭐좀 뭐 한자리는 하겠다 이렇게 하고 나온 놈들도 있어요, 사실은. 없는 게 아니에요. 그러다가 점점 전두환이가 자리를 굳혀지니깐 다 슬슬 꼬리 빼고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다 사라져버렸죠. 그래서 처음에는 적십자 병원에 그때 모일 때는 하튼 헌혈하는 인구들이 5백 명이 단위 시간에 그 적십자 병원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니까요, 그렇게 많이 모인 게.
면담자 : 80년 당시 5·18 당시에 선생님이 직접 적십자 병원에서 헌혈, 뭐 그런 활동도 하시고 항의시위도 하시고 81년도에 인제 전두환 방미 때 또 그런 일들도 있었고. 그 이후에 또 다른 5월 진상 규명활동 이라든지 오월 관련 투쟁을 전개했던 부분들이 뭐 어떤 것이 있으실까요?
구술자 : 그러니까 그 이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에서 석방 되가지고 나왔어요.. 83년인가, 84년인가 한번 조사해보세요. 그 나오셨단 말이에요. 그럼 그분이 이제 여기 미국에 오시니까 바로 그 다음부터 5·18은 김대중과 함께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거는 중요한게 아까 내가 이야기한 대로 그 광주 항쟁 때 그렇게 정말 그냥 애절하게 애타게 투쟁하던 사람들이 어느덧 다들 좌파 빨갱이로 몰리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김대중 자신이 여기 와가지고 5·18에 진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외면했어요. 만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서신 그거 영어로 번역을 해야 되는데 그 번역이며 김대중 대통령을 가까이 하면서 여기 정치인도 만나고 교수도 만나고 학자들을 만나고 출판사 사람들도 만나야 하는데 누굴 인제 거기에 붙여 줄거냐, 김대중한테. 붙여줄꺼냐. 이래되니까 아주 완전 좌파 빨갱이도 안 되고 고 다음에 또 또 호남이니까 또 호남을 널려고 하면 또 이상하게 안돼. 이래 저래 안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때 김대중 대통령 옆에 완전히 출판이며 번역이며 담당을 그때 내가 뽑힌거예요. 그래 김대중 대통령 여기 엘에이 와있는 동안은 하루, 매일 김대중 대통령하고 같이 다녔죠. 그 여기 UCLA 출판 관계 사람들, 그 다음에 그 책을 내가 번역했잖아요. 번역하다가 인제 1985년 2월 5일에 들어가고 나는 2월 8일에 들어가고, 한국에. 번역하다가 최선일 이라는 그 분이 맡아서 노벨상 받은 그 책을, 첨에 내가 번역을 한거예요. 그렇게 인제 그 하다보니까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그 내란 음모에서 연루가 된 그 원인으로 해서 여기에 이, 광주, 내가 80년 광주 항쟁 날 당시에 인적 상황들은 고만 이렇게 고만 이렇게 마음들이 막 갈라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해, 충분히 우리가 이해해요 뭐 그 당시 뭐 여기 양은식이다, 뭐 벌써, 그러니까 광주 나고 81년도에 헬싱키 회담이라고 해서 헬싱키에서 북과 해외 동포간의 대화라고 해서 해외 동포 간에. 그래서 이쪽에 엘에이에서 양은식 박사, 고 다음에 김기양 박사 뭐 이런 분들이 󰡔분단을 뛰어넘어󰡕라는 이 책을 썼잖아요. 그 책을 그것도 그 당시로서는 이런 󰡔뿌리󰡕지라는 데서 냈는데 그것도 정말 어려운 작업을 한 거죠. 그러다보니까 북쪽 사람들 하고 헬싱키에서 만나고 온 거예요. 그럼 만나고 와서는 그 다음부터 다 빨갱이지 뭐에요.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여기 와가지고 그러한 사람들하고는 전혀 만나주지를 않았어요. 그래가지고 그때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가 차 뒤에 'save 김대중' 스티커를 붙이고 다닐 땐데도 뭐 김대중 대통령 전화 한 통 안 하고 그분들은 만나주질 않고 느닷없이 뭐 황재선이다, 뭐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김대중 대통령을 뒤에서 물적으로 많이, 돈 벌어가지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거든요. 돈을 많이 번 도와주는 사람들이더라구요. 뭐 그리되니까 결국은 김대중 대통령 여기 오면서부터 광주의 그 어떤 그건, 광주에, 광주에 직접적인 분이 나타나니까 이쪽에서는 그런 양상들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나타난 게 윤한봉이잖아요, 바로. 윤한봉이. 그게 뭐 나는 윤한봉이를 광주에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몰라가지고 뭐 그걸 뭐 내가 말 하나마나 하겠지만, 내가. 한봉이에 대해서 얘기할게 너무 많아요, 실지 말해서. 이 민족 학교 설립자.
면담자 : 뭐 간략하게 이야기를 쫌 해주시죠.
구술자 : 이건 뭐 역사에 관한 얘기니까. 그러니까 한봉이가 롱비치항, 씨애틀항인가 어디 입항을 했잖아요.
면담자 : 롱비치
구술자 : 롱비치항으로 들어온 걸로 알아요, 내가. 그때 이제 상원의원 애드워드 케네디가 그 한봉이를 가서 배안에서 데리고 나와야 할거 아니에요. 그때 그때 김상돈 선생, 차상달 선생이 나도 같이 가자고 그렇게 제의가 왔어요. 근데 나는 그때 여기서 50마일 떨어진데다가 그때 막 오랄 디펜스가 그날 말 걸려서 그때 오질 못했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데리고 왔단말이에요. 데리고 올라왔는데 그러니까 뭐 그때는, 그때는 사람들이 다니면서 전부다 눈물을 줄줄줄줄 흘리면서 다녔어요, 광주만 생각을 하면. 뭐 차타고 운전하다가도 울고 막 그럴 때거든요. 근데 막 현장에 있던 친구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그게 한봉이에 대해서 그 애절한 마음이 간절했겠냐고요. 생각하시겠, 짐작하시겠죠. 그러기 때문에 인제 그 당, 그 광주 현장의 인물이 직접 나타났으니까요. 그 형이 윤광장이라고 광주 시장이 된 건 알죠? 지금 광주 시장된 윤장현, 그 형님이에요, 형님. 예. 하, 그 참, 참 그 악몽 가운데 악몽인데 그 좀, 이 한봉이가 여기 나타나가지고 그 카리스마를, 카리스마를 이용해가지고 다 여기에 있는 찢어진 마음, 산산된 마음 이런 걸 다 자기 그 산하에서 좀 묶어줬으면, 묶을 수 있었고요, 그때. 뭐 한봉이 말이라면 다 그것이 다 가능할 때구요. 가능할 때에요. 인제 딱 한봉이가 그, 여기 육지로 올라와서 LA에서 나타나서 얼마 안 되고서부터 이제 한봉이 입에서 막 말이 나오기 시작 한 거야 아마 그 당시 이동철이라는 사람이 먹물들, 먹물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예요. 글 배우고 공부한 사람들 먹물이라 해가지고. 이동철이 알죠, 꽃동네 그쪽에서 국회의원 나온 친구 있잖아요? 그러면서 여기 와서 뭐 학교 다니고 공부한 사람들, 이걸 전부다 먹물이다 이래하면서 매도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내가 타겟 1호가 될 수밖에 없어. 난 여기서 박사까지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인제 내 밑에서 그 모여 있던 대학생 그룹 있잖아요, 그걸 산산조각을 낸 거예요. 산산조각을 내면서 제일 먼저 친 게 누구냐면 한광호를 친 거예요. 한광호, 아까 내가 얘기한, 장님이 됐다 하는. 바로 이 장소, 이, 그때이 건물이 아니죠. 이 밑에 건물에 있을 때 홀이 쪼끔 컸어요. 쭉 인제 그냥 한광호, 그 다음에 한광호 와이프, 그 다음에 박대형, 박명호 우리 대학생들이 저를 쭉 둘러싸가지고 있는데 윤한봉이가 딱 서더니 바로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이, 인제 그, 지금 우리가 여기에 와서 대학 다니고 공부하고 뭐 나같이 박사과정 하고 이런 건 다 먹물로서, 먹물로 매도를 하면서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써클을 조직 하는 거야, 거기서 그게 바로 한청으로 발전한 거예, 한청으로. 그래서 거기에 제일, 그 인제 대결을 한 게 누구냐면 한광호예요, 한광호에요. 그 지금 이혼한 바로 그 한광호 부인이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죠, 그 자기 남편이 그래도 뭐냐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가지고서 광주 항쟁때 적십자 병원에 주동자 노릇을 했는데 한봉이가 그냥 광호를 치고 나오니깐 그, 그 생각해보세요. 광호 와이프가 그냥 담배를 딱 빼더니 사람들 앞에서 담배를 쫙 피우더라구요, 그러니깐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겠어요. 예를 들어서. 그 다음부터 그러니깐 그러니깐 이, 이 LA에 학생운동은 한봉이가 나타나고 나서 내가 말하는 대학생 운동은 다 와해됐어요. 다 깨져버렸어요. 없어져버렸어요. 없어져버리고 그 가운데 인제 그 한봉이의 거기에 따르는 그룹과 고만 그렇지 않은 그룹들이 딱 갈라지면서 내가 하던 그 대학생 그룹은 한봉이부터 사라졌다고 보면 되요. 한봉이가 결국은 그 다음에 와서 치는 게 김상돈이라는. 그분 치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인제, 그 다음에 인제 김영삼하고 김대중이가 앞으로 대통령이 누가 될거냐, 하는 이런 문제가 생길게 아니에요. 이런 문제가 생기니깐 그 당시 김상돈 선생과 나하고 두 사람만 김대중을 지지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리고는 거의가 아까 그 이야기한 김운하로부터 시작 해서 김영삼을 지지했다고요. 그건 전부다 그러니까 앞을 내다보는 거죠. 다음에 대통령이 되면 누구한테 줄을 설꺼냐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나는 줄을 서고 그런 걸 떠나가지고서는 김상돈하고 나하고만 둘이서 그, 이, 김대중 지지고. 고 다음에 여기서는 윤한봉이가 인제 김대중하고 김영삼 둘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는지 관건이 되잖아요. 당연히 김영삼 지지하고 나왔죠. 한봉이가. 무슨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국내에 들어가서도 계속됐어요, 한봉이가. 그래야되니까 광주에서 윤한봉이 설 땅이 있겠어요? 그 사람이. 예? 윤한봉이가 그 김영삼 지지하고 김대중이라고 하면 이를 갈고 비판, 비난했다고요, 윤한봉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만약 한봉이가 그때 김대중 라인에서 김대중 지지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리고는 이 이 민족학교가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며는 말은 민족학교라고 해놓고는 보시다시피 전부 시민권, 영주권, 소셜 웰페어 하는 그런 사람 상담해주는 단체로 변해버린거죠. 처음에는 설립할 때는 그렇게 설립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 조국의 민주화, 통일, 거기에 인재 양성, 그래서 이 민족학교 설립 멤버에요, 내가. 그리고 책, 내가 책 나왔을 때 그 출판 기념회를 여기에서 했어요. 그때 한봉이가 그때 뭐 출판 기념회 할 때 뭐 그냥 밥그릇들고 다니고 그런게 요새 동영상 보면 다 나오죠, 그러니깐. 예. 그게 그러더니 이 한봉이의 조직력이 굉장했던 것 같애요. 나는 몰랐는데 뭐 그 다음부터 버클리, 뉴욕, 시카고, 다니면서 이 조직을 엄청나게 했잖요. 이 한청이라는 조직을. 그니깐 그 당시 버클리에 있던 성낙영이라고 하는, 전부 우리 대학생 멤버였거든요. 고 그 다음부터 나를 배신하고 나와가지고 한봉이 밑에 한청으로 들어가버리고 그러게 된거예요, 그러니까는. 그니깐 그, 뭐, 그때는 우리는 그, 이 발전적으로, 발전적으로 좋게 생각했어요. 이제 우리가 이제는 한봉이, 한봉이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져 가지고 좀더 세게 좀 이렇게 나아가길 바라고 발전적인 차원에서 그만 인제 우리 사명이 끝났다 생각을 하고 그 다음부터 한봉이 하는 일에 대해서 진짜로 잘 되기만을 바랬죠. 바라고 나는 그리고 85년도에 인제 김대중 대통령이 2월 5일날 들어가고 내가 같은 날 들어가겠다니까 내가 들어갈 때 공항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자기가 일단은 한국에 들어가 있고 내가 만약 공항에서 잡히면 자기가 그때는 국내 언론을 통해서 내가, 자기가 말해줄 수 있으니까 한 3,4일 늦게 들어오라고. 그래서 내가 2월 8일에 들어가고 김대중씨는 2월 5일에 들어갔죠. 들어가가지고는 이게 그냥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예요. 내가 인제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로 갔잖아요, 감리교 신학대학. 종교 철학과 교수로 갔는데 내가 딱 일년간 하고 재임용에 탈락된 거예요. 재임용 탈락될 때 이 학교에서, 그 당시 문교부죠, 문교부에다가 내가 인제 광주에서 활동한게 있잖아요. 아니요, 저기 LA, LA에서 인제 광주항쟁 활동. 그 자료를 갖다 정부에다 다 갖다 줬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CBS, ABC 그냥 내가 그때 뭐뭐 미쳤죠, 그냥 몽,몽둥이 들고 치고 돌아가니는 장면 찍힌 거를 갖다가 정부에 다 갖다 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정부에서 여지없이 일년만에 쳐버린 거예요. 학교에서, 학교에서 친걸, 반정부하다 들어온 놈 이래가면서 쳐버린거죠. 딱 그러니까 내가 그, 한국에 들어가가지고는 딱 일년 딱 가르치고는, 실제 가리킨 거는 한 학기밖에 못 가르켰죠. 딱 가르키고는 거기서 완전히 재임용에서 탈락된거죠. 자리 어떻게 되가지고는 딱 3년만에 한신대학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 바로 참 기구한 거는 그 당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우리 그 광주, 못포 친구들이 있었어요. 정태기 목사라고, 고재식이라고 한신대 총장까지 됐지. 이런 분들이 결국은 내가 여기서 광주 항쟁때 투쟁한 그걸 인정해가지고 3년 만에 한신대학을 다시 들어간거야. (웃음) 참, 역사. 그거 지금 그 당시에는 재임용에 탈락된 사람들은 학교에 그, 명노근 이런 분들은 결국에 민주화 다시 될 때까지 전혀 학교에 못들어갔잖아요. 3년만에 다시 들어간가는 그 당시에 나뿐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그러니까 한신대 자체가 전부다 반골들 모인데고 그 당시 친구가 마침 총장이 됐다구요. 그래가지고 인제 또 광주, 광주, 광주 항쟁 때문에 또 내가 모가지가 또 살아났다고요, 그게.
면담자 : 그 한신대는 그 이후로 어느정도까지 계셨나요? 그때 나가, 나가셨을 때가 구십...
구술자 : 그러니까 내가 은퇴할 때까지 이제 22년을 잘 있은 거죠. 1988년에 가가지고 2006년에 나왔으니까 20년 됐나? 그 정도 겨우 간다, 20년 정도 겨우 될까 말까.
면담자 : 그 이후로도 계속 한국에 계시면서도 이 5·18과 관련돼서, 물론 잊지 않고 여기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셨을거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특별하게 한국에서 이런 관련 활동들, 아니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하셨는지요.
구술자 : 인제 그건, 그게 중요한데요. 그 다음에 내가 인제 한신대학으로 갔잖아요. 한신대학을 가니깐 아마 여러분들은 모를거예요. 그 당시만해도 PD와 NL이라는게 갈라져가지고요, 이 한신대학에 경제학부를 중심으로 해서 윤소영이라든지, 고 다음에 경기 교육감 하던 김상곤이, 김상곤이는 바로 내 옆방에 있었거든요. 이친구들이 뭐냐하면 PD골수들이에요, PD. PD는 뭔 말인지 알죠. PD 골수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뭐냐면 민족 해방 통일에 관심이 없어요. 계급 투쟁에만 관심이 있는거예요. 나는 한국 들어가서 제일 놀란 게 이 두 노선이 갈라져 있는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게 어떻게 갈라질 수 있느냐는 거예요, 나는. 예? 갈라질 수 없어요. 그게 어떻게 갈라져. 근데 한국에는 엄연히 자기들 조직 확장을 위해 노선을 그렇게 정해놓고 싸우잖아요. 저렇게 노선을 쌓아놓고 하는 한 보수한테 이길 수 없어요, 우리가. 한마디로 말해 김상곤 그, 경기 교육감 하던 이 녀석이 주동이 되가지고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이, 아주 자기들 타겟 1호에요, 타겟 1호. 내가 굽히나요? 절대 그놈들하고 타협 안 하죠. 그 친구들은 문익환 목사님, 문익환 목사는 알죠? 문익환 목사는 방문행사 못해요, 우리 한신대학에서는. 그 친구들이 와가지고는 상 차려놓으면 발로 차서 뒤집어 엎어버리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니깐 한국에 들어가니깐, 한신대에 들어가니까 이, 이 노선이 분열되고 대부분의 학생, 교수들이 PD 노선이고 학생들이 PD 노선이에요. 그리고 나하고 같은 NL 가까운 PD, 이거는 신학과 교수 몇 사람, 신학과 학생 몇 사람뿐이었지. 학교 전체는 PD 였어요. 그러니깐 내가 속한 철학과로부터 애들이 내가 강의를 하며는 강의를 할 때마다 반발을 하고 이 감신대에 있을 때보다 더 어려웠어요, 한마디로 해서. 이, 내가 거기서 겪은, 강의하고 나면 강의 평가를 말이죠, 전부 내가 강의 내 반대하는 애들만 모아놓고는 강의 평가서 써 가지고 말이죠. 교수님, 강의 평가 이렇게 잘 못 나왔습니다. 그땐 뭐 학생들이 완전히 학교의 뭐 그냥 모든 주도권을 다 잡고 교수 위에 앉을 때 아니에요m 그러니깐. 그러다가 89년도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그 세력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부터 겨우 숨통 돌리고 은퇴할 때까지 무사히 교수 생활하고 나온 것 같애요. 한신대 가서 사실 더 어려웠어요, 더 어려웠어요. 그러니깐. 그, 이, 이이 이게 지금 엄격한 의미에서 PD노선 아이들은 광주, 뭐 별로 관심 없어요. 이, 이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민자도 내놓지 못하게 하는 애들 아니에요.
면담자 : 학교가 좀 진보적 성향이 있어서 오히려 더 편하게 학교생활을 하신 줄 알았는데요.
구술자 : 아니요, 더 어려웠어요. 예, 아주 그건 은퇴하는 날까지 이거는 막 PD, NL노선, 김상곤 노선하고. 예, 이, 그, 그러니까 김상곤 그 노선들이 교수들을 다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요. 감히 뭐냐면 그것들하고 대항해 싸울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LA에서 싸우던, 전두환이 그놈 앞에서도 내가 관 메고 싸웠는데 우리가 이제 지금 운동을 하다보면 운동권에 있다보면 베짱이 커지고 겁을 안 먹는 게 특징이에요. 내가 그놈들한테 내가 기죽게 생겼어요? 하튼 그 20여년 동안 그 아이들하고 마음고생은, 뭐 이건 조희연이다, 전부 그 노선들이죠. PD노선들이죠, 전부. 예. 그, 그거, 그거 정말 PD, NL노선은 그 내부에 들어가보면 말이죠, 이거 보세요.지금 뭐 이정희 저렇게 해놓고 뭐 심상정이다 이런 것들 그거 전부다 PD 노선들이잖아요. 심상정, 노회찬이. 아이 그게 다 합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정권 교체하고 이명박 노무, 박근혜를 꺾는다고 그래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정희 그쪽 아이들 지지하는 거 아니에요. 느들 정말 정당 활동 하지 말라는 거. 왜 선거철만 되면 되지도 않을 거 후보를 내노냐, 내말은. 할라믄 시민운동 하라는 거예요, 시민운동. NGO, NGO 활동하면서 통일운동 하라는 거예요, 이정희 보고. 예? 여기 지금 LA 바닥도, LA 바닥도 여기 무슨 하용진이다 뭐다 이게이게 꼴뚜기 같은 놈들, 여기서 무슨 놈의 진보당을 하냐고, 여기 무슨 진보당을 해요, 여기서. 예? 분명해요. 이정희 노선 똑같아요. 이쪽의 주장 똑같애요. 정당 활동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정당활동 해가지고 무슨 동, 동작구 구청 같은 데 출마해가지고 표 한 백표 얻을 거, 백표 차이 때문에 다 졌잖아요, 우리가. 인천 시장하고 그 다음에 저 짝에 경기 도지사 선거는 진보당만 후보 안 냈어도 다 우리가 이길 선거 아니에요, 동작 을도 마찬가지고. 이, 이보세요, 난 노희찬이가 당선만 되면 찬성이에요. 그 진보당이 김경태라는 놈이 나가가지고 뭡니까, 그 백표, 백표 차이로 표 갉아 먹는 바람에 결국은 동작을 거기도 노회찬이가 떨어졌잖아요. 내가 이렇게 생각, 이렇게 하면 PD, NL나 가리지 않는 단걸 알 수 있어요. 누구든지 진보가 당선되면 되요. 근데 왜 그기 당선 안 될 걸 알면서 뻔히 알면서 나가가지고는 그렇게 야권을 분열 시키고 결국은 뭐냐면 이게 우리가 이 정권 교체를 못하게 만드느냔 말이에요. 정말 이런 진보당 내부 안에서의 이런 심리 싸이컬러지 가지고는요, 이런 대국적인 견지를 보지 못해요. 예. 내가 안타까운 것은 한봉이한테도 그런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참, 그, 정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절대 그게 우리가 그런 짓 하는 거는 진짜 광주 정신을 훼손하는 거예요. 예, 광주 정신을 훼손하는 거예요. 그 광주가 정말 그렇게 어떤 파당 정신을 가지고 했다면 그건 정말 우리가 비난 받아야 되겠죠. 우리는 뭐 광주의 을이라 그러면 궁극적으로는 우리, 우리, 우리 조국 통일, 거기 있었다고 보고요, 최정상은 저는 그거라고 봐요. 그때 뭐 저가 그, 이, 적십자 병월에 있으면서 ‘광주 열흘’이라는, 시가 저절로 나오드라구요. 시도 쓸 줄 모르는 게. ‘광주 열흘’, ‘광주 열흘’이라고 하는 시를 써가지고 그때 신한 민보에서 그때 발표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그때 뭐 아직도 병원에 있을 때죠. 그 뭐, 그 시를 읽고 사람들이 그렇게 울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그, 한번 신한민보 고 열흘 동안에 신문을 찾을 수 있으면 한번 찾아보세요. 거기 광주 그 당시 사태 기록을 신한 민보가, 김운하 자기 입장에서 쓰기는 했지만 그 현장 기록들이거든요. 매주 일어났던 일들을 고대로 보도한 거니까. 그 전두환 왔을 때까지. 그러나 그 신문이 언제 그냥 폐간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주간지는 딱 그거 하나뿐이었어요. 배달도 없어요. 나오면 그냥 가판대에 그냥 이렇게 되어 있고, 뭐 인제 구독자들에게는 보내는 거 외의 그거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뭐 그거 하나 외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할 수 있는 매체라는 전혀 전무했으니까, 완전히.
면담자 : 그 2006년에 인제, 신한, 한신대에서 퇴직을 하시고 그럼 다시, 다시 미국으로는 언제 돌아오신건가요?
구술자 : 그러니깐 2006년에 인제 은퇴를 하고 내가 졸업한 클레몬트, 그 학교에서 인제 코리아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그 코리아 프로젝트 디렉터를 하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여기 왔어요. 왔는데, 봉급은 무슨 한의과 대학에서, 내가 공부하는 동안에 한의학에 그때 미쳐가지고서는 한의학 이론들을 새롭게 개발하는 그런 작업을 하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여기 2006년도에 왔다고요. 2006년에 와가지고 그동안 책을 쓰는 일을 주로 했죠. 하는데, 이게 또 광주하고 관계돼요. 금년 3월 달에, 금년 3월 달에 인제 일본에서, 일본에서 나를 초청해 가지고 열흘 동안 강연을 시켰어요. 동경에서,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해서 고꾸라까지 쭉 내려가면서 한번에서 두 번 세 번 강연을 했다고. 아무래도 인제 일본은 가니까, 일본 놈들은 말이야, 남한, 남한하고 북한을 똑같이 잡아가지고 한국, 조선을 다 비판, 죽이라고 해요. 고늠들은. 그게 그러니까 어떤 한쪽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되요. 그러니까 자연히 거기서 뭉치게 되요, 거기는. 남북이. 인제 일본은 가보며는요, 그 민단하고 조총련이 이제는 거의 거의가 행사 할 때 보면 같이 모이더라구요, 그러니깐. 그러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많이 모이는 건 조총련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죠. 총련이에요, 아무튼. 민단 사람들은 어떤, 이런 통일이나 이런 거에 관심 자체가 없어요. 없다고요, 이름 바꾸고 뭐 귀화하는데 바쁘고. 그러니까. 그게 그 강연한 걸 그걸 갖다가 어떤 놈이 막 전부 갖다가 내가 있는 학교 그 총장한테 일러바쳤어요. 예? 일러바쳐가지고 총장이 날 부르더니 뭐 학교를 그만두라고. 9월 말까지 고만두고 이제 지금. 그믄 내가 그런데 지금 내가 지금 은퇴하고 있는 마당에 뭐 덤으로 여기 와서 있는, 봉급은 뭐 받긴 하지만 그까짓 꺼 뭐 받으나 안 받으나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거든요. 문제는 아닌데 아무튼 이러게 시리즈로 이어져요. 한국에 와서는 결국은 또 이, 재임용 탈락당하고 고 다음에 미국까지 와 있더니 또 역시 그런 문제로 이 보수들한테 또, 이, 쫓기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누가 이걸 이게 하라는 사람이 있어 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했다고 무슨 돈이 생기는 거 있습니까? 그러고는 이게 하면 할수록 이, 보다시피 뭐, 한봉이다 이런 운동하는 동료들끼리 이게 또 그냥 서로 간에 막 사소한 걸로 치고받으면서 마음 고생시키고 그러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이거는, 이건 기질이라면 기질인데 못 버릴 거예요. 왜 못 버리는 줄 아세요? 이건 뭐냐며는 귀신이 씌어있기 때문이에요, 귀신에. (웃음) 귀신 쓰여서 무당이 신들려 안하고는 못 배기듯이 이 운동하는 사람 누가 돈을 주고 안주고는 상관없어요. 돈은 안줘도 상관 업고 누가 봐주고 안봐주고는 상관없어요. 그러나 안 하며는, 그냥 막 저절로 속에서 못 견디기 때문에 이렇게 인제 우리가 운동에 뛰어드는 거죠.

(TAPE 교체로 중단)
면담자 : 용어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한국 전체를 아우르는 사상, 한국을 아우르는 사상. 선생님께서 그것을 ‘한 사상’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잖아요? 현재도 계속 이와 관련한 연구를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구술자 : 그게 바로 이 광주 80년도 박사학위 논문 쓸 때라고 했잖아요 28일 지나고 나니까 미국에 대한 정이 떨어지는 거예요. 영어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말 자체를 영어로 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광주 항쟁 이후로 민속 운동 이 일어났어요. 무언중에 우리 것을 찾아야 한다는 운동이 중국에는 도가 있고 인도에는 무라든지 범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한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랬더니 한 18판이 찍혔어요. 그게 내가 보니까 광주 이후에 우리 것을 찾아야 되겠다고 하는 갈구하다가 예술적으로 풍물로 나가고 사상적으로는 글로 찾았던 것 같아요. 조총련계 학교에서는 복사를 해서 돌려가며 읽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인제 그게, 그, 그 작업을 한국에 있을 때도 계속했고 지금 여기 와서도 궁극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그거죠.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우리의 뭐냐면, 단순히 반미, 고 다음에 뭐, 미국에 대한 적대감, 우리가 우리 걸 무슨 정립을 해놓고 해야지, 그렇게 감정적으로 해가지고는 오래가지를 못한단 말이에요. 나름대로의 이제, 그럴 때 우리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걸 갖다가 정의 해주고 거기에 대한 실체를 만들어놓아 야된다 하는, 이게 인제 내가 지금. 우리 집에 인제 한번 가보면 뭐 그냥 집에 전부 책만 갖다 놓고. 지금 학교도 인제 고만 뒀으니까. 스물 네 시간, 그냥 뭐, 거의가, 아침에 잠깐 나와서 산책하는 거 외에는. LA는 그저 여기 뭐 이따금씩 이렇게 나오고. 이 사상적으로 우리꺼 정립하는 거. 그러다가 내가 통일 뉴스에다가 김일성 회고록을, 그걸 연재를 한 90회 정도 했잖아요. 그걸 한 걸 인제 북에서, 북에서 평양출판사에서, 그걸 책으로 엮어냈어요. 책으로 만들어냈어요. 󰡔세계와 더불어󰡕 그걸. 그래가지구 지금 북에서는 지금 뭐, 해외 교포 학생들, 일본에서 총련계 학생들 오면 몇 백 권씩 그걸 사다가 애들한테 필독으로 읽히고 이러는가봐요. 여기 있는 친구들도 막상 내가 미국에서 있으면서 쓴지도 모르고 북한에 갔다가는 그 책을 받아가지고 오고 이래요, 보니까. 뭐 이, 앞으로는 아무래도 통일이 될려며는에, 북한의 주체사상하고 우리가 사상적으로, 사상적으로 우리가 정말 이게 서로 조화될 수 있는 그걸 만들어야 돼요. 그게 안 만들고 통일을 해놨다가는 나중에 조직만, 제도만 가지고 해놨다가는 예맨 보세요. 얼마 못 가죠, 삐끄덕 하면서. 그게 통일 안 하기보다 더 못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그 지금 인제 토요일마다 이, 여기 민족학교에서 계속 우리가 모임을 가지면서 가지면서 이런 사상 이, 자꾸 정립하고 터득해내 가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 회원들이 상당히 확, 아주 확고하게 단단해요. 토요일에 시간 있으면 나중에 한번 맞춰 취재를 해도 좋으실텐데. 이분들이 뭐 이런 철학 사상 공부도 물론 하지만 이, 행동으로 통일 운동에서도 LA 바닥에서 하는 대마다 이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면담자 : 뭐 이것과 관련해서 지금, 어떤 저서 활동도 계속 지금 하고 계시는 거죠?
구술자 : 그렇죠, 지금 이제 지금, 그 2000년 초반부에는 우리 그, 동학 , 동학 사상 그걸 예, 중심으로 해서 책 내고 그 다음에 2000년대 말에 와서는 한의학, 논리학 관계 개발하는 책을 내고 그 다음에 이제 최근에 하고 있는 건 이, 그, 맑시즘을, 맑시즘을 어떻게 한철학과 관계시켜서 관계시킨 것이 어떻게 주체사상으로 발전 했는가 뭐, 이런 것들이 다루어질 중요한 과제들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면담자 : 그, 쫌 5·18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약간 마무리 지으면서 제가 좀, 선생님이 쫌 바라보시기에 그, 한국 현대사에서 5·18이 가지는 그런 의미나 그런 위치랄까 그런 부분들이 뭐가 있을까요?
구술자 : 뭐 두말할 것 없이 내가 뭐 경험한 동시에 한국 사회 전체가 우리가 집단적으로 경험한 건데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 외세에 대한, 외세에 대한, 외세에 대한 확고한 입장정리라고 나는 봐요. 아마 5·18이 없었더라면 뭐, 뭐, 뭐 보기에 따라서는 김대중의 정권, 고 다음에 그, 뭐 지역 뭐, 호남이라는 지역감정 그런 게 변수로서 어떤 거든지 변수가 없는 건 없어요. 그치마는 확고하게 달라진 거는 5·18 이후에 우리가 민족적 자각이, 민족적 자각이 어떻게 하든 전방위적으로 일어난 것이 사실이에요. 이건 내가 문화나 사상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 5·18, 이 계기가 확고하게 그걸 만들어주는 게 사실이에요. 이건 그러니까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인정을 안 할 수도 있지만 나타난 이 현상으로는 그게 확실해 지고 고 다음에 그 다음부터 어떤 통일 운동, 통일 운동, 아무튼 해외에서는, 해외에서는 지금과 같은 막 강하고 줄기찬 이런 통일운동이 전개된 것은 당연히 뭐냐며는 이 5·18 요 이후에 헬싱키 회담이에요, 그러니까. 헬싱키 회담과 함께 󰡔분단을 뛰어넘어서󰡕 그 책이 나오면서부터 여기서는 뭐 그 다음부턴 과감하게 북한하고 이, 자유로운 왕래가 막 활발해졌죠. 그때부터 책도 막 가지고 들어오고. 뭐, 북한에 있는 그 여러 가지 무슨 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또, 북에 대해서 뭐 터부 없이 가봐야 되겠다, 가 보고 싶다, 갈 수 있다, 하는 그것도 전부다 이 광주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예. 그건 활실해요, 그러니까. 그게 가장 큰 정말 역사의 선물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이 정치권에서 이거를 제대로 받아내 가지고서 이걸 추진시켜야 되는데 이, 바로 이게 지금 이 호남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제 1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이란 것 자체가 이걸 의식을 못하고 있고, 이 광주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있잖아요, 이 사람들이. 지금 도리어 뭐냐면 이석기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뭐 이런 통일 이런 문제를 갖다가 얘기했다가는 보수층으로부터 지지를 못받는다. 그래서 약간 우편향해야 한다, 이런 논리까지 전개하고 있잖아요, 야당이란 친구가. 이건 완전히 이건 광주 정신에 대한 완전 훼손이에요, 이거는. 전,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봐요. 그렇게 보는 동시에 이게 또 이게 그냥 민족 해방 노선으로 강하게 나가다보니까 그 반대 이, PD라는 이런 그룹들이 형성이 되면서 우리가 진보 그룹 안에서의 노선 상의 확실한 그만,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70년대에 순수한 민족운동만 하던 김동길이다, 뭐 한완상이다, 뭐 이화여대 서광선이다, 이런 사람들. 다들 이건 기독교를 주로 배경으로 하면서 외세 의존적으로. 그 미국이 우리한테 영향을 미쳐서 우리가 인제 우리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북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반공이다, 하는 이런 사람들이 이 5·18 지난 후 부터는 설 땅이 없어져버렸어요. 설 땅이 없어져가지고 그니깐 70년대 운동권 운동하던 사람들이 이 광주 이후에 나온 이 세대들 하고 연계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연결이. 그건 뭐 고리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끊어졌다고 봐야겠죠.
면담자 : 선생님 그 80년 당시나 그 이후의 지금 오월 운동에서 선생님께서 굉장히 주도적으로 활동을 하셨는데...
구술자 : 뭐 주도적이라기 보다는 경험한 거죠.
면담자 :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셨는데 선생님이 바라보기에 당시에 5·18이 여기 지금 현재 동포사회에 미쳤던 영향이랄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쫌 평가를 하십니까?
구술자 : 인제 그 당시는 그러니깐, 그, 이, 예 전두환이가 예, 일단은 이 하극상, 하극상이라는. 그러니깐 밑에 부하가 상급자 정성화를 갖다가 치고는 자기가 권력을 잡는 일에 대한 그거는 누가 보더라도 이,천인공노할 짓이다. 예, 한마디로 말해 인정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등장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 양민들을 사람, 양민들을 죽이고까지 했다는 것, 거기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그때 다, 그땐 정말 보수 진보 할 것없이 전두환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초기에는. 그건 확실해. 그 당시 데모할 때 보면, 그 멀쩡한 그냥, 목사들, 이런 사람들도 그냥 분노해서 피켓 들고 막 다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 이렇게 그 데모해가지고 행진 지나가면 한 7,80명은 모여가지고 다녔다구요. 그러다가 점점 전두환이가 그걸 권력을 잡으면서, 광주를 악마화 시키면서, 한마디로 색깔을 칠하기 시작하니까 그럼 너도 나도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을 했고 그 다음에 지금 뭐 이명박, 박근혜 정부 거쳐오면서부터 이제는 그냥 뭐, 광주를 갖다가 완전히 북한에서 간첩들이 침투해서 선동해가지고 한 것처럼 공공연하게, 뭐 조갑제 같은 이런 인간들을 내놓고 이렇게 얘기 하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광주가 처음 여기, 막 발생했을 때, 이건 상상도 못할 일인데. 지금 이게 지금 모르겠어요, 한국 역사에서 언제 이게 뒤집혀가지고서 이게 지금 광주가 바로 이해되고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가 심판을 받을지는 모르겠어요, 지금. 예. 그건, 그건 내가 볼 때는 우리 진보 진영들이 뭐, 두말 할 것 없어요. 반 박근혜 반 이명박이라 그러면 좀, 정말 진보진영들이 대동단결하라 이거에요. 대동단결하라. 이, 요번에 조국 교수 같은 경우도 보세요. 조국이 말이야. 그걸 갖다가 살인교사, 어떤 예를 들어 얘기한 걸 갖다가 조국이가 살인교사를 했다고 해서 지금 고소를 해놨잖아요, 보수 단체들이. 왜 이런 경우가 당하냐며는 조국만 하더라도 좀 그 서울대학교 교수고 법대교수고 그러면 좀 그, 좀 통을 크게 잡고 생각해야 되는데 선거만 되면 그 정의장 심상정, 노회찬 지지잖아요. 근데 이정희도 또 아니에요, 그 사람은 또. 뭐 아세요 그거?(웃음) 그 이도흠이라 하는 한양대학 교수. 그 조희연이 이번에 선거본부장 하던 친구 있잖아요. 그 죽도록 고생하고는 고작 보면 결국은 그 심상정, 노회찬 그거 지지하는 거예요, 그니깐. 나는 나는, 반대해요, 나는 반대해요. 민주당, 진보당 예...할 것 없이 반 박근혜, 반 이명박, 이 친일 매국노, 이 세력 기득권자들, 그리고 철저하게 일본의 우익 보수로부터 돈 받고 사주를 받는 이 세력을, 그걸 주 타겟으로 하고는 크게, 뭐 무조건 단결해야되잖아요. 내 입장은 그래요. 여기 LA 바닥에도, 내 생각하고 같이 하고. 나는 뭐 심상정파다 나는 뭐, 뭐 저기 뭐 이정희 파다, 나는 민주당이다. 이, 뿔뿔이 나누어져가 있어요. 모르겠어요,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나는 그러니까 뭐, 뭐 정치할 생각도 없고 내가 한국 들어갔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자기집에 불러가지고는, 뭐 그냥 아마 그때는 내가 뭐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러니까, 영어도 좀 하고 그러니깐, 이 정치적으로 나가 뭐 좀 이렇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죠. 어...나를 굉장히 정치로 끌고 들어가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내가, 어디까지나 나는 학자고 나는 한시라도 책을 놓고 있으면 불안해서 못사는 사람이에요. 차 타고 오면서도 책을 읽어야 되는. 그런 사람인데 내가 그런 정치판에 들어가버리면 그건 완전히 뭐 책하고는 뭐 그냥 멀어지는 거죠. 그럼 내가 공부를 못해요, 내가 한국 들어가서 전혀 정치에 기웃거리지 않고, 한신대학에 있는 동안도, 그 뭐 김성재라고 해가지고 문광부 장관도 하고 그 기독교 교욱가 친구, 김대중 대통령이 부른다고 거기 들어가서 뭐 장관도 하고 뭐 한신대 교수들 그때 뭐, 그때 뭐 전부다 노무현정부 때까지 신났잖아요, 부르면 다 한신대 교수였잖아요, 그러니까. 예. 그니깐 지금까지 나는 절대로 정치에 기웃거리지도 않고 고 다음에 그, 내가 한때, 내가 해야될 때 하고는 고만 싹 자취도 없이 내가 사라져버렸다가 또 언젠간 내가 글을 써야 되고 뭐 내가 행동할 때가 있다그러면 그때만 딱 나타나서 나는 하고는, 난 일체 뭐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뭐 역사에 기록으로 남고 싶지도 않고 지금 난 역사에, 여기 한국의 미주 민주, 뭐 미주 뭐 민족운동사라고 해서 이, 적어놓은 거 보면 전부 글 쓴 자기들 위주로. 이 역사라는게 얼마나 진짜 역사가 남는지 정말 의심스러워요. 그 예를 들어 양현성이. 그런 뭐 감리 이 바닥에 한인 타운에 일하고 이러니까 아까 이불 뒤집어쓰고 있던 그런 애들. 뭐 장, 장태완이는 또 미국 대학 교수니깐, 뭐 아무래도 미국 교수라 그러면 말빨 있을 거 아니에요? 뭐 장태완이 같은 경우는 뭐 영어 잘 모를 때, 얼마 전에만 하더라도 뭐 5·18만 되면 한국에 불려나가서 강연하고 막 이랬어요. 그 장태완이가 아니에요, 절대로 한광호지 장태완이가 아니에요. 그 가운데 가장 그, 정말 나쁜 친구는 박대영이란 친구죠 돈 받아가지고는 전부 술집에서 가서는 술 받아 먹고 그 돈 다 탕진해버리고,
면담자 : 그, 제가 대부분 지금 선생님 2시간 30분 가까이 말씀을 드렸는데 선생님 활동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그, 짧게나마,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짧게나마 활동상황들을 좀 다 이야기는 해주신 것 같아요. 네. 아까 말씀하신 도중에 미처 그, 말씀 못하신 부분이라든지 쪼끔 더 보완이나 추가적으로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면...
구술자 : 뭐, 그, 인제 그 한국에 제가 85년에 들어갔잖아요. 뭐 당연히 가보고 싶은 데는 광주죠. 광주. 그래서 인제 한국에 인제 그, 이 그러니까 내가 3월달에 들어가가지고 5월 14일이구나, 5월 14일에 감신대 교수회가 열린 거예요. 교수회의를 했는데 이 교수들이 5·18이 내일 모레, 내일 모레인데 글쎄 학교 안에서 그 총장 쫓아내는데 이, 몰두를 하면서 한마디로 무슨 5·18 모여가지고는 그 목사놈들이란 게 기도 하나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정말 이거 너무 하잖냐, 내가 처음 들어온 교수가 교수회의 석상에서 말하는 건 뭐하지만 어ᄄᅠᇂ게 이게 지금, 그 광주를 위해서 우리가 참, 묵념 하나 안 하고 교수회의를 시작하느냐. 이랬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그 홍종수라는 교수가 뒤에 앉았다가,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자기들은 총장쫓아내는게 관심사인데 내가 관심을 딴 방향으로 돌렸다 이기죠. 그랬더니 막 뒤에서 그냥 막 “이 개 새끼야” 하면서 고함을 치고 달려들더라구요, 나하고, 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놈이. 그러니까 나도 기가 죽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야 이새끼야, 뭐!” 하고 고함을 친 거예요. 그랬더니 재임용 인제 나중에 탈락할 때 바로 이거를 갖다가, 그때 첫째는 뭐냐면 교수회의 발언에서 그, 뭐 5·18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다, 고 다음에 소리치면서 개 새끼라 했다 뭐 그래가지고는 결국은 인제 그런런 게 이제 재임용 탈락할 때 그게 이슈가 된 거예요. 문교부에는 그만 내가 여기서 관 메고 대만 갔다고 해놓고는. 그러고는 그때 하도 마음이 적적해서 그때 광주를 간 거예요. 광주가 그때 신문에 계속 나는게 금남로,, 충장로,.,뭐 이렇게 뉴스가 나오잖아요. 금남로가 어딘지, 고 다음에 충장로가 어디 있는지, 그 다음에 도청이 어디 있는지, 인제 아마 딱 시간이 이때쯤 될거에요. 그래서 맨 처음에 간 게 전남대, 전남대 교정을 갔다고요. 전남대 교정을 갔더니 이, 여학생이, 여학생이 여기 첼로를, 첼로를 매고 이제 그, 이 교정을 이렇게 걸어가더라구요, 후, 이게 그냥. 이제 이렇게 조용한 캠퍼스에. 이게 광주의 아픔도 있지만 역시 그 또 학생들은 저렇게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구나. 그 장면을 이제 보고 인제 광주 시내로 인제 들어와서 금산사로 이렇게 해서 인제, 인제 이틀 동안 왔거든요. 왔더니 바로 총장이 부르더니 재임용에서 탈락됐다고. 그게 그때는 뭐 저뿐만 아니라, 제가 이 얘길 왜하냐면 말이죠, 그때는 광주가 전부가 정말, 정말 애인이상의 애인이었어요. 정말 진짜 사랑이었어요, 그때는. 그냥 막 말하면 그냥 시가 그대로 나오고 그 김대중 대통령이 여기 왔을 때 자기 책을 출판 기념회를 여기 VIP, 여기서 했거든, 식당에서. 그때 또 그걸 인제 김대중 대통령 그 책 서평을 나보고 하라고 해서 내가 또 그걸, 내가 해줬죠.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굉장히 내가 서평을 해준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가지고는 그, 인제 그땐 막 그냥 광주에서 누가 왔다 그러면 막 얼싸안고 뭐 그등그등, 그등그등 눈물부터 막 이제 그, 쏟아지고 그런 세월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사실은 이 한봉이가 나타난 이후부터 우리가 현장에서부터 온 친구가 와가지고 그냥 오자말자 막 그렇게 나가버리니깐. 그게 그냥 하. 그 다음부터 광주에 대한 이게 막, 연민의 정이 이 마음속에서 막 흔들리기 시작한 게 사실이에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 광, 그때 윤한봉이는 상당히 좀 상징적으로 이렇게 남아가지고 뭔가 이걸 좀, 광주 그걸 전체 어우러서 이걸 크게 좀 감싸며 나갔으면. 참 아쉬워요. 그분이 그렇게 했드라면 그 내 생각에는 그 당시 모여있던 학생 운동이 지금은 벌써 5, 60대가 다 되었잖아요. 그게 그대로 또 그 다음에 싹을 피고 인제 만들어져 나갔을 텐데 고게 좀 못 만들어진게 그게 참 아쉬움이다 하는 생각이 인제 들어요. 뭐 여러 가지 그냥 아주 뭐, 그 그, 그 그런 것들이 전부 통일이라는 이걸로 이게 글로 마음이 확 쏠려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고. 그건 인제 내가 한국에서 단군학회 회장 하면, 단군학회 회장 하면서 북은 그러니까, 금강산 두 번 갔다 오고 뭐 이, 단군릉 개천절 행사 하느라고 또 네댓 번. 그러니까 이명박 들어서기 전에는 내가 매년 갔댔죠. 거기 북이라는 사회는요, 가보면 아무리 가도 또 가고 싶은 데가 북이에요. 뭐 그랜드 캐년에 아무리 좋다 그래도 한 두 번 가면 싫증나잖아요. 북은 그렇질 않아요. 열 번 가면 또 가고 싶고 열 번 가면 또 가고 싶은 데가 북이에요. 왜 가냐, 왜 그러냐며는 거기 사람들이 주는 그, 인간미 때문에 그래요. 이 북쪽 사람들을 막상 만나가지고서 이렇게 대해보면요, 마치 그게 우리가 사람이 사람보다는 동물에 대해서 정이 더 가잖아요. 왜냐며는 동물들은 진실하기 때문에 그래요. 동물들은 자기 먹기 싫으면 안 먹고. 사람은 자기 먹기 싫어도 체면상 먹을 때도 있잖아요. 동물 속에 그런 진실이 있기 땜에 그러거든요. 북녘사람들을 한번 만나보세요. 그 마음 속에는 인간미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그 사람들은. 그게 매력이래요. 그래서 가도 또 가고. 와서 여기 와서 있으면 북쪽사람들 하나하나 얼굴이 이렇게 떠오르고. 그러거든요. 이게 그, 이, 아무도 지금도 많은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은요, 이 광주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많아요. 여기 인제 뭐, 사실 그런 분들을 만나서 얘기하는 게 필요해요. 누구, 어떤 분을 또 누구 지금 만나실 분이 누구누구 또 되어있죠?
면담자 : 저희가 그, 시간이 좀 많지 않아가지구요, 한정된 시간에 만나다 보니까 많은 분들은...
지금 누가 추천되어 있어요, 지금 만나야 될 사람들 가운데?
면담자 : 지금 은호기 선생님도 있구요.
그분은 그분대로 또 딴 스토리가 있을 거예요. 그분은 주로 아마 뭐 정치적으로 여기 조직 판도가 어떻게 돌아갔다, 뭐 인제 그런 얘기를 할 거예요. 뭐 이런 대학생 이거와는 또 아무 상관없던 사람이거든요. 그 분은 또 뭐 노무현 정부 때 아마 상도 받았을 거예요, 거기. 그, 이, 이 민주화 그런 공로로 해가지고서. 그분은 그분대로 또 뭐, 여기 김상돈 선생님 주변으로 돌어가던 여러 가지 그, 어떤 큰 정치적인 틀에서 얘기를 많이 해주실 거예요. 그분은 저쪽에 정읍이 고향이거든, 정읍.
면담자 : 그 여기 이사장님이신 이길주 이사장님.
구술자 : 아, 이길주 선생님. 음...인제 이길주 선생님은 인제, 이분도 그러니까 정말 이분이야말로 광주가 계기가 돼서 운동권에 나오신 분이죠. 그리고 인제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라고 해서 홍동근 목사님, 그 교회 계속 다니셨고. 여기서 광주, 광주 행사 있을 때마다 나와서 인제 노래, 서울대 음대출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노래로, 노래 불러주시던 분이죠. 예...그다음에 그 사실 아까 얘기한 한광호라고 하는, 그 당시 대학생 그룹을 이끌어주는 인제 이런 친구들, 고 다음에 아까 드라마 작가라고 했던 김영희는 여기 바로 전화만 해도 바로 올 사람이거든요. 이런 김영희같은 여사도 있고. 노길남은 추천 안 하죠? 노길남. 노길남이는 그 당시 신문, 신한민보 기자도 했었고 그 다음에 코리아 스트릿 저널이라고 거기 기자도 있었어요.
면담자 : 코리아 스트릴 대표였던 조재길 선생님, 내일 모레 만나기로
구술자 : 예, 그분도, 그분도 뭐냐면, 광주로 계기로 해서 그, 아주 초창기에 인제 그 아까 얘기하는 정호영이라는 친구 있잖아요. 그 친구는 완전히 돌아서가지고서는 그 친구는 뭐 앞장서서 데모했던 뭐 프랑카드 제일 앞에 들고 나가던 친구에요. 전두환이가 등장하자마자 변절을 해버린 친구에요. 완전히 그냥 극보수로 그냥. 조재길 같은분은, 조재길 같은 분은 그분이 뭐냐하면 그, 광주 때, 그렇다고 현장에 피켓들고 데모하는 데 까지는 나오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니었지만 계속 인제 코리아 스트릿 저널 가지구서 그, 이 광주 진상을 알리고 언론 홍보를 하던 분인데 인제 이분은 뭐냐하면, 출판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다음에 그만 어느 날 갑자기 코리아 타운에서 사라져버렸다고요. 오랫동안 이제 그, 사라졌다가 여기 새리토스(Cerritos) 시장을, 새리토스 시장이 돼서 정치활동을 했죠. 그러다가 그게 인제, 금년으로 끝나요. 끝나면서 그 사이에 인제 연변대학에 가가지고서 북한 핵으로 주제로 해서 박사학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도 5·18에 나온 이후에 지금까지 그렇게 지속적으로 이걸 해간 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양반은 변절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거 하다가 고만 전두환이가 등장하고 이러니까 고만 맥이 풀리고 고만 자기 본업으로 돌아간 사람들이죠. 본업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또 나이가 한 70넘고 하니까 다시 인제 이런 운동권에 와야 옛날 사귀던 친구도 만나고 하니까 이렇게 나온 분이고. 그 다음에 황갑주라고 있어요, 황갑주. 여기 그러니깐 인제 참 정말 재빠르게 이 LA에서 움직인 게 말이죠, 그 광주 항쟁 나고 한두 달도 안 되가지고 시집이 나온 거 아시죠. 시집이 󰡔빛의 고을󰡕이라고 해서. 시집이 나왔어요. 어느새, 어느새 시를 썼는지 시집이, 시집이 헌정이 됐다니까. 그때 김준태, 「아 무등산이여, 십자가여」 김준태 시 있잖아요. 그게 그 얼마나 여기서 읽혀진지 못해요(몰라요). 뭐 김준태가 요새 뭘해요? 뭐 어디 고등학교 선생인가?
면담자 : 아니요,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강사, 뭐 그, 그런 외래 강사로 쫌 활동하고 계시구요.
구술자 : 어, 김준태씨가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그게 엄청난 영향을 많이 줬구요. 그 󰡔빛의 고을󰡕이라는 시가, 시집이 나왔어요. 까만 표지에 하얀. 그걸 내가 85년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가고서 그때 내가 84, 5년돈가 6년도에 광주에서 삼일절 행사할 때 그때 인제 그 광주 5·18 그쪽 단체에서 나를 초청해가지고 삼일절 강연을 했다고요. 그때 누구냐면 돌아가신 명노근, 그때 살아계셨죠. 그 부인 안순례라고
면담자 : 안성례
구술자 : 안성례요, 성례. 지금 도의원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면담자 : 아, 지금 그냥 활동을 안 하시구요. 여성 단체 뭐 시민 사회 단체 원로로서 이렇게..
구술자 : 그 딸이 있었는데. 딸이 한신대 신학과 나오고. 그 딸도 있다고.
면담자 : 딸은 잘 모르겠습니다.
구술자 : 딸이 그래가지고 그, 인제 그 쪽에서 할 때 그때 내가 그 시집을 갖다가 줬어요. 안순, 안성례 선생한테. 깜짝 놀라더라고요. 어떻게 이 사이에 벌써 이렇게 광주 그, 광주 항쟁을 주제로 한 시집이 이렇게 나왔냐고. 그게 참 좋은 시가 많이 실려 있었어요. 그 시집을 그때 나도 딱 한 개 가지고 광주 들어가서 그걸 전했거든요.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나온 것이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그게 두 번째 나온 시집이죠. 거기에 인제 시인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살아계시면서 바로 인제 그, 이세방, 이세방, 고 다음에 황갑주라고 있어요. 황갑주. 뭐 이런 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순수하게 이 광주항쟁을 이, 증언해주실 분이에요. 그분들은 뭐 정치적 맥락 없이 누가 진짜로 진심어린 마음으로 했고 사심 없이 활동했는가를 알 사람이에요. 특히 그 황갑주 선생 같은 분은요. 무슨 행사 있을 때마다 꼼꼼하게 돌아다니면서 누가 무슨 행동하고 누가 무슨 한 걸 다 적어 놓은 사람이에요, 그런 분이 있어요. 나이가 지금, 살아계시긴 한데 연세가 너무 지금 많으긴 한데 저가 볼 때는 고 황갑주 선생 같은 분, 이런 분은 꼭 인터뷰를 해야 할 분이에요. 제, 지금 살아계신 가운데는 제일 나이가 많고. 고 다음에 인제 여기 인제 작년, 금년에 돌아가셨구나. 이선주, 이선주라고. 이선주. 뭐 은호기하고 전고 지금 동창들인데 뭐 이런 분들. 이선주도 비교적 어떤 그, 객관적인 증언을 해주실 수 있는데 돌아가셨어요. 근데 그 누구보다도 황갑주 선생이 제일 좋고 고 다음에 이세방도 이게 인제 좋고. 그 다음에 이게 전두환이가 오기 전 1월 24일 날 오기 전에 여기 저 그 당시에 여기서 벌어졌던 또 정말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요. 그 전두환 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저걸 박살을 내 버릴껀가, 그 전야제에가 굉장히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요. 재미있다기보다도 좀 아슬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 인제 김방앗간에 다 모여 가지고는 전두환이 오는 걸 갖다가 어떻게 저놈을 요번에 LA에서 혼따귀 내놀까 하는. 고 다음에 아유, 여기 지금 사진을 꼭 찍어야 되는데, 아까 적십자 병원...
면담자 : 네, 가시죠.
구술자 : 내가 6시까지는 어딜 가야되는데, 괜찮아요. 그니까 지금 가서 우리 지금 적십자 병원에 가지 않을래요? 차가 없죠?
면담자 : 예, 차가 별도로 없습니다.
구술자 : 그럼 내차 타고 가자고요.
면담자 : 예예, 아무튼 선생님, 오늘
구술자 : 아 근데 이거 지금 어두운데 찍어도 될까 모르겠네.
면담자 : 아 이 정도는 충분히 나옵니다.
구술자 : 아 가자고요. 거기 가서 그거하고 김방앗간 하고는 거기는 꼭 찍으세요, 사진을.
김준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준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6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접자: 이 구술 녹음은 그,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과 관련한 김준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면접 장소는 L,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10시 15분입니다. 이 구술 녹음은 5·18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국외 5·18 기록물 조사 및 수집 사업의 결과물로 제출될 것입니다.

면접자: 그럼 지금부터 구술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건데요. 일단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저는 너무 기쁘구요.
구술자: 반갑습니다.
면접자: 7년 만에 만나 뵙는 거라서. 그,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그 생년월일을 쪼끔 말씀을 해주세요.
구술자: 서류상으로는 66년 5월 13일이구요, 근데 일 년 늦게 호적이 돼서. 6, 어...띠는 뱀띠에요. 그니까 그렇게 65년생이라고 할 수 있죠. 근데 서류상으로는 66년으로 돼있어요.
면접자: 5월 13일은 같, 같은 건가요?
구술자: 에 서류상이니까. 66년이 맞겠죠, 서류상으로.
한국나이로 하면 딱 오십.
구술자: 딱 오십, 여기 나이로 하면 이제 마흔 아홉.
면접자: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구술자: 광주에서 태어났지요.
면접자: 부모님들도 처음부터 광주에서 계속 사셨나요?
구술자: 네 네 광주에서 한 가족이 있었죠.
면접자: 광주 어디에서 사셨어요?
구술자: 본적이 광주시 임동 60번지. 기억이 나네요. 하도 그걸 많이 써서. 광주 임동에서 주로 살았고 그쪽 그쪽주변에서 살았죠. 지금은 없어진 것 같은데 옛날 그, 북성중학교 자리가 있어요. 그쪽 근방에 살았죠. 그 성당, 임동 성당인가, 주변에 있었고. 지금은 다 없어졌더라고요. 자리가 흔적이 없어졌더라고요. 거기서 자고 자라고 거기서 서림 국민 학교, 진흥중학교 대동고등학교, 전남대학교까지 다니다가 미국에 오게 됐지요.
면접자: 학창시절 얘기는 좀 뒤에 쫌 다시 여쭤보기로 하고요. 그, 가족 관계는, 형제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가족 관계, 쫌 그런데. 그, 3남 3녀 중에 하나, 둘 셋, 네 번째네요, 네 번째. 위로 인제 그니까 누님이 둘, 형님이 한 분 이렇게 계시죠.
면접자: 넷째고 밑으로는
구술자: 둘이 있죠.
면접자: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한명 이렇게 인가요? 어렸을 때 가족이 많으셨네요.
구술자: 네네
면접자: 다투기도 많이 다투셨을 것 같은데.
구술자: 쫌 그렇죠.
면접자: 이렇게 가족들이 어렸을 때 좀 많았었는데, 이렇게 부모님이..
구술자: 구술자: 힘드셨죠. 어렵게 살았죠. 어렵게 살고 또,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저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올라갈 땐가?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 되도록 가족, 가족사는 얘기를 잘 안하고 싶어요.
면접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그러면, 집안 분위기는 그때 쫌 어땠나요, 어렸을 때?
구술자: 그니까 집안 분위기는, 어렵게 사니까 서로 관심이 힘들잖아요. 먹고 살기 힘드니까. 그래서 인제 어머님은 우리 인제 여섯 식구 먹여 살릴라고 열심히 노력하시는 거고 저 이민 오게 된 배경이 깔리게 되겠는데, 저희 누님이 독일에 간호원으로 가셨어요. 그 당시 경제가 어렵고 막 이러니까 광부도 하고, 간호도 하고 했잖아요. 누님도 뭐 꿈이 많았었겠지만 가족 형편이 그러니까 또 가족을 위해서 어떤 그런 길을 갔죠. 독일로 간호원으로 가셨다가 인제 그분이 ㄱ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이민의 고리가, 미국에 오게 된 과정이 그렇게 저하고는 관련이 되어 있죠.
면접자: 어렸을 때는 주로 어떻게 생활, 동네에서 친구들과 좀 어울리셨나요?
구술자: 동네 친구들과 잘 놀았죠. 산에 가서 칡 캐러 다니고. 개울가 가서 고기 잡으러 다니고 많이 돌아다니고 잘 놀고 돌아다녔어요. 그 당시에 애들하고 축구도 차고 잘 돌아다니니까.
면접자: 어렸을 때부터 외향적이고 활발하셨네요.
구술자: 그렇다기보다 성격이 쪼금은 내성적이었고 별로 잘 나서지 않는 그런 편이었어요. 그런 편이었는데, 이제 성격이, 지금은, 지금 나이가 들어가니까 옛날 그 성격들이 쪼금 이렇게 소극적이고 하는 것들이 다시 나올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내 의지적으로 많이 극복할라고 노력을 했죠. 대학교 가서 특히 노력을 했고. 그러다보니까 대학교 생활도 쫌 외향적이 되고. 뭔가 학생회 활동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스스로 극복할라고 했어요. 성격은 좀 내성적이었고. 속이 없었을 때는 잘 놀았고 그랬죠.
면접자: 초등학교 들어가셨을 때는요?
구술자: 모범생, 범생이? 범생이? 모범생? 조용하고 말 잘 듣고 하는 그런 타입이죠. 근데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회에 대한 이런 것들은, 뭐 광주 자체가 분위기가 그러니까. 잘은 모르지만 뭔가 좀 사회에 만족하지 않는 그런 생각들은 있었던 것 같애요. 또 가정 생활이 그랬으니까. 가정, 자랐을, 제 기억으로 자랐을 때 동사무소 같은 데서 밀가루도 나눠주고 받아서 이렇게 먹고 사는, 이런, 그런 생활을 좀 했었지요. 그 당시 그니까 70년대? 그죠.
면접자: 어렸을 때 특별히 쫌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든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큰, 기억에 남는 큰 일 같은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그런 거는 별로 없죠.
면접자: 초등학교는 아까 말씀하실 때 서림초등학교가 현재도 있나요?
구술자: 그거는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여기 떠나온 지가 오래 돼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요.
면접자: 서림 초등학교 입학하신 게 72년 됐던 것 같은데
구술자: 구술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오래 되서.
면접자: 주로 학교 다닐 때, 초등학교 다닐 때는 어떻게 쫌 학교를 다니셨나요? 그때 좀, 조용하고 모범생, 아니 조용히 학교를...
구술자: 그쵸 그쵸, 이런 얘기도 해야 되나 근데?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란 걸 내잖아요. 육성회비 내라 그랬는데 우리가 형편이 그래가지고 육성회비를 못 내요. 육성회비를 못 내니깐 받아오라고, 학교에 가면 돌려보내요. 선생이.
면접자: 초등학교 때요?
구술자: 초등학교 때. 집으로 육성회비 가져오라고. 그러면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는데 뭐. 그러면 그 주변에 비슷한 또래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학교 선생이 학교 육성회비를 받아올 때까지는 집에 오지 말라, 아니 학교에 오지 말라고 돌려보낸다고요. 그럼 또래들이 몇몇 있으니까.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들 많이 있었으니까. 그럼 가가지고 놀러가요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고 돈 못 받아 올 것도 뻔하니까. 그래서 내 놀다가 학교 끝날 때쯤 가갖고 인사하고 다시 집으로 오고. 그런 기억은 좀 있어요.
면접자: 그, 아까 말씀하실 때 초등학교 5학년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구술자: 5학년 말, 저희 아버님이 1월 12일인가가 아마 기일인데 6학년 올라갈 때, 5학년 마치고 방학 때, 그때쯤 돌아가셨죠.
면접자: 편찮으셔서...
구술자: 예, 그, 폐, 지금 봐서 폐병이죠. 그 당시에 많이 생겼었던데. 저희 아버지, 제가 알기로는 일제 시대 때 저기, 일본 그, 목수하는 분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시고. 그래서 인제 그 일을 하셨던 분이신데, 목수 일을 하셨던 분이신데 쫌 그 당시 기술자들이 필요하고 있을 때니까 좀 잘, 좀 건설 현장에 많이 돌아다니시는 그런 분이셨는데 제가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아파 누우셨어요. 그래서 한 몇 년 투병 생활 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면접자: 그 이후로는 어머님께서 생계를 이렇게 다 꾸리셨겠네요.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구술자: 우리 어머니 고생 많이 했죠. 이런 저런 장사 다 했죠. 뭐, 노가대, 노가대 판이라고 하죠, 건설 현장에 가가지고. 그때는 지금 생각해서 보니까 그때는 인제 막 자재, 원자재가 없으니까 재활용들을 많이 헌, 했던 것 같아요. 건물 뿌수면 거기 있는 못 다 뽑아내고, 나무 따로 좋게 편성해가지고 그걸로 또. 쓸 만한 건 다시 집짓는 데에 사용하고. 그, 그런 일을 하는, 어. 일꾼, 노동자들이죠. 노동자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런 쪽에 가서 하셨고. 뭐 인제, 보따리 장사, 과일 장사, 뭐 이런 것도 하셨고. 또 힘들게 많은 일들을 하셨던 것 같아요.
면접자: 중학교는, 초등학교 때 그러면 다른 어떤 좀, 말씀해주고 싶은 그런 건...
구술자: 그런 건 없어요. 근데 난 이런 얘기 안 하고 싶은데
면접자: 그, 그 때가 뭐 사회적으로 보면, 사회, 초등학교 때라 관심이 없을 때였던 것 같은데요.
구술자: 관심이 없죠, 그런 건 관심이 없죠.
면접자: 뭐, 정치적인 그런 부분이나 그런 거에 전혀 이렇게...
구술자: 관심 없죠. 그때 뭐 알겠어요. 학교에서 또 교육을 그렇게 시키진 않았을까요? 지금 보면 학교에서 뭘 받았는지 그런 건 별로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뭐 국어 산수 그런 거 배웠겠죠. 지금, 지금 한 40년전 일이니까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면접자: 국민 교육헌장을 강제적으로 외우라고 했달지...
구술자: 있었죠. 외우라고 했었죠. 근데 전 못 외웠어요. 내가, 우리, 나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막 외워라고 이런 것들이. 우리 전 정도는 막 외워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 때 정도부터는 강압적으로 심하게 한다던가, 그런 것들은 없었던 것 같아요.
면접자: 중학교는 진흥중
구술자: 예.
면접자: 몇 년도에 입학하셨는지는 기억나시나요, 중학교는? 79년?
구술자: 그니까 중학교 2학년 때 박정희가 돌아가셨죠. 돌아가셨,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죠. 아, 저 그때 슬프더라구요.
면접자: 칠십 그럼 팔년도에,,,
구술자: 79년도죠. 79년도가 중2였으니까 78년에 입학했네요.
면접자: 78년도에 입학을 하신거네요.
구술자: 그니까 아마 내가 기억나는 거는 수학여행을, 2학년 수학여행을 갔다오고 등교하는데 갑자기 그때 즈음 해가지고 학교로 가는데 이렇게 돌아가셨다고. 박정희 죽음, 돌아가셨다고. 그때도 참 슬펐죠. 눈물을 흘렸던가, 안 흘렸던가, 모르겠는데 하튼 슬픈 기억이 나요.
면접자: 그때는 뭐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간 쫌 그런 제왕적 권력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그랬는지 몰라도 국부가 죽었다는 그런 생각을 가졌던 어르신들도 굉장히 많이 있었고 또 방송에서도 그렇게...
구술자: 그쵸그쵸.
면접자: 해가지고 전 국민이 좀 추모를 하는 좀 이런...
구술자: 그때 그래가지고 우표, 그 당시 유행이고 그랬으니까, 우표, 우표도 모으고 그럴 때 많았거든요. 취미 생활로, 그래가지고 밤새 우체국 앞에서 아침 일찍 가가지고 새로운 우표 나왔나 사고 그랬는데 그때 인제, 지금 생각나는 건 박정희 돌아가셨다고 기념우표 나오고 그렇잖아요. 가서 사고 막, 기념으로 한다고 사고.. 아마 집에 있을 거예요. 우표도.
면접자: 그, 진흥중이. 좀 그 때 당시, 뭐 70년도 말까지만 해도 중고등학교...
구술자: 함께, 함께 있었죠.
면접자: 중고등학생들 사회 참여가 현재보다도 많았다라고 판단이 되는데.
구술자: 나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고, 인제. 중 3때 인제, 중 3때 5·18이 터지잖아요. 중3때, 중3때 인제 5·18 경험 얘기가 나오는 거죠, 그때. 뭐 아무, 뭐 모르잖아요. 5월 10, 19일인가 아마 학교를 갔을 거예요. 18일인가?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데 중 3일 때죠. 학교를 갔는데 학교가 웅성웅성 거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오면서, 이제 자기 차타고 학교를 오는데, 그 당시 다 버스타고 학교 오니까, 오는데 뭐, 공수부대들이 올라와가지고 버스에서 이렇게 대학생 같은 사람들을 막 쥐어 패고 끌고 내려갔다, 뭐 이런 얘기들이 학교 오니까 나오는 거예요. 나오고, 인제 학교가 웅성웅성 거리니까 그때 담임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했던 거 같애. 너희들 이렇게 함부로 쏘다니지, 돌아다니지 말아라고. 그냥, 어째 부화뇌동하지 말라고 그런거죠. 그러지 말고, 그리고 무등산 인제 무등산 보이잖아요. 어디서나 무등산 보이잖아요. 그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기억이 나. 무등산은 알고 있으니까 다 보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섣불리 행동하지 말아라. 걱정스러워서 그랬겠죠. 걱정해서. 우리들이 뭘 잘 모르고 느닷없이 휩쓸려가지고 돌아다니고, 걱정스러워서 그랬겠죠. 그 얘기를 했어요, 그 얘기를 하고 아마 그 다음날부턴가, 20일인가 21일부터 학교 휴교 내리잖아요. 그래서 학교를 못 갔죠.
면접자: 그 전부터 좀 광주가 굉장히 좀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편이었을 텐데요.
구술자: 근데 학교가, 난 집이 그때 그 바로 중학, 진흥중학교 바로 밑에, 그때는 운암아파트가 있었어요. 얼마 전에 쫌 몇 년 전에 한국 갔을 때 그것도 엄청 달라, 없더라구, 없어졌드라구요. 커지고, 옛날 살던 데가 아니던데. 거기 살았었어요. 운암아파트 살았어서, 그냥 거기서 학교가고 왔다 갔다 하니까, 뭐 걸어서 얼마 안 되고 그러니까 도시 상황을 잘 모르죠, 몰랐는데 인제 18일 날인가, 19일 날인가 아마 그랬을 거에요. 학교 운동장에 그때는 고등학교가 같이 있으니까 그때 인제 고등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가지고 스크럼 짜고, 스크럼이라 그러죠? 막 운동장 돌고 그랬어요. 운동장, 그래서 인제 뭔가가 있구나, 그런 정도만 인제 경험을 한거죠. 그리고 뭐 그 당시에 특별히 뭐 사회에, 사회에 대해서 그런 건 별로 없었죠, 당시에. 그런 건 인제 보고 듣는 그런 정도죠. 그래서 근데 궁금하잖아요. 궁금하니까 19일인가, 20일인가 그 다음 날엔가 학교가, 학교는 휴교하고 인제 그러니까 도청을 나갔죠, 저도. 버스 타고 그때 버스가 운행됐었으니까. 어, 도청, 금남로를 나갔죠.
면접자: 20일 이나
구술자: 19일이나 그 다음날인가, 19일인가 20일 쯤에 나갔을거라고요. 그니까 인제 18일 날 완전히 막 그, 진압한 다음에 시민들이 인제 이러나 저러나 다 죽는다. 이럴 수 있느냐 이런 분위기? 뭐하느냐, 계엄군? 이런 분위기로 같이 집결하자 그런 분위기로 사람들이 모일 때에요. 관심도 많을 때고. 저도 인제 궁금하니까 그때 버스 다녔을 때에요. 버스타고 금남로에를 나갔어요. 금남로에를 나가갖고 보는데 쪼끔 있으니까 통제가 되면서 대학생들 나와 가지고 데모를 하는 거에요. 계엄군들은 있고. 이래서 인제 시민들이 계엄군들한테 막 항의를 해요, 기억나는 거에요 그냥. 항의를 막 해. 니네들이 왜 우리를 때려 잡냐고. 우리가 세금을, 이렇게 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분위기이에요. 그러니까 하의를 막 하는데 어떻게 나라 지키라고 보낸 놈들인데 선량한 시민들을 이렇게 하느냐, 그래갖고 그런 식으로 항의를 하는 거죠, 정확한 건 아니에요. 하니까 공수부대 리더 되는 사람이, 우리는 그런 거 없다 안했다 그럼 실랑이를 막 해요. 뒤에 역사적으로 보면 5·18때 진압했던 군인들하고 그 당시 변경된 군, 계엄군들하고 그런 과정이 있었다고 얘길 하는데 아마 교체 투입된, 교체된 군인들이었던 것 같은데. 계엄군 아니고. 인제 그렇게, 그런데 계속 시민들은 항의를 했어요. 항의를 하니까 자기는 안 했다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 때리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쪼끔 지나가서 누가 맞았어요. 시민이 맞아가지고 피가 막 흘렀어요,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이제 그 시민이 그 사람 데리고 와가지고 이것 봐라고, 지금 니네들이 이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니까 그 계엄군이 느닷없이 항의한 사람한테 이 자식아, 욕같은 걸 하면서 무릎 꿇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가지고 그 사람을 무릎을 꿇렸어요. 그 광경을 인제 봤죠. 겁이 나더라구요. 겁이 나서 그 길로 도망을 왔어요, 나는.
면접자: 혼자 나가셨습니까?
구술자: 실제로 혼자 나갔죠. 궁금하기도 하니까. 그게 저는 5. 18에 대한 첫 경험이고 인제 운암동이 집이 있으니까 운암동에서 거기 보면 바로 또 집 앞에가, 뭐라 그러지 톨게이트라 그런가, 고속도로랑 중외공원. 광주 박물관 있었던 자리, 체육고등학굔가? 그 쪽에 있잖아요. 광주 야외 공원인가? 공원 있잖아요. 그때 옛날에는 거기가, 지금도 아마 있나? 고속도로로 해서?
면접자: 예, 그쪽 고속도로 빠져나가는 길 있어요.
구술자: 그 쪽 근방에 운암아파트가 있어서 그쪽에 살았었으니까. 그니까 그쪽 상황. 그때 5층, 아파트가 5층이었으니까 5층위에 올라가면 광주 시내가 쫌 보이잖아요. 그러면 저쪽에 불나가지고 연기 나는 것도 보이고. 그리고 , 그러고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때 어디 방송국인가, MBC 방송국인가가 불타잖아요. 그 현장도 갔었던 것 같애. 어렴풋이 기억에. 거기에 간 건지 아, 오래 되가지고 가물가물하는데 아마 그 현장도 봤었는 거 같애. 불나고 이런 거. 그리고 이제 시민군들이 인제 도청을 장악을 하고 이렇게 막 돌아다니잖아요. 돌아다니면 우리 아파트에서도 쌀을 모았어요. 쌀을 모아가지고 주먹밥 만든다고. 나와 가지고 밥해 갖고 나눠주기도 하고. 시민군들이 인제 차타고 돌아다니면 아파트까지 와요. 오며는 거기에서 돌아다니면 슈퍼 같은 데서 그냥 그 차에다가 무조건 음료수든지 빵이든지 무조건 막 실어주고. 근데 거기 가만히 있으면 줘요, 먹으라고. 그러면 그런 거 먹기도 하고 그랬었어요. 그때. 그리고 학교는 계엄군들이 있어가지고 뭐 저기 그, 학교 옥상에서가 계엄군이 총 들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오래 되서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겪은 경험을 했죠.
면접자: 학교 그럼 휴교령은 6월 초에 풀렸나요?
구술자: 그건 정확한 건 모르겠어요. 모르겠지만, 근데 5월 27일날엔가 저기 도청이 다시 계엄군한테 들어가잖아요. 그렇겠네요, 한 그 정도 되겠네요, 그죠? 다시 뭐 학교 가니까.,,
면접자: 학교에 갔는데 반응, 친구들은...
구술자: 어수선하죠, 어수선하고. 어...한명인가 정확히 모르겠어요. 어...다 왔는지, 한 명인지 안 나온 친구도 있긴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한 건 모르겠어요. 근데 그때 지금 보며는
면접자: 같은 반 안에요?
구술자: 지금 보면 오래도 됐고
면접자: 네에
구술자: 아 그런가 보다 그런 생각으로 저는 5. 18을 접한 거죠. 막연한 그런 것이 있죠. 어리고 뭘 몰랐으니까 그때는 그냥 아, 그런가보다. 계엄군이 뭐 그런가보다 그런, 그런 생각으로 5·18을 처음 접한 거죠. 의식적으로 접한게 아니라. 그런 막연한 그런 것이 있죠.
면접자: 아직 중학생이면 아직 어렸을 땐데 그런,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조금 왜 지금 이 일이 일다는 걸 이해는 하셨나요?
구술자: 그 당시에는 몰랐죠. 그 당시에는 몰랐죠. 그 당시에는 몰랐고, 그 다음에 인제 저희 형님이 그때도 전남대 다녔었어요. 저희 형님은, 막 대학생들 때려잡고 이러니까 형님은 도망갔어요. 그 당시 대학생들 대부분 그랬어요. 그니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많은 그, 학생들은 뭐 피했겠죠, 다. 도시에 있지 않고 피했어요. 형님도 그 분 중에 하나고. 그리고 인제 계속 이어가자면 고등학교 때로 가잖아요. 고등학교는 대동고를 나왔어요. 대동고를 나왔는데 대동고가 그 당시 때는 쪼끔 그, 사회, 사회 참여의식이 좀 강했던 때에요. 그리고 선생님들도 그런 분들이 계시고. 전교조 활동이라던가 대학교 때 그, 선생, 선생님 한분도 대학교때 강사로 오셔가지고 보고 그랬는데 어떤 어, 고등학교 가가지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대동고 선배들이 짱짱했나봐요, 맨날 데모하고. 학교다닐 때도 운동장에서 막 스크럼 짜고 돌고 그랬어요. 1학년, 2학년, 이렇게 보고. 근데 우리 2학년 때만, 저저, 저때, 저 학년 때만 데모를 안 했다는 걸로. 저 위 학년만 해도 데모를 했다 그러드라구요. 학교에서 막 데모하고. 학교 운동장 돌고. 근데 인제 고등학교 때 기억나는 거는, 인제 제가 연극을 잠깐 했었어요. 연극을 잠깐 했는데 연극을 지도하시는 분이 내 친구 중에 쪼끔 사회 또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하는 친구도 있고 그러니까. 근데 연극을 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이 아마 82년, 81년, 81년 되겠죠? 81년도에 박관현 열사가 그때 돌아가시고 그랬잖아요, 그쵸? 그래가지고 학교에서 연극연습을 하고 있는데 막, 메케한 거막 이러는 거죠. 그때 연극 지도했던 분이, 오늘 박관현이라는 사람이 옥중 단식투쟁하다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면서 우리 묵념하자고 그러드라고요. 묵념하고 상록수 노래 부르자고 해서 상록수 노래를 불렀고. 그런 것이 있었고 그 다음에 인제 친구 중에 또 자기 형님이 전, 전남대학교 사회학, 사회대 거기 다니는 분이 계셔서 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앴어요. 그 친구도 거기 영향을 받아서 그런 관심이 좀 있었고. 그래서 그 친구랑 같이 5·18 쯤 되면 광주에서 시위를 많이 하잖아요. 그믄 같이 나가서 따라다니고 최루가스 마시면서 도망 다니고. 고등학교 때는 쫌 그런 활동을 그냥 뭐, 의식이 있어서한다기보다 그냥, 그 당시 광주 사람들 다 그렇게 하니까. 때만 되면 그렇게 하고. 또 대학생들이 그렇게 하면 시민들이 박수쳐주고, 힘내라고 적극적으로 함께하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전체가 그러니까. 저도 인제 밤에 학교 끝나고 가서 같이 참여하고. 고등학교 때 그랬죠.
면접자: 어떤 특별하게 어떤 의식화 돼 있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차츰 학교, 그런 분위기들도 있고 그런 것도 있고 해서 선생님도.
구술자: 많은 사람들이 사회 의식화되면서 사회문제에 눈뜨게 되고 이런 과정들 거치잖아요.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냥, 그냥 뭐 자라나는 게 그런 환경, 대부분 저와 같은, 저 또래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다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 들어요. 비슷한 과정 이렇게, 저 그 당시 그때 중 고등학교를 거쳐 갔던 그런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주위도 다 그러고 그 당시 광주 전체 분위기가 뭐 집으로 말하면, 전두환 물러가라, 그런 게 절대적으로 강한 상황이었으니까. 크게 저는 어려움은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생활이 뭐 그랬으니까. 그리고 인제 대학을 가야되는데 저희 집 형편이 대학갈 형편은 아니고. 그러면서 인제 했는데 제가, 저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대학을 한번 가보자.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애요. 이런 사회 현상들을 이런 것들이 있는데 누구 가르켜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뭔가 체계적으로, 사회 의식적으로 뭔가. 아, 이래서 이런가보다 그런 것들을 좀 알아야 되는데 누가 가르켜줘요? 그냥 멋모르고 따라다니기만 했었지. 아, 대학을 가가지고 졸업을 하지 않더라고 한 1,2 년이라도 그런 걸 접해보고 좀 뭔가 사회를 알아보자, 그런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애요. 대학을, 그래서 대학을 한번 가자.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취업이나, 자기 어떤 앞날 비전은 한 발짝 더 성장할 수 있는, 과도기적으로 대학을 생각한 게 아니라, 저는 그런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애요. 가서 뭔가 좀 배워보자. 왜냐면 제가 대학을 다니자면 우리 집 형편이 대학 다닐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리고 고등학교 때 집안 형편이 그러니까 대학 간다는 걸 쫌 포기를 좀 했었어요. 공부를 좀 등한히 하고. 그런 것이었는데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인제 시험도 대충 봤는데 뭐, 원서내서 떨어지고. 근데 떨어지고 나니깐 많은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그래도 한번 대학은 가보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재수도 했죠.
면접자: 그때 처음, 인제 떨어지셨다고 그랬는데
구술자: 그것도 전남대, 전남대, 그것도 전남대. 성적이 안 돼서 원하는 데는 아니었지만 써보자 했는데 떨어졌어요. 2지망에는 붙었는데 그 당시에 장학금을 좀 받아야 되니까. 근데 2지망으로 붙으면 장학금을 안 줬어요, 그때. 1지망만 장학금을 줬다고요. 그래서 포기를 했어요. 포기를 하고 재수를 했죠. 뭐 또 한 번 더, 좀, 이왕 갈 거면 생각이 있는 데를 가보자, 그래서 했는데, 그렇게 됐어요. 일 년 재수했어요, 재수하고...
면접자: 재수를 하고 85년도에...
구술자: 85년도에 인제 학교를 들어가. 들어갔는데, 인제 그때는 농생물학과를 들어갔어요.
면접자: 농생물학과요?
구술자: 네, 농생물학과. 아마 장학금을 좀 줬을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들어갔어. 장학금을 받고.
면접자: 특별하게 농생물학과 하고 적성, 뭐나 관심보다도...
구술자: 그것 좀 강했죠. 그게 쫌 대학을 좀 가보자. 그것도 컸고 성적도 그랬고. 성적도 그 정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고. 그렇죠.
면접자: 점수에 뭐 그런...
구술자: 장학금은 다는 안 받았지만 그래도 쫌 장학금 혜택도 좀 있고 아마, 잘 모르겠어요. 장학금 혜택이 있었나, 어쨌나. 잘 모르겠어요. 여튼, 어떤, 그 당시 저희 집안 경제도 쪼끔 인제 등록금은 낼 수 있는 정도가 됐고. 그래서 인제 집안 형편도 쪼끔 경제적으로 나아지고 그래서 대학도 갈 수 있었겠죠. 뭐 지금은 뭐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때 대학 가는 것도 참 힘들잖아요. 소 팔고 막, 그렇게 대학 다니고 그런 상황이니까. 그렇게 됐지요.
면접자: 80년대 중반이면 아, 물론 전두환정권이긴 하지만 80년대 초반보다도 쪼끔 더 유화정책을 펴면서 대학 내 학생회 활동들이 더 활발해지기도 하고 좀 그랬는데.
구술자: 인제 막 꽃이 필 때죠, 84학년. 84학번 뭐, 그때 학원 자율화? 그때 학원 자율화가 그 전 해엔가? 그 전 핸가 됐을 거예요. 그래가지고 점차 학원이 활기가 띄어지는, 그리고 그 당시 학교의, 대학교에 있었던 사복 경찰들, 경찰들이 인제 밖으로 나가는, 그런 시기에 학교를 들어간 거죠. 학교를. 상주해 있지 않는 시기에. 얘기 들어보며는 그 전에는 상주해 있어가지고 몇 사람 모이기만 하면 막 학교에서도 최루탄 터치고 흩어지라 하고 그랬다는데 그때 84학년 때까진가 아마 그랬을 거라고 그랬던 것 같애요. 83학년 때 까진가? 정확하게 정리가 안 돼서 그러는데.
면접자: 학교 분위기는 좀 어땠나요? 그런 것에 쫌...
구술자: 많이 자유로워졌죠.
면접자: 아니 인제 선생님께서는 이런 어떤 좀 운동적 성향? 뭐 꼭 그걸 일학년때부터 실천하기 위해서 가신 것은 아니었죠?
구술자: 그쵸그쵸그쵸, 근데 그쪽에 관심이 많이 있었죠, 근데. 관심은 있었고. 꼭 그 할려고 간건 아니지만 관심은 있었고, 그랬었어요. 이 뭔가, 지적 욕구, 이런게 있었겠죠? 지금 돌이켜보면
면접자: 과 생활 외에 특별하게 뭐 동아리 활동 같은 거나 그런거 하신게 있으셨나요?
구술자: 동아리 활동 했죠.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들어가자 마자 먼저 들어간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들어간 친구가 거기를 소개를 시켜줬죠. 소개를 시켜줘서 거, 소개를 받아서 동아리 활동을 했죠.
면접자: 어떤 동아리였습니까? 학습 동아리였습니까? 아님 문예, 문예...
구술자: 학습동아리죠. 내가 이런 얘기 다 해야 되나?
면접자: 어, 이제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말씀하셔도 됩니다.(웃음)
구술자: 아, 나참. 그니까 그 당시 학교 동아리는 인제 그 비합, 뭐 합법 이러잖아요. 맞는지 모르겠는데. 하튼 잘 모르지만 하튼 간에 언더 써클이 있고 뭐 그러잖아요. 그런 부류의 동아리 활동을 한 거죠. 이제 이름이...이름을 얘기해도 되나? 나 이름이 확실한지 어쩐지는 모르겠는데 하튼, 그룹을 황토라고 그랬나? 아마 그럴 거예요. 그, 이런 얘기도 해도 되나? 기봉이 형하고...선배니까, 바로. 같이 학습하고 그랬으니까. 그쪽으로 활동을 시작했죠. 근데 거기 활동을 하고 어...일 년을 보내고 2학년 2, 1학기까지 보내고 군대에 오라고 인제 신체검사, 신체검사를 받고 그러지 않나요? 2학년 2학기 때까진가 다니고 휴학을 했어요. 이제. 예.
면접자: 그,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을 하신건가요?
구술자: 그쵸.

<off the record>

구술자: 아니, 근데 이거는 철환이를 만나서 얘기를 해도 되고. 그 종화형을, 종화형은 다 모르지. 종화형은 87년돈가 저기, 뭐냐 오월, 오월 특위라고 나오잖아, 오월투쟁위원회라고 항상 해만 되면 나오니까. 87년엔가 아마 종화형이 투쟁위원장을 했을 거라고, 그때. 확인해봐야돼, 잘 몰라. 종화형하고도 얘기하고 그런가?
면접자: 아니, 저희, 뭐 관련해서 가끔 저희 연락도 드리고 하니까요.
구술자: 그니까 그때 같이 투쟁위원장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 복학생 복지위원회 그거 만들어가지고 하고 그랬었고. 그때 종화 형이 복학해갖고, 군대 제대 복학해가지고 막 활동하고 그랬을 때거든. 그런 관계는 종화 형이 더 잘 알 테니까.
면접자: 질문을 좀 바꿔서요, 그러면 군대를...
구술자: 그래갖고, 그래갖고, 그래서 내가 녹음한거요?
네, 녹음 괜찮습니다. (웃음) 어떡하죠, 하지마, 하지마봐. 어떤 걸 녹음...

(잠시 중단)

구술자: 이 과정에서 물어볼 것 물어봐, 이거 빼고, 인제 얘기 안 하고 이거는.
면접자: 그, 80년대, 85년도에 입학을 하셨다고 했는데 계속 어찌됐건 동아리 활동이나 학생회, 학생 운동 성향의 그런 활동을 계속 해오셨는데, 당시 오월, 매년 오월이 되면 이제 그런 기념식이랄지 추모식을 진행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정부 탄압도 분명 있었을텐데 주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학교에서는 좀 그런 걸 좀 진행을 하셨나요?
구술자: 그니까 이제 학교에 들어가니까 뭔가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뭔가 인제 사회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 알아가잖아요. 사회적 모순, 우리 정권의 모순, 뭐 예를 들자면 김남주 시인의,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학살자라면, 그러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감옥이고 어쩌고 막 이런 얘기, 그런 시들이 있잖아요. 그런 거죠.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학살자라면, 그런 부분이 가슴이 뛰고 그러잖아요. 그럼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없다, 이런 식이 되잖아요. 그니까, 그러고 그 당시는 4.19가 되면 4.19 집회를 해가지고 끝나고 데모하고, 5·18이 되면 5·18 집회하고 일주일 내내, 인제 5,18 같은 경우는 일주일 내내 하죠, 그 전부터 하든지. 시위하고 학교에서 시위하고 저녁에 시내 나가서 또 하고. 이런 과정. 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냥, 그냥 했죠. 근데 인제 가장 기억에 남는 거는, 지금이야 망월동을, 제가 얼마 전에 한국 방문했을 때, 버스타고 택시타고 가고 그러잖아요? 차, 차 있는 사람 다 택시타고 간다든가. 그 당시 때는 막잖아요 망월동을 못 가게, 망월동을 못 가게. 집회를 본부 앞에서 하고 후문으로, 후문을 통해서 걸어가려고 하면 후문 막고 못 가게 한다고. 그러면 어찌되든 간에 걸어서, 산을 몇 개 넘고 비, 비오면 비 맞고 그리고 망월동 가서 참배하고 막 그랬거든요. 그런 기억들이 참 어려운 기억들이지만 그런 것에 비해서 지금은 얼마나 좋아졌는가. 그 당시 어려운 싸움이면 싸움, 투쟁 속에서 오늘을 만들어냈잖아요? 그니까 뭐, 저에게 있어서 5·18이 어떤 의미냐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그런 과정들을 볼 때, 그게 5·18이 그렇게 탄압 속에서, 힘들게, 그 당시는 힘들었지만 끝내는 이기고 말았다는 거. 85년, 86년, 87년, 88년 이때는 망월동을 갈려면, 5·18 때 망월동을 갈려면 그렇게 최루가스를 맞아가면서 갔다만 지금은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거. 그거는 단순히 얻어진 게 아니라 그, 비 맞으면서, 최루탄 가스 맞아가면서, 산을 막 넘어가면서 망월동을 갔던 그 사람들의 힘 때문에 이런 결과물이 났다는 걸 봤을 때는 5·18이 어떤 5·18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어떻게 우리가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는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런 걸 봤을 때. 해외에서도 어떤 어려움들이 많잖아요. 해외에서도 엊그제 선거가 끝났지만, 다시 공화당이 상하원 장악을 하고 이민 문제 이런 것들이 참 시련이 앞으로 더 인제 생길 것 같은데. 그런 것들도 더 열심히, 어렵지만 해 나가면 또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 어...그런 역사적인 경험이 어찌 보면 현대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있기 때문에 어렵지만 분명히 옳은 길이라면, 정의롭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라면 분명히 저는 된다고 믿어요. 해외에서도 그런 정신, 5·18 이 가지고 있는 그런 정신.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이 저항하고 투쟁하고 나눠먹고 이런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어떻게 보면 그게 승리라면 승리, 뭐 명예회복이라면 명예회복. 이런 과정들이 투쟁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결과물이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그런 5·18 에 대한 것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어떠한, 동포들이 살아갈 때 이겨낼 수 있는, 우리 현대사적인, 역사적인 산물, 그런 면에서 참 좋아요. 그런 것을, 그래서 여기서도 그런 얘기를 좀 많이 하고 싶고 5·18 이 되면 앞으로도 그런 쪽으로 얘기들을 많이 하고 싶어, 하고 싶어요. 5·18 정신을 뭐 기리고 그날을 기념 하고 그런 거지만 5·18이 지금 어떤 모습인가, 라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이쪽에서 살아갈 때, 미국에서 살아갈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역사적인 모습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있다는 거. 뭐 쩌기 합수형님이 우리 역사적 거울이라고 이렇게 뭐 얘기도 하고 그랬지만. 그런 면에서 5·18은 지금 우리한테 살아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말이, 나는 이런 표현이 참 그런데 (웃음) 내 언어 같지가 않아가지고 (웃음)
면접자: 마무리 발언을 해주셔가지고
구술자: 연결 되가지고 (웃음)
면접자: 다시 옛날걸 물어보기가 (웃음) 좀 애매한데요.
구술자: 앞뒤로 편집하세요.
면접자: 80, 뭐 88년에 그러면 농대 회장 88년에 하신 거죠?
구술자: 네 88년.
면접자: 어, 그때 당시 87항쟁 상황을 쫌 이야기, 학교에서 87항쟁 상황을 좀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그때 쫌 어수선할 때 였을 것 같은데, 87년이면.
구술자: 아...근데 뭐, 그때 그 활동했던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만나서 얘기하면 그 당시 87년도가 아마 김승남? 그때 총학생회장이 뭐, 김승남 회장인가 아마 그럴걸요? 지금 보면 오병윤, 제가 기억나는 거는, 지금 국회의원 하고 있죠. 그다음에 황일봉, 제가 황일봉, 오병윤, 김승남, 그 다음에 이게 우리 선배들 총학생회장 있을 때고. 나하고 같이 했던 사람이, 기억이 잘 안 나. 하튼 최 뭐시긴가 그랬을거야. 최완욱이구나. 최완욱. 그니까 나 있었을 때, 저가 활동했을 때 총학생회장이 최완욱이예요.
면접자: 이분도 지금 광주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지 않나요?
구술자: 어, 최완욱.
면접자: 성함을 좀 들어본 것 같은데.
구술자: 그 다음이 김지순가, 김... 하튼 그 다음이 송갑석. 그니까 그래요. 그런, 그런 텀에 제가 학교에 존재를 좀 했었죠. 87학년 87항쟁 같은 경우는 아, 또 그런 것이 있구나. 제가 저기 교생실습을 나가요, 87년도에. 87년도 여름방학에 교생실습을 나가요. 참 어수선할 때잖아요. 근데 교생 실습을...미안한 부분 중에 하난데요. 근데 이제 아침에 총학생회, 1학생회관 총학생회실에서 모여가지고 87, 60항쟁이고 그랬으니까, 하루하루 이렇게 막 점검하고 그러는데 그걸 뒤로 하고 저기 뭐냐, 아닌가? 88년도인가? 나 헷갈리는데... 모르겠네요, 헷갈리는데. 아무튼 간에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어, 88년돈가보네.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대동고로 갔지요. 대동고를 갔는데. 아, 88년도 같네요. 학생회장 했을 때니까. 87하고 좀 틀려지네? 교생실습을 갔는데 막 그때는 통일,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88년도가 그게 좀 심했었어요. 60 그거 해가지고. 근데 대동고, 얘기가 나왔으니까, 대동고 후배들이 운동장에서 스크럼 짜고 데모를 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생각이 들드라고. 내가 무슨 선생님을 할라고 교생실습을 나와서 이러고 있는가, 생각이 들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땐가란 생각이 들고 그러드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뒀어요. 교생실습을 그만 뒀어요. 다시 인제 학교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그랬는데 그때 그 학교 선생님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그랬거든요. 그분들한테 미처 말도 못하고 실습을 그냥 나 혼자 그만 둬버려 가지고 그분들한테 지금 쫌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지금 생각난 김에. 87년도는 그랬던 것 같아요. 거의 학교에서 살았죠. 학교에서 살고 항상 어떤, 학교가 지휘본부가 되고 그러잖아요. 그때 사회 연대적으로 하고 그럴 때니까. 그러면 어, 학교에, 그 당시 학교에 경찰병력들이 안, 못 들어올 때였니까 근데 경찰병력이 들어온다고 한다고 만다고 막 그랬었어요. 그러면 막 도망갈 준비 하면서 학생회에서 잠을 자고 그면 그 다음 날 정신 차려 시내 나가서 투쟁을 하고 다시 들어오면 또 내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당시 우리 용어로는 택, 택 짠다고 그랬어. 요만한 칠판에 광주 시 도시 다 이름 적어놓고 어느 조는 이쪽으로 가고, 어느 조는 이쪽으로 가고, 몇 시에 뭘 만나고 막 이런 거 하고 그러거든요. 인제 그런 거 기획하고 그러면서 87년도는 60항쟁, 그때는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거의 학교에서 살았죠. 그러니까 많이 다쳤고, 뭐 구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했을 때고 책으로도 나왔을 테고 그랬겠지만.
면접자: 그때는 경찰병력이 학교로는 안 들어왔었나요?
구술자: 아마 그때 못 들어왔을 거예요. 86년도까지는 들어왔던 것 같아요. 시위하고 그러면 경찰, 학교 안으로 들와요. 중앙도서관까지 도망가고 막 그랬거든요, 중앙도서관까지 최루가스 뿌리고 그랬거든요. 근데 87년도에는 아마 안 들어왔던, 못 들어왔나? 시위하고 그러면 들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녁에 어, 무단으로 들어와 가지고 잡아가고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니까 학교에서 잤으니까. 그리고 만약에 들어올 것 같다 그러면 도망가고 그랬는데, 아마 근데 정확한건 모르겠어요. 긴가민가해 모르겠어요. 기억으로 학교 다닐 때 기억으로는 들어왔었어요. 86년도까지는, 뭐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근데 87년도는 아마 안 들어왔을 것 같기도 해요.
면접자: 6.10항쟁이 어찌됐건 노태우 항복 선언을 받아낸 걸로 어떻게 보면 일단락이 되잖아요. 보통 5·18 에서도 5,18의 연장선상으로 87항쟁으로 이렇게 하기 때문에 5·18 에 대하 완성, 마무리를 87년으로 보는 것도 일부 계시기도 하는데. 어찌됐건 승리라고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항복 선언을 하고 직선제 되고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그때 당시 그, 직접 그 현장에서 그걸 뭐 이렇게 하신 분으로서, 참여했고 기획하고 했던 분으로서, 이게, 앞으로 이게 어떻게 변할 것이다, 라는 게 좀, 뭐 그런 게 앞으로까지의 뭔가가 있었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이제 그 6.10항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박종철 저기 고문해갖고, 박종철 열사. 그게 1월 13일인가 아마 1월 몇일날 그랬을 거라고. 87년도는 어찌 보면 그때부터 시작이 된 거죠. 그 먼저 동력은 5·18 이죠. 당연히 5·18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또 이런 얘기 돌아가지만, 저도 여기서 가끔 그런 얘길 하지만. 5·18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 않아요? 근데 저는 이제, 광주 5월 27이었더라면. 5월 27일 날 그 새벽에 그 도청을 사수해서 산화하신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광주는 엄청난 힘을 잃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이 들거든요.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 공수부대들이 들어오면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 역사의 증인으로서 마지막 도청을 사수하는 그 사람들의 결의에 목숨을 건 그 날 밤, 그 날 밤이 저는 지금까지의 5·18을 싸워왔던 힘이 지탱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많은 힘든 일들이 있었겠지만 저는 그걸 크게 생각하거든요.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저도 그때 5월 27일 날 헬리콥터가 막 떠가는 소리 때문에 깼거든요. 그때는 잘 몰랐죠. 그치만 자라고, 대학가서, 나는 그때 도청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갈 때 자고 있었구나. 그걸 참 먹먹하다고 해야 하나 막막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잖아요. 그니까 그 당시 5·18을 정확히 몰랐던 사람들도 그런 과정들 나중에 접했을 때, 아, 광주는 그렇게 죽어가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죽어가면서 그렇게 희생해서 싸워가고 있을 때 나는 뭐 했던가, 라는 그런 마음. 5월 27일날 죽음을,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했던 사람들의 그런 마음. 나는 뭐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걸 보면서 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 쪼금이라도 더 해야지. 그런 것들이 쌓여서 5·18 어떤, 싸워왔던 투쟁의 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글고 가끔 생활하면서도 어렵고 힘들 때라도 그분, 그때 그 심정, 5월 26일 새벽에 공수부대를 맞이했던 그 도청의 산화해 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이 달라질 것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는데, 최루탄 맞고, 공수 부대들한테 뭐, 전경들한테, 전투경찰들, 전경들한테 곤봉 몇 대 맞고 최루가스 마시고, 무슨 대수에요, 감당할 수 있죠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나는, 저는 거기서 나왔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 후로부터 5·18 이나 그런 모습을 기억하고 나는 그때 뭐 했던가, 내가 이래선 안 되지, 그분들을 위해서 쪼금이라도 따라가야지, 그런 마음들이 81년, 82년 분신하고, 뭐 미문화관 점거하고. 계속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이뤄내야지. 이런 생각에서 그 힘들이 모아져서. 그러니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니까 많은 사람들도 죽음을 또, 그래 내가 이렇게 죽지 뭐. 그런 마음도 생겼을 거고. 이미 죽은, 죽은, 산화하신, 산화해 가신 분들이 있으니까 고문을 당하더라도, 죽더라도 얘기를 안 하고 그랬을 것 아니에요. 박종철 그 분도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겠지만 산화하신 거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걸 계기로 87년 새해 일월 달부터 뭐,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 기억해보면 금남로 충장로 나가갖고 박종철 살려내라고, 이러면서. 그때부터 계속 1월, 2월, 3월, 신입생 환영회 하고, 4.19 하고, 5·18 하고 이러면서 6.10 항쟁이. 이런 과정들이 계속 전국적으로 그 무슨, 조직들도 결성이 되고 뭐 그래서 6.10 항쟁이, 힘이 그 순간 모아져서 팍 터졌지 않았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우리가 생각한 만큼의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어땠든 간에 노태우 뭐, 말하자면 항복 선언, 직선제로 했고. 인제 그때 많이 얘기가 된 게, 왜 5·18이 생겨났는가. 인제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근본 원인이 뭔가 했을 때, 군부의 어떤 그런 문제 이런 것도 있지만 5·18에 의해 그 속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보습이 미국 문제잖아요. 정말 은인으로만 알았던, 우리 편인 줄로만 알았던 미국이 우리 편이 아니고 군부 편이었구나, 독재자 편이었구나, 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5·18이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독재자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을 바라보니까 미국이 분단한, 우리 조국을 분단하는 것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미쳤구나, 이렇게 또 하게 되고. 그런 속에서 아, 이런 문제들이 좀 본질적으로 해결이 되려면 그니까, 5·18문제가 본질적으로 문제 해결이 되려면 단순히 직선제를 개현하고 뭐 정권이 OOO 141106_김준_02_00:20:45 이런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의 문제가 해결되고 분단 문제가 해결되는 게 이렇게 올바른 방향이지 않는가란, 그런 것이 막 학생운동 사이에서는, 그래서 NL도 생기고 PD도 생기고. 노선이 생기잖아요, 86년도에 NL, PD 생기고, 전남대 같은 경우에 NL의 뭐 어쩌고 다음 얘기 다 아실 거예요. 인제 그런 속에서 미국의 문제와 분단의 문제가 생기면서 그 다음부터 이제 분단 통일의 문제가, 6.10항쟁 이후로 최대의 학생 운동 속에서의 화두면 화두랄까 이게 부각이 되죠. 그래서 그 다음해에 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88년도. 89년에 평축을 계기로 해서. 그쵸? 평축을 계기로 해서 국제 평화 대행진. 미국에서 주도적으로 합수형님, 윤한봉 선생님께서 많이 참여, 관련이 돼있으신 국제평화대행진이라고 부르지만, 그런 문제. 그래서 그 이후로 학생운동의 보며는 통일 운동 쪽으로 많이 변화를 하잖아요. 1차적인 5·18 의 문제가 노태우 정권의 그, 항복 선언으로 직선제로 개편이 됐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 문제와 분단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야 되겠다. 그 문제로. 변화하죠, 그쵸. 그니까 이제 궁극적인 5·18 문제의 해결은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뭐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자주적인, 정말 민족 자주적인 정권 그리고 분단의 해결. 어,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 5·18은 나름대로 또 역할을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어요. 질문에 대충 연계가 됐나 모르겠네.
면접자: 그 88년도에 선생님께 농대 학생회장으로, 그때 과정이 글쎄 뭐 선생님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그런
구술자: 사회적 분위기가 있죠, 학생 내에 분위기가 있죠. 87항쟁이 끝났잖아요. 87항쟁이 되가지고 많은 학교 내 분위기가 인제 그, 운동 성향이 있는, 그니까 모르겠어요. 학생, 이런 평가를 제가 감히 할 수 있나, 그 분위기를 얘기할 수 있나 모르겠지만. 87년도까지의 학생회의 구조하고 88년부터의 학생회의 구조는 쪼끔 달라요 쪼끔. 어, 그니까 87년까지의 학생회는 어떻게 보면 이렇게 그, 특별히 나대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학생 운동 그룹이 있고 그런 공개단위의 학생 운동 그룹이 있고. 그럴 거 아니에요. 비합, 표현이 좀 어색하고 그래하지만 쫌 이해를 해, 잘 해서 들었으면 좋겠네요. 말이 좀 조심스럽긴 한데 하튼 그런 87년까지는 그런 게 있었어요. 왜냐면 많이 잡혀가기도 하고 그, 조직을 보호해야 되기도 하고 이러니까. 그래서 이게 87년까지는 그랬는데 88년 학생회부터는 조직에서 나름대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대거 학생회장 후보로 다 출마를 해요. 그중의, 그중의 한 사람이죠, 저도. 근데 그때 분위기가 87항쟁 이후, 선거가 11월 달 되잖아요, 12월 달인가? 선거가 되잖아요? 그니까 그, 87항쟁 이후로 사회가 엄청 인제 많이 민주화라면 민주화랄까? 아니면 쫌 개방적이라면 개방적이랄까? 아니면 쫌 더 진보적이면 진보적이랄까? 그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또 학생 전반적으로, 물론 우리 전남대학 같은 경우는 뭐 다른 데보다는 쪼끔 더 사회진보적인 그런 쪽에 있긴 했지만 어떤 전체 분위기가 그랬어요. 거의 대다수가 학생회로 나가서 그게 거의 다 당선이 됐죠. 저도 뭐 어렵다고 보긴 했지만 무난히 당선이 됐죠. 제가 잘나서 당선이 됐다기보다는 그 당시 사회 분위기, 그리고 내 활동 경력, 뭐 있을 거 아니에요. 어느 활동했고 그걸 선거에 나가서 다 보이는 거니까. 그런 경력. 뭐 이런 것들이. 제가 잘나서 했다기보다 그런 분위기가 돼서 당선이 됐을 걸로 생각이 들어요.
면접자: 그때 88년도에 선생님께서 농대 학생회장 했을 때 총학생회장이 최완욱씨?
구술자: 아마 그랬을 거예요.
면접자: 다른 단대회장들은 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확실히 다 기억은 못하겠어요. 오래돼서. 근데 하튼 그때 법대, 사회대, 공대, 농대, 자연, 자연대? 하튼 거의 대다수가 함께 활동했던, 활동했거나 자주 얼굴을 봤던 그런 사람들이 많이 됐었어요.
면접자: 아까 말씀하신 이제, 89년 상황으로 쫌 넘어가서요. 인제 제가 기억이, 제가 쫌 기억이 틀릴 수도 있는데, 다를 수도 있는 것 같은데,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어찌 됐건 그런 과정에서 5공 특위, 청문회 개최가 되고 그런 게 만들어지면서 뭐 이제 5공 광주문제와 관련된 청문회들이 어찌됐건, 이게 정치적으로 금기시 됐던... 테잎 잠깐 갈고 가겠습니다.

(DV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내용 상당부분 누락

구술자: 그러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그럼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나 후배들이나 선배들이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특히 또 제가 또 문화 쪽에 그 쪽에 잠깐 몸 담이 활동 했을 때도 다들 어렵게, 지금은 얼마나 받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뭐 만원, 만 오천 원, 이만 원 이런, 이런 거 가지고 생활하고 그랬던 시기라, 정말 열정 하나로 버텼던 시기라. 근데 그렇게 함께 했던 사람들을 그냥 놔두고 딸랑 미국에 와가지고 산다는 거 자체가 너무 그분들한테 미안하잖아요. 여기 살면서 그런 미안함들이 많이 있었죠. 난 여기서, 그래도 그 사람들 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 그믄 괜히 지금 현장에서 열심히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뭐 조국이 뭐간디, 조국의 자주 민주 얘기하면서 통일 얘기하면서 막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그런 생각하면. 똑같이 해봤기 때문에 알잖아요. 그니까 그런 생각을 뻔히, 나는, 나는 거기에 떨어져 나와서 여기 미국 생활 한다는 게 미안하고. 항상 그런 죄스런 마음, 이런 것들이 존재했었죠. 그래서 대충 좀 여건이 된다면 다시 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라는 그런 마음들이 많이 있었죠.
면접자: 근데 미국에 도착했던 날짜는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기억하죠.
면접자: 90년...
구술자: 90년 3월 달이요. 3월 24일입니다.
면접자: 집을 어디, 뭐하셨나요?
구술자: 그때는 누님이 토렌스(Torrance)에 계셨는데, 토렌스에 계셨는데 저희 인제 매형 되는 분이 인제 컨트랙터(Contractor), 목수죠, 목수죠. 여기서 말하면. 건설업자죠, 건축, 건축 하시는 분, 그분이 인제 생업을 그걸로 하시는 분이라 저는 그쪽으로 와가지고 일단은. 그분들은 사회 참여라던지 뭐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는 모르죠. 근데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시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 그...일상적으로 생활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저도 여기에 합류를 해서 오자마자 매형이 그런 건축일을 하기 때문에 따라다니면서 인제 목수일도 배우고 일도 도와드리고 뭐 그런 시작을, 생활을, 이민 생활을 했죠. 도와드리고 그런 시작을 했죠
면접자: 오면 가장 불편한 게 아무래도 언어일텐데, 그, 매형 되시는 분은 한국어 말을?
구술자: 한국분이셨어요.
면접자: 주독?
구술자: 아, 인제, 그... 여기 주한미군에서도 우리 있지만, 주한미군에서도 한국 사람들 많이 있어요. 그니까 주독미군도 한국사람 많이 있어요. 인제 근데 또 여기는 이혼이 자유롭잖아요. 아, 이런 얘기 쫌 그런데. 그니까 또, 또 다른 분이세요.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니까 여기 와서 어머님 초청해서 어머님이 또 우리 초청하고 이 기간이 몇 년 걸린다고요. 몇 년 사이에 누님의 생활환경도 많이 변했죠. 그래서 그때는 좀 다른 첨에 주독 미군이었던 분이 아닌 다른 분이 함께 살고 계셨죠.
면접자: 와서 제일 좀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점이 뭐였나요?
구술자: 그니까 제일 불편한 점은 말이 안 통하잖아요. 그리고 여기 미국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중교통이 많이 발전이, 한국처럼 몇 번 몇 번 있어가지고 버스만 타고 돌아다니는 시스템이 아니고, 차가 있어야 돼요. 운전면허 있어야 되고. 운전면허도 당장 나오는 게 아니라 몇 달 걸려요. 그것이 있고 그 다음에 인제 어찌 보면 광주라는 곳에서 활동하다가 이렇게 왔는데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근데 인제 어찌 보면 시간은 흘러가지고 4월도 지나고 5월이 다가오니까 어, 마음이 좀 이상해지죠. 5월하면 뭔가 가슴이 뛰고. 이렇게 두근거리고. 내가 뭐하나,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내가 뭔가 해야 하는데, 뭐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이 초창기에 많이 힘들었죠. 어떤 육체적인 힘든 것 보다 국, 국내에서 이렇게 연장선상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거 이런 것들이 많이 힘들었었죠. 내가 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이런 것들. 그게 한 몇 개원 된 것 같아요. 몇 개월 된 것 같고 그 다음에 우연찮게 신문에서 여기에서 5·18 행사를 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광고를 봐서 저희 누님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인제 쫌 태워달라고 해서 지금 토렌스라고 하는 데서 LA하고 시간이 차로 30분에서 한 시간? 교통 체증이 있으면 이런 거린데 뭐, 제가 지리도 모르고 차도 없고 뭐 어딘지 모르니까 부탁을 해서 이러이런 장소로 같이 가달라 부탁을 해서 그때 처음으로 90년 5·18을 여기서 맞이를 했죠. 여기 그때 이 동포사회에서 나름대로 5·18행사를 하는 단체들이 있었더라구요, 있어서 5·18 행사를 하는데 거기서 인제 참석, 참석 했고 또 거기에 인제 5·18 망월동 사진 영정 놓고 분향한다고 그런가요? 촛불피우고 이렇게 향 피우고 하는데 절하고 그런 무대도 설치되 있고 누구 강연도 했는 것 같고 그래요.
면접자: 그때 당시 기억 안 나실, 기억나시는 부분만, 행사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됐나요? 어떤 내용의 어떤 행사라고 이렇게?
구술자: 그러니까 대충 식 하기 전에 그냥 분향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놓고 그믄 오는 대로 와서 분향하고 자리에 앉으면 뭐, 식 하고, 강연 같은 거 하고, 합창 같은 거 하고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그런 식으로 뭔가 되지 않았나.
면접자: 그때 90년 기념식은 어디에서 진행을 했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윌셔(Wilshire) 연합 감리교회라고 지금 민족학교에서 쪼끔만 떨어져 있는데, 여기서 뭐 한 200m나 떨어질라나? 여기 윌셔 윗 거리라고 감리교 교회에, 교회에서 했었어요.
면접자: 그때 참석 인원 같은 것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근데 어떤, 많이, 의자에 많이 좀 찬 걸로 알고 있어요.
면접자: 대부분이 한인...
구술자: 대부분이 한인들이죠.
면접자: 그때 뭐 누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가 간게 아니라 광고 하나만을 보고 가시게 된 게 이게 계기가 돼서...
구술자: 거기서 이제 지금에서야 알게 됐지만 그때 인제 재미 한, 한청련. 한청련이죠. 그 한청련 그, 저기, 젊은 활동가들이 거기에서 준비하고 또 그 외에서 그 당시에 활동했던, 단체는 잘 모르지만 하튼 뭐. 한겨레, 재미 한겨레. 기억나는 건 그 정도네요. 왜냐면 제가 또 관련되었던 조직이 그런 조직이었기 때문에, 단체였기 때문에. 그러네요. 가물가물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했을 때는 아, 그분들이 그런 거였구나. 또 그 후에 그 분들을 만났기 때문에 기억을 하죠.
면접자: 그럼 그, 그걸 참석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한청련이라든지 한겨례 라든지 그런 활동들을, 사회 활동들을 하고 있는 단체가 있구나, 라는 건 모르고 계셨나요?
구술자: 근데 인제 제가 학교에서 제가 활동할 당시에 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그, 미국에 우리가 존경할만한 분, 아주 훌륭한 분이 운동가가 계시는데 윤한봉 선생님이라고 계신다, 저가 또 농대 다녔기 때문에. 그분이 또 축산, 축산과 아마 다니셨을 거래요. 전남대, 그 농대 선배 중에 그런 좀, 우리가, 그런 분이 계신다, 그런 얘기를 들었었어요. 그래서 인제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된 후에 인제 그분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근데 그때 좀 87학년도 이후에 분위기가 좋아졌기 때문에 그때 그분을 소개하는 그 잡지, 󰡔말󰡕진가 󰡔길󰡕지인가가 있었어요. 그, 그분의 미국생활을 잠깐 소개하는. 거기서 정보를 접해서 민족학교 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미국가면 여기를 찾아가봐야겠다 생각을 했었었어요. 마음을 가지고 있었었어요. 여기에 와가지고 거기를 찾아봤었고 5·18 행사도 갔을 때 그분하고 관련된 거구나, 근데 저 아직 당장 자리도 잡히지 않고 뭘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서 뭐 어떻게, 어떻게 한다고 그러기는 없었어요. 그날은 그냥 5·18 행사만 하고 돌아왔었지요. 돌아와서 인제 시간이 좀 지나니까 운전면허증이 나오고 운전면허증이 나오면서 아주 좀, 중고차지만 제가 운전할 수 있는 차도 하나 생기고 그래서 아마 7월경이 됐을 거예요, 3월 달에 왔으니까. 3,4 개월 지났는데 7월경에 제가 차를 직접 몰고 인제 찾아왔죠. 찾아왔는데 제가 문화 쪽을 잠깐 몸담아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그런 쪽에 뭔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런 활동 단체를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그쪽하고 이렇게 만나지를 못했어요. 그 다음으로 민족학교라는 곳을 좀 찾아봐서. 지금 여기 민족 학교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저 밑에, 아래쪽에 거기 민족학교가 있었을 때 그 쪽으로 찾아갔었죠. 찾아가서 거기에 계신 분을 만나고 제 소개를 잠깐 하고 그리고 이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보고 싶다 인제 미국에 와가지고 어려움이 많다, 뭐, 제가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움 주셨으면 좋겠다. 왜냐면 왠지 국내에서 활동했을 때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끼리 있는 그런 막연한 유대감, 연대감 이런 것들이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그런 활동하시는 분들,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내가 좀 서로 동지라고 할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얘길 했는지 모르겠지만 얘기를 했었었어요. 그러니까 그분들도 저를 반겨주셨어요. 반겨주셔서 인제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인제 윤한봉 선생님도 뵙게 되고 거기 활동하는 분들도 만나게 되고 민족 학교하고 90년도에 인제 만남이 이루어졌죠. 만남이 이루어져서 그 인제 그 당시 민족학교 재미 한청련 이런 것들 보면 2년에 한 번씩 대회라는 걸 해서 전국에 있는 조직들이 모여서 큰 행사들을 해요. 그때 인제 제 기억으로는 뉴욕에서 그 행사를 했었는데 저한테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면접자: 90년도에요?
구술자: 90년도에. 그때 비행기 값 내고. 먹고 자고는 할 수 있대요 큰 돈 안 들이고. 그냥 비행기 표 값 정도 내고 그쪽 가서 한 며칠 있다가 같이 활동하는 것 보고, 또, 너무너무 좋았어요. 몇 백 명 모인 자리에, 여기 그렇게 큰 규모의 활동가들이 있고 또 전국 각지에서 모여서 하는 이조직력도 보고 참 기뻤었어요. 반가웠고. 그래서 뭐 자연스럽게 민족학교하고도 관련 맺어지게 되고 재미 한청련 하고도 인제 관련 맺어지게 되고 인제 재미 한청련 회원으로, 나성 회원으로 활동도 하게 되고 뭐 그랬죠.
면접자: 주 활동내용이 어떤 거였나요?
구술자: 주 활동 내용은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는데 주로 저는 문화 활동을 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뭐 여러 가지 분야들이 있잖아요, 교육도 있고, 조직도 있고 뭐, 학술 모임도 있고 봉사 모임도 있고 뭐 그렇겠지만, 독서 모임도 있고 그러지만 저는 문화 쪽에서 좀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다,라고. 또 단순히 그냥 쪼끔 하다마는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여기서 꾸준히 하고 싶고 그래서, 그래서 그 당시 재미 한청련에 문화분과 준비위원회인가 그런 게 있었을 거예요 거기에 인제 활동을 하게 되고 그, 그걸 토대로 인제 거기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연습하고 그래서지고 92년 말에 저기 뭐냐, 문화패 한누리 라고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화패를 만들어요. 문화패를 만드는데 그 전에 뉴욕에는 뉴욕 문화패 비나리라고 있었었어요. 뭐 저기, 좀 오래된 문화패 조직은데 LA 조직이 인제 문화패가 하나 생기는 거죠. 거기에 인제 그 동안에 여기서 준비를 하면서 함께 했던 사람들하고 저랑, 또 저랑 비슷하게 한국에서 좀 문화 활동을 했던 친구들이 오고 같이 좀 힘을 합쳐가지고 문화패 한누리 라고 해서 만들었죠. 만들어서 그 다음해 일월달인가, 안치환씨를 초대했죠. 안치환씨가 이렇게, 하나 있는데 가져와볼까요? (포스터 자료를 보며) 안치환씨는 기억날지 모르겠네요. 안치환씨는 기억 날거에요, 아마. 이게 뭐냐, 미주 순회공연을 했어요, 안치환씨가. 92년 12월 달에 한누리가 생기고 인제 93년, 93년 1월에, 1월에. 안치환씨가 겨울엔가 와가지고 인제 했죠. 그때 미주 민족문화예술협의회가 있었고, 그 다음에 인제 나성 한인문화패 한누리 라고 해가지고 같이 두출, 두출해가지고 처음으로 이걸 하나를 했죠. 문화 행사로. 그래서 이런 활동을 인제 저는 이렇게 뭐랄까, 문화 행사를 하게 되면 거기에 쪼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획하고, 활동 진행하고, 그런 쪽에 쫌 더 활동하게 된 거죠.
면접자: 이때 그럼 이런 활동들을 같이 하셨던 분들이 몇 분정도
구술자: 그때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나둘, 셋넷 다섯, 여섯, 일곱, 한 일곱 명 정도 되나 아마 그럴 것 같네요.
면접자: 한누리
구술자: 멤버
면접자: 멤버가요? 주로 이제 어떤 분들이 하셨나요?
구술자: 어, 그때 부부가 하나 있었는데요 그때, 저보다 나이가 한두 살 더 어린 친구였는데, 국내에서 문화 활동을 하다가 풍물패 활동을 하다가 온 친구가 있었구요. 그 다음에 한 친구는 독일에서 이렇게 살다가 온 친구인데 우리 문화를 좋아해서 이렇게 함께 했던 친구가 있고. 그, 유성씨, 문유성씨 부인되시는 김희숙씨도 그때 잠깐 같이 활동을 했었구요. 그리고 여기 윤희주씨도 잠깐 같이 활동을 했었고 그래 그때 그 멤버들이죠. 지금은 지금 한누리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얼마 없구요, 이제 무슨 행사가 있고 그랬을 때, 그 유명, 거의 뭐랄까, 주축 멤버라기보다는. 지금은 다른 분야로. 그니까 인제 2세들. 2세들 문화 팀하고 장년 문화 팀을 아울러서 인제 뭐랄까 활동해나가는, 강습 위주, 공연 위주 그리고 인제 5·18행사라던가 무슨 문화행사가 생기면 함께 기획하고 함께 하는 그런 정도의 명맥을 문화패 한누리는 유지하고 있죠.
면접자: 이게 한청련 산하, 어떤 단체인가요? 한누리 라는 게, 산하 조직이었나요?
구술자: 어 딱히 조직적으로 산하조직이라기보다 하나의 문화패로서 존재를 하죠. 근데 거기 그, 구성원들을 보면 거의 한청련 회원들이죠.
면접자: 대부분 한청련에서 뭐 그런 분이 있으면 같이 참여를 그랬었겠네요.
구술자: 예예예예. 이른바 산하단체에요. 이런 이런, 딱 한청련 산하 문화패 한누리입니다, 이런 표현은 안 했었어요. 안 하고 그냥 문화 패, 문화 단체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거기 활동 한 사람들이 거의 한청련 회원, 그렇지만 비회원도 있고요. 왜냐면 문화 활동이니까. 강습활동도 하고 그러면 인제 그 다음, 그 해에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프로그램들을 하면 그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해야하잖아요. 그러니깐 많을 때는 열, 열명씩 가입하고 그러는데 그분들은 다 한청련 회원이 아니고. 뭐 그렇죠. 그러니까 그 문화패 한누리 내에는 한청련 회원도 있고 한청련이 아닌 사람들도 있고. 활동은 주로 문화 활동을 하고. 뭐 산하 단체로 뭐 굳이 뭐 얘기한다면 할 수도 있지만 또 아니라고 해도 또 굳이 왜 아니냐?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조직이죠. 근데 대충 나름대로 그걸 운영하고 기획하고 하는 사람들은 한청련 회원이었고.
면접자: 제가 예전에 한청련 뭐 민족학교 관련해서 사진 정리를 7년 전에 와서 좀 하다보면 그, 뭐 야외 집회나 그런 거 있을 때 풍물 공연 있고 같이 이렇게 시위할 때. 그분들이 다 지금 한누리 멤버들이었다는거죠?
구술자: 그쵸. 한누리 멤버들이었고 예예예예. 그리고 한누리 멤버가 아니더라 할지라도 쪼끔 인제 그날 시위하고 그러면 다 올 수 없잖아요 근데 대충 북치고 꽹과리 치고 징치고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또 있었으니까. 멤버가 아니라도 그런 쪼끔 능력이 있으면 그때 와서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데 주로 집회나 시위 때 나가면 주로 이제 주축...핵심이라고 새야 하나요? 이런 사람들은 문화패 한누리 활동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됐었죠.
면접자: 주로 인제 활동들을 보면 꼭 오월 문제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시위들도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구술자: 네네네
면접자: 주로 인제 어떤 부분을 많이 이렇게
구술자: 문화
면접자: 한청련 활동이 꼭 오월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운동 하고도 연계를 하고 뭔가를 진행하거나 그런 부분이 있었나요?
구술자: 네. 그러니까 한청련이 주요 활동, 뭐라 그럴까요? 강령이 있지요 있는데, 그 중에 우리 조국이라고 표현을 많이 했었어요. 조국 연대하는 거. 조국에 힘이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다음에 크게는 세 가지겠죠. 동포사회에 어떤 그, 권익,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활동. 그 다음에 제 3세계, 타민족과의 연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 평등, 인권, 이런 것들이 나오는 거죠. 좀 분단된 또 조국에 대한 통일의 문제 뭐 이런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활동들을 했었죠. 한청련에서 뭐 한청련에도 활동 했었고 또 문화패 한누리도 그런 속에서 만약에 뭐, 영사관 앞에서 시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뭐 예를 들면 뭐, 양심수 석방하라는 문제, 국가보안법 철폐하는 문제, 또 뭐 5·18에 대한 그 진상규명의 문제 이런 등등이 나왔을 때 영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또 인제 제 3세계 연대할 때가 있어서 이라크 전쟁이 났을 때 전쟁반대 시위도 하고 또 뭐, 또 어디 만약에, 지금 생각하는 거 피코 노동잔가 아마 그때 있었을 거에요. 그때 와서 본사가 여기에 있으니까. 본사 앞에서 시위하고 그러면 같이 가서 시위도 하고 도와드리고 뭐 이런 거. 그러니까 국내 연대 운동. 우리가 도와주기도 하고 그쪽에서 무슨 문제가 생겨서 미국을 오면 저희가 여기서 통역 문제라든가 차량 문제라든가 같이 도와주면서 같이 시위할 수 있으면 시위하고 뭐 그런 다양한 문제. 그런 속에서 문화가필요하다 시위할 때 소리가 필요하면 참여하고. 또 음향? 뭐 등등이 필요하다면 합주하고 그랬죠.
면접자: 그런, 한청련 한누리 그런 지금 현재, 당시 활동들에 대해서 좀 주변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게 아무래도 집회 시위가 당시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보단 자유스럽고 뭐 이렇게 했겠지만 어찌됐건 그, 그때 당시 정부에서 보면 반국가적인 뭐가 좀 있지 않을까
구술자: 뭐 며칠 전에 봤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렇잖아요. 여기 뭐 (신문을 펼쳐 보이며) 이런 게 있잖아요. 엊그제 선거 했잖아요. 선거 했는데 ‘북, 직접 조정 한인 종북단체 수두룩‘ 해가지고 여기 미국 내에 종북 단체가 이러이러한 단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는데. 그 당시는 이것보다 더 심했죠. 그 당시에는. 그니까 빨갱이죠. 빨갱이. 민족학교 빨갱이. 민족학교 저기, 저기 뭐냐 민족학교 앞에는 김일성 사진이 있고 인공기가 붙여져 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지금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당시 그런 것들 인제 그 진실 아닌 유언비어? 그런 것들을 듣는 사람들. 또 한청련이 민족학교, 또 같이 공간을 쓰고 그러니까 한청련 활동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 친북, 그때는 용공 세력이라고 그랬을 걸요? 일수, 일부 몰지각한 폭, 불순세력, 용공 세력. 지금이야 종북 세력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표현을 했던 것 같아요. 일부 소수 극렬 과격세력, 뭐 용공 세력, 그리고 여기에 그런 동포 사회에서도 아, 뭐 김일성의 지령을 받는 뭐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렇게 해서 그 당시, 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활동, 그 국내 민주화를 위해서 하는 뭐 시위를 이런 것들을 그렇게 보는 시각들이 많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뭐, 제가 역사적 평가자는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뭐라고는 못하지만 그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고 지금도, 지금도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민족학교가 많이 알려지고 동포 사회의 권익을 위해서 많이 활동도 하고 있지만 지금도 민족 학교다 그러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를 하니까. 그렇게 많이 세월이 흘렀어도, 근데 그 당시에는 더 힘들었겠죠, 그런 것들이. 그리고 제가 여기서 93년도부턴가 4년도부턴가? 지신밟기를 했어요, 지신밟기. 한국에서 지신밟기를 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우리 문화 차원에서 한번 해보자 해서 한 적이 있었는데, 쫓겨났어요. 미신 굿 한다고. 가게에 가가지고 지신밟기 하러 왔다고 그러면 무슨 미신 굿거리 하냐고 쫓겨나고 그랬어요. 근데 지금은 그러신 분들은 거의 많이 인제 없어지셨는데 그때 90년대 초? 중반만 하더라고 그런 시각들이 동포 사회에는 존재를 하고 있었죠.
면접자: 아, 한국인 가게를 찾아가도 쫓겨나고 그랬나요?
구술자: 예, 한국인 가게, 한국인 가게를 찾아가죠. 인제 반겨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쫓, 쫓아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미신 푸닥거리 하지 말라고. 무슨 지신밟기냐고.
면접자: 그, 쫌 제가 인제 모든 활동들을 다 모르기 때문에. 그 쫌 말씀을 이렇게 드려볼게요. 어...그 주로 활동했던 게 사회 참여, 그게 인제 한국 정치상황의 문제든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인권의 문제, 그 세계 아니면 전쟁 반대, 핵 반대 비핵, 그런 문제라든지 그런 사회참여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민주주의 관련 문제들을 다 같이 폭넓게 쫌, 이 한겨례 하고, 좀 한겨레, 아니 한청련에서 이런 활동들을 쫌 해오셨는데 주로 좀 이렇게 가장 쫌 기억에, 90년도에 좀 가장 기억이 남았던 좀 그런 부분들이 있으셨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그 89년도에 저는 여기에 없었는데 89년도에 국제평화대행진이라고 해가지고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가잖아요, 임수경씨도 그때 인제합류를 했었고. 인제 그거를 하면서 2년에 한번씩 2년에 한번씩 이 국제평화대행진을 하겠노라고 이렇게 얘기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89년에 했으니까 91년도에 또 할때가 됐잖아요, 그래서 91년도에 다시 추진을 하려고 했었는데 그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정리된 게 있을 껀데 그때 그게 국제평화대행진이 열리지를 못했어요. 열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게 이, 우리의 조국의 분단 상황, 그리고 민주화의 상황 이런 것들을 전 세계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알리고. 우리 조국이 좀더 민주화되고 자주화 되고 이렇게 분단이 좀 극복되는 그런 것에 활동을 전개해보자. 그냥 못한다고 있을게 아니라, 그런 논의가 있어가지고 그... 그것도 어떤 정리된 책자가 나온 걸로 지금 기억이 되는데. 그 해외 문화선전대라고 해가지고 활동을 해요. 그래서 한 팀은 호주 쪽으로 가게하고, 한 팀은 유럽 쪽으로 가게하고. 그게 91년도죠. 91년도 9월 달엔가 하고 하는데 거기 제가 합류를 합니다. 7월 달에 뉴욕으로 모여가지고, 활동가들이 뉴욕에서 세 명인가, 그리고 엘에이에서 한명, 북가주에서 한명, 이렇게 해가지고 다섯 명인가가 이렇게 제 팀은, 유럽 팀은 꾸려지고. 유럽에서 세분이 합류해가지고 유럽을 몇 개 지역인가 지금 가물가물 한데요, 한 달 정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우리 조국의 어떤 문제, 민주화 문제, 이런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홍보하고 제 3세계 사람들하고 연대하는 그런 활동들을 그때 한 적이 있어요. 그게 아마 최용탁씨가, 아마, 그때 최용탁 지금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죠, 한국에서. 얼마 전에 최용탁씨가 그거에 대해서 아마 정리를 한 글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쫌 더 구체적으로 아마 나와 있을 거에요. 저도 기록물이 있는데 아직 정리를 못했어요. 그런데 거기 참여를 한 게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 정도 90년대 초반에는 그런 것이 있죠. 그리고 좀 뛰어올라가자면 94년도에는 5·18 관련돼서 극단 토박이가 󰡔모란꽃󰡕을 가지고 와요. 94년돈가? 아마 그럴 거에요. 기억은 뭐 확실히는 모르는데 제가 이런 자리가 되면 다 자료를 준비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웃음)
면접자: 아, 아닙니다.
구술자: 하튼 기회 되는대로 저도 여기서 인제 쫌 더 구체화시켜서 저도 정리를 하도록 노력을 할게요. 근데 그때 그 모란꽃으로 저기, 극단 토박이가 미주 순회공연을 와서 여기서 공연을 하지요. 공연을 하면 하는데 오월과 관련된, 오월에 관련된 행사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또 같이 참여를 하고 행사 진행도 하게 되고. 그리고 저는 오랜만에 그,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도 만나게 되는 거잖아요. 그 당시, 지금도 하고 있는 혜정씨인가? 혜정씨? 현정씨. 현정씨를 그 후에 만났나? 또 수근씨 뭐, 그때 만나서 그때 참 가슴이 쫌 복받치더라구요. 이렇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만나고. 돌아가셨지만, 누구죠, 단장님? 아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이렇게 기억 안 나면 안 되는데, 그분들은. 들불 열사 한분, 한분이신데. 하튼 좀 있다 기억하도록 하구요. 그분도 뵙고 그래서 눈물나도록 반가웠어요. 그런 기억이 있고. 또 그 후에도 󰡔금이의 오월󰡕로 또 오시죠, 토박이가. 근데 󰡔금이의 오월󰡕 때는 인제, 모란꽃때는 첨 오셨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는데 󰡔금이의 오월󰡕 때는 이왕 온 김에 여기도 문화적 역량을 쪼끔 도와주자 이런 기획을 하신 것 같애. 그래가지고 그때 󰡔금이의 오월󰡕 올때는 여기서 문화 활동가가 배우로 또 합류를 해요. 배우로 합류를 했는데 거기에 저도 합류를 하죠. 저도 인제 같이 공연을 다녔어요, 배우로. 단역이죠, 단역, 단역으로 인제 합류를 해서 하고 그 다음에 그때 또 다른 분이, 미주에서 활동하시는 또 다른 분이 이렇게 같이 해서 같이 미국 7개 지역인가 다니고 캐나다까지 가서 이렇게 공연도 하고. 아마 󰡔금이의 오월󰡕은 저기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 그 미국 극장가, 극장가 거기에서 한 군데 무대에서 올라서서 좀 많이 각광도 받았던 그런 기억이 나네요.
면접자: 선생님께서는 90년도부터 미국에 들어오셔서 어찌됐든 오월운동과 관련해서 그 문화 활동으로 계속 활동을 해오셨는데 어찌됐건 그때는 청년기, 청년, 가장 왕성한, 활발하게 활동할 때 들어오셔서 이제는 거의 인제 25년이,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때의 역할과 지금의 선생님의 역할은 쪼끔 이제 지금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고 판단이 되는데 선생님 개인적으로 생각하시기에 어, 선생님의 지금의 역할, 이런 문화 예술 활동 이런 운동, 오월운동에 관련해서 선생님의 역할, 이런 역할을 이제 좀 해보고 싶다 이런 게 있으신가요? 지금까지 좀 아쉬웠던 거라든지, 이런 걸 꼭 하고 싶었는데 쫌 못했다든지, 아니면 앞으로 이런 걸 좀 해보고 싶다, 아니면 쫌 이렇게 내가 뭔가 역할을 주고 싶다, 라는 그런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지금 이렇게 인제 어떻게 우여곡절 속에 제가 인터뷰를, 감히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돼가지고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아, 이곳에서도, 이곳에서도 뭔가 민족학교라던가, 민족학교가 30, 31년째 되고 있는데 민족학교도 정리 기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조금 들고요. 그 다음에 5월 관련해서도, 저는 이제 90년에 왔기 때문에 90년 이후 작년까지, 올해까지의 오월 관련 행사 이런 것들은 많이 참여도 하고 기획도 하고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기록, 기억을 점검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하면 정리가 되겠지만 그 이전은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 5월에 관련된 것도 인제 이렇게 국내에서 정리를 하러 오셨는데 자체 내에서 뭔가 기록을 정리하고 수집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이 펼쳐져 있을 거예요. 민족 학교도 낼 모레 곧 이사를 가게 되는데 이사 가 는 속에서 많이 자료들이 인제 어, 우려스럽게 잊어버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데 오늘은 인제 딱, 어제 딱 보면서 이런 것들도 나오더라구요. 이런 것도 자료가 될는지 모르겠어요. 그니까 제가 그리피스 팍(Griffith Park) 갔잖아요. 그래서 더, 더럽죠, 근데 96년도에요. 96년도에 천문대에서 인제 5·18 정신 계승 걷기 대회를 한다고 이렇게 했거든요? 근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니까 어...이때만 한 줄 알았어요. 근데 딱 보니까 이게 또 꾸질꾸질 해가지고 있더라고. 근데 이게 보니까 94년도야. 94년도치가 있더라고. 그러니까, 그니까 역사는 기억하는, 기억하는 자의 것, 몫이라고 했는데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역사는 역시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란. 그래서, 몰라요, 그찮아요? 저도 맘대로 기획하고 같이 가자고 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도 이게 첫 번짼지 두 번짼지 가물가물한데 이게 보니까 지금은 이건 안 하고 있지만 이걸 보면서 아, 또 이것도 기회 대는 대로 또 내년부터라도, 나 혼자라도 해볼까 라는 생각들이. 뭔가 상징적인 활동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 내년에는 그럼 나 혼자라도, 주위 사람들이라도 있으면 같이 하지만 혼자라도 이런 것도 다시 한 번 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어, 어, 이거는 오늘 아침에 갖고 나오는데 이거 보여주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지금 나도 가져가면 달라고 할지 모른다고. 근데 어떤, 여기서 저도 이제 찾아볼게요, 찾아봐서, 분명히 더 있을 거라고요. 되는 대로 드리고 저도 인제 이런 일들을 하게 돼서 기록물들이 생기면 서로 이렇게 전달해 드리고 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조사를 이렇게 많이 하시니까 그중에서 저희들한테 또 미주에서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으면 또 도움도 주시고 그랬으면 좋을 것 같구요. 그 다음에 인제 좀 이렇게 얘기를 드렸지만 가끔 저희들이 토박이도 오고 국내 관련된 인사 분들이 오고 이래가지고 강연도 오고 뭐 이랬는데 요즘 국내하고 관련돼서 연대하는 행사들이 거의 인제 얼마 안 돼요, 없어요. 특히 오월 부분에 있어서는 다시 그런 것들이 함께 시작해보면 어떻겠는가 생각이 들고. 내년이 35주년이니까 뭐 좀, 서로 이렇게 국내 단체와 미주 단체가 좀 연대해서 뭔가 문화행사를 함께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니까 저는 이런 것들을 쪼금씩 고민해보니까 지금부터 생각이 든다 이거죠.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기에 어쩔 수 없이 저는, 어차피 광주, 5월을 경험한 사람이고 또 거기를 활동했던 사람이고 또 여기 와서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어떻게 사람이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활동들을 해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5·18로 다양한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꼭 이 5·18 이 부분도 함께 꾸준히 이 미주에서도 알리고 오월 정신을 항상 살아있는 오월 정신으로 이렇게 하는 내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근데 저는 이제 5·18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한 장면이고 5·18만 정신 계승하고 막 이런 차원이 아니라 5·18이 가지고 있는 그 상황에서의 정신,뭐 예를 들면 주먹밥 정신이라고 우리가 그러잖아요. 서로 나눠먹고 이렇게, 그런 것들. 그런 정신은 광주에서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분명히 있어야 할 거잖아요. 그런 어떤 그런 정신은 분명 이 땅에서도 필요한 거고, 얘기해주고 싶고. 그 다음에 아까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그렇게 피흘려가면서 죽어있었지만 7년이란 세월, 10년이란 세월, 세월이 지나고 나서 명예가 회복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오늘날까지 오는 과정들이 하나의 승리의 과정들이 보이잖아요. 근데 미국 생활을 하면서 뭐 다양한 보이지 않는 인종의 문제, 계급의 문제,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도 계속해서 꾸준히 활동을 해나가고 그러면 분명히 개선될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을 우리 코리안은 역사 속에서 갖고 있고, 분명히 자랑스러운 한 역사로 가지고 있으니까 5·18을 바라볼 때 그런 속에서 힘을 얻고 여기서 활동하면서도 힘을 얻어가는 그런 5·18로서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민족학교가 그런 정신으로 활동을 한다고 저는 믿고 있고요. 앞으로도 민족학교,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그걸 잃지 않고 꾸준히 이렇게 갈 수 있는 그런 단체로 갔으면 하는, 제 개인의 바램이죠. 근데 시대와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 뭐 바뀔 수도 있는 문제지만 제 바램은 그중의 하나가 있어요.
면접자: 그, 인제 선생님께서 25년간 이곳에서 5·18 관련 기념식, 이곳에서 매년 이렇게 5·18 관련 기념식을 진행하고 그러니까. 광주는 광주 나름대로 진행을 하고 있고. 광주에서 늘 나오는 얘기가 인제 세월이 지나가면서 의미가 점점, 5·18에 대한 의미가 퇴색되기도 하고 또 인제 기념행사나 그런 것들이 너무 그런 인제 관행화, 박제화 되는 듯 한 느낌도 받고. 그런 비판적 시선도 조금 많이 저희들도 가지고 있어서 그거에 대한 고민들도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어, 이곳에서의 오월 기념식, 오월 운동은 선생님 쫌 평가하시기에, 25년간 쫌 평가하시기에 어떻다고 보십니까? 좀 변해야 할 부분이라든지 좀 더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든지.
구술자: 근데 참 그, 어... 뭐 질문을 하시면서도 이렇게 답이 쉽지 않을 거란거 아시면서 이렇게 생각이 드는데. 참 어려운 얘기에요, 어려운 얘기고. 35년 전, 어림잡아 그러잖아요. 34년. 이렇게 흘러갔고. 제가 지금 제 나이에 4.19를 생각하면 무슨 방송, 때가 되면 책이나 신문이나 그런 얘기 나오지만, 역사속의 한 장면이잖아요. 그니까 저야 그런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고 계속해서 이렇게 왔던 사람이지만 그런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의 30대, 40대들은 그냥 책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진의 몇 장면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미국에서 그쵸, 어떻게 하냐? 이거죠. 그러면 이제 여기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5·18 행사를 하게 되면 대부분 저 또래에 약간 미치거나 약간 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지 그 밑으로 20대 30대가 거의 안 모이죠. 그 어려움이 좀 있는데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도 해봐요, 인제 우리 기념 재단이 함께 고민을 해봤으면 하는 바램이긴 한데. 저희들이 자녀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중 고등학생들이 있는데 어, 그런 생각들을 해봤었어요. 역사 탐방. 일정 부분 여기서도 비용 좀 하고 재단에서 비용 조금 해서 역사탐방 할 수 있는 그 어떤 기획 프로그램을 해서 여름방학 때 뭐 보름이나 한달동안 한국에 나가서 우리 한국의 현대사를 좀 배울 수 있는 그런 장소, 그런 경험? 5·18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경험?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 후대들에게 좀 현실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5·18이 이런 거구나, 우리 부모님들이 이렇게 또 알고 지내왔구나 하는 그런 계기의 프로그램들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드라구요. 왜냐면 여기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여기서 인제, 5·18 기념하고 그러면 저 같은 경우는 5·18 영상을 꼭 틀어주거든요. 우리가 세월호를 겪으면서 잊지 말자 세월호, 잊지 않겠습니다, 얘기를 하고 있지만 저부터도 잊어가고 있으니까. 그니까 잊어불지 맙시다. 80년 5월을 항상, 아 그거 뭐 몇 번이나 봤어, 수십 번 봤잖아 이것이 아니라 5·18이라는 날짜를 통해서 한 번 더 보는, 그런 기회를 삼자고. 그래서 꼭 한번 씩 더 틀어주고 그러는데, 같이 온, 참석하신 분들에게 다 틀어주는데 그런 것들을 보는 우리 인제 십대, 십대들이죠. 십대들은 핸드폰으로 이렇게 게임하고 그래요, 보든지 말든지. 좀 보고,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서 그런 고민을 해봤었어요. 혹시 그런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내고 싶고 지금 뭐 범동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제 나이 또래에 있는 분들의 고민, 자녀가 있는 분들의 고민이 그런 거 있을 거예요. 아마도 그런 기획의 프로그램들이 나오면 또 함께 하면 그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봐요.

(TAPE 교체)

구술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이쪽은 이쪽이고. 그거는 뭐 내가 상관하고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5·18 가지고 있는 정신을 이렇게 우리가 잘 모아서 그걸 잘 알릴 수 있는 방식의 활동으로 할 수밖에 없다, 라고 저는 생각을 한다고요. 단순히 그냥 5·18 기념식 한번 하고 끝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니까 저기 앞에도 민족학교 들어오면 딱 윤한봉 선생님 사진 있고 거기에 5·18이 우리 역사에 의미가 뭐가 되는지, 하나, 더 놓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최근 들어서 우리 재단 저기 설립 추진위원회, 합수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5·18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라고. 그런 말씀을 재단을 설립하시면서 그 생각을 피력을 하셨는데 나는 분명히 나는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5월, 그걸 하나 추가 하고 싶어요. 5·18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라고. 그런 것들을 감내해가면서 할 수 있는 행사들을, 이거는 우리가 이번에 하면서 만든, 만들어 놓은 거고. 이것도 우리가 거의, 거의 유명무실 해졌지. 이름만 있는 상탠데. 그니까 내년에는 35주년이고 그래서 뭔가 쪼끔은 더 역량을 해서 앞으로 5·18을 이 땅에서 어떻게 더 잘 해낼 건가, 어떤 사업들을 벌일껀가에 대해서 한번 의견들을 모으는 자리? 또 그걸 되돌아보는 자리? 그런 자리를 내년에는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앞으로 그런 속에서 여기서 10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30년이 가도 5·18을 내가 얘기해주고 싶은 거. 아까 주먹밥에 대한 거, 5월 26일날, 27일날 산화해 갔던 사람들의 정신, 그리고 그걸 딛고 일어선 승리의 정신. 뭐 그런, 그런거는 시대를 떠나서나 지역을 떠나서나 다 관통할 수 있는 정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서 어떻게 풀어내든지 간에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거를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또 단순히 5·18을 정신 계승한다, 이게 아니라 그거를 담아내는 활동들이 우리 민족학교가 하면 된다, 그거죠. 단순히 뭐 5·18 정신을 계승하는 활동입네 이게 아니라, 그거는 다 포함되는 활동으로 민족학교가. 그리고 어차피 민족학교는, 이 민족학교를 세우신 결정적으로 세우신 분 중에 한분이, 막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인제 하셨지만, 결정적으로 하신 분이 윤한봉 선생님이시니까. 또 민족 학교, 그러면 윤한봉 선생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차피 민족학교는 5·18 정신을 안고가야 된다고. 그래서 민족학교 생활 속에서 공간 속에서 항상 5·18이 보여줄 수 있는, 인제 공간으로서 뭔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고. 인제 얼마 전에 그런 얘기도 했었었어요. 그, 이게 민족학교를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잖아요. 그러며는 민족학교, 그 어떤 건물 외벽이라든가 한 부분 중에 5·18 조형물 같은거, 합수형님을, 윤한봉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는 거라든가 5·18을 좀 정신을 어떻게 딱 보면 알 수 있는 조형물, 그림이면 그림, 이런 것들을 딱 세워놓자, 라는 의견들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그게 일 년 반, 2년 뒤의 얘기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고민하고, 또 우리, 홍성담 선배님이, 예술가도 있으니까 자문도 얻을 수 있으면 얻어서 민족학교 건물에 그런 것들이 세워졌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봐요. 단순히 행사 속에서가 아니라 건물 자체 내에서나 활동 속에서 5·18이 가끔 생각날 수 있는 그런, 생활 속에서의 5·18 정신 이런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일을 하는데 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off the record)
구술자: 한인회 같은 광고 문구가 있나 (자료 )다른 쪽에서 했던 건데 아무튼 그래요 여기에 이제 실질적으로는 안 나왔지 함께 했던 단체가 좀 진보적인 단체 빼버리고 이 사람이 그런 걸 한거지 다른 사람들은 빼버리고 같이 추진을 공동으로
면접자: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신 적이
구술자: 끝나고 같이 밥을 한번 먹은 적이 있었어. 그 단체에서 성명서를 이런 식으로 발표를 했다고 (자료) 여기서 이렇게 안 맞잖아. 이 내용의 행사고 이 내용의 행사로 할 수가 없잖아

면접자: 뭐 질문은 거의 지금, 제가 드리고자 했던 질문들은 대부분 좀 말씀을 많이 드렸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다른 또, 앞에 선생님께서 얘기를 포괄적으로, 아울러서 해주셔가지고 내용이 좀 중복이 될 수도 있겠다, 라는 판단이 쫌 드는데요. 지금 선생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서 관련, 그런 운동들을 진행해 오신 게 25년. 앞으로도 이걸 계속 꾸준히 선생님께서는 진행을 하시고자.
구술자: 바램이죠, 사람의 앞날은 모르니까. 녹음하고 저기 뭐냐 녹화되고 있는데 나 장담 못해요. 사람 일은 몰라요. 그니까 아, 저 사람 이렇게 얘기해놓고 일년 뒤에 달라졌다, 이러면 할 말이 없잖아요. 전 장담은 못하고요, 하튼간에 어...하는 데까지, 하는 데 까지, 하는 데 까지는 하고 싶고 그런 입장이에요. 이게 일년 정도 더 갈지, 10년이 더 갈지, 내가 죽을 때까지 갈지 그건 인제 장담은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어차피 제가 이렇게 미국생활을 살아가면서 참 힘들었을 때 많이 힘이 됐던 거는 5·18 그런 부분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게 견디는 힘으로 작용을 했었고, 또 대학교 생활할 때, 지금에 와서야 회복하고 그랬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맨날 최루탄 가스 맞아가면서 도망 다니고 이랬는데. 근데 그런 일을 한 경험이 있는데 극복하고 이렇게 오늘날까지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서 그런 어려움이 또 닥치면 그런 걸 떠올려요. 떠올려서 힘을 내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인제 힘을 내고 사는 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런 정신이 다른 사람에게도 좀 잘 이야기, 이야기가 되고 설명을 하면 그런 사람들도 피부로 와, 와 닿는 것이 저와는 틀리겠지만, 뭔가 견디는데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현재 이 민족학교 역사가 그렇게 가고 있는 거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니까. 자꾸 저기 윤한봉 선생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는데 저는 어떻게 보며는 미국에 와가지고 윤한봉 선생님을 만난 게 어떻게 보면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떤 현대사 속에서 그런 분들하고 잠깐이나마 같이 활동을 했고 또 왜 그렇게 행동 하냐고, 활동 하냐고 얘기도 들어봤고 힘도 내라고 얘기도 들어왔기 때문에 어, 그런 속에서 같이 기억이 많이 나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한다고 그래서도 합수형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기도 하고, 뭐 그런 얘기를 생각도 해보기도 해요, 뭐 막 그랬을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편한 대로 해라, 그랬을 것 같애. 뭐 그래서 저도 그냥 그런 맘으로 지금 이렇게 하고 있어요. 하고 있고, 지금 이렇게 하면서 제가 반성되는 게 인제 이런 게 있는데 이게 올해 저희가 34주년 기념행사라고 하긴 했는데, 인제 이런 걸 하면서 그동안의 했던 기록들, 보니까 2008년부터 쭉 기록이 되어있네요, 2003년까지. 2013년까지. 그럼 이전에 2006년부터 어 그것들이 빠져 있어요. 2006년에 토박이도 뭐, 왔었고 또 아까 걷기 대회도 하고 막 이랬었는데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보면서, 이게 인제 한줄 두 줄로 행사들이 적어져 있는데 이런 것들을 좀 더 구체화시키는 것들을 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 앞으로 행사를 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구체화할 수 있는 행사를 좀 해야지 않는가, 생각을 해야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네요. 반성입니다. 다음에 이렇게 또 뵀으면 좋을 것 같고 또 그때는 저가 조금 더 자료를 구비를 해서 도움을 드렸으면 하네요. 지금은 제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이렇게 말이 좀 길어지기도 한 것 같고 이렇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긴 하네요.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뭐 저희가 이번 조사가 이게 마지막은 아니니까요. 저희가 좀 이번 조사에서 좀 미진한 부분이나 부족한 부분은 인제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같이 좀 찾아서 계속 진행을 할 예정이라서요. 좀 그러한 부분들은 선생님께서 아까 말씀하셨지만, 어찌됐건 그 5·18과 관련된 미국 LA 지역, 특히 아니면 미국 미주지역에 행해졌던 5·18 관련 기록들의 대부분은 민족학교에서 대부분 가지고 있다, 라고 지금 하시는데 그런 기록들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이게 좀 잘 되어 있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들이 있구요. 그리고 이제 동포사회에서도 5·18 기념행사들이 꼭 우리 민족학교만 이렇게 중심으로 된 게 아니고 다른 단체, 또 한인회 또 다른 단체에서도 5·18 기념행사 같은 걸 하거든요. 그리고 또 거의 민족학교가 중심적 역할로, 민족학교가 빠진 행사는 5·18 행사는 뭔가 빠진 듯한 그런 기념행사로 인식이 되고 동포, 동포 사회 내에서, 그래서 인제 무슨 민족, 5·18 기념행사를 하게 되면 꼭 민족학교란 이름으로 같이 들어가는 그런 걸 많이 하는데. 최근 들어서 인제 따로 하는 진행하는 경우도 생기고 그래요. 그래서 이걸 굳이 제 개인적으로는 옳지 못하다, 잘못된 방향이다, 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 제가 잘 모르는, 국내 상황은 잘 모르지만 국내에서도 다양한 5·18 행사들을 하잖아요. 다, 다양한 계층에서, 다양한 지역에서 하잖아요. 그리고 원할 거 아니에요 경상도에서도 하고 서울에서도 하고, 제주도에서 하고. 이상한 단체들이 하든지 간에 하튼 간에 5·18정신이 우리 현실 생활 속에서 도움이 되는, 방향의 5·18 행사들이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 같지 않나요. 그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니까 꼭 민족학교가 꼭 끼어야만 5·18이 아니라 민족학교는 민족학교대로 꾸준히 5·18에 관계된 행사나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들이나 이런 것들을 꾸준히 해나가지만 다른 단체에서도 그런 것들이 또 꾸준히 하고 싶고 한다면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이 들고 또 그런 것들을 함에 있어서 민족학교의 어떤 조언이랄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함께 할 수도 있고. 앞으로의 어떤 동포 사회나 미주에서의 5·18의 다양한 활동들은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란 생각을 좀 해봐요. 글고 인제 저희들이 갖지 못하는 소중한 자료들도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곳에 활동했던 곳에서 분명히 또 소중한 자료들이 또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점차적으로 같이, 멀리서 오셨는데 그런 분들도 시간 되는 대로 모아질 수 있는 그런 것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면접자: 향후 오월 운동은, 특히 이쪽 지역 사회, LA 지역 사회에서 향후 오월운동은 좀 어떤 방향으로 좀 갔으면 하는 그런 좀 바람이나 생각들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인제 그 오월이 뭐 그, 민주화 과정에 독재정권에 있어서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 오월이 하는 어떤 결정적 사건의 진실의 문제를 보며는 그게 딱 보이잖아요. 이게, 이게 나쁜 정권이라는 것, 나쁜 사람이라는 것 딱 대비가 되잖아요. 근데 그런 것들도 확실히 하기 위해서 5·18 그런 부분이 함께 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있었죠. 미주에서도 분명하게 그런 역할도 5·18이라는 것들이 하나의 그런 형태로 치러지기도 했던 때가 있었구요.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것들이 희석화 되었다고 저는 쫌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5·18이 가지고 있는 어떤, 우리가 꼭 계승해야 할 정신, 그런 것들을 좀 정리를 해서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그런 것들을 이렇게 알려줄 수 있는 역사적인 고리를 만들어서 연결해서 삶에 도움이 되는 그런 활동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들이 좀 들어요. 그래서 특히 2세 3세들로 넘어갔을 때 저희 1세대들이 알고 있는 것도 2세 3세들이 보고 느껴야 할 과정들이 분명 다르기 때문에. 그렇지만 거기에서 흘러가야할 중심적인 정신 문제, 오월의 정신 문제는 1세나 2세나, 3세나 그대로 흘러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꾸준히 흘러나갈 수 있도록 여기 미국에서의 3세가 됐든 4세가 됐든 5세가 됐든, 백년후가 되었든 간에 아, 5·18하면 이것이었지, 아, 우리 엄마 아빠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 아, 민족학교가 그랬었지 하는 그런 것들이 연결될 수 있는 그런 행사나 사업들이 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의 뭐 어떤 시기가 닥쳤을 때 아, 5·18이 이랬고 이게 지금 이랬으니까 이렇게 연결해가지고 막 뭐 울분을 토해내고 필요하긴 하겠지만, 필요는 하겠지만 어떤 그런 것들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면접자: 오랜 시간 그래도 잘, 말씀을 해주신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질문을 했거나 선생님 말씀하신 부분 중에서 아, 이건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잘못한 게 아닌가, 내지는 좀 보완해서, 지금까지 했던 것 중 보완해서 말씀해주실 부분들이 있거나 하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하시고 인터뷰를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저도 지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제가 얘기하고 기억을 통해서 얘기했던 게 정말 정확할까? 이런 우려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제가 전적으로 제 기억이 옳고 정확하다가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애요. 제 기억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혹시 제가 말한 부분에 있어서 다른 분의 시각과 다른 분의 입장과 이렇게, 얘기들이 있자면 그런 부분들은 제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전제 아래 비교하셔가지고 정리하셨으면 좋을 것 같애요. 그리고 나중에 저도 그걸 보면서 아, 내 말이 옳았구나, 내가 쭉 잘못 생각했구나, 그것도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또 있었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또 제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웃음)
면접자: 말씀 잘 하시네요. 말씀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장시간 한 세 시간 가까이 지금 인터뷰 진행한 것 같은데요.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길주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이길주(LA민족학교 이사장)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6일 20시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과 관련한 이길주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 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오후 8시 입니다.
면담자: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구술자: 안녕하세요.
면담자: 편안하게 그냥 말씀 해주시면 될 거 같구요. 일단 선생님 그 태어나신 연도랑 출생지를 좀 말씀해 주시면..
구술자: 나이는 물어보지 않는 건데(웃음) 저 1945년생이구요.
면담자: 네 해방 될 때 태어나셨네요.
구술자: 제가 11월이기 때문에 저희 아버님이 저, 내가 태어난 곳은 중국 만주에요, 만주, 네. 길림성에서 났었어요. 그래서 인제 그때 못나오고 11월에 났기 때문에 해방하고 못 나오고 그 다음해에 서울로 왔어요.
면담자: 혹시 11월 몇 일..
구술자: 3일이요.
면담자: 11월 3일
구술자: 쯤 지났어요(웃음)
면담자: 엊그저께 생신이셨네요. 부모님이 계속 만주에서 사셨나요, 아니면 있다가, 조선에 사시다가 올라가셨나요.
구술자: 사실은 저희 아버님이 항일운동을 많이 하셨다고 그래요. 근데 이거는 제가 그냥 어머니한테 듣고 사람들한테 들은 거지 아버진, 저희 아버지는 전연 식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안 하셨어요. 어머니한테도 얘기 안 하고. 무슨 일 하셨는지. 하튼 굉장히 많이 인발브(involve)가 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본인이, 그니까 동경에서 동경의대를 졸업하시고 한국, 인제 그때 항상 말하자면 일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그때 지하 운동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인제, 한국을, 이제 졸업을 하시고 인제 한국을 나오셔서 서울 대학 병원에 인제 취직을 해서 인턴으로 다니고 그러시는데 그 형사들이, 그니깐 이 사람들의 리스트에 아버님이 올라와 있었던 거예요. 근데 이제 잡을 수는 없고 내 아버님이 굉장히 잡히지 않게 하셨다고 그래요. 그러니깐 이제 잡을 수는 없는데 인제 항일을 하기는 했는데 증거가 없고 그러니까 한국에, 서울에 와서 일은, 그 대학병원에서 일을 하시는데 계속 거기서 따라 댕기는 거예요. 경찰들이, 일본 경찰들이. 그래서 인제 아버지가 그 다음에 결혼을 하시고 내가 인제 여기서는 자식들을 키우고 그럴 수 없겠다. 경찰들이 뭐 계속 따라다니고 이러니까. 그래서 결혼을 하시고 만주로 망명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오빠가 둘이고 저가 셋째고 딸, 그다음에 남자 동생이 있어요. 남자 동생만 한국에 와서 낳았고 저희 셋은 만주에서, 길림에서 났어요. 그래서 길림에서 거기서 병원을 개업하시고 계셨죠. 그러면서 이제 거기서 중국을 통한 항일운동을 많이 하시구 인제 거기서 병원을 하셨으니까 이제 길림 병원이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하시면서 어 자금을 대셨던 것 같애요. 그래가지고 인제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뭐 밤중에 사람들이 왔다 가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절대로 얘기를 안 하시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아녀자가 알면 어렵, 힘들어진다고 그래 가지구 이제. 근데 이렇게 누가 왔다가 새벽에 가고. 손님이 그러니까. 인제 그게 나중에 인제 친구들이 얘기하고 이런 거 보면 그게 인제 자금을 댄 거예요. 그래서 뭐 그때 독립하고 해방되고 굉장히 많은 무슨 이런 대장, 장군들, 뭐 이러셨던 분들이 집에 많이 찾아 오셨었어요. 이제 설날이나 그때 되면 뭐 사가지구 오시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연관 시키는 거죠. 김한림 장군인가 뭐 그런 분들. 저도 잘. 아버님이 그런 말을 잘 안하시니까 인제 그런 걸로 볼 때 아마 그때 자금을, 독립운동, 항일 운동 자금을 대실 때 관계되는 여러 사람들이 인제, 인제 그런걸로 우리가 인제 아는 거죠. 아버님이 직접 말씀 안하시니까.
면담자: 선생님 말씀하실 때 형제들이 오빠 둘 있고, 선생님 있고 밑으로 남동생. 4남 1녀 시네요? 외동딸이..
구술자: 3남 1녀
면담자: 남동생이 한명이었습니까
구술자: 오빠 둘 있고. 동생은 저보다 세살이 어리니까. 걔는 서울에서 났어요. 근데 저는 인제 거기서 나서 고담 해에 나왔죠.
면담자: 그럼 만주에 대한 기억은 거의 뭐.,
구술자: 저는 전연 없죠 몇 달 때 왔으니까
면담자: 그럼 서울로 내려오셔서 서울에서 아버님 또 병원하신건가요
구술자: 네.
면담자: 그럼 서울에 언제까지 선생님은..그..
구술자: 저는 69년까지 있었어요. 69년하고 70년에 왔죠.
면담자: 대학, 대학까지를 다 서울에서 마치신거네요.
구술자: 네 대학 졸업하고, 대학 졸업하고 왔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 아버지 스토리가 재미있어요 저는 스토리가 없구요.
면담자: 아버지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선생님이 기억하시기에..
구술자: 아버지는 의사이셨는데 사회사업가이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굉장히 정의감이 저기 하신분이고 친구 분들이 하신 말씀은, 저도 그건 들었는데 자네는 너무 물이 맑아서 고기가 끼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아버지가 너무 청렴결백하시니까 인제 뭐 그런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그렇게 좀 말하시는 친구들이 있었고. 어, 근데 아버지가 굉장히 재미있어요.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동승으로 해인사에 들어가셨어요. 아버지 (웃음) 아버지 어렸을 때 인제 그 해인사 지주 스님이, 큰 스님이 탁발을 나오셨다가, 저희 가야에요, 거지 아버지 생가가. 그래서 거기 나와 보니까 어린 애, 아버지가 뛰어 댕기시니까, 뛰어댕기니까. 그 스님이 보시고 아 이놈이 가야의 정기를 다, 가야산의 정기를 다 받았다. 내가 저 애를 데리고 가겠다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그래서 인제 아버지가 셋,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셨어요. 그런데 이제 첫째는 아니니까. 그때만 해도 아마 스님이 아기를 달라고 하면 가문의 굉장히 영광 같이. 그런데 이제 내주셨나봐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내주셨나봐요. 그래서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동승으로 해인사에서 자라셨어요. 그러니까 국민 학교 같은 것도 안 다니셨죠. 거기서 한문을 공부하셨죠. 그래서 한문을 공부하시고 인제 그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 인제 결심을 하시고 나는 의술을 배워서 사람들을 돕겠다. 그래서 인제 일본으로 그냥 가셨던 거예요. 이제 거기서 고학을 하셔서 동경 의대를 졸업하시고 그러면 인제 그동안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오셔서 거주가 불편하시니까 만주로 인제 가신 거예요.
면담자: 공부를 굉장히 잘 하셨나봐요, 동경대를..
구술자: 아 아버지가 머리가 굉장히 좋으세요. 학교도 안 다니셨는데 가셔가지고 인제
면담자: 어렸을 때 그럼 그 서울에 내려오셔서는 쪼끔 기억이, 어렸을 때 기억이 나실 것 같은데요.
구술자: 그거는 전쟁서부터 조금 기억이 나죠 6.25, 6.25부터..
면담자: 그때 뭐 따로 어디 피난을 가시거나.
구술자: 피난을 갔었죠. 맨날 뭐 들어갔다 나갔다가 했었죠. 그러다가 인제 아주 인제 가야겠다고 그래가지고 마산, 부산으로 갔다가 마산으로 갔어요. 그래서 인제 마산에서 아버지가 또 인제 개업을 하셨죠. 그래서 인제 하셨는데 어.. 그러구 나서 인제 한국 서울로 들어오고 저 국민 학교 때 서울로 도로 왔죠. 수복이 되서 인제 와가지구 거기서 인제 국민 학교를 들어갔죠, 그래서.
면담자: 국민학교
구술자: 마산에서 국민학교 1학년 2학년을 댕겼든거 같아요.
면담자: 아아 마산에서 국민학교 2학년 다니시다가..
구술자: 그래서 방산 국민 학교로 왔어요. 저희 집이, 저희 집이 을지로였었거든요. 우리집이 어디였나 (웃음) 퇴계로 있는 데에. 방산 국민 학교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그 시장 안이었어요. 학교가 그래서 인제 거기서 인제 학교를 졸업을 했죠, 국민 학교를.
면담자: 방산 고등학교, 아니 국민 학교를 서울로 올라와서 2학년으로
구술자: 아마 모르겠어요. 2학년인지 1학년인지 뭐 하여튼, 하여튼 학교를 마산에서 댕긴 거가 기억이 나요. 산에서 이렇게 텐트를 치고 학교 당겼었어요. 1학년이었나, 근데 재수하고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2학년으로 들어갔나? 잘 모르겠네.
면담자: 중학교는 어디?
구술자: 중학교는 서울 사대부고
면담자: 사대부고.
구술자: 네 사대부중.
면담자: 아, 사대부중, 사대부고 이렇게..
구술자: 지금은 중고라고 그러나 옛날에는 캠퍼스도 다녔었거든요. 을지로에 있었고.
면담자: 그 사대부중 들어가셨던 연도가 그럼 오십 한, 57년?
구술자: 그거는 제가 64년에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으니까 빼면 57,8년?
면담자: 64년에 대학을..
구술자: 입학했어요.
면담자: 사대부중은 58년에 입학을
구술자: 네 모르겠어. (웃음)
면담자: 61년도에 고등학교를 들어가셨으니...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 때, 국민학교 때도 그랬겠지만 아버지가, 아버님께서 의사생활을 하셔서 가정환경은 그렇게...
구술자: 그렇지도 않아요, 왜냐하면은 저희 아버지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제 절에서 자라셨잖아요. 그니까 그때까지 큰 스님이 살아계셨대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데리고 가서 지주스님이죠. 불교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이미 병원을 하고 있는데 부르셨어요. 제가 국민 학교 때요. 해방되고 얼마 안 되가지고 내가 한 일곱살 여섯살? 학교 들어가고 금방 아버지를 부르셨어요. 스님이 그래서 대처승 무슨승 뭐뭐뭐 해가지고 싸우고 야단이 났었어요 그때. 아버지는 병원을 하고 계신대 큰 스님이, 그 다음에 팔만 대장각 있잖아요. 대장경을 저기 두는 각이 있잖아요? 집이 있잖아요? 그게 다 비가 세고 이게 뭐 물이 세고 그러니까 근데 또 스님들이 그때만 해도 이거를 어떻게 돈을 구해서 이거를 보수사업을 해야 하는지 전연 모르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절들이 없었던 시대에. 다 산에 있고 그래가지고. 그러니까 스님이 아버지를 부르셔가지고 니가 도로 와서 니가 이걸 맡아야되겠다. 그래서 인제 일이 많으니까 기와도 세고 니가 이걸 맡아서 니가 사회에 나가서 공부를 했으니까 페이업(pay up: 보답)을 해라. 그래갖고 인제 부르셔서 그때 들어가셨어요. 그러니까는 개업하시다가 말고. 그 해인사로 들어가셔가지구 거기서 해인사 주지스님이 되셨어요. 큰 스님이 넘기셨어요. 그래갖고 아버지가 졸지에 대처승이 되셨죠. (웃음)
면담자: 언제 들어가신지 기억이..
구술자: 글쎄 그게 국민 학교 2학년, 3학년 때? 오자마자? 그래서 인제 거기서 주지스님을 하시면서 그러니까 집에 잘 없으셨어요. 집에 계속 없으셨고 가끔 집에 오시고 인제 저하고 동생은 국민 학교 였죠. 인제 그런 게 기억이 나고 그래서 어머니가 굉장히 힘드셨죠. 뭐 살기도 굉장히 힘들고 지금은 크고 그랬지만 병원 하고 쌍임동에 살았어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병원을 하시고 하시다 하셨기 때문에 집이 굉장히 컸어요. 방이 뭐 한 열 개 쯤. 열 몇 개쯤 되고 그랬어요. 병원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 그런 데에 세 놓고 샆았죠, 저희가, 엄마가. 그래서 내 생각에 어머니가 그때는 전쟁 끝났으니까 다 다들 가난했죠. 돈이 어디, 없죠. 거기 가난했거나 천막 같은 데서 살았거나 아니면 그래도 굉장히 힘들었죠 다들. 그럴 때 인제 어머니가 방 세 놓고, 굉장히 다세대로 살았었어요, 저 어렸을 때. 방이 큰 게 많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인제 그런 걸로 사셨겠죠. 아버지가 돈을, 절에서 뭐 돈을 갖다 주셨겠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남이 뭐, 동네에서도 의사집 딸이다 그러고 뭐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 차이가 많이 났죠. 집이 있었던 사람하고 집 다 부셔진 사람하고. 근데 저희 집은 하나도 다치지, 우리집 우에까지 다 부셔졌어요. 근데 저희 집은 괜찮아요. 가도집이었거든요, 쌍임동에? 근데 거기에 무슨 뭐 굉장히 조금 부자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애요. 무슨 극장 단성사? 그런 극장집 주인도 살았고. 무슨 사이다, 칠성 사이다 주인도 그쪽에 살았고 그래서 인제 다 쪼끔 괜찮은데 그런데 내 생각에 그래도 굉장히 가난했던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집이 다 부숴져 가지고 저는 또 가는 거를 좋아해갖구, 그런 집에. 가서 잘 살구, 잘 놀구 밥도 얻어 먹구 그러면 너는 의사집 딸인데 이런 데 와서 밥을 먹냐, 나는 우리 집보다 그 집, 그런 집, 친구 집 밥이 더 맛있어. 그런 코멘트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요. 지금 생각하면..
면담자: 그 제가 알기로 선생님께서는 성악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보통, 그런 꿈을 가지고 계셨으면 중고등학교 때부터 요즘 같으면 준비를 하거나 학원을 다닌다거나 그런 준비를 하잖아요.
구술자: 예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는 춤을 좋아했었어요. 여기서 저기를 가더라도 춤을 추고 댕기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국민학교 때부터. 그리고 이제 노래도 하구. 그런데 이렇게 제가 말씀드렸듯이 전세를 많이 놨다 그랬잖아요. 그니까 거기 응접실 같이 큰 게 몇 개 인데, 왜냐면 진단, 진료실 이런 게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컸어요. 그런 방을 인제 렌트를 줬는데 나 국민 학교 때. 어. 거기 성악간데 피아노를 치시는 분이 렌트를 들어오셨어요. 내가 막 노래를 하고 댕기니까, 아니 그러고 피아노를 배웠죠. 그 사람한테. 인제 피아노 선생님이래. 근데 사대 부중 음악 선생님이 그분의 친구였어요. 그분은 성악 선생님, 성악가가 친구였는데, 인제 다 음악 하시는 분들이니까. 인제 그분이 인제 와서 인제 내가 막 노래를 그냥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질르구 댕기니까 어 쟤가 소리가 참 좋다, 하면서 성악을 해라 그래가지구 그래서 인제 사대 부중을 들어갔어요. 그 선생님이 거기 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그때 딴 데 있는데 그때 사대부중이 특차라구 그래가지구 딴 학교가 시험을 보기 전에 시험을 봤어요. 그러니까 뭐 누구든지 다 와서 시험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제 그때 40대 1 이었어요. 저희가 들어갈 때. 오로지 국민, 뭐지, 공립이었잖아요. 공립이고 남여공학이고. 근데 거기를 인제 와 거기가 좋다구 그 음악 선생님이 좋다고 걔 여기 보내야 된다고 그래서 인제 거기 시험을 본 거예요. 딴 데 다 지원을 했다가. 거기를 인제 특차니까는 시험을 보고, 근데 그때 그게 어떻게 됐냐며는 인터뷰, 그거 뭐지 면접, 면접시험만 겹쳐요, 딴 학교 하고. 그니까 이제 고걸 두개는 할 수 없는 거예요. 그치만 이제 실기 시험은 떨어졌는지 붙었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니깐 인제 아유 비싼, (141107_ 이길주 18:17) 인제 그래서 인제 붙었어요. 그러니까 애를 아유 고생시킨다면서 그냥 보내자 인제 그래가지구 제가 그 학교를 가게 됐어요. 그 전에는 그 학교가 있었는지도 몰랐어 (웃음) 그래서 아주 재밌어요 아주, 그죠? 어떻게 이게 이렇게 되는지. 그래서 인제 거기 고등학교 까지 나왔죠.
면담자: 그러면 계속 그, 그꿈을 가지고 그때부터 준비를 하신건가요? 중학교 때부터?
구술자: 그렇죠. 인제 피아노 레슨 하면서. 국민학교 때부터 피아노 치면서. 근데 제가 손이 작아요. 그래가지고 제가 어느 정도 피아노 레벨이 올라가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이게 화음이 많이 짚고 이게 되야 되는데 손이 굉장히 작아요. 그래서 그냥 맨마다 이거를 내가 늘리고 그랬는데 그래서 인제 피아노과는 못가는 거예요. 피아노 전공은 못해요. 그러구 인제 저는 춤을 좋아해서 어, 저기 무용을 하고 싶은데 그때만 해도 무용과는 아니, 못가는 거예요. (웃음) 그때 좀 그런 게 있었어요. 무용과는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인제 그다음에 인제 성악과를 간 거죠. 선생님이 인제 성악 하라고 그래서 레슨 받고 인제 고등학교 때부터 인제 개인 레슨 받고 그래서 서울 음대를 들어갔죠. 64년
면담자: 공부를 선생님도 꽤 잘하셨..
구술자: 아니요 그런데요, 저 공부 못했었거든요 학교 댕길 때. 그런데 저희 학교가 굉장히 실력이 있는 학교였어요. 우선 너무너무 공부 잘하는 애들이 왔었고 왜냐면 학비가 굉장히 쌌어요. 공립이라. 뭐 만약에 하여튼 삼만 원이래면 우리는 삼천 원 뭐 이랬어요. 근데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뭐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다 우리 학교로 온 거예요. 그래가지구 인제 학교가, 고등학교가 그니까 사범대학, 사범대학 있잖아요. 거기서 그 뭐지, 선생님 하러 온 거 있어요,
면담자: 교생실습
구술자: 교생실습, 그런 거를 하러 오고 그랬거든요. 그니까 인제 거기 모범된 학교였어요. 그 실험하는, 그러구, 그 다음에 근방 제일 좋은 사람들이 왔어요.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영어선,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믄 영어 선생님두 미국에서 직접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다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를 거쳐서 다들 가든지 그러니까. 영어도 지금 생각하니까 나 영어에 아무런 프라블럼(problem)이 없거든요. 지금도. 그거보면은 발음이래든지 뭐 그런 게 굉장히 실력이 있었어요. 저희 학교가. 그러니까 대학은 뭐 그냥 뭐 공부 못 했는 축이었는데도..
면담자: 학교가 워낙 중고등학교가..
구술자: 그게 교육이 참 좋았던 것 같애요. 그리고 굉장히 실력 있는 애들이 많고 선생님들이 참 훌륭하신 분들이 많았었어요.
면담자: 선생님 중고등학교 다닐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라든지 일화라든지 그런 게 좀..
구술자: 고등학교 때 4.19 나고 그랬잖아요. 그니까 그때만 해도, 아 아니다 대학교 때 났다.
면담자: 4.19가 중학교 3학년 때.
구술자: 아니다 중학교 때죠? 네 중학교 3학년 때 났죠? 참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같이 학생회장 했던 애가 음대를 같이 가가지고 그 생각을 하네. 그 인제 학생 회장 하고 그때 내가 인제 음대를 갔기 때문에 내가 지금 콘퓨즈드(confused: 혼란) 되가지고 있는데. 예. 그래서 인제 그런 거 할 때 그때만 해도 그런 거 몰랐죠. 전연 인제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고 그랬는데 어, 그냥 4.19 났다 그래가지고 어디로, 어디로 다 막혀 버린 거예요. 저희 학교가 그때 용산 같은데 있었거든요. 그러니까는 아닌데? 그때가 중학굔가?
면담자: 60년
구술자: 60년이며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네
면담자: 중학교 3학년..
구술자: 중학교 3학년 아닌 것 같은데?
면담자: 음대를 64년도에 들어가셨다고. 61년 62년 63년을 고등학교를 다니셨구요. 61년 62년 63년.
구술자: 이상하다. 왜 그랬냐믄, 내가 지금 생각에 그때 그게 우리 학교가, 그때 중학교가 글루 왔었나? 아 을지로 있다가 이게 옮겨갔는 거 같아요. 그래서 아마 3학년은 거기서 나왔을 꺼야, 저기 용산. 아니 용산이 아니고 이건 어디지? 용두동. 아우 저쪽에 어디였어요. 중학교는 을지로에 있었거든요. 근데 그게 딴 데 있었어요. 고등학교는. 근데 거기서부터 집에를 오는데 다 막혀버려 가지구 겨우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산넘어, 산넘어서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왔 던 생각이 나요. 그때가 4.19였어요.
면담자: 그때는 뭐 중고등학생들도 참 많이 참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학교 쫌 그런 분위기 있었나요?
구술자: 그렇죠 그러니까는. 근데 나는 지금 고등학교 때는 그런 거 생각 안 나구요. 4.19났을 때 집에 온 거가 너무너무 힘들게 막 하루 종일 걸어서 막 헤매고 헤매면서 집에를 온 생각이 나고. 그 다음에 그때는 우리가 삼선교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그 온 생각이 나고. 대학교 때는 데모를 많이 했죠. 대학교 때 데모를 했어요, 저희가.
면담자: 선생님도 직접 참여를 하신건가요?
구술자: 그럼요, 그거는 왜 그러냐며는 다 같이 가야되는 거야. 그래가지구 우리, 제가 얘기한 고등학교 친구가 학생회장을 하고 그래갖구, 음. 그 사람들까지는 뭘 알았지마는 우리는 전연 지금 생각하면 그런 거 없었던 것 같아요. 의식이 이제 우리가 뭐 해야되겠다 그런거 없었고 그냥 어.. 해야 되니까 다 같이 간 거예요. 수업 안하고 다 가믄 가야되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그렇게 해서 데모 하고 그랬던 생각이 나는데 제가 이제 정치적인 거는 제가 뭘 알았겠어요, 어렸을 때. 근데 이제 아버님이 굉장히 정치 좀, 아버지가 정치가 좋아서 정치를 하신 게 아니구 그래서 제가 스님으로 들어가셨다고, 스님이 아니고 주지스님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거를 펀드래이징(fund-raising)을 하다 보니까 어 인제 아 이게 도대체가 이 불교의 불교인이 정치적인 뭐가 있어야지 이게 어떤 발전이 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완전히 불교 스님들은 그냥 산에 그냥 있구 그렇기 때문에 인제 그래서 아버님이 그 펀드레이징 해가지구 그 저기를 하셨어요. 팔만대장경 대장각 수리를 다 하시구, 그리고 제가 이제 그런 생각나요. 금뺏지 같은거 이렇게 해서 그걸로 펀드래이징을 하시더라구요. 그거 달고 댕기면서 불교인들이 돈 낸 것을 인제 달고 댕기면서 했어요. 그러고는 인제 그걸 하시면서 아버지가 아 이게 어.. 정치적으로 인제 어떻게 좀 해봐야지 도저히 안 되겠다 그래서 인제 뭘 시작하셨냐믄 해인 대학이라는 걸 세우셨어요. 마산에. 부산인가 마산인가. 부산인가? 해인, 지금 마산대, 마산대학이 어딨어요? 아 마산이다. 그래서 저희가 거기서 마산 대학을 세우시면서 내가 이게 정치적인 뭐가 있어야되겠다 그러셔가지구 어 국회의원 출마를 하셨어요. 그 저기에서, 가야에서. 그니까 무소속으로 (웃음) 그러니까는.
면담자: 언제인지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그럼요 그거 생각나죠 그니깐 내가 고등학교 한 2,3학년 때, 3학년 땐가 그때 그랬어요. 왜 그랬냐믄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많이 못 보고 자랐어요. 인제 많이
면담자: 그럼 서울에 계시고 아버지는..
구술자: 예, 그래 가끔 오시면 가장 같이 오래 있었던 적이, 우리 마산에 피난 갔을 때. 아버지가 그때 개업을 하시면서 그 먹구 살아야 되니까 아버지가 집에 계셨어요. 고때 피난 생활 때. 그래가지구 그때 인제 아부지가 인제 눞혀 놓고 불교 얘기를 다 하셨어요. 뭐 달마 대사래든지 뭐 그런 거를 얘기로. 그래서 인제 그런, 그런거 다 그때 이제 제일 아버지를 가까이하고 한문 공부도 시키시구, 반야바라불, 반야바라밀, 심경 같은 거 다 외우게 하시구 이게 저 자선하는 거 자선하라구 어린 애를 갖고 그러셨어요. 그때 아버지 생각이 그르고 그 다음에는 별로 아버지를 못 보고 자랐어요. 다 그런 거 하느라고 댕기시니까. 그래서 이제 뭐 또 글쎄 안 되셨죠. 두 번 나가셨는데 안 되셨죠. 그때 뭐 다 그때만 해도 부정선거 굉장히 했었다고 해요. 그러니까는 뭐 인제 일가 친척인대두 고무신 받고 쌀 받고 그러고 안 찍는 거예요, 아버지를. 일가 친척인데두. 그래가지구 인제 하여튼. 그래서 아버지가 인제 만나시면은 굉장히 사회나 정치적으로 말씀을 인제 친구들인데, 아버지가 바둑을 참, 바둑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뭐 하여튼 바둑 친구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동네 친구들이. 그러니깐 이제 얘기하잖아요. 저는 이제 애니깐 옆에서 인제 그런 걸 줏어 들었죠. 그럴 때 인제 그래서 그때가 이승만 저기 대통령때. 그때 저 국민 학교 때였어요. 그래서 인제 그때 국민 학교 때 생각나는 거는 제가 좀 반항심이 많았던 것 같애요. 그래서 어, 학교에서 그거 모르실거예요. 어르신이 넘으신? 141107_ 이길주 28:22 이승만 대통령 생일 때는 편지를 쓰게 했어요. 국민 학교 애들 한테. 그 대통령이 오래 사십시오 뭐 어쩌구 뭐. 아주 뭐 어쩌고 그렇게 해서 써서 그거를 보냈어요. 굉장히 ?141107_ 이길주 28:36 (웃음) 그때 그랬어요. 그래가지구 근데 그때만 해도 제가 좀 이렇게 뭘 그런 걸 듣고 그러면서 이게 이건 아니다 해갖구 마악 엉터리로 막 비웃으면서 썼어요. 대통령에 대해서 뭐 막 비웃는 걸로 썼어요. 되갖구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겨갖구 그 저기 학생, 선생님 교무실에 불려 가가지구 벌스구. 제가 그랬던, 국민 학교 때 그런 생각이 나요. 그런데 고담에 뭐 중고등학교때는 그렇게 정치 뭐 그런 얘긴 들었지만 제가 뭐 데모에 선두 스고 내가 리딩을 하고 뭐 그런 거는 전혀 없었던 것 같애요 그때는. 대학교 때 데모 좀 했고. 그러고.
면담자: 그, 대학을 졸업하시구 바로 미국으로 또 가셨네요?
구술자: 졸업하구 졸업 4월 달에 3월 달에 하죠? 그러구는 제가 고 다음 해에 고 다음해 일월에 왔죠. 69년에 졸업하구..
면담자: 69년에 졸업을 하셨었나요?
구술자: 64년에서 64,65,66, 아니다 64년에 들어가서 1,2,3,4 8년에 졸업했다.
면담자: 네 68년에 졸업하신 거죠?
구술자: 그래가지구 내가 70년 1월에 왔어요.
면담자: 70년 1월에요? 그 여기에 유학을 오신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69년에 제가 학교 댕길 때 2학년 때부터, 2학년 때 선배 언니들이 영어 배우고 인제 용돈도 쓰고 그런다면서 미군 부대에 그 저기, 그 성가대가 있었어, 콰이어(choir: 성가대)가 있었어요. 미국 사람들 위한 처치가 있잖아요. 거기를 가자구 그래가지구 인제 따라갔어요. 2학년 땐 거 같어요. 그래서 거기를 다녔죠. 거기에 인제 거기가 어디냐믄 카이저, 캠프 카이저라 그래가지구 동두천 있는데 거기였어요. 근데 거기를 아침에 버스를 타구 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노래를 하구 저녁을 먹구 집에 오는 거예요. 버스루. 우리들이 다 그랬어요. 선배들도 있구. 가서 거기서 성가대를 했어요. 성가대를 했는데 어 내가 3학년 때, 내가 4학년 때, 그러니까 2년, 4학년때, 아니다 3학년 때 그 부대에서 그때 인제 그 저기 뭐야 각 고아원을 써포트(support), 후원을 했었어요. 그래서 고아원을 후원을 했었는데 어.. 그 고아원 애들이 한달에 한번씩 와서 노래를 했어요. 어린이 성가대죠. 그래서 인제 걔네들이 와서 노래 했었는데 그니까 인제 군인들이 인제 그렇게 된 거예요. 채플린(Chaplain: 목사)이랑. 왜 우리가 얘네들을 돈을 많이 주구, 그 월급을 다 받았으니까 돈이 꽤 되잖아요. 성가대를 다 돈을 주니까. 그러니까는 왜 우리가 뭐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을 데려다 ? 돈을 주고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 우리가 고아원을 써포트를 하는데 걔네들이 노래를 참 잘했어요. 왜냐믄 뭐 얼마나 연습을 시켰겠어요. 자기 이거 해주는 데서 해야되니까. 그니까 얘네들만 해두 천사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들 할 필요 없이 얘네들을 성가대로 하자. 그리고 얘네들을 더 도와주자. 그렇게 됐대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다 파이어(fire:해고)가 됐잖아요, 이제 우리 어른들은. 그때 음대 댕기는 사람들이 다 가서 했어요. 그러니까는 파이어가 됐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이 저를 픽업(pick up: 채용)을 했어요. 미스 리, 와서 애들 지휘를 해달라구. 자기들이 다 시키니까 그 음악적인 것만 해서 성가대 지휘를 좀 해달라. 그래서 전 지금두 왜 그 사람들이 저를 그때 뭐 다 잘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래서 인제 제가 인제 그거 잡을 맡게 됐죠. 그래서 제가 그거를 이제 3학년 4학년을 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남편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인제 우리 남편이 하고 이제 뭐 나는 인제 남편을 얘기하자면 얘기가 길어지니까. 졸업을 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야지 생각을 했는데 우리 남편이 뭐 어쩌구 그러니까 나는 일본 사람하고 결혼을 안 한다. 일본사람하고 했어요 제가요, 그래서 난 그 때 뭐 일본 일본놈이죠 우리가 뭐 일본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때 뭐 한일 그런 게 저도 반일 그런 게 굉장해. 저도 좀. 제가 저도 좀 이렇게 반항기가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도 또 그러시고.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인제 뭐 집에서는 뭐 나는 국제결혼을 할 생각도 안 했고 가라 그랬어. (웃음) 왜냐면 내가 저기 갈테니까 가서 어떻게 살겠냐 하면 나는 애국심이 너무 강해갖구 우리 남편을 이제 어, 자기를 좀 한국을 서울을 구경 시켜달래는 거예요. 그니까 나는 이거는 애국심이 너무 강해 가지구 내가 얘를 해줘야 되는 거야. 그래갖구 어떻게 되냐믄 내가 일요일 날 아침에 가서 집에 올 때 같이 나와요 버스를 타고. 그러믄 미 8군에서 자구. 용산에 있는 거 있잖아요. 거기서 자구 토요일, 월요일 날, 아 아니다, 토요일 날 나와서 거기서 나를 만나가지고 내가 인제 뭐 덕수궁 뭐 이런데 다 데리고 댕겼어요. 하며는 일요일 날 아침에 나랑 같이 버스를 타고 부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예배를 보고 일요일날은 일을 안 하드라구. 집에 올 때 또 버스를 타고 같이 오는거야 그리고 혼자 또 집에 가는거야 (웃음) 아니 이제 집에 같이 오고는 자기는 도로 부대로 들어가야 되니까. 그러니까는 나는 아무, 하나도 그런 생각이, 제가 좀 그런게 없어요. 남자 오빠들 사이에서만 자라서 뭐 이렇게 여자들 같이 남자를 보면 이상하고 그런게 없었어요. 그러니까는 이제 학교, 중고등학교때도 친구들은 쟤는 호박씨까는 애다 그러죠. 그러면서 시치미 딱 떼고. 남여공학이었으니까. 전혀 그런게 없어요. 남자니까 뭐 이런게 없는거예요 제가. 그냥 남자면 남자고 뭐 그냥 그런대다가 계속 계속 남녀공학을 다녔잖아요. 근데 지금도 그제가 그래요. 남자라고 부끄러워하는게 없어요. 그래서 인제 전연 그런걸 몰랐죠. 나보고 미국을 오라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그렇게 얘기는 안 하고 인제 학비 같은 것도 뭐 해주겠다, 이런 식으루. 후원자를 자기가 찾아주겠다 이런식으로. 그래서 이제 내가 뭐 그런거 받아갖고 가냐, 이제 가구 글구 난 집에서 반대하는 결혼 같은 건 안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랬드니 우리 남편이 미국을 오자마자 월남전이 그 전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월남을 발룬티어(volunteer)를 했어요. 지원을 하니까 인제 저희 남편이 덴티스트(dentist)에요. 의사가 월남에 가겠다는 일이 없대요. 다 빠지지 거기를 왜 가요 전쟁하는데. 근데 우리남편이 가겠다고 그러니까 뭐 완전히. 근데 가는데 조건을 서울로 도로 가는 걸로. 그걸 하고 일년을 하고 그래서 이제 일년 동안 월남을 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인제 졸업. 우리 어머니는 인제 내가 편지를 보내고 그러니까 남의 아들이, 남의 귀한 아들이 우리 딸 때문에, 내 딸때문에 전쟁터로 나가고 그러는데 1월 1일인데 어.. 밥이라도 먹이자. 그렇게 된 거예요. 우리집에서 처음에는 말도 않고.(웃음) 그렇게 점수를 따가지고 결혼을 하게 됐죠.
면담자: 결혼을 하시고 들어가신 건가요?
구술자: 구술자: 네 69년에 결혼을 했죠. 그리고 인제 70년에, 8월 달에 결혼을 하고 1월에 인제 미국으로 온 거죠. 그니까 그 무슨 비잔가 그런 걸로 온 거죠. 배우자.
면담자: 유학을, 유학을 공부를 계속하시려고 여길 먼저 들어오신 건 아니었었고.
아니에요. 그럴려고 그러고 있는데 인제 그렇게 돼갖구 들어와 갖고 내가 지금도 그러지 너 땜에 내가 공부도 못하구. 그때 혼자 와서 공부를 했으면 뭐 조금 더 잘 잘할 저기가 됐을텐데, 그냥 와가지고 뭐 살림 살았죠.
면담자: 그럼 70년 1월에 미국으로 좀 들어오셨는데 혼자 들어오신 거죠. 가족들 다..
구술자: 아니요. 나는 그냥. 우리오빠는 먼저. 우리오빠가 굉장히 나이가 여섯 살씩 많아요. 작은 오빠는 서울 의대 졸업하고 뭐 그런 게 있었어요 그때 뭐 그런 게 있었어요. 의사 해갖구 인턴 이런 게 미국에 오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오빠는 왔고 그 다음 해엔가 내가 왔죠.
면담자: 아아, 오빠되시는 분이 먼저 미국을 들어오셨네요.
구술자: 졸업하자마자 왔어요.
면담자: 그럼 가족이 다 들어오신 건가요?
구술자: 아니죠. 나만 온 거죠. 우리 오빠는 센트리스라고 글루 병원으로 갔고 고 다음에 나는 나 혼자 온 거죠. 식구들이, 식구들은 아무도 안 왔어요. 그리고 내 동생은 와서 공부를 했죠. 걔네는 UCLA에서 박사를 받고 그랬죠.
면담자: 처음에 미국을 들어오셨을 때 좀 분위기라든지, LA로 오셨나요? LA에 거주하셨나요?
구술자: 바루스? 일년 있었어요, 군대이니까 군인이니까. LA에 저희 시부모님들이 사셨어요. 그래서 이제 LA로 왔죠. 졸업, 졸업이래, 제대하고 LA로 왔죠. 무슨 얘기를 할려고. 그때 왔을 때는 그러니까 언제 온 거야. 70년대. 70년대에는 올림픽 이런 데가 한국 음식점의 냄새 맡고 찾아갔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길거리에도 한국 사람도 없고. 또 혹시 지나가면 쳐다볼 정도였고 그랬었죠.
면담자: 그때만 해도 여기가 한인들이
구술자: 없었죠,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 한국 뭐 음식점이 한 개 있었어요. 근데 우리 남편이 이제 나 한국 음식 먹고 싶어 한다고 이렇게 냄새 맡고 찾아갔더라구. (웃음) 난 또 한국사람이니까, 미국 사람보다 냄새가 좀 덜 저기 하는데 외국 사람들이 더 한국 냄새가 더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땐 그랬었어요. 뭐 굉장히 한국 사람들 없었죠. 그래서 인제 그랬엇는데 지금은 완전히 네..
면담자: 지금 그때 LA 오셔서 거주했던 곳이 이 인근이셨나요 아니면?
구술자: 그렇죠, 여기 저기 그 우리 친구가 우리 남편 어떻게 된 친구가 아파트를 갖고 있었어요. 놀망디(Normandy)라고 있어요. 여기 윌셔(Wilshire)에서 저 북쪽으루. 놀망디라고 인제 이렇게 가는 길인데 고기에 아파트가 있어서 거기서 살았죠. 얼마동안
면담자: 그, 그 민족학교 초반부터 선생님 좀 활동을 꾸준히 해오신 걸로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때 오셔서 이런 그, 이런 활동들을 쫌 할 수 있었던 계기 같은게 좀 과정 같은게 있으시면
구술자: 제가 미국에 70년도에 와가지구 71년에 애기 낳고 74년에 애기 낳구 그래갖구 십년 동안은 제가 살림만 살았어요. 시댁도 있고 그러니까. 이제 시부모 식구들 뭐 이런 것두 저기 하고 그래가지구. 10년 딱 살림을 살았어요. 그러니까 80년대부터 제가 노래를 하기 시작했어요. 교회 그 다니구 그러면서 그 교회 음악 같은 거 하고 그래서 인제 80년부터 그래서 인제 교회가 산타모니카(Santa Monica)에 있었어요. 선한 사마리아 교회라구. 이제 그 교회는 그 홍동근 목사님이라고 그 통일문제에 대해 관계하시고 이러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이 LA에 유일한 그런 정치적인 그런 거를 갖고 있는 그런 교회였어요. 그래서 인제 거기를 어떻게 하다가 가게 됐죠. 뭐 어떻게 이상하게 해소 거기를 갔었어요. 그래서 거기를 가서 인제 목사님 설교가 참 좋으시드라구요. 그때부터 목사님이 뭐 그때 저기 독일에서 있었던 뭐 저기 무슨 남북 회담 뭐 이런 것도 가시고 그래서 그때부터 그런 거를 듣기 시작을 했고 그래서 인제 갔을 때 거기 김상돈 장로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그 서울 시장하시다가 쫒겨 오신 분인데 그분이 거기 장로님이셨어요. 그니깐 인제 그분의 댁에 윤한봉 선생님이 오신 거죠. 거기서 거두어주셨죠. 그러니까는 인제 일요일 날 윤한봉 선생이 선한사마리아인 교회 내가 나가고 있는 교회에 오셨어요.
면담자: 그때 처음 뵌 건가요?
구술자: 그렇죠 그때, 그때 책 보셨는지 몰라, 왜 기념집 윤한봉 기념집. 저기 나온 거에 내가 몇자 쓴 게 있는데.
면담자: 아 그러셨나요?
구술자: 그래서 인제 맨 처음에는 『운동화와 똥가방』이라고 나왔었고 몇 년 전에 기념 생각, 추모집, 그런 게 나왔어요. 저거를 좀 써달라고 그래서 제가 그때 인제 어떻게 만났으며 어떻게 해서 인볼브 됐으며 하는 걸 쓴 게 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그래서 그 윤한봉 선생님 와서 교회에 인제 나온 거예요. 그 댁에 계시니까. 이분이 굉장히 진실하신 기독교인이니까 거기서 집에서 있으니까는 이제 일요일 날은 또 따라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인제 거기 김성철이라구 그때 인제 뭐 저 4.19 민주 학생 4.19 혁명 학생 위원회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에 그분이 거기 성가대 대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제 그래서 거기 내가 지휘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내가 십 몇 년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거기 성가대에 있으면서 그분은 인제 그런 민주화운동동 뭐 이런 거, 예를 들어서 반정부 뭐 그런 거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만 해도 그 조직적인, 조직이 없었어요. 이 사람들이 그냥 무슨 회의 하고는 그냥 4.19 기념하고는 끝나는 거예요. 3.1 절하고 끝나고 그게 연속되는 게 없고 그때 그 사람이 회장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보고 여기를 소개를 해준 거죠. 윤한봉씨를. 그리고 이제 제가 그 장로님 댁에서 모임이 많이 있었어요. 윤한봉선생이 있는 김상돈 댁에서. 윤한봉 선생님이 뭐 강의라고 그럴까 좌담회 같은 거. 그럴 때 인제 초대를 받아가지고 갔어요. 그래서 인제 그때부터 이런거에 눈을 뜨게 됐죠. 그 이전에는 정치적인 거에 제가 뭐 할 시간도 없었고 오자마자 애기들 십년 길르구. 그때부터 제가 노래를 하면서 교회를 나가면서 인제 그때부터 이제 그게 제가 사회활동이 시작된 거예요.
면담자: 그럼 80년 5월에 광주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소식은 전해 들으셧나요?
구술자: 구술자: 그럼요. 왜 그랬냐며는 고때 금방은 아니지마는 그때 인제 소식은 들었고 그래서 인제 윤한봉 선생님 오시자 마자 그 뭐야 그 신부님이 그걸 복권하셨다던가 사진을? 5·18 그 현장 사진을?
면담자: 네 독일에 있던 것을 이렇게 옮겨서.
구술자: 그래가지구 그거를 우리가 거기다 한번, 유니테리안 처치(Wilshire Unitarian Church)래는게 있어요. 윌셔하고 번몬에서 저쪽으로 가면 유니테리안 처치라는게 있는데 유니테리안 처치에 대해서 좀 아세요? 그거는 뭐가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가 없는, 그 장로교가 없는, 그 뭐라 그러나 그거를? 뭐 원불교같은 크리스천들 저기고. 참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그 사람들은 목사 뭐 이런 것도 없고 그냥 모여서 참선하고 얘기하고, 그러고 북한에도 많이 도움을 주고 그런 데 거기에서, 거기를 그러니까 오픈된 거예요. 그러니까 5·18 전시회도 거기서 했고
면담자: 그 전시회는 언제 했던 건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그게 언젠가 5·18 나고 윤한봉선생 오시고 난 다음이니까 금방
면담자: 81년, 2년 그 정도
구술자: 그런게 이제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민족학교가 83년에 세워졌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때 그런 게 생긴거죠. 나는 순전히 노래하느라고 그 전서부터 윤한봉 선생 오시기 전부터 뭐 3.1절, 4.19 그럼 이제 노래 해달라 그러믄 가서 해주고. 그러니까 그런데 가서 강연 듣고 내가 그래서 그런 거에 대해서, 한국에 대해서 저기를 갖게 된 거죠. 관심을 갖게 된 거죠.
면담자: 그 80년 당시 상황은 좀 기억나시는 대로, 뭐 특별하게 활동은 하지 않으셨더라도요, 그걸루 들었거나 동포 사회 분위기나 뭐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좀
구술자: 그때만 해도 내가 처음으로 인볼브하기 시작한데가 동포 사회에 관여가 많이 되지는 않았었어요. 그 다음에 제가 노래하면서부터 동포사회에 연계가 됐는데 어 그때 인제 저희가 이렇게 보며는 무슨 어려움이 있을 때 사람들이 더 일을 많이 하잖아요. 그러구 이제 더 뭉치구. 그래서 그 5·18이 났을 때는 특히 그 저기 그 전라도, 그거 뭐지, 뭐라 그러죠, 향우회.
면담자: 호남 향우회
구술자: 호남향우회, 그 호남향우회가 그때 굉장히 흥분을 하고, 자기네들 저기니까. 그리구 그때부터 인제 오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때그거를 봤던 사람들이, 대학생들도 오고. 그래가지고 이제 아주 생생하게 그때 누구보다도 그거는 내가 많이 봤죠. 그르구 윤한봉선생님이 그거에 대해서 5·18 그 광주 혁명에 대해서 강연도 여러 번 했어요. 그때 마다 이제 난 노래해야하니까 가서 들으니까, 들으니까 귀가 뚫리잖아요. 그래서 이제 순전히 노래 때문에 제가 관계가 됐어요. 그러다 원체 제가 조금 또 기질이 좀 그런 기질이 있어가지구.
면담자: 예. 그 이건 뭐 민족 학교를 그때 인제 LA에 83년도에 이렇게 만들때 왜 민족학교를 세우게 된 계기라고 해야 되나요, 이런 걸 만들고자 했던 그런..
구술자: 내가 맨들고자 했던 건 아니죠. 저는 그런 건 없었죠. 근데 이제 윤한봉 선생이 이제 일요일날 와서 이제 나를 봤을 거 아니에요. 저 여자는 어떤 여자냐, 그러니까 이제 그 문성철이라는 학생한테 저 여자는 어떤 여자냐. 그러니까 문성철씨 얘기가 뭐 그렇게 뭐 뭐지? 뭐라고 하나 다 잊어버렸다. 어, 깨어있는 거 뭐라고 그러죠.
면담자: 의식화
구술자: 의식화 되진 것 같지는 않은데 굉장히 좋은 사람인거 같다. 그래서 내가 리크룻(recruit)을 당했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한봉씨가 합수 형님이 이제 해서 그때 인제 이사로 인제, 그러면서 그런 거 연설하고 이럴 때 내가 인제 계속 인볼브가 됐죠. 그러니까 직접 주도하지는 않으셨지만 과정들을 죽 지켜보셨잖아요. 만들어지고 했던. 그 민족학교를 처음 설립하고자 했던 그런 목표라든지 뭐 목적이라든지 그거는 뭐 우리가 들고 나온 게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뿌리를 알아야 된다, 우리 민족적인 뿌리를 알아야 된다. 왜그러냐며는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뿌리를 알아야 된다. 우리가 그냥 미국사람이다 그러구 댕기는 게 아니라, 그리구 그때는 무슨 일이 시작했었냐면 라치키(latch key), 저기 그 애들이, 차일드라는게 있었어요. 애들은 목에다가 열쇠를 달고 댕겼어요. 그 저기 뭐냐, 아파트 열쇠를. 왜냐면 부모들이 와가지구 사실 그것이 법적으로 큰일나는, 엄마 아빠들 다 잡혀가거든요. 그게 알려지믄. 근데 뭐 그때만 해도, 그니깐 얘들이 목에다가 열쇠를 달고 댕기면서 엄마 아버지 없는 집에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애들끼리 있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일인데 그때 그런 사람들 많았어요. 그래가지구 그러면 그런 애들로 우리가 민족적인 이런 거를 가르켜야 된다, 그래서 인제 그게 취지였어요. 그니까 뭐 너무 좋은 취지지. 그 다음에 인제 그때 인제 내가 통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인제 우리가 우리나라가 인제 그 하나가 되야된대는거, 그리고 평등한 사회가 되야된대는 거. 저는 조금 정의, 뭔가 뱃장이 뭘 몰라가지고 배짱이 많아요. 깡이 많아가지구. 뭘 몰라갖구 깡이 많아. 근데 그래서 인제 그런 거 뭐 흥분하는 거죠. 제가. 그래가지구 뭐 시작을 한 거죠 그때. 그래서 6명 이사가 선택이 인제 되서 하는데 그때 어떻게 제가 끼게 된 거죠. 그래서 인제 그때부터는 정식으루 인제 역사강의래든지 뭐 정치적인 그런 거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 교육을 받게 된 거죠.
면담자: 그, 민족학교가 해년마다 5월이 되면 그 5월 관련 기념사업, 정신 계승, 관련 어떤 활동들을 꾸준히, 평상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꾸준히 진행해온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주로 인제 그 문화 관련된 쪽으로 이걸 이렇게.
구술자: 네 문화가, 제가 그때 인제 합수 선생이 계셨을 때 68년, 아니 90, 아니다 88년이었는 것 같애. 88년에 그때 인제 여러 군데에서 지부가 있었어요. 시카고래든지 뉴욕이래든지 필라래든지. 많이 있는데 한봉선생이 계신 관계로 인제 그 모든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깨우쳐졌잖아요. 이렇게 이런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러구 미국과의 관계, 그런 게 그때부터 인제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인제 저기를 하면서 인제 광주 혁명에 관계됐던 사람들, 있었던 분들이 계속 오시는 분들이 계시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뭐라 그럴까, 흥분을 한 상태라 그럴까. 썸씽 이즈 해프닝(Something is happening: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매일매일이 신나는 날들이었어요. 저한테는요. 뭐 정말 아무것도 모르다가. 너무너무 그냥 이게 정말 정의롭고 내가 너무 내가 맘에 드는 거야. 그래가지구 그때부터 인제 인권운동을 하기 시작한거죠. 광주 혁명 같은것도 인권운동 아니에요. 그래서 인제 저는 정치는 전연 물라요. 정치는 지금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정치인들도 모르는데 어.. 제가 저를 캐태고리(category), 구분을 한다면 휴머니스트(humanist)에요. 저는 인간 관계가 정의로워야 된대는거. 그거로 저는 구분하고 싶어요. 제가 전 정치가도 아니고 액티비스트(activist)도, 그걸 또 액티비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그죠, 운동가라고 할 수 있겠죠. 그걸 보고 행동을 해야지 되면. 그래서 이제 그런게 저는 굉장히 저하고 이게 제가 저기, 정말 투헌드레드 퍼센트 어그리(200 percent agree: 완전히 동의) 되는 그런거 였고 어.. (웃음)
면담자: 그, 주로 선생님께서 이렇게 5월 관련활동이라든지 꼭 5월 뿐만이 아니라 민족 학교에서 하셨던 그런 활동들이 있으면 좀 소개를 해주세요
구술자: 아. 얘기하려다 말았다. 그래서 이제 그때 한창 이렇게 고조되어가고 있을 때에요, 통일이래든지.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합수, 윤한봉 선생이 나라가 하나가 되야지 된다는 거 그런 거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통일, 통일 했지만 구체적인 뭐가 없었던 거죠. 근데 그때 더 이론적으로 정리가 되는 거죠. 우리들이.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어요. 근데 그래가지고 어.. 저기 뭐. 나는 아직도 합수씨가 나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냥 보면 씩 웃고 그러지
면담자: 나이는 더 어리셨죠.
구술자: 한두 살 어려요. 저는 근데 나이를 별루 그렇게 관계 아까도 얘기 했지만 좀 맞 먹으려구 그러는데. 모르겠어요. 난 나이 관계가 없는데. 굉장히 그것도 다 따지더라구요. 그때도 몰랐어요. 나보다 나이가 어린지도 몰랐어요, 저는요. 그냥 다 어른이라고 생각했죠. 나보다 많이 아시고 그러니까 어른이라고 생각했죠. 한참 후에 알았어요. 제가 어리, 밑이라는 걸 근데 저기 그 남북 가곡의 밤을 한번 해보시오? 그래요. 그래서 그러면 뭐 저기 뭐 좀 도와줄테니까 그거를 해보래요. 나보고
면담자: 남북 가곡의 밤을요?
구술자: 남북 가곡의 밤을. 그래서 88년에 했던 것 같아요. 왜 그냐면 88년에 남북 가곡의 밤을 굉장히 성대히 했어요.
면담자: 어디, 남북 가곡의 밤이라는 이름에서만 보면 남쪽 뭐 이렇게..
구술자: 그래서 사람들이 다 북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때 그럴 수가 없었죠. 그치만 이제 그게 아니구 그 우리가 그거를 구입을 했어요. 북한 노래를. 북한의 노래를 구입을 해가지구 여기서 그때 인제 합수 저기저기 윤한봉 선생이 다니면서 우리가 브랜치가 많았다 그랬잖아요. 그런데서 이런 통일운동이래든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민주화 운동이래든지. 그게 일어나니까 거기서 젊은 사람들 많이 리크룻이 됐잖아요. 그러니까는 거기에서 음악하는 사람들도 있구 그런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소개를 해주고 이름을 우선 줬고 그래서 인제 제가 그때 맡아가지구 LA에서 저기 했죠. 그래갖구 뭐 자리가 없어가지고 사람들 다 돌아가고 막 그 정도로 성황리에 했어요. 다 음대 나온 사람들이고 그래서 이제 내 친구들, 내가 아는 친구들이며 또 소개소개로 이렇게 해가지고 뉴욕 쪽에서도, 동부에서도 여러 명이 왔고 여기서도 여러 명이 참석했고. 그래서 노래로만 했죠
면담자: 북한에서 불리는 그런 노래를요?
구술자: 그 노래 하나 하고, 남한 노래 하나 하고, 북한 노래 하고, 이렇게 같이 해서 처음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래디오 코리아(Radio Korea) 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처음으로 북한 노래가 나갔어요. 굉장히 역사적인 일이죠. 그때는 북한 노래 이러면 뭐 말도 안 되는 소린데 그 때 이 사람들이 이걸 브로드캐스트(broadcast)를 했어. 그래가지고 사람들도 많이 왔고 선전도 많이 됐고 북한 노래가 어떤 건가 인제 궁금한 거죠. 근데 이제 그 노래하신 사람들은 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굉장히 수준 있게 음악회를 했어요 .이제 그거를 하고 나서 내가 89년에 4월에 북한을 방문을 했죠. 뭐로 갔었냐 하면 4월 축제, 봄축제에. 김일성 장군 생일 그걸 4월 축제래는게 있어요. 4월 10월 16일 해서 축제가 열려요. 그걸 동남아시아, 유럽, 뭐 다 그런 데서 예술인들이 한 4백명 이렇게 와요. 그래가지고 모든 문화 행사가 있는 거예요. 무슨 합창도 하고 노래도 하고 뭐 하여튼 굉장히 그게 저기 ? 141107_이길주 59:35 그때 내가 여섯명이, 여섯 명쯤, 근데 그거가 어떻게 해서 주선이 됐냐하면 내가 다니던 교회에 홍동문 목사님이 이제 부인되시는 분이 홍정자씨라고 그걸 맡았어요. 단장을 맡았어요. 그래서 이제 그분들은 북한을 왔다갔다가 하셨던 분이라 이제 해서, 내가 리크룻이 된 거죠 이제.
면담자: 북한에서 초청을 해서요?
구술자: 초청을 했는지 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인제 모으는 거죠. 예술인들을 모아가지구. 음악, 음악인들을 모아가지고 그 사람이 단장이 되어가지고 가는 거죠. 근데 그분도 굉장히 첫번이에요. 그게. 그리고 저도 미국, 해외 동포 중에서 간 사람이 제가 첫 케이스에요. 여섯 명이 가기로 했어요. 뭐 하는 사람도 가고 피아노 치는 사람도. 근데 이게 영사관에서 막 압박이 들어오구 어쩌구 해가지고 다 못간 대는 거예요. 나 하나 남은 거예요. 다 못가고.
면담자: 선생님에게는 뭐 영사관에서 뭐 압력이나 그런 게 없었나요
구술자: 제가 그 다음에는, 아니 저한테는 저는 뭐 그때는 한국 사회에 제가 인볼브가 안 돼 있었고 한국사람하고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도움이 됐던 것 같애요. 스크린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 저기가 없었고 또 한 가지 고마운 거는 저희, 제가 뭘 몰라서 깡이 쎄다고 그랬잖아요. 뭘 몰라 가지구 뭐 무서운게 없어요 제가요. 그러고 그러니까 혼자 갔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놀래는거야. 어떻게 거기를 혼자 가느냐 이러는 거예요. 북한을 어떻게 혼자 가느냐. 근데 저는 또 사명, 아니 뭐랄까. 약속한게 있으면 그게 뭐 내가 뭐 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떻게 되서 못가면 내 양심에. 사람들이 뭐라 그러니까 영사관에서 뭐라 그러니까 안 간대는 것은 있을 수가 없거든요, 제 양심에는요. 그거 하나 때문에 깡이 세요. 제가. 그래갖고는 다 안 간대니까 혼자래도 가야죠 어떡해요. 미국에서 예술단이 온다 그랬는데 저가 안 가면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는 가는 거죠. 혼자서. 그니까 우리 남편한테도 혼자라는 소리 못하고, 남편이 비행장에 데려다주는데 딴 사람들은 다 어디갔녜 (웃음) 뭐 몰라 뭐 따로 오나봐 그러고는
면담자: 혼자 가신건가요?
구술자: 혼자 그 홍정자씨랑 간 거예요. 홍정자씨도 처음으로 그런 걸 맡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간 거예요. 가서 4월제에 가서 제가 오로지 그때에는, 그때는 인제.
면담자: 아아, 아닙니다. 말씀 그냥 편하게 하십시오. 저희 시간이 뭐 저녁 시간이라. 혹시 뭐 다른 일정이 이후에 ?
구술자: 아니요, 아니요.
면담자: 그, 그래서 그 일본, 아니 북한을 들어가셔서 선생님이 하셨던 뭐 공연, 공연인가요 그런게
구술자: 그게 4월 봄 축제라고 그래가지구 각 나라에서 와가지구 음악회를 한 거예요. 근데 그게 본 거기는 뭐냐하면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축하하는 그거가, 여기도 백악관에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있는데 그게 점점점점 커져가지고 이게 그냥 그렇게 몇백 명 뭐 사오백명씩 막 모이는 음악회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인제 제가 간 게 아마 7횐가 그랬어요. 제 7찬가 뭐. 제가 이래요. 그런 게 전부, 전연, 7차 아니면 9찰 거예요. 그때 인제 처음 외국 해외동포로서 간 것도 처음이고, 하튼 남한에서도 간 적이 처음, 남한 사람이, 남한 사람이 간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갔을 때 제가 동창을 하나 데리고 갔죠. 얘는 왔어요. 왜냐면 자기 어.. 부인의 누가 어 저기 북한에 있다 그랬어요. 그래서 장인이 그걸 꼭 찾아봐달라고 그래갖구 그런 또 이 사람은 그게 있었어요. 가야금하는 음대 친군데 김동선이라고 활약을 많이 했죠. 지금 그래서 걔를 제가 지금 간 거는 그때 김영선씨라고 작곡하고 그러는 분이 있었는데 교회에 나오면서 알게 되가지고 그 통일에 그 사람이 통일 노래를 많이 지었어요. 민주 운동 같은 이런, 민주 운동 같은 그런 노래도 짓고. 그래서 그 노래를 제가 불렀죠. 그때 기회가 있었으니 그런 걸 부르고 그랬죠. 그래서 제가 꽤 재산이잖아요. 아무도 그런 걸 부르지 않는데 나는 그 통일에 관한 곡을 갖고 있으니까 성악가는 곡이 있어야 되잖아요. 곡이 있어야지. 그러니까 그래서 그때 인제 저는 처음으로 그니까는 그 통일에 관한 노래를 가지고 갔어요. 제가 그래서 그때 가보니까 다들 뭐 일본에 재일교포들이 예술인이 또 많이 와요. 많이 왔는데 다 뭐 무슨 뭐 저기 러시아 뭐 이런 데서도 오고 뭐, 그런 사람들이 노래를 뭐, 무슨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도 하고 뭐, 근데 뭐 전연 그 의식이 없는 그런 노래만 부르더라구요. 근데 다행히도 저는 가게 된 이유가 제가 가서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첫 번째 내려서 한 얘기가 난 노래 잘해서 온 거 아니다. 나는 통일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그 통일에 대한 염원을 북조선 사람들하고 하기 위해서 내가 온거지 난 뭐 내가 노래를 잘해서 내가 대표로 온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알아 달라, 인제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게 저의 생각이었어요. 내가 뭐 노래를 잘해서 가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 통일에 대해 그때 내가 그런 운동을 하고 있었으니까.그런 거에 대한 노래를 하겠다 그래가지고. 그래서 인제 거기서 인제 제가 처음으로 통일에 대한 그런 그거를 가진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좀 생각이 달라졌겠죠. 그때부터 제 노래를 갖고 또 다들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거를 제가 참 뭐라 그럴까. 에브리씽 퍼스트(Everything First) 뭐든 게 첫 번이었어요. 그리고 그게 참 보람이 있구 그랬어요. 그래서 이제 그때 갔다 와서 그 다음에 인제 8월에 저기 그 평화 대행진이 있었죠. 민족 학교 그거에. 글쎄 그때 이제
면담자: 이건 어떻게 계획을 하게 된 건가요, 평화
구술자: 평화대행진이요
면담자: 예 대행진
구술자: 그거는 제가 저는 전혀 관계를, 안 껴줬어요. 저는요. 저는 뭐 왜였냐면 그건 한총련 주류로 된거예요. 저는 그때 한청련의 멤버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한청에 대해서 잘 알거예요. 한청련 했던 사람들이 잘 알거예요. 심인보씨라든지 그런 분들이 또 저기 홍, 홍기완이래는 분 스케줄이 됐나요?
면담자: 아니요 그분도 안 되있습니다.
구술자: 왜 안 되있어요? 그분이 그때 아주 롸잇 핸드(right hand: 오른팔)이었는데. 5·18에 대한. 근데 굉장히 먼데 살아요. 여기서 두 시간? 두 시간 반? 그분을 좀 얘기를 하면. 근데 왜 연락이 안 됐어요.
면담자: 저희가 LA에서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이 5일밖에 안 주어져가지고
구술자: 그런 분을 미리미리 했었어야 되는데. 그래가지구 그분들이 다 해가지구 8월달에 갔죠. 가서 인제 대행진을 하고 왔죠.
면담자: 어디 어디를 돌아다니신 거예요?
구술자: 저는 안 갔어요. 저는 못 갔어요. 저는 한청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 그 기밀이 굉장했어요. 그때 임수경 가고 그랬을 때. 그래가지구 인제 그 다음에 고 다음 해에 4월에 제가 또 갔었죠. 그때 여러 명을 데리고 갔어요. 중창단 같은 걸 해가지고 가고. 제가 인제 89년에 갔다오니까 90년에 미주 민족문화예술인 협의회래는 게 생겼어요. 인제 제가 인제 그 통로를 뚫어놓으니까 그런 게 있어야 되겠다 그래 가지구 글쓰는, 문학하는 사람들, 뭐 또 음악 하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민족문화 예술인 협의회가 그때 발족이 됐죠. 그래서 이제 그 민족문화 그 예술인 협의회가 음.. 일을 많이 했죠. 뭐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협찬을 하고
면담자: 그럼 그렇게 혹시 그 협회에 모이신 분들이 규모가 어느 정도 몇 명 정도 됐나요.
구술자: 그게. 한 열댓 명됐었죠. 글 쓰시는 분들이 많았고 황지강씨라고, 황석영씨하고 같은 저기 친구들이에요. 그래서 그분이 인제 해서 그때 그 청산이 부르거든 그거 아까 얘기한 게 우리 민족학교 생기고 금방 했던 것 같애요. 청산이 부거든 그분이 각 저기 연출 해갖고 그때 제가 인제 거기서 인제 주인공 맡았죠. (웃음) 졸지에 그냥 음식해가지고 먹이러 갔다가 (웃음)
면담자: 이게 그 어떤 극
구술자: 그게 몇 년이었나 연극이었어요.
면담자: 연극이었나요 연극하고 노래를 같이 아우르시는 그런 거?
구술자: 아니요, 노래는 아니고 연극만 아무튼 됐던 거예요. 그러구 그 다음에 그 다음에는 미문예협 멤버가 되셨죠. 그분이. 그분이 다 해가지고 되가지고 뭐 많이 일을 했어요.
면담자: 그런 문화 공연으로 사회 참여를 하신 거네요.
구술자: 그래서 우리가 처음으로, 처음으로 통일예술이라는 책을 세권 발간, 3집까지 냈어요. 4집 째는 압수가 되가지고 못 냈어요. 그게 한국에 가서 프린트를, 인쇄를 해가지고 와야되는데 뺏겼어요. 원고를. 그래서 제가 북한을 한 네 번쯤 갔어요. 가가지구 노래하러 간 게 아니고 가서 노래 하러는 두 번 갔고 그 다음엔 인비트윈(in-between: 사이)에 가가지고 그게 어떻게 됐냐면 뭐 민족문화, 민족 예술인 협의회가 생겼으니까 이제 우리가 조직이 생긴 거죠. 그래서 그 이름으로 북한을 방문했죠. 가서 음.. 재료를 구해가지고 온 거죠. 거기에 인제 남쪽에 발표가 안 된 그런, 남쪽에 발표가 됐다가 금지된 것, 이런 것들은 가서 허락을 받아오고, 우리가 책을 낸 대는, 그러구 인제 또 발표되지 않은 것들 있잖아요. 그래서 갔을 때 그 사람들이 한 얘기가 첫 번째 요구가 정치나 이념에 관계없는 재료로써 교류를 하자 이렇게 됐어요. 아, 그거는 우리도 원하는 바다. 순수한 그 염원과 통일의 염원과 이산의 아픔 이산가족의 아픔으로만 그거를 교류를 그게 조건이었어요. 그쪽에서 내건 조건이었고 우리도 그거가 조건이었고. 왜냐면 우리는 예술인 협의회였고 정치적인 것뭐 이런 거 이념적인 뭐 이런 것 그런 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순수한 문학, 그러니까는 이산가족의 아픔이라든지 또 통일에 대한 염원 이걸로만 하자 그래가지구 그때 가서 재료를 가져왔죠 제가. 그때도 혼자. 그래서 인제 책이 인제 거기서 가져온 걸로 인제 책을 맨들었죠 저희가. 그걸 저기 인쇄를 해서 책이 세 권째 나왔고 그래서 제가 그것 때문에 왔다 갔다 많이 했고 그 다음에 예술인 협의회가 생기면서 음악적으로 인제 제가 인제 음악을 맡아가지고 가서 보니까 노래를 하면서 보니까 노래할 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한국에서 한국, 남한 가곡 같은 거는 노. 우리가 북한곡은 알지도 못하고. 우리가 같이 부를래면 북한 노래를 남한에서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우리가 아이디어를 냈냐하며는 북한에 그러니까 이념이 없이, 정치적인거 아닌 거 그런 거로 된 시, 그런 시로 가져와서. 그때는 남한에서 그런 걸 할 수 없을 때니까. 재미 해외 인제 작곡가들이 작곡을 하고 그니까는 공동 저기가 되는 거예요. 또 여기 있는 시, 그걸로 북한에 음악가들이 작곡을 하고 그렇게 되며는 하자가 없잖아요 이거 니네꺼다, 내꺼다 이런게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곡을 여러 곡 맨들었어요. 저희가. 그래서 그거를 가져가서 그 다음 해에는 인제 그 다음 해에는 중창으루 제가 데리구 갔죠. 남자하구. 여자는 간다는 사람이 없어가지고 거기서 하고. 그래가지고 참 정말 뜻깊었어요. 첨으로 통일이 됐었어요. 음악인들이.
면담자: 89년 90년 91년
구술자: 89년에는 저 혼자 갔다 왔어요.
면담자: 이렇게 세 번 그 이후로도 계속 이 활동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그 다음에는 계속 활동을 했는데 어, 저는 인제 개인적으로는 인제 그거 뭐죠 나 왜 이렇게 이름이 생각이 안 나가지구 뭐 남북이 같이 하는 그런 거 있었잖아요 그런 거 있었잖아요. 그 뭔가. 지금도 있긴 있는데 우리는 안 왔지. 아 여기 누가 있어야 되는데 내가 그런 거 몰라가지구. 이름이 그게 .. 아 그런 게 있었어요. 그게 있는데
면담자: 남북이 같이 하는 회담 같은 건가요?
구술자: 회담 같은 것두 있고 8.15에 했었어요. 그 저기 해외 여기도 있었구 한국에도 있었구. 아직두 있는 걸루 알고 있어요. 그냥 종북으로 좀 치우친 사람들이 하는 거. 아. 내가 그런 거를 말이 기억이 안 나요. 그래가지구 8.15 저기 광복 기념으로도 모이고 그랬죠. 그때 처음으루 그때 황석영씨 북한에 있을 때. 그래가지구 그거 처음으로 그때 8.15음악제가 있었어요. 그게 처음으로 남한의 음악가들이 갔었어요. 황병선이라고 가야금하시는 분
면담자: 이게 언제였었나요?
구술자: 그니까 그게 80, 아니 93년? 내가 그거 확실하지가 앉네요. 92년 아니면 93년이에요. 그래서 그때 인제 남한에서 처음으로 성악가들이, 그니까 성악가들이 아니야. 남한에서 처음으로 그 고전음악, 뭐지 우리나라 그거, 그 국악. 국안인들이 가서 황병기씨라고 가야금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단장으로 해가지고 그때 와서 우리가 만났죠. 우린 해외 저기로 가고 그 사람들은 이제 남, 남쪽에서 오고 그래서. 그래서 뭐 저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요. 그래가지고 휴전선에서 우리가 넘어가겠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데모도 하고 그래서 미국에서 간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야단이 났었지. 그런 좋은, 하여튼 참 정말 신나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던 해였어요. 80년, 90년도가. 그리고 아까 뭐 이야기 하라고, 뭐 이야기 하라고 그런 게 "청산이 부르거든"이죠? 말 못했다고.
면담자: 뭐 낮에 김준 선생님이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야기 못한 게
구술자: "청산이 부르거든" 그거를 못했다고 그랬죠? 그거 미문예협 우리가 한 거 민족문화예술인협회하고 그리고 저는 뭐 5·18에 관계되는 건 위원장도 했었고 그때 다 돌아가면서 하니까. 위원장도 했다가 제가 저기 그 뭐죠? 아유 나 이렇게 말이 생각이 안 나요. 지금도 있는 거 우리나라 그거 무슨 법 있잖아요.
면담자: 국가보안법
구술자: 국가보안법. 그거가 시정을, 폐지하라는 소리도 못하고 시정해야 한다고 인제 그랬다가 인제 조금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그때 그 해에, 내가 인제 위원장 했던 해에 그 주민 토론회라는 게 처음으로 있었어요. 그 때 하규완씨라고 회장이 되가지고 처음으로 친정부, 친남한정부적이 아닌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 회장이 됐어요. 그래가지구 그때 그거를 했었어요. 토론회를 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저보고 그걸 좀, 그때 제가 맡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이 뭐 그런 반공적인 것 그런 거에 대해서 저기 얘길 해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때 가서 그거 없애야 된다는 소리는 못하고 그건 재정비를 재, 거기가 되야한다. 거기 안 좋은 것도 많고. 예를 들면서 내가 인제 뭐 그냥 덤블론드(dumb blonde: 멍청한 미녀) 노릇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인제 뭐 여기 그냥 얘기하자는 건데 시리어스(serious)하게 그러지 않고 그렇게 얘기 했는데 거기 무슨 재향군인회 사람들이 와가지구 나를 그냥 때릴라구 지팡이를 들고 덤비고. 그것도 굉장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어요. LA에서. 근데 그게 또 라디오 코리아로 생중계가 되서 나갔어요. 그래 가지구 참 사람들이 그냥 막 몰려들어가지고 막 흥분하는 사람들, 빨갱이를 두둔하는 그니까는 뭐 이런 내가 뭐 누구도 죽고 누구도 죽고 내 아버지도 참형을 당하고 어찌고 그때 한번 발칵 뒤집혔었어요. 그래 가지구 그때부터 한 저기, 우리 사회에서 저기, 한국 그 저기 사회에서 거론이 처음으로 된 거죠 정식으로 퍼블릭하게. 그 우리가 이런 게 있어야지 되고 그 화해를 해야 한다고. 근데 그 사람들이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진을 치고 와가지고 인제, 인제 그 빨갱이가 하나 나와서 인제 민족학교가 그때는 그렇게 오해를 받고 있었을 때니까. 그래가지구 야단법석이 났지만 그것도 참 좋은 전환점이었어요. 인제 그래서 뭐 이 얘기는 인제 그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는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된다, 한국 커뮤니티도. 왜냐면 무조건 빨갱이 그러고 죽여야 된다. 뭐 이러니까. 그래서 그것도 아마 좋은, 좋은 깨달음이 됐었어요. 우리 모두들한테. 그래서 뭐
면담자: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됐나요? 그냥 그렇게.
구술자: 그건 인제 뭐, 주최 측에서는 야단이 났잖아요. 이거 내가 한대 얻어맞으면 어떻게 해요. 지팡이를 휘둘르면서 노인들이 나와 가지고 그러니까. 그래서 인제 다 짜가지고 온 거죠 자기네들이. 그게 굉장히 내가 나도 놀란 게, 내가 그냥 웃었어요, 웃으면서 자꾸 내려오라는 거예요. 나보고 피하라는 거예요. 그 정도로 막 살벌했어요. 그러니까 또 이제는 래디오로 다 됐으니까 또 인제 그 다른 인제 이런 사람들도 막 와가지고 인제 나를 보호해야 된다고 또 그러는데 다 내려가라고 했어요. 제가. 다 내려가라 그러구 내가 이거는 뭐 어쩌자는 게 아니니까, 나의 의견을 얘기하는 거니까 쪼금 남았으니까 마저 들어달라고 그르고 내가 그냥 끝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놀래가지고 (웃음) 여자가 그래서 나는, 저는 그렇잖아요. 그거 한 대 맞으면 그거보다 좋은 효과가 어디 있어요. 그러면 그거는 정말 이슈화가 되는 거예요. 여론화가 되는 거 라구요. 강연, 그거 연설자가 나가서 말을 하는데 자기네들 의견이 틀리다고 테러를 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그때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어. 내가 하도 태연하게 웃으니까 이 할아버지들이 놀래가지고 진짜 때리지는 못한 것 같아요. 뭐 그랬으믄 놀래가지고 내가 막 뛰어 도망갈 줄 알았지. 그래서 하여튼 그 다음에 만나요. 그 여기 그 사람들 있어요 몇명이. 그래서 그 사람들 뭐 하는데 인제 무슨 공식석상에서 만나잖아요. 내가 안녕하세요 그러고 인사하고 많이 잡수세요 하면 이 사람들이 피식 웃어요. 그래서 인제 그런 관계가 그때부터 많이 흐려, 흐트러졌어요, 많이. 그래서 라디오 코리아가 큰 역할을 많이 했고요. 그 다음에 북한에 다녀온 것도 라디오 코리아가 굉장히 많이 저기를 팔로우업(follow up: 후속보도)을 해줬어요. 그래서 인제 거기두 인제 사람 사는 데고 거기 예술은 어떻게 되고 있었나 거기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했고.
면담자: 라디오 코리아라는 게 그 라디오 방송
구술자: 지금은 그게 라디오 서울이 됐던가? 라디오 코리아가 그전에는 오로지 저기였어요. 한국 방송.
면담자: 예 이제 지금은 이름이 라디오 서울
구술자: 라디오 서울?
면담자: 없어진 건 아니죠?
구술자: 라디오 코리아 있는지 물어보세요. 저는. 방송이 두갠가 그렇게 되는데 하나는 라디오 서울이구. 라디오 코리아가 라디오 서울이 됐다고 그러든가? 뭐. 하여튼 그래서 그때 미디어, 그리고 그게 있었잖아요. 그다음에서부터 신문들도 북한에 대한 그런 걸 다루어 주셨어요. 오픈하고. 그전에 뭐 그건 타부였었죠. 말도, 말하면 다 빨갱이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그게 깨졌죠. 그런게 쫌. 그래서 인제 언론도 저기를 해주고 라디오 인제 그 뉴스 미디어도 저기를 하고 그게 굉장히 제가 당한 일중에서 저한테 굉장히 저기 기억에 남는 일들이에요. 그런 일들이
면담자: 주로 선생님께서는 그, 문화 예술 활동으로 주로 인제 통일운동이라든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그런 운동들을 꾸준히 전개해 오신 것 같은데요
구술자: 김대중씨, 김대중 선생님 오셨을 때 시국 강연을 했었죠. 정치 강연을 처음으로 했었죠. 풀려나서 쫌 있다가. 그때 저희가 민족 학교에서 강연회를 준비를 했거든요 합수씨가 그걸 해줘야 된다, 그래가지고. 그래서 뭐 다 우리가 해줬죠. 그리고 제가 그때 통일 노래 부르고. 그래서 인제 굉장히 좋았어요. 왜냐면 그때는 민주화 운동 그러면 이렇게 했었는데 인제 거기에 음악이 들어가고 시 낭독이 들어가고 음악이 들어가고 그러니까 좀더 다른 견지에서의 시국강연회가 됐었죠.
면담자: 그 예전에, 예전과 좀 비교를 해보신다면 선생님께서 비교를 해보신다면 그래도 80년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인제 이런 활동들을 준비하고 시작해서 쫌 어느 정도 성장해 가는, 문화예술가협이 활동하고 성장해 가는. 이 이후에 뭐 좀 흔히 얘기하는 민주정부가 쫌 들어서서요.
구술자: 들어서면서 직접 북한하고 대화를 했고 예술가들도 갔고 그랬어요.
면담자: 그런 교류들이 활발했잖아요.
구술자: 그래서 민족문화예술회, 민조문화예술인협의회가 잠재적인 해산을 했죠. 그때
면담자: 아 해산을?
구술자: 잠재적으로 해산을 했어요. 그때 경제적인 문제도 컸었구 그래서 우리가 그걸 뭐 정부에서 하니까 쫌 그게 좀 열망이 조금 식었죠. 우리가. 그때 못하게 할 때는 기를 쓰고 하다가
면담자: 근데 현재는 또 그런 게 또 사그라든 상태였잖아요.
구술자: 십년동안. 그래도 인제는 그렇게 절망적이지가, 잇츠 낫 데스퍼럿(It's not desperate), 그게 뭐지 아주 그냥, 그걸 뭐라 그러나 데스퍼럿, 아주 그냥 절박하지가 않으니까 그찮아요. 민주화래도 그게 그거지마는. 말은 민주화 된거 아니에요. 그리고 많이 나아졌죠. 그런 저기도 할 수 있고. 무슨 내가 깜짝 놀란게 뭐를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더라구요. 그래서 인제 많이 달라졌잖아요, 저희 때하고는. 저희때 민족학교가 생겼으면 10년 동안 저도 한국 못나갔어요. 그동안에 민족학교 관계 됐던 사람들 나갔다가 비행장에서 돌아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뭐 그런 식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그리고 또 이해하는 사람들도 좀 더 넓어졌고요 생각이 방송인들도 좀 더 넓어졌고요. 뭐 깡이 생겼다 그럴까? 뭐 좀 저기가 됐고. 어. 아마 그때에 진전하던 것에 비하며는 굉장히 슬로우한 거죠. 이명박씨에 들어서고 그러면서 굉장히 거꾸로 가고 있죠, 지금. 근데 박근혜씨, 박근혜 대통령은 할라고 말라고, 할동 말동하고 그러니까 (웃음)
면담자: 앞으로의 쫌 선생님이 생각하는 방향, 그 문화 예술과 관련한 예술 활동, 이런 관련한 운동들에 대한 방향을 선생님이 앞으로 방향을 제시해본다면?
구술자: 저는 뭐 이렇게 계획을 안 해요. 저는 그냥 그때에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있어서 하는 거지. 그냥 하는 거지. 난 이게 너무 하고 싶어 나 북한에 가서 너무 노래하고 싶어 난 이게 없구요. 지금은 민족학교가 주로 하고 있는 게 커뮤니티 서비스잖아요. 왜냐면 그거는 인제 그 정세 판단으로 봤을 때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대는 거죠. 지금 해도, 할 수 있는 그게 굉장히 폭이 없대는 거죠. 왜냐면 국가가, 정부가 한다고 나서고 있으니까. 그게 그거를 제치고 우리가 가서 북에서도 저희를, 그래서 내가 갔을 때 민족문화예술인 협의회가 결성이 되가지고 그 이름으로 갔잖아요. 그게 갔을 때는 처음으로 그 북한에 그 예술인 단체, 거긴 그게 굉장하더라구요. 그게. 그게 그 저기 자매결연? 이렇게 된 거 그거 뭐라고 그래요? 같이 이렇게 서로 이거를 교류를 하기로 하는 협의 있잖아요. 그게 뭐지? 처음으로 그거를 맺었어요.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거죠
면담자: 협약?
구술자: 협정은 아니고 어우 나 말이 생각이 안나. 그니까는 같이 인정을 한 거죠. 해외에 문화협의회를 하나의 단체로 인정을 해준 거죠. 거기서 그래서 너희들이 하는 거는 우리가 협조를 하고. 이렇게 하겠다는 게 정식으로 그게 됐죠. 그래서 우리가 그때 그게 굉장히 그게 처음이에요. 지금도 없을 거예요 그런 걸 맺은 저기는요. 그런데 아깝게도 그게 인제 그래서 이게 챙피한 얘기지만 아쉬운 얘긴데 제가 그때 그만둘 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죠. 그, 우선 첫째로 경제적인 부담도 많았고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고. 그런 것이 필요한, 우리가 나서야 될. 정말 뭐 우리가 서울에도 못갈 정도까지 나서야될 그런 절박한이 없었고. 그다음에 저 개인적인 이유로는요. 제가 뭐 노래를 세계적인 조수미 같은 사람이 되어가지고, 조수미 누군지 알죠? 그런 사람이 되가지고 간 내가 할 수 있으면 내가 혼자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그리고 인정을 받는 가수래며는, 성악가라면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죠. 제가 혼자 간다 그러면 되죠. 그게. 그치마는 그게 그렇지가 못해요. 제가요. 그렇기 떄문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백만장자가 되가지고 돈을 몇 백만불씩 쓸 수 있는 재력이 있다면 아이 쿠드 두댓(I could do that) 아이 쿠드 헤브(I could have) 왜냐면 나는 따른 사람들을 다 해가지고 할 수 있으니까. 서포트를 하고. 그런 것도 안 되죠. 예술가적인 실력으로도 내가 안 되죠. 그래서 저는 개인 그거는 그거예요. 그치만 누가 알아요? 내가 필요하다며는, 내가 해야된다며는 뭐 사람들 많은, 아 또 그 때 왜 우리가 고만 뒀냐면 모든 단체들이, 기독교 단체들이 또 들구 나오는거예요. 지네들이 북한 저기 한다고, 선교 한다고 그리고 뭐 막 나서고 가고 뭐 이러니까 우리가 거기 낄 수가 없더라구요. 그러니까 하겠대니까 잘 하시오 이거지. 거기에 치고 받으면서 그거를 할 수가 없드라구요. 그리고 북한에서는 볼때 보세요. 그런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들을 하죠. 우리같이 정말 마음만 갖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환영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래서 그런 자책적인 결론, 그런 것도 우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잠재적 해산을 하고 그러고 끝났거든요.
면담자: 앞으로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게 다시 쫌 뭐.
구술자: 그게 통일에 관한 거라면요, 제가 가서 절실히 느낀 거는 같이 부를 노래가 있어야 되요. 그래서 지금 그렇지 않아도 그때 작곡했던 그런 거 그런 걸 다시 좀더 해가지고 그거를 출판을 해서. 그때 우리가 한건 통일 자장가라든지 뭐 이런 거였거든요. 그니까는 남북의 전연 관계, 뭐 트집 잡을 게 없는 그런 가사로 된 곡이었거든요. 그리고 합작이니까, 합작 작품이니까. 뭐 여기서나 거기서나 그때 가서 참 저기했던 게 보급을 해야 되, 그러니까 북한은 그냥 보면 그거 하나만 보여주잖아요. 그러니까는 그때 뭐 하루 종일 그거를 보여주는 것에요, 예술단을 한 거를요. 그러니까 그 노래를 이 사람들이 다 외우는 거예요. 제가 가서 한 노래들도 뭐 직녀에게, 문병란씨, 그거 그런 것도 뭐 다 외워요. 그리구 그때 세 명이 같이 나갔는데 인제 한 명은 못 구했어요. 앨토를 못 구해서 거기서 인제 거기서 서플라이(supply: 조달) 해서 앨토가 해가지구 했는데 사람들이 그냥 길에 댕기면서 아무 집에나 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러구 그냥 막 노래해주고, 그리고 막 노래 해주고 우리가 가져온 통일 노래. 그리구 우리가 프린트를 많이 해가갖구 많이 돌렸어요. 그 노래를요. 그래서 이제 그게 쭉 계속이 됐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저희가 힘이 모자랐던 거죠. 그래서 그냥 그거는 합창, 중창단 가고 그런 건 한 번에 끝났죠. 고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못 갔을 거야. 사람들을, 사람 구하기도 참 힘들어요. 그랬는데 이제 앞으로는 제일 절실한 게, 예술인들이 해야 되는 게, 어.. 서로들 익숙해져야 되요. 왜냐면 벌써 말도 다르잖아요. 말도 다른 데 말도 다른 말을 써요. 완전히. 그것도 굉장히 문제고 그다음에 문학, 예술 그러니까 예술 음악예술이나 무용, 그런 거가 전연 다른, 그러니까 북한에서 한 거는 북한의 그거는 볼 때 뭐 중국적인 그런 쪽으로 많이 흘러가고 있죠. 의상이라든지 그런 것도. 근데 인제 몇 번 남한에 왔었잖아요, 북한 사람들이. 그래서 인제 그거를 많이 배워갔드라구요. 그래서 옷도 인제 그렇게 입구. 그러니까 제가 갔을 때요, 할머니들이 울어요. 제가 처음 갔을 때 한복을 가져갔거든요. 그래서 한복을 입으니까. 거기서는 음악 예술이래는 게 뭐에요. 모든 예술이 다 생산을 위한 산업 예술이었어요. 그러니까는 그림도 풍경화는 고전적인 산수화는 있는데 현대 그런 거는 전연 없는 거 추상화 같은 거는. 상상도 안 되고. 그 순수 예술이 없는 거예요. 그 인제 다 뭐 포스타 같은 거. 그런 거는 잘 되 있죠. 그래서 그런 거였었고. 음악도 속도가 무지 빨라요. 생산을 하는데 힘을 주는 그런 음악예술이었어요. 그르고 인제 무용도 우리나라의 선이래든지 한국적인 게 없구 그냥 이렇게 저고리도 그냥 중국, 이렇게 해갖구 그냥 마악 이런 거. 그 우리나라의 우아한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한국은 너무 발전을 했어요. 이 음악 예술이, 무용이 의상이나 이런 게. 그게 요새 그러니까 뭐야 완전히 사치화 됐잖아요. 그르고 생각을 해보세요. 내가 한국의 드라마를 많이 봐요. 근데 거기에 나오는 거 보면 그게 몇백년 전 일인데 옛날에 그런 옷, 분명히 없었어요. 뭐 여기 막 수놓고 뭐 이거는 말 도 안 되는 한복이 옛날 한복이 아닌 거야. 그렇게 발전을 했잖아요. 그래서 이거는 무슨 파티복으로 발전을 한 거예요. 북한은 또 너무 그런 거는 박물관에다 너 놓고 전연 거기에 대한 발전이 없었어. 그래서 이게 양극화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술 하는 사람들이 한복을 입지를 않은 거예요,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래갖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가 옛날에는 저런 옷을 입었다. 한복에 그 짧은 치마, 유관순 언니 입든 이런 꺼먼 짧은 치마에 흰 저고리, 이런 것만 있지. 뭐 이런 우아한, 그런 게 없어졌어요. 그때. 그러니까 할머니들이 앞에 우셔요. 그 나중에 하는 사람들이 이 선생, 저 사람, 저 할머니들이 우시면서 저 할머니들이 옛날엔 우리가 저런 옷을 입었었다구 그랬더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정말 너무나 다른 나라가 되고 있는 거,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 가고 있잖아요? 근데 요새는 뭐 운동, 인제 스포츠 계통으로 인제 되니까 저희가 좀 이게 옷도 쫌 더, 그거는 일본에서. 일본에서 그게 가는 거예요. 그 이런 디자인들이요. 치마도 이렇게 막 속에다 해갖고 패티 코트 입고 그러는 게. 그렇고 우선 음악적으로는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어야 되요, 거기서 하는 게 고작 우리의 소원은 통일하고 봄의 고향하고 그거밖에 없는 거예요. 딴 거는 다 안 되요. 그리구 이렇게 보니까 저도 그때까지 의식이 없었어요. 그런 데에 대한. 왜냐면 그리운 금강산을 같은 걸 가서 막 부른 거예요. 근데 거기 가사를 보면 짓밟여진 지가 몇 년인가 백두산이 완전히 반공이에요. 가사를 다 바꾼 거예요. 남한에서. 근데 그래서 내가 이걸 갖다줬드니 가사 바뀐 게 말도 못하게 많아. 완전히 반공으로 가사를 바꿔놨어. 내가 노래를 부르고 한다면서 그거를 캐치를 못한 거예요. 근데 한국 사람들이, 아니 남한 사람들이 가서 그런 노래를 부른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그걸 부르게 하겠어요. 못 부르게 하죠. 근데 이 사람들은 왜 못 부르게 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부를 노래가 없어요. 가며는요. 그래서 특히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이게 남한 노래다, 북한 노래다가 아닌 노래. 그죠? 우리가 같은 감정을 노래할 수 있는 노래. 그거는 굉장히 시급해요. 그러구 제가 항상 얘기하는 게 그래서 대중화적인, 대중적인 노래를 만드는데 북한에서는 작곡자들이 한사람이 작곡해갖고 이건 누구 작곡 이렇게 안 해요. 그기 그룹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자기네들 그룹이 다 뭐 가사도 첵업(check up: 확인)하고 하면서 같이 맨들어요. 그래서 그런 게 제가 참 남한하고 남한하구 틀린거라고 그르구, 그러면 이 노래는 부를 수 있는 음역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보통 사람들이 불러야 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이 나라는 한국 노래를 보며는, 제가 좀 여기서 노래하고 그랬으니까 뭐 좀 부를라고 새로 사가지고 오며는 이사람들이 도대체 이 노래를 어렵게 하려고 작정을 하고 뭐 괴상 망칙하게 일부러 지어 논 노래들이야 다. 그것이 멜로디가 이렇게 흘러가지고 우리 감정이 이렇게 되는 노래가 참 드물어요. 특히 요새 노래를 보면은 어떻게 이렇게 거지같이 작곡이 그런 식이야. 전연 다른 거예요. 거기는. 그래서 완전히 노래의 음역이 어떻게 되냐면 동요를 만들면 이거는 애들이 부르는 노래니까 이거는 어떻게 되야 되구 말은 어떻게 쉽게 해야 되구 그거는 굉장히 제가 샤킹(shocking)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지금부터래두 그런 생각을, 만약에 우리가 할일이, 음악 하는 사람들로써 의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 문화의 그거를, 교류를 해야 회는 거예요. 그래갖고 이거는 우리 꺼 그런 게 아닌 거, 그래서 통일이 되며는 제가 항상 느끼는 게 정치가들 내일부터 통일, 그러믄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되지, 되겠지요. 그러지만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죠. 그러니까는 그것이 되기 전에 민족적인, 사람들의 통일, 마음의 통일, 그게 뭐 이론이 아닌, 아, 우리 동포네, 같은 민족이네. 이게 너무 틀리잖아요, 지금. 이제 통일이 되보세요. 이거는 완전히 뭐 요새 그런 얘기 좀 나오대요? 실업자가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 와서 할것이 그게 없다는 거지. 그거밖에는 없다는 거죠. 그러며는 어떻게 되느냐 이거지, 종살이하러, 다 종살이 해야된대는거지. 오죽해요. 또 남한은, 그런 경제적인 경쟁이. 거 살아남지 못해요 이 사람들은. 왜냐면 여지까지 다 해줬잖아요. 다 수령님 아버지가 해주고 다 좋은데 재밌는게 술을 한잔, 운동하를 하나 줘도 우리는 부모님들께 감사하잖아요. 이거는 수령님 아버지가 주신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는 너는 수령님께 감사해라 이렇게 된다구. 그러니 그 사람들이 커가지구 수령님을 뭐 괜히 그러는게 아니에요. 얘네들이 뭐 어쩌고 그러는데 정말 감사한 거예요. 그게 뭐 이렇게 안 그러믄 다 어떻게 되서 그러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김일성 수령, 거 저기 일단 그랬어요. 그거는 직접 내가 느꼈어요. 하루빨리 그거를 교류를 해야지 되는 거예요. 통일이 되기 전에 우리 마음이 왔다갔다 하고 그러고 제일 중요한 거는 뭐지 그거, 북한을 대접을 대접을 해야되지. 이퀄로 대접을 해줘야지 된대는 거예요. 왜냐믄 그게 한가지 있었는데 북한에 많이 갔다 온 사람들이 앉아있기가 미안할 정도의 발언을 많이 해요. 하 그지같이 살더래는 둥 뭐 어쩧대더래는둥. 근데 알잖아요. 우리가 알면되지 그거를 그런 공식석상에서 그런 예기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왜냐면 ? 하고 같애요. 예의를 지켜야되는 거예요. 그러구 이렇게 보면은 남한한사람들이 할씬 잘 살고 그러잖아요. 북한 사람들보다, 그거는 뭐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러면 가진 사람이 베풀어이죠, 그게 꼭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이 관대해야죠. 그거를 업신여기고 그러믄. 굉장히 그런 말언을 많이 해요. 그거는 정말 우리가 말을 해야될말 안해야될말을 정말 우리가 몇번 생각을 하고 해야지되는데 사람들이 와서 그냥 뭐 하니까 북한에서 그러니까 자꾸 규제하는거예요. 못 받게 하고 그럼 그거를 너는 왜 이렇게 그지같이 사냐? 가서 그러믄 그게 그 사람들. 그게 도움이 되요, 통일에? 그게 도움이 되요? 우리가 통일이 되면 다 같이 돕고 다 같이 잘살자 이렇게 되야지 이게 대화가 되는 거지. 너네 그지들 말이지, 뭐 할튼 그게 참. 예의가 없어요 사람들이. 그리구 통일을 하자는 마음이 말이죠. 그래선 안 되죠. 우리 밑으로 들어와라, 적화 통일 하겠다. 그거 굉장히 제일 큰 걸림돌이 될거예요.
면담자: 저희 지금 동포 사회도 약간 그런 이념적인 게 많이 있죠
구술자: 그렇죠. 네. 그르구 무조건.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흑인 질시하는 거 그죠? 중국 사람들 뭐 그러는 거. 그런 게 많잖아요 우린. 다 우리나라는 미국 놈 무슨 뭐 중국 놈, 일본 놈. 나부터도 그랬으니까 (웃음) 뭐 우리 민족만. 지금 한국이 다민족이 이렇게 하면 안 되죠. 굉장히 큰 적화통일이 될 거예요. 우리 민족만 한국이 지금 다민족이, 다민족 저기가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학교에서 애들한테 가르쳐야 할 것이 뭐에요. 인간, 평등, 그게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 그러구 그거 있어야 되요. 그거 없으면 통일이 안 돼요. 통일이 되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거예요.
면담자: 선생님 지금 70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구술자: 30년
면담자: 40년 가까이
구술자: 아니 70년부터는 아니지 내가.
면담자: 80년부터 시작은 하셨는데 인제 예
구술자: 사회 생활을
면담자: 80년부터라고 한다고 해도 인제 34년 됐는데 그런 활동들을 쫌 해보면서 나름대로 보람도 물론 있으셨을 거고 힘든 부분도 제일 좀 많이 있을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래도 가장 좀 기억에 좀 남는 사건이나 일 같은 게 있으면 소개를 좀 해주십시오.
구술자: 어떤 사건, 어떤 사건을 (웃음) 제가 아까 말씀드린 거 처음으로 우리가 국민, 아니 저기 뭐야 저기 커뮤니티, 동포 사회 저기 그 토론회, 동포 사회 토론회, 그런 거 없었던 건데 그런 거 함으로써 그런 반공 사상이나 그니까 친북 뭐 이렇게 해가지고 적대시 이런 게 드러나고 그런데 이것이 인제 지금 많이 순화가 됐대는 거. 그게 굉장히 큰 사건이었죠. 큰 사건이었고 그리고 인제 우리가 남북 가요의 밤 했던 거, 그것도 사건이었고. 볼 때 그 전환점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북한의 노래, 어, 북한도 노래는 노래네? 다 무슨 뭐 수령님 뭐 아니구. 뭐 그렇지 않은 노래도 있네, 휘파람 같은 거 있고. (웃음) 그래서 인제 그런 거가 전환점이 됐고. 그거가 제 인생, 제가 지금, 제가 해온, 제가 사회생활은 민족 학교를 통해서죠, 다. 민족학교를 통해서 민족학교의 그런 또 저기 후원을 받아서 한 거고 그렇고. 그러니까는 그런 거는 전환점이 됐다고 저는 정말 흐뭇하게 생각하는 거죠.
면담자: 그, 뭐 재단도 비슷한 생각을, 5·18 기념재단도 가지고 있고 아마 민족학교도 뭐 좀 그런 동지애적, 서로 상호 동지애적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해요.
구술자: 물론이죠, 그게 근본이 된 거니까요.
면담자: 인제 현재 민족학교 이사장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데 지금 민족학교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활동해온, 오면서 활동들에 대한 이러한 변화 과정들을 겪게 되고, 방금 아까도 말씀했지만 요즘은 동포 사회의..
구술자: 이제는 동포사회의 인권, 인권 향상을 위한 권리, 권익 향상, 그런 거에 많이 초점을 두고 있죠.
면담자: 그 지금 뭐 이사도 하게 되고 앞으로, 여기에 또 들어설 시설 같은 거 또 대충 이야기는 좀 들었는데 앞으로 좀 이런 모습으로 민족학교가 좀 이렇게 발전해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부분들이 있으시면..
구술자: 글쎄요, 이렇게 뭐 저희들은 그냥 기본적인 거요. 저기 있잖아요, 바르게 살자. 뭐 저기 굳세게 살자, 그 다음에 또 뭐지 또 인제 그 다음에 더불어 살고. 더불어 산대는 것은 인종차별 같은 거, 인종차별...같은 민족 중에서도 빈부의 차이. 그것도 차별을 하잖아요. 그니까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슨 소리에요. 모든 사람이 다 정의로운, 보다 나은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그거예요. 제 목적은. 그리고 인간적인 그런 관계를 갖는 사회. 그래서 그것이 그거지. 그 이상 뭐 그게 인제, 그전에는 우리가 힘이 부족하니까 한인 동포 사회만 이웃했지만 벌써 시카고나 이런 데는 그 논(non), 그 저기 비 한국인들이 많이 동조를 하고 있고. 여기도 그래요. 왜냐면 여기 청소년들이 친구들이 있으니까 좀 많이 봐요. 한국 사람 아닌 청소년들을 많이봐요. 인제 그르니깐 음.. 우리는 인제 그것이 한국사람이고 뭐를 떠나서 그 비, 그 민족적인 것을 떠나서 전 세계에 어느 레이셜(racial) 어떤 그거를 가진 사람, 인종이라도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것 그게 목적이죠. 그르고 그런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서 우리는 봉사를 하는 거죠. 그니깐 이게 인제 한 어느덧 한 2, 30년 그렇게도 갈까? 이제 이거는 뭐 한인 코리아 리소스 센서, 코리아 리소스 센터(Korea Resource Center)지만 서비스는 범, 저기적인 그렇게 된거예요. 그리구 그렇게 되는 게 옳구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되고, 우리가.
면담자: 그런 방향..
구술자: 한국 사람 아니니까 넌 안 돼.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면담자: 그런 방향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쫌 있지 않나요?
구술자: 그런 사람이 있지요. 이사 중에서도 얼마 전에 그 1.5세, 저기, 그러니까 입양 되 온 사람, 애들, 사람에 대한 일을 많이 하셨어요, 윤한봉 선생이. 그래서 찾아주기도 하고 우리가 인제 네트워크가 전국적, 전 세계적으로 있게 됐을 때, 그러니까는. 그니까는 인제 그런거 지금도 입양 아동들, 그게 그 그룹이 굉장히 쎄요. 그래서 인제 그래서 우리 이사 중에도 한국말이 이렇게 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치만 너무너무 추라이(try)해요. 한국말을 할라고. 그리고 한국에 대한 거 일고 싶어하고. 그런 사람들이 몇 분 있어요. 그 입양아들, 특히. 그러며는 그런 사람들, 그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다 있는 데서 그 사람들도 다 앉아있는 데서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은 이사 자격이 없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니깐 아직도 그 민족, 보수적인 말이죠, 그래서 그거는 그거는 인정할 순 없는 일이에요. 인제 우리는 한국사람을 떠나서 어느 사람이래도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관계가 그렇지 않은, 정의롭지 않은 그런거는 있을 수 없는 거죠. 그치만 그게 되겠어요? 그런 세상이 오겠어요? 난 요새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요. 그 사극 같은거 있잖아요. 그 옛날부터도 그렇게 짓밟고, 그렇게.
면담자: 네..권력암투가..
구술자: 화딱지가 나서 못보겠는거야. 그래서 아 이게 몇 천년 전 인류가 있으면서부터 지금 된건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그게 고쳐지겠냐? 응? 그건 안 된다, 안되는건 하지 마라. 그치만 저번에도 제가 한번 우리식구들한테 말했는데 그것이 안 된다 하더래도, 또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하더래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거잖아요. 분명히 내일 망해도. 오케이. 분명히 내일 망해도. 근데 많이 발전을 해왔잖아요? 몇 백년씩 걸리고 그래두. 미국도 노예제도가 없어졌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는 죽을 때까지 하는거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거를 하는 거죠. 인권 문제두. 되구 안 되고를 떠나서 말이죠.
면담자: 그,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좀 일대기라고 얘기를 해야겠죠. 일대기를..
구술자: 내가 너무 나이가 많이 먹었어요. (웃음)
면담자: 두 시간 가까이 선생님께 얘기를 좀 들었는데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좀 하셨던 얘기 중에서 마지막으로 좀 이렇게 나 이 얘기 꼭 할려고 했는데 못하고 넘어갔어 하는 그런 부분이라든지, 아니면 말을 조금 잘 못 했던 것 같은거 보완하셔야 될 부분이 있으면 ?
구술자: 아니요 그냥 제가 그냥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은 거는 제가 항상 그래. 뭘 그런거에 대해서 그게 없어요. 그래서 사실은 어르신들하고 그게 확실하신 분하고 끼어서 인터뷰를 할려고 그랬는데 인제 그게 안 되가지고 저 혼자 이렇게 엉기고 있는데. 미안하고요, 그런 거로는.
면담자: 아 아닙니다.
구술자: 그냥 제가 지나온 것을 보면 저는 참 행복했어요. 그러고 정말 신나게 살아왔어요. 지난 30년. 정말 그 윤한봉 선생님과 5·18.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거에 대한 각성을 하는 거잖아요. 만약에 5·18이 없었으믄 또 얼마나 몇 십년을 그냥 뭉개고 민주화래든지 뭐 그런 게 그렇게 됐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런게 이러나주잖아요? 그게 그때그때에. 쌓여가지구 일어나죠? 그게 지금은 또 흐려지고 있는거 같지 않아요? 그게 강도가 어떤 면으로 저기 한지 모르지마는. 저는 정말 합수, 윤한봉 선생님 만나서 정말 어떻하다가 정말 운 좋게 내 인생에, 일생에 처음 되는 일을 많이 해봤잖아요. 제가 북한에도 제일 먼저 가봤고 뭐 이런 것도 해봤고. 처음으로 책도 출간해봤고, 그죠? 우리 미문예협. 여러 이런 것들이 민족학교를 통해서 된 거고 저는 참 합수씨 아니, 윤한봉 선생님 계셨을 동안에 참 행복했어요. 정말 사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여기 지금 가시고 없으시지만. 인제 그, 그 방향으로 가는 거죠, 뭐. 그리고 5·18 재단에 대해서는 참 고맙고 제가 한번 5·18 그때도 갔었어요. 뭐지 그거 하는 거. 초청해주셔서 가서 정말 좋은 거 많이 봤고. 음.. 근데 인제 합수, 한봉씨 계셨을 때는 저희가 5·18 재단에 많이 참여를 많이 했었죠. 무슨 모금 활동도 많이 했구, 그 묘지 할 때 저희가 많이 성의를 보였고 그랬었는데 인제 가시고 없으시까 인제 또 뜸해지고. 재단이 또. 여기 일이 바쁘니까 여기가 또 허리가 휘니까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못 되고. 그치만 정신은 그 정신이 이 학교의 뿌리죠. 5·18 정신이요. 그래서 그게 뭐가 되던. 그르구 인제, 아마 한청련도 해체가 되었지마는 다 같은 이유일거예요. 우리 미문예협이랑. 아우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우리가 또 나서지 않아도 되는게 좋은 거지마는 만약에 시대가 그런 걸 원한다며는 여기서 또 나설 사람들이 많죠? 또 때가 되면 하죠. 해야되며는. 그리고 지금은 인제 우선 그, 꼭 이제 제금 한국 커뮤니티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그죠? 애니바디 후 니즈(Anybody who needs: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르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그런게 지금 잘 되가고, 열심히 하고 있고. 열심히들 하고 있어요. 그니깐 저희가 제일 중요한거, 민족학교의 앞날의 기로는 뭐냐하며는 후배들을 양성하는거. 지금까지는 아직도 윤한봉 선생의 가르침, 그분이 기어댕기면서 청소하고 그랬으니까. 정말 사심없는 사명감을 가진. 그리고 여기서 일하시는 스태프 멤버들이, 직원들이라고 그럴까 그런 사람들이 돈 받을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이제는 먹고는 살아야되지만 아주 그냥 정말 최저대우를 하고 있거든요, 저희가. 그런데 뭐 이 사람들이 딱 다른 데 같이 이 다른 이런 저기 이거 논 저기 그거 논 프로핏 올거니제이션(non-profit organization)은 시간 딱 되면 가잖아요, 이건 직업이잖아.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은 그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은 대며는 돈 안 줘도 와서 일하실 사람들이에요. 그러고 또 그렇게 해왔고요, 한 십년은. 자기 돈 이렇게 내면서 이렇게 해왔고. 그래서 참 그런 분들은 고맙고 그런데, 걱정은 인제 윤한봉 선생님 가시고 나니까 그다음에 뭐가 인제 더 변하냐하며는, 그때 동참했던 사람들, 5·18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 뭐 저기 호남 향우회 그런 분들도 굉장히 이렇게 보며는 좀, 그 옛날의 그 알찬 마음들이 없어지는 것 같애요. 흐려지는 거죠, 정신이, 그죠? 그래서 근데 저희 민족 학교도 그래요. 인제 요 다음 제너레이션은 어떻게, 이 사람들이 정말 봉사 정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왜냐면 저번에도 우리가 그 나카섹(NAKASEC: The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이라고 그걸 또 우리가 십년 됐을 때 했었거든요. 그게 인제 20주년 됐어요. 그래서 했는데 딱 십년 후에 인제 그게 생겼어요. 그거는 인제 로비단체죠. 그래서 DC에 있어요. 거기서 정치적인 그런 걸 많이 해요. 거기 인제 일을, 그 저기 뭐라 그러지, 총무? 총무를, 나는 무슨 직책 이름도 잘 몰라요. 그거를 총책임자를 뽑는데 아, 놀랬어요. 정말 돈을 뭐 하튼 뭐 헌드레드 따운전드 이상씩 그 돈을 내고 어떻게 봉사활동을 해요? 그러믄 사람들 월급 주다가 다 끝나요. 그거를 그렇게 그게 지금 현실이에요. LA 안에서두 봉사단체라고 하는 논프라핏, 논 프로핏이 뭔가, 돈 아니고, 영업이 아니고 봉사하는 단체들이요. 비영리 단체, 그 비영리 단체가 많아요. 정말 많아. 근데 대, 뭐 굉장히 대부분의 비영리 단체들이 다 그냥 자기네들 월급 타가구 그래갖구 그걸로 다 쓰는 거예요. 정말 그것이 사람들한테도 돌아가는게 없는 거예요. 그러구 북한을 돕는대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래서 교회도 많고 하는데 그 사람들두 다 자기네들 쓰고 남은거 갖다줘요. 그러니까 우리는 윤한봉 선생님 계실때두 절대로 그런 기관을 통해 우리가 하지 않았어요. 여기에 큰 단체들이 있어요. 미국에. 재단이 있잖아아요. 거기는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고 자기네 재단에서 돈을 써요. 예를 들어서 비행기값이 있어야 되잖아요. 가서 뭐 일하는거, 그런 거를 다 자기 재단의 돈을 쓰지 그, 그걸 도와주라고 들어오는 돈은 안 써요. 그런 단체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단체를 이용을 했죠. 그러니 우리가 뭐 왜그러냐면, 다른 사람들은 뭐냐믄, 무슨 교회에서 이걸 해줬다, 그걸 더 많이 하는 거예요. 요만큼 주면서. 그러고 자기네들이 도우러 갔다. 근데 저희는 누가 도왔다는게 문제가 아니니까 그거는 윤한봉 선생이 그렇게 저희를 그런 정신을 줬어요. 우리한테요. 누가 이걸 줬대는게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니까 그 사람들 다 이렇게 들어가면 그냥 가는 거죠, 그 단체 이름으로. 저희가 뭐 그런 거 없어요. 과연 그 정신을 이어갈 사람들을 우리가 키울 수 있는지. 저번에 참 힘들었어요. 대중씨알죠? 대중씨가 갔잖아요. 그걸 찾다가 뭐 몇년을 찾다가. 그때 제가 이사장 하고 있을 때.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을 때만 이런 거를 맡는지 모르겠어 (웃음) 그래서 그게 그게 제일 큰 일이고 특히 우리 단체는 정신이 그게 아니니까. 다른 단체야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고. 우리는 그 정신이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또 5·18 정신이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근데 인제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남한에서 통일 안해도 된다, 통일 왜하냐 많대잖아요? 그럼 그런게 인제 되는 거죠. 여기서도 . 그러니까 그거를 어떻게 우리가 줄기를 잡고 있고, 그거를 이어나갈 사람들을, 인제 그런 사람들 다들 리타이어(retire:은퇴)했잖아요. 그때 뭐 일했던 사람들. 저만 해도 제가 중학교때, 고등학교 때, 중학교때 그런 4.19가 났었는데 지금 벌써 70이잖아요, 제가. 그러니까는 이제 뭐 낫 투매니오브 어스 레프트(Not too many of us left: 남은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게 인제 아마 광주도 그럴 거예요, 그죠? 한국두. 그 직접 겪은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잖아요. 또 남북한 통일도 그렇잖아요. 부모의 그 애절한 것 그게 점점 없어지잖아요. 점점 돌아가시니까. 그러니까는 통일의 염원도 우리가 경제적인 거, 이런 걸로만 어프로치(approach: 접근)을 해야 더 알아듣고 그게 우리가 인제 합쳐야 된다는 그런 걸 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냥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그거잖아요. 그니깐. 한국도 뭐 마찬가지겠죠? 그런 정신이 자꾸 흐려지겠죠. 그리고 재단 같은 게 생기면 그게 이제 우리는 비영리 단체인데 영리단체가 되는거겠죠.그래서 그거 정말 조심해야 되고. 민족학교도. 자꾸 커지니까. 그 걱정이에요. 부자가 되는거죠. 건물이 생기니까. 그러면 또 오죽들 또 달려들겠어요, 서로들 하겠다고. 아까 그 얘기 한거예요. 야 어떻게 그런 사람들 상대를 우리가 저기를 해야될까. 이게 참 마음만 갖고는 안 되는거고 근데 마찬가지 일거예요 어느 다른 단체든지. 5·18도 인제 벌써 오래됐으니까.
구술자: 말이 너무 길었다, 그죠? 내가 이 말을 시작하면 내가 끝이 없어요. 구술을 시작하면 보통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난 이게 뭐 이렇게 긴 게 (웃음) 할 말이 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드니 또 말이 많아졌네.
면담자: 아무튼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아우 정말 고마워요, 여기까지 오셔갖구. 돌아가시면 5·18재단 거기 모든 여러분들한테.. 지금은 이사장은 누가 하시나요?
면담자: 지금은 전남대
구술자: 윤한봉 선생님 형님이 하실 때 제가 한번 ...
면담자: 네 윤광장 이사장님이 하실 때가 전전번이고요. 이번에는 전남대학교 교수 활동을 하고 계시는 오재일 씨라고..
구술자: 하튼 가서 안부좀 전해주시고. 저희가 이렇게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그전에 그런 얘기가 있었잖아요. 그거를 우리가 인제, 광주, 그걸 해야되니까 어떻게 하겠냐고 우리가 얘기가 되고 있거든요. 아마, 하튼 윤한봉 선생님 기념사업회도 그렇고. 아 그것도 여기서 어떻게 해야될텐데. 참 힘들어요. (웃음)
면담자: 네. 감사합니다.
구술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면담자: 이상으로 이길주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차철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차철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7일
○ 구술장소 :

□ 녹취록
면담자 : 찾아뵌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연기가 되는 바람에 이제서야 들어왔습니다. 그 먼저 선생님, 저희가 간략한 신상을 저희가 알아야 되서요, 아까 써주시긴 하셨지만 선생님 태어나셨던 곳...
구술자 : 태어난거는 거기 써드렸습니다만, 실제 태어나기는 1942년 음력으로 2월 22일, 2월 22일 생이에요. 양력으로 하면 4월 7일 된다는 것 같애요. 그러나 2월 22일이라는 날짜도 숫자도 좋지만 그, 미국의 조지 와싱턴이 2월 22일날 태어났습니다. 몇 년돈지는 모르겠는데. 그 다음에 링컨이 1월, 2월 16일날 태어났어요. 그래서 미국의 그 둘짼가? 몇째 주일을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 day), 대통령의 날이라 그래서 공휴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생일이 좋아서 저는 우리 자녀들이 가족에서 2월 22일, 무조건 2월 22일을 음력으로 쉬고 있습니다.
면담자 : 그 선생님..
구술자 :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여수, 당시 여천군, 지금은 여수시죠? 율촌면 신풍리, 여수 비행장 바로 밑입니다. 여수 애양원이라는, 손양권 목사님이 순교하신 그 교회, 바로 입구에가 제 마을이 있어요. 거기서 태어났어요.
면담자 : 그럼 선생님은 언제 미국으로 좀 건너오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 제가 1970년 10월 15일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습니다.
면담자 : 그러면 그때 연세가 스물 한 일곱여덜정도
구술자 : 맞습니다. 제가 42년생이니까 70년이면 만으로 28세 되죠.
면담자 : 예예, 그때 그러면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계속 거주를 하셨나요?
구술자 : 한국에 있으면서 여수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 서울서 다니다가 군대 갔다 왔죠. 그래서 백마부대로 66년에 월남 가서 만 1년 근무하고 67년에 와서 제대하구요. 그 다음에 대학 복역, 복학해서 1년 더 다니구요. 그담에 한 2년 회사 다녔어요. 근데 그 회사가 공교롭게도 어.. 당시 이름은 금광 개발 주식회사였는데 그게 그, 그 회사가 나중에 저가 미국 와서 보니까 명성그룹으로 바꼈드라구요. 거기 창설자가 김철호씨라고. 예, 저 상관이었죠. 그러고 인제 미국에 학생비자를 받아서 69년에 미국에 올려고 인제 여권 신청을 하니까 당시 그 이수근 미국 위장간첩, 가짜 여권으로 도망가다가 홍콩인가 어디서 걸렸잖아요. 그 사람 때문에 올 여권이 스탑됐어요. 69년에. 그때 69년에 미국을 못 오고 일 년 더 쉬었다가 인제 여권이 해제된 바람에 70년에 미국에 들어왔죠.
면담자 : 학교는, 초등학교는 어디를 나오셨나요.
구술자 : 바로 우리, 내가 태어난 그 옆에 신풍초등학교라고 있어요. 거기 1횝니다. 제가 손으로 손수 교실을 만들고 지어서.
면담자 : 그 초등학교 들어가실 때쯤이 아무래도 한국전쟁 6.25가 일어났었던
구술자 : 아, 전입니다.
면담자 : 6.25 전인가요?
구술자 : 제가 42년생이니까 50년. 제 생각에는 6.25전에 들어간 그런 것 같애요. 왜냐면 6.25도 이북 뭐라고 그래, 그. 빨갱이라 그럼, 그 용어를 안 쓰드라구. 공산당인가
면담자 : 인민군
구술자 : 인민군, 인민군이 들어와서 우리 동네 사람들 모여놓고 총질을 하고, 그 다음에 그 전에 여순 반란 사건 있었잖아요. 저희 집안에 한 육촌 되는 형님이 순천 농곤가? 순천고등학교 학생회장 하시면서 돌아가시구요, 그 다음에 이제 2년 후에 6.25가 터졌잖아요. 50년에. 손양원 목사님이 여수로 끌켜, 끌려가셨어요. 당시에 저희 작은 아버지는 차자 진자 국잔데, 차자 진자 국자, 최연소 전라남도 도의회 의원이 되셨어요. 천재였어요. 학교를 수재로 졸업하셨는데. 그 손양원 목사님하고 같이 끌려갔어요. 그때 한 150명인가 120명인가 여수 미평 그게 끌려가셔서 거기서 다 총살당했죠.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그 미평 수원, 과수원 하는 데서 지금 가면 푯말 있어요. 손양원목사 순교지라 해서. 여수 시내 가면 그 푯말 있습니다. 작은 아버지도 거기서 같이 총살 당했어요. 그래서 이제 여수 애양원에서는 추럭을 타고 손목사님 시체를 모시러 갔고, 추럭이 하나 있었어요. 저희들은 이제 시골에 왜, 그 저기, 뭐라 그러지, 왜 새들이 같은 거 있잖아요, 관 이렇게 만들고, 그거 메고 시골 사람들이 내려갔죠. 시체를 모시러. 근데 밤늦게 되니까 손양원 목사님 차는 하얀 천을, 손 목사님 이렇게 덮어서 차가 들어오더라구요. 해가 지기 전에. 근데 저희 작은아버지 모시러 갔던 동네 어르신들은 밤늦게 들어오니까 술이 좀 취해가지고 들어오셔요. 왜 빈손으로 오냐 그러니까 쉬, 그래요. 조용히 하래요. 알고 봤더니 거기서 150명인가 120명이 총살당했는데 저기 두 사람이 살아났어요. 그 중에 저희 작은 아버님이 살아나셨어요. 결국은 그 홧병으로 2년만에 돌아가셨죠, 예.
면담자 : 그 6.25가 일어났었을 때도 뭐 어디 다른 데로 피난을 가셨었나요?
구술자 : 아니, 피난이라 해봐야. 저희 집에서 바닷가거든요, 신풍 부암이라고. 우리집에 배도 있었고, 고기 잡는 배 있었어요. 배타고 이제 가면 애양원 이라고 손목사님 그, 교회 뒤에 섬이 세 개가 있는데 삼간도라 해서 있었는데. 저쪽 끝에 섬에가 있었죠. 작은 아버지랑 가서 인제, 가 있는데. 아 인민군들이, 애양원 배가 그때 컸어요. 우리들 배는 두, 돛대 두개짜리 조그마한 밴데, 노젓는 밴데, 애양원 배는 돛대 세개라 그래, 억수로 커요. 우리보다 한 서너배 네배, 다섯배 큰 배를 타고 인민군들이 애양원 배를 타고 우리한테 왔더라구요. 근데 뭐 특별한 이상은 없고 어쩌다 돌아가는 걸 그렇게 봤어요. 그래서 피난 뭐 2,3 일?
면담자 : 중학교 고등학교는 어디로..
구술자 : 순천 매산중학교를 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면담자 : 중고등학교 같이..
구술자 : 네.
면담자 : 공부를 근데 꽤 잘 하셨나봐요. 서울로 대학을 가시고
구술자 : 공부땜에 가는게 아니고, 그때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국민학교 다니면서부터도, 국민학교 제가 다섯살, 여섯살, 한문, 우리 바로 집앞에 한문 서당이 있잖아요. 거기를 보내요. 그러면 이제 제가 일곱살때, 한국 나이로 일곱살 때입니다. 일곱 살 때 인제 여덟 살, 나보다 한 살 위에 아이들이 율촌면이라고 4키로 전방, 그 먼 학교, 국민 학교를 보내요. 맨날 보내달라고 그랬죠. 뭘 모르고 보내달라고 그랬어요. 그래, 때리더라구요. 어린애가 뭐, 자동차, 그때는 차도 없어요, 걸어다니거든. 위험하다고 때려서 울고 못 갔는데, 그 다음해가 되니까 우리 동네 회관, 동네 회관에, 회관이라 해야 뭐 사람 5,60명 들어갈까 말까 하는 방 하나에 학교가 생기더라고요.
면담자 : 예. 신풍 초등학교가. 1회..
구술자 : 그게 1회에요. 그래갖고 학교도 공부도 할까 말까 하고 6.25니까 맨날 우리보다 나보다 한 두살, 세살, 네살 먹은 선배들이 막 데리고 다니면서 쌈질이나 시키고 유격 훈련 받구요. 공부는 안 하죠. 그게 우리 담임 선생님이 같은 동네 사람이에요, 순천 사범학교 나오셔가지구. 1회 니까 이제 학교를 중학교 갈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된다고 밤 10시까지 촛불 켜놓고 했어요. 근데 저 경우는 인제 그때도 교회를 다녔거든요. 교회를 다니고 순천 매산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우리한테 와서 티칭하고 뭐 이렇게 여러가지 가르켜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그랬어요. 아, 매산 중학교는 그 미션 스쿨이니까, 선교부에서 하니까 이게 월사금이 싼 줄 알았죠. 그래 거기다 제가 원서를 넣은 거에요. 집에서는 몰라요. 그러고 아버지 도장도 가짜로 내가 만들어서 파서 원서 다 찍고 내가 했어요. 누가 시킨 거 없어요. 가고 싶어 간 거에요. 근데 어디서 들통이 났냐하면 인제 어머니가 마실을 갔는데 아, 뭐 철이가 사진을 찍어 우리반에서 제일 잘 나왔어요. 무슨 사진 찍었는데? 아 중학교 가는 입학 원서 찍을려고, 붙일려고. 사진을. 걔가 무슨 중학교를 간대? 거기서 들통이 났죠. 근데 마침 작은 아버지가 그때 살아계셔서 와서 발표날 보니까 떨어져서 우는 애들도 있더라구요. 입학 시험에. 근데 나는 당당히 붙으니까 인제 그게 조금 좋으셨나봐요. 그래 보내줘서 겨우 다녔어요. 다니다가 말다 다니다 말다, 가정 형편때문에 그랬어요. 그게 공부는 어렵게 고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한거에요.
면담자 : 서울은 어디에 있는 학교에 다니셨나요.
구술자 : 처음엔 제가 인제 뭐 수도의과대학을 어떻게 갔는데 그 막, 여러분이 아시는, 농촌에서 그게 됩니까. 도저히 안 되서 인제 결국은 쫌 쉬다가 챙피해서 말을 못 할 정도로, 정부에서 공짜로 시키는 학교가 있었어요. 글로 갔어요. 거기가 농업협동대학, 협동조합대학이에요. 국비에서 전 장학금으로, 장학금이 아니고 무료로 공부해서, 거기서 하다가 이제 건국대학으로 3학년때 이전을 했죠. 그러다 군대 갔다 오고.
면담자 : 군대를 그럼 몇 년도에..
구술자 : 65년도에 들어갔죠.
면담자 : 예. 65년도에 갔다가 아까 월남에도 파병을 하셨다고..
구술자 : 65년도에 군대를 갔는데 내가 배치받은 부대가 백마부대라요. 9사단. 그러니 자동으로 백마부대는 오로매릭(automatic: 자동으로) 그냥 가게 되는거에요. 월남을.
면담자 : 몇, 그, 월남으로 간 연도가 그때 90
구술자 : 96년. 6년 8월인거 같애
면담자 : 60, 60
구술자 : 아 66, 65년에 군대 가서 66년 8월에 월남. 백마부대가 부산에서 선발대가 떠나고 그 담에 본진이 떠나고 후발대가 떠나는데 우리는 사단 사령부랑 같이가니까 본진으로 따라간거지. 이것 좀 드시고..
면담자 : 아니요, 저는..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럼 군대를 제대를 하시고 서울에 좀 2년,
구술자 : 복학을 다시 했죠.
면담자 : 2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구술자 : 1년은 학교 졸업하고 인제 그 금성 개발이라는데, 아니 금성개발이 아니고 금광 개발 주식회사를 다니다가 인제 69년에 인제 미국..
면담자 : 미국은 들어오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구술자 : 그때 학생 비자를 받으며는 미국서 학생비자가 아니고 미국서 I-20폼이라고 미국서 학생, 그 뭐라 그러지, 허가증. 대학에서 그걸 받으면 비자 신청을 하면 일단 한국서 내줬어요. 두 가지, 미국 유학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유삼인가 어디에서 하고, 정부에서 이렇게 선택해서 보내주는 케이스가 있고, 또 정식으로 뭐 요새 같음 토플(TOEFL), 토플 시험인가 봐서 들어오는 케이스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미국에 대학에, 당신 대학을 내가 가고 싶으니까 입학 허가서, I-20 폼이라 했는데 그거 받아가지고 저는 들어왔죠. 급신청을 했죠.
면담자 : 공부를 더 하실려고
구술자 : 그렇죠. 아, 물론이죠, 물론이죠. 저는 그때 제, 우리 사회에 개념이라고 그러나, 그걸 뭐라 그러나, 사회상이, 뭐 실력 이게 없었어요. 실력이 필요, 실력이란 말은 우리가 자랄 때 없었고, 물론 실력이 있으면 뭐 사법고시도 했겠죠. 근데 저는 그런 개념이 없었어요. 부모나 누가 그런걸 가르켜 주질 않았기 땜에. 그러고 다만 그때는 두 가지, 우리 자랄 때는 그 얘기가 이었는데 하나는 빽이에요 빽. 뒤에 빽, 내가 누가 있냐, 빽이 있었고. 또 하나는 학벌, 학벌을 중시했어요. 그때는 뭐 실력 이걸 따지지 않고. 그러니까 나는 학벌 목적으로 (웃음) 미국가서 유학하면..
면담자 : 혼자 들어오신건가요?
구술자 : 혼자, 혼자, 혼자.
면담자 : 결혼은 하시고 들어오셨나요?
구술자 : 그때만 해도 집사람이 나보다 한 4년 후밴데, 순천여고 인제 2학년때 인제, 난 대학다닐때 인제 만나서 교제를 했는데 그러다 군대 갔다 대학 졸업하고 그러니까 이제 이 여자도 이제, 우리 집사람도 이제 대학 졸업하고 그때 지금 세종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과를 인제 졸업을 했죠. 그런데 이제 내가 미국을 오게 되니까 아, 결혼을 해야되지 않겠어요? 근데 들어오기 전에 결혼안하고 오면 피차 좀 불안하잖아요. 뭐 그런 건 아니지마는 부모님들이.. 그래서 저 생각에는 내가 10월에 들어오고 8월엔가 결혼식을 올리고 들어왔죠. 그래가지고
면담자 : 아, 같이 들어오신..
구술자 : 아니 아니야, 집사람은 10개월인가 후에 그때 유학생 와이프 초청이 가능했어요. 당시에는. 유학생 와이프는 초청이, 여기서 우리가 유학생 와이프가 그래가지고, 뭐라 그래, 인비테이션(invitation)을 보내면 초청서를 보내면 그게 들어오는 케이스가 있었어요. 그래서 들어왔죠, 집사람.
면담자 : 70년도에 들어오셔가지고 학교를 그럼 다니
구술자 : 제가 털사 오클라호마(Tulsa, Oklahoma)에 오클라호마 유니버시티에 인제 I-20폼을 가져 왔는데 거기까지 갈 경비도 없고 거기 누군가 잘 모르고. LA에 도착을 했죠. 친구가 USC라고 남가주 대학교 어, 유니버시티 오브 서든 캘리포니아(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라는 LA에서 유명한 대학, UCLA 다음가는 유명한 대학인데 그 대학에 친구가 있었어요. 여기 와가지고 여기서 그냥 일단 학교를 등록을 시키라 그래서 아주 이름없는 학교 있어요. 우드볼리 유니버시티(Woodbury University)라는 쪼그만게 하나 있더라고. 일단 등록을 안 시키면 비자가 캔슬되니까 등록을 해서 거기서 적을 두고 살았죠. 그 인제 낮에는 일하고 밤에 가 공부하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졸업은 여기서 못하고 졸업은 동부에 가서 했어요.
면담자 : 루이지에나 뱁티스트 유니버시티(Louisiana Baptist University)라고 거기서 비지니스로, 경영, 저저기 상업과
면담자 : 80년 당시에는 LA에 계셨..
구술자 : 그때 LA에 있었죠.
면담자 : 면담자 : 그때는 어떤 걸 하고 계셨었나요.
구술자 : 그때는 제가 인제 학생 비자로는 영주권이 안 되니까, 사업체를 운영하며는 비자를, 영주권을 내주는 케이스가 있어가지고 사업, 그 영주권 목적으로 가발점을 냈어요. 가발점을. 인제 그때 제가 롱 비치(Long Beach)에다 가발점을 하나 사서 인제 거기서 집사람이 운영을 했죠. 저는 또 저대로 다른 사업을 좀 하고. 그렇게 해서 살고 그때 5·18이 날 때는 제가 롱비치 살 땝니다.
면담자 : 그럼 그 당시에도 뭐 호남 향우회, 뭐 이런 활동들, 한인 활동들을 그 전부터 하고 계셨던 건가요?
구술자 : 아주 좋은 질문 하셨는데요. 제가 미국에 와가지고, 오며, 오니까, 미국에 와서 보니까 교포 사회가 그때만 해도 LA 교포라 해봐야 7천명, 3천명 이런달정도라요
면담자 : 70년대 초에
구술자 : 그러고 뭐 한국 식당도 있을까 말까고. 식품점도 없다시피 한 케이슨데. 근데 보니까 친구들, 사회가 완전히 그, 이 뭐라고 그래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안 되요. 서로 대화하는게 안 되요. 서로 이렇게 벽을 갖고 살아요, 보니까. 뭐 예를 들믄 군대 비슷하더라고요. 군대가며는 너 어느 대학 나왔다 어디 나왔다 뭐가 상관이 없잖아요. 계급이 최고잖아요. 여기 오니까 뭐 먼저 온 사람이 최고로 치고 뭐 무슨 비자로 왔냐, 뭐 뭘 했느냐, 묻지 말라고, 몇 가지를 가리키더라구요, 삭막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70년 10월 15일날 들어와갖고 그 담에 3,4 개월 후가 3.1절 아닙니까. 3.1절 기념회를 하더라구. 여기 안 가져왔을거에요. 그때 앙케이트를 만들었어요. 당신은 왜 미국에 왔고, 당신 영어 실력은 어떻고, 왜 무슨 비자로 왔고, 사람을 만나기를 싫어합니까, 좋아합니까? 앙케이트를 열댓개를 내가 만들어서 이렇게 해서 조사를 해본 일이 있어요. 그게 제가 미국에 와서 교포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계기에요.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암만 해도 인제 한인회도 인볼브(involve)가 되고 무슨 단체, 예를 들어 제가 여기 와서 만든 단체가 기독교 실업인협회, 세계적인 기구거든요. SBMC라고 세계적인 기구고. 그러다 보니까 와이즈맨클럽이라는게 있어요. 와이즈맨 클럽도 인터내셔널 국제 기구에요. Wise, YMCA를 써포팅하는 비지니스맨 그룹인데 신실한 기독교 크리스찬 신자들이 모여서 만든 인터내셔날 로타리 클럽, 라이온즈 클럽, 똑같은 기구에요. 아주 잘 되요. 둘다, 지금 내가 얘기했던 둘다 기구가 기독교 기구로서 아주 훌륭하게 잘 운영되고 있어요. 지금도 잘 되고
면담자 : 지금도
구술자 : 크죠. 인터내셔널 아주 빅 오가니제이션(Organization), 빅 그룹이에요. 그런데 이제 크로쳐가 설립자죠. 인제 롱비치 살다가 가든 그로브(Garden Grove), 오렌지카운티(Orange County)로 이사가갖고 거기서 한인회 만들었죠. 내가 만든건 아니고 세 사람이 만들었는데 내가 거기 한사람 인볼브 한거죠. 그거 만들었죠. 차터(charter), 영어로는 설립 멤버를 차터 멤버라고 그럽니다. 비지니스 기독 실업인 협회, 윌셔(Wilshire) 와이즈맨, 아니 와이즈 맨 클럽 차터, 오렌지 카운티 한인회 차터 멤버, 그 다음에 많이 만들었어요. 한인회 단체를. 운동을 많이 했죠. 인제 그러다가 아.. 아까 향우회 얘기도 했는데 그 향우회 얘기가 여기 저 기사에 다 나와요. 제가 썼던 그 책에 다 나오는데 그때 한인회가 없었어요. 이게 인제 호남 향우회에서 만든 호남지에 내가 쓴 글이고 요건 내가 호남 향우회도 내 손으로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5·18이 여기 보면 내용이 뭐냐면요, 취임서에 가며는 그런데 막상 데모를 하려고 하니 어떤 단체명으로 해야되겠는데 적당한 이름이 없어서 호남향우회라는 이름으로 데모를 했습니다. 근데 그 때 당시 이 단체가 없었어요. 내가 뭐라고 그러죠.
면담자 : 가칭그냥
구술자 : 예. 그냥 만들어서 내 스스로 그냥, 예를 들면 페이퍼 컴퍼니 같이. 만들어가지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년 6월 1일 일요일날 오후 한시에 외환은행에서 했고 30, 3백명 모여 했고. 그 다음 일주일 후에 6월 8일에는 30여개 범교포단체가 주차장에 장장 5시간의 긴 데모를 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이제 제가 11대 회장에 취임하는 거에요. 10댄가 11대. 11차 정기 총회에 저가 취임을 하면서 에, 그 인제 그래서 동월 12일, 그러니까 8월 12일이요. 백범 기념사업회에서 가칭 재미 한인민주화협의회가 탄생 했고 두 번째 단체가 바로, 오늘 이 자리가 있게까지 한 대 남가주 호남향우회가 발족을 보게 됐습니다. 5·18땜에 호남 향우회를 내가 만든 거에요. 없었으니까. 두번째 단체가 호남향우회가 준비모임을, 8월 12일 마지막 준비위원회에서 차종완 한인회부회장을 초대회장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야유회를 겸한 창립 총회를 1980년 8월 26일 오후 1시 30분에 센츄리 씨티에 있는 렌초파크 농구장 뒤에서 향우 5백 여명이 모인 가운데 본인의 사회로, 내 사회로. 내가 다 기초 한 거거든요. 뭐 이렇게 얘기하며는요, 뭐 좀 교만하고 뭐 이런게 있잖아요. 근데 역사적 사실이니까. 5·18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기안했고 또 자 서류 다 가져왔잖아요, 기안했고. 또 향우회라는 걸 내가 내 손으로 기안하고 초안 만들고 회칙 만들고 해서 만든 거에요. 내가. 그래서 5·18땜에 이게 만들어지고 2년 후에 제가 골프를 79부터 골프를 쳤는데요, 미국 와가지고. 어, 2년 후에 82년이죠. 8을, 5·18을 기념해가지고. 왜냐면 그때 4.19 뭐 자전거 전국 경주대회라든가 4.19 기념 자전거 우리나라에 있었어요. 우리 어려서. 그럼 5·18 기념으로 해가지고 뭐를 하나 상기를 해야되겠다. 그래서 제가 골프 대회를, 호남 골프 클럽을 만들었죠. 또 내손으로. 그래서 5월, 그 골프 클럽 명단도 이 안에 있어요. 지금도 이 두 단체는 아주 꾸준하게 잘 운영되고 있죠. 요게 여기였고. 미주 호남향우회를 또 만들었거든요, 내가 10년 후에, 내가 회장 하면서. 내가 호남향우회를 만들어놓고 10년만에 회장하는 거에요. 80년에 만들었으니까 서른 여덟이지? 그러죠? 서른 여덟이죠? 그러면 서른 여덟에 호남 향우회 회장 나이가 너무 어리잖아요. 서른 여덟살 밖에 안 되니까. 그러니까 안하고 기다린거죠. 어르신들이 다 하고 11대 되니까 뭐 어중이 떠중이 다 사람들이 회장할려고 그러고 막 향우회가 영 이상하게 돌아가기에 내가 총대를 맸죠. 그래서 인제 이때 하면서 바로 그 해에, 그 다음 핸가 미주 호남 향우회를 제 손으로 만들었죠. 그게 여기 있어요. 가져왔어요. 가져온걸로 아는데. 미주 호남향우회를 제 손으로 만들었어. 미주 호남향우회 책자가 있거든요. 근데 그 책자를 안 가져 왔나봐요. 그 책자 속에, 거기 인제 골프 클럽 명단이 들어있거든요. 그때 나는 회장은 아니고 인제 후임이 하지마는. 그 책을 안가져왔나봐요.
면담자 : 그, 그럼 선생님은 80년 5월에 광주 소식을 어떻게 듣게되셨습니까?
구술자 : 오케이. 그때는 제가 세탁소를 할 때에요. 그러니까 집사람은 롱비치에서 가발점을 하고 나는 오렌지카운티 플러톤(Fullerton, Orange County)이라는 우리집 옆에다가 세탁소를 크게 내서 세탁소를 운영할 때에요. 근데 손님이 아침에 인제 7시에 와요. 7시에 문 여니까. 7시에 많이 와요 출근하면서 옷 맡겨놓고 가는데. 너 코리안 뉴스 봤냐? 이래요. 나는 못 보고 오잖아요. 뭐냐 이랬더니 한국에 난리 났다 이거야. 군인들이 막 민간인을 죽이고. 난린데. 육안으로 봐도 너무한다 이거야. 그래 당장 집에 가서 봤죠. 집에 가서 뉴스를 틀어서 봤죠. 봤더니 개머리판으로 치고 대검으로 찌르고 질질 시체를 끌고 다니고. 이게 선명하게 총천연색으로, 아침 라이브 뉴스로 쫘악 나오는 거에요
면담자 : 그때가 며칠이었는지 기억 나시나요.
구술자 : 5월 18일이면 한 5월 19일이나 여기 날 5월 똑같이 가거든요? 5월 18일이면 여기도 5월 18일이라고. 거 5월 18일인가 19일 그쯤 될거에요. 내 생각에는 뭐 하루 이틀 차이 날까말까? 내 생각에는 당일인거 같은데? 당일인거 같은데? 그 정도로 지금 기억이 나거든요. 생생하게 나오는 거에요. 매일 막 방송에 나오는 거에요. 생생하게. 현장에서 보는 듯이. 그러고 그 신부, 미국 신부나 미국 기자들이 들어갈려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들어가고 . 한국에, 그때 한국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나오고, 나왔거든요. 그때 LA에. 근데 거기에는 일체 뭐 단 한마디도 없는 거야. 한 일주일 지나니까. 동아일본가 어딘가 밑에 한 오단 밑에 가니까 쪼그마한, 다섯 줄 정도로, 광주에서 약간의 소요 사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알죠. 지금 내가 지금 광주에 전화 하죠. 한번 통화를 했죠. 누구 한테 전화를 했냐면, 아까내가 얘기했던 YMCA 라는 국제 프로그램에 한국 총, 총재라는 분이 정화영일거에요, 존함이 정자 화자 영자, 정화영씨일거에요. 지금은 고인 되셨겠죠, 돌아가셨을거라고. 그 분이 미국에 대회, 세계대회 때문에 LA에서 우리가 만난 분이거든요. 그분한테 안부전화를 했죠. 따님이 받더라고. 따님이 어린 음성으로 받는데 아버님 통화좀 하자 그랬더니 아버지 안 계십니다. 아주, 아주 떠는 음성으로. 전화를, 대화를 못하고 끊없죠. 그랬을 때 내가 정말 심각하구나. 우리는 기사를 외국, 그때 외국에는요, 광주 사람은 현장에서 보니까 알지만 외국사람은 모르잖아, 한국 내에 있는 교포들은 모르잖아요. 아니, 저 한국 내에 있는 (웨이트리스와 대화로 잠시 중단) 여기 과일이 남네요. 먹으라고 그래요. 저희들은, 이따 천천히 합시다. 그래서 그 텔레비로 칼라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중계해준 그 모습은 광주 현장에서 보는 그 모습보다 더 비참할 수도 있을꺼에요. 왜냐면 현장에서는 자기자 직접 찔르고 때리는 걸 보지 않는 한은 모를 꺼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텔레비가 가서 관이 대학병원인가, 전남대학병원인가 수십개가 관이 쫙 늘어서 있고 그 어린애가 사진 들고 이렇게 관 앞에서 한 서너살 난 꼬마가 이렇게 울고 있고. 그 비참한 건 말로 형용이 안 되요. 미국 사람도 그러고. 어떻게 같은 동족이 전쟁도 아닌데. 어떻게 자기 자국민을 저렇게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시킬 수 있느냐고. 미개인들이라고. 야만인들이라고. 말로 형용이 안 되죠, 그때 그 상황은. 여러분이 현장에서 봤던 그 상황과 내가 봤던 그 상황의, 글쎄, 현장에서는 모르겠어요. 그런. 우리는 텔레비전이 완전 관은 관대로. 또 뉴스위크(Newsweek)지에서, 타임즈(Times)지에서. 상생한 사진들을. 여기 타임즈지 카피도 내가 몇개 가져왔는데요.
면담자 : 그럼 선생님, 당시에 항의 시위를 6월 1일에 시작하셨습니까?
구술자 : 6일날 처음에 시작을 했죠.
면담자 : 6월 6일이요?
구술자 : 1일, 1일.
면담자 : 6월 1일이요.
구술자 : 그 이유는 여기 보면 내가 살던 그, 오렌지 카운티는, 우리는, 나는 뭐 울고만 있는 거에요. 울고만 있고, 아 이걸 어떻게 해야되느냐 이러고 있는데 오렌지 카운티에 그, 내 아는 친구들이, 그 친구들이 데모를 오렌지 카운티에서 하더라고, 나, 나도 없이. 그때 내가 한인회를 내 손으로 만들고 한인회, 내가 그때 수석 부회장 겸 사무 총장을 볼 때거든? 그런데 그때 나를 빼고 자기들끼리 그 데모를 한 기사가 크게, 오렌지 카운티 레지스트(Orange County Register)라는 미국 신문에 크게 났어요. 그게 그걸 보니까 이건 더, 내가 비참해진게, 아니 지금 저 친구들은 전라도 사람도 아니거든요, 그 친구들이. 근데 저렇게 데모를 하는데 왜 LA는 나가면 지가 전라도 최고 뭐, 뭐 유지라고 그러고 어깨재고 다니는 친구들은 왜 조용한가 싶어가지고 내가 LA 전화를 했어요. 선배하고 친구들한테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와아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그래 의기투합해가지고 하다보니까 5월 그게 20 한 5일이나, 4일 이래 된거죠. 그믄 당장은 데모 안 되잖아요. 일주일 준비를 했지. 그 일주일 준비기간이, 그리고 주말에 해야되잖아요. 그러니까 6월 1일이 된 거에요, 인제 날짜가. 근데 그때도 뭐 광주는 사태가 6월 1일까지도 광주 사태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고.
면담자 : 주로 어디에서 어떤 활동들을 좀 이렇게 하셨나요?
구술자 : 그래, 인제 처음에 그 기사가 났던가, 인제 광고를 일단 내가지고 호남 향우회 이름으로, 호남 향우회 이름으로. 요건 범교포 141108차철32:50 (?) 을 한 광고고 요것도 물론 범교포 광고고. 이것도, 이것도 범교포 광고죠. 이게. 예, 여기 준비위원 들어가 있고 뭐 다 들어가 있고 날짜 장소 다 들어가 있고. 이건 이제 포스터잖아요. 이건 포스터로 썼고. 지금 그건, 요건, 이게 동아인지 무슨 신문사에, 여기 스토리가 다 있어요. 내가 그 기록을 해놨죠. 근데... 근데 이제 오렌지카운티에서 데모를 하더라고. 그래서 인제 LA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그렇지 않아도 전화 기달렸다고 그러면서 이제 해서 6월 1일날 호남 향우회 이름으로 인제 아드모어 공원(Ardmore Park)이라고 한인타운 내에 조그만 팍, 공원이 있어요. 거기서 할라고 그랬는데 정부에서, 시에서 허락을 안받았기 때문에 못하게 하기에 영빈관이라는 그, 그.. 뭐라 그러죠 음식점? 그걸 뭐라 그러죠? 식당, 식당에서 팔킹랏(parking lot)이 컸어요. 주차장이. 그래서 인제 사정해서 거기서 빌려가지고 거기서 했는데 그때 삼백, 한 삼백명 이상 왔어요. 그 뭐 그냥 바로 했는데. 그래 인제 그때 그 결의문 141108차철3:06 (?) 뒤에다가 내가 뭐라고 썼냐며는, 이건 하나부터 열까지 제손으로 다 만들었어요. 뭐라고 썼냐면 “다음주에는 범교포 궐기대회를 갖겠습니다.” 이렇게 했다고. 내 생각에는 내가 호남 향우회 썼잖아요. 호남 향우회, 요거 인제 6월 1일날 한 거야. 근데 요 밑에 “오는 6월 8일 오후 3시는 아드모어 공원 올림픽과 노르만디에서 각 단체와 공동 주최로 범교포 궐기대회를 갖겠습니다.” 이걸 썼다고. 그냥 전혀 누구와 상의 없이. 딱 이, 그날 데모가 끝나고 나니까 단체장들이 모이자 그러더라고, 자기들이. 그렇잖아도 기다린거야. 이 글을 읽고 모이자 그래가지고 백범 김구 선생 그, 그 사무실에서 모여가지고 이제 일사천리로 그 다음주께 진행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 포스터도 만들고 어.. 포스터도 만들고. 이것은, 지금 그 뒤에 무슨 신문이라고 안 나와 있어요? 제가 신문사 3개 신문을 그때 냈을거에요. 한국일보,
면담자 : 신문 이름은 안 나와있습니다.
구술자 : 중앙, 동아, 그렇네. 근데 내용이 다 틀린게, 신문사마다 자기들이 그, 내용을 과격한 내용을 못 쓰게 하는 거야. 어? 그러니까 그때도 중앙정부,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아서 못 쓰게 하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3개 신문사.. 여기 또 하나 있네? 신문사 이름을 내가 안 쓴 모양이네. 아, 이거는, 요건 내가 향우회 회장할 때 5·18기념, 내가 후원 했던, 내가 주최해서 했던 거고. 그런데 그 LA 타임스나 ABC, NBC, CBS 같은 미국 3대 텔레비존에서 와서 취재하는 거는 나는 몰랐죠. 근데 인제 내가 그날 그 유족 대표로 인사를 했어요. 왜냐면 그, 그때 여기 제목을 보면 위령제이지않습니까? 뭐라고 되어 있어요? 구국 그.. 아니 여기여기여기 보며는 위령제 뭐라고 했죠?
면담자 : 순국영령 위령제..
구술자 : 어, 영령 위령제로 되어 있죠?
면담자 : 네
구술자 : 그러니까 이제 제사를 지내면 상주가 있어야되잖아요? 일종에 제가 상주죠, 유족 대표로 내가 인사.. 사실 유족이 없으면서도 유족 대표가 없잖아요. 그러고 또 누가 시켰더니 유족은 아니지만, 광주에서 막 온 친구를 시켰더니 그, 가족이 와서 데리고, 끌코 가더라고. 누구라고 얘기도 못해요. 다 이름 대면 아는 사람인데.
면담자 : 누구라고 얘기 하셔도 됩니다.
구술자 : 아니, 안 되지. 그건 안 되지.
면담자 : 예, 그래서 끌코 가더라구요. 첨에 와서는 막 제가 그 현장에 있었는데요, 살아있는 우리가 부끄럽고 우리가 같이 죽지 못한 데 대해서 정말 참 비참하게 느끼고, 막 그러면서 울분을 토하고 그래서 유족 대표 인사를 시켰더니, 안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떻게 해요, 순서에는 나와 있는데. 내가 인제 유족대표 인사를 했죠. 그랬더니 LA 타임스 기자가 날 보고 인터뷰를 신청하는 거에요. 요게 LA 타임스 그날 끝나고 나서의 기사 내용이에요. 이게. 이게 지금 전면, 일, 페이지가 얼마나 크게 차지 해요. 이제 요건 타이틀, 내가 LA 타임스 날짜하고 타이틀만 여기다 뽑아놨는데. 요게 인제 메트로 폴리탄(Metro Politan) 지방판 제 1면에 이렇게 크게 난 거에요, 기사가. 한 면에 풀로 나왔으니까. 근데 이거 보세요, 이렇게 보며는 이 글자를 이쪽에서 찍으면 이게 역광이 되서 안 나오니까 프랭카드 뒤에 가서 찍은 거에요. 글자가 꺼꾸로 보이는 거죠. 플랭카드 역광을 그, 그 없애기 위해서. 예, 그래서 여기, 여기서부터 내 이름으로 시작해서.. 내 이름으로 시작, 끝이 여기 하나 더 있는데? 여기 하나 또 있어요. 어디가 피스가 하나 있는데, 여기 연결된다고. 어디 봅시다, 여기 밑에 보며는.. 턴투 페이지 에잇 칼럼 원(Turn to page 8 column 1) 으로 다시 넘어가야 내 스토리가 또 나오는데 그게 있어요. 내가 가져왔어요. 그 칼럼, 그 밑에 또 스토리가 있는 게 있어요. LA.. 여기 있어요. 아, 여기 오렌지 카운티에서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이게 박진관 박남규... (웨이트리스와 대화로 중단, 부인과 대화로 중단) 그래서, 무슨 얘기 하다가... 하튼 자료 속에 있을거에요. 여기 내가 그걸 몇장 가져왔거든요. 여기 요걸거에요. 가만 있어. 여기 있네요. 여기 있네. 내가 끝에 여기 여기 어태치(attach)해놨죠. 그러니까 칼럼 투가 요게요게 그거에요. 요거 두개 가져가시면 그, 그날 그 스토리에요. 그러고 그래서 이 5·18을 두, 두번을 6월 1일날, 6월 8일날 두 번다 백프로 내 손에, 이 결의문 모든거 전부 내손으로 내가 작성하고 아까 얘기했던 그, LA 주소 전화번호 좀 쓰자 그랬더니 이 친구들이 못쓰게한거야. 중앙정보부에 자기들이 걸린다고. 그래서 보면 연락처가 303 파인에빌 롱비치로 되어 있어요. 이게 내 사무실 전화에요, 내 사무실 전화, 이게. LA서 친구들이 못쓰게 해요. 한 일주일 전에 한번 썼어요. 아이, 그냥 누구 여행사 하는 친구 있었어요, 그 친구 좀 쓰자 그랬더니 난리가 났어요. 왜 내 허락 없이 써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래서,
면담자 : 그러면 그때 모이, 모이신 분들이 한 몇 분 정도 됐었나요? 6월 8일날?
구술자 : 아니, 그러니까 데모 군중들은 거기 인제 기사상으로 다 나와있거든요. 우리는 주최상 천명이라고, 말하기 좋게 천명이라고 그랬고 LA 타임스에는 오백명이라고 나왔고. 그때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인제 나하고 쪼금 무슨 알력이 있는 친구가 담당기자가 있는데 고의로 내 이름을 뺐읍디다. 근데 이제 누가 이제, 물어, 차철이가 주관인데 차철이는 빼냐 그랬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재밌어요. 아, 그거 차철이 이름 들어가면 중앙에 걸리면 그 친구 다칠까봐서 고의로 빼줬어요. (웃음) 진짜로.
면담자 : 예... 그럼 이때 5, 6월 8일날, 6월 1일날 1, 1차 항의시위를 하고 이제 총궐기대회를 6월 8일날 하시게 됐고 그 이후, 이후에도 꾸준히 뭔가 진행된 부분들이 있었나요?
구술자 : 저는 그러고나서는 그 다음에 이제 향우회 만들고 골프 협회 만들어서 그 양쪽, 그 단체를 내가 열심히 써포팅하고 그 다음에 이제 10년 후에 하면서 했고. 아까 여기, 지금 요거 아니에요. 요거 11대, 뭐야 내가 아까 광고 하나 거 크게.. 내가 회장할 때 크게 한번 밀어서 인제 발표회, 5·18 기념회를 크게 가졌죠.
면담자 : 그럼 그때 6월, 80년 6월에 선생님하고 같이 6월 8일날 이거 이 시위를...
구술자 : 주도했던 사람 이름들 거기 다 있어요. 그 명단에, 그 밑에...
면담자 : 이분들이신가요?
구술자 : 예예예예예
면담자 : 이분들이 다 호남향우회 소속이신가요?
구술자 : 아, 아니죠, 아니죠, 아니죠. 보편적으로 다 아는데 거기 지금 사회가 정호영으로 나와있나? 여기 보며는 제일 밑에 이 양반은 죽었고 여기여기 이 사람 변호산데 여수 사람인데, 살아계시나 모르겠고. 김운하 이 양반이 아까 얘기했던 조선일보 편집 뭐야 국장하다 오신 분인데 신한민보 하시다가, 완전히 이분은 이북으로 돌아갑디다. 이 노길남이도 이북으로 돌아갔고. 문성철인데 이분 잘 모르겠고. 박완철 우리 선배 광주분이고. 이봉호 이 사람은 미국에 전라도 사람 아니고, 이화수도 아니고. 정호영이는 경상도고, 그래요. 패티장은 미국서 태어난 여자분이고. 예. 왜냐면 이때는 범교포니까. 호남이 아니고. 첫째 호남은 이제, 예. 아주 크게 했어요. 그때 미국에, 내가 인제 그 11대 회장때 날 보고 5·18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내가 했던게 광주 시민 학살일지, 그 다음에 인자 뉴스위크에 났던, 그때 그 포승줄에 끌고 가고 뭐 시체, 막 하고, 관 있고. 뉴스윅이 있던가? 그 다음에 아까 오렌지 카운티에서 친구들이 데모했던거, 그 다음에 요거는 인제 우리가 광고 냈던거. 그 다음에 인제 우리 기사 났던거, 데모 기사. 2주 동안. 요거 광고, 광고, 광고가, 요건 아까 그게 지금 내가 카피한거고. 그 담에 결의문 거기 내가 만든거고. 결의문 내가 만들었고. 그 다음에 여기 뭐 서명날인에 지미 카터하고 최규하한테 보낸다는거. 요것... 동아일보 기사 난거. 8백 여 교포 구국궐기대회, 여기 8백명만 모여도 많이 모인거 아니요. 한국일보가 공식 광고니까. 많이 모인거야. 교포 사회 가장 큰 데모로, 당시로. 지금도 이렇게 크게 데모하는 단체가 미주에서 없을껄요? 8백여명이, 우리 추산으론 천명이라 그랬고 LA 타임스는 오백명으로 했거든? 여기 한국일보는 8백으로 하고. 요거 인자 LA 타임스 기사 내가 이거. 광주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 이거 내가 그때 내가 부동산 내가 브로커로 있을때, 이제 광주 의견에 대한 내의견이라고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에이고 그렇습니다. 그러고 인제 이건 호남지에 났던 호남지라는, 호남향우회때 그 기사 똑같은 내용이야. 내가 얘기했던 내용이 그 속에 디테일하게 잘 들어 있어요. 그게 이중 삼중으로 든 것도 있고. 이건 전남일보 내가 95년돈가 96년도에 거 전남일보하고 인터뷰한거, 광주건에 대해서. 그때 서류 가지러 갔다가. 무등일보에도 내 기사가 났네. 무등일보란게 있어요?
면담자 : 예, 지금도 있습니다.
구술자 : 근데 이... 99년 5월 18일 이거.. (웃음) 여기 다 있네? 여기 보니까. 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어? 여기 와서 했나? 전혀 기억 없는데? 이야. 요건 내가 보관 하고 싶은데, 요건 팩스로 넣어드릴게, 이메일로 넣어드릴게. 헛, 무등일보하고 언제 내가... 여기 보며는요. 광주에 가서, 여 보세요. 광주만의 교포들이 알려. 요게 94년 전남일본데. 요게 차상렬이라고 장성, 장성 사람인데, 나와 종씬데. 이 친구랑 그때 같이 했어. 그 이름 있어요, 그 속에. 저기 명단에 있다고. 근데 이게 군수로 나왔다 떨어지더라고. 이 친구 형이 그 김영삼이, 그 경호실의 바디가드로 아주 이름 날렸었어요. 이름은 내가 모르겠는데. 자료가 됐음 좋겠어요.
면담자 : 아니 뭐, 선생님 주신 자료는 대부분 저희들이 못 갖고 있는 자료인데
구술자 : 허허허허, 미주 LA, LA, 내 생각에는 그때 다른 데서는 데모를 얼마나 했을까 의문스럽네요. 허허.
면담자 : 그러면 그, 11대
구술자 : 잠깐 죄송합니다. 차가 몇 시죠? 4시 몇분이요?
면담자 : 4시 십분입니다.
구술자 : 나갈 준비 합시다.
면담자 : 마무리를 좀 짓, 짓는다는 의미에서
(웨이트리스와 대화)
면담자 : 91년도에 호남향우회 회장으로 추대되시고 그 이후로도 이게 보면 관련, 5·18 관련 활동들을 쫌 지속적으로...
구술자 : 전혀 안 했어요. 모든 단체를 95년 이후는 일체
면담자 : 95년 이후로는요? 91년도까지는 좀 하셨던 것 같은데요.
구술자 : 91년도에는 한인회장 하고 미주총연만들고 했으니까. 저는요, 마지막으로. 망월, 망월동이에요, 거기가? 국립묘지, 국립묘지라고 그래요?
면담자 : 예, 국립묘지라고 합니다.
구술자 : 아직 못 가봤거든요. 근데 왜 못가봤냐면 내 개인적으로 갈 수 있잖아요, 구경삼아서. 근데 명색이 이렇게 미주서 일을 했는데 참 내 혼자 가서 거기서 쓸쓸히 눈물짓고 거기 구경하고 그러고, 생각하니 참 서글프더라고. 예?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참 비참하더라고. 근데 한번은 그 광주 어떤 분이 나하고 잘 아는 분인데 나를 이용해가지고 신청을 한대요, 돈을. 그래가지고 그 돈을 자기가 먹겠다 그거야. 나한테 그러더라구. 그러면서 어떤 이사장을 소개시켰어요. 식사를 한번 대접을 하면서, 식사를 하더라고. 그 사람 면목에서 나를 팔아서 5·18에 돈을 당신이 먹는다는 건 참 비열하잖아요. 응? 내가 돈을 원하는 그 자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게 참 비애감을 느끼고 그런 일도 있었어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돈이 나온다더라구. 그래서. 근데 내 경우는 5·18때는 내가 우리 형제가 고생을 했거든요, 서울서.
면담자 : 아, 그렇습니까?
구술자 : 내 동생을 누가 잡아, 경찰이 잡아갔는지 중정이 잡아갔는지. 잡아가지고 형 보고 싶다고. 편지를 간절하게 쓰라 한 거에요. 형이 좀 나오라고.
면담자 : 시간이 쪼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구술자 : 여유가 없길...없기에 다행이에요.(웃음)
면담자 : 아무튼 저희들 만나러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차철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술자 : 네, 감사합니다.
은호기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은호기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8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은호기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8일 오후 4시 5분부터 시작입니다. 예, 선생님. 먼저 이렇게 오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예.
면담자 : 그 선생님 크게 인제 세 가지로 쫌 나눠서 선생님께 좀 질문을 드리려고 해요. 일단 선생님께서 미국에 오시기 전까지 이렇게 선생님의 한국에서의 활동, 뭐 유년시절부터 해서 한국에서의 활동과 이후에 미국에 오셔서의 그런 활동, 그리고 지금 현재적, 현재의 활동, 크게 세 가지로 쫌 구분해서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 너무 부담갖지 마시고 그냥 옛날 이야기,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저에게 해주신다고 그냥 생각하시고 편하게 그냥 말씀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면담자 : 어, 선생님 먼저 언제 태어나셨고 어디에서 쫌 태어나셨는지 그걸 쫌 말씀을 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1939년 10월 30일, 전라북도 고부,
면담자 : 고...
구술자 : 고부, 정읍군 고부, 동학 농민 전쟁 발생된 곳.
면담자 : 그 39년 10월 30일은 호적 나이인가요, 실제 나이와 같으신건가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선생님 그럼 언제까지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이렇게 오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 1970년 꺼정 있었죠.
면담자 : 그러면
구술자 : 1970년 말에 왔으니까
면담자 : 서른 한 두 살, 32, 서른 두살
구술자 : 한국 나이로 뭐 그렇게 됐을거에요.
면담자 : 그 정도 까지는 계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쫌 이렇게 말씀을 드릴게요.
구술자 : 뭐뭐뭐 어렸을 때는 뭐 거기서 국민 학교 다녔구요.
면담자 : 부모님은 뭘...
구술자 : 농업이지, 뭐 농업.
면담자 : 농사 지으셨구요, 형제 관계는, 선생님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우리 8남매죠, 예.
면담자 : 8남매에 선생님이
구술자 : 끝에서 두 번째
면담자 : 아 여섯 번째요, 일곱, 일곱 번째이신가요? 굉장히 형제들이 많으셨는데 뭐 어렸을 때 쫌 이렇게 어... 여덟 식구, 부모님까지 하면 열 식구 같이 생활을 하셔야 되는데 이렇게 뭐 크게 경제적으로나 뭐 그렇게 뭐 힘들거나...
구술자 : 뭐 그런대로 뭐 살았죠.
면담자 : 그럼 국민 학교는 어디를...
구술자 : 뭐 거기서 나왔죠.
면담자 : 무슨 국민 학교, 이름, 혹시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그저 그, 고부국민학교죠, 뭐 그런 거 다 써서 뭘 해요. 대강대강 이야기 합시다.
면담자 :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쫌 이렇게...
구술자 : 그런 건 중요한 거 아니야.
면담자 : 학교만 좀 확인을 하고 쫌 넘어가겠습니다. 중학교는 어디를...
구술자 : 그게 그 저,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나왔고,
면담자 : 고등학교는 전주에서요.
구술자 :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고.
면담자 : 중학교는 혹시 어디에서.
구술자 : 거기 마찬가지고요.
면담자 : 서서, 대학은 어디...
구술자 : 아, 그런 거 알아서 뭘 해. 그런 거 없앨라고 허는 사람이 운동하는 사람인데...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이 지금 뭐,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이렇게 넘어, 이민 아니면 유학이든 오시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구술자 : 그거 뭐 공부하러 왔죠. 68년에 오려가다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오고 왔죠, 공부 끝낼라고 왔죠. 근데 못 했죠.
면담자 : 그 대학을 다니시다가 유학을 오신건가요?
구술자 : 아니 아니죠, 다 마치고
면담자 : 아, 다 마치시구요. 여기 오셨을 때 혼자 들어오셨나요, 결혼을 좀 하시고 들어오신 건가요?
구술자 : 음...같이 오기는 왔는데 결혼은 여기서 했지.
면담자 : LA, 처음 오신 곳이 LA인가요, 아니면 다른...
구술자 : 응 LA로 왔지, 그게 잘못된 거지.
면담자 : 아, LA로 오신 게 잘못된 부분인가요?
구술자 : 바로 학교 쪽으로 갔어야 공부를 하는데 여기 들렀다가 간다는 것이 여기서 그냥 주저앉게 된 거지.
면담자 : 예. 여기 그러면 처음 들어오실 때는 학업을 계속 하시려고 들어오셨는데, 어떤 뭐 유학 결정이 났을 때 어느 학교로 좀 공부를 하실 생각이셨나요? 어느 전공, 어느 대학 어느 전공으로...
구술자 :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치학 하려고 그랬지.
면담자 : 그런데 LA에 이렇게 머무시게 된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가요?
구술자 : 친구들이 여기 있었으니까
면담자 : 아, 친구 분들이요. 그럼 LA 들어오셔서는 어떤 활동들을 선생님, 하셨었나요? 70년도에 들어오셨다고 하셨는데...
구술자 : 그러니까 뭐 뭐야, 뭐 먹고 사는 데 정신이 없었지. 이런 잡다한 일. 그때만 해도 인제 한국이 가난할 때고 미국만 오며는 모든 것이 풀린다는 그런 그 통념을 가지고들 와서 고생들 많이 했지.
면담자 : 그러면 LA에 처음 오셨을 때는 인제 어떤 경제적 그런 이유 때문에 선생님 직업 활동을 여기서 하시기 시작했는데 어, 이렇게 한국 정치 쪽에나 이런 거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런 활동을 하시게 된 이유가 계기라든가 그런 부분들이 있으셨나요?
구술자 : 내가 그, 한국에 있을 적에는 뭐 무슨 학생 운동을 한다던가, 사회 운동을 한다던가 이런 건 없었고 그때는 굉장히 제한되어 있었고 다만 그,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지. 그러니까 그, 인제 그때만 해도 여기 그, 그러니까는 반 박정희 그, 운동, 반정부 운동이 에...있었는데 그, 그때는 주로 그 원로들, 김상돈 선생님을 중심으로, 어른들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그때 그 젊은 사람들이 낄 자리가 별로 없었지. 또 운동이라는 것도 연줄 연줄이 돼야 조직으로 되고 그러잖아요. 그런 것들이 없었죠. 없었다가 박정희, 인제 김대중 허고 대통령 선거를 71년에 할 적에 김대중 씨가 이슈로 많이 냈지. 4대국 (평화) 보장론이네, 뭐네. 그때 인제 그 김대중씨 정책에 관심을 가졌고 그 뒤에 인제 그 유신 체제가 되면서 김대중씨가 여기로 망명을 왔잖아요. 그래서 그, 유신체제에 대한 아주 그 혐오감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헐 계제가 없었어. 여기 그 무슨 조직도 있었던 게 아니고, 물론 인제 그 있었는데 그 원로들, 김상돈 선생이네, 차상달 선생 원로들, 다 돌아가셨지마는. 말하자면 연줄도 없고 낄 틈도 없고 그러다가 인제 그, 기웃기웃 하던 차에 그, 10.26 사태가 일어났다고. 10.26 사태가 났는데 그때가 점심때야. 그때는 뭐 매체가 발달하고 뭐 그런 때가 아니니까. 여기 뭐 한국 그, 언론 매체도 보잘 것이 없었고. 어...그래가지고 인제 전화로 박정희가 피살됐다고. 어 근데 사람이 죽었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 (웃음) 사람죽고 기분이 좋았던 것은 내가 그때가 처음이야. 그래서 이제 그 내가 그 세상에 이제 좀 달라지겠구나, 했는데 12.12사태가 났잖소. 그런데 그 때만해도 인제 그 한국의 정치 상황이라든가, 유신구조라든가, 이런 것을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군부의 동향은 전부 몰랐고. 그러니까 12.12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미닝(meaning), 그 파악을 못했다고. 그것이 이제 전두환의 쿠테타고 집권으로 가는 과정인데 그렇게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어. 저, 한국 군부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희망적인 것이 없고 물론 한국에서도 그랬지. 그러다가 광주 사건이 일어난 거라고. 그러면서 이제 그 사회 활동에 구체적으로 이제 가담하기 시작했지.
면담자 : 그 5·18이 일어났던 것은 어떻게 접하시게 됐습니까, 선생님이.
구술자 : 그, 그것은 이제 그 미국 테레비도 나오고 또 이제 그, 그때 만해도 주위에서 전화를 하고. 또 이제 우리는 그, 고향이 호남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많을 거 아니야. 호남 사람들이. 그래서 연락을 하고 그래서 그, 알았죠. 근데 그, 그래서 그때 이제 그런 일은 제 3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이렇게 그 생각을 했지. 한국 사람들은 상당히 자기네들이 선진적이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그런 일은 제 3 세계. 한국도 제 3세계인데 일어나는 일이 그런 것이 일어나니까 어처구니가 없지. 그리고 에... 그 『뉴스위크』(Newsweek)의 주간지에 사진까지 해서 생생하게 다 봤다고. 그러니까 열불이 나지. 그래서 그, 그래서 여기서 맨 처음에 그것에 대해서 규탄대회를 한 것이 호남 사람들이야.
면담자 : 네. 그때 당시에 뭐 호남 향우회랄까요, 그런 것들이 조직이 되어 있었나요?
구술자 : 없었어. 그 전에 내가 그 호남 향우회를 만들자고 했는데 나한테도 연락이 왔는데 내가 노 했어. 여기까지 와서 그런 것을 맨들 필요가 있느냐. 그, 말하자면 그, 쫌 우리가 그 분단되고 했는데 폭 넓게 살아야지, 그런 지엽적인 뭐라 그래. 난 반대를 했다고 . 그래서 형성이 안 되던 차에 광주 사태가 일어나니까 특히 그 전라남도 사람들은 기가 막힐 거 아니요. 흥분이 더 되지. 그래서 부랴부랴 그렇게 그 몇이서, 차철이네, 장경희네, 박완철씨네, 김수근씨. 이런 사람들이 연락을 해서 그냥 호남향우회라는 그 명칭으로 그, 규탄대회를 6월 1일 날 처음으로 했다고, 일요일날. 그 뒤에 아, 안 되겠다. 이제 그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까 우리라도 뭉쳐서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가자 해서 그 뒤에 호남향우회가 만들어졌어, 그 뒤에. 그건 내가 적극적으로 종용하고. 그래서 이제 그 시카고 호남 향우회, 워싱턴, 워싱턴에서 그때 조직돼서 내가 가서 축사도 하고. 이렇게 해서 호남향우회가 결성이 됐지. 그러니까 그 호남향우회는 상당히 역사적이야. 무슨 지방적인 게 아니라. 그 선언문에도 있고 향우회 규약 전문에도 쓰여 있지만 내가 썼지마는, 그 역사성을 강조한 거라고. 지역성보바도. 그래서 그 뒤에 운동권에서 광주 규탄대회하고 기념식 하고 그러면 호남향우회에서 돈을 많이 대고 그랬죠. 그러고 6월 1일날 호남향우회 저거 하고 6월 8일날 인제 대대적으로 규탄대회를 했죠. 영빈관, 영빈관이라고 식당이 있었어. 식당 VIP 식당이라고, 여기 그 주차장에서 했는데 아마 LA, 내가 그 그 뒤에도 집회도 여러번 해봤는데 그 때가 LA 지금까지로 쳐서도 젤로 많을 거야.
면담자 : 규모가요?
구술자 : 규모가. 김대중씨가 왔을 때도 그렇게 없었어. 김대중씨 2차 망명 때 와서 강연할 때 내가 사회를 봤는데 그때도 그, 그렇게는 안 모였어. 그때 굉장히 모였어. 1000명 정도 추정을 했는데 그래가지고 그때는 모두가 흥분을 했어. 모두가, 여기에 있는. 동포들이 그래서 그 궐기대회 그 규모도 상당히 크게, 저저 폭넓게 했지. 그때 주축이 됐던게 국민회의라고 라고 있어. 김상돈 선생이 하던. 내가 자료를 줄테니까 나중에 읽어보라고. 그리고 신한민보라고 그 신한민보가 그, 그 일본 식민지 때 교포 언론으로 그, 되어 있는데 이제 조선일보 김운하씨가 그것을 인수하면서, 굉장히 역사적인 신문이야. 그, 해방, 저 독립운동 사료가 굉장히 많은 신문인데 그 신문을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던 김운하 선생이 그, 인수를 하면서 반정부 신문이 됐지. 그래서 신한민보 본 줄기에서는 불편이 많았다고. 국민회의하고 그 신한민보가 주축이 됐다고 봐야지. 그래서 그때만 해도 전부 그, 흥분 상태야 뭣을 조직적으로. 그래가지고 운동권 측면에서는 인제 그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 첫째는 그때 그 영빈관 대회에 모인 단체가30여개 였어. 뭐 백범 뭐 기념사업회니 뭐니뭐니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대표들이 모여서 민주화운동 협의회를 맨들었다고. 그러니까 최초의 통합 단체야. 그니까 모든 것을 힘을 합쳐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런 그, 것과 또 하나는 북한이 뭔가, 도대체. 북한이 쳐들어온다고 자꾸 그, 위기, 사건 때마다 이러는데 과연 북한이 뭔가. 근데 동부는 상대적으로 그 진보 세력보다도 진보 인사들이 많이 있었어, 진보 세력도 있었고. 노광욱 선생이니, 지창보 선생이니, 임창명, 그 대사 임창명씨니. 또 그 동아일보에 있던 서정주 선생 문리대 정치과 다닐 때부터 진보운동을 한 사람이야, 해외 한민보라는 그 신문을 맨들어서 그 구심점이 됐다고. 근데 서부는 진보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되. 서부는 반공 민주화. 이 노선이 그랬지. 근데 그것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그 운동 측면에서는 그 두 가지의 그 변화 현상이 일어났어. 그러니까 그래서 인제 운동이 점차 조직적으로 되어가기 시작했지. 조직적으로. 어...그런, 그런, 그런데도 유동기고 또 아까 얘기했던 한국의 군부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그저 그, 말하자면 그, 좀 희망적이었지. 그런데 그것이 안 되겠다고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1981년에 1월달에 전두환이가 여기 왔잖아. 레이건이 그 취임하자마자 초청을 했다고. 그건 왜 초청한지 알죠? 어? 카터 대통령이 인수인계를 할 때 냄겼다고. 이 문제를 해결해라. 김대중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 그 카터 일기에도 나와요. 그게, 내가 있는데.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레이건이 전두환이를 제일 먼저 불른 거라고. 근데 한국에서는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한국 대통령을 불렀다 해가지고 굉장히 그, 그그, 다른 각도로 써먹었지. 근데 거기만, 워싱턴만 갔다가 얼른 갔으면 되는데 여기서부터 바람몰이를 한다고 온 것이 되게 걸렸지. 그때는 굉장히 대대적으로, 그때는 이미 평이 갈렸어. 광주 항쟁 때 흥분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체제를 그러니까 인정하고 그쪽으로 빠져나가고 이제 그 그, 소위 그 반정부 반 전두환 정권, 군부정권 세력이 조직화되고 힘이 생기기 시작했지. 그걸 계기로. 그때의 그 80년도에, 80년도 그 항쟁 기록을 내가 찾다가 지금 못찾았는데 이거는 (자료 제시하며) 전두환이 왔을 적에 생생한 좌담회야. 그러니까 그 한번 읽어보시라고. 그래서 이제 그 광주 항쟁이 어...일어나자 내가 여기 보냈는데, 여기 있는 시인들이 광주, 인제 그때 광주 항쟁 때 제일로 많이 읽힌 것이 김준태씨의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야. 그 103행인가 그럴 거야. 군데군데 깎여서 여기 들어왔어. 내가 시극, 시극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그 광주 항쟁의 겪고 여기 있는 시인들이 그, 그 말하자면 그 참상이랄까, 그 저걸 시로 발표를 했다고 여기저기에. 그것이 묶어져나온데 그게 이 󰡔빛의 바다󰡕야 광주 항쟁의 시집은 이게 세계에서 이제 최초야. 인제 내가 편집을 도와주고 그랬는데 이걸 읽어보면 시라기 보다는 굉장히 흥분되어 있어. 그때만 해도 여기 그 한국 타운의 가장 그, 큰 마켓의 담벼락에 전두환이 찢어죽이라고 어떤 놈이, 어떤 사람이 크게 그 페인트로 써놓기도 하고 그랬어. 이게 그 역사적인 거고 지금 이게 후에 󰡔다시 쓰는 빛의 바다󰡕라고 해서 이게 광주 탈상할 때 기념으로 해서 나온 거라고. 가지고 가쇼.
면담자 : 그 선생님, 그 6월 1일날 처음으로 규탄대회를 했는데 6월 1일은 어디에서 규탄 대회를 했나요?
구술자 : 아드모어 공원(Ardmore Park)이라고 있어요. 저, 올림픽 한국 타운
면담자 : 그때는 인제 호남 향우회, 호남향우회라는 그런 명칭으로 모인건가요?
구술자 : 호남사람들이 주로 했어
구술자 : 면담자 : 그때는 한 몇 분정도 여기 참여를 하셨나요?
그래도 그 한 그래도 그, 한, 한 이백명은 됐을거야. 여기 호남 사람들만 온 것이 아니고 그 호남사람들이 적극 해서, 해서 그 나도 무슨 발표하고 그랬을 거야.
면담자 : 그때 미국인들의, 현지인들의 반응이라든지 이쪽 언론들의 반응, 뭐 인터뷰를 하거나 그런 반응이 있었나요?
구술자 : 그, 그것은 인제 그때는 없었고 6월 8일 날 영빈관 해되를 할 적에는 『LA타임스』(LA Times)에서 크게 쓰고 그리고 그. 왜냐면 여기 언론은 이,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었어. 그러고 전두환이가 대통령이 돼서 여기서 왔을 적에도 여기 그 일부 텔레비 방송국에서도 항의 데모하는 우리를 더 취급해줬다고. 그래서 우리 대변인도 맨날 했지.
면담자 : 81년 전두환이 LA로 이렇게, 아니 방미해서 LA로 왔을 때도 엄청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술자 : 아 그 때가 더 컸지. 왜냐면 매일 했으니까. 전두환이 따라다니면서. 긍게 경찰들도 여기서 그, 시위하는 법을 다 아르켜줘. 밤 10시 넘으면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하고. 호텔 투숙객들이 항의를 하면 불가불 쩌기 하니까. 폴리스 라인을 쳐놓고 그 또 반대 세력과 격리시키고 우리를 많이 보호를 해주더라고.
면담자 : 뭐 통일교 세력 하고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구술자 : 그때 그 통일교 세력이 올림픽에서 통일교 세력이 태권도 하는 애들을 동원해서 데모도 하고 충돌이 있었지. 그 여기 다 나와요.
면담자 : 그, 그것은 반대 충돌이 일어났던 통일교 세력은 외국인이었나요?
구술자 : 그렇지, 주로 백인들
면담자 : 어떤 사주를 받아서 그런건가요?
구술자 : 그렇지, 그렇게 봐야지. 그 통일교가 본래 문선명씨가 북한을 가기 전까지는 그, 반공세력 아닙니까. 승공협회가 있고. 그 통일교의 정치단체가 승공협회야. 그래가지고 그 반공행동을 굉장히 했지. 그러니까 그런데 문선명씨가 북한을 가서 김일성 주석하고 만나서 하면서 그 반공 노선이 없어지고 말하자면 그, 통일지향적인 그런 색채를 띠기 시작했지. 문선명이가 세상을 떠나고는 그것도 좀 희미하지. 그래서 이제 그 전, 전두환 대통령이 그, 방미를 계기로 해서 조직이 인제, 인제 굳어지고, 보다 인제 운동이 조직화되는 계기가 됐지. 그러고, 그래서 운동이 그때 인제 그래서 젊은 층들도 많이 참여를 하게 됐고. 그러다 일 년 후에 인제 우리가 그 민주화 운동 협의회를 열심히 할 적에 인제 윤한봉 선생이 나타났지. 82년 11월 달에 여기를 왔지. 그래서 갈등이 많았었지.
면담자 : 선생님, 기존에 여기에서 그런 관련한 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어느 정도 이렇게 자리를 잡고 계시는 과정이었는데 이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서부는 다소 좀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반공 민주화가 좀 이렇게 강한 이런 성향이 있어서 이런 민주화 운동 협의회 단체를 결성하고 난 뒤에 쫌 어떤 갈등, 교민 사회 내에서 갈등구조 같은 건 없었나요? 현지...
구술자 : 그냥 그, 그때만 해도 진보적인 색채를 뭐 뚜렷이, 말하자면 나타낼 말하자면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반정부 운동세력으로 이렇게 되어 있었지. 그런데 이제 LA가 그, 한국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인제 그 달라졌지만 그때 당시의 데모그래픽(demographic), 인구 구성이 이북 사람들과 호남 사람이 많았어. 왜냐면 이북 사람들은 어차피 피난 왔잖소. 그러니까 고향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개척자 정신이 많아서 이쪽으로 많이 왔고 호남 사람들도 찬밥 아니요. 그래 이쪽으로 많이 왔어. 어, 그래, 그래서 로스엔젤레스의 경우는 소위 그 민주화 운동, 반정부 세력 이런 반정부 세력 주축이 이북 사람들하고 호남사람이 많았다고. 그게 특징이야. 저...그래서 여기서 그때 그 용산 고등학교 애들이 많았어. 용산 고등학교가 거기가 피난민 학교거든 (웃음) 이북서는. 그래서 이제 그 북한이 뭔가 하다가 이제 그, 내가 자료를 줄테니까 이제 그, 카터 행정부가 북한 여행 금지를 풀었다고. 그 전까지만 해도 쿠바, 베트남, 월맹, 노스 코리아, 이곳은 여행 금지국이라고 써져 있어, 영주권에. 그것을 카터가 풀었다고. 그러면서 북한이 미국에 있는 관광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그 처음에 갔다 온 것이 여기 그 민족학교 초대 이사장 하던, 지금 돌아가셨는데 최진환 박사가 갔다 왔지. 거기에 대하서 글도 쓰고 그랬는데. 그러자 이제 물론, 이제 70년대에 갔다 오신 분들도 있어 동부가 더 많지. 여기서도 양은식씨가 76년에 갔었나, 아마 갔다 오고 그런데 인제 그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인제 그, 하면서 여기 있는 이산가족들이 북한을 많이 가. 가게 됐지. 그래서 북한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일어났다고. 인제 그 그래서 이제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책을 그, 낸 것이 책을 편집 활동을 나는 관여하고 했는데 방북기예요. 󰡔분단을 뛰어 넘어󰡕. 그 책이 나와서 그, 한국 운동권에서 그 지하 책으로서 상당히 저걸 했다고. 그리고 그거를 그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통협이야, 통협. 조국 그러니까 그, 이게 이 그러면서 친북세력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지. 그래가지고 그 인제 그 구도가 어떻게 되었냐면 일단 빨갱이냐, 안기부 앞잡이냐, 이런 논란이 있고 그랬죠. 내가 자료를 줄 테니까 그걸 쭉 읽어보시고.
면담자 : 그러면 그 6월 8일 날 인제 범동포 그 대회를 좀 크게 연거 같은데 그 이후로는 이런 뭐 다른 모임이나 활동들이 있었나요?
구술자 : 있었죠, 이슈 있을 때마다 모여서 그 데모를 하고 이런 걸 데모하고...
면담자 : 주로 인제 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민주화운동협의회가 중심이었나요, 아니면 호남 향우회가?
구술자 : 호남향우회는 뒤에가 있고 그 호남 향우회가 나서써야 쓰겠습니까? 모양새가 안 좋고. 그래서 돈이나 대고. 그래서 아까 이야기 했던 그 협의회하고 신한민보, 김상돈 선생이 인제 여기서는 제일로 어른이니까. 또 한국에서 민선 시장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아주 그 대단하신 분이야. 그 분이 버티고 있으니까. 그분, 그분이 인제 중심이 돼서. 그분한테는 무서운 사람이 없지. 자기 정치적인 경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그래서 박정희 화형식도 시키고 이렇게 그, 가령 이런 거야. 무슨. 그 전에도 민청학련, 광주 사태 나기 전에도 민청학련사건이 난다던지 인혁당 사건이 난다던지 그러면 인제 데모하고 박정희 화형식도 하고 그랬지. 그 김상돈 선생 중심으로. 그러나 좀 더 조직화되고 그 동포 사회에 그,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광주 항쟁이 계기가 됐지. 광주 항쟁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전두환 세력을 변호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뒤로 인제 말하자면 또 그 이슈, 그러니까 무슨 한국 같이 뭐 조직적으로 뭘 한다기보다는 이슈 중심으로. 뭐 그리고 여기서는 한국같이 직접적으로 투쟁하고 그럴 저기가 뭐 없잖아요. 그렇게 했는데 인제 윤한봉씨가 오면서 윤한봉씨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전략과 새로운 방식으로 운동을 하면서 운동권이 양분되지, 크게. 윤한봉 세력과 기존의 세력. 그런데 이제 기존의 세력은 중심이 된 게 통협을 중심으로 해서 그, 저 그, 이북서 온 사람들이야. 그게 그, 우리는 그 쉽게 얘기하면 한강을 그 보며는, 한강에 가며는 감회를 느끼듯이 그 사람들은 한강보다는 대동강이 더 그런다고. 종류가. 떠나온 지가 오래되고 또 남쪽에는 근거도 없고. 갑자기 그쪽으로 기울지. 그런데다 인제 북한은 정치적으로 그 활용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을. 그래서 북한에서도 여기 있는 남쪽 지향적인 한인회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드라고 했어요. 그래가지고 해외 동포 위원회 위원장이 여기 와서 나하고도 단독 면담을 해서 그걸 조직하는 걸 도와달라고 나는 노 했어요. 그런 거 미국서 맨들면 안 된다고. 그랬더니 몇 년 있다가. 여기 사회 대치 구조가 어떻게 되냐면 한인회의 대칭 구도가 동포 연합이고. 평통이 있잖아요. 한국 정부 평통. 김대중 정권이 들어오라고 평통으로 오라고 했는데 난 안 했어요. 안한다고 또 신문에 났더구만. 내가 그, 그, 민족 운동하는 사람이지 정권 옆에 가는 사람이 아니야. 이 평통하고 대칭 구도로 만든 것이 범민련이라고. 이 범민련 창설대회에는 내가 참여을 했어, 직접. 범민련을 만들 적에. 그 평양 가서. 범민족 대회 할 적에, 내가 ㅇㅇ141108_은호기01_00:38:16 범민족 대회 할 적에 그 미국 대표단 단장으로 갔는데. 그래서 그 평양에서 그 범민련을 맨들 적에 난 보류를 해놓고 왔는데 결국은 그것을 그, 범민련을 맨든 것은 두 가지 그 목적이 있었어. 나중에 파악한 거지만 나도. 왜냐면 남쪽에서 옛날에는 지하에서 북을 지지해주고 그랬잖소. 그러니 범민련이라 하는, 말하자면 범민족 대회도 한국 운동권의 전국 연합에서 말하자면 제안하고 북한이 받아들이고 해외가 호응을 해서 이루어진거거든. 그러니까 그, 그때 당시 80년대 그 숨 막히는 운동권의 활로를 거기서 찾았다고, 범민족 대회에서. 좌승우나 이해학 목사네. 또 광주 그, 희태, 김희태니. 그, 그래가지구 내가 그 서울로 그 조직 때문에 몇 번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었는데 북은 생각이 달랐던 거야. 그래서 이제 지금 그 말하자면 해외 통일 기구로 변질 됐어. 그러니까 그 이, 평통회 대칭 구조가 범민련이야. 한인회의 대칭구도가 전국 연합이고, 동포 연합. 그래서 그 동포 연합이 지금 오스트리아, 그리고 유럽. 유럽은 독일이지. 뭐 그, 그 저 뭐 각 지역에 다 돼서 비슷비슷해 이름이. 동포는. 내가 보기에는 그게 미국하고 북이 수교만 되며는 그게 일본 총련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 총련의 기반이 되는 거야. 그 구상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인제 그 미묘한 갈등이 있지. 쉽게 얘기하면 우리는 통일 운동을 하드래도 어...통일 운동을 하면서 북쪽의 가치를 인정을 허지, 하지만 북한의 편에 서지는 않는다고. 그런데 그 이제 그 동포 연합 사람은 완전히 그 해외 동포 북쪽의 어느 해외동포 어느 위원회의 산하조직 같이 되어 있다고. 거기서 의장도 결정하고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한계가 있지. 우리하고 같이 하기는 해도. 그러니까 이제 거기에서 그 흔히 얘기하는 색깔논쟁인데, 색깔 논쟁이란 건 다른 게 아니야. 색깔이 다 똑같을 수는 없잖아? 이북 같이 다 한색일 수 없잖아? 그러면 자기의 색깔을 자기가 인정을 해야 하는거야. 어? 그러고 그 색깔의 한계 내에서 운동을 하고 그래야 한다고. 그런데 자기가 그것을 인정을 않구 남을 그 기준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색깔 논쟁이 일어나는 거라고. 그래서 그 말하자면 윤한봉 선생이 북한의 가치를 철저히 인식시키고 그, 북한을 옳게 보는 데에 상당히 기여를 했어. 그렇지만은 종북주의자는 아니야. 쉽게 이야기 하는대로. 그러니까 그 두 줄기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어.
면담자 : 그 윤한봉 선생님 처음 오셨을 때 선생님과 갈등관계가 있지 않았었나요? 그 기존에 운동을 선생님이 여기서 계속적으로 지속해서 진행해오셨던 이렇게...
구술자 : 그런데 나는 인제 성격이 무슨 조직에 들어가서 무슨 장을 하거나 이런 사람이 아니야. 장을 하고. 그래서 유일하게 운동권에 오래 있으면서 장 안 해본 사람은 나일거야. 그저 뭐 한 무슨 공동의장 이런 것은 많이 했지. 그런데 윤한봉씨가 와서 김상돈 선생댁에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 자기 신분도 있고 그러니까 윤한봉씨가 가명을 쓰고 김상원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으니까 누가 오기는 와있는데 수군댈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막 이 얘기가 부풀어 가는 거야. 처음부터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했으믄 모르는데 가명을 쓰지. 저기하지. 그리고 또 밀항했다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고. 그래서 그, 그래가지고 말이 많았다고. 그러고는 인제 윤한봉씨가 와서 여기 운동권에 있던 핵심 사람이라든지 원로라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인제 그 사람들로 볼적에는 불쾌하지 왔다는데 어떤 놈이 왔다는데 뒷조사나 하고 다니고. 그런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 윤항봉씨를 한번 불렀어요. 우리집에. 너 살아온 과거를 한번 쭉 얘기를 해보라고. 그니까 그 쭉 하더라고요 그래서 됐어. 그래서 기존 운동권에서는 여기 최진한 선생하고 내가 제일 먼저 윤한봉이를 지지하고 나왔지. 근데 그 최진한 선생은 쫌 성격이 좀 모나. 그래서 갈등을 많이 일으키고. 나는 또 좀 두리뭉실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떤 조직에 깊이 개입을 않는 사람이니까. 어.. 좀 그렀지. 그래서 최진한 선생이 참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았죠. 한국 정부에서도 고통을 받고. 나 같은 사람은 한국 그 입국 금지를 당해보면 뭐 그런 갑다하고 마는 거지, 뭐 갈 일도 없고. 다만 집사람들 우리 식구들만 귀찮게 안 하면. 불쑥 불쑥 찾아가기도 하고 ㅇㅇㅇㅇㅇㅇㅇㅇㅇ141108_은호기01_00:45:55 그러진 않으니까. 그래서 최진한씨가 그, 고생을 많이 했어요. 윤한봉씨 때문에. 문제는 윤한봉씨가 귀국을 하면서 민족 운동 부분이 다 정리돼버렸다고. 그래서 없어지고. 그러니까 최진한 선생 같으면 설 자리가 없는거야, 그렇지 않겄소? 참 그, 외로웠지.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수가 없고. 그러고 돌아가셨어. 그 저쪽 양은식 노길남파에서는, 양은식이나 노길남이나 다다 오래된 친구들이야. 그사람들이 늘 그랬거든 윤한봉이가 들어가면 다 와해된다고. 뭐 그렇게 된 셈이야. 윤한봉씨가 여기 와서 일을 참 많이 했는데. 참 많이 했어. 그것이 인제 지속이 됐더라면 좋았을텐데 지속이 안 되고 뚝 끊기고 맥이 없어져 버리니까. 그만큼 미국에 있는 저, 역량이 줄었다고 봐야지. 그리고 인제 통일운동으로 넘어가지까 북하고 이해관계가 자꾸 걸리잖소. 장사할라 하는 사람도 있고 이산 가족. 뭐 하는데. 우리야 아무 상관이 없지. 그래도 그, 남북이 잘 나가면 해외에서는 할 일이 없어, 사실상. 그렇지 않소? 근데 남북이 갈등이 있으면 해외의 역할이 커지지. 그래서 그 전두환 정권 때는 북한을 그, 에 대한 해외 동포 역할이 굉장히 컸지. 이 그, (자료 제시) 이런 거 옛날에 이런거 그 한번 읽어보라고. 쭉 나오니까. 윤한봉 추모집에 대해서 내가 쓴 거니까. 책으로 나왔지, 그건. 광주에서. 그 이건 아까 조사장, 방금 한 양반, 책 낸다고 해서 내가 글써달라고 해서 썼, 써준 거라고. 읽어보라고. 나하고는 오래된 사람이고.
면담자 : 뭐 인제 방금 주신 부분에서 제가 좀 질문할 것이 이 안에 다 이제 포함이 되어 있는 내용 같은데요. 간략하게좀, 간략하게만 좀 정리를 해주신다면 80년대 이후 선생님께서 계속 좀 전개해 오신 그런 통일운동이라든지 아니면 민족운동, 뭐 이렇게 그런 운동 활동들에 대해서 선생님이 하셨던, 활동하셨던 거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신다면요.
구술자 : 굳이 그, 그러니까 그, 저, 윤한봉 선생이 여기 오면서부터는 윤한봉 선생의 그.., 같이 했지. 같이 쭉 그 청년 운동을 서포트 해주고 강연해달라면 강연해주고. 강의해달라면 해주고. 내가 두드러지게 한 것은 범민족 대회, 범민련 결성. 이것을 했지. 근데 인제 아까 얘기한 대로 그건 인제 윤한봉 거기에 나와. 그러고 그 뒤에 인제 한 것이, 내가 한 것이 그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 본부. 뭐 잡다하게 했지. 어...그래가지고 나는 또 여기는 운동권이, 한국은 운동, 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도 허고 뭐 그러잖소. 근데 여기는 인제 그런 것 없고 또 정치 추종자들이 있어. 그때만 해도 김영삼파다, 김대중 파다. 그 사람들은 운동권하고 철저히, 에...뭐라고 그럴까, 그 따로 노는 사람들이야. 그래가지고 고 녀석들은 우리를 빨갱이로 모는 놈들이 김영삼 패거리들, 김대중 패거리들이었어. 음...그 사람들이 집권하니까 들어가서 재미도 보고 그랬지 .근데 이제 우리야...
면담자 : 선생님은 이, 이 두 개는 속하지 않고.
구술자 : 이쪽에 속하지. 윤한봉 쪽에. 속하는데 내가 무슨 단체의 장은 그런 것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인제 저쪽하고도 나름 많이 소통을 하고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 일본하고도 그, 또 묶어 볼려고 하는데 일본 세력이 또 이상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이제 아까 이야기했지만 범민족대회 북미주 대표 단장으로 이북을 갔다고 평양을. 도착성명도 하고, 떳떳이. 인제 그 거기는 북한은 서열주의 아니요, 앉아도 서열대로 앉히고 그러잖아. 이런 내가 여러 가지 그 소득들도 있지만 그 소득 중의 하나가, 해외 동포들하고 북한 하고의 긴밀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더라고.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놈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게 그 큰 소득이야. 그래서 해외 운동권 인사들의 북한하고의 그, 유착관계를 그거를 파악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그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것을 모르고 댐비는 것하고 알고 댐비는 것하고는 다르지. 그러잖아? 한계를. 그 사람들 한계를 인정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내가 지켜주니까. 갈등이 일어날 수가 없지. 그런데 인제 구체적으로 부딪치면 이, 말하자면 근데 그 사람들은 자꾸 이쪽, 우리 쪽 조직을 장악을 할라고 그런다고. 범민련 때도 그렇고 6.15실천 위원회도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 그런 그 내가 겉으로는 표현을 않지만 앙금이 남아 있지. 그런게 나 같은 경우는 갈등이 그 사람들하고 갈등, 또 저 김영삼 김대중 똘마니들허고 갈등. 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김대중 추종 세력들이 또 그냥 어느 날 운동세력으로 나타나는 거야. 운동의 그 역사와 맥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게 나는 아깝지. 김대중씨 하고 나하고 논쟁도 많이 했어. 나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나 만나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지. 말하자면 국회의원을 헐라고고 그래야 옳습니다. 그러는데 그,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그게. 김영삼씨 하고도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141108_은호기01_00:54:40 만나면 내가 할 얘기 다 해버리지. 김영, 김대중 선생하고도 나 그랬지. 아 선생님도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뻔했는데 아 저놈들이 자꾸 우리를 빨갱이라고 하니 그것 좀 막아주쇼. 그러고. 그 민족의 지도자는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민족의 지도자는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일단은 민족의 지도자가 되주십시오. 그, 그랬지. 그래가지고 많이. 첨에 오실 적에는 나하고 내가 인제 정치가를 따라댕기는 애들은 좀 달러, 우리하고. 그래 김대중씨 보고 왜 그렇게 대통령 얘기만 하십니까, 그랬더니 아 이 사람아, 이, 내가 그, 그런 그 암시를 안 하면 나를 따르는 사람이 다 없어져. 운동계야 죽으나 사나 운동하겠지만. 그러더라구.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왜 자꾸 돈 있는 사람들만 그렇게 그 애들만 그러시우. 그러니깐 아 그것은 아, 돈 없이 어떻게 정치를 하겄어. 그러니까 걔네들이 싸고도니까 뭐. 그리고 인제 걔네들이 말하자면 나를 빨갱이로 모는 거야. 그래가지고 요즘엔 그런 것이 저런 것이 많이 없어졌지. 그냥 없어졌지, 거의 없어졌는데. 인제 이것은 있어. 아까도 얘기한 동포 연합이라든가 북허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 철저히 북을 대변한다고. 그러나 거기,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안 해. 다만 자기의 색깔을 인정 하고 그 범위 내에서 행동하라, 그러지. 뭐 그런 사람들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그래야할 거 아닙니까. 글고 북한도 그, 국가야, 정부야.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거야.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는 인제 80년대, 90년대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었고 특히 미주 지역에서는 지금 원로로서, 운동 세력들의 원로로서 계시는 부분, 계시는데 지금 현재에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 건가요?
구술자 : 지금은 인제 그, 관여할 분야가 별로 없지. 그런게 그 6.15 공동선언 실천위원회 거기에 그 고문으로 있고 가끔 가서 얘기해달라면 얘기해주고. 또 뭐 그런 정도지. 그리고 우리가 이제 치열하게 그런대로 조직적이고 치열하게 투쟁했을 때는 그 김영삼 정권 전까지지. 인제 그 삼선 개헌 운동이, 그 아, 저저 직선제 개헌 운동이 6.29선언하고 맞물려 있잖아요. 그때 그, 굉장히 대중 운동을 많이 했고. 그리고 아까 조사장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와도 그 핵문제를 가지고 계속 그, 했어. 핵문제는 그 전문가야. 인제 우리는 그래서 이제 김영삼 정권이 그, 들어서고 그니까는 말하자면 일단은 민주화가 성공한 거 아니요, 말하자면. 절차적 민주주의. 구조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러니까 거기에 맞게 말하자면 운동의 내용과 방향과 조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어... 공동으로 인식을 동부에 있는 이형우 선생, 나, 이승만 목사, 뭐 윤길상 함.. 뭐 해가지고 그때 그 조직을 그, 새로운 조직을 맨들려고 내가 뉴욕도 여러번 가고 했어요. 해서 맨들어진 것이 나카(NAKA)야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 나카인데 이게 내가 생각했던 것하고는 좀 달리 그, 가더라고. 특히 이승만 목사가. 그래서 그, 그 뒤에 나카 운동에서 나는 빠졌지. 그리고 또 아니, 그래서 이쪽에서도 이제 나카를 조직하려고 했더니 아까 조사장이랑 몇 이랑. 잘 안 돼 이쪽에. 그래서 이쪽에 나카 세력이 없으니까 이쪽은 그러고 동부중심으로는 나카가 있으면서 그것은 주로 그 의회 로비 그런 걸 하는데. 요즘 잘 하고 있어. 거기도 그 한청, 옛날 한청 멤버들이 실무진으로 탄탄히 진을 치고 있지. 서옥균이, 최강현이. 그런 측면에서 그, 윤한봉씨가, 내가 썼지만 윤한봉씨가 우수한 유명 대학의 학생들도 많이 선발을 했어. 그니까 윤한봉씨가 굉장히 또 광주 항쟁의 수배자고 또 실재적인 조직을 하고 운동을 해봐서 조직하고 설득하고 하는 것에 상당히 그, 활동력이 있다고. 그래서 아주 그런 점에서는 특출하게 잘 했어. 그래서 그, 특히 얘기했지만 북한을 인식하는 데에. 말하자면 윤한봉이는 NL은 아니야, PD인데. 여기가 원체 형편이 없으니까. 또 해외에서는 PD보다는 NL쪽 운동을 할 수밖에 없잖어. 여기서는. 그래서 그 NL은 그, 그런 점에서 그 북한을 철저히 인식하고 김일성 체제를 그, 새롭게 인식하는 데에 기여를 많이 했어. 그래서 윤한봉이가 평화 대행진도 많이 했고 또 UN 분리가입 그 단식 투쟁도 많이 했고. 나도 거기 가서 UN 앞에 가서 저기 하고. 그런데 윤한봉 선생 (레코더 비프음)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합니다.
구술자 : 윤한봉 선생이 귀국한다는데 말리리기도 했어. 내가. 여기서 그 민족 운동을 해라. 그러기도 했지. 그런데 인제 윤한봉이 생각할적에는 내 생각에는 그거는 자기 역할이 끝났다 이렇게 판단할 수도 있어. 상황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김영삼 정권이 뭐 입국을 허가했으니까. 그거 김영삼씨로서는 큰 결단이야. 그래서 그 들어간 것이 좀 아쉽게 됐지. 우리, 여기 있는 민족 운동권 입장에서는. 그리고 인제, 말하자면 옛날에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김상돈 선생이 인제 그 한국 민주당의 거물을 하셨으니까. 통로가 그쪽이야 전부. 원로들, 한국에서도. 윤보선이네 함석헌이네. 김대중씨네. 이런. 운동권하고는 연락이 별로 없었어. 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인제 윤한봉씨, 선생이 오면서 한국 운동권하고 관계가 아주 좋아졌지. 철저히 한국 운동권하고 손을 잡고 우리가 운동을 했지. 그 과정에서 이제 그 조성우 역할이 컸고. 그래 이제 나도 한국 운동권하고 인맥이 많이 생기고 연대가 많이 생겼지. 어...그런, 그게 그 단점이 되기도 하고 말하자면 그, 장점이 되기도 하고 그랬어요. 철저히 저쪽에서 얘기하기ㅔ는 한국 운동권에다 의존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같이 가야할 것 아니야. 그래서 그, 그, 깊이 그 연대를 맺게 된 것은 나로써는 참 좋은 계기였고. 그래서 그...
면담자 : 그 선생님, 인제 미주 지역에서 꾸준히 지금도 현재, 현재 선생님 후배들이 미주지역에서 민족운동을 계속 진행하고, 뭐 어떤 인제, 약간의 방식들, 모습들은 변화됐지만 미주 지역에서 민족운동을 계속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선생님으로써, 먼저 하셨던 선생님으로서 후배들에게 당부해주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신가요, 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랄지.
구술자 : 역량이 많이 줄었어. 첫째로는. 줄고. 인제 군부정권에 대한 대립각을 세울 적에는 힘도 나고 힘도 나고 그랬는데. 인제 지금은 인제 그런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으로 넘어가고 통일운동도 인제 그 6.15남북정상회담 이후는 상당히 그, 뭐랄까 그, 긴장이 없는 운동이 됐잖소. 그런데 어...그런 점에서 인제 좀 더 공부를 하고 구체적인 이슈를 찾아서 그, 해외에서 독자적으로 해야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어. 지금 전부 새로운 사람이니까 모르지. 예를 들자며는, 지금도 무슨 북한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슈가 되고 있다고. 그건 80년대 황석영이 때부터 하던 짓이야. 그게. 그러고 또 무슨 뭐, 국토 종단 뭐 운동을 구체적으로 한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한청이 이미 1989년에 참전 16개국 사람들을 모아서 백두에서 그 대행진을 했다고. 평화 대행진을. 그때 임수경이가 거기 있었지.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이렇게 보면 그 80년대 운동에서 실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별로 나간 게 없어. 그러니 그 그게 왜냐면 미국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해서 뭐를 했냐면, 그 성과도 그렇게 없고. 나는 지금 그 전부터 주장하는 게 그거는 통일 운동은 통일이라는 프로세스 유니피케이션 프로세스(unification process)지, 통일이라는 말을 그렇게 쓰지 말라. 우선 남북이 그, 싸움 않고 왔다갔다 하면 거기서부터 출발하지. 한국 사람들은 통일하면 한국과 한 체제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단박에. 그건 그, 거의 지금으로서는 논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싸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평화 경주 교류 협력, 이걸 착실히 해야 하는데 그걸 가로막는 게 뭐야 그 미국 아니야 미국. 북한하고 평화협정으로 휴전 체제를 끝내야 한다고, 우선. 그래서 이, 평화협정 체결 촉구 서명 운동을 그전부터 내가 그 주장을 했는데 미국 동포들이 주축이 돼서 10만명만 서명을 하면 미국 그래서 의회에 갖다 주면 그런 것은 저 윤한봉 선생이 아주 잘 했다고. 여기 있었으믄 내가 별도로 해서 했을거야, 그 조직을 이용해서. 그걸 안 해. 그러니까 그, 구체적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좀 그, 그런 상태에서 여기서 샌디에고 여기서 한 두 시간 거리에서 사니까. 그, 힘이 안 나지. 그러구 아까 얘기했지만 윤한봉 선생을 중심으로 했던 큰 조직이 없어져버리니까 나로써는 힘이 없는 거야. 또 그렇다고 해서 큰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그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있어요, 지금. 말하자면 그 한국의 운동권도 그렇지 않소. 10년 동안 에...말하자면 그 민주 정부 하에서 남북 관계 개선에 노력하면서 옛날의 세력들이 많이 생각이 그거 관변화가 되어 버렸더라고. 이번에 이창동씨가 왔을 적에도 내가 젊은 애들, 뭐 이 ㅇㅇ이나 창ㅇ 141108_은호기01_01:10:25 이놈들을 좀 키울 준비 좀 해라, 그러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 지금 그, 미국 운동권의 그, 투철한 이론가들이 지금 없고 그, 과감한 행동력을 가진 그, 분도 없고 그저 그런 상태야, 지금.
면담자 : 그런 점이 좀 아쉽다는 말씀이시죠?
구술자 : 그 정도면 됐지? 그리고 무슨 얘기, 얘기 했으믄 (자료 제시) 이거 인제 한번 참고하고. 이게 그 노, 노무현 정권 때 한국 그 통일연구원에서 오럴 히스토리 한 거야, 이게, 이 책이. 거기에 그, 들어있던 그 사람들이야. 이게. 책에. 그러고 첨엔 그러고. 이것은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 있지. 거기서 해외 운동사를 정리허기로 나하고 얘기를 하고 그랬는데 함세웅 신부가 되면서 문국주 파동이 일어나서, 그래가지고 담당하던 양기영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래서 거의, 그런대다 이 정권이 이명박이한테 넘어가면서 이 사업이 중단됐다고. 그러니 그때 그 작성한 명단이 안에 있어. 되가지고. 그리고 또 한 번 참고를 하고 그 전에 줬어야 하는데, 말하자면 명단을 작성할 적에. 그 이것저것 참고로 하고. 혹시 그, 혹시 보충할 것이 있거나 뭐가 있으면 서슴지 말고 참고해. 내가 자료를 찾아주고 알려주고 그럴테니까.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구술자 : 애쓰겄다. 이 오랄 히스토리 정리가 쉽지 않애.
면담자 : 선생님 그래도 중요한 자료 이렇게 많이 주셔가지고 제가 이거 꼭 확인해보고 하겠습니다.
구술자 : 이, 이것은 전두환, 광주 사태 때 그것이 없고 이것은 아주 생생할 때 좌담회 한 거니까, 전두환이 왔을 적에. 그때 굉장했어, 나도 그냥. 이게 인제 그 운동 역사가 좀 들어있고 그러니까 윤한봉 추모집 쓴다고 한 거니. 읽어보고. 이렇게 저렇게 하며는 이제 프레임 워크가 생길 거야. 그래서 그, 기왕 돈 들고 오셨으니까 자료를 그 착실히. 할 얘기야 많지. 많은데.
면담자 : 예. 아무튼 이렇게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은호기 선생님의 구술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재길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조재길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8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조재길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LA에 있는 민족학교에 있는, 아, 뉴욕,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8일 토요일 오후 한시, 열두시 삼십분입니다.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번에 재단 들어오셨을 때도 저희 그, 저희가 그 기록물 담당 부서다 보니까 분류하고 선생님이 가지고 들어오신 󰡔코리안 스트릿 저널󰡕(KOREAN STREET JOURNAL) 저희가 다 펼쳐서 분류하고 일자별로 이렇게 정리하고 이렇게 보존하기 위해서 이렇게 등록하고 그러한 작업들을 저희가 좀 했었는데요, 그때 기증해주셨던 자료 저희가 지금도 소중하게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네. 그, 선생님 일단 언제 태어나셨고 어디에서 좀 태어나셨는지를 좀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어 난, 난 우리 일제 말, 2차 대전 종전 직전인 1943년 2월 16일에 일본에서, 일본 규슈에서 조선인 노무자의 에...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러나 어...이 우리 부모님들이 미국이 일본 본토를 본격적으로 그 이게, 공습하던 1944년에, 내가 첫돌이 막 지났을 적에, 나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에 나는 일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이 고향에, 고향은 이제 충청북도 단양군 어, 단양면, 그 당시는 북산리라는 아주 산골에, 한 30호 정도 되는 조그만한 마을에, 근데 단양이 본래 산세가 험한,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단양 8경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아주 산세가 험하고 특히 우리 고향 복성리는 완전히 산, 산골인데 거기서 이제 성장을 해 자리를 잡고 살다가 잠시 그, 내 유년 시절에 가장 오래된 기억은 단양, 고때 단양에서 살던 기억은 별로 없고 잠시 인제 충북 충주시 주덕면 신양리라는 곳에 가서 거기서 국민 학교를 그 당시는 초등학교, 국민 학교라고. 그때 국민 학교라 했나요, 초등학교라 했나. 거기 입학을 해가지고 거기서 삼년 동안 내가 인제 국민 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있으면서 그때 거기서 6.25 사변을 맞았어. 해서 한국 전쟁을 그 때부터 내 인제 유년기인데 근데 주덕에서는 우리집이 그, 정미소를 했기 때문에 어...아버님이 인제 그 뭐, 참 우리 아버님은 일제 말기에 참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농촌의 아주 어려운 가정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만주로, 일본으로 그냥 온갖 군데 다니시면서 하시다가 인제 한국에 오셔가지고 그 인제 주덕에서 인제 정미소를 하셨는데 정미소를 하실 땐 그래도 우리 생활이 상당히, 내가 살아왔던 어린 시절 중에서 가장 그, 유족했던 그 시절이야. 근데 그 6.25동란 중에, 그 당시 장질부사라고 아주 유행을 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그때 우리 할아버님이 돌아가셨어. 그 아버님이 할아버님 장례식에 그, 다녀오시더니 내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 그 우리, 내가 장남인데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우리 할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까 고향으로 가야된다. 이래가지고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때 우리 어머님이 그 산골로 들어 가며는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겠다고 그 산골로 들어가느냐 하면서 우리 어머님이 반대를 하셨지만 우리 아버님이 나는 그, 장남이기 때문에 아버님이 안 계신 고향으로 가서 지켜야 된다, 하면서 아버님이 들어가셔. 그때부터 인제 그, 단양에서의 삶이라면 참 어려운 삶이었지. 어... 그, 그 해방직후에, 거기다가 한국 전쟁 중에 한국 전쟁이 인제 내가 우리가 단양에 갔을 때 휴전이 됐는데, 휴전이 되고 나서도 그쪽에 게릴라들이 이렇게 있고, 소백산 쪽에서 끊임없이, 그 저, 인제 전투행은?141108조재길01_00:08:15 아니지마는, 공비 소탕이니 해가지고 어, 하고. 전쟁직후라노니까 참 가난하기 이를 데 없고 특히 우리집은 그니까 이게 가난하니까 이제 정미소판 것으로 가지고 와서 논을 조금 샀지마는, 그러고 또 그, 그때 아 저 우리가 단양으로 이사왔을 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을 때라서 아버님이 아버님이 나이가 인제 쪼끔 있으시니까 군인으로 입대하지는 않으시고보급대라 그래가지고 제2 국민병이라고 그래서 두 번이나 그, 그 다른 어떤, 다른 분들은 한번밖에 안 가는데 두 번씩이나 보급대에 가셔가지고. 내가 국민 학교 인제 3학년때 단양으로 다시 이사를 갔는데, 고향으로 4학년때부터 우리 아버님이 인제 보급대에 가시고 그러니까 어머님이 농사를 지으시고 그러니까 누님하고 나하고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또 그 당시에는 화전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야산에 밑밑한 야산에 불을 질러가지고 인제 저 풀들을 제거하고 그걸 인제 뿌리를 캐내고 밭을 만들어 가지고 그니까 국유지라던가 하튼 임자 없는 누가 간섭 안 하는 야산을 개간을 해가지고, 사실 이게 먹고 살구. 그 당시에는 사실 그 우리 단양 촌은 초근목피로 연명한다고 했던 그런 시절이죠. 그러니까 내가 지금 기억이 나는 건 우리 그 동네 느티, 느티나무가 큰 게 있거든. 지금은 느티나무 잎사귀 먹는 사람이 없을 거야. 그 당시에는 느티나무에 봄이 되면은 파랗게 새 잎사귀가 나오지. 그걸 훑어다가 그거를 밀가루, 밀가루는 조금 섞고 그 반죽을 해가지고 이렇게 뭉쳐가지고 느티나무 잎사귀를 우리가 그, 그, 밀가루 반죽을 해가지고 먹던. 그리고 산에 가서 이게, 화전을 할 적에 보면 칡넝쿨에 그 칡이 이렇게 굵직한 게 나와. 그러니까 사실 칡넝쿨 캐서 그거 이제 가루로 만들어가지고 먹고 하던 그 어려운 시절을 단양에서 인제 보내고.
면담자 : 가족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그래서 인제 부모님하고 누님하고 나하고 였다가. 어...우리 어머님이 그, 이, 내 밑에 여럿을 낳자마자 그, 잃었어요. 그러다가 나하고 내 여동생하고 딱 열두 살 차이야, 여럿을 중간에 잃고. 그 여동생 하나에 남동생 둘, 그래서 우리는 그, 3남 2녀인데 나는 사실은 누님하고 둘이만 형제인 것 같고 쟤들은 동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게 우리 막내동생은 사실 내, 나하고 20살 차이가 지니까 아들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그래서 어...그 중에서 인제 우리어머님이 단양으로 이사갈 적에 그 산골로 가면 어떻게 애들 공부를 시키려고 그러느냐고 그러셨는데, 그 아니나다를까 가서 우리 누님이 참 공부를 잘하셨는데 그 중학교 입학을 했는데 보내질 못했어. 합격을 했는데 보내지를 못했다고. 그래서 그거는 우리어머님이 사실은 아들을 학교를 보내야 되기 때문에 나를, 둘을 다 공부를 시키기 어렵다 해서 아마 그, 못 가게 하셨던 것 같애. 그래서 누님은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그냥 인제 결혼을 하고. 우리 집안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 하나지.
면담자 : 그럼 그 단양으로 옮기셔가지고는 국민 학교 이름 기억 나시나요?
구술자 : 어. 단양에서 단양 국민 학교, 그 다음에 단양 중학교.그렇게 단양에서. 우리집은 읍내에서 한 놎재라는 산이 아주 높은 산이 있는데 그걸 넘어서 한 십리쯤 더 들어가서 산골에 사는데 지금 어떻게 다녔는지 몰라. 그 국민 학교 1학년, 저 1학년, 3학년 때 갔으니까 3학년 4학년때 갔으니까 거기 1학년 아이들도 그 놎재를 넘어가지고, 그 칼바람 부는 놎재를 넘어가면은저쪽에 한강에서 그냥 칼바람이 몰아 오는거야 근데 그거를. 지금보다 그땐 굉장히 추웠어. 그 추운 속에 놎재를 넘어가기고 국민 학교 아이들이 그 4킬로 5킬로 넘는걸 걸어가지고 가서 학교를 다니고. 그때는 학교 다니는게 지금 아이들은 도저히 상상을 못할 거야. 그 어려웠을 때. 그 국민 학교를 어.. 그 인제 나는 이제 그 3학년 때 전학을 갔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 인격 형성에 상당히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내가 가기 전에 이쪽에, 충주에 살때는 반장을 하고 일등을 했는데, 이쪽으로 갔는데 그...가니까 전학생이지, 전학생이니까 공부는 잘하니까 공부는 일등을 하는데 반장은 못하는거야, 왜냐면 이건 타교에서, 타지에서 온 아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것이 그때 그 국민 학교 3학년에서 6학년 다닐 때에 고것이 내 인격 형성에 굉장히 영향을 미친 것 같애. 어떻게 미쳤냐면은 그러니까 이쪽에서 내가 완전히 리더로서의 역할을 못한 거야, 전학생이라서. 그러나 그 내가 공부를 잘하고 그 하튼 리더의 지위에는 있는 거지. 그래서 나는 그때 그러니까 주류는 못돼. 주류가 못되고. 또 비주류도 아니고. 그래 모든 사람을 함께 이렇게 어울려 사는. 그런데 고때에 삼년 동안에, 내가 지나오면서 내 삶을 보며는 고때의 고것이 내 삶에 굉장한 역할을 미친 것 같애. 그러다가 국민 학교하고 중학교, 인제 중학교 들어가서는 단양 국민 학교 출신들이 인제 주류가 되니까 그 단양 중학교,, 또 촌에 아이들이 인제 왔으니까 촌 아이들 보다는 단양 국민 학교 출신이 제일 이제 주도적이지. 그래서 이제 중학교 들어가서는 인제 내가 다시 반장을 하고 이제 나중에, 그 당시에는 학도호국단이라고 그러는데 학생 회장을 하면서 이제 주류 쪽으로서 활등을 했지만 그러다가 다시, 하여튼 우연한 계기로 해가지고 고등학교를 혹시 아나 모르겠는데, 사범학교라고 있었거든? 사범학교라는 거 모르지?
면담자 : 예.
구술자 : 교육대학은 알지.
면담자 : 예.
구술자 : 교육대학의 전신이 인제 각 도에 두 개씩, 인제 도청 소재지하고 그 나머지 지역에 하나 해서 각 도마다 사범학교들 두 개씩 있었었어. 있는데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마치면 국민 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는 거야. 그러다가 인제 내가 61년에 졸업하는데 63년에 그게 교육대학으로 바뀌었어. 그 고등학교 과정이 아니고 인제 각도에 두 개씩 있던 사범학교를 그, 폐지하고 도청 소재지에다가 교육 대학을 맨들어서 에, 이제 고등학교 마친 사람들이 들어가서 초급대학을 마치면 국민 학교 교사가 되는 거야. 그런데 이 사범학교를 그, 우연하게 해서 갔지. 근데 사범학교를 갔는데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사범학교를 간 거야
면담자 : 어, 충 충청도가 아니라요?
구술자 : 어 충청도 아니, 그러니까 거기 가서도 공부를 잘하고 하니까 이게 리더급에는 속하는데 이게 경상도 아이들 속에서 충청도 학생은 나 하나 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이게 그래서 그러니까 완전히 주류의 리더는 못 되는 거야. 그래서 그것이 내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특별히 한 그룹 하고 저 이렇게 그룹의 리더가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활동하는 그러한 역할을 내가 평생을 해왔거든 그래서 고런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이 상당히 이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이 되지.
면담자 : 고등학교를 충청, 충북이 아닌 경상도 쪽으로 안동 쪽으로 가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술자 : 그건 뭐냐면 우리,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집에서는 어...대학을 보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대학을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중학교 다닐 적에 뭐 입시 공부를 한다거나 그런 건 없어. 그리고 나는 어...학교 다니면서 그 평생을 사실 공부를 별로 안 했어. 그냥 학교 갔다 오며는 그냥 가방은 팽개쳐 놓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지게를 지고 가서 이렇게 풀을 베다가 이게 소를, 소를 먹이고 하는 농사일을 했지. 농사일을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다가는 장작을 만들어서 그 나무 장사를 한 거야. 나무를 지게에 지고 가서 시장에 가서 판 건 아니고. 겨울에는 눈이 쌓이니까 산에 올라가서 큰 나무를 베는거야. 지금 같으면 불법이겠지만 큰 나무를 베서 가지를 다 치고 그걸 쇠로 이렇게 해서 끈으로 해서 비탈지니까 그걸 끌고 내려 오는 거야. 그러면 아침에 가가지고 큰 나무를 하나 베와서 토막을 쳐가지고 장작을 패 놓으면 그게 아주 몇 지게가 나오지, 하루에. 그래서 처마 밑에다가 아주 차곡차곡 재놓는거야, 장작을 갖다가. 중학교 내내. 그러면 인제 그거를 장사꾼한테 부르면 장사꾼이 마차를 가져와서 이게 그걸 장작을 실어가지.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 사실은 여름에는 농사일을 하고, 겨울에는 나무 장사를 하고. 그리고 나는 촌에서 커봤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그리 안 하는데, 그 당시에 농사꾼들 중에서 제일 상 일꾼이 뭐냐면, 논을 이렇게 갈아엎어가지고, 쟁기질해서 갈아엎어가지고 그 논에다 쟁기질 하기 전에 풀을 쫙 깔고 그거를 갈아엎어가지고 어, 거기다 인제 물을 대는데 물을 대서 그것이 갈아엎은 것을 평안하게 해야하는거야. 왜냐하면 그걸 평안하게 고르지 않으면 물을 넣으면 높은데는 물이 안 가고 낮은 데는 깊고 그러니까 그거를 그거를, 제일 그 최고의 농사 기술자는 그거를 인제 쓰레질이라고 해가지고 쓰레를 가지고 소가 끌면 그걸 가지고 이래 가지고 돌아가지고 그 논바닥을 전체가 평안하게 하는 게 농사꾼 일중에서 가장 기술을 요하는 거야, 내가 그 쓰레질을 하는 농사꾼이었다고. 그게 거 굉장히 어려운데. 그렇게 나는 농사일만 하고 그러면서 어, 이 해방 직후에는 이 아이들에게, 너 앞으로 커서 뭐가 될래 하면 다 대통령이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꿈을 가진 아이들을 전부 다 대통령이 된다고 그래.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인제 군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니까 그 다음에는 인제 장군이 된다고 하는게, 대대통령과 장군이 우리 어린 시절에는 꿈을 그게 어린이들의 꿈이었다고. 그게 나도 마찬가지로 나도 크면 대통령이 된다고 생가하고 그러면서 중학교 가서는 이게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중학교에 가서는, 대학을 갈 형편은 안 되니까, 육군에서 그 당시에는 아주 가장 인기 있는데가 육군 사관학교를 가는거야, 육사를 가가지고 인제 장군이 된다고. 그러니까 농사일을 하면서 공부는 잘 하니까 육사 가는 것이 당연히, 그 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아버님이 하루는 인제 그 마실 이라고 동네 마실을 갔다 오시더니, 안동사범학교 입학원서를 가지고 오셨어. 근데 이제 그, 내 같은 반에 있는 애가 안동사범학교를 가겠다고 원서를 사다놨는데 걔는 성적이 안 되가지고 쳐봐야 안 되니까 원서만 사다놓고 아이구 저, 소용없다고 그러니까 안 간다고 그러니까 그거를 인제 동네에 나갔다가. 참 우연한 것이, 계기가 인생을 바꾸는 거야. 그래서 그 원서를 가져와서 야, 너 이거 한번 시험이나 쳐봐라. 근데 사범학교는 이게 국, 국립이었어. 국릷이니까 요새 말하면 등록금이 없고 돈을 안 받아. 안 받고 학생들한테 매달 그, 그때 그걸 뭐라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하튼 한 달에 지금 현재 미국 돈으로 하면은 한달에 뭐 한 200불 정도를 돈을 줘. 그러니까 저, 돈을 안 받고,등록금을 안 받고 한 달에 200불씩 학자금을 준다고. 누구나 똑같이. 그러니까 사범학교는 그 당시에는 어, 전, 전국의 수재들, 서울도 마찬가지고 전국에서 각지 지방의 수재들은 전부다 사범학교를 가는 거야. 근데 거기를 가라고. 그러니까 아버님이 그러니까 거기 또 졸업하면 국민 학교 교사로 발령이 100퍼센트 나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 한번 시험이나 한 번 쳐보라고. 그러니까 나는 시험공부도 안 하고 농사짓고 그러다가 거길 쳐서 인제 거길 가게 됐지, 가게 된 게. 그래서 인제...
면담자 : 육사, 육사의 꿈이 있으셨는데
구술자 : 육사의 이제 그거는 막연히 인제 앞으로 육사 가가지고 장군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냥 사범학교 시험 쳐보라니까, 사범학교 들어가기 힘들거든. 사범학교 들어가면 그거는 경사야. 그 학교에서 그, 그러니까 각 중학교에서 뭐 일등 하튼 한명정도야 사범학교를 가지 그, 그렇게 쉬운 덴 아니거든. 그러니까 사범학교는 가는 걸 생각을 안 하고. 교사가 된다는 걸 생각을 안 했으니까. 그런데 우연히 그냥 친구가 사다 놓은 입학 원서를 가지고 시험을 쳐서 들어갔죠. 그런데 나는 국민 학교 때는 항상 일등을 하고 그랬지만은 중학교 들어가면서는 일등을 못했어. 왜 못했냐 하면 시험 치는 과목은 전부다 내가 일등인데, 미술, 음악, 체육, 이거는 시험 치는 것과는 관계가 없거든. 그러니까 이거는 일등을 못하는 거야 그러니ᄁᆞ 이제 항상 그, 국민 학교 때는 담임 선생님 혼자 하니까 공부 잘하는 애는 미술 인제 체육도 그냥 점수를 잘 줘가지고 공부 잘하면 일등을 시키는데. 중학교 가서는 선생님이 다 다르잖아. 그러니까 시험치는 것은 항상 내가 매월 월말 고사니 뭐니 치며는 일등인데 나중에 학기말이 되며는 반에서 한 5등, 6등. 뭐 그래가지고 전교, 전교에서 우리 네 반이었으니까 전교에서 뭐 한 20등 정도밖에 못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사범학교를 들어갔어. 시험을 치는건 잘하니까 합격을 해서 들어갔는데 뭐 입학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들어가서 그니깐 뭐 들어갔으니깐 그냥 뭐 나는 교사가 된다는 걸 생각을 안했으니까 별로 이렇게 익사이팅하지는 않고 그냥 왔다갔다 하는거야. 거기다 경상도 애들 복판에 충청도애 혼자니까. 근데 일 학기 성적이 나왔는데, 근데 인제 그 우리 담임샘이 너희 저, 사범학교는 아주 정원제야, 딱 오십명 씩만. 한반에 오십명씩만 있고, 있는데 정원젠데 선생님이 각자 자기 학교에서 일등한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니까 50명 중에 반이 넘어. 약 30명이 자기 학교에서 일등한 애들이야 그 다음에 한 20명 정도는 2등, 3등. 나는 우리 반에서, 뭐 한 6등, 7등 하다가, 그 다음에 전교에서야 한 20등 정도했으니까. 아이구 얘들 속에서 내가 뭐 공부를 가지고 이케 뭐할 수는 없겠다 생각을 했는데 아, 일 학기 성적이 나왔는데 우리반에서 3등을 한 거야. 그래서 이야, 얘들 봐라, 이거 저희 학교에서 반 이상이 일등을 했다고 그랬는데. 그래가지구서는 일학년 일학기때 내 평생 처음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어. 일학년 일학기때 열심히 했더니 내가 완전히 일학년 일학기 일등이야. 어. 그 수재들만 모인 데서. 그래 저, 이제 열심히 하니, 그렇게 열심히 한 이유는 뭐냐면 우리 사범학교 애들은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이 모였는데 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대학을 가기를 원하는데 대학을 못가고 이러니까 우리 이제 경상 북도에서는 사범학생들의 꿈은 대구로 발령을 받아서 야간 대학 다니는 게 꿈이야. 대구 발령이. 그거를, 대구만 발령을 받으면 머리들이 다 좋으니까 대구에 있는 대구대학, 청구대학 뭐 이런 대학이 야간이 있으니까 야간 대학에 가서 야간 대학을 다니고 나서는 이제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할 수 있으니까. 우리 사범학교 학생들의 모든 꿈은 근데. 근데 대구발령 받으려면 이게 성적순으로 받는거야. 근데 성적 순인데 3년간 우등을 하고 그 중에서 일등을 하면 금시계, 졸업할 때 금시계를 받고 대구 발령이 그냥 개런티(guarantee)가 되는 거야. 보장이 되는 거야. 그래서 야, 이거 한번, 일등은 삼년 일등 이 정도라면 내가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이 정도라면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서 해가지고 단연 일등을 했어. 그런데 나중에 학기말 일 학기하고 이 학기를 다 평균을 하니까 우리반에서 3등이고 전체에서 6등을 한 거야 그러니까 네반이니까 네반에서 일등 한명씩 하고 우리반은 원체 성적이 좋으니까 우리반에서 두 명하고 다섯명만 우등상을 준거야. 근데 나는 6등이라서 그만 짤려버렸어. 3년간 우등을 하고 그 중에서 일등을 하면 인제 금시계를 받고 대구를 가는데 고만 그게 아차상으로 그걸 놓쳐 버린거야. 거기에서 인제 대구 발령받아가지고 야간대학간다는 꿈이 사라진거지. 그니까 나는 좀 성격이 좀 나는 뭘 하면 아주 올인을 해버려, 올인을. 평생 안 하다가. 2학년에 올라가서는 완전히 딴사람이 된 거야. 완전히. 근데 우리 사범학교는 그 당시에 인제 미국에, 전쟁 직후라노니까 미국의 시스템이 들어온거야, 우리 한국에. 교육 분야에서는 인제 피바디 대학(Peabody Institute)이라고, 미국에 피바디 대학이라고 있는데 거기 피바디 대학의 사범학교하고 한국의 문교부하고 해가지고 피바디에서 이게 그, 파견들 나와가지고 미국 교욱을 우리, 그 중에 시범학교로, 이게 전국의 몇 학교가, 한 세 학교가 이렇게 정해져가지고 피바이에서 이게 교수진들이 오고 피바디에서 돈을 보내고 아주 특별한 교육을 시키는거야. 미국식 교육을. 그, 그래서 우리 학교는 인제 다른 학교는 사범학교는 인제 졸업하고 나며는 국민 학교 교사가 되니까, 다 선생님. 학생들을 바로 3년 후면은 선생님 될 사람들이니까 고등학교에서부터, 사범학교에서부터 인격적으로 대우를 해 리스펙트(repect)해. 그런데 특히 우리 학교는 전국에서 세 개밖에 없는 피바디 그 시범학교라보니까 카운슬링 제도가 인제 처음으로 우리 한국에 도입이 되고. 모든 것이 아무튼 미국식으로 해가지고 머리도 기르고, 머리도 그리고 복장도 자기 맘대로 입는 거야. 물론 교복이야 있지. 교복이 있지만. 그리고 학생들한테 체벌이 없고, 그 하여튼 미국의 학교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야. 근데 그러니까 이제 2학년 올라가면서는 교과서를 하나도 안 샀어. 글고 신문배달을 시작했어. 신문 배달을 하구서는, 신문 배달을 일찍 하고 나면은 부지런히 뛰어서 신문 배달을 하면 다 하고 지각 안 할수도 있다고. 신문배달 한다고 하고서는 그, 매일 지각하는거야. 매일 지각하고 교과서를 하나도 안 사고 신문 배달 하고 나면 신문 한 장만 또르르 쥐고 손에 쥐고서 고 다음에 머리를 길러가지구선 모자는 뒷주머니 이게 집어놓고. 다른 애들은, 사범학교에서는 전부 모범생이야. 왜 모범생이냐면 전부다 공부 잘하는 일등하는 애들만 모였으니까 모범생인데다가 학교 성적을 잘 받아야 성적순으로, 대구는 아니라도 좋은 데를 가고, 그 저 성적이 나쁘면 저 산골로 가고, 섬으로 가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성적순이다보니까 전부 다 이렇게 그, 본래 모범생들이 모여가지고 이 성적을 잘 받으려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나는 그냥 2학년 올라가서는 그리고 위에 옷을 저기에 아마 나올거야. 여기 사진에 나오는데, 그...보며는 다른 아이들은 다 교복을 입고 있는데 여기. 나만 군복을 물들여가지고 입고 다녔어 군화를 신고 운동화 척 접어 신고. 다른 아이들하고 일부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 같으지? 그러니까 그렇게 그 매일 하튼 군복 물들여가지고 입구서는 운동화 척 접어 신고 터덜터덜 가는 거야. 앞에서 조회를 하고 교장선생님이 단상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그냥 교문에서 휘적 들어가며는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저기 교문에 들어오는 놈 저놈 학생이냐고. 교장 선생님이 훈화하고 있으면 쫓아가서 뒤에 가서 서야되잖아. 그러니까 처절처절 들어가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저놈이 학생이냐고 뭐냐고 하니까, 그냥 가다말고 탁 꺾어가지고 90도로 꺾어가지고 처절처절 교실로 들어가는거야. 어. 그러니까 교장선생님이 막 이렇게 뿔이나고 그래도 야단은 못치는, 안치는거야, 그 학교는. 그렇게 한 석달을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 너는 가르쳐라. 나는 내가 키가 제일 큰 것도 아닌데 맨 뒷자리에 앉아서, 나 자리 바꿔 이래가히고 다른 애들 뒤쪽 중간 자리로 보내고 나는 맨 뒤에 앉아가지고 신문만 천천히 보고 앉아있는거야 신문만. 그 당시에 신문엔 한자가 많이 있으니까 그 신문에 있는 한자를 가지고 한자를 쓰고 앉아서 수업은 전혀. 만날 선생님이 일교시 시작하고 나면 더러럭 뒷문 열고 들어가서 뒤에 척 가서 앉아가지고. 하루는 그러는데 갑자기 조용해. 가만히 이래 보니까 선생님이 앞에서 그, 가르치던 선생님이 바로 옆에 와있는, 계시는 거야. 그래 일어서라고. 일어섰지. 그러니 선생님이 앞으로나가셔. 근데 그 선생님이 어떤 분이냐면 학생들한테 존댓말을 꼭 쓰시는 선생님이야. 누구한테 야단치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없는 사람이야. 꼭 예대하고. 상주 사람이라가지고 상주 사람들은 끝에 예자를 붙여서 해. 그러니까 이랬어예, 저랬어예, 하면서 그 학생들에게 존댓말쓰고 학생들한테 꼭 인격적으로 대하고 아주 아주 그런 그 양같은 분이신데 이분이 화를 못 참아가지고, 지학 선생인데 화를 못 참아가지고 앞에 가서 화를 억누르고 수업을 하려고 하다가는 책을 팍 찢어가지고는 내동댕이치고서는 수업 안 해도 좋다. 그러면서 인제 나를 한시간 내내 야단치시는거야. 그러니까 애들이, 내가 그럼 그걸 듣고 있어, 그냥 나갈려고 그랬더니 애들이 양쪽에서 콱 바지를 붙들고 쥐고 있어가지고 나가지도 못하고 선생님이 그냥 날 세워놓고 한 시간 내내 야단을 치니까 그냥 멍하니 있었지. 그 선생님 골자는 니가 지난 2학기때 시험을 치며는, 자기 시험에서 80점 넘게 받은 사람은 그, 지금까지 별로 없었다 이거야. 근데 너는 시험만 치면서 맨날 90점이 넘어가지고 너는 특별한 놈으로 내가 봤는데, 지금까지 너처럼 그렇게 하는 애는 없었다, 이거지. 근데 너는 공부를 아무리 잘하면 무슨 소용 있냐? 인간이 돼야지. 너 지금 하는 거 보니까 너는 인간이 되먹지 않았다말이야. 그래서 너같은 놈은, 너 같은 놈은 선생이 되면 안 되니까 너 같은 놈 필요 없으니까 학교에서 나가라고 그러면서 지금 나뿐만 아니라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너 때문에 지금 골치가 아파 죽으려고 그런다고. 그러면서 한 시간 내내 야단을 치시는거야. 아 그러고 나니까 나중에는 등줄기에서 땀이 차더라고. 처음에는 뛰어나갈려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두 번째, 그담시간부터는 선생님이 들어오자말자, 그리고 내가 그 저 호적이 잘못되가지고 1943년생인데 1944으로 돼 있어. 호적에. 그러니까 우리 출석부를 나이 순서대로 하는데 내가 나이가 제일 작아. 그 우리 반에서. 근데 진짜로 제일 작은 건 아닌데. 그 한 애가 호적이 잘못되가지고 44년생으로, 모든 건 다 서류는 44년생으로. 그래 날 저 선생님들이 맨 끝에 가서 내 이름을 안 부르고 막내, 이래부르고 끝난다고. 그래서 출석을 부르고 그 나를 무슨 막내 일어서, 이 선생님들 매 시간마다 선생님들 들어오시면 일으켜세우니까 내가 너를 야단치려고 했는데 오범식선생님이 그, 내 야단을 쳤다고. 너 그럼 못쓴다고. 아, 이건 그냥 매시간마다 야단을 치는거야, 선생님들마다. 그래가지고 아 이게 풀이 팍죽어가지고 있는데 한 며칠, 한 이삼일 후에 우리 인제 그 나동성선생님이라고 하시는 그 교무 주임선생님이 그, 부르시더라고. 부르시더니 너 오범식 선생님한테 야단맞았지? 너는 그렇지 않아도 교무실에서 지금 너 때문에 이걸 지금 어떻게 해야되느냐고 선생님들 다 그러는데, 너는 대학을 가라. 너는 대, 저, 이게 국민 학교 선생을 할 놈이 아니니까, 너는 대학을 가라. 저는 우리집에서 나를 대학을 보낼 형편이 안 됩니다. 그랬더니 니가 대학을 가면 너희 부모님들이 못 보내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보내줄테니까 가거라. 그러면서 이분이 이북에서 월남을 하셨는데 월남을 하셔가지고 인제 동대문 시장에서 군복 물들여서 파는장사를 하시면서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그리고 인제 우리 학교 와서 일반 사회를 가르치면서. 인제 그 교무즈임까지 되신 분이야. 이분이, 너는 지금부터 공부를 해라, 그러시고 났는데 내가 인제 신문을 배달하는데 그 내가 신문 어느 집 배달 갔더니 그, 그집 아주머니가 매일 이렇게 나와서 이렇게 한 일주일을 날 보시더라고. 신문을 가면 그냥 던져 놓고 오는데 신문 가는 시간 되면 꼭 보고 그러더니 한 일주일 후에는, 너 우리집에 들어와서 가정교사 하라. 국민 학교 저, 5학년짜리 아들을 가르치라고.
면담자 : 선생님이 사범학교에 다닌다는 걸 그 아주머니는 알고 있었나요?
구술자 : 글쎄 모르지 하여튼 그랬는데, 나중에 생각을 하니까 학교의 선생님들이 아마 부모, 그 집이 사장이야, 그 한국 타이어라고, 한국벨트라고, 타이어가 아니고. 안동에서 그 당시에는 안동에서 제일 큰 공장이었는데 뭐 공장이래야 규모가 지금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안동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공장인데 그 집에 그 한국벨트 사장 거기 뭐 공장도 있고 집도 있고 그러는데. 그래서 그 집에서 들어오라고. 아마 내 생각에는, 확인이 된 건 아닌데 우리 선생님들이 아마 그, 그렇게 가정교사로 쓰라고 추천을 하셨으니까 나와서 이렇게 보고 그러고서 인제 나를 들어오라고 해서 그리로 들어갔지. 그리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신문 배달을 안 하고. 그 신문배달 하는 동안에는, 그 사범학생은 신문 배달하는 애들 나 하나 밖에 없어. 왜냐면 애들 전부다 공부하고 학교에서 이렇게 학자금도 주고 하니까 그걸 할 필요가 없는데. 그니까 이제 다른 학교 아이들, 뭐 상고 애들, 농고 애들., 농고 그 다음에 중학교 애들 이런 애들하고 하면서, 근데 그 신문 배달하면, 나는 그때 서울 신문을 배달하는데, 서울 신문 배달하는데 그 우리 팀이 있잖아. 그면 그 어떤 다른, 다른 동아일보 하는 애들 하고 인제 서로 신문 배달하며는 다니면서 구독 신청을 받아와야 되요. 근데 서울 신문은 정부 신문이니까 그 지국장이 이 집에 신문 갖다 넣어 하면 우리는 갖다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그 집에서 경향 신문 보던 어떤 집에서는 신문을 막 어거지로 가져다 집어넣으니까 다른 신문을 그만 끊어야 되잖아. 그러면 경향신문이나 뭐 동아일보나 이런 데 돌리는 아이들은 우리가 미워 죽겠는 거야. 우리 서울 신문 돌리는 아이들 때문에 자기 신문이 끊기니까. 그러면 인제 패싸움도 하고 막 강변에 가서 그쪽에 애들 하고 우리가 시비 붙으면 그 인제 이쪽저쪽 패싸움도 하고 말이야. 사범학생들이 인제 그런, 그런 건 인제 없어. 그 인제 농고 애들 뭐 저기 이런 애들이나 경안고등학교 이런 애들이나 인제 그렇게 하면서 패싸움하고 그러고 인제 돌아다녔는데, 그래서 인제 가정교사를 들어가면서 신문 배들을 끝내고 이렇게, 그러니까 나도 한번 대학을 가보자, 해서 우리 선생님이 그, 그 대학을 가도록 그래가지고 그 이후부터는 인제 조용히 141108 조재길01_00:43:58ㅇㅇㅇ하게 가서 그 입학시험 공부만 책을 가지고서 하면서 우리끼리 교무 주임이 전 선생님한테 다 얘기해가지고 ‘얘는 열외다’ 열외니까 전부다 그렇게 얘기해서 ‘우리 얘 대학 보내자,’ 이래가지고 선생님들이 내 주위에 앉아가지고 수업 안 듣고 그냥 하는 거를 전부다 공, 공인을 다 했어. 그래서 그 2학년 때부터 인제 나는 대학 입학시험공부를 했지. 혼자서. 그니까, 근데 우리 사범학교는 대학 가는 공부를 할려면 혼자 해야해. 왜냐면 왜 학교에서 그렇게 열외를 시켜주냐면 사범학교 공부를 해가지고서는 대학을 못가. 왜 못가냐며는 다른 데는 영어 수학 그그그 국어를 일주일에 일곱시간, 여덟시간 가르치고 음악, 미술, 체육은 뭐 한 시간 정도씩 밖에 안 넣잖아. 헌데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은 일주일에 세 시간씩 밖에 안 가르치고 미술, 음악, 체육은 일주일에 일곱 시간씩 가르치는 거야. 학교 국민 학교 선생이 될 사람들이니까. 거기다가 교육과정과정이 교육 과정, 뭐 교육 철학, 뭐 뭐 이런 거, 이런 거 교직 과목이 또 인제 있으니까 이게 영어, 수학, 국어는 절루 가라야, 그러니까 교직 과목하고 미술 음악, 체육을 오히려 위주로 가르치는거야.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얘 대학가야 되니까, 우리 사범학교 교육 받아가지고는 얘 대학 못 간다, 그러니까 선생님들 그냥 얘는 그냥 학교 성적은 그냥 뭘 어떻게 나오던 간에 저, 졸업만 시키고 얘는 대학 가도록 두자. 그래가지고 200명 중에 160등씩 하고 그랬어. 그러면서 학교 공부는 안 하면서 열외를 시켜줘 가지고 혼자 인제 대학 입시 공부를 했지. 그 2년, 2년 동안 그 인제 그 한국 벨트 사장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나중에 3학년 때는 인제 나와서 자취를, 인제 입시공부만 전적으로 하기 위해서 3학년 2학기 때는 입시공부를. 그러니까 그런 사범학교는 교생실습도 나가야 되고 별거를 다 하는데 완전히 다 열외를 시켜줘가지고. 그래서 어...그 당시에 인제 󰡔향학󰡕이라고 하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고, 󰡔학원󰡕이란 잡지는 일반 인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 잡지고 󰡔향학󰡕은 입시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그런, 입시 지도하는 잡지인데 거기에 에...인제 음악, 미술, 아니 영어 수학 거기 문제를 내면 내가 그걸 풀어서 보내면 이제 거기 이름에서 점수가 이렇게 나오고 내지 책에서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책을 공짜로 보내주고 그러는데 거기 나중에 나오는거 보면 전부다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뭐 이런 데, 광주 일고 뭐 이런 데만 나오고 나오는데 애들 뭐 80점, 몇 점, 이렇게 그러니까 몇 점 우수한 성적이 나온 애들 그 이름이 나와. 근데 사범학교 출신 내 이름이 거기 만날 나오고 혼자 그렇게 공부를 해가지고 인제 대학을 가게 되지
면담자 : 대학은 어디로 가셨나요.
구술자 : 그니까 인제 이 선생님이 고려대학을 나왔으니까 나는 고려대학이 서울대학이 있는 지도 몰랐어. 나는 그냥 무조건 고려대학을 가는 걸로 생각을 한 거지. 고대 법대를 가가지고 고시공부를 하는 걸로. 그래서 어...그니까 고대 법, 고려대학교 가는 것만, 국어 영어 수학 그 다음에 그, 국사 일반 사회. 이 다섯 과목만 공부를 하는 거야, 고대는 그 당시 그랬어. 그래가지고 나는 다른 거 생각할거 없어, 우리 선생님이 고대 법, 나오셨으니까 고대 법대 가는 걸로. 고대가 최곤 줄 알았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했는데, 3학년 입학 그, 인게 학교를 어디로 갈 것인가 정할 때 그때 인제 우리 아랫동네에 그, 우리 우리 북상리, 북하리가 있는데 우리 북상리는 그, 그 집은 그러니까 옛날에 그, 이 구한말에 에...단양군의 원이 오면 이, 우리 북상리 북하리를 갖다가 뒤뜰이라고 그래. 산너머 뒤에 있는 뜰, 쪼끔 논이 있는, 산골에 논이 좀 있는 데라고 해서 뒷뚤이라고 그러는데 뒤뜰이라고 그러면 북상리 북하리를 얘기해. 뒤뜰에 성씨하고 조씨 댁에 가서 그걸 인사를 하지 않으면 원노릇을 못한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북상리는 우리 조씨, 그 집안의 동네고 북하리는 성씨네 동네였었어. 근데 인제 우리 집하고 성씨네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게, 구한말에 인제 우리 고조부대에서 낙향을 해가지고 하시면서 우리 고조부대에서 유언이 뭐냐면 자식들 공부시키지 말아라. 공부시키면 일본놈들 꼬숫가리 노릇한다. 이래가지고 우리집은 학교를, 저 이제, 신학문하는 학교를 보내질 않았어.그러니까 우리 집안이 만석꾼 집안이었는데 학교를 안 보내니까 전부다, 이 뭐해, 술 먹고 그 투전이나 하고 그그그, 그러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우리 할아버지대에 완전히 망했어. 망해가지고 우리 집안 전체가 그 동네에 있던 그 모든 것을 다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버렸어 우리집안은 뿔뿔이. 근데 우리 할아버지만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우리가 종가집이 아니야, 종가집에서 다 팔아가지고 날라가니까 오두막집에,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 맨 가운데에 미음자 집에 큰 게 있는데 이 집에 인제 우리 종가집이고 그 주변에 인제 우리 인척들이 살고 그 나머지는 인제 일하는 뭐 하인들 집이고. 이게 우리 원동네야. 다 가고 나서 우리 할아버지 혼자, 우리 아버지 형제 저, 여섯 데리고 그, 다 팔고 가니까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니까 우리집만, 우리 할아버지만 여기 남은 거야. 그래가지고 우리 할아버지하고 할머니는 양반집 그, 막내로서 그러니까 생활능력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이 그 일찍 때 우리 아버님이 처음으로 국민 학교를 나온 사람이야. 우리 아버님이 가만히 숨어가지고 어...저 학교 저저저 갈 때는 산에다가 책가방을 숨겨놓고 학교 갔다 와서는, 학교 갔다 와서는 거기다 놔두고서는 와서 일을 하고. 이러면서 우리 아버님은 국민 학교를 졸업을 했어. 우리 집안 전체에서 국민 학교 나온 사람이 첫 번째야, 우리 아버지가. 이 성씨네는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일본 유학을 보내고 이러게 다 했어. 그런데 해방 이후에 우리 집안은 좌우익에 연루가 안 됐어. 무식꾼들이니까. 그래가지고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도 한사람도 비명횡사한 사람이 없어, 우리 집안은. 그러니까 우리 부모, 조상들이 유언을 남겨가지고 한 사람도 이게, 그러니까 무지랭이로 살았어도 비명 횡사 한 사람이 없는거야. 이 성씨네는 일본 유학보내고 다 해노니까 이 집안의 사위가 소위 말해 가지고 빨갱이 사위가 하나 들어와 가지고 이 집안이 전부다 이게 빨갱이 집안이 되가지고 해방 이후에 이 집은 완전히 풍지박산이 된 거야, 이 집안은. 뭐 완전히 다들 서리를 맞았지. 근데 그 중에 인제 한 분이 일본에 가서 와세다를 졸업한 양반이, 와세다를 나왔으믄 해방 후에 뭐 대단한 거 아니야? 그런데 완전히 집안이 그러니까 겨우 살아남아가지고 대학에서 교수를, 저 지금의 명지대학인데 그 당시엔 이름이 뭐였는지 몰라. 거기에 교수를 하는 분이 계셨어. 근데 그게 우리 아버님하고 국민 학교를 같이 다닌 분이야. 이분이 그, 고등학교 3학년때 인제 입학 인제 원서를 사고 그래야 할땐에 오셔가지구서 너 어디 가냐, 그래서 저 고대 법대 갑니다, 그랬더니 야, 대학을 가면 너 같은 애를 서울대학을 가야지 왜 고대 법대를 가냐, 서울대학을 가라. 서울대학이 어떤 대학인데요? 그러니까 서울 법대란 데가 있는데 고대 법대하고는 천양지차 이거지. 근데 그해 보니까 그해에 그 전해까지는, 그 해에 서울대학교 입학 그, 시험 제도가 서울 대학교 제도가 완전히 바뀌었어. 그래가지고 그 전에는 이 법대는 독어 불어 중에 반드시 하나를 반드시 해야 해. 그런데 그 해는 입시 원서, 입시 요강이 신문에 나고 했는데, 서울 법대도 독일어를 안 해도, 독어 불어를 안 해도 되. 근데 사범학교는 독어 불어를 가르치는게 어딨어, 제 2외국어는 없는 거야. 그래 나는 그니까 서울 법대를 갈라면 독어 불어를 해야되는데, 필수로 해야되는데, 그래서 안 된다고 그랬는데 아, 이번에 입시제도가 바뀌었다고 한번 해보라고. 그래 보니까 신문에 나고 보니까 그래. 그래서 국어 영어 수학에다가 과학에서 두 과목, 그 사회과목에서 두 과목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사회 과목은 역사하고 내가 일반 사회를 했으니까 되고. 그러니까 이 과학 과목만 두 과목을 하면 되는 거야. 어, 서울 법대를 갈 수 있는 거야. 그래가지고 입학 원서를 신청해놓고 한달 동안에 물리하고 생물 참고서를 갖다가 한달 동안에 그냥 그 삼년 내내 공부 안 했던 물리 생물을 그냥 파서 했어, 저저 한달 동안에. 그래가지고 입학원서를 딱 왔는데 신문에 발표된 대로 그대로인데 법대만 독어 불어를 해야했는거야. 법대만. 그래가지고 그래 인제 교수님한테 ‘아 이 법대는 독어 불어를 해야된다’고. ‘야 그러며는 사대 일반사회를 쓰면 거기도 고시 패스를 잘해. 사범 거기는 법대는 아닌데 사범대학교 일반 사회과면 거기 정치, 경제, 사회, 다 가르치니까 거기를 가면 된다고. 그래가지고서는 어...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대 일반사회과를 친거야. 사대 일반사회과. 그래서 아, 그러면 금년에는 사대 일반 사회과를 쳐야지, 연습 삼아 치고 내년에, 일년동안 나는 뭘 하면 그냥 바짝 하면 되니까 일년 동안 독일어 공부를 해가지고 내년에 법대 간다고. 그리고 그해에 사대 들어갈 생각을 한 게 아니고 서울대 연습삼이 시험을 쳐본다고 쳤지.
면담자 : 그 대학에 들어갔을 때 집에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어...우리집에서는 보낼 형편이 안 되니까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여장부야. 우리 어머님이 그,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한다니까. 우리도 어떻게든지 너 하면 서포트 하겠다고.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님이 아주 억척을 떠시면서 어...지금은 아마 한국에서 단양마늘이라고 하면 유명할거야. 단양마늘이 그 아주, 단양은 마늘의 고장이라고 유명하거든, 지금. 근데 그 단양 마늘의 시작이 우리 어머니가 시작을 하신거야. 그 당시에는 우리 인제 고 뒤뜰이라고 논이 조금 있었었어. 아주 뜰이 넓은 건 아니고, 호남지역처럼 뜰이 넓지는 않고 쪼그만 한 뜰이 있는데 거기에서 겨울에는 보리를 하고 인제 여름에는 그, 벼농사를 하고 그랬는데 그 우리 어머님이 거기 처음으로 이 마늘을 씨를 갖다가 논에서, 마늘은 인제 밭에서만 하는 걸로 생각을 했었어. 밭에서 하니까 마늘이 아직 작고 그런데 이 논이면 토질이 좋잖아. 근데 그 마늘을 갖다가 논에서 보리를 안 심고 논에서 심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마늘씨를 뭐 백 접을 한다고 그러면 한 접이라는게 엮어가지고 그걸 백개씩을 마늘씨를 한거야. 우리 있는 논 얼마 안 되는 거를 전부다 마늘 농사를 한 거야, 우리 집에서. 그게 마늘, 논에서 마늘을 시작해서 그래가지고 그것이 보리농사보다 훨씬 순득이 놓은거야.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님이 내 대학을 보내려고 마늘 농사를 시작을 하신거야. 그래가지고 그 수입이 굉장히 좋거든 뭐 이건 마늘은 마늘쫑이라는 것도 뽑아서 팔고, 마늘 잎사귀도 뽑아서 팔고, 마늘은 마늘대로. 버릴 게 없는 거야. 그래가지고 단양에서 마늘 농사를 우리 어머님이 시작해가지고 그게 뒤뜰 전체가 마늘밭이 돼버렸어. 어, 우리 어머님이 시작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님이 그 마늘을 해가지고 그거를 가지고서는 머리에 이렇게 이고서는 원주로, 영주로 기차를 타고 중앙선 타고 다니시면서 그 하튼 한푼이라도 더 받겠다고 그거를 가지고 해서 우리 어머님이 하튼 니가 간다면 어떻게든지 서포틀 하겠다. 그래가지고 인제 인제 사대 일반 사회과를 시험을 쳤는데 이게 나는 뭐 갈 생각을 안 했어. 그러니까 이 우리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제 4.19가 나고 인제 1961년 5.16 나던 해에 인제 그 사대를 들어갔지. 근데 입학, 안 그저 일반사회과를 안 가고 한해 재수를 해가지고 법대를 가려고 생각을 했는데 법대를 갈려고 생각을 했는데, 신문에 그, 그 당시에는 서울대학교 그, 저, 이렇게 수석 뿐만 아니라 각 과의 수석도 신문에 이름이 났어. 신문에. 신문에 서울대학교 인제 수석 합격자들 인제 각 과별로 전체 수석은 누구, 그 단과대 수석은 누구, 뭐 이렇게 과별 수석은 누구고 이게 신문에 이름이 났어요. 이 이름이 나니까 이게 뭐 완전히 고향이고 사범학교에서 경사가 난 거지. 고게.
면담자 : 과 수석으로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 과 수석인데 과수석이고 내가 사대에서는 전체에서 2등이고 그러니까 이게 벼락치기로 물리 생물 한달 두달 만에 그냥 참고서 달달 외워가지고 하고 인제 혼자 독학을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사대 전체에서는 2등인데 과 수석으로 하여튼 어떻게 됐든 신문에 이름이 난 거야. 그러니까 그 우리 어머님이 어떻게든지 그 입학, 그 사대는 등록금이 굉장히 싸. 서울대학이 등록금이 싼데다가 그 중에 사대는 거의 몇푼 안 되는 거야. 사범학교는 돈을 주고 했지만 이 사대도 돈을 학생들한테 줬어. 등록금, 등록금이 아마 없고 학생회비만 받았던가, 그래. 그러고 돈이 조금 나오고. 그래서 사범대학이 이제 싸고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써포트 할 수 있고. 등록금을 하튼 마늘 농사를 지어가지고 등록금을 마련해 주셔가지고 서울에 이제 올라갔지. 그래서 신문에 나는 바람이 인제 입학을 한 거야. 입학을 했는데, 서울에 갔는데 인제 그때 아마 대학이 사월 달에 개학을 했을 거야. 지금은 3월달에 개학을 하지. 3월, 9월에 개학을 하는데 그 당시우리 입학을 할 때는 4월달에 개학을 했어. 근데 인제 사범대학에를 들어갔는데 난 완전히 촌놈이지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는데 내 중학교 동창 하나가 서울에 가가지고 버스 회사의 그러니까 사환으로 있었었어. 버스 이게,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거기에 사환으로 있으면서 걔는 에...인제 밤에 사무실에 의자를 이렇게 놓고 자는 거야. 그, 그러면서 야간고등학교, 동대문 상고를, 나는 인제 졸업을 했는데 걔는 그때 아직도 2학년에, 나중에 인제 고등학교를 못가다가 서울 올라가가지고 버스회사에서 이렇게 하면서. 처음엔 인제 걔하고 버스회사에서 의자, 회사에서 잤지, 자면서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했는데 들어가니까 인제 사범대학에서 그 중에서 이게 일반 사회과가 사범대학 운동권의 중심이야. 사범대학 운동권의. 그리고 사실 서울 대학에서 사실 서울 문리대의 정치외교학과 문리대가 운동의 중심이었지만 사범대학이 문리대에 못지않게 운동권의 중심이야. 그런데 인제 그러니까 서울대학교의 운동권의 주류에 상당한 역할을 하는 일반사회과의 수석이 되어노니까 내가 각 운동 단체들의 포섭대상의 1호야. 그래가지구 인제 들어갔더니 뭐 선배들 와서 너 우리 단체 들어라, 우리 단체 들어라. 그런데 그러니까 뭐 그러냐고,. 여기 불려 다리고 저기 불려 다니고. 그러면서 하튼 뭐 선배들 만나서 인사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랬는데 한 달 16일 만에 5.16이 난거야. 그러니까 내가 서울에 그 대학에 들어갔을 적에는 저, 이 4.19는 그 다음 해니까 이 학생 운동이 전 대학가에 이 열풍이 대단 했어. 그래서 인제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4.19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학생운동 방향이 인제 남북 통일 문제로 가가지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말이야. 그래서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들이 만나서 회담을 하자고, 그것이 막 우리 대학의, 그러니까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서, 4월달 개학을 하면서 그게 아주 핫이슈가 돼서 하튼 전 대학가가 그냥 들끓는 거야.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그러다가 한달 16일 만에 그냥 전부다 완전 찬서리를 맞은거지. 그러니까 4.16, 5.16이 나니까 너도 숨어라 이거야. 그래서 나는 사실 운동권 모임에도 나가보지도 못했어. 나가보지도 못했는데 이 선배 저선배들하고 불려다니면서 뭐 얘, 어쩌고 이랬는데 거기 가서 이게 1학년 간부, 1학년 간부인 이름으로 이 단체에도 들어가 있고 저 단체에도 들어가 있는거야. 그러니까 이 단체도 수배 대상이고 저 단체도 수배 대상이고. 그러니까 숨어란 말이야. 그래서 숨었지. 숨었는데 한 일주일 지났더니 야, 넌 좀 나가봐. 넌 괜찮을거야. 나오니까 아무도 안 잡더라고. 그래서 난 일주일 만에 숨었다가 난. 그러니까 인제 내가 들어갔던 단체에 ‘민족 주체성 확립’ 뭐 이런 말이 들어가 있으며는 전부다 잡혀 들어가는거야. 근데 나야 뭐 어디 가서 그 단체 활동을 해본적도 없고 뭐 그냥 선배들 만나자 그럼 만날 뿐인데. 그래가지고 나오니까 그러고 나서 한달 두달 후에 선배들도 슬슬 나오더라고. 그러더니 그 뜨거운 열기가 싹 가라앉아. 아무도 민족 얘기를 안 하는 거야. 민족 얘기를. 그래서 대학의 분위기가 완전히 그냥 그, 어두운 큰 저저 돌덩이 밑에 깔려 있는 그 속에서 여름 방학이 가차워 지면서 서울 대학에

(비프음, TAPE 교체)

면담자 : 아까 그 말씀하신 게 5. 16
구술자 : 5.16 혁명이지. 5.16 혁명으로 내가 대학 입학한지 한 달 16일 만에 그 뜨거웠던 4.19혁명의 그 열기는 다 사라지고. 그야말로 대학가가 완전히 그, 그 짓눌린 그런 암흑기로 들어가지. 그 중에서 인제 겨우 학생운동이 할 수 있는 분야가 농촌 계몽운동밖에 없었어. 그래가지고 우리 인제 서울대학교 인제 사범대학에서 그건 시작이 됐어. 그래서 우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향토 개발회라고. 인제 조직이 되고. 그게 시작이 돼서 각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별로 농촌 계몽운동 단체들, 그것만 허락이 된 거야. 군사 정부 아래서. 그래고 그것이 학생 운동의 하나의 돌파구가 돼서 그래서 나중에 서울대학교 전체에, 전체에 향토 개척단이라고 하는게 인제 결성이 되가지고. 우리 대학 1학년에서 1학년때 4.19혁명의 큰 물줄기는 사라지고 인제 농촌계몽운동이 인제 시작이 된거지. 그래서 향토 개발회를 인제 조직하고 하면서 거기에 인제 그 우리 사범대학교가 중심이 되가지고 해서 향토 개척단 단장이 인제 사범대학교 역사학과에 그 당시 3학년이던 홍갑표 형이라고 서울대학교 전체 인제 단장이, 향토개척단의 단장이 되고 우리 서울대학의 향토개발회 회장은 김국태라고. 그 김국태가 누구냐면 김근태 형님이야. 김근태 형님이 내가 일학년때 인제 3학년이었는데 그때 인제 우리 사범대학에 농촌, 서울대학교 전체의 농촌운동의 그 중심은 세 사람이 있었었어. 그게 인제 세 사람이 인제 우리 사범대학교 출신인데 사범대학의 역사학과의 홍갑표, 61년 당시에 3학년이었는데 3학년 역사학과의 홍갑표가 나중에 서울대학교 전체 향토개척단의 단장이 되고 그 다음에 국문과에 김국태가 향토개발회의 단장이, 회장이 되고 그 김국태가 이 김근태의 바로 윗형님이야. 그 다음에 인제 그, 인제 교육, 그 교육학과에 정, 정철기라고. 정철기가 사범대학교 학생회장이 됐어. 이 세사람이 사실상 이 새로 부활한 서울대학교 그, 농촌 계몽운동에 중심적인 인물이야. 이 세사람이 주도적으로 해서 사범대학에서 시작해서 서울대학교 전체를 맨들었는데. 이 세 사람부터 잠깐 설명을 하면 김국태는 김근태의 형님인데 이 집안의 역사를 알아? 이 김근태가 맨 끝이고 국태가 그 형이고. 큰 형님이 월북을 했어. 그래가지고 어...이 집안이 그러니까 항상 월북자 가족 집안이야. 그래서 김국태가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직장생활을 못해. 제대로 직장생활을 못해서 소설가가 됐어. 소설가로서 그렇게 유명한 소설가는 아니었는데 소설가가 되면서 이게 재대로 그 대접을 못 받으니까 술로 해가지고. 나중에 국태는 술러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죽었다고. 그러니까 김근태의 가족의 참 그 아픈 가족사가, 큰 형님은 월북을 했고 둘째 형님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그냥 집에서 소설을 쓰면서 폐인이 돼서 죽고, 그 인제 김근태가 그런 형제들 속에서 그 민주화 운동 속에 들어가서 그 운동을 했어. 김근태에 대해선 더 할 얘기가 없고. 홍갑표는 사실 나한테는 하나의 우상이었어. 어...이, 이 사람은 손가락이 이게 두 손가락이 이렇게 끝 마디가 없던가, 그래. 그 이유는 난 몰라. 근데 1학년때 자기는 자칭 맑스주의자야. 공산주의자고. 그러면서 캐도릭 신자야. 근데 캐도릭 신자면서도 근데 이 사람은 이렇게 향토개발회 단장을 했는데 손가락 매디가 없는 손가락을 들고 이러고 얘기를 하며는 좌중이 이게 완전히 손가락에, 그그 매디 없는 손가락에 여기에서 그냥 압도당하는거야. 그러면서 카리스마적인 운동권이야. 이 양반은 그러면서 3학년 때 단장을 하고 4학년 해서 사범대학을 마치고 이게 의정, 그, 양주군, 양주군에 들어가서 농촌 운동을 시작했어. 농촌 운동을 이화여대 나온 분하고 같이 농촌운동을 하면서 결혼을 해가지고 양주에 가가지고 10년을 이 농촌운동을 했지. 근데 내가 나중에 인제, 나중으로 돌아와서 그 미국에 오기 직전에 보성고등학교의 교사로 잠깐 근무를 했는데. 그때 보성하고 이게 요렇게 골목길 요쪽에가 경신 고등학교라고 있어. 경신고등학교 그러니까 10년 후가 되지. 10년 후가, 내가 74년에 미국 왔으니까 74년이니까, 이 형님이 졸업한 게 나보다 세 해 선배니까 내가 65년도에 졸업했어야 되니까, 그니까 이, 61, 62,, 63, 64, 65에 졸업해야 되는데 내가 66년에 졸업을 했다고. 그러니까 이 형님은 65년에 졸업을, 내가 65, 그러면 64, 63년에 졸업을 하고 10년 동안 갔다가 그 나중에 10년 후에 그 경신고등학교에, 내가 보성에, 74년에 보성교등학교 선생을 할 적에 74년에 경신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왔더라고. 그래서 10년 만에 다시 만났어. 만났는데, 10년 후에 만났을 때 그, 이, 홍갑표는 나의 우상이었는데, 학생 운동의, 우상이었는데, 정말 철저한 운동가지 철저한 운동간데 경신에서 만났을 때 그 모습은 완전히 그 지친 하나의 패배자가 됐더라고. 그러니까 10년 동안 양주군에서 농촌운동, 양주가 나중에는 도시화가 되어버리잖아. 뭐 남양주 시도 되고. 그러니까 이, 거기에 농촌 운동이 안 먹혀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10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서 했는데 결국에는 패배자가 되어 가지고 초라한 교사로, 경신고등학교에, 사립학교에 역사교사로 왔더라고.. 그러다가 내가 74년에 미국에 갔으니까 나중에, 작년에 가서 내가 한번 만났더니 이제 교사로 은퇴를 했는데 지금은 그 이후에 운동권 단체에 주류에는 아니고 하튼 지금도 하튼 그런 글을 쓰고 하는. 참 내가 가슴이 아프더라고. 정철기는 어...나중에 그, 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갔다가 제대를 해가지고서는 김대중 선생 비서를 했어. 저 장교를 전역을 해가지고. 김대중 선생 비서를 하다가는 미국으로, 지금 캐나다로 이민을 가가지고 캐나다에서 나중에 󰡔민중 신문󰡕이라고, 신문을 발행을 하는데 그건 나중에 내가 다시 기회가 되면. 하다가 김대중 선생 귀국하면서 들어 가가지고 전남 어디, 어딘지, 거기가 함평인가 아마 거 어디쯤, 난 잘 모르는데 거기서 국회의원을 한번 했어. 국회의원을. 정철기. 국회의원을 한 번 하고 그 다음에는 한번 했는데 이게 한화갑이 하고 처남 매부간이야. 한화갑이의, 한화갑이하고 같이 그, 이 김대중 선생 비서를 같이 하면서 그러니까 이제 누구 한화갑이 동생이 정철기하고 결혼했는지 정철기가 한화갑이 동생하고 결혼했는지는 모르지만.그렇게 둘이 김대중 선생 비서를 하면서 서로 그렇게 돼서. 이 정철기는 미국 와서 한 10 몇 년 동안 그, LA에서는 내가 󰡔코리안스트릿저널󰡕을 하고 이, 김경재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신문󰡕을 하고 정철기는 캐나다에서 󰡔민중 신문󰡕을 하고 그 세 개 신문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인제 그 신문들은 그렇게 그, 여기 정기적으로 그, 이게 미국에서 나온 신문들이 주간지들이 이렇게 나처럼, 나는 돈을 벌어가지고 돈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냥 꾸준히 그렇게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신문을 냈는데 거기는 뭐 이따금씩 뭐 한달에 한번도 나오고 뭐 하면서 했지만 하여튼 그렇게 3개 신문이 민주화 운동을. 그 다시 인제 돌아가서 그래서 겨우 인제 농촌 계몽운동으로 학생 운동이 살아았는데 나는 인제 그 향토 개척단하고 향토 개발회를 조직하고 하는데 2학년으로서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 했는데 그, 인제 여름방학이 되면은 농촌 활동을 가야잖아. 근데 그게 나하고 맞지를 않아. 왜 맞질 않냐며는, 나는 농촌 사람인데 서울 출신 도시 아이들은 농촌에 가서 그 여학생 남학생 어울려가지고 가서 하는 것이 대학 시절의 하나의 낭만으로, 뭔일인지 모르는데, 이건 나는 촌 사람인데 얘네들은 농촌 사정도 모르는거야. 근데 마치 나를, 내가 계몽대상이 되는 것 같은. 이게 아주 자존심이 상하고 즈들이 뭘 안다고 농촌계몽 운동을 하느냐, 근데 얘들이 신바람이 난거야. 학생 운동 보다도 이게 MT가고 하는 기분인거지. 그래서 그것이 영, 다 조직하고 하는 데는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를 했는데 계몽운동은 못가겠다고. 그 나는 계몽 운동 어디 경상북도 저 어디 의성 그쪽으로 가는데, 어디 마을로 가는데, 나는 거기가서 계몽 운동하는 것보다 나는 집에 가서 우리 부모님들을 도와야 되는거야. 거기다가 인제 계몽운동하고 나하고 맞지 않았던 것. 두 번째는 어...이게 내가 대학에, 인제 고등학교 때에 우리 사상계, 함석헌 선생의 사상계,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하는, 그 하튼 사상계에 나오는 함석헌 선생의 글에 내가 인제 그, 빠졌고. 그런데 인제 서울대학에 들어가가지고 그, 우리 단양에서 멀지 않은 경상북도 풍기에 사는 내친구 진영일이라는 친구하고, 내 평생의 친구인데 이 친구가 하도 역시 함석헌 선생의 글에 빠진 친구야. 그래서 나하고 둘이서는 어...이 학생 운동은 완전히 다 없어지고, 그때 인제 그 서울에 묵정동에 묵정동에 세기대학봉사회라는 회관이 있었었어. 거기 2층에 세기대학봉사회 2층에서 함석헌 선생이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날 학생들을 모아가지고 성경공부를 가르쳤어요.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그때 거기를 이 진영일이하고 나하고 둘이 일년을 나갔어. 나가서 거기에 인제 우리, 나는 인제 함선생한테 빠져가지고, 빠졌는데 이 진영일이는 완전히 빠졌고 완전히, 지금도 이게, 씨알 사상 연구회 그 회장을 하다가 금년에 물러났어, 서울에서. 나중에 인제 졸업하고 공주 교대 가서 선생, 교수를 하고서 한 이삼년전에 리타이어(retire) 해가지고 서울에서 씨알 사상 연구회 뭐 함석헌 기념사업회, 인제 거기에 회장도 하고 그러다가 인제 물러났는데. 얘는 함선생한테 빠졌는데 나는 거기에 함석헌 선생, 거기에 빠져들었고 농촌 운동이 인제 체질에 맞지 않고 고 다음에 함선생님한테 인제 나는 일년간 따라다니게 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이게, 그 당시에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지금도 대학생들 전부다 건강검진 하는지 모르는데 우린 서울대학병원에서 일제히 건강검진을 했어. 근데 건강검진을 하는 것 중에 그 당시에 제일 중요한게 결핵이야. 근데 내가 결핵이 발견이 됐어. 그래가지고 거기 한 2,3년을 그 서울대학 병원에서 약을 타서 먹고 요양을 인제. 하게 됐지. 그래서 이제 운동권에서 그래가지고 발이 빠진거야. 근데 함선생님한테는 일년동안 나가서 공부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거기 빠지는데 나는 함 선생님한테 열심히 나가가지고 같이 일요일날 함선생님 강의도 듣고 하면서 그 당시까지 나는 불교신자였었어. 불교신자였지만 함선생한테, 그게 함선생님한테 간거는 이게 사실은 어떤 철학적인 면이라든가 이런거 보다는 함선생님의 그 투쟁적인 그런 면에 나는 더 매료가 됐던 거지. 그런데 이 함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그 나보고 정치하라면 난 못해. 그러니까 이게 나가가지고 그 투쟁도 하고 이렇게 이렇게 바꾸는 그런걸 해야되는데 말로만 하는거야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래서 그, 나를 보고 정치하라면 못해, 근데 나는 비판만 한다는거지. 그래서 함선생님을 인제는 따라다니는데 그 따라다니면서 난 좀 삐딱한 인제 그, 편이지. 그 함선생님 따라다니면서 아무튼 여러 가지 내가 지금 인제 카톨릭, 신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런데 성경을 지금도 해석하는데 함선생님한테 그때 배웠던게 바탕이 되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거야, 지금도. 캐돌릭 신자면서도. 그다음 나중에 내가 캐도릭으로 개종을. 그때 인제 그 일년에 한번씩 그 용문산에 가면 큰, 뭐 백년, 천년 된 은행 나무가 있다고. 가가지고 거기에 같이 우리 함선생님 모시고 우리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함선생님을 따르는 여러 그룹들이 가고. 그러면서 일년동안 그러다가 우리 함선생님이 나중에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그, 오셔가지고 이렇게 그, 이 세계를 돌다가 인도까지 가셨다가는 완전, 하튼 오셨는데 고때 인제 한국에 있지 못하고 다시 오셔가지고, 오셔가지고 얘기하시는게 미국에 갔더니 국무성에 자기를, 함선생님을 초청한 거는 와서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걸, 욕을 하는 걸 원했는데 내가 왜 밖에 나가서, 내가 집안에서는 싸우지마는 왜 밖에 나가서 내가 싸우느냐고. 그래서 내가 욕을 안하니까 당신 그 안에서는 욕을 하더니, 우린 그걸 듣기 위해서 당신을 초청했는데 왜 한국정부를 비판을 안 하느냐, 그래서 아 내가 밖에서, 안에서 우리 집안에서 싸우는거지 내가 왜 여기 와서 그, 정부를 비판을 하느냐고,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러고 인제 와서는 운동권으로 들어가신 거야. 근데 인제 나는 일년을 마치고 어...일학년을 마치고서는 내가 휴학을 했어. 그 결핵 때문에. 결핵 때문에 휴학을 해서 인제 산에 가서 절에,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인제 대학을 일년간 휴학을 하고 다시, 그래서 내가 산에 가서 있고 인제 이러면서 하는 동안에 그 육, 저 한일협정 비준반대 운동이 있었던거야. 그래서 나는 그 운동, 학생 운동에서 한발 물러서있게 된거야. 5.16에 의해가지고 419의 학생 운동도 없어지고 농촌운동은 내 체질에 안맞아서 그러고. 고 다음에 함선생님은 묵정동에서 하던 그것이 한 일년간 하고는 그 다음에는 완전히 그, 이게, 그 미 국무성 초청으로 왔다나가시고 나서는 그 다음엔 거기 그 모임이 없어지고. 그 다음에 나는 휴학을 해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가지고 이게, 절에서 공부하고 하면서, 한일협정 비준반대 운동에서 빠졌지. 그래서 나는 대학 일년 동안에 학생운동에 들어가보지 못한거야. 그러고는 인제 사실은 고시공부를 절에 가서 했는 나는 좀 무모한 면이 있어. 그러니까 시험을,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다 해가지고 해야되는데 뭐 헌법 민법 형법, 이것만 공부하고 행정소송법 민사소송법 이건 공부를 안 하고, 그 당시에 시험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까 일차에는 딱딱 붙는데 필기시험에서는 떨어지고. 근데 그 당시는 어...이게 인제 사법, 5.16이 나고나서는 사법시험이라고 했어. 사법시험이 1회에서부터 한 6회까진가는 그 전에 인제 그 고등고시라고 했는데 고등고시 때는 일년에 한 열명씩 붙었는데 요거는 인제 고거보다는 많아서 스무명 뽑는데 나는 공부를 안하고 가서 쳤으니까 사법 시험 1회부터 쳤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형사소송법 그건 책도 안 산 상태에서 시작을 해가지고 한 두세번 치고, 일년에 두 번씩 시험을 쳤어, 두 세 번 시험을 치는 동안에 할 수가 없지. 시험 치면서, 시험치면서서 공부를 한거야. 그런데 그때 4횐가 3회인가 내가 성적이 제일 좋은, 거의 합격점에서 0.몇 점이 모자랐는데 한 세명, 네명인가 뽑았어. 그 네명인가 뽑을 적에 내가 한 열명만 뽑았어도, 그 전까지 열명 스무명 뽑았어도 합격이 되는데 네명 뽑을, 그때 저 박철헌이가 되 나중에 보니까. 박철헌이가 뽑힐 때 고때 네명이 합격자가 네명인가밖에 안 나왔어, 세명인가, 네명인가. 그때 나는 거의 열명 안에 들어가는 성적인데, 그러고 나서는 그 다음에 한 두 어번을 더 쳤는데 그 성적이 안 나오는거야. 거기서 더 올라가지 않고. 그래서 나는 성격이 뭘 하면 꽉 하고 안 하면 딱 끊고나선 미련없이 돌아서는 사람이야. 그래서 난 고시공부를 할 적에 난 대학 졸업할때까지만 한다. 졸업까지. 고시공부 할 때 보면 십년씩 붙들고 하는 선배들 있는데 나는 그게 아주 보기싫은거야. 그리고 나는 고시공부하는게 내가 법관이 되겠다고 생각을 해가지고 한게 아니거든. 이거는 그러니까 신분상승의 솟컷이야, 지름길, 지름길이기 때문에 그걸 한거지. 그러니까 나처럼 저 못사는 사람이 이게 출세를 하는 하나의 숏컷으로 생각을 하고 한 거지, 내가 법을 공부해가지고, 나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뭐하는지 그거에 대한 그게 있어가지고 이걸 내 천직으로 생각하고 해애되겠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거든.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닐 적에 나중에 대학 갈 수 없으니까 아이고, 어디 국민 학교 선생이나, 2학년때 신문보고 만날 한자연습을 했다는 게, 나중에 어디 시골 소재 국민 학교 가가지고 고시공부나 하겠다고. 그래서 인제 그 인제 선생님 공부는 안 하고 인제 그랬던 건데. 그, 그 식으로 법을 알아가지고 내가 고시 공부를 한게 아니고 그냥 없는 사람이 이게 그,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했기때문에. 그걸 하다보니까 아 이게 처음에는 공부를 안 하고 했기 때문에 시험은 여러번 쳤지만 그건 처음엔 안 되는거고 어느 시에서 점수까지는 올라갔는데 그거는 네명 밖에 안 보니까 그 다음에 한 두세번 더 치니까 이건 뭐 그 성적도 안 나오고.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못한거는 나는 글씨를 쓰지, 그러니까 공부는 안하고 뭘 노트 정리도 안 하고 항상 새 학기 되면 하지만 한 2,3 페이지 쓰고서는 끝이야., 그러면 그 다음에 2,3 페이지 찢어내고 그 다음 학기에 새로 시작하면 한 2,3 페이지. 하튼 글씨를 쓰는 걸 싫어해. 근데 이거는 그 당시 고시 공부는 완전 논술이라니까 잉크로 글씨를 잘 써야되는데. 나중에 내가 선생님 노릇 할 적이 무슨 질문이 있느냐 했더니 애가 손을 들고, 선생님 이제부터는 칠판에 글씨를 손으로 좀 써주세요, 이러더라고. 그러니까 글씨를 발로 썼다는 얘기지. 그래서 아, 나는 이 고시는, 고시는 나하고 잘 안맞는거고. 그래서 딱 끊고 어...인제 졸업하고 일년 더 하고, 일년 더 하고. 65년에 졸업을 해야되는데 일년 늦었으니까 66년에 졸업을 했고 고 다음에 그... 66년에 졸업하고 일년 더 하고서 67년에 오케이 난 군대를 간다, 하고 공군 장교로 입대를 했어. 그런데 인제 대학때 들어가서 대학생활 때에 그, 나는 어...이렇게 하나의 그 발화 시점을 놓친 시한폭탄이라는 것 같은, 농촌의 아주 저저 시골의 사람이 서울에 갔을 때 그 농촌과 서울의 격차, 고 다음에 나는 창신동 꼭대기의 판자촌에서 그, 이렇게 우리 친구하고 같이 버스 회사 사무실에서 자취를 하다가 나주에는 거, 다른 친구 하나하고 판자촌에서 그, 이게 자취를 하면서 나는 가정 교사를, 입주 가정교사를 안하고 그 시간제로 다니는 가정 교사로 했어. 그런데 그, 내가 살고 있는 창신동 판자촌하고 내가 가정교사로 가서 가르치는 그 집의 그, 한국의 상류 가정하고 이게 언밸런스해. 농촌과 서울의 언밸런스, 이, 창신동 판자촌과 그 일류 가정집의 부자집의 그러니까 이 부자짓의 아이들은 나를 선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뭐 지 하인으로 생각을 하는거야. 그러니까 뭐 공부 도우미지. 공부 도우미인데 이게 마치 그 하인과 같은.그런 속에 있는 것. 그리고 그, 이 민주주의를 공부하는데 그 군사 정부 하에서의 그런. 그것이 모든 부조리 속에서 그냥 그, 이 폭탄을 가슴에 안고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것이 그러면서 이제 함석헌 선생한테서의 그런 영향, 운동에서의 좌절. 그런 것이 하나의 폭탄을 안고 살았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그걸 억누르면서 이렇게 졸업을 하고, 그것이 고시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폭발을 안 한거야, 산에 가서 고시공부를. 그러나 고시공부를 이거는 내가 갈 길이 아니다, 하고 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하고 미국에 갈려면 군복무를 마쳐야되겠다, 해서 67년에 공군장교 시험을 쳐가지고 공군 장교로 68년 4월달에 인제 임관을 했지. 그래서 임관을 했는데 난 인제 군대생활을 공군 장교로 우리가 4년을 복무를 하는데 한 8,9개월을 인제 그 대전의 병무관리부에서 인제 잠깐 임관하고나서 있다가는 이, 참모 김성, 참모총장이 새로 취임을 하면서, 아니지, 장지량 총장때 입대를 해가지고,김성룡 총장이 취임하면서 자기 스피치 라이터를 구한다는거야. 그래가지고 이게 공군에 있는 이 장교들 중에서, 초급 장교들 중에서 서울대 출신중에서 인제 뽑는다고 해서 뭐 막 여러 사람이 했는데 안 되고 서울에 있던 공군본부에 가 있던 내 친구가 너 한번 거기다 글을 써서 올려보라고 그래가지고 보냈더니 그 내가 서울로 올라가겠됐지. 공군 본부로. 그러니까 소위 시절에. 소위 시절에 임관해가지고 일년이 안 되가지고 서울 공군 본부에 참모총장 비서실에 안에 인제 서한 장교로, 서안 장교실을 갖다가 지휘 관리실이라고 따로 해가지고 비서실 안에 지휘 관리실이라고 있어가지고 거기에 인제 갔는데. 나는 인제 그 자리는 중령보직이야. 중령보직에 소위가 가서 앉은거야, 소위가 가서 앉았는데 어, 공군본부에서는 이 대령도 독방을 쓰는 대령이, 국감실장이나 되야 독방을 쓰지 아니며는 대령도 큰 사무실에 뒤에 앉고 중령들 앉고, 그 다음에 유관 장교 앉고 사병 몇 명 앉고 이렇게, 그때. 나는 소위가 독방을 썼어, 공군 본부에서. 그게 인제 중령이어가지구 연설문쓰는 걸로 특별히. 그래서 나는 만년필 하나 가지고 군대 생활을 다 마친거야. 그래서 3년이 조금 넘게 그, 거기 있으면서. 비서실은 총장이 바뀌면 싸그리 다 바뀌어. 그런데 나는 전문직이라고 총장 바뀌어도 그냥 계속 남아 있는거야. 그래서 3대 총장을 거기서 하면서, 그런데 그때 이제 그, 이 군생활을 난 군대생활 얘기를 하며는 얘기 할게, 우리 한국 남자들은 군대 갔다 온 얘기가 제일 흥미진진하고 많잖아? 근데 나는 만년필 하나 가지고 졸업했기 때문에 할 얘기가 없어. 할 얘기가 없고 술 먹고 사고 친 얘기밖에 없어.
면담자 : 아, 군대 안에서요?
구술자 : 그러니까 항상 사회에 대한 불만과 이게, 그니까. 술 먹으면 이게, 이제 내가 체력이 좋아. 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타고난 체력이 강해 그리고 이때까지 술을 먹으면 같이 먹어가지고 내가 누구보다 먼저 떨어진 적이 없어. 근데 술을 먹으면 엄청나게 먹고 이게 아무리 먹어도 끄떡이 없어. 그런데 그게 사람이라는 게 한계가 있으니 필름이 끊겨. 다른 사람이 보면 멀쩡해, 멀쩡하고 한데 나는 전혀 기억을 못해. 그래가지고 나는 군법회의에 세 번에 회부됐어. 이게 뭐 아주 사고를 쳐도. 그, 이게 경희대 입구에 있는 그 휘경동 파출소 하나를 완전히 때려 뿌시고, 그래서 수도 경비사로 헌병들이 나와서 잡아갔다가 그 다음에 공군 헌병대로 넘겨가지고 영창에도 들어가 있다가 나중에 군법회의를 하고 하튼. 그 다음에 그, 우리 장교들 숙소에서 하룻밤에 그냥 뭐 대위서부터 소령, 중령까지 뚜드려 패가지고 이게, 당직 사령이면 그 사관학교 야간 교장이라고, 교장 대행인데 그 당직 총사령인 중령을 때려 패기도 하고 뭐 하튼 택시 운전수와 시비가 붙어서 택시를 뚜르려 뿌시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울분이 쌓여가지고 밖에서 보면 다른 사람이 보면 멀쩡한데 나는 정신 없이 막 아주 폭력성이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런데 원체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군법회의에 다른 사람 같으면 붊명예 제대를 해도 벌써 했지, 벌써 했는데 원체 인제 총장 비서실에 있으니까 우리 비서실장이 보고를 안 할 수가 없으니까 했어. 그러니까 참모총장이 아, 우리 젊을 땐 다 그랬어, 알아서 해. 인제 이래가지고 군법 회부되면 견책으로 그냥 끝났지. 군법회의 세 번 회부되가지고 견책을 세 번 받았어. 그것이 나는 군대 생활 한 거의 할 수 있는 얘기의 다 라고. 그러면서 총장 연설문을 인제 쓰고. 근데 연설문을 쓸 게 별 그렇게 별로 없잖아. 별로 없으니까 뭐 한 달에 한건이나 있을까말까 하고. 그러니까 내 일상 업무는 뭐냐, 일상업무는 아침에 출근하며는, 9시에 출근하면 쭈욱 공군 본부를 한 바퀴 돌아. 한바퀴 돌면서 인제 그 국감 실장들 방엘 삐꿈히 들여다 보면서, 소위가 뭐 있어요? 그러면 아, 오늘은 없어없어. 그러고 인제 그 다음에 국감실장 방에 삐꼼 들여다보며 뭐 있어요? 그러면 아, 일로 들어와, 조박사 일로 들어와. 그러니까 나는 이게 상대하는 게 중령 대령들만 상대를 하는 거야. 위관장들 상대. 근데 이 소위가, 나중에 중위가 되지만 이게 중령 대령들이 이, 나를 조소위, 조중위 이렇게 못 불러. 야, 조박사, 일로 들어와, 이래 가지고 들어가면 그 전날 밤에 뭐 있어요? 하는게 뭐 이게 뭐 보고할게 있냐는 얘기야. 그러면 아 들어와라 그러면 자기네들 불러주면 그거 가져와서. 쭉 한바퀴 돌고 한 한시간 정도 돌고 와가지고 그 중에서 인제 정리해가지고 그거를 인제 나는 열한시까지 저 국방부 장관실로 보내는거야. 장관실로 보내면 그건 인제 국방부 장관실에서는 삼군하고 해병대 껄 모아가지고 합참하고 그걸 다 모아가지구서는 인제 그 한시까지 청와대로 보고하지. 그러니까 일일 보고를, 군 일일 보고를 하는 거야. 그게 인제 내 업무고. 그러니까 이게, 뭐 중령, 대령들이 그냥 뭐 조박사 조박사 이러고 그러고 인제 이 연설문보다도 많이 쓰는 게 결혼 저, 주례사를 많이 써. 이게 창, 총장이 주례를, 가을되면 주례를 많이 선다고. 그러면 총장 주례사 쓰고. 그러면 내가 이게 무슨 전문가, 연설문 전문가니까 각 장군들이 뭐 이렇게 국장이나 실장들도 주례 슬 게 있으면 야, 저 비서실에 가서 조박사한테 주례사 부탁해오라고. 그러니까 전부다 장군들이고 뭐고 전부다 나한테 저 서로 그런 관계니까. 그러니까 이게 사고를 치는 거야. 그러다가 이제 제대를 하는데 제대를 하면서 이제 나는 이제 미국을 간다. 제대할 때 되니까, 내가 연설문을 쓰고 하니까 뭐 저, 이렇게 공군 출신 그 장관들 비서실에서 오라고 그러고. 또 공군 출신들로 나가가지고 경인에너지라고 지금은 그게 뭐가 됐나 모르겠는데. 경인에너지의 인사국장을 하는 인사부장을 하던 사람이 거기 오라 그러기도 하고. 뭐 갈 데가 많아. 많은데 아, 나는 안 간다고 난 미국에 간다고 그러고서는 나를 대학에 갈 적에 보내주던, 격려 해주셨던 나동성 선생님이 나중에 인제 우리 그 교무주임을 하다가는 공주 사범학교 교장을 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했어. 그러고서는 서울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의 교장을 하고 있었었어. 이 서울에 있는 오산 고등학교 교장을 하시던 분이 보성고등학교, 자기가 먼저 있었던 학교에 추천을 해가지고 보성에서 그, 2년 동안 교편 생활을 하고 미국엘 오게 됐지.
면담자 : 오산고등학교에도 좀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구술자 : 그거는 인제 경기도 화성에 있는 오산고등학교. 공, 군대 가기 직전에, 군데 가기 직전에 아 나는 인제 안 한다, 그러고 미국 간다 그러고 경기도 화성에 있는 오산 고등학교에 있으면서 저 학교 끝나면 서울에 와가지고 그 시사영여학원을 다니고, 미국 간다고. 그렇게 하고. 근데 군대를 가게 되니까 그래서 거기 저, 화성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하면서 시사영어학원 다니면서 그 인제, 저 준비해가지고 인제 그 공군에 들어갔지. 그래서 오산고등학교, 보성고등학교에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냐마는 그게 인제 72년에 내가 제대를 하고서 갔는데 그 72년이 무슨 해냐, 72년 그 10월 유신이 나던 해야. 그래서 이 보성고등학교에 저, 선생을 하는 데 갑자기 유신이 난 거야. 이 유신 하에서 가장 힘들었던 사람들이 누구냐면 고등학교 일반사회 선생이야. 왜냐하면 대학생들은 그래도 교수하고 이렇게 토론이 되고 그러고 이게 얘기가 통하는데 이 고등학생들은 그것도 없어
면담자 : 친굽니까?
구술자 : 친구가 아니라, 이거는 대학생들은 교수하고 토론이 아니라, 이게 하루아침에 유신이 벌어졌는데 애들이 머리를 깎고 삿갓을 쓰고 대나무 지팽이를 지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들어오는 거야. 그거를 야, 맞다, 하고 너희들 나가서 데모하라고 길거리로 내보낼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유신이 옳다고 이게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를 가르치다가 하루아침에 유신을, 유신 교사가 되어야 되는 거야. 근데 학생들한테만이 아니라 학부형들은 와가지고 학부형들 학교로 불러가지고 유신 강의를 해야 돼. 그것이 참으로 이게이게. 그러니까 내가 인생을 되돌아 볼 적에 가장 힘들었을 때가 보성에서 2년 동안 그 유신 교사를 하던 거야. 그렇다고 하, 난 지금 미국을 가야되는데. 이게 내가 그 못 나와 서 하면 인제 미국도 못가고 지금 미국도 못가고 어떻게든 빨리 여기서 탈출을 해야 되겠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인제 학교 선생님이 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면, 이건 모가지 날라 가는 거지. 근데 나는 상관 안 하고 낮에는 보성에서 하루 종일,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그래서 낮에는 보성에서 선생 노릇하고 밤에는 대일학원, 제일학원 학원 두 군데를 가서 강의를 하고. 고 다음에 또 컴퓨타 배우는 학원에 가서 컴퓨타 배우고. 그러면서 크, 눈 질끈 감고 사회 문제, 그러니까 나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권에서 그러니까 운동권 성향이 강한데도 거기에서 한발 물러서 있고 그, 군에, 군에서 그 울분을 토하면서 그냥 혼자 폭탄을 인제, 시한폭탄을 삭히고. 그게 보성에서는 하루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해서 눈 질끈 감고 가서 학원 선생을 하고 그 하면서 이년을 인제 준비를 그 하면서 그때 귀도 막고 눈도 막고 다 막고, 막고 오로지 그때 우리 와이프하고 신혼이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와이프하고의 신혼생활은 결국은 한국 탈출 작전이야.
면담자 : 결혼은 군 제대하시고 바로 하신건가요?
구술자 : 제대 하기 한달 전에. 제대 하기 한달 전에 결혼을 하고.
면담자 : 뭐 연애결혼 하셨습니까, 아니면 중매?
구술자 : 인제 뭐 중매 소개로 해서 결혼을 하고 어..인제 거기 보성에 있으면서 우리 아들을 낳고. 근데 미국에 오는데 우리 집사람하고 둘이 애들 데러올 수가 없으니까 우리 그, 장모님한테 아이를 맡기고 그러고 74년 74년 7월 6일에, 정말 그 우리 친구들한테는 내가 반드시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정말 우리 부모님하고 친구들한테는 반드시 돌아오고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약속을 했지만 결국은 나는 못 돌아올 것이라는 그, 내가 못 돌아올 것이라는 거를 마음 속에는 아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는, 그러면서 그 억눌린 유신 체제 아래서 도망치듯 김포공항을 7월 6일날 떠났지. 7월 6일 떠나서 인제 여기 코리아 타운에 떨어진거야..
면담자 : LA로 들어오신 건가요?
구술자 : 인제 나는 이제 그 내 화장실 좀 잠깐 갔다 와서

<녹화 재개>
구술자 : 위스콘신 대학원에 경제학과에 대학원과정의 인제 입학 허가서를 받아들고 왔어. 왔는데 그 LA 인제 떨어졌는데, LA에 떨어지면 인제 짐을 부치니까. 배로, 이미 배편으로 오니까 한 한달 걸린다고. 짐이 도착하면 그걸 가지고 인제 그 위스콘신을 갈려고 여기 떨어져서 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 얘기가 그 위스콘신 추운 데를 왜 가느냐고 여기 캘리포니아에 얼마나 좋은 대학이 많은데 거길 왜 가느냐고. 인제 그러고 여기 남으라고 그러는데.
면담자 : 선생님 미국에 어떤 연고가 있으셨습니까?
구술자 : 없었지, 아무도 없었지.
면담자 : 아무도없는 상태에서 그, 사모님하고 같이 두분이서...
구술자 : 물론 인제 여기에 오니 저 내 사촌 처남이 그 일년 전에 와가지고 여기 아파트에 살면서 날 마중을 나와서 그 친구는 노동치고 있었는데 나는 인제 위스콘신을 간다고 해서 여기 일단 그 친구가 있는 아파트에서 방을 빌려가지고 인제 기다리기로 했는데 그, 위스콘신을 안 간 이유는 내가 위스콘신을 가가지고 경제학을 전공을 하며는 학위를 받아가지고 한국에를 들어가면 유신 독재 하에서 저, 봉사를 해야 되는데 그거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근데 인제 그 이, 미국에 오는 때 그 당시 내가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경제학을 할려거든 미국에서는 수리 경제학을 해야 되니까 컴퓨타를 공부 하는 게 좋다, 그 당시 컴퓨타가 처음 막 나올 때야. 그래가지고 광화문에 가가지고 그 컴퓨타를 랭귀지를, 포추런(Fortran)이라는 수리 경제학에 도움이 되는 포추란이라는 컴퓨타 랭귀지를 배우러 갔어. 갔는데 이게 나가 그렇게 재미있는거야, 컴퓨타 랭귀지가. 그래가지고 그 수리 경제, 수리 계산하는 포추런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저기 어플리케이션인 코벌(COBOL)이라는 게 있었는데 코벌하고, 그 다음에 인제 기계, 기계 용어지, 기계 랭귀지, 그게 어셈블리어(Assembler)라고. 크게 그 당시 세 가지 계산하는 포추란, 비즈니스 어플리케이션인 코벌, 그 다음에 컴퓨타 랭귀지인 어셈블리어. 이 세 가지를 한 달씩 배워가지고 온 거야. 한 달씩 배워 가지고 야, 이게 그 당시에 인제 광운 전자 대학에 인제 전산학과가 처음으로 생겼을 때야. 그리고 한국에 컴퓨타라는 건 네 대밖에 없었었어. 근데 인제 나는 컴퓨타 만져보지도 못했어. 그냥 저 강의를 듣고, 컴퓨타 키스트에 가가지고 유리창 너머로 쳐다보면. 내가 미국에 와가지고 컴퓨타를 공부 하며는 한국에 가며는 컴퓨타를 가지고 정치하고는 관계가 없이 빨리 돌아가서 우리 부모님들을 모시고 내가 한국에 기여를 할 수 있겠다, 해가지고 경제학을 위스콘신 대학원에 가지 않고 이 LA에서 컴퓨타로 하튼 잡을 한번 잡아보자. 그래가지고 내가 컴퓨타 쪽으로 전공을 바꿔야겠다 이래가지고 LA타임스에 인제 나오는 광고가 나오면 영어를 못하니까 전화는 못 걸어. 주소가 있는 데를 나오면 우리 와이프하고 둘이서. 그래도 우리 와이프는 한국에서 컴퓨타 배우러 갔는데 거기 키펀치(Key punch)라는 걸 가르치더라고. 그래서 우리 와이프는 키펀치를 배워오고 나는 인제 코벌, 어셈블리, 포추런을 배워가지고 와가지구선 둘이 다 컴퓨타 쪽으로 직장을 찾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인터뷰 가는 날은 지도에다가 표시를 해가지고 아, 인제 우리 와이프가 운전을 해서 가고 와이프가 인터뷰하는 날은 내가 운전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이 LA을 돌아다니면서 6개월 동안에 한 내가 60번은 인터뷰를 했어. 근데 가며는 아, 미국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해. 그러니까 이게 뭐, ‘야, 너 미국에 온지 몇일 됐냐?’ 며칠 됐다, 얼마 됐다 그러믄 ‘너 근데 어찌 그리 영어를 잘하냐?’ 인제 이러면서 금방 써줄 것 같애. 근데 집에서 기다리면 연락이 안 오는 거야. 그러면서 우리 와이프하고 나하고 그냥 있는데 그인제 뭐 다니다가 밤에 청소를 시작하지, 밤 청소 시작하고, 주말에는 저 이게 개스 스테이션에가서 기름 넣어주는 거 그 당시엔 펌프맨이라 그랬는데 그러면서 6개월을 돌아다니는데 근데 한 두어 달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거 안 되겠어. 너 미국에서 경력있느냐? 미국에서 공부했느냐만 찾는 거야. 그래서 안 되겠다. 그래서 우리 와이프 보고 ‘그 내가 청소하고 주유소 다니면서 할 때니까 당신은 우선 키펀치 학원에 등록을 해라. 그래서 키펀치 학원을 여기 윌셔(Wilshire)에 있는 키펀치 학원을 등록을 했더니, 우리 와이프가 등록을 하니까 그 학원에서 해가지고 한 달 만에 우리 와이프는 뱅크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취직이 됐어. 어. 거, 학원에 등록을 해가지고. 학원에서 소개를 해가지고. 우리 와이프는 담에 키펀치를 하고 나는 밤에 청소를 하고 글고 내가 청소 끝나면 우리 와이프 은행 주차장에 가서 자고 있다가 오후에 나오면 같이 집에 오고. 그러면서 낮에는 내가 인제 또 취직하러 다니고. 이렇게 한 6개월을 다녔는데 LA 카운티에 그, 뭐 가서 시험을 쳐 놓으면 시험은 착착 붙어. 그믄 인터뷰에 가서 떨어지는 거야. 뭐 이런 개인회사에는 인터뷰하는 연락도 안 오고. 그런데 여기 카운티에서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 그, 조지 히로카와라는 일본인 3세가,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내가 취직을 못했을 거야. 근데 그 사람이 같은 동양계니까, 아마 그,그래서겠지. 나를 영어도 못하고, 컴퓨타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하는데 이 조지 히로카와가 나를 채용을 해준 거야. 그래가지고 6개월 만에, 75년 1월 7일에 LA 카운티 공무원으로 취직을 한 거야. LA 카운티 데이터 프로세싱 디파트먼트(LA County Data Processing Department), 전산국에 컴퓨타 오퍼레이터로 취직을 했어요. 취직을 했는데 뭐 날아갈 것 같지. 정말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난 하도 기뻐가지고 방바닥에 떼굴떼굴 굴러본 것은 그때 뿐이야. 뭐 이게 그, 영어도 못하는데 전화로 이렇게 왔는데 하튼 그러니까 취직이 됐다고 1월 7일부터 나오라는 거야. 거, 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뭐 미친 것처럼 그렇게 기뻤던 적이 없어. 그날 취직해서 갔더니, 컴퓨타 룸이 딱 들어갔더니 이게 인제 통제구역이지, 명찰들을 다 달고 갔더니, 아이구, 흑인 아이가 아주 험상궂게 생긴 흑인 아이가 나를 데리구 다니면서 얼마나 친절하게 가르치는지 몰라. 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막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거야. 그런데 가만히 이래 보니까 걔가 컴퓨타 오퍼레이터 트레이니야(trainee: 견습 직원) 걔는 정식으로 시험을 쳐서 들어온 게 아니라, 그냥 그 이케 뭐 직업센터나 이런 데서 트레이닝 받으라고 보낸 거야. 근데 걔는 거기 트레이니로 한 3년간 근무를 해가지고 아주 도사야, 컴퓨타에. 나는, 걔는 지 똘마니 들어왔다고, 지 밑에 부하 들어왔다고 신나게 가르치는 거야. 근데 가만 보니까 나는 내가 걔 윗사람이야. 나는 컴퓨타 정식으로 시험치고 인터뷰를 해서 들어간 컴퓨타 오퍼레이터야. 그래가지고 얼른 이게, 명찰을 뒤집어 달았어. 그래서 3일 동안을 뭐 열심히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가르쳐주고 뭐 신나가지고 이놈, 인제 지가 제일 말단이었다가 지 밑에 들어왔다고 난리를 친 거지. 근데 얘가 얘기 지 보스라는 것 안거야.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나한테 하드츄레이닝을 주고, 하드타임을 주는데 나는 트레이니도 아는데 너는 왜 모르냐는 거야. 근데 그게 내 변명이 되는 게, 컴퓨타는 기계마다 랭귀지가 달라 IBM 랭귀지가 따로 있고 유니백(UNIVAC) 랭귀지가 따로 있고, 하니웰(Honeywell) 랭귀지가 따로 있어. 근데 일반적으로 학원에서 가르치는 거는 IBM 3-60이라는 거를 가르쳐요. 근데 여기는, 내가 간덴 하니웰이야. 나는 IBM 오퍼레이타지 하니웰 오퍼레이타가 아니다, 이러면 익스큐스가 되는 거야. 그런데 아 모른다고 막 난리를 치는 거야. 일주일을 도저히 그걸 못참겠어. 얘가 뭐 나한테 얼마나 대하고. 그러니까 이게 거기 컴퓨타 룸에 들어가는 게 지옥에, 도살장 들어가는 거 같은 거야. 그래가지고 하루는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건 내가 그렇다고 이 잡을 그만 둘 수도 없는 거고. 걔를, 컴퓨타 아마 지금은 아마 상상을 못할 거야. 큰 강당 같은 게 컴퓨타 테잎 드라이브가 캐비넷 만 해, 이렇게. 그런게 쫙 한 40개가 있으면 거기 양쪽에 테잎이 축축축, 이러면서 돌아가는거야. 영화에 같은 데서 봤을거야. 저, 디스크 드라이브는 이게 세탁스 안에 이만한 구멍이 있는데 디스크가 이런 게 이만해. 이걸이렇게 집어넣었다가 이렇게 꺼내. 세탁기 같은 데. 그게 한, 또 2,30개가 쭉 있고. 그러면 양쪽에 돌아가는 거야 디스크 드라이브는 세탁기만한 게 이만해 이걸 이렇게 집어 넣았다가 이렇게 꺼내. 뭐 프린터가 있고 이게. 뭐 강당으로 하나 가뜩이야, 컴퓨타가 뭐. 그게 요샌 요만한 컴퓨타에 다 들어가지. 그 테잎 드라이브 뒤로 얘를 불렀어. ’나는 니가 나를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참 널 좋아하는데 너는 날 왜 그리 싫어하냐‘ 그랬더니 ’니가 우리 브라더들의 잡들을 너희 에이시안들이 들어와가지고 우리 브라더들의 잡을 다 가져간다, 느히들은 가란말이야.‘ 내가 영어를 잘 못알아듣지만 그런 뜻이야. 그러면서, 그래서 내가 나는 합법적으로 이 나라에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니가 왜 날 가라고 그러냐. 너도 여기, 여기는 이민자의 나라가 아니냐, 너도. 그러니까 우린 이민 오지 않았대.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서 끌려왔대. 할 말이 없잖아. 거기다 뭐라고 얘기해. 그런데 우리 형제들의 잡을 니들이 다 뺏어가니 우리 형제들이 그래서 못 먹고 못산다 이거야. 할말이 없더라고. 그래서 한참 있다가 그래서 알았다 근데 나는 그래도 니가 좋다. 저기 있는 다른 애들은 너처럼 그렇게 얘길 안하지마는, 말 안하지만 쟤들은 니가 나를 하드타임 주는 것을 아주 인조이, 아주 인조이하는데 너하고 똑같이 생각하지만 얘길 안하는데 너는 솔직히 얘기해주니까 좋다, 애니웨이. 난 그래도 니가 그렇게 생각을 해도 좋다. 그랬더니 이놈이 한참 이러고 보더니 한 5분쯤 이러고 보더니 손을 탁 내밀면서 ’마이 브라더,‘ 그러더라고. 그래가지고 악수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얘가, 얘 때문에 내가 출세 길이 열렸어. 왜 출세 길이 열렸냐면 이놈이 빅마우스야, 이게 입이 뭐 떠벌이야. 그러니까 아무하고나 싸워. 그러니까 우리, 거기 A팀, B팀, A조, B조가 있는데 우린 A존데 이 A조에서 얘하고 같이 아무도 일을 안하려고 해. 그 얘가 하도 싸우고서 B조에 자리나면 다 B조로 가. 그 A조는 새로 들어오는 애들만 들어오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석달만에 시니어가 됐어. 수석 오퍼레이터가 된 거야. 밑에, 밑에 애들이 아무튼 자리 나면 다른 자리로 다 가고, 이 부서, 저 부서로 다 가고 내 밑에는 신참들만 들어오니까. 아 내가 시니어가 되고 6개월이 되가지고, 액팅 수퍼바이저가 됐어. 근데 얘가 완전히 다 알아. 그러니까 얘가 일은 다 하는 거야. 다 하는데 미국 사람들이 아주 철저한게, 상하관계가 철저해. 이게 뭐 높은 사람 앞에 바로 앉고 이래도 위계 질서가 아주 분명하다고. 이게. 얘가 그, 나한테 얘기할 때, 문제가 생기면 꼭 나한테 ’이건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해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됐으니까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결정하겠냐,‘ 그러며는 나는 내가 뭘 알아? ’그러냐? 그러면 우리 그렇게 한번 해보자.‘ ’고맙다, 내 의견을 존중해줘서 고맙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니 얘가 다 하는거야. 그런데 내 결정을 기다려서 하는 거지. 그래가지고 얘가 다 쫓아줘가지고 내가 3개월 만에 시니어가 되고 6개월 만에 액팅 수퍼바이저가 되는거야. 그런데 또 이게 사람의 운명이라는게 이상한게 내가 들어가자 말자 우리가 하니웰 시스템을 가지고 쓰는데 유니백 시스템으로 완전 바꿔버렸어, 바꾼다는 거야. 그러니깐 이게 유니백의 교육을 가야되. 근데 아무도, 거기 미국 아이들이 서로 가려고 하지 않아. 왜냐면 새로 배우는 건 귀찮거든. 그러니까 아무도 안가려 하니까 나는 하니웰도 모르고 사실 IBM도 잘 모르니까. 내가 먼저 가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내 밑에 애들, 새로 들어온 신참들하고 넷이서, 신참들 셋 하고 나하고 넷이서, 일차 교육위원으로 훈련을 간거야. 츄레이닝 받으러. 츄레이닝 받으러 갔는데 그 컨설팅 컴파니에서 나와서 츄레이닝 하는데 얘들이 나한테 안 가르치고 거기 있던 제이노라고 하는 백인 여자애한테 가르쳐. 그 다음에 인제 흑인 두명 하고. 이렇게 해서 넷이 갔는데. 그러면 얘 제이노는 다 하는거야, 지가 다 안다고. 그래놓고 해보라 그럼 못해. 그럼 나는 제이노에게 가르칠 때 이래, 어깨 너머로 보고 있는데 그럼 제이노가 야, 제이, 네가 한번 해보라고. 그럼 이렇게 내가 해. 그러니까 그런게 자꾸 몇 번 되풀이 되니까 컨설팅 캄파니에서 나한테 가르치는거야. 그믄 나한테 가르치면 내가 제이노한테도 가르치고 흑인 아이들한테도 가르치고. 그러니 얘들이 내가,나한테 설명하면 다 알아듣는대, 영어는 못해도. 그거 인제 다 알아듯고서 얘기하는데. 그래가지고 석달마다 인제 석달 교육받고 인제 도로 가고 이쪽에서 다른 아이들이 오고 하는데 석달 되니까 이 컨설팅 캄파니에서 제이는 여기다 남겨뒀으면 좋겠다. 그래서 셋만 보내고 나는 거기 남아서 조교 노릇하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년 반을 거기서 조교 노릇을 해서 여기 있는 애들, 그러니까 컴퓨타를 유니백 컴퓨타를 갖다 설치하는 거에서부터 이거를 모든 걸 다 연결 다 해가지고 컴퓨터 시스템을 하나를 완전 셋업을, 인제 시험용 컴퓨타 셋업을 이렇게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면서 일년 반 동안 하면서 교육 오는 애들을 교육시켜 가지고 보내고 교육시켜 가지고 보내고 그랬어. 컨설팅 캄파니가 인제 우리 전산국에다 컴퓨타를 다 설치하고 떠난거야. 떠나고 나니까 이 컴퓨터를 아는 사람은 카운티에 나 하나밖에 없어. 난 일년 반동안 설치하는거 아주초보서부터 끝까지 이걸 다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이게 승진하는 것도 서열에 따라가지고 차례가 돌아와야 하는거야. 그니까 근데 내가 없으면 컴퓨타 룸이 돌아가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날 고만 방을 이렇게 하나 따로 주면서 나를 계속 승진시키는거야. 어, 명분을 맨들어가지고. 명분을 맨들어가지고 하면서 넌 이방에 들어앉아가지고 지금 이 컴퓨타를 어떻게 작동시켜야 되는지 책을 써라 이거야. 니가 아는 대로 다 적어라 이거야. 그래가 내가 미국에 온지 그, 한 1년 반을 넘어가지고 2년이 되는데 매뉴얼을 두 권을 썼어. 매뉴얼을 두권, 나 들어앉아서. 애들 하다 문제가 생기면 나가서 해결해주고 들어앉아서 쓰고. 그래가지구 이 미국 가이들이 10년, 15년 걸려야 진급하는 오퍼레이터에서부터 그, 이, 그 매니저, 저저 수퍼바이저 급의 그 저,저 데이터 수퍼바이저라고 하는게 어시스턴트 매니저, 매니저 보까지 한 10년, 한 15년 걸린다고. 그거를 한 3년 안에 그냥 올라가버린거야. 3년 안에 올라가는데 아무도 컴플레인을 못해, 그거 그냥 같으면 노조에서 당장 반기들고 일어나가지구 하는데. 왜냐면 전부다 나한테 와서 배웠고 내, 저저 내가 없으면 컴퓨타가 안 돌아가니까. 지들이 어쩔 수가 없는거야. 그건 노조 아니라 할애비라도 그건. 그래가지고 딱 됐는데 그때 우리 그, 내가 인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돼서 인제 컴퓨터룸을 관장하는 프로그래머에서 프로덕션 컨츄롤러라는게 됐는데 여기에서 이...고 위에가 인제 매니저야. 내가 3년 있으면 매니져가 될건데. 가만 보니까 우리가 프로그래머가 한 400명 되고 매니저 1이 한 70명 멍도 되고 매니저 2가 15명 되고 매니저 3는 우리 디파트먼트 치프야. 매니저 1 70명 중에는 유색 인종이 흑인하고 히스패닉이 한 몇 명 섞였어. 매니저2는 완전히 백인이야. 매니저 3는 치프는 당연 백인이고. 가만 보니까 내가 3년 후면 매니저 1까지는 올라가겠는데 그기에 올라가기는 그래스 씰링(Glass ceiling)이야, 유리 천장이야. 그래서 내가 저거 하러 내가 미국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우여곡절 많아서 내가 이런 속에서 있는 거 보다 내가 이것 내가 하기 위해서 내가 미국 오지 않았다, 해가지고 3년 8개월 만에 그 매니저 되는 것을 저...포기하고 내가 인제 카운티를 떠났지. 떠나서 어...그때 인제 마침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자리를 잡아가지고 집을 사기 시작하는 때야, 인제 70년대 인제 후반에. 그래서 인제 나도 집을 그 카운티에서, 카운티는 얘기가 길지만 카운티에서 한 잡을 뛰고 밤에는 또 한 잡을 뛰었어. 그래서 내가 두 잡을 한 2, 3 년 뛰었지. 그래 두 잡을 뛰니까 갑자기 돈이 생기는 거야. 그래서 우리 한국에 있던, 두고 왔던 아들도 데려오고 여기서 애들 둘 낳고. 그, 갑자기 우리가 식구가 둘이 와가지고, 와이프하고 나하고 둘이와서 둘이 벌어서 둘이 먹고 살다가, 인제 그 다음에 인제 내가 인제 대학원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니고 했는데 갑자기 우리 와이프는 애들 셋 봐야되고 내는 혼자 벌고. 이래가지고 그래서 혼자 벌게 되가지고 내가 대학원을 고만두고 한 잡을 더 해가지고 투잡을 뛰었던 거지. 그러니까 아침 새벽 아침, 한 다섯시나 여섯시에 일어나가지고 7시에 출근해서 3시 반까지 카운티에서 일을 하고 고 다음에 5시에 다른 잡에 가가지고 거기서 밤 1시, 2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와서 한 다섯시까지 자고 일어나는 거야. 근데 다향히 세컨 잡은 그것도 풀타임 잡인데도 그, 내 혼자 일을 해. 그러니까 인제 낮에 프로그래머들이 일을 해놓은 것을 밤에 내가 그걸 테스트를 하는거야. 나한테 다 테잎하고 인제 잡을 주며는 내가 혼자 그걸 하는데 거의 매일 그냥 한 몇 시간만 하면 되. 그거 다 하면 나는 그냥 가도 되는게 내 혼자 하니까. 그러나 8시간 페이를 해주지. 그러니까 풀타임 투잡이지만 그렇게 컴퓨타 오퍼레이터를. 그니까 카운티 처음 취직할 때는 힘들었는데 그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잡을 하나 더 구하려고 하니까 서로 오라고 해. 그래가지구 그 때 갔으면 지금 달나라 가는 화성 탐사선 뭐보내는 뭐 JPL이라고 나사 산하에 있는 제JPL, 제트 추진 연구소라고 파사데나(Pasadena)에 있는데 거기에서도 오라 그러고 또 유니백 아이들이 철수하면서 카운티에서 일하는 것의 다섯배를 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그런데 거기 컨설팅 팀에 가면 그 여기 저기 미국을 떠돌아야돼. 그니까 우리가족은 여기다 두고. 그 와이프와 애들은 여기다 두고 나는 시카고가서 6개월하다가 뭐 어디 샌프란시스코 갓다가 미국 전국을 돌아다녀야되는거야. 그니까 이것이 마이너리티로. 카운티 잡은 신분이 보장되는데 그거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거야. 그래서 안 갔다고. 뭐 JPL에서 오라고 그러고 얘들도 가자고 그러고. 아마 얘들 따라서 컨설팅 팀을 갔을면 내가 실리콘 밸리에 가가지고 아마 IT사업의 뭐 부자가 되었을 수 있어. 또 JPL에 갔으면 지금도 이게, 우주선 가는거 추적하면서 저기 이게 과학자로서 지금까지 살았을지도 몰라. 근데 이제 다른 잡을 하나 해가지고 살다가는 아, 인제 그 다 그만두고 나와가지고 나도 인제 집을 사고 그 당시 사람들이 집을 살 때 우리 세리토스(Cerritos)에서 어...이 부동산을 시작을 했어. 왜냐면 부동산을 왜 시작했냐면 집 하나만 팔며는 한달 월급이 나와. 그러니까 공연히 투잡을 뛰면서 밤 새서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가지고 밤 열두시 한시에 들어가는거 할 필요가 없는 거야. 뭐 그냥 주말에 처음에는 인제 이쪽 세컨 잡을 그만 두고 카운티에서만 일하고 주말에 인제 부동산을 하고. 어 그런데 이게 뭐 수입이 공연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거야. 이제부턴 돈을 버는 거다. 컴퓨타 해서 한국 돌아간다는 생각을 버리고서 이제 돈을 버는거다. 그래가지고는 나와가지고 부동산을 했는데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뭐든지 하면 내가 혼신을 다 해서 하는대신에 하나님이 다 그렇게 다 해주셔, 잘 해주셔. 부동산을 하는데 그 당시에 여기에 주간 신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우리 대학 선배가 편집 부장을 했어. 야 너 부동산 한다니까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동산에 관해서. 그래가지고 나는 뭘 하면 열심히 하거든. 그래가지고 도서관에서 찾고 해가지고서는 글을 ’투자로서의 주택 구매‘ 그러니까 집을 사는게 어떻게 이게 집을 내가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투자로서 이게 어떤 가치가 있으냐. 한국에서는 이게 돈을 다 주고 사잖아. 근데 여기서는 10%만 내면 사는거야. 10퍼센트만 내면 90퍼센트는 은행에 론을 받아가지고 하니까 이 집을 사가지고 10퍼센트가 올라간다, 그러면 내가 투자한 것에 비해서는 100퍼센트가 올라가는게 되는거야. 그렇잖아. 그래서 이게 이게 집을 사가지고 금방 100퍼센트가 올라가는거야. 그 막 올라갈 때 20퍼센트 올라가면 200퍼센트 올라가는 거고. 내 투자한 거에 비해서. 레버리지(leverage)라고 그래가지고. 그런걸 할 일곱 번 썼어.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근데 한국에 가면 조하유라고 저저저, 아니, 아이고, 박, 박 뭐 월터박이라고 나중에 한국에 가서 국회의원까지 했어. 이 친구가 부동산에 대해 글을 쓰는데 이 친구는 용어해설을 하는거야. 용어 해설을 하니까 일반인들은 읽을 필요가 없는거야. 그런데 나는, 내 글은 굉장히 재미있어. 이해하기 쉽고. 그러니까 이게 부동산 시작하자마자 부동산 전문가가 되가지고 손님들이 그냥 막 미어지게들 들어오는거야, 다 핸들을 못해. 그래가지고 토요일 일요일날은 한 사람에 두시간씩 해가지고 10시부터 12시까지 누구, 고 다음에 누구, 누구, 누구 해가지고 하루에 다섯명씩 소화를 하는거야. 그렇게 주말에 열명씩. 이래가지고 한 채만 팔면 월급쟁이보다 나은데 나는 많이 팔때는 그 한달에 열채, 열 다섯채까지 막 파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3년만에 밀레어네어(Millionaire)가 됐어. 어. 그게 거짓말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뭐 한, 한달에 집 한 두어채만 팔면 그 여긴 10퍼센트만 다운하면 되니까 한 두, 두어채만 팔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어. 그러고 내가 꼭 살려고 하는게 아니라 이게 손님들한테 소개했다가 이게 깨지니까 그러면 그걸 알고 저, 내가 레퓨테이션(reputation)이 있어야되니까 아, 이게 캔슬한다고 그런 것 보다 그건 뭐 내가 산다고. 돈이 있으니까. 그거 캔슬되면 나는 캔슬되는건 내가 사는 거야. 내, 또 돈이 있으니까. 이래가지고 한 삼년 하고 나니까 부동산이 한 열 개가 돼. LA에 아파트가 한 20 ㅇㅇ141108 조재길01_02:17:37짜리 아파트가 생기면그래가지고 밀리어네어가 된거야. 밀리어네어가 되고 부동산 회사를 내가 차리고 그래가지고 지금 윌서에 가면 이게 한인 건물들이 많거든. 근데 그 당시에는 여기 윌셔에 한국스토어가 없었어. 내가 이제 윌셔 거리에다 첫 번째 사무실을 낸 사람이야. 부동산 사무실을. 그래가지고 저 윌셔거리에다가 부동산 사무실을 내가지고 한 직원이 한 삼십명 되고 전부다, 이 부동산 하는 사람들을 유니폼을 입혀가지고 명찰을 달고 미국식으로 명찰을 달고. 완전히 사무실을 뭐 그냥 번듯하게. 상담실도 만들고. 그 당시에는 그런 한국 부동산이 없었다고. 완전히 미국부동산하고 맞먹는 정도의 그런 걸 돈을 가지고 그걸 차렸어. 돈을 가지니까 그렇게 채렸는데 그러고 나서 인제 그 윌셔에서 사무실 차렸는데 이게 79년, 어...에 인제 채렸지. 그게 그 12.12 사태인가? 아니아니, 박,박,박,박,박정희
면담자 : 10.26.
구술자 : 박정희가 죽은거야, 이게. 박정희가 죽고 한국에 서울의 봄이 왔지. 서울의봄이 오니까 그때까지 한국의 언론이 억눌렸다가 이제 우리도 눈을 세계로 돌리자, 이래가지고 KBS가 처음으로 시도한 프로그램이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 프로그램을 기획했어..그래가지구 세계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들을 뽑아가지고 그거를 취재를 해가지고 그몇 사람을 8.15 특집 프로그램으로 낸다 그랬서. 지리산 소설을 쓴 이병주라는 그 소설가가 있는데 이 양반이 팀장으로 PD 한명, 카메라맨 한명 해가지고 LA 룰 왔어.. 와가지고. 내가 어떻게 해서 거기 뽑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나를, 하고 우리 회사를 두 주를 쫒아 다니면서 인제 취재를 하는 거야. 우리부동산 회사하고 나하고의 그 석쎄스 스토리를. 그러니까 내가 세계 속의 한국이 1호야. 그게 80년 그, 4월 그, 말에 인제 4월 후반부에 두 주 동안은 와서 취재를 했어. 그러고 저, 2호를 취재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이 사람들은 갔지, 내 취재는 마치고. 그게 뉴욕으로 가서 2호를 취재하는 동안에 5·18 광주 사태가 벌어졌어. 그래서 이 취재팀들이 그만 철수를 하고 그 프로그램은 방송은 안 됐지. 나만 취재를 하고 그러다 내가 하여튼 성공한, 그 미국 와가지고 74년에 와가지고 79년이면 한 오년만에 카운티에서 글래쓰 실링까지 한 3년 만에 그 올라갔다가. 와서 부동산을 해가지고 76년에 인제 부동산, 76년에 여기서 77, 78, 79, 3년 동안 해가지고 밀리어네어가 됐어. 그래 80년에 내가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되고. 광주 사태가 난거야. 그래서 이게, 돈벌, 그래서 사람들이 ‘저 조재길이는 평생 일 안하고 먹고 살 돈을, 근데 저 그 돈을 다 쏟아 붓고 저렇게 지금 파산단계에까지 갔다하는 정도로. 내 인생을, 이게 아주 잘 나가던 사람이, 그때 아주 프로젝트가, 그것까지 얘기하면 오바되니까. 프로젝트가 내가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고 꿈이 대단했어. 이 뭐, 부자가, 사실 80년에 밀리언(Million)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LA에 몇 명 안 돼, 지금은 뭐 많지만. 어...가장 성공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으니까 KBS에서 나를 세계 속의 한국인 1호라 했지. 그래, 광주사태가 났는데 나는 광주하고는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 광주라는 대를 나, 전라도를 알지도 못해. 충청도 사람으로 안동에서. 대학에 가가지고 우리 과에 일고나온 친구하고 또 한, 전주, 전주 고등학교 나온 친구 두 명이 저 호남 사람이었었어. 그친구들하고 난 그냥 친하게 인제 지냈는데 그게 나하고 광주, 호남사람하고 인연의 전부야. 졸업하고는 미국에 오고. 그랬는데 그 광주 사태가 났으면 나는 어떻게든지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우리 부모님들, 내가 미국 오는 걸 반대했던 부모님들. 그래서 광주 사태가 났을 적에 사실은 나는 이 시국에서 애써 그걸 보지 않으려고 했어. 그러고 특히 이제 이게 이병주씨가 그때 나하고, 내가 큰 포르젝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하는데 한 천만 달러가 필요했었다고. 그 이병주씨가 이게 기자 출신인데 아주 인맥이, 아주 호걸이야. 그래가지고 정주영씨 하고 친해. 정주영씨가 그, 이, 남미 쪽에, 남미쪽에, 그 제철소를 만들겠다고 돈을 해외로 보내논 돈이 있는데 그거를 자기가 이, 내가 하는 프로젝트에 그 투입을 하도록 하겠다고 이래가지고. 아, 광주사태가 나면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꿈은 버리고 미국 시민권을 받고 성조기 앞에 미국시민으로서 선서를 했어. 그 80년 8월에. 8월 1일에. 8월 1일에 내가 미국 시민이 됀다고. 근데 그러면서 이 양반이 나 취재하고 가면서, 제가 인제 내가 시민권을 받으면 그,그 한번 한국에 들어가겠다고. 우리 어머님 회갑이기 때문에 내가 들어오겠다고. 그랬더니 들어오면 자기가 정주영씨하고 연결해줄테니까 이, 프로젝트 이거 대단한 프로젝트니까 우리 같이 한번 해보자고. 그래가지고 나는 인제 그 프로젝트도 해야 되거 한국에도 들어가야 되고 하니까 광주사태가 났을 때 나는 아무, 돌아보지 않고 외면을 했지. 8월 1일날 인제 그 시민권을 받고 8월 그, 후반에 한국엘 들어갔어요. 우리 아이들 셋을 데리고.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한데요, 당시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애써 외면은 하셨지만 당시에 그 한인, LA에서도 한인들을 중심으로 5월부터 뭐 6월까지 5·18과 관련한 뭐 항의 시위들이
구술자 : 항의 시위들 있었고 여기서는
면담자 : 그런 걸 쫌 목격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어, 여기서는 텔레비, 신문에서는 뭐, 미국신문에도 광주 사태가 보도가 되고 미국 TV에서도 광주 사태가 나오고 그래서 한국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지만 여기서는 그러게 미국 신문과 미국 tv를 통해서 이 사태를 알고 거기에서 인제 이게 이, 거, 운동 얘기니 다음에 할테니까. 하튼 교포들이 광주사태에 대해서 데모를 하고 항의를 하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나는 애써 외면을 하고 8월 말에 한국을 들어갔어요. 한국에를 들어갔는데 한국을 가보니까 내 느낌이 서울이 유령의 도시야. 아무도 얘기를 안 해. 글고 친구들도 서로 만나지를 않아. 친구들도. 그래가지고 서로 친구들 한자리에 딱 모아가지고 야, 하고서 한번 하면 좋겠는데 한명씩 밖에 서로 안 만나려고 해. 그럼 얘, 얘, 얘, 나하고 만나자고 하면 만나. 그럼 만나고, 쟤 만나고 그러고 고향에 가도 아무도 안 하고. 그러고,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우리 어머님이 ‘너 미국에 가길 참 잘했다’ 그렇게 반대하시던 분이. 그러면서 나는 애들 뭐 셋, 그 손자 손녀들 셋을 데리고 왔으니까. 우리 어머니 그렇게 미국에 가는 걸 날 불효자로 하더니 그 ‘니가 어디 가서 살던 니 자식들 잘 키우고 잘 살면 괜찮다. 나는 괜찮다. 너 미국 잘 갔다.’ 그러셔. 그래가지고 그 한국 방문을 하는데 내가 떠나왔던 유신 때보다도 이거는 완전히, 뭐 택시를 타도 택시 기사도 뭘 물어봐도 얘기를 안 하고 아무도 얘기를 안해. 버스를 타도 안 하고. 뭐 사람들 전부다 입 다물고들 다들 있는 이게 무언의 도시, 침묵의 도시, 그 유령의 도시더라고. 돌아왔어. 돌아와서 이제 그, 내가 신문을 시작을 했어. 신문을 시작한 게 내가 신문을 시작한건 광주 때문에 그 민주화 운동을 위해 신문을 시작한 건 아니고 내가 인제 부동산 회사를 크게 하니까 부동산 회사의 선전을 위해서. 󰡔주간 광고󰡕라고 그래가지고 우리 회사 선전. 우리가 회사가 크니까 광고비가 많이 나가는 거야. 그 돈을 가지고 신문을 맨들어서 우리 회사의 광고도 하고 다른 사람 광고도 받고. 이래가지고 󰡔주간 광고󰡕라는 신, 광고지를 만들은 거야. 그러니까 󰡔주간 광고󰡕라는 게 거기에 기사는 없어. 그냥 뭐 경제 동향 뭐 이런 거, 고 다음에 TV 안내 이런 것만 해서 했는데 그게 신문이니까 한호 두호 만들면서 신문을 좀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니까 세상만사, 뭐 이래가지고 무슨 가십거리를 이렇게 쓴 거야. 근데 다른 신문들이, 한국 신문들이 광주사태에 대해서 보도를 전혀 못하는 거야 근데 그거를 미국 신문이나 미국 방송을 통해서 들었는데. 거기에 세상만사 이런데 전두환 고스돕, 최규하 고스돕 이런 거를 가십거리로 실어. 그러면 그거를 실었다는 자체가 이게 막 센세이셔널 한거 야. 그러니까 어, 이런 신문이 다 있느냐고, 최규하 고스돕, 전두환 고스돕을 이란 걸 쓰는 신문이 있냐고.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점점점점 이게 기사가 늘어나는 거야. 그래가지고 사람들의, 이게 독자들이 원해서, 신문을 󰡔주간광고󰡕라고 맨들었는데 이게 점점점점 일반신문으로 바뀌어가는 거야. 그래서 이게, 그 당시에 일간지나 이런 대서는 뭐 한 몇 천부 밖에 발행을 못했는데 우린 이만 장씩 뿌리니까, 우리 신문의 광고효과라든지 그 파급력이란건 엄청난 거지. 그래서 어, 이게 저, 26호인가부터, 29혼가에서 󰡔주간광고󰡕라는 이름을 버리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 이라는 영문 이름으로 일반 종합 주간지로 바뀌었어. 그래서 그게 그만 내가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신문을 만든 건 아닌데 어느 순간에 시대의 그 요구에 따라가지고 이게 민주화운동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이게 바뀌었지. 근데 이제 그 당시, 거기에 인제 미국의 민주화, 미국의 운동은 인제 독립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다가 독립운동 끝나고 한국에들 들어갔다가 거기서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못사는 그 독립투사들이 다시 이게 미국에 와가지고 운동을 했지마는 이게 노인네들이 모여가지고 그냥 하는 우국지사의 그냥. 근데 민주화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반 독재 운동이 대중운동이 되는 데는 몇 가지, 인제 광주사태를 계기로 해서 이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이게 민, 교포 사회와 교포 사회의 민주화 운동 그룹을 사실 그 미미한 몇몇 사람들의 그, 이게 운동이었는데 그거를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이게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한 거야. 그 다음에 인제 83년엔가 윤한봉이 인제 미국으로 오는거. 와가지고 그 전까지는 뭐 그냥 각자들이 각자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모여가지고 선언문 작성해서 선언문 한번 낭독하고 또 이게 전두환 온다 하면 가서 데데, 데모하고 그게 다야. 근데 인제 이게 윤한봉이 와가지고 LA에서, 83년인가 와가지고 그, 이, 민족학교라는 걸 만들었어. 이 민족학교에서 윤한봉이 상주하고 여기서 인제 전준호라고 하는 거기, 교장을두고서 민족학교를, 그 마당집을 만들고 고 다음에 민족학교를 만들어서 청년들을 훈련을 시키고 고 다음에 상주하는 상근자가 있고. 그러니까 직업 운동가들이 시작이 된 거야. 직업 투사들이. 그, 그 인제 󰡔스트릿 저널󰡕과 윤한봉이의 민족학교, 그 마당집, 민족학교, 한청, 한겨레 운동연합, 이것이 인제 LA에 생기고 뉴욕에 청년학교가 생기고 시카고하고 워싱턴에 이렇게 생기면서 미국이 하나의 그, 저 운동권의 이, 조직화가 되고 또 전문적인 인제 운동가들이 나오고 그러니까 그 당시 여기서 민족학교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은 이게 뭐, 신학 공부를 하던,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도 다 때려치우고 유니온 신학 다니던 친구도 때려치고 여기서 그냥 전업 운동가가 되고.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친구도 때려, 학교를 때려치우고 오고. 이래가지고 이 운동이 되고. 이거를 동포 사회에 알려. 이거를 아무도 보도를 안 하는 거야. 한국일보, 중앙일보, 세계 신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보도를 안 하고 그, 이게 이게 주간지들이 있어도 보도를 안하고. 했는데 그거를 우리 󰡔스트릿 저널󰡕이 그거를 보도를 하고.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 󰡔코리안 스트릿 저널󰡕을 발행을 하시면서 물론 선생님도 당시의 그런 한국 사회에 대한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많이; 가지셨지만 애써 좀 이렇게 외면하고 계셨던 부분들도 분명히 쪼끔 있었던 것 같고 지금까지 이렇게 부동산 활동을 하시고 다른 어떤 직업을 하시고 선생님 개인 어떤 그런 활동들을 쭉 하셨는데 󰡔코리안 스트릿 저널󰡕 만들면서 약간 좀 한국 정치 사회에 좀 관심이 많은 분들과 인제 교류를 쪼끔 어찌보면 시작이 된 부분이 있잖습니까.
구술자 : 근데 나는 단체에 가입을 안 했어. 근데 모든 단체가, 이 민족 학교 뿐만이 아니라, 뭐, 그그, 무슨 기도회? 나중엔 통일염원 기도회가 됐는데 목요 기도회, 뭐 고 다음에 뭐 여기에 거, 뭐 통협,.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있지 그 단체들이 전부다 사실은 󰡔스트릿 저널󰡕을 통해서 운동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몇몇 사람들이 운동을 해도 그것이 교포 사람들이 알지를 못해. 외면을 당하는 거야. 근데 이 2만장이나 발행을 하는 집집마다 이렇게 배달하는 신문이 그거를 다 보도하니까 이게 영사관이 인제 난리가 난 거지.
면담자 : 그런 부담감은 쫌 없으셨습니까? 이런 기사들, 이러 내용들의 내용을 선생님이 󰡔코리안 스트릿 저널󰡕에 싣는 다는 게 지금까지 이루어 오신 이런 일정정도의 부분도 있는데 좀 외압이랄까, 뭐 그런 것이...
구술자 : 외압이 엄청났지
면담자 : 걱정스럽진 않으셨습니까?
구술자 : 어, 근데 그 당시에는 젊으니까. 젊고 돈이 있으니까. 이게 돈을 마켓을 해가지고 한푼, 한푼, 페니를 가지고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았으면 그렇게 못써. 나는 어느 순간에 한 3년 사이에 돈을 돈이 귀한 걸 모르는 거야. 그냥, 그냥 쓰는 거야. 그리고 탄압을 하면 그 영사관에서 나를 설득하려고 그 총영사가 자기 총영사 관저에, 그 당시에 처음 만들었을 때 총영사 부인이 사대 선배야. 그러니까 선배로서 후배를 초청하는 형식으로 초청을 해가지고 같이 인제 식사도 하고 그런데. 나는 선배로서 나하고 이렇게 초청하는 건 고마운데 내 신문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라. 그러고 인제 그러니까 처음에는 설득을 하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이게 인제 󰡔스트릿 저널󰡕하고 인제 부총영사가 󰡔코리안 스트릿 저널󰡕 전담을 하다시피 해가지고 이걸 어떻게든지 조재길이하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은 빨갱이다, 그러고 여기다 광고를 못내게, 광고를 못내게 해서 교포사회로부터 이게 격리를 시키려고 아주 무한히 노력을 했지. 그러니까 나는 그, 내가 3년만에의 밀리언이 이게 84에 내가 뱅크럽시(Bankruptcy)를 할 정도가 된 거야. 그런데 그 84년이 뭐냐하며는 󰡔스트릿 저널󰡕이 일간지, 그럼 교포들이 일간지 만드라고 한국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 쓸데없는 신문이니까 이게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일간지를 발행해야 된다고 나한테 어떻게 압력을 가하는지. 시대가 나를 그렇게 몰고 간거야. 그래가지고 나는 일간지 되면 뭐 금방 이게 일간지가 큰 신문이 될 줄 알았어. 그래가지고 어... 1년에 40만 불을 투자를 해가지고 내가 일간지를 발행했어, 84년에. 그니까 그 전에 주간지 한 3년 발행하는 동안에 돈을 많이 썼고 40만부를 그, 투자를 해가지고 하니까 그 밀리언 달러가 순식간에 사라진 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이게 한국 정부의 광고 탄압으로 인해서 이게 운영이 안 되는 거야. 그래가지고 파산단계에까지 들어갔지. 그랬는, 인제 파산단계에 들어가면서 일간지를 9개월 만에 40만 불을 없애고 문을 닫고 나는 돈이 없어서 뱅크럽시를 못했어. 왜냐면 변호사 비용을 캐쉬, 이게 현찰로 가져오라는거야. 현찰로 2만 불을 가져오라 그러는데 현찰 2만불이 없어가지고 내가 파산을 못하고 그러고 나서 인제 그때까지는 내가 운동권에 관련을 안 하다가 그리고 나서는 어느 순간에 내가 민주화 운동의 그냥 한 가운데 선거야. 그래가지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사실은 운동의 중심이 됐어. 그러니까 시작은 인제 민족학교에서 그게 이제 가장 우리가 본격적으로 인제 정식으로 한 게 광주 위령탑 건립 기금 모음. 그거는 이제 한청에서 민족학교에서 하면 그걸 우리 신문이 누가 얼마 내고 누가 얼마 내고 이걸 하고 그 정말 가슴 아픈 스토리들을 보도 하고. 그러면 그거에 뭣해가지고 또 모급이 들어오고 그러고 그것이 또 나가고. 이걸 해가지고 황석영이를 초청해서 하고 해가지고 그때 뭐 정확한 액수는 저 책에 아마 나올 거야. 그 모금을 해서 보내고. 그러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한 게 한국에서 양심선언운동을 했어. 양심선언 운동을 했는데 뭐 한국의 치과의사도 하고 의사도 하고 학생도 하고 교수도 하고. 그때 인제 내가 이게 미국에서 양심선언운동을 조직을 해가지고 그 때까지는 이게 그때까지는, 이게 친정부 어용이었던 상공회의소 회장 한인회장들을 한 30명을 모아가지고 직선제 개헌 양심선언운동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5일, 저저저, 그 6월 항쟁. 6월 항쟁 때는 그, 내가 누구야, 저 서경석이. 한국에 가 있는 서경석이. 서경석, 서경석 목사. 서경석 목사가 뉴욕에서 평화 대행진을 조직을 하고 내가 여기서 이게 시국선언 대회를 조직을 하고 그래서 양쪽에서 같은 날 우리가 해서 한 5천명이 모여가지고 그때 미국의 그때 tv방송들이 전부다 와서 취재를 하고. 그래서 그 이제 위령탑 건립운동, 양심선언 운동, 그 다음에 6월 항쟁 이거는 완전히 인제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가지고 해서 6월 항쟁으로 해서 민주화 운동으로, 민주화되는 과정으로 들어가지. 근데 민주화 되는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에서 󰡔한겨레 신문󰡕 나오고 󰡔말󰡕지에서 막 보도를 하고 󰡔새 국민 일보󰡕, 󰡔세계일보󰡕 나오면서 청와대 비사, 뭐 새마을, 정경환이 뭐 어쩌고 하면서 이게 온갖 스토리가 나오니까, 저쪽에서 다 나오니까 인제 우리 신문에서 볼 게 없는거야. 그리고 광고를 못해가지고 내가 인제 완전 뱅크럽시 단계에 들어가고. 그래서 우리 신문은 민주화가 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거지. 그래서 자세한건 저기 책에서 보면 되고. 설 자리를 잃어가지고 결국에는 돌파구가 그, 통일운동, 민족 화해와 통일운동 사이드로 하니까 오히려 이게 빨갱이 이미지가 더 짙어지고 그래서 타운 번영회라는 데서, 타운번영회에서 나를 빨갱이로. 나하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을 빨갱이로 하니까 그래서 소송을 하고. 그리고 그 소송이 끝나고 나서는 내가 인제 북한에 취재를 다녀오고 그러다보니까 이제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 책을 쓰고. 그러면서 통일운동에 깊숙이, 이렇게 민주화 운동에 깊숙이, 그리고 통일 운동에 깊숙이. 이러면서 나는 인제 완전히 빨갱이 딱지가 붙고. 그러다가 인제 90년대 후반에. 아, 내가 뭐, 인제 그니까 신문사를 문을 닫고. 그 다음에 아, 라디오 방송을 한 3년. 그 인제 일주일에 한번씩 칼럼 방송을 했는데. 내가 뭐 제대로,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해 가는거야 하도 빨리 변해가니ᄁᆞ 내가 세상 돌아가는걸 제대로 알고나 떠드냐 말이야. 이래가지고 이...아, 내가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어...70, 이, 그 그러니까 78년인가?
면담자 : 97년입니다.아참, 97년 12월 17일 날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 12월 말로 내가 한인 사회에서 떠났어. 한인 사회에서 모든 직책을 버리고 한인 사회를 떠나가지고 그때부터 저 남쪽으로 회사를 옮겨가지고 인쇄소를 옮겨서 그니까 저, 빈털터리가 됐다가 3년 동안 그 인쇄소를 해가지고 또 돈을 벌었어. 그래 나는 전 3년 후 3년이라 그래. 부동산 해서 3년을 해서 밀리언을 벌고 그거를 민주화 운동가에게 다 쏟아 붓고 그 다음에 98, 99, 어, 2000, 2001년, 4년 동안. 98년은 준비하고 그래서 3년 동안 저 남쪽에 가서 인쇄소를 해가지고 돈을 벌고, 그걸 가지고 2002년에 내가 회사를 정리하고 리타이어를 했어. 리타이어를 하면서 아, 내가 지금부터 뭘 할 것이냐. 그래서 민주화운동, 통일 운동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냐. 여기와서 내가 설 자리가 없더라고 그래서 2002년부터 미 주류 사회에 인제 한인 정치력 신장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한인 정치력 신장운동 쪽으로 나가서 거기서 한 인제 지금까지 인제 12년 동안,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당선되가지고 지금 이제 8년 시장, 시의원을 마치고 내년 3월이면 인제 끝나.
면담자 : 그면 계속 이게 끝나시는건가요? 또 하실 수 있는 건가요?
구술자 : 어, 인제 이게 시장, 시의뭔은 4년 임기 두 번밖에 못해.
면담자 : 그러면 다른 뭐, 도전을 하시겠다고?
구술자 : 그거는 인제 지금 고민 중이야. 그래서 뭐를 할 것이냐, 그래서 지난 한 2년 동안은 내가 인제 내년에 3월에 끝나면 뭘 할 것이냐. 그러면 이 시대에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그래가지고 얘기하면 복잡하니까. 나는 한국이 한반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한국전쟁이 60년 동안 끝나지 않은 데에 있다. 이 60년 동안 끝나지 않은 한국 전쟁을 끝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고 이 한국 전쟁은 미국과 북한의 전쟁이다. 그러면 이 한국 전쟁을 끝내는 거는 워싱턴에서 어...주도적으로 끝을 내야 되는데 그러면 이게 한국 전쟁을 끝내는 데에 미주에 살고 있는 이 미주 동포들의 역할이, 워싱턴에다가 한국전쟁을 끝내 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인제 작년에, 작년에 책에 서문에 나오지만 1월 7일 날 워싱턴에 오바마 저...취임 2주년에 갔다가 국회의원 7명하고 얘기하면서 아, 이게 아니다. 한국 전쟁을 끝내기 위한 책을 한 권 써야겠다, 해서 인제 󰡔평화가 먼저다」. 그 다음에 통일보다도 우선 남북이 총부리를 내려놓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이다. 그래서 인제 금년에 영문판을 준비를 해서 내년부터 인제 한반도 평화운동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인제 고민을 하고 있고 그런데 갑자기 인제 연방 하원을 출마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걸 가지고, 지금 책을 1월 달에 영문판을 내려고 하다가 우선 일단 홀드를 하고. 지금 이러고 있어. 이거 은호기 선생 오셨을텐데.
면담자 : 선생님 그 마지막으로 제가 질문을 한 가지 좀 이렇게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인제 세리토스에서 시장도 하시고 시의원을 지금 계속 지속적으로 하고 계시는데, 그 한국인들이 한국계 미국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한국에, 아니 미국에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정치적 목소리는 굉장히 좀 미비한 것 같아요. 다른 어떤 부분에 비해서. 그래서 선생님이 쫌 생각하시기에 이런 미국사회에서 한국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어떤 좀 방안들을 어떤 생각들을 좀 가지고 인제 이걸 더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더 있어야한다고 보십니까?
구술자 : 우리 동포사회가, 어...이제 다른 커뮤니티, 중국 커뮤니티, 이민 역사 200년이 넘은 중국 커뮤니티와 비교는 안 되지만 어...상당히 굉장히 여러 면에서 성장을 하고 어...이게 큰 역할들을 하고 있었요. 근데 가장 뒤떨어진 부분이 정치 부분이야. 정치부분은 내가 이게 정치활동을 시작하던 그 당시는 완전히 거의 없다시피. 물론 그 10년 전에 김창준씨가 연방 하원의원 당선된거 있지만 그거는 특수한 케이스고. 그 이후에, 그 이후에 공백이 생기고 그래서 아, 한인 정치력 신장이 가장 중요하다하는 점에서 내가 인제 뛰어들었고. 근데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 나는 이게 커뮤니티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어...꾸준히 이렇게 힘을 합쳐서 목소리를 내야 된다, 그러니까 정치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해. 첫 번째는 우선 그 후보자가 있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정치력이 왜 이렇게 약하냐?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커뮤니티는 당선자가 많은데 우리는 왜 없느냐? 걔들은 출마를 했고 우리는 출마를 안 한 거야. 후보자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떨어지더라도 출마를 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그 후보자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후보자들을 키워야 되고 두 번째는 이게 투표를 해야 되. 근데 이게 지금까지는 한인 후보가, 한국 사람들은 한인 후보가 없으니까 투표하는데 관심이...이게 남의 농, 남의 일이야. 그니까 내가 그 처음에 출마를 했던 거는, 나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어. 왜 한인 사회에서 신문을 만들고 그러니까 카운티에서 3년 8개월 일한 거 외에는 난 영어를 해보지 않은 거야. 미국을 오래 살았어도. 영어를 전혀 못해. 저기 얘기 나오지만. 그니까 그런 내가 당선돼야 된다고 생각한건 아니고. 한국 사람은 한국 후보가 있어야만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를 하니까. 우리가, 내가 투표용지에다 이름을 올려서 유권자 등록 시키겠다, 해서 시작을 한 거라고. 그 다음에 인제 돈을, 돈이 중요한 것이야. 그래서 돈과 보딩 파워(voting power)와 이 후보자를, 이 세 가지 요건이 맞아야 되는데 이거를 위해서는 커뮤니티가 전체적으로 힘을 합쳐서 꾸준히 지속적으로 노력을 해가야 되는데 내가 나올 당시만 해도 후보자가 없었어. 그러나 이제는, 금년에도 29명이 출마를 해가지 22명이 당선될 정도로 이제는 상당히 정치력이 신장이 됐지마는 아직도 시작에 불과해. 시작에 불과해서 어...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런 점에서 민족학조가 나카섹(NAKASEC)이라고 해서 에...미국에, 미주동포들의 민권 운동, 또 정치력 신정 운동에 앞장 서는 건 참 방향을 잘 잡아서 하고 있다, 인제 그렇게 보지. 너무 내가 장황하게 하다보니까. 요번에 못한 건 책에 보면 다 나와.
면담자 : 알겠습니다. 긴 시간 이렇게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구술자 : 오케이.
육길원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육길원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0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글렌뷰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육길원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0일입니다. 네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구술자 : 저도 반갑습니다, 수고 많습니다.
면담자 : 예. 그, 우선 좀 선생님의 살아오신 것을 좀 이렇게 말씀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언제 태어나시고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말씀을 좀 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저는 1940년 2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데는 삼선교, 돈암동, 성북구. 그 다음에 제 본적은 서울특별시 낙원동 92번지입니다. 7남매 중 제가 두 번째 두 번째였고 제 위로 형님이 한분이 계시고 형제간에 상당히 우애가 많고 또 형제지만 친구 같은 형입니다.
면담자 : 그, 그때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당시 인제 일본 제국주의, 일제 시대였을텐데 거기에 대한 기억들은 있나요?
구술자 : 일제 시대 때에 그, 저, 뭐야 1945년에 해방이 되었죠. 그러니까 일제시대에는 한 세 살 때 서울에서 형님들이 와서 사진 찍어주고 그러던 기억밖에는 없고, 볼때. 사진이 있었기, 있었고 그 다음에 저희 아버님이 일본에서 공부하시고 할어버님이 경상북도 상주에서 농사를 크게 지으셨어요. 만석 가까이 지으셨다고 그래요. 팔천 석. 땅을 밟지 않으면 못 디딘다고. 박정희 부인 되시는 육영수, 육영수 여사도 먼 친척이죠. 그러니까 저희 아버님이 창수고 그쪽은 영수, 육영수 뭐 이렇게 3,4대 올라가면 다 같은 친척일 정도로. 그래서 인제 동경에서 공부하시고 바이올린을 치시고, 바이올린을 키시고 돈이 많으시니까 뭐 동경하고 돈을 많이 쓰셨죠. 할어버지가 돈을. 제가 낙원동 92번지가 본적인 것도 여기처럼 뭐 집 살 때 모기지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캐쉬를 갖다줘야 집 사잖아요. 종로에 기와집 사시구. 어머님은 신여성으로서 진명여고를 나오셨는데 농구도 하시고 뭐 자전거를 타시고. 여성이 그 당시. 개화된 분이고 그러니까 돈 많은 지주의 아들이 개화된 여성을 만나서 나를 낳은 거예요. 근데 아버님이 그래서 인천 부청에 다시셨어요. 부청이 지금으로 말하면 시청이죠. 그래서 잘, 공무원인데도 잘 살았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친일파는 아니었고. 그러니까 선창에서 배 들어오는 것을 관리하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참 어려운 땐데 어렸는 대도 제 기억에 우리집에 밤이 막 자루로 왔다가갔다 하고 다섯 살 이전의 기억입니다, 이전에 살 때. 용동이래는데 살았는데 지금 그게 없어졌다고 그러더라교요, 역 앞인데. 동네 이름이 갈렸다 그러더라고요. 얼마 전에 가서 물어봤더니.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은 제가 어렸지만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건 어떻게 기억하냐면, 역 앞에서 살았다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역 앞에서 사람들이 막 스크럼을 짜고 그때 그 당시에 스크럼인지는 몰랐지만 막 어깨 동무를 하고 말이죠, 막 좋아서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백의 민족이, 마악 좋아서 왔다 갔다 이리도 갔다 저리도 갔다 하고, 뭐 태극기 흔들고 어디서 태극기가 났는지 만세 부르고 말이죠. 어렸을 때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8.15를 기억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그게 해방 지난 다음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래서 서울서 학교 다니고. 그래서 해방의 기억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면담자 : 7남매에 부모님, 하면 아홉 식구인데
구술자 : 아홉 식구가 살았죠.
면담자 : 네. 좀 부모님께서 좀 경제적으로 풍요로우셔서 그렇게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그런 것은...
구술자 : 아니 아니요, 그거는, 그거는 해방 전의 얘기구요, 해방까지. 그 다음에 6.25 겪으면서 어...다 힘들었어요. 지주 자식들이든지 하여간, 모르겠어요. 친일파나 뭐 이런 매판자본으로 이병철이나 이런 사람처럼 성공한 사람들은 이렇게 잘 살고 그랬는지 몰라도 그 당시는 다 가난했고 가난이 또 흉이 아니었어요. 누구나 못 살 때니까. 전쟁으로 다 파괴가 되고 무에서 막 시작하고 그런 때니까. 그래서 저희두 어려웠습니다. 저희두 어려웠고 또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오프더 레코드(off the record)로 발언하는데 저희 아버님이 경마를 했어요. 이건 오프더레코드로 해주세요, 참고로. 그래서 가산을 탕진하셨고 어머니가 속을 많이 쎅였고. 그래서 저는 화토도 안 해요. 노름으로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을 해갖고. 그래가지고 6.25 전에 아버님이 6.25 전에 그러셨던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게, 그 가난이 6.25를 겪으면서 더 어려워졌고 고 다음에 인제 박정희, 아니 노노,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정권으로 오면서도 계속 어려웠어요. 아버님이 책방을 하셨는데 9남매를 맥여 살리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책장을 하기 전엔 체신부 공무원으로써 또 계셨는데 오랫동안. 보험 관리국에. 이 공무원 말단 5급인가 4급 정도 되셔가지고 계장인가 되시고 그랬는데 9남매, 7남매 맥여 살리기 힘들죠. 그래서 어... 부자 삼대를 못 간다고 제 경우는 지주의 자손이라기보다 오히려 참 서민, 그니까 저...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많이 겪었어요. 그래서 그게 내 성장에서도 그게 내가 신문을 제작하는데 그 가난이래는 게 많은 영향을 줬어요. 가난도 편견이래면 가난에 대한 편견을 제가 가지고 있어요.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싸울 수 있고. 그런 정서가 내가 못살았기 때문에, 눈물 젖은 빵을 맛 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요.
면담자 : 한국전쟁이 일어나시기 전에 인제 선생님께서는 아마 국민 학교
구술자 : 국민 학교 다녔죠, 3학, 3학년 다녔어요.
면담자 : 47년에 입학 하셨나요?
구술자 : 6.25는 1950년에 6.25가 일어났구요. 45년에 해방이 됐고 고 다음에 47년인가, 8년에 입학했을 거예요. 정확히 기억은 못하는데.
면담자 : 학교 이름이 기억하시나요? 학교 이름.
구술자 : 학교에서 처음 들어간 데는 종암 국민학교라는 데를 들어갔어요. 그리고 졸업은 서대문에 있는 안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러니까 서울서도 가세가 기울면서부터 외갓집에서도 살고 아버지가 집을 잽혔기 때문에 안암동에서도 살고 돈암동에서도 살고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서 학교도 옮겼어요. 군인들이나 은행 가족들이 전전을 하듯이 우리는 아버지 때문에 식구들이 인제 옮겨 다녔죠. 근데 어쨌든 서울에서 국민 학교를 다녔습니다.
면담자 : 방금 말씀하신대로 국민 학교 3학년 때 쯤 6.25
구술자 : 네 6.25가 났어요. 그쯤이 아니라 그때 일어났어요. 그게 1950년이었어요.
면담자 : 그때 다른 데로 피난을 가시거나 하진 않으셨나요?
구술자 : 좀 얘기가 복잡한데요. 어...6.25때는 서울시민이 거의 피난을 못 갔어요. 1950년 6월 25일은. 많이 그냥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앉아서 그 식량이 없어서 많이들 굶고. 호박죽 먹고 뭐 이렇게 연명하는 그런 시대였고. 그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1.4 후퇴, 한 해를 넘기고 1951년 중공군이 6.25 참전 했을 때 그때들 막 피난 간 거예요. 공무원들 막 차를 실어 나르고 열차로 실어날라 가지고 대전, 대구, 부산으로 가고, 그 다음에 이제 저 뭐 군인 가족들은 해군, 해병대 이런 데로, 진해로 가고 그랬는데 우리도 나가다 중간에 돌아섰어요. 7남매를 끌고 도저히 가실 수, 가실 수가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멀리 못 가고 갔다가 다시 또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런대도 공산주의에 대한 그 실체라고 그럴까, 참 허구라고 그럴까? 그런 걸 어려서 부터 느꼈어요. 이건 사기라고 그럴까? 아니면 선전 이런 거를 어린 마음에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공산주의 때문에 무지무지한 고통을 당한, 뭐 거긴 나뿐만 아니고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6.25래는 게 우리 세대, 이상 한때 준 영향이래는 건 이건 뭐 어느 거하고도 비교할 수가 없죠. 6.25라는 그 기점, 전환점에서 인생들이 막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이산가족이 생기고 무슨 더 많은 가난한 사람이 생기고 사람들의 그, 저 인성이 포악해지고 말이지. 그러니까 막 살기 위해서, 적자생존하기 위해서 남한테 이겨야 되고, 거짓말시켜야 되고, 사기 쳐야 되고. 그리고 피난민 잔뜩 왔으니까 남쪽 사람들은 이북치라 그래가지고 평안도 사람, 함경도 사람 싫어했어요. 그래서 지역감정 같은 거도 그런 데서 내재 되있었는지도 모르고. 그 다음에 하여간 6.25가 민족사적인 견지에서 한 민족을 파탄시킨 거예요. 민족을. 그래서 아, 무슨 종북이나 저쪽, 북쪽을 찬양하는 사람은 통일이 되었으면 또 이게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냐, 김일성이가 유독 업적을 생각하고 말이지, 역사의 공을 세우는 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동족상잔을 해도 그것 땜에 아직까지도 아까 내가 장선생하고 얘기했지만 미국에서까지도 이념 논쟁, 무슨 미씨 유에스에이(MissyUSA.com)가 이게 뭐 보안법에 걸린다, 뭐 아니다, 우파 좌파로 갈려가지고 같은 민족끼리들. 남북 분단도 서러운데 남남 갈등을 겪는다는 거 이게 다, 얼마 전에 고은 선생님하고 인터뷰했을 때도 그 얘기해요. 분단 상황이 이렇게 길어지니까 이념, 이념 논쟁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거야. 집권층은 그거를 이용해갖고 빨갱이로 몰아서 자기네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려고 들고. 그래서 하여간 6.25래는 건 난 참 이가 갈리고, 또 한 많은 인간들의 인성을 파괴 했고, 가난에 허덕이게 했고 수많은 이산가족을 냈고. 그 이후에 독재정권을 만들게 했고 그니까 역사상 참 가슴 아프면서도 말이죠, 많이 그 참 처참함을 당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면담자 : 그 국민 학교 시절이 어찌 보면 절반은 한국전쟁을 같이 하신 건데, 그 뭐 특별히 피해를 입으셨다 거나 특별하게 정말 기억에 각인이 남는 그런 건 있으신가요?
구술자 : 우선 못 먹고 자라서 체격이, 체격도 이렇게 작잖아요. 인제 못 먹고 살았고 그 다음에 인제 그 6.25라는 전쟁을 이긴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는 이기질 못하고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했어요. 우리 가족은. 그니까. 내가 장성해서 이민 올 때까지 가난 때문에 고생을 했고, 고 다음에 이민 온 것도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당시 신문 기자로서. 자유를 찾는다는 의미도 있었고 망명이란 뜻으로 얘기할 수 있고. 또 미국에 와서는 자유를 찾자는 거, 또 좀 잘 살아보자, 좀 잘 살아보자. 한국 너무 가난하고 또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좀 정직한 나라에서 살아보자. 이런 걸로 이민을 온 건, 이건 나중에 할 얘기지만, 지금 할 얘기가 아니지만. 그런 뜻으로 이제 이민을 온 거죠.
면담자 : 중학교는 어디로 입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나는 중고등학교를 저 특차를 나왔어요, 서울 사대부고를 나왔어요.
면담자 : 공부를 굉장히 잘하셨나봅니다. (웃음)
구술자 : 아, 아니요. 국민 학교 다닐 때 학교를 옮길 적마다 반장을 시키더라구요, 선생님들이. 그래서 6년 동안 늘 반장했습니다.
면담자 : 사대부중, 사대부고 이렇게 나온 겁니까? 그 중학교 들어가신...
중학교 때 내가 잠깐 어디 거쳤는데 그거는 내가 그 이름이 있질 않아요. 왜냐면...예.
면담자 : 그 중학교 입학하신 해, 연도가 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중학교가 56년이고 고등학교가 기억하지 59년, 아니, 아니, 53년이고 3년, 3년이면 어떻게 되요? 53년에 입학해서 59년에 졸업했습니다.
면담자 : 예.
구술자 : 59년에 맞아요. 그니까 50년때 그때만 해도 여기다가는 저걸 안 했네요, 연도를 안 넣었습니다. 59년에. 맞아요, 59년. 왜냐면 63년에 내가 대학을 나왔으니까.
면담자 : 그렇게 하시고 1960년도에...
구술자 : 50년에, 59년에 대학을 갔어요. 졸업하면서 대학에 입학했어요.
면담자 : 서울대 사범대
구술자 : 서울대학교 사범대 교육과 나왔습니다.
면담자 : 전공이 교육학이신가요?
구술자 : 교육학이에요. 사범대학 교육과가 유명하고 노토리어스(notorious) 하고 그렇더라구요, 내가 여기 와서 보니까. 대학 총장이 60명이 나왔대요. 그리고 요새 관피아 하는데 문교부의 장관 차관서 부터 계장까지 전부 서울사대 나왔다 그러드라구요, 교육과.
면담자 : 그,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인제 다니셨네요?
구술자 : 순전히 이승만 정권이죠, 박정희가 나타나기 전이죠.
면담자 : 다니셨는데...
구술자 : 이승만도 독재였습니다. 이승만도 안 좋아해요
면담자 : 그때 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정치적인 상황이나 사회 문제라든지 그런게
구술자 : 조봉암 사형 사건은 제가 평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양반이 인제 평화통일 주장한건데, 지금 같으믄. 그때는 북진통일 하자는 거 아니에요? 지금 북진통일한다하면 미친 놈 아니에요? 이 양반은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사형까지 당한 거예요. 양명산이라고 하는, 소위 말해서 그 당시 그, 그 당시 특무대지. 그 김종필이가 안기부 만들기 이전에. 특무대에서 갖은 고문을 하고 해가지고 양명산이라는 간첩이 조봉암한테 정치자금 대고 해갖고 국가 전복을 하려고, 요즘으로 말하면 진보당을 맨들어서. 그러니까 이승만이가 3선 개헌하기 전에 조봉암한테 혼이 났거든요. 이 잘못하면 정권 뒤집힐 테니까. 대구에서는 뭐 조봉암 표가 훨씬 많고 그랬어요, 그 부정선거를 하는대도. 그러니까 그래가지고 사형을 시켰는데 결국은 지금은 이제 다 아시잖아요, 내용을 .다 판결이, 대법원 판결이 오판이었대는 걸 정부에서 사과를 하고 인제 지금 보상금을 인제 줄 정도가 됐는데. 그 내 어린 마음에 그때, 그때 이 승만 때 내가 중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 같애요. 형무소 앞에서 내가 관 나가는 거를 봤으니까. 그 딸이 지극했어요. 그 딸이 아버지 다 재판도, 이리 따라다니기도 하고. 그때도 내가 이가 갈리더라고요, 이승만 정부가. 하. 어떻게 저렇게 정치범을 저렇게 죽일 수가 있나. 응? 대통령까지 나왔던 사람인데 빨갱이로 몰아가지고. 인제 그 생각이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뭐 여기도 조봉암에 대한 칼럼이 있겠지만 어...정치적인 사건 중에 정확, 제 가슴에 제일 쇼킹했고 지금도 뇌리에 잊혀지지가 않는 건 조봉암 사건, 조봉암 사건. 그 다음에 사사오입 사건도 잊을 수가 없어요. 사사오입. 그러니까 통과가 안 됐는데 영점 해가지고 이렇게 사사오입해서 통과됐다고. 삼선 개헌 때, 그짓을 했고. 그런 건 잊을 수가 없죠, 어린 마음이지만.
면담자 : 중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정치문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네요.
구술자 : 관심이 많았지만 그 당시에 중고등학교에서 뭐 행동으로 옮기고, 그 풍토가 무슨 데모를 한다든지 무슨 조직을 한대든지 그런 활동은 있을 수가 없었고 마음속에만 그런 걸 품고 있었고 다만 제가 그 당시에 웅변을 했어요. 그 당시는 인제 정치가가 되겠다는 그런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들이 무슨 그런 대회 있으면 너 나가라고 해가지고 저희 형님이 원고도 쓰고 뭐 나도 쓰고 해갖고 나가면 무슨 각 학교 대항, 또 학년 별로 대항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거기서 뭐 일이등 하고 늘 그랬어요. 그래서 웅변을 쯔금 했어요.
면담자 : 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신 계기가 교육학 쪽으로 뭐 어떤 꿈이 쫌 어렸을 때부터 있으셨나요?
구술자 : 아니, 이런 거예요. 우리, 우리 저 동창회보에다도 썼지만 아버님은 늘 법대, 서울 법대를 가라고 그랬는데 내가 졸업할 때쯤 몸이 굉장히 약했어요. 그래가지고 등수도 많이 떨어지고 그 3학년 말기에 죽어라고 공부를 했어요. 그 우리 클래스에는 한 70명이 쫌 안되, 65명 쯤 되는데 55명 내지 60명이 서울대학을 들어가던 시절이거든요. 사대부고가 1960년대에. 경기 고등학교하고 뭐 비교가 안 되지. 특채들이, 머리들이 좋으니까. 상당히 학교가 천하부고라고 해서 나도 그 프라이드를 간직하고 있는데 애가 1등 하던 놈이 50등 하고, 50등 하더니 막 1등하더니 그래요, 다 비슷비슷하니까. 쪼금 오르면 뚝 떨어지고 말이죠. 근데 몸도 약하고 그래가지고 내가 자신이 없더라구요, 법대는. 법대는 법을 좀 하고 싶기도 했었는데. 근데 어머니는 맨날 그랬지, 사범대학 가서, 요즘은 사범대학이 좋다 그러대? 교사가 되고 좋고 교수가 될 수도 있고. 제일 안전해요, 편하고. 또 집이 너무 가난했으니까. 동생들도 돌보고. 그래서 어머니 말을 듣기로 했지. 그래서 사범대학을 갔는데 내가 역사도 좋아하고 국어도 좋아하고 영어도 영어 웅변반에 있었고, 이에스에스(ESS)반에 있었고. 잉글리시 스피킹 소사이어티(English Speaking Society)라고. 말이죠. 거기서도 영어 잘하는 애들만 모이던 반이거든요. 그런 거를 했는데도 교육과를 택한 이유를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우리 동창들한테 썼어요. 야, 이 사범대학 갈려면 문교부 장관이라도 해야지. 농담처럼. 그 뭐 선생 하러 가느냐, 하고 교육과를 택했어요. 동창들도 김신일 같은 사람은 뭐 통일부 장관도 하고, 아니아니 교육원장, 그걸 뭐라 그러지? 교육 무슨 장관? 옛날에 문교부 장관이라고 그랬는데.
면담자 : 네, 예전엔 문교부 장관.
구술자 : 교육, 문교, 그거 뭐라 그래요, 요새?
면담자 : 요즘은 교육과학기술부 뭐 그렇게, 뭐 그렇게.
구술자 : 아니야, 하여간 문교부
면담자 : 교육부
구술자 : 교육부! 교육 무슨 부라 그래요, 교육 문화부라 그러나? 교육, 체육 뭐 연예, 체육 그게 다 교육부에 속한 것 같은데 요새, 그건 문화부에 속하나?
면담자 : 예.
구술자 : 애니웨이 하여간. 옛날엔 문교부라 그랬어요. 난 지금도 문교부, 문교부 그러는데. 신문을 늘 다루면서도 말이죠, 물을 좀...
면담자 : 말씀 이어서 서울대 입학을...
구술자 : 딴 목적이 있었냐, 무슨. 그랬어요. 농담처럼 그냥 뭐. 사범대학 갈 바에는 티칭 보다도. 행정 쪽에.
면담자 : 그때 학교 분위기는 좀 어땠나요? 서울대 사범 대학 같은 경우는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좀 제가 듣기로는 민감, 그 당시로도 민감했었다고 하는데요.
구술자 : 8.15때는 솔위 말해서 빨갱이가 제일 많았다고 그래요, 김종필씨 다니고 그럴 때, 김종필씨 전에 이영덕, 총리였던 그 양반 다니고. 정범모씨, 서명훈씨, 윤태림 선생 뭐 이런 사람들 있어요. 그 국보안 반대 이런 걸 가지고 싸우고, 죽창 갖고들 막싸우고 그럴 정도로. 그러니까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좀 사상이 좀 그렇잖아요. 원래 공산당에 빠질 수가 있잖아요. 사회주의, 공산당이래기보다. 그 사범대학교이 인제 일제 때나 해방 후나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거든요. 없는 집. 등록금도 싸고. 아참, 난 서울대 간 이유 중에 하나가 서울대가 원래가 등록금이 사립대학보다, 연대나 고대보다 훨씬 싼데 그중에서도 사범대학은 서울대에서도 제일 싸요. 정말 쪼금만 내고도 다닐 수 있어요. 거의 장학금도 타고. 그래서 이제 서울대학을 택했는데 그랬는데 우리 때는 오히려 문리과 대학, 그 저 동숭동에 있는. 그 종로가에서 올라가면서 혜화동으로 가는데 그, 그때는 문리과대학이 본부였거든요. 지금은 인제 관악산으로 이전했지만. 거기가 이제 문리대하고 법대, 미술대하고 이러게 같이 있었단 말이요. 근데 걔네들이 항상 데모가 제일 심했어요. 무슨 일만 나며는 문리대는 데모로 시작하는거. 한미회담 반대래든지 무슨 한미 협정이래든지 뭐든지 그냥 데모를 했어요, 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 래기 보다 하여간. 이슈화 시켰어요. 근데 사범대학은 쫓아다녔지, 걔들. 앞에 나서서 한 건 아니고.
면담자 : 문리대 정도는 아니어도 문리대 만큼 버금가게 활발한 게 그 사범대 쪽이라고 들었었는데요.
구술자 : 네 활발하죠. 우리 동기 중에는 저 김근태 형님, 김국태라고 소설가, 돌아가셨어요. 나하고 친했지. 우리 같은 학년에 같은 과고. 김국태 있었고. 김신일, 아까 얘기했던 그 친구 있었고, 정철기라고 서울대학 총동창회장 하다가 그 친구는 한 2,3년 전에 죽었어요. 정치적으로 쪽으로 가는 친구들이 좀 있어요, 더러. 사범대학이면서도. 그 다음에 주선식 같은 사람도 사범대학인데 에...조선일보 편집국장하고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가기도 하고 말이죠. 정치과, 정치하는 것도 아니고. 사범대학이 그런 정치적인 부류가 있어요.
면담자 : 제가 LA에 있을 때 김상일 선생님.
구술자 : 누구요?
면담자 : 김상일.
구술자 :잘 모르겠는데. 김상일, 연배가 어떻게 되요?
면담자 : 그 분, 그 분도 서울대 교육학과. 41년생.
구술자 :어, 내 또래 내 후배네요. 난 기억이 안 나는데.
면담자 : 김국태에 대해서 잘 알고
구술자 :아아, 한 학년 차이니까.
면담자 : 혹시 또 아시는 분인지 하고.여쭤봤습니다.
구술자 :우리 동기들이 모여서 정치 애기를 할 때 김근태가 와서 이렇게, 경기 다닐 땐데 관심 있게 그걸 듣고 그랬어요. 근태가. 지금은 부인이 국회의원이죠, 인, 인선생님.
면담자 : 그렇게 2학년 때 그럼 이제 4.19가
구술자 :2학년 때 4.19가 났어요. 그건 참 큰 일이죠. 굉장히 그,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일이죠.
면담자 : 어떻게 활동을, 분명히 하셨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아니아니, 데모는 했지만 내가 무슨 조직하고 그런 건 없었다고. 그 당시두요. 근데 이건 저, 에피소드지만 내가 첫 번째 책 제목이 인제 󰡔기자는 글로 말한다󰡕는 제목인데 거기에 한 챕터에 뭐가 있냐면, ‘나는 대학 다니면서 공부는 안 하고 연애 허고 데모만 했다,’ 이렇게 썼거든요. 그랬더니 한승원 이사님이 1995년 출판 기념회에 오셔가지고 이 필자 육길원씨는 세상에 좋은 것만 했다고. 데모하고 연애만 하고. 자기 주변에 보면 데모도 못한 사람도 있고 자기 주변에 보면 연애도 못한 사람도 있는데 길원씨는 이거 양쪽을 다 했다고. 그런 농담도 했지만 사실은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되는데 데모도 많이 했고 그 연애도 많이 했는데 그 5, 4월 18일 날이 고대생들이 데모를 했는데 그 동대문 깡패 이정재의 오야봉, 이정재의 이 사람들이 쇠갈퀴로 학생들을 막 긁고 해갖고 동아일보에 그게 피투성이가 되고 이런 게 4월 18일에 일어났거든요. 이 도화선은 고대 애들이 일으킨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니까 우리는 4월 19일날 학교 공부하러 가갖고 예? 누가 뭐 조직하고 데모하자 이런 것도 없이 대열을 짓기 시작한 거예요. 앞에서 나가자, 나가자, 웅성웅성 해갖고. 근데 도서관에 있던 내 걸프랜드가 내 성지을 아니까 막 뛰어나갔어요. 그래가지구 말리는 거야 나가지 말라고, 무슨 소리야 너두 나가야지, 이런 판국에. 근데 내 가방을 뺏드라구요. 가방을 가져갔어. 그리구 난 데모하러 가고. 근데 우리 같이 가던 중에 청와대 가다가 사범대학도 몇 명 죽었거든요. 부상당하고. 그런데 상당히 걱정했다고 그러드라구요. 근데 그 여자 친구도 지금 7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세상에 없고. 인제 그런 에피소드도 있어요.
면담자 : 그때쯤 4.19 당시에 선생님 참가하시면서 좀 기억나는 일들도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하여간 그, 동대문에서, 우리가 제기동에 있었어요. 동대문 저, 춘천 가는 기차 타는 데가...
면담자 : 청량리
구술자 :제기동, 제기동. 제기동에 있었는데, 거기서 인제 쭉 대오를 짓고 나오는데, 뭐 데오도 뭐 뭐 국문과는 여기서고 이런 것도 아니고 뭐 이렇게 자연발생적인 데모에요. 그러니까 그게 진짜 데모지, 혁명이고. 지고 동대문까지 막 갔는데. 연도에서 박수막 치고 신나가지고 영웅심에 들떠갖고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서 구호 불르고 막 그랬어요 내가. 근데 그중에 하나가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게 ‘깡패 때려잡자’ 깡패들이 그 전날 고대 애들을 그렇게 폭력을 했었기 땜에 깡패들 미워서, 근데 깡패들 얼씬도 못하지. 나서지도 못하고. 우리들이 젊은 애들이 하도 그냥 핏기가 서려가지고 아주 그냥. 독재 타도하자, 이승만 물러가라, 나처럼 깡패 때려잡자, 막 이런 식으로 막 여기에 해갖고 국회의사당 이런 데서 광화문으로 이런 데로 하셔 청와대 쪽으로 막 가고. 뭐 총 쏘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나도 도망가고 내 침구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근데 내가 그날 집에 갔다가 또 나왔어요. 집에 있었어야 내가 효도를 하는 건데 인제 어떻게 되나 보려고 쭈욱 나왔더니 뭐 그때까지도 서울고등학교 앞에, 서울고등학교 뭐 서대문 쪽에 있잖아요. 이기붕 집 있는데. 이렇게 서대문 넘어가는데, 신문로에서. 거기에 뭐 학생들이 차 뺏어가지고 막 운전하는데 서울 경찰서에서 총 쏘고 다치기도 하고. 그런 데를 막 지나가고 했어요. 그래 가지구 안암동, 안암동 고대 다니는 학생들 친구 집에서 잤어요. 그랬더니 집에서는 뜬 눈으로들 세웠지 얘가 또 나가서 데모하다가 죽었나 하고. 근데 그때는 데모하는 게 아니라 그게, 그런 걸 보면서 이렇게 안암동까지 걸어간 거예요. 서대문에서, 서대문에서 광화문, 종로, 동대문, 또 이렇게 다 지나가지고 안암동, 고대 가는 길까지. 해서 그 다음날 집에 돌아갔더니 집에서 깜짝 놀랐다고 그래요. 나가지 말라고. 연락이라도 해주지. 그러고 다녔냐고.
면담자 : 며칠, 선생님은 며칠 정도 그, 같이 시위에 참여하셨나요?
구술자 :이틀이지 이틀. 이틀 동안. 4.19, 4월 19일, 20일. 그 20일에는 벌써 뭐 희생자도 많이 생겼고 시국이 뒤숭숭하고 그 다음에 이어서 교수들, 교수들이 또 데모했어요. 학생 지지한다고 그러자 이화장에 가셨던 이승만씨가 하야,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고 했죠. 지금 같으면 낭만이지, 지금 누가 하야한다고 하겠어요. 이승만을 포함한 독재 하긴 했지만, 나도 쪼끔 전에도 얘기했지만. 정적을 죽이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는 그래도 스스로 물러날줄 알았지. 그 뒤로 박정희는 더 포악했으니까. 전두환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우리가 5·18이야기 하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학살한 사람인데 뭐. 그게 아직도 살아있고 말이지.
면담자 : 그리고나서 63년인가요, 5.16?
구술자 :고 다음해에 일어났어요. 60년에 4.19가 일어나고 61년에 5.16이 일어났는데 나는 지금에는 쿠테타를 지지했다기 보다 박정희는 좋아했어요. 왜냐면 쿠테타는 지지할 수 없죠. 쿠테타는 후진 백성이 하는거고. 장면이 집권한 게 일 년이 채 안 됐어요. 제일 민주적인 헌법에 의해서. 4.19래는 그런 어마어마한 혁명을 치르고도 그래도 일년을 잘 끌어갔어요. 경제 개발 5개 년도 세우고 갈 만 한데 뒤집어엎은 거예요. 그, 이게 4.19를 새치기 친 게 5.16이거든요. 4.19 새치기 친 게. 나는 그래서 결국은 박정희를 싫어해서 여기도 뭐 아주, 내가 이따 드릴게, 이따. 아주 무지무지한 칼럼을 썼지만. 포악한 박정희 독재에 대해서. 그렇지만 처음은 이거 가져가세요, 제가 서울대학, 첨엔 서울대학에서 안 넣어줄려고 한 게 어떻게 이렇게 됐어요. 이거 보면 참고로. 5.16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죠. 나는 개인적으로 지도자 박정희 인기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인기 최고 아니네요.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존경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뭐보다도 그의 18년 동안 너무 많은 국민들이 고통 받았기 때문이다. 보라, 안보와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선량한 국민들이 잡혀가 고문 받고 조작된 빨갱이로 몰려 죽었으며 이민을 갔는가. 언론을 탄압해 거짓 언론을 조성하고 보호해야 할 상아탑을 적극 ㅇㅇㅇ하고 141110육길원01_00:31:38 군을 도구화 했는가. 기억조차 섬뜩한 민비사건, 민청학련 사건, 조작된 숱한 간첩 사건,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 사망 사건, 간첩 누명 오부 사건, 인혁당, 통혁당, 동백림 사건 등등 또한 도덕성, 정당성이 없는 정권은 부도덕의 극치를 보여 정인숙 사건, 김동성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을 일으켜 국민의 분노를 살까, 샀다. 영구집권의 길을 튼 삼선개헌까지는 참을 수 있다고 티자. 입에 재갈이 물려 비판도 하지도 못하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란,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유신시절에 이르러서 국민의 인권은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국 근세사의 제일 존경을 받는다는 박정희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부마 사태로 위기에 몰린 채 죽을 때도 밀실에서 술과 여자와 간신에 둘러싸여 부끄럽게 끝을 맺었다. 정통성 없는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허구헌날 긴급조치에 계엄령을 발동했다. 국민 무서운 줄 ㅁ르고 탄압을 일삼은 그에 대해 황당함과 분노를 느꼈다. 뭐 이런 얘긴데. 이만큼 강하게 쓴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한국에서나 바깥에서나. 저렇게 노골적으로
면담자 : 이게 지금...
구술자 :이게 서울대학 미주 학보에 나왔어요.
면담자 : 미주 지역에서
구술자 :다 봐요 발생된, 발행한 동창회보죠. 동창회보죠. 이게 뭐 서울 대학 미주, 여기 6천명인가, 서울대학생이 에 저, 미주에 졸업생이 6천명이 구독한다니까요.
면담자 : 2010년에 글을 5월에 기고해서 실으신 건데요.
구술자 :네, 길지도 않아요, 4년 전. 요즘 박근혜한테 이렇게 썼으면 이건 뭐 이 신문 패간당한다.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면담자 : 그때당시에도 특별하게 더...
구술자 :아 말이 많았대요.
면담자 : 예. 2010년이어도 뭐 이명박 정권
구술자 :이명박 때부터 민주화가 역행하기 시작했어요. 10년이 민주화의 꽃을 피었고 그 다음에 이명박 들어서면서부터 시카고에 안기부 정보원 직원이 두 명 직원이 있고 그때부터 나왔어요.
면담자 : 아. 이명박 정권 때.
구술자 :여기에 왜 두 명씩이나 나와, 뭐 할 일이 없어가지고. 결국 그 덕을 본 건 박근혜고. 그 지경이 돼버렸어요. 그건 가져가세요. 하나밖에 없는 거 같기도 한데. 카피할 수 있으면 카피해서 쓰고. 장 선생님한테 한 두부 줘가지고. 하나 해갖고 날 주고.
면담자 :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술자 :카피할 수 있으면 어디서... 아 뭐 여기도 있을 거야, 어디. 내가 줄 것 또 많아요, 얘기하면서. 허허
면담자 :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3학년...
구술자 :박정희를 좋아했던 이유는요,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 2학년이에요, 2학년
면담자 : 3학년이 아니구요?
구술자 :내가. 2학년 말일 꺼예요.
면담자 : 59년, 60년, 61년.
구술자 :61년이거든, 내가 63년에 4학년이니까. 그니까 1학년에서 2학년 넘어갈, 고 때에요, 고다음해. 1학년이었다가. 59년에 1학년에서 60년까지 일학년 아니에요. 고다음에 61년, 2학년이 됐구나, 맞아요. 61년에 2학년, 62년에 3학년, 63년에 4학년. 예. 맞았어요. 2학년이 됐어요. 봄이 돼서. 2학년이 된 때에요. (당시 4월에 신학기 시작)
면담자 : 그때는 학내 분위기 뭐 그런 거.
구술자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데모할라 그러고 안 그랬어요. 나만 정치에 대해, 정치에 대해서는 자유당 독재에 대해서는 다들 싫어했지. 왜냐면 신익희 선생님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됐으면 좀 변화가 올텐데 이런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그 당시가 전쟁을 겪고 난 다음에 무슨 뭐 이승만은 나라의 국부였으니까. 뭐 파운딩 파더(the founding father). 정면 대결을 할 그런 용기도 없었고, 힘도 없었고,. 계기도 없었고. 근데 이제 그게 인제 부정선거 때문에 이제 권력누수 현상이 생기고, 데모가 생기고, 대구에서 데모하고 마산에서 데모하다가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최루탄에 이게 머리를 맞아가지고 한 게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게 또 도화선이 돼서 고대, 고대가 또 일어나고 고 다음에 서울대가 해서 다 그때는 뭐 하이스쿨 다니는 애들까지도 대광고등학교, 무슨 뭐 동성 고등학교 애들이 형님, 형님 하고 그래요. 같이 뛰고. 그때 감격은 말이야, 야, 진짜 감격이에요. 아 이런 게 혁명이구나. 난 책으로 러시아 참 그 14년 러시아 41년 14년 러시아 혁명 그런 걸 책으로만 봤는데 내가 체험하니까. 그 표현할 수 없는. 도 고은 선생 얘기허믄 이 양반이 어...여기 6.29선언 때 민주화 직선제 쟁취할 때 그니까 이한열이 박종철, 박종철, 이한열이 죽어가지고 시청 앞 바다에서, 아니 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 지내고 이거 할 때 저, 뭐야 무슨 집회 헐 때 고은 선생이 추모식을 했, 그걸 보잖아요. 근데 이야 이 백만 인파가 금강산보다도 절경인 천하의 그냥 대서사라고 말이지, 그랬대더니. 아 4.19는 진짜 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동과 말이죠, 그 흥분과 설레임과. 아직도 뭐 신난다 랄까. 목숨 바쳐서라도 옹호할 수 있다는.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죽은 거예요. 물불 안 가렸으니까. 지금 애들 그렇게 데모 안 해요. 왜냐면 부모 생각하고 마마보이들. 취직해서 잘 살아야 되고 애인 생각해야 되고. 난 애인이 그 앞에 사는데 같이 가자고. 나 혼자 갔다 나왔다고. 첫사랑인데 말이지, 결혼은 못했지만.
면담자 : 근데 인제 채 그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가지고 인제 박정희가 다시 등장을. 쿠테타로, 5.16.
구술자 :그게 묘한 거예요. 그니까 얘기가 딴 데 가지만 장면이 5개 년 계획을 세우고 잘 할 수 있었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네들이 정권 야욕에 의해서 쿠데타를 한 거예요. 혁명을. 그래가지고 원래 우리가 후진국이었고 가난했으니까 군부가 제일 그래도 앞에, 앞섰잖아요. 군부가 미국의 모든 그 저, 뷰로틱한, 뷰로크래틱(beaurocratic: 관료적) 한 시스템이래든지, 무 슨 뭐 하여간 문명의 이기래든지, 조직에 대한거래든지 다 앞섰잖아요. 그거를 이용해서 혁명을 성공 시킨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도 썼지만 삼선개헌까지도 그래도 뭐 좀 이왕 혁명 했으니까 다져놓기 위해서 참아준다 했는데. 삼선 개혁 이후는 그거는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유신이 뭐에요. 유신이. 그건 무슨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 같으면 도저히 그건 참을 수 없는 거죠. 거기 앞장섰던 놈이 지금 지금 비서실장 하잖아요. 그런 나라에요. 사형당하고 없어졌어야. 4.19 난 다음에 최영균이 이런 사람 사형시켰어야해. 아까 고대 때 때려잡았대는 이정재 이 깡패들 다. 근데 박정희 이후에는 심판 받은 사람이 없어요. 김기춘이 같은 사람이 어떻게 비서실장을 해요. 그건 대통령도 문제지. 유신 앞장서고 말이지,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말이지. 백성을 기만하고 속이고. 그게 지금 복귀하고 있잖아요. 하긴 뭐 진짜 부녀지간인데 배운 게 뭐 있겠어. 그것이 그것 밖에. 그 점을 안 다며는 박근혜가 잘 돼길 바라고 잘 되야 되고 하지만, 잘못했을 때는 언론 철저하고 따복 따복 얘기해야 하는데 그것들을 못하고 있잖아. 특히 언론이 문제야. 조중동이라는 보수언론이 기득층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 사실을 날조하고.
면담자 : 그 5.16 당시에 사회적, 뭐 학생들의 분위기는 뭐 특별히 반대시위를 하거나 뭐 반대 움직임 같은 건 없었나요? 그 당시에는.
구술자 :그 당시에도 무슨 좀 이념적으로 깊이 들어가고, 그니까 신홍금씨 알아요?
면담자 : 아니요.
구술자 :조선일보 기자고 신홍금이라고 찾아보세요. 조선일보 나하고 같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깊이 들어갔죠. 성공회 신부였는데. 평생 고생하다가 어디 아프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 그러니까 그 4.19 나고 5.16 고 사이에는 학생들이 굉장히 그 액티브 했어요. 그니까 이북학생들하고 만나서 얘기하자, 통일에 대해서. 학생들이 지금 자기들이 정권을 쟁취했지만 그거를 정권을 지탱할 수는 없잖아요. 조직도 없구. 그럴. 학생의 신분이 있으니까. 근데 이게 5.16에, 박정희에 이용당했어요. 장면이라는 사람을 무능한 사람으로 몰기도 했지만 무능하지 않은 사람을, 민주적이고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해서 민주적으로 뽑은 총리를 갖다가 말이죠. 근데 학생들이 자꾸 북한학생 만나자느니, 무슨 뭐 새마을 운동 하자느니, 뭐 미국 물품 사지 말자느니 뭐 새로 무슨 개혁 하자느니, 막 이제 막 데모를 막 심하게 하고 그러니까 인제 5.16일어나가지고는 학생들이, 좌파세력이 막 범람하고 이렇게 학생들이 그냥 나라 질서를 문란시켜가지고 그냥 이북 학생들을 만나자고,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냐는게 이게 5.16 혁명 이후의 하나로 방향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이후가. 그러니까 그런 움직임은 있었죠. 근데 제 주위의 사범대학은 뭐 개인적으로 문리대 가서 그렇게 그, 유근일이 중앙일보 논설 위원, 조선일보 논설 위원 유근일이가 그 당시에 굉장히 진보 좌파였어요. 그 저, 민비의 전신인 민총, 민비. 민족, 민족, 민족 문화 연구소, 하여간 그래서 형무소 들어가고 그랬어요. 5.16 나자마자. 그래가지고 중앙일보 논설으로 갔던 게 어떤 인연이 있었냐며는, 최인규하고 홍진기는 내무장관, 법무장관 했으니까 서대문 형무소 들어왔고 유근일이는 학생으로서, 문과대학 정치학과 학생으로서, 󰡔새 세대󰡕라는 위클리의 편집장 하고 그랬는데 그때부터 글쓰고 그랬죠. 그랬는데 형무소에서 만났어요. 홍진기하고, 그러니까 이병철의 사돈. 홍진기, 이병철 다 형무소 들어가 있을 때 홍진기하고 유근일이하고 친해졌어요. 바둑도 잘 두고 뭐 젊은 사람이 똑똑하고 그러니까 형무소서 나온 다음에 중앙일보로 데리고 왔어요. 홍진기씨가 중앙일보 회장이 됐으니까. 홍진기의 딸이 이건기, 아 저저저저저, 누구야, 이병철, 이병철이가 홍진기의 딸 홍라희가 이병철의 아들 이건희, 나하고 사대부고 같이 나온, 내 후배에요. 결혼하지나 사돈이 된 거죠. 그래가지고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으로 갔는데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이 사람은 우파여도 그렇게 우파일 수가 없어요. 유근일이라고 아세요?
면담자 : 아니요.
구술자 :유근일이라고 조선일보에서 논설을 쓰는 사람이에요. 김대중, 유근일.
면담자 : 중앙일보...
구술자 :중앙일보, 조선일보 두 군데서. 처음에 저 중앙일보에서 시작했어요. 그거는 인제 홍진기라는 사람하고의 인연 때문이야. 형무소에서. 그니까 홍진기와 이병철의 결혼은 그거는 저 정경유착이에요. 자유당때 내무장관과 법무 장관 하던 홍진기가 일제 때 고시 파스해서 친일파하고 그딸이 경기여고, 서울대학 미술대학을 나오고 어...참한 딸이 하나 있었고 이병철이는 이제 소위 그 당시에 우리 학생들이 얘기하는 매판 자본가로 돈을 많이 벌어. 쌀장사부터 시작해서 사카린 밀수 해다가 돈 벌어가지고 삼성이라는 오늘날의 거대한 기업체를 이룬 그, 뭐 그런 나름대로의 공은 있는거죠. 한국 산업화에. 정과 경이 유착이 돼서 사돈을 맺어가지고 오늘날 이건희와 홍라희가 인제 그 부부가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아들이 인제 삼성을 백업하게 된 거예요.
면담자 : 대학, 선생님 그 대학 시절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요
구술자 :정치적인 얘기요?
면담자 : 특별하게 뭐 활동하셨던 서클이라든지 그런 뭐가있었나요, 학교 다니실 때.
구술자 :나는, 사범대학은 얌전했어요. 고려대학은 활발했어요, 그때도. 그니까 4.19나, 4.18 4.19 나고 5.16 돼서 출세한 이세균이, 무슨 뭐 하여간 거 데모 주동 하던 사람들 다 공화당 들어갔어요.. 공화당 당시 박정희 라인이죠. 들어가서 출세하고 국회의원 되고, 국회 상임 의장 되고, 장관되고 많이 그랬어요. 어...우리 주위에서는 그때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나중엔 많았는지 모르지만, 나 이민 온 다음에. 거기 4.19 때 에...4.19 첫돌, 노노, 아 그렇지. 4.19 첫돌을 박정희도 그 식을 해줬어요, 그때는. 그니까 5.16된 다음에. 학생 대표로 김유진이가 그, 저 연설을 하고 박정희가 연설을 하고 그랬어요. 김유진이래는 나하고 베스트 프랜드인데, 사대부고 동창이라. 그 고대 애들하고 몰려다니면서 내가 선언문 써주고 그랬어요. 김유진이가 박정희하고 같이 연설한 문안을 제가 썼어요. 같이 김유진하고 같이 고쳐가면서, 여관방에서. 해가지고 그거를 김유진이가 동아일보 톱으로, 국기가 또 흔들리면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온다 이런 걸 내가 썼던 기억이 있는데 그거를 제목으로 나오고 막 그랬어요. 제목으로 나왔는데 그 친구는 비례대표 마지막으로 한번 하고 출세도 못하고 지금 무슨, 무슨 뭐 어디 4.19 혁명 무슨 기념 사업횐가 전무인가. 그 사업 일하고 있어요. 김유진이라고 그 당시 나는 크게 될 줄 알았어요, 그 친구가. 박정희하고 같이 연설을 하고. 419 1주년에 학생 대표로 연설을 했으니까 스카웃되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 친구가.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 친구의, 그 친구가 정치를 좋아했던 것은 윤길중이래는 사람이 있었어요. 윤길중은 기억하실 거예요. 국회 부의장하고 조봉암 사건 때 저저 진보당 사무총장, 사무총장을 하던 분인데 그분이 자기 누님의 남동생이니까, 누님의 남동생이면뭐에요. 삼촌인가? 자기 엄마의 남동생, 윤길중이가. 삼촌이지? 외삼촌이니까 윤길중한테 정치를 배웠어요. 이 친구가. 그래서 고대 학생회장을 하고 야당을 하고. 그랬기 땜에 저쪽으로 못 갔어요.
면담자 : 선생님은...윤길중씨가 어...공화당, 아니? 민정당인가? 하도 그런데도 당이 많이 바껴서. 민정당 당의장. 당수까지도 했어요. 노태우 때 민정당 대표 했어요, 윤길중씨가. 그래서, 돌아가셨지만 저도 막역해요. 저한테 붓글씨를 굉장히 잘 쓰셔서 주고, 우리집에는 춘추정문이라고, 춘추, 늘 바른 글을 쓰라는 취지의 그런 휘호도 써놓고 가고 그러셨어요. 윤길중씨가. 근데 그런 식으로 활동을 했죠.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전혀 끊은건 아니고 딴 대학생 애들하고 여관방에서 자면서 선언문도 쓰고 뭐 무슨 공작음모 그런 건 없었고. 잡히면 그 사람들을 그걸로 다 몰아대지. 근데 잡혀가지 않았어. 정보부원들이 우리를 따라다닌 건 그 당시 정보, 안기부가 셌으니까. 그때도. 그렇게 무슨, 그게 그 땐 합법적인 저거니까. 박대통령하고 같이 연설하는데 잡아갈리 없잖아. 그니까 그 이후에 험악해졌지.
면담자 : 글을 굉장히 좀 잘 쓰셨었나봅니다. 연설문,선언문 같은거 작성하고..
구술자 :글쎄, 내가 하이스쿨 때 공보반장하고 그랬거든, 공보 그리고 어 웅변 나가고. 그 다음에 최근에 가을이 돼서 우리 형님이 나한테 편지를 써 보내셨는데 거기 내용에 니가 아버지하고 피난을 갔을 때 아부지하고 나하곤 상주까지 갔어요. 그 다음에 상주까지 피난갔었는데 그 학교를 못다닌다고 그래서 학교를 다니랬드니 내가 편지를 보냈는데 그 동네에 아주 명문이 됐대. 그 고걸 그대로 인용해서, ‘다만 신발이라도 있어야, 신발이래도 있어야지요.’ 어, 맨발로는 인제 학교 못 간다 이거지. 학교가 그렇게 가고 싶은데 못 갑니다. 그니까 동네가 다 울었대는 거야. 피난가서 학교 가고 싶은데 신발도 없고. 짚신하나 못맨들어가지고 하고. 부산에 환도, 그러니까 환도하기 전 임시정부 때 아부지가,.아까 체신부 다니셨다 그랬으니까, 체신부에서 부산에서 근무하신 아버지가 내 고향 경상북도 상주에서 나를 떨구고 부산갔다가 아버님이 날 데리고 다시 서울까지 올라와야 되는데 환도때 그때까진 난 기다리는데 뭐 어린 마음에 환도가 뭔지 알고 아버지가 언제, 오는지를 알아야.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저기 저 읍, 읍쪽,그쪽에가 아버지가 오나 하고 이렇게 봤던 그런 기억이 나고, 피난 가서. 그 뭐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나무 위에 가면 잘 뵐까 해서. 참 눈물 겨운 얘기지. 지금 생각해도, 어린 마음에. 6.25가 그렇게 사람을 맨들었어요. 그래서 가끔 외로움을 겪을 때면 그때 생각이 나요. 내가 그때 그래서 이렇게 외로운가보다, 어떨 때는. 근데 어... 하여간 이런 이념인가 이런게 움직여서 정치도 인제 윤길중씨, 고대 학생회장 김유진, 같이 글 쓰구, 선언문 쓰고. 그러니까 지금도 시카고 바닥에서는 글 잘 쓰는 사람으로는 뭐 여기도 있지만. 별명이 나있습니다. 그거는 자화자찬이 아니라 나는 뭐 아직도 참 다혈질이고 라직(logic: 논리)보다 에모션(emotion: 감정)이 강하고 그런데. 이 나이에도 아직도 인제 이 시카고에서 제일 많이 나가는 신문에 주필 글 쓰고, 뭐 한 일 이년 까지는 한국일보 논설위원 고문으로 또 글 쓰고. 그 다음에 글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 한석원 변호사가 글을 잘 써요. 한석원 변호사는 아세요? 이 양반은 변호사로서 형무소에 들어간 사람이야. 변호해서 변론 잘못 해갖고. 늘 그저 운동권만 변호해갖고 말이죠. 그래가지고 이 양반이 자기 육순 잔치에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글을 쓴 글 모음이 한 변호사의 초상이예요. 그래가지구 출판기념회 했는데 한명숙씨가 그 당시 총리되기 훨씬 전이지, 사회를 보고 나는 미국에서 이걸 축하하기 위해서 일부러 갔어요 갔는데 이 책을 만든 편집위원장이 지금 서울 시장 하시는
면담자 : 박원순
구술자 :박원순씨가 한석원변호사하고 가까우니까. 처음에 나는 글을 못 썼어요. 바쁘니까 마감시간에 못댔는데 박원순 시장님이 그땐 시민운동 할 때 전화가 와가지고 지금도 안 늦었으니까 한변호사가 이 원고가 안 들어가면 책을 못내게 한다. 그러니 빨리 좀 보내달라. 그랬더니 이메일도 쓰기 않을 때니까 팩스로. 박원순님도 팩스로 보냈고 나도 팩스로 보낸 게 미주에서는 유일하게 글을 실른, 실은 사람이 저에요. 그리고 여기 보통 보며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난 어떤 수준의 사람들인가 했더니, 자랑이 아니라, 아주 훌륭하신 변호사님들, 감사원장 죠. DJ때. 아주 훌륭하신 분이예요. 이런 분이 대법원장 하시고 국회의장하시고 나라가 바로 서는데. 요새는 저저 홍 누구지? 중앙일보 하셨던 홍사덕이가 또 총리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사대부고 나왔어. 여기 보믄 뭐 김중배, 신경림, 고은, 강원룡, 아시는 분 있을거에요. 고 다음에 그 다음에 계훈제, 김금지, 저저 연극인, 일본사람 누군지 잘 모르겠고 김상윤, 김종환,그 다음에 일본 사람들 그 다음에 쭉 일본 사람들이 많이 썼어요. 그리고 송건호 동아일보 편집부장 하시던. 그 다음에 저, 그 다음에 이어령, 이문용이, 이우정이, 이해동 교수, 장을병, 성대총장하던 김관스님, 최일남, 한완산. 저저 한완상, 한 적십자 총재, 서울대학 교수하구. 소설가 한승원, 그 다음에 뭐 이런 사람들 하고 같이 썼어요. 그리고 위원장은 박원순이었고. 이래서 이거는 제 책이니까 참고로 보시고 이 양반은 아주 자상하신 분이라 그 편지도 잘 써요. 편지도 이렇게 핀필로 이렇게 많이 쓰곤 했죠. 서울 가면 제가 만나던 데는 이대 뒷문에 있는 그 저 식당, 이름 잊어버렸네, 거기서 꼭 같이 식사하고. 유명한 식당이 거기 있는데. DJ는 한승호씨를 굉장히 애꼈어요. 그래서 김종필씨를 총리 시키고 DJP 연합 때 한승호씨를 감사원장시켰어요. 감사원장이 당시 총리급이었는데.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대학교를 63
구술자 :63년에 졸업했어요. 제때에 졸업했어요.
면담자 : 졸업하시고 바로...
구술자 :군대에 들어갔어요. 1년 있다가
면담자 : 63년에 군대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64년에 들어간 거지
면담자 : 그러면 그, 졸업하시고 군대 제, 군에 입대 하실 때지 어떤 활동들을 하셨나요?
구술자 :그땐 뭐 학교도 쪼금 가르키기도 하고 건달, 건달은 아니다. 떠돌이처럼.
면담자 : 사대, 사범대를 나오면 바로 좀 중 고등학교 교사로
구술자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요. 쪼끔 가르키기는 했어요.
면담자 : 군은 어디로 입대, 어디서 근무하셨나요?
구술자 :군대는 어떻게 되나, 난 그때. 내가 체격이 안 좋아서 갑종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을종인데 을종도 제2을종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안 가두 되거든, 기피해도. 근데 딱 영장을 달아보고 갔, 갔어요. 논산에 갔더니 무게를 달아보드니 사실 불합격이니까 서울을 보내야 하는데 그때, 그때 만해도 박정희 군대인데도 굉장히 썩었었거든, 군대도 돈 받고 그러면 보내주고. 체중 좀 미달인데 고생 좀 할래, 서울로 갈래 그러드라구. 심판보는, 심사광니. 그래서 급수 나오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더니 웃어. 고생 좀 해봐. 하고 합격시키더라고요 그래서 하도 논산에서 훈련이 되니까, 논산 훈련이 제일 되요. 아, 나 그놈한테 한 몇 천원 쥐어주면 말이지, 그 당시에는 화폐 개념이 없으니까, 할 껄 그랬나 하는 생각도, 유혹을 받기도 했어요. 뭐 돈을 주거나 그러지도 않았지만. 그리구 즐겁게 군대 생활을 했어요. 그니까 순진하고 낭만적이지 지금 같으면 기피를 하는데 말이지. 이회창이 아들은, 이회창총리 아들들은 기피를 해서 대통령도 못 됐는데. 뭐 우리는 기피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 고생을 하고. 그니까 뭐 순진하다고 그럴까, 낭만적이라고 할까. 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하나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거든요. 거기 보믄 걔네들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가서 죽잖아. 이유도 모르구. 그리구 부모들이나 친구들이 보냈던 편지가 강물로 흘러가는데, 맨 마지막 장면, 서부전선은 지금 이상 없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말이지, 뭘 위해서 죽었냐, 근데 많은 사람들이 또 살았거든 또. 나라도 군대간다고 죽으라는 법도 없고 말이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한번 가자. 나이두 그때 가 돼면 나보다 젊은 애들이 와요. 대학 졸업하믄 스물, 스물 서넛 됐잖아요. 그러니까 가도 쫌 대접도 해주고 그랬는데 고생은 무지하게 했어요. 그러다가 어떻게 또 운이 좋아가지고 부평이 카투사 스쿨이라는 게 있어요. 그니까 미군 부대에 갈 한국 부대를 영어 교육를 시키는 학교가 있었어요. 써디 에이츠 바탈리온(38‘s battailon) 대대지, 그러니까. 삼팔 보충 대대에 스쿨이 있었어요. 카투사 스쿨이. 영어 가리키는 거예요. 한국군부대에서 미군에 파견을 할래면 우선 영어 훈련, 그 뭐라 그래요, 훈련을 뭐라 그래요. 제식 훈련 같은 구호라도 알아야될 것 아니에요, 그 모르거든, 걔네들은. 우리는 이제 미군 교관들이 가르켜 줘가지고 가리키라고. 뭐 뒤로 돌아가, 뭐 줄줄이 우향 앞으로 가, 뭐 이런 거 영어로 알아요? 인제 그런 거 가르키고. 그래가지고 2년 반 있었는데, 보통 2년 반, 3년 임기니까 1년 반쯤 있면 교대를 해요. 먼저 있던 카투가사 전방으로 가면 전방에 있던 카투사들이 또 인제 이렇게 오고. 그게 공평한 거지, 페아(fair). 근데 이것도 돈을 쓰면믄 안 가요, 거기서. 카투사에서 저 군복 벗을 때까지 있을 수 있어요. 좀 쓰면. 근데 그것도 내 특유의 성질이. 아니 나 이만큼 편하게 했으믄 딴 놈도 와서 편안하게 해야지. 뭐 돈쓰고, 지금 가난한데 돈 쓰면서까지 뭐 군대생활을 하냐, 난 전방에 그냥 가겠다, 해서 고생을 했어요 워낙 카투사 스쿨 같은 건 8군 부관부 8군 사령부 직속 소속이었기 때문에 대우를 받았거든요, 빽만 쓰면 있어요. 내 친구들이 다 그렇게 있었어요. 나는 갔더니 우선 구로동 보충대에서 똥 푸는 일부터 시키는데. 아우, 이게 이런거구나, 내가 급수 나올 때 나온 대로 하십시오, 했더니 아니 뭐 공평하게 해야죠, 하고 갔는데. 근데 그렇다고 또 그냥 뭐 무턱대로 전방에 간 게 아니라 3보충대 춘천에서 전방에 갔는데 19사단이라고. 우리 형님이 휘문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자기 동기 동창이 사단장의 저거예요, 부관. 육사 나온 18기 육사나온 그양반 별 넷까지 나왔어요, 대장. 육사 18기 나온 편장원 대장이란 양반이 어, 자기 베스트 프랜드의 동생이니까 우리사단으로 보내라, 그래서 본부 사령실에 또 있었어요, 본부 사령실에. 부사단장이 영어 가르켜 달라 그러고, 연대장이 오라고. 이리 저리 불려다니는거지. 근데 아주 간단한 영어들들도 못해요. 그러니까 정찰기가 이리 떠서 이쪽 지역을 공격하고, 막 아무. 뭐 리콘이 사인가 뭐 사인을 보내가지고 말이지, 범빙 에어크래프트(bombing aircraft)가 akr 디스 에어리아 어택트(This area attacked), 이거 아주 뭐 쉬운거 아니에요? 뭐. 그냥 뭐 브로큰잉글리쉬 하더래도. 뭐 별 하나 단 사람 뭐...
(비프음)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합니다.
(TAPE 교체
구술자 :배우긴 배워야 되는데 이 머리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런 에피소드도 있고 해가지고. 뭐 유격 훈련도 받고 그랬지만 군대생활은 그래도 비굑적 편하게 한 셈이에요. 교관 했었고, 세시간만 가리키면 뭐 극장에 가도 되고, 도서관에 가도 되고, 집에 나가도 되고. 8번 버스 타고. 그 당시 친구가 이부영이가 아주 베스트 프랜드가 됐고, 이부영씨는 알 거야, 다. 이부영씨 알죠? 이부영씨가 친구고, 그 다음에 권근술이라고 한겨레 신문 회장겸 사장을 했어요. 다 군대에서 생긴 내 일생 일대의 친구들이지. 여담처럼 얘기했어요.
면담자 : 네, 지금 테잎 계속 돌아가고 있고요. 말씀 계속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셔다기 67년에 나오시게 66년에?
구술자 :아...그쯤 됐어요. 67년인가. 그 당시에는 3년이거든요. 그니까 하여간 12월 달인데 눈발이 막 이렇게 나르는데 강원도에서 추럭에 송장 실어 나르듯이 말이야, 담욘지 무슨 판초 둘르게 하고 강원도 화천 저위에 사창리라는데 거기서부터 춘천으로 해서 서울을 나오는데 좋기만 하지도 않고 착찹하더라구요. 이, 내가 뭐할 껀가, 학교 가기도 싫구 갈수도 없고. 금방 뭐 신문사 들어가는 건 견습 기자 시험도 다 끝났어. 근데 그거 뭐 신화일보라고 지금은 없어졌는데 신문 하나가 기자, 견습기자를 모집한다 그러드라구. KBS가 또 하나 있더라구. KBS도 뭐기자 따로가 아니라 KBS PD기자 종합적으로 모집하는거. 두 군데 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했어. 그래서 동아, 동아일보에 내 동기동창 김지자 라고 동아 방송 PD, 동아 방송 그때 괜찮았어요. 동아일보만큼. 그래서 사회부 기자로 있던 지자라고 있어요. 서울 교대 교수하고 저여성 YWCA 인가 뭐 회장도 하고 우리 동기 있어요. 걔한테 가서 야, 이거 방송으로 가야되니, 신문사를 가야되니? 하니까 걔가 보기에는 잘못 봤지, 사실 방송이 앞으로 가망이 더 많은 건데 방송을 갔어야 되는데 니 기질에 신문사가 나을 것 같다고. 그니까 KBS 가지도 않았어. 면접 가지도 않고 그냥 들어갔다가 스트라이크에 연루가 되갖고 노조는 아니고, 한 부가 내가 편집부에 잠깐 있었는데 인제 대우가 너무 박하다 이래가지고 인제
면담자 : 신화일보에서요?
구술자 :예, 그게 정동에 있었거든, 그 건너가 덕수궁 아니야. 맨날 데모하고 인제 사장하고 싸우고 덕수궁 가서들 신세타령하고 또 다음 작전 얘기하고. 인제 그 중에서도 언론사에서 주필이나 논설위원분들도 있고 그런데 하여간 어...그렇게 보내다 조선일보로 내가 신문사를 바꿨죠.
면담자 : 그럼 신화일보에 들어가신 게 67년에 들어가셨구요?
구술자 :그럴거에요. 그리고 바로. 그러니까 데모만 하고 쫒겨다녔으니까. 신문사 데모, (웃음) 아주 유명한 일화에요. 그랬다가 조선일보로 편집부로 들어갔어요, 또.
면담자 : 한, 그때가 68년 한 일년 정도 계셨나요? 신화일보에서.
구술자 :그랬을거에요. 일년 쯤 있었을거에요. 그러고서는 조선일보에서는 인제 6,7,8,9,1,2,3, 맞어, 67년부터 내가 조선일보에 있었든거 같은데요? 7,8,9,10,1,2,3. 73년에 내가 이민 왔으니까 그때까지 내가 조선일보에 있다가 퇴직하고 왔으니까요. 조선일보서는 편집부에 주로 내근만 했어요. 왜냐며는 내가 이민 간다는 걸 3년 전부터 알고 부서를 안 바꿔주더라고요. 내가 정치부나 사회부쪽 뛰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를 못얻고. 그 당시 편집국장이 신동호씨인데 나를 무지무지 허게 사랑했어요. 그래가지고 조선일보의 트리오래면 그 당시에 그, 저 60년, 70년대에 육길원, 임보길, 조병철. 근데 임보길이래는 사람은 조선일보를 어, 두 번이나 편집국장을 했어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아주 한국일보가 조선일보를 비트(beat)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고 한국일보 기자들한테 물어보니까 조선일보에는 임보길이가 있다. 뭐 그러더라구요. 이게 신문 만드는데 귀재라고 그래요. 근데 내가 그 삼총사에 끼었었어요. 그래서 시카고에서 신문의 귀재로 (웃음) 이 조그만 동네, 저저, 개울에서, 바다가 아니라. 조그만 개울에서. 뜻을 크게 피지 못하고. 그것도 다 인연과 운과 그런 게 있고. 그래가지고 신동호래는 국장은요, 점심시간이면 맨날 나하고 임보길이 데리고 저 테니스 치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만큼 사랑을 받았어요. 또 내가 첫 번째 출판 기념회 때 축사를 하면서 그 노래 중에 뭐 마음 주고 뭐주고 다 줬는데 도망을 간 놈아, 뭐 그런 노래가 있대요. 마음주고, 뭐주고, 멀어져간 내~ (노래)김추자, 저 놈이 그런 놈이라고 그러고. 참 유능한 기자로 제가 무지허니 사랑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이민을 갔다고. 와서 자기도 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지. 나, 평기자한테. 자기도 국장 했지만 또 그 버릇 못 버리고 시카고가서도 편집국장 하고. 글 보니까 잘 썼다고. 도강파 비도강파로 치며는 어...를 따지듯이 육길원이는 운동권 망명파, 자기는 국내파하고. (웃음) 축사를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한승원씨도 축사하고. 이부영씨가 사회보고. 권글술씨가 또 축사를 하고.
면담자 : 선생님 이때는 결혼을 하신 건가요?
구술자 :이민 갈 때 는 결혼을 했어요.
면담자 : 결혼은 언제...
구술자 :결혼을 어... 70년에 결혼했는데. 70년. 70년에 결혼했네
면담자 : 그때 당시...
구술자 :결혼하고 이민 갔으니까.
면담자 : 그때 당시, 그때 당시로는 결혼이 좀 늦으신 건가요?
구술자 :늦었죠. 30 넘었으니까 벌써. 우리 집사람은 연세대학을 나오고 스물 세 살인가 대학 나오자마자 그해, 그 다음 해에 했구나, 그니까 스물 네 살에 결혼을 했고 나는 아시다시피 대학나오고 군대 갔다 오고 직장도 몇 군데 데모하면서 왔다갔다 하고 이러면서 결혼했으니까 그래도 서른 살이네. 우리 딸이 40인데도 지금 결혼을 안 하는데. 요즘은 더 늦어졌어요. 30이면그땐 늦었어요. 스물 다섯서 부터 스물 여덟까지가 적령기였지, 보통.
면담자 :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연애결혼 하셨습니까?
구술자 :그때 윤길중씨도, 연애결혼이죠. 근데 윤길중씨 땜에 결혼을 했어요. 윤길중씨, 그 윤길중씨 누님, 그니까 내 친구 어머님에게 세배를 갔는데 집안에 그 사진을 굴러다니드라구요.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연세대 간호대학을 나왔는데 세브란스. 그 졸업 때 무슨 사은회 한복들 입고 사진을 찍잖아요. 그 사진이 많이 굴러다니드라구요. 내가 사진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그, 고대학생회장했다는 친구가 나더러 ‘야 맘에 드는 애 있음 하나 찍어. 소개해줄게’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제 눈에 안경이라고 집사람이, 집사람 본 적 있어요? 육원장. 좀 훤해요. 허옇고 넓적해. 그래가지구 그래 그랬더니, 그, 그 세배하러 온 딴 놈이 ‘걔 애인 있을 걸’ 이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걔네들 성질이 뭐냐하며는, 남자들이거든. 아 임마, 맘에 들면 뺏으면 되는 거지 뭘. 이래가지고 그 다음 다음날인가? 바로 기숙사 찾아갔어요. 그때 이수근이가 넘어왔을 때거든. 그래 지금 와이픈 된 여자한테 내가 아, 여기 이수근이 취재 왔다가 잠깐 들렀다고. 인제 그것 땜에 간건데어. 이수근이 하곤 내 취재 분야가, 내가 가긴 갔어, 그 친구하고 사회부 애들하고. 이수근한테 가긴 갔지만 그거 취재가 내 메인 목적은 아니었거든. 와이프한테, 와이프 될 여자한테 이수근이 땜에 잠깐 왔다가 또 갈테니까 차나 한잔 하자고 나는 건수를 잡은 거지. 그렇게 만났어요. 그래서 일 년 연애하고. 예.
면담자 : 그, 그때 당시에 기자 생활이라고 그러면 그래도 한국에서는 엘리트였었고 좀 안정된 생활이 좀 보장되어 있는 그런...
구술자 :아니에요. 물론 직장이 없을 때니까 어...그 취직만 하는 것도 참 힘들어서 대학 졸업 맞고 광부 아닌 광부들이 수출이 되는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간호사들도 파독 되갖고 독일로 광부 간호사, 박정희 때 보낼 때니까. 겨우 은행 들어간대든지, 뭐 또 사대 나오면 교사가 된대든지 뭐 은행, 이런 거지 직장이 그렇게 지금처럼 삼성이 있고 LG가 있고 막 이럴 때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취직만 하는 것도 괜찮은거야. 그래가지고 신문사 시험이 고시보다도 어떤 땐 힘들때도 있었고. 우리때는. 그래가지구 취직한 거지 거기서 뭐 안정되고... 안정되지 않았대는 것은 지금도 내가 그때 입었던 옷을 기념비처럼 갖고 다니는데 이민, 가다마이라고 했어요, 가다마이. 기억나요, 가다마이? 신사복을 가다마이라고 했어요, 일본말로. 가다마이를 돈을 내고 살수가 없으니까 월부로 하잖아요. 월부도 막 일년 씩. 월부. 집사듯이 말이지. 자동차 사듯이 월부로. 월금이 쪼금이니까. 게다가 그때 한창 나이에 친구들 좋아하고 몰려다닐 나이인데 혈기왕성하고. 거기 거 사직동 가는 데 대머리집이라고 있었어요. 기자들 가는데. 술집에서 외상술 먹어야지. 그러면 월급 받는 날은 또 대머리아저씨가 술값 받으러 와요. 수첩에 적은 이름 적고 엄청나. 월급 뭐 반은 나가야 될 정도로. 이것 띠고 저것 띠고 하면은 집에 가져오는 돈 없어요. 그래도 우리 집사람이 또 세브란스 병원에 다녔기 때문에 둘이 벌어서 둘이 겨우 살았지 그래서 여기도 월부로, 미국을 이민오고. 가난했어요. 그렇게. 그 다음에 나중에 들어보니까 이건 완전히 재벌이더라고요. 신문사 다니는 놈들, 아, 증말 예. 청와대 출입하고 그러면 거기서 보도해 준거 갖다 냄기기만 하면 되요, 비판하지도 않고 필요없고. 대통령 해외 갈 때 쫒아가 뭐, 부시러기 거기서 생기고 촌지 받고 하니까 아주 뭐, 요즘에 삼성 이게 문제가 아닐 정도로 다들 잘 살더라고요. 그니까 좋은 시절 고생하면서 보냈고, 여기 와서 또 여기 신문이 아주 척박합니다, 또. 여기 신문이 뭐 돈이 벌리겠어요? 그러니까 지사장이래든지 신문사 사장. 한국일보라면 김용화씨. 김용화씨는 알죠? 한국일보 먼저 사장했던 분. 그런 분들은 안정되고 돈을 벌었지. 건물도 뭐 삼백만불ᄍᆞ리 이런거 사고. 한국일보 창업주인 그 누구냐, 장기영씨 조카고 그러니까. 그 뒤로는 신문 고생들 해요. 신문이 돈 벌어요? 못 벌지 한국도 지금 조중동 빼놓고는 다 저 흑자? 적자라고 그러나? 그래서 언론사에 있으면서는 고생만 했고 에즈 팔 에즈 머니와이드(As far as Moneywide: 돈에 있어서는) 월급이래든지 재정적인거. 이거 우리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하고 우리 집사람 덕분에 내가 이렇게 소신대로 글쓰고, 글쓰고 또 여행도 다니고 그럴 수 있는 거지.
면담자 : 당시 슬하에 자녀들이 있었나요? 언제?
구술자 :나는, 나는 딸은 이민 올 때 두고 왔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이년 후에 데리고 왔고 여기서 아들 하나 낳고 해서 딸 하나, 아들 하난데 마흔이 다 된 애들이 아직 아들, 딸 결혼을 안 했어요. 딸은 모닝스타라고 여기 다운타운에 컨설팅 파이낸스회사에 다니고 고 다음에 아들은 뉴욕에 CBSTV 기자로 들어가서 지금은 NFL 여기 풋볼이 굉장히 인기잖아요. 미식추구 NFL에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에요. 세 명의 하나에요. 이게 한국애로서는 스포츠 계에 굉장해요. 아는 사람은 알아요.
면담자 : 그, 그럼 다시 이민 오시기 전에 이야기로 돌아가서 언제 그러면 이민이라는 것을 쫌 생각을 하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유신 임박해서. 정보부원들이 기자하고 신문사에 같이 근무하고. 아주 숨막히겠드라구. 그런대다 마침 집사람이 간호사니까 이민의 길이 수월하고. 그래서 신문사에서는 다 유학가는 줄 알았어요. 공부하러. 공부 더 해서 뭐 좀.
면담자 : 한 그럼 준비를 한 3,4년 정도 그럼 하셨나요? 바로는 안됐을텐데.
구술자 :3,4년이 뭐에요, 1,2년이지. 왜냐믄 내가 71년에 결혼하고 72년에 애 낳고 73년에 애 떼어놓고 이민을 왔으니까. 2년. 2년도 채 안돼요. 73년 봄에 왔거든요. 신혼 기분으로 이민왔어요.
면담자 : 오실 때는 어떤 좀 생각을 가지고 오셨나요? 뭘 해야겠다는 그런 뭐...
구술자 :막연했어요. 막연했고 미국이라는 게 기회의 나라니까 그냥 뭐든지 부딪치면 한다 해갖고 왔어요. 와가지고 처음에 첫해는, 첫해가 아니라 한 육 개월은 멤피스 테네스(Memphis, Tennessee)라는 데에 내려갔어요. 시카고로 안 오고. 거기에 일 년 선배가 가발 가게를 무지무지하게 크게 하는데, 도매상도 하고. 거기 뭐 가게 하나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아 이건 장사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때 그걸 또 참고 견뎠으면 내가 또 비즈니스 면에서도 성공했을지 몰라요. 뭐 초창기는 아니지만 뭐 가발이 괜찮을 때거든요. 그거 하다가 나 못하겠대니까 디트로이트에 지금 또 가게가 하나 비었는데 시카고하고 가까우니까 그리 올라가라고 해서 디트로이트도 한 삼 개월 있었나? 뭐 조금 여기저기 다녔어요. 장사 땜에. 그리고 집사람이 저 간호사는 이제 의사가 MD 그 뭘 받듯이 레지던트 너스라고 라이센스를 받아야되거든요. 그래야 인제 병원에서 일할 수 있고. 그게 인제 시카고에서 됐으니까 물론 딴 데도 쓸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 시카고에 친구들이 몇 명 있으니까 야, 같이 있자 뭐 딴데 가봐야 신통하지 않다, 해서 여기있으면서 신문사는 내가 바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고. 여기까지 와서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무슨 돈을 벌어야지. 신문사는 마음에 없었어요 첨엔 솔직히. 그래서 공장도 쇠 공장을 다녔어요. 이민 초년 우리 일 세대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서울대학 총장 아들도 여기서 나하고 공장 같이 다녔어요. 유...윤...윤일선 총장 아들이 나하고 공장 같이 다녔어요. 아주 친했어요. 우리 애낳는 애 낳았을 때 자기가 우리집까지 차로, 난 그때 차도 없어서 라이드 해주고 그랬는데 그 이민 일 세대는 그때 고생 많이 했어요.
면담자 : 쇠 공장이라는게 뭐 제철소를 얘기하나요?
구술자 :스틸컴퍼니(Steal Company), 스틸.
면담자 : 아...
구술자 :그니까 라미네이션(Lamination)이라고 이렇게 쇠, 쇳덩어리를 철판처럼 맨들어가지고 그걸 전자제품과 자동차 제품으로 쓰기 위해서. 잘 모르실거에요. 이렇게. 라미네이션, 철판을 정확하게 잘라요. 고거를 인제 이렇게, 이렇게 모아가지고 상자에 넣고, 뭐 헐래면 이거 비기도 하고 피대끼리 갈 때 영치면?? 141110육길원01_01:18:10 여기 판 하나 떨어지고. 아주 무지무지 위험한 데에요. 그러니까 임금이 무지하게 비싸죠. 비쌌는데 뭐 서울 법대 나온 친구들 뭐 다 같이, 우리 템플 유니버시티(Temple university) 인 시카고 캠퍼스에 알럼나이(alumni)라고 동기생이라고 그러죠. 아...템플 스미스래는 사람이 닉슨 대통령 때 거기 사장이었는데 닉슨 정치 자금 댄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한국 사회에 대해 참 동상 세월 줄 사람이에요. 처음에 이민 온 사람 일 년에 한 3백 명씩 채용했으니까. 독일에서도 광부 들어온 사람들 카나다로 해서 여기 와갖고 영주권 다 받고. 그, 그 회사에 제일 많았고 그건 아주 시카고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회사가 탬플 스미스 스틸 컴퍼니(Temple Smith Steal company). 공화당.
면담자 : 들어오신 연도가 73년...
구술자 :73년 4월
면담자 : 4월 몇일이십니까?
구술자 :4월 7일.
면담자 : 기억하시네요. 4월 7일에 여기
구술자 :시카고 도착했어요.
면담자 : 처음에는 시카고가 아닌 다른
구술자 :아니 여기서, 친구집 아파트에서 한 달인가 일주일 있다가 그 다음에 인제 짐싸달라구, 아, 내가 먼저 한번 내려가 보고 그 다음에 와이프 데리고 내려가서 한 육개월까지 안 있었을 거에요.. 한 여름 있었으니까, 가을에 와서. 멤피스라는 데가 굉장히 아름다워요. 거, 저 미시시피 강이 흐르고 참 흑인들도 순진하고 여기보다. 백인들이나 외국인들 순박하고...포스터(Stephen Foster)의 민요에 켄터키에 집에 뭐 그런 노래처럼 말이죠 목가지고 그랬는데 아 뭐, 답답하고 내가 이거 하러 왔나 생각하고. 내가 다른 길을 찾아야겠구나 하고 그니까 내가 장사하곤 길을 멀었었기 때문에. 인제 그랬고. 그 다음에 어떡하다 또 신문사에 들어갔느냐. 이 76년인가, 석유 파동이 일어났어요, 1차. 아 2찬가? 73년에 석유 파동이 두 번인가? 석유 파동이 일어났는데 여기 98년에 저, 인제 금융위기 있어가지고 1930년대 금융위기처럼 말이죠. 이렇게 곡선을 그리잖아요, 경제가, 바닥을 칠때가 있잖아요. 최근 게 인제 78년, 아니 아니 2008년 소위 그 니먼 막스(니먼 브라더스와 혼동?) 말고 몰게지(Mortgage) 막 깡통 주택 생기고 인제 이것 땜에 그렇게 된 거고, 그게 최근 꺼고. 그때는 석유 파동 때문에 석유 값 뛰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스틸 컴퍼니들도 이 소비자들, 다시 말해서 제품 없자들이 물건을 줄이니까, 소비자들이 이 물건을 안 사가니까 물건을 생산을 줄이고 줄이다 보니까 원재, 원재품을 부품을 허는 사람들도 납품량이 줄어들고. 그러니까 레이업(lay off)이라고 그래서. 레이업, 뭐라 그러나 우리말로. 감원. 감원을 시키는데 나는 늦게 들어갔으니까 감원 대상이죠. 그래서 감원이 됐어요. 그랬는데 인제 주위에서 옛날에 인제 중앙일보에 출판국장도 하고 사회부장도 하고 그런 분도 그렇게 아까운 재주 이렇게 썩히냐고, 같이 신문을 하자 맨날 그랬는데도 거절했었고 그 다음에 장기영씨 이쪽으로는 여기 사장하는 사람이 동서가 또 내 동기동창이고 그래서 너 지사 하나 맡아라, 칼람을 맡던지 해서 편집을 하든지, 그러다가 딴 걸 하드래도. 이래가지고 76년에 한국일보 다시 들어간 게 오늘날까지 또 계속 이, 이거에 그냥. 코가 뀐거에요. 그리고 보람도 있었고 기자로서 보람 증말 있고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았어요. 그거는 뭐 그거는 한국에서 있었으면 누릴 수 없는 여러 가지 특권과 기자로서의 그 기회와 또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던 그, 그런 그 후회 없는 언론인의 생활이었어요.
면담자 : 선생님 이것은 한번 쫌. 그때 당시에 선생님께서 멤피스나 디트로이트, 뭐 그쪽에서 몇 개월간 생활 하셨는데 이곳에 계신 한인...
구술자 :와이프도, 친구허고.
면담자 : 같이 시카고에서 지내자 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당시에 선생님 여기 계실 때 시카고에 한인들이라고 해야 되나요, 한 몇 분 정도나 시카고에 좀 거주하고 있었나요?
구술자 :만 명 안 됐을 거예요, 육천명, 팔천명.
면담자 : 그때 당시의 한인 사회에 어떤 뭐 그런 뭐가 조직이 되어 있었나요? 한인 조직이.
구술자 :조직이 인제 신문사가 그게 인제 오피니언 리더죠. 신문을 통해서 모든 거를, 한국과의 그 네그 네트워킹과 연결은 신문이 다 했어요. 그러니까 그, 고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변화래든지 뭐 이런거. 그 다음에 심지어 위로 기능, 위로 기능. 그니까 신문에 나는 소설 있잖아요, 신문 소설. 그게 유일한 낙이었던 분들도 있으니까. 우리 어머니 같은 분들은 신문을 기다리고 신문 소설 보고. 왜냐믄 텔레비도 없고 비디오도 없던 시절이고 또 뭐 미국 극장은 영어를 모르니까 못가고. 그니까 신문이 오피니언 리더일뿐만 아니라 일종의 광고지였고, 어디에 무슨 그로서리에서 뭐를 세일한다든지 또 어디 식당에 무슨 맛있는 것이 있대든지. 그게 신문의 역할이 컸죠, 그러니까. 왜냐면 미국 사회를 동화시키고 미국 사회를 알리고 광고 선전을 해주고, 위로기능을 하고 인제 호랭이 담배먹던 때 얘기죠. 그때는. 그러니까 신문이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인제 교회. 교회는 뭘 했느냐. 교회는 이제 이민 목회라고 해요. 어떤 사람은 또 공항 목회라고도 그러고. 이민자가 공항에 처음 나타나면 목사님이 직접 차 몰고 가서 이삿짐 날라줘요. 이삿짐 날라주고 아파트 얻어주고 취직 시켜주고, 뭐 취직을 백퍼센트 시키는 건 아니지만 간호사다 하면 병원 끌고 다니고, 무슨 손재주가 있다하면 자전거 회사, 조립하는 데도 데리고 가서 어플라이 시켜주고. 목사님이나 한국 교회가 지금 부패해서 여기 교회도 부패했다고 지금 많이 욕을 먹지만, 그 당시 목사님과 신문사가 역할을 많이 했어요. 정착에. 그러나 그 이후 이민 동화에는 역기능을 했지. 왜냐면 주류 사회로 동화돼야 되는데 신문과 교회래는 건 동화에 역작용을 하잖아요. 교회도 미국 교회를 나가야 영어 ksakel라도 배우고 미국 사람 하나라도 친구 생기고, 미국 신문을 봐야 좀 더 폭넓게 보고 그럴텐데 맨날 박정희 뭐, 광주사태 이런 것만 봐야 되니까. 그 동화에는 조금 지장이 있었죠. 순기능과 역기능을 언론과 교회가 함께 했던 시절이에요.
면담자 : 그 한국일보 시카고 지부라고 불렀었나요?
구술자 :지사
면담자 : 지사라라고 불렀었나요? 거기에서 76년부터 이제...
구술자 :76년부터요, 어...80년 80 광주 사태 지나고, 아니야, 지나기 전에 내가 중앙일보 편집국장으로 옮겼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면담자 : 기자로서 활동하신 건가요, 아니면 논설위원으로...
구술자 :한국일보서는 기자로 활동 하고 기자 편집하고 그 다음에는 저 직책은 편집부장이고 조광동씨가 외신부장인가 뭐 취재부장이었었고. 이윤모라는 저 농과대학 나오고 사회학 Ph. D.를 가진 분이 편집장이었고 그랬고. 그 다음에 기자가 한 두세 명 있었을 거예요. 판 짜고, 취재하고. 어...중앙일보로 가면서는 내가 어...처음에는 그냥 편집국장으로 갔고 나중에 사장이 본사에서 나오고 그러면서 편집인이 됐죠. 그니까 더 승진한 거지. 발행인, 편집인, 주필과 편집국장을 총괄하는 게 편집인이니까. 중앙일보는 편집인으로 갔어요.
면담자 : 그러면 중앙일보에 근무하실 때 80년을 맞으신건가요.?
구술자 :그렇죠. 80년 때는 중앙일보에서 보냈어요. 그리고 80년때 또 후반기에는 또 한국일보로 다시 갔어요. 그런 상황이 벌어졌어요. 왜냐면 한국일보가 데스크감이 없어가지고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중앙일보에서 너무 뉴욕타임스를 많이 번역한다고 뉴욕타임스가 유일한 정부비판 언론이었거든. 따른데 기사를 안 보내는데. 그래가지고 신문 짜른걸 막 지사장이 띠고 이런 정도의 갈등이 한 삼개월 계속되다가 돌파구를 제가 다시 한국일보 쪽으로 찾았어요. 그래가지고 한국일보를 다시 가가지고, 그때는 딴 편집장이 있었고, 내가 한국일보에서 다시 편집국장이 된 거는 90년. 90년에서 2000년까지 또 십년을 편집국장을 했어요. 한국일보에서. 2000년이니까 그것도 벌써 것도 십 몇 년 됐죠. 십사 년, 십오 년 지났죠. 그 뒤로는 이제 내가 편집국장을 2000년에 관두면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생겨가지고 그쪽에 편집국장을 일 년 했어요. 그러고 그 신문이 문 닫는 바람이 한국일보는 바로 안 가고 좀 쉬다가 한 두달, 한국일보에서 나를 논설위원으로 데려갔어요. 파트타임으로 그니까 내가 출근을 안 하고, 아 이삼일 출근을. 파트 타임 직원이지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게 아니라 한 10년 전부터는 제가 반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 세마이(semi). 왜냐면 매일 출퇴근을 안 했으니까, 그때는 논설만 쓰고. 사설만 쓰고.
면담자 : 그 이민을 오셨어도 이제 한국 그런 신문에 대해 신문에, 그런 언론,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계속 하고 계셔서 한국의 정치상황, 뭐 사회 상황들을 누구보다도...
구술자 :한국에 계신 사람보다도 더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면담자 : 더 정확하게, 어찌보면 미국의 언론에서 이야기 하는 것도 비교 분석을 또 할 수 잇는 부분이고. 그런 생활을 언론인 활동을 계속 하셨었는데 그 인제 79년 뭐 부마라든지 10.26이라든지 뭐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신군부 전두환의 등장 이러한 부분들을 언론 활동 하시면서 다 지켜보셨을 텐데 이런 부분들을 좀 그때 당시에 어떻게 좀 판단을, 정세 판단을 하고 계셨는지, 선생님께서는.
구술자 :나는 내 기자로서의 사명이 한국 민주화에 있었기 땜에 지면도 아무래도 그쪽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알정도로. 한국서부터는 그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허게. 왜냐면 신문 제작자가 어떻게 그 정부 비판하는 사람이 데스크에 앉아있을 수 있어요. 근데 여기는 그게 가능했지, 미국이니까. 그리고 한국에서 직접 감시를 한다든지 지시를 할 수 없으니까. 근데 이게 다 청와대도 가고 정보계통에도 가고 본사에도 가고 그러니까 대강은 다들 알지. 어떤 성향인지는 알지요, 그렇지만 내 역할이 그거라고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내일 관두더래도 나는 소신을 관철하겠다는.
면담자 : 직접적인 압력이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까? 그런 글, 그런 정부비판에 대한 어떤 신문 보도 내용에 대해서 이런 거 하지 말라라고 직접적으로...
구술자 :그러니까 그거는 지사장을 이쪽을 통해서 은근히 들어오지 자기네들이, 그건 서울도, 한국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저 우직하지는 않거든, 야, 이 사람 관두게 해라. 너 관둬라 이렇게는 못하지. 그러니까 이제 데스크 저 그 책임자들이 알아서 기는, 알아서 기는 거죠. 왜냐면 나중에 말이 인제 안 좋게 나니까. 그래서 찾은 길이 아까 얘기했던 이 화이부동이에요. 화이부동은 인제 아까 서산대사 말이라고 그랬는데 이 홍성민씨도 그렇게 정부 비판적이었는데 동아일보의 김준백씨처럼 광주, 광주 일고 출신이지. 아주 직설적으로 그렇게 그런 비판 칼럼을 쓰지는 않고 이런 사람들은 은근히, 그러니까 조화하고 화합하면서 그 범위 내에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인제 비판했던. 그래서 이 분이 나의 멘토고 내가 존경의 대상인데 그래서 내가 3개사를 옮겨다니면서 데스크를 봤지만, 편집 책임을 봤지만 한국일보, 중앙일보, 뭐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같이 했었으니까. 네 개 한국의 네 개 일류 신문사를 여기서는 다섭렵한 거죠. 그래도 그게 결국 무슨 기회주의자나 이렇게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 안하고 오히려 화이부동과 같은, 화이부동과 같은 그런 그 나름대로의 환경에서 내 그 주장과 정치성을 폈기 때문에 나는 내 일을 아주 충실히 잘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면담자 : 그, 선생님 인제 질문을 다시 좀 드리자면 79년 부마사태부터 시작해서 10.26으로 인한 박정희의 죽음, 그 이후에 뭐 전두환 뭐 12.12 쿠데타로 인한 등장, 서울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80년 봄 상황, 그런 것들을 그런 내용들을 인제 미국에서도 여기에서도 계속 주의주시하고 계셨을 텐데 그때 당시 선생님께서 한국 정부의 정치적 상황들, 이 정세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진행될 거라는 그런 판단이 좀 들으셨나요, 선생님 개인적으로..
구술자 :굉장히 너무 광범위한 얘기죠. 이게 좀 한마디로 말씀드리기 힘든데 어...내가 편집장 하는 시절에 어...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 초청해서 어...근데 초청한 게 레이간 그 재선, 두 번 텀 때 이제 마이너리티들의 표를 의식하고 그, 미주 마이너리티의; 발행인 편집인을 백악관으로 초청했어요. 그래서 기자회견도 하고 내가 가서 질문도 하고 그랬지만. 그런 일도 있었고 어...전두환 대통령도 초청했어요. 그래서 백악관, 청와대 갔어요, 몇 사람 갔어요.
면담자 : 그때 몇 년인지 기억하십니까?
구술자 :80년 때에요. 대한항공이 떨어지고 그랬을 때에요. 대한항공이 언제 떨어졌지, 83년인가, 그게? 83년 쯤 될거에요. 대한항공. 그래서 아주 독이 났을 땐데, 아웅산에서 말이죠. 대한항공이 아니라 아웅산 사태. 어...버마에서 무슨 사건이야, 그게. 버마사태. 아웅산 사건. 그 저 대한항공 떨어진 게 아니라. 고 다음이지. 그 해. 그 해에 대한항공 떨어졌지 저저 사라 거기서 소련 영공에서. 그러니까 83년일 거예요. 하여간 전두환 대통령하고 한 한 시간 반쯤 몇 사람 앉아서 얘기도 하고. 왜냐면 정체성 없는 정권이 외부에는 잘 보여야 되니까 외국에 언론, 우리처럼 인제 교포 언론에 미국과 창구에 있는 이런 언론인들은 장악해야 되기 때문에, 호텔도 좋은 데로, 대접도 잘해주고 청와대까지 부르고 그런 것도 있었고. 그 다음에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들이 대통령 되기 전에 시카고에 왔을 때마다 뭐 아주 근접거리에서 같이, 신문기자라기보다는 물론 인터뷰도 하고 그랬지만, 같이 무슨 상의도 하고 뭐 한국 정치에 대하서 얘기도 하고 같은 그 참모처럼 말이죠 있었고. 그런 식으로 정치 참여를 했고.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그런 그, 그를 그 줄기를 벗어난 그 그 박정희, 그 다음에 뭐 전두환으로 이어디는 독재정권은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고. 제가 하는 일이 글로 쓰는 거니까 뭐 이정도로. 이 정도까지는 그때 신문에는 안 썼지만 그게 나의 논조였고. 고 다음에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 방대해서 현학적이랄까, 철학적으로 얘기하면요. 아...나는 역사학자 중에 한국에서 김준혁 고려대학 총장을 제일 존경해요. 이분의 󰡔장정󰡕이래는 책을 보셨는지 모르지만, 보셨겠지만 󰡔장정󰡕이래는 데 보면 인류역사를 이렇게 쭉 자기가 역사 학자로 되돌아 볼 때, 자기는 역사의 신이 있다고 믿는다, 역사가 말이지 옆으로 비뚜로 가기도 하고 뒤로 후퇴도 하고 그러지만 긴 큰 흐름같은 것으로 봤을 때는 결국은 선과 진과 진선미의 아름다운... 고거 고대로 ㅇㅇㅇㅇㅇㅇ 01:36:22 다시 한 번 보여드릴게요. 나는 그걸 믿기 때문에 반드시. 나는 김영삼,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믿었어요, 그게 순리니까. 외국에서 그만큼 어, 투쟁을 하구 정치 이력을 쌓았으면 대통령 되는 거거든요, 국민이 뽑아주는 거거든요. 됐잖아요. 잠깐 녹음 중단 하셔도 되요, 찾는 동안.
<자료를 보면서 계속>
구술자 :이거는 내가 한국 갔다 오면, 갔다 와서 쓴 거구요. 한국의 정치실정을 보고. 그거 다 가져가세요. 다 가져가시고.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 돌아가셨을 때 말이죠. 그게 2009년 6월이에요. 제가 제 칼럼란에다가요, <MB정권의 산물 순교자 노무현>이라는 제목 칼럼을 썼거든요. 그게 아까 내가 얘기하던 마지막 구절이 여기 있어요. “세월이 어수선하다. 북한은 도발의 강도를 높이고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임채진 검찰 총장이 고뇌 끝에 사퇴했다. 지금은 망자가 추구했던 가치, (노무현), 즉 인권과 좌우 지역 세대 갈등 해소, 소외 계층의 보호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민 화합과 통합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한 때이다. 이 대통령의 열린 마음의 리더십이 아쉽다 (MB의) 김준혁 고려대학교 전 총장이 그의 저서 장성, 󰡔장정󰡕에서 기록한 세계사의 긴 전개 과정을 통해 진리와 정의와 선을 마침내 실현해내는 역사의 신이 존재한다는 지론을 나는 이번에 확신하게 되었다. 상록수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 민족 나아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승리하리라.” 이게 인제 노무현 죽었을 때 내가 쓴 칼럼인데 이것도 가져가세요. 참고하시고. 그러니까 그 뭐 12.12고 무슨 저 부마사태고 내가 단편적으로 내가 일일이 코멘트 하기에는 좀 너무 장황하고, 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한국 정치 변화사를 보면서 내가 논설에서 취했던 거는 이 화이부동의 자세였고 그 다음에 내가 쓴 칼럼은 낙관적이었대는 거, 그리고 희망을 가졌대는 거. 그 근거는 김준형 총장 같은 저런 분이 있었고. 고 다음에 내가 또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하는데요.. 김수환 추기경을 내가 인터뷰를 아주 거창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쓴 칼럼도 하나 가져가시고. 이건 내가 하나 있나? 그냥 참고만 하시죠. 필요하시다면 드리는데 내가 보관용으로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 그렇게 크게 보도 했어요, 내 신문에. 일종에 편집국장으로서의 횡포죠 2면을 할애해가지고 양쪽에다가. 김대중 선생 왔을 때고. 그 다음에. 이건 편집 국장 당시 이부영에 대해 쓴 거에요. 이부영씨 같은 사람은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 강동에서 자꾸 떨어졌는데, 강동. 서울에서 떨어졌죠. 비교하자면 무슨 김근태나 정동영 이런 사람들보다 큰 인물인데 유엔 사무총장을 했어도 뭐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고 대통령감인데, 때를 못 만난 것 같고. 이것도 뭐, 김영삼 취재했을 때 서울서 만난 것. 이런 건 갖고 가셔도 될 거에요. 그 다음에 내가 장대용씨도 만났어요. 장대용씨는 한국에서 기자가 오면 안 만나요. 나는 여기 시카고살 때 만났는데 있을거에요. 장대용씨가 그때 최고의원이었어요. 그리고 이 사람이 허수아비로 최고의회 의장으로 세워놓고 그 밑에 박정희가 부의장이면서 실권을 건드렸죠. 그리고 이 사람은 육사 오기를 쥐고 있었고 누구냐, 박정희는 8기를 쥐고 있었는데 8기가 더 스마트했어요. 8기가 5기를 이기고 장대용씨가 망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히스 베리 젠틀(He's very gentle.) 그러나 우유부단하고. 그 다음에 이 책도 제가 드릴게요. 참고가 될만한. 이거는 성기종. 제일 앞에서 다이빙 선수하고 인터뷰, 그 저 누구지. 요세미티, 금메달 딴 사람, 골프 선수, 전설적인 박세리하고 한 거고. 여기 보면 아까 그 사진, 레이건 대통령하고 있을 때. 그리고 여기 동네 이야기고. 인혁당 사건에 죽은 사람 있고, 아까 얘기했던 이부영씨 후원회때 내가 연설하고 있는거, 이 이게 이부영이하고 이부영이 부인이고, 김수환 추기경, 이 저, 어...
면담자 : 박개동
구술자 :박개동씨, 김대중씨. 이게 우리집이에요, 우리집에서. 이건 최은희 신상욱, 이홍구, 이건 주지사, 미국 사람. 이 사람이 한승원 변호사. 아, 성란. 이대 앞에 성란이란 식당인데 항상 여기를 좋아하시더라고. 성란이라고 이대 교수들이 많이 가는 식당인데. 여기는 우리 식구들, 아들 딸 우리 와이프. 이게 권근술, 한겨레 사장했던 베스트 프렌드. 서정주는 고은 선생 지금도 용서 못한다고 그러고. 이거는 언론인 조병희. 그 다음에 여기에도 또 내 얘기가 될 만한 사진들이 좀 있을 거에요. 이것도 드릴게요, 여분 있으니까. 이거 짐되지 않아요?
면담자 : 아, 아닙니다
구술자 :괜찮아요? 이건 우리 집안 형제들이고 이게 인제 조선일보 트리오. 이 사람은 정무하고 이 사람은 편집 국장을 두 번 하고 나하고 집사람, 방호영, 방호영이. 조선일보 회장 방씨. l게 또 이 친구들이 또 친하니까. 안 갈라고 그랬는데 금강산 갔을 때 나하고 친구, 이부영씨 부인 친구. 그때 항상 연설을 했고. 김대중, 김영삼. 김수환, 또 이 사람이 장대영. 김상현씨 알죠? 이 사람이 국회 의원 했던. 그 다음에 이지현 박사라고 여기 대부에요, 민주화 운동에. 군인으로서는 백선엽씨 인터뷰를 했으니까. 여기 있고. 이거는 인제 야구장 취재 내가 할 때 박찬호 한거고. 그 다음에 김우중씨 그분을 또 언론인으로 또 인연 맺었고. 그 다음에 이건 내가 첫 번째 책 출판 기념회 했을 때. 아프리카 가서 취재하면서. 그 다음에 이것도 아프리카. 이건 아까 거기 나와썬 참전용사 기념비. 백선엽 장군하고 같이 같던. 피러 제임스라고 유명한 앵컨대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이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우리 집사람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다녔는데 거기 CEO, 여기 주지사, 유명한 칼럼니스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뭐 그런 거고. 일권에는 인제 함석헌 선생하고 있는데 첫 번째 출판한거는. 요것 또 가져가시고.
면담자 : 그 79년 이야기를 쫌 다시 쫌 드리자면 79년 부마사태랑 10.26이 일어났을 당시 보도를 선생님께서 신문에 보도를 여기서 하셨을 텐데, 그 이 지역 한인사회의 반응이라고 해야 되나요, 뭐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서요.
구술자 :고 부분은, 고 부분은 조광동 씨가 자세히 알고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때 그때 데스크에 안 있었던 것 같아요. 무슨 이윤지 그때 79, 80 때 어...내가 편집 책임자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딴 부서에 간 것도 아니지만 그 때 내 기억이 없어요, 신문 제작했던.
면담자 : 한인 사회의 그런 반응 같은거, 한국 정세에 대한 그런 반응같은 것은 좀 어땠나요?
구술자 :광주 사태 때 80년대에는 막 데모하고 그랬죠. 전부 뭐 좌파 우파가 없고. 무슨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없이 전부 전두환이 죽이자고 그러고 굉장했죠. 왜냐면 사실을 보도 안했기 때문에 폭도들의 난동인지 안 사람들이 많앴거든요, 여기두. 근데 그게 사실이래. 정권을 잡기 위해서 학살을 했다는 게 사실로 확인된 이상은 그거 가만둘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로렌스가 그때 한인 타운인데 거기 애들, 횃불 집회 하듯이, 광화문에서. 그식으로 다 나왔죠.
면담자 : 그때 당시에도 시카고에도 약간 그 친정부적인 성향의 한인들이 있었고 약간 반정부...
구술자 :노노, 거의다 반정부라고도 안 그랬어요. 그땐 정의, 민족으로서 당연한 주장이지. 그리고 친정부래면 영사관 직원하고 그 사람들도 뭐 월급 받고 하는거니까 자기네들 정부에서 시키는대로.
면담자 : 그러니까 80년 전에. 5·18 일어나기 전에도 한인 사회가 약간 그런 이념적인 그런...
구술자 :이념적인 것에서는 그거는 반적인 쪽이 정당성을 인정받았지. 반정부쪽이. 왜냐면 정통성 없는 정부니까. 박정희, 박근혜의 유신서부터 독재가 아주 아주 극악으로 치달렸고 전두환이가 왔고 그러니까 그걸 찬성하면 오히려 욕먹었죠. 이런 데서 어우 전두환이 잘한대면. 뭐 그러니까 영사관 직원이라든지 그쪽, 그쪽 친여쪽, 또는 한국 쪽에서 무슨 전경환이가 온대든지, 전두환 동생. 그 새마을 운동 왔다 그러면 우 몰리는 사람들이 있지, 또. 정부에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뭐 그런 거지. 지금처럼 말이지, 좌우로, 좌우가 지금 51대 49 아니에요, 어쨌든 지금은. 박근혜를 칭찬하는 것도 반이고 반대하는 것도 반이잖아. 근데 그 당시에는 거의 반대하는 걸루 봐야지, 일반은. 그러니까 이승만 독재 때 4.19가 일어났는데 그 4.19가 반반, 반은 찬성하고 반대했던 게 아니라 국민 전체가 찬성한 걸로 인정을 받듯이 포악한 정권은 무너져야 된다고 그때는 다 생각을 했지. 그때만 하더라고.
면담자 : 5·18 당시에 상황을 쪼끔 이렇게 말씀을 여쭈어볼게요.
구술자 :아 내가 5·18때 내가 한 몇 개월인가, 한 일 년 인가 또 공백이 있었어요.
면담자 : 잠깐 신문사에서
구술자 :중앙일보에도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하여간 신화일보 때 무슨 데모, 또 한국 일보 때는또 뭐 그런 이너써클 쪽에 문제가 있었어요. 그건 내가 공개하기 쉽지 않을거고. 인제 그것 때문에 내가 딴데로 밀릴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중앙일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보도와 관계됐을거야, 아마. 그래가지고 나와 있을때요. 그래서 내가 제작을 안 했어요. 그래서 기억이 없고 내가 쓴 기사가 없어요. 그때 12.12, 고 다음에 광주 그 광주서부터 12.12 사이에 내가 칼럼 쓴 거나 기사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 공백이 있었어요.
면담자 : 기사는 쓰지 않으셨지만 이 지역 내에 한인 사회의 움직임은...
구술자 :움직임은 잘 알죠. 그러니까 80년 때 다 일어나서 애들까지 데려와서 데모하고 그랬고.
면담자 : 선생님은 그 광주의 상황을 어떻게 쫌 처음 접하시게 됐나요?
구술자 :나는 그때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던지, 내가 잠깐 봐주던 가게에서 그 매니저를 하면서 TV를 이렇게 봤는데 막 이가 갈리고 그냥 분개를 했습니다, 제가. 그리고 그 당시만 하드래도 만약 그 애들 죽은 채 끌고 가고 학살하고 뭐 이러는 걸 보고 총 쏘고 뭐 나중엔 다 항복했는데도 도청 그래 공격하고 그런걸 보면 야 저건 공산당이 와도 저렇게까지는 안하겠더라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런 사람들이 공산당이 살려준다고 온다면 만세부를꺼다.
면담자 : 주로 인제 미국 방송
구술자 :미국 방송만 봤지. 한국 방송은 무슨 전부 폭도들의 행동이라고 그러고. 모종의 사태. 그 때만해도 꽉 통제하고 막아놓으면 바깥으로 세지를 못했어요. 지금같으면 뭐 그냥 다 알지, 다 . 사실이 금방 다 알려지면 전두환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었지. 벌써 그게 바깥으로 나갔었으면 이건 있을 수가 없는데 그 당시는 김정일이나 김일성이나 김정은처럼 꽉 가둬놓으니까 이게 뭐 발표, 정부발표만이 진짜인줄 알고 폭도들이라느니 지금도 폭도들이라고 하면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긴 있죠. 지금두.
면담자 : 당시 그런 미국 방송이 5·18을 바라보는 보도하는 그런 내용의 논조라고 해야되나요?
구술자 :논조는 내가 내 논조, 그러니까 반정부 논조고 소위 말하는 반정부. 정부 비판. 정부는 하여간 전두환이 꺼니까, 그 당시에. 완전히 그렇죠. 뉴욕 타임스가 교과서였잖아요. 그거 베껴다 내면 다 알아들은 것에요. 정권욕에 의한 것, 12.12도 그렇고. 어떻게 하극상이지 그게. 제대로 보도했죠. 미국은.
면담자 : 당시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70년대에 처음에 들어왔을 때 70년대에 들어오셨을 때 시카고에 한인이 뭐 한 6천명에서 만 명 됐을 것 같다 이렇게 말씀 하셨는데 그때 당시 5·18 소식을 듣고 여기 뭐 행동을 했던 어떤 시위나 항의 시위나 했던 조직이 됐었나요.
구술자 :그때는 조직이 돼서 나왔을 거예요. 무슨 조직이 뭐 이렇게 뭐 한국서처럼 이렇게 조심스럽고 치밀하고 이런 게 아니고, 우리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냐, 가만히 있어야 되겠냐 그래가지고 교회라든지 뜻있는 사람 몇사람이든지 어디 광고 내는 거야. 몇월 며칠 로렌스에서 시위하겠다. 하면 몰리는 거야, 모이는 거야.
면담자 : 시위 장소가 로렌스.
구술자 :로렌스. 한인타운이야, 당시. 그리고 상당히 조직적이지는 않고 그냥 그냥 교회, 그 다음에 친지들 이런 통해서 의분한 사람들이 이니셔티브(initiative)지.
면담자 : 오래된 기억이긴 합니다만 혹시 이때 로렌스에서 첫 5·18 관련 항의 시위를 했던 시기가 몇일인지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날짜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면담자 : 5. 18 이후인가요.
구술자 :이후죠.
면담자 : 훨씬 이훈가요?
구술자 :훨씬까지는 아닐거에요.
면담자 : 아무튼 그 이후.
구술자 :고 얘긴 따른 사람한테 들을 수 있을거예요. 정확하게. 왜냐면 거의 참석한 사람들 다 있고. 나도 가봤지만 그래서. 그 때 한 삼백 명, 꽤 나왔어요. 한 삼백명 그것도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종합해보세요. 딴 사람은 또 얼마로 기억하는지.
면담자 : 하루 딱 있었나요? 그 항의 시위가, 로렌스 한인타운.
구술자 :하루 있었던 것 같애요. 하루 있었고. 교회에서 그 규탄하는 예배를 보는 데도 있었고.
면담자 : 면담자 : 예. 뭐 당시에 그 시카고에 지부를 두고 있었던 한국일보라든지 동아, 중앙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그때 있었나요?
구술자 : 없었어요. 그건 늦게 생겼어요.
면담자 : 어떤 형식으로 좀 보도, 5·18에 관련된 보도...
구술자 :조광동이가 한국일보 편집국장이었고 그 당시엔 한국일보가 중앙일보보다 훨씬 독자도 많고 리딩 뉴스페이퍼(leading newspaper)였는데 심지어 어떤 것까지 보도했냐면 ‘전두환 찢어죽여라,’ 하는 사진을 조광동씨가 개재했어요. 근데 발행인이 빼라고 그랬어요. 근데 못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게 아마 신문에 나간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압력이 들어와서 조광동씨는 그거 신문에 낸 이후로 신문사에서 나갔어요. 쫒겨났어요. 근데 그게 결국은 조광동씨로 하여금, 나중에는 한겨레신문을 조광동씨가 맡았어요. 하튼 그게 계기가 됐지. 조광동씨도 한겨레 맡기 전에는 옷장사도 하고 또 고생 좀 했어요. 소신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고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아무튼 그 당시에 로렌스 한인 타운에 있었던 항의시위는 참석은 하셨는데 이걸 조직적으로 주도하시거나...
구술자 :뭐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왜냐면 꼭 인원수를 많이 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냐면 그 의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그, 그 자기네들 생각을 미국 사회에 전파하고 알리고 한거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무슨 조직하고 하튼 그런 기억이 전혀 없어요. 많약 조직했으면 조광동씨나 나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게 없이 몇 사람이 이렇게 신문에 광고를 냈는지 안 냈는지 이렇게 구두로 이렇게 이렇게 해갖고 모이고 했던 것 같아요.
면담자 : 그 어찌됐건 그 이후에 5·18이 10.1 항쟁으로 마무리 되고 한국 상황은 마무리가 되고 어...그걸 인제 실패했다라고 얘기는 않지만 어찌됐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지 않습니까. 들어서고 제가 알기로 그 다음 년도에 미국을 방문한 것으로. 81년도에 레이건을 만나러 미국 방문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당시에 물론 직접 시카고를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당시에 또 뭐 한인 사회 내에서 그런 전두환을 바라보는 시선이랄지 방미와 관련된 어떤 시위라든지, 방미 반대 시위랄지 그런 거 뭐, 워싱턴이나 뉴욕이나 그런 데서는 일어났던 걸로 알고 있거든요. 엘에이도 마찬가지고 그런 움직임도 같이 있었나요, 시카고에요.
면담자 : 전두환 방미반대 시위 같은 건 여기 그렇게 없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구술자 :그럼 선생님께선 다시 한국, 아니 다시 신문사로 들어가셨던 해가. 언제였나요? 좀 다시 쉬셨던 공백 기간이 아까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다시 신문사로 복귀한게.
면담자 : 그러니까 86년까지인가 81년서부터 뚝뚝 내가 편집국장을 또 했죠. 중앙일보. 그니까 일단 광주 사태 하고 이게 진정된 다음에. 이 쪽도 지사장이 갈리고 이러면서 내가 다시 들어갔고
면담자 : 그럼 86년?
구술자 :86년까지. 81년인가. 81년서 82년인가? 81년 아니에요, 광주 다음에는 아니에요 고게 정확하지가 않은데 80년때 초에서 80년대 거의 말까지 있다가 다시 한국일보로. 그때는 내가 이 논조가 너무 정부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쫓겨난 거야, 중앙일보.
면담자 : 아니 그러니까 제가 좀 이해가 좀 안 돼서 그러는데 80년...
구술자 :곡절이 많았기 땜에
면담자 : 80년 당시에 좀 쉬셨던, 신문사를 떠나있으셨던 공백기간이 있으셨다고 했는데 그 기간이 정확하지 않지만 1,2년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86년 까지 쉬셨다는 건가요?
구술자 :아니, 86년까지는 아니야. 83년에는 벌써 내가 중앙일보 편집국장으로 전두환을 만났다니까. 83년에는. 대한항공 떨어질 때.
면담자 : 83년에는 중앙일보
구술자 :편집국장.83년에 내가 83년, 82년서부터 86년까지 편집국장이야. 아니 그렇기 길지 않다. 3,4,5,6, 4년 편집국장했을거에요. 83년부터 86년까지 그러고 한국일보로 갔어요.
면담자 : 한국으로 다시 잠깐 들어오셨다구요?
구술자 :아니, 아니요.
면담자 : 아, 한국일보로.
구술자 :한국일보로 다시 또 갔다구요. 어어. 왜냐면 이때는 내가 너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니까 신문사에서 인제 다른 핑계로 내쫒는거죠. 왜냐면 그때는 여기 민통련이니 뭐니 민주 단체들이있었거든요. 그때는 조직이 있었어요. 민통, 민통이라고. 어, 민주주의 통일 연맹인가 무슨. 조광동씨 거기 회장도 했죠 나는 주로 조광동씨가 나보다 더 이, 사이사이가 많아요. 그니까 한겨레 오기 전에 장사했다든지 한국일보 가기 전에 또 뭐 어떤 그 양반은 신문사 근무한 거는 나보다 짧은거에요. 왜냐면 하도 쫓겨나기를 많이 했으니까. 쫓겨나기도 하고 한겨레 같은 경우는 쫒겨난 게 아니라 실패하고. 그러니까 이제 광고가 없고 구독자가 없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나보다도 더. 근데 나도 그런 곡절이 있었는데 83년서 86년까지 있다 왜 또 한국일보로 갔냐 하며는 그거는 논조 때문에. 그때 논조 때문에 그렇게 내보냈다고는 대외적으로는 안 하고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자기네들은 무슨 딴 핑계를 내는 거예요. 어차히 인사할 때가 됐다, 편집국장을 오래했대든지 딴 이유를 대는 거에요. 무슨 이 살마은 게을르대든지 이 사람은 직원들이 싫어한다든지. 뭐 이런 걸로 내쫒으려고 해요. 왜냐하며는 아까 말씀했듯이, 내가 말씀 드렸지만 민통이니 뭐니 민주화 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들고 일어나서 데모하고 자기네들 수(suit: 소송)하고 그럴 까봐. 근데 나만하더라도 사실 그거 수를 해야 했는데 그만큼 미국을 몰랐고 또 경영하고 틀리면 나오는 거지, 이런 정도만 생각했기 때문에 정부 상대 싸움도 아니고 그래서 뭐, 그냥 나왔어요.
면담자 : 선생님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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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저것만 갖고. 혹시 내가 없으믄 내가 하나도 없는 거니까.
면담자 : 어, 80년 5·18 이후에 이쪽 인제 시카고에서도 그 이후에 인제 교민사회를, 한인 교민사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 세력들이 이곳에 조직이 되기 시작한 부분인데 선생님도 그 관련되서 어떤 활동을...
구술자 :저는 조직 속에는 안 들어갔습니다만. 그 저, 민통에 대해서 좀 알아보시라구요. 그쪽은 내가 직접, 거기에는 또 누가 있냐면 박장렬 박사라고 있어요 박장렬. 광주분이지. 박장렬 박사. 서울 공대 나오신 분인데 여기 원자력 관계 연구소에 다니셨고. 그 양반이 민통 회장도 하고 그랬어요. 자료들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어요. 조광동씨나 그 사람들이. 나는 그쪽은. 그 사람들이 그 운동을 할 때는 나는 신문 제작 쪽에 있었으니까.그러니까 안에 있었고 바깥에 안 있었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은 또 바깥에 있었다구요. 그래서 그 양반들이 더 정확하게 잘 알거에요. 80년대에 여기 동포와 민주화 단체의 움직임. 고거는 내가 지금 그냥 막연한 기억만으로는 정확하고 자신있게 할 수가 없는데. 실무자들이, 직접 일했던 사람들이 있으니까. 고 부분은 그쪽으로 좀 물어보셨으면. 저는 그 안에 이너 써클에는 개입을 안 했어요. 왜냐면 신문 제작 쪽에 있으니까.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언론 활동을 미국쪽, 미국에서 오셔서 하시면서 계속 그쪽으로, 약간 성향이라고 할까요, 논조가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과 그런 것들을 이렇게 날카롭게 쫌 해주셨는데 물론 인제 한국에서보다는 쪼끔 그런 글을 쓰기가 자유스러웠겠지만 그런 부분들에대한 어떤 불이익이나 보이지 않는 다른 뭔가가 압력들이 선생님께 있지 않았나요?
구술자 :그런 건 없었어요. 가령 무슨 뭐, 그 당시는 비자를 받아야하잖아요 여권을 도장을 여기서, 근데 다 주고 그 다음에 뭐 아까 사진에도 보여줬지만 우리 형제들이 다 서민들이거든요. 무슨 요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평범하게 서민으로 사는 사람들한테 그런 건 없었어요. 제 경우에는 그런 건 없었어요
면담자 : 한 가지만 더 여줘볼게요. 70, 80년 당시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 통폐합을 하면서 수많은 한국에 있는 기자들이 해직되고 그 뭐 또 그런 한국에 있는 기자분들이 해고당하면서 운동하기도 하고 전부터 그런 운동들 하고 했었는데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좀 같이 운동을 진행한다거나 뭐 그런 부분들은 좀 없었나요?
구술자 :본국하고 미주와?그런 건 없었어요. 뭐 여기 언론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 어...몇 사람 빼놓고는 다 인원이 충당 리크루트(recruit) 됐고 여기서는 의식이 없고, 또 그 몇사람이 또 그 안에서 일하면서 연결해가지고 하는차원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런 건 없었어요. 그리고 기자탄압은 사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사태가 제일 컸던 거지. 김종필이 총리하면서 그, 언론 통폐합 이전 얘기에요. 김종필씨가 그때 광고 탄압이라고 동아일보 자쭈 정부 비판하면 광고 싣지 못하게 압력을 업주들한테. 나중에 이제 백지가 나가게 되니까 국민들이 막 써포터하고. 사실 오늘날 보면 써포트한 국민이 바보지. 동아일보가 배신을 했는데 국민들한테. 그러니까 그런 게 더 컸었고 그때 해직된 그 송일보같은 기자, 얼마 전에 돌아가신 송일보 동아태위원장, 그런 사람들에 제일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에요.수십명 수백명이. 조선일보하고 동아일보가 제일 많았지 언론자유실천선언 이부영, 권근술이. 그런 사람들이 저걸로 피를 많이 봤고 그 다음에 전두환 들어와서는 많이 인제 해외나 국내나 하도 독재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냥 언론인, 신문사 안에서 사람들은 많이 순종하고 뭐 그런. 패기가 줄었지. 그것도 세상이 바뀌면서 젊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뭐 큰거, 역사와 또 조국 민족 이런 걸 위해서 자기 희생 안 할려고 하고. 요즘은 또 더 심한 것 같아요. 그, 우리 때만 해도 그래두 독립운동 정신이 있고말이지 그랬었는데 요즘은 하거는 KBS, MBC에서 노조들이 쪼끔 활동을 하지만, 비판을 하고 그러지만 말이죠. 저 사주 측이나 정부에 대해서. 근데 옛날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열기대른가 투지력이. 여기서 보기에, 제가.
면담자 : 그러면
구술자 :학교도 마찬가지고요. 대학교도 지금 옛날 같으면 사대가 심했냐 문리대가 심했다 뭐 이런 얘기 했지만 요즘 사실 학생들도 뛰어나와야 될 그런 상황, 정치적인 상황이 많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뭐 잠잠하드라고. 마마보이들 뭐 취직 잘해서 잘 먹고 잘살려고 이쁜 마누라 얻고 토끼 같은 자식들 키울라고 해서 그런지들. 그런 의식은 없는 것 같애요.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이해하죠. 그것이. 안정된 나라니까. 한국은 나라 자체가 안정되지가 않았잖아요, 특히 정치적으로 후진성을 버리지 못했고.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마당에 가만히들 있고 말이죠. 그 젊은 사람들의 혈기가 좀 아쉬워요.
면담자 : 86년까지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하시다가 87년도에 한국일보로
구술자 :갔어요. 그때 편집국장에 누가 있어가지고 직책은 편집국장이 아니지만 일은 편집국장 일을 했어요.
면담자 : 그 당시 또 한국은 6월 항쟁.6월 항쟁이 또 크죠.
면담자 : 6월 항쟁이 일어났던 시기. 어찌됐건 그런 전두환 시절, 독재정권 시기 인제 7년을 보내면서 87항쟁으로 이게 터진 거잖습니까. 그 이게 인제 제 2의 5·18이다, 그런 얘기도 하고 5·18의 연속선상에서 인제 87항쟁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또 있었구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인제 87년 6월 항쟁 뭐 미국에서 바라보시는 입장에서. 이런 또 동포사회의 분위기와 같이 좀 87항쟁 6월 항쟁에 대한 동포사회의 분위기와 해서 선생님께서 좀 하시고 싶었던, 해주시고 싶었던 말씀은요.
구술자 :아쉬웠던게 그때 물론 이제 넥타이 부대들도 다 나오고 해서 항쟁이 굉장히 거셌었는데 거기서 이룩한게 사실 얻은 게 직선제거든요. 직선제 하쟤는 거예요. 근데 직선제 쟁취만으로는 그게 그렇게 큰 거였냐. 하는 생각이 좀 들구요. 뭐 그래서 노태우가 나타나고 김영삼이가 나타나고 그 뒤로는 인제 김대중 선생이래든지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그게 쪼금 좀 미흡했던 것 같아요 좀더, 좀더 큰 변화를 가져왔었으면. 그 항쟁이 너무 평화적이어서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그래서 뭐 그렇다고 다 블란서 식으로 단두대 처리하고 그런 주장은 또 아니지만도 직선제라는게 뭔가 좀 미완성이 아닌가 말이죠. ㅜ직선제 성취했대는게 그렇게도 기쁘냐 말이야. 오늘날 또 이런 게 반복되잖아요. 좀 미진하다고 생각했어요.
면담자 : 어떤 게 좀 더 필요했을까요.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는. 이런, 이정도까지 좀 이루었으면 지금의 현, 우리 나라가 한국이 이 정도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그때 쫌 뭔가 완성시켜놨으면. 쫌 더 이뤄놨으면.
구술자 :그거는 굉장히 힘든 질문이야. 내가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런거 까지는. 그게 우리의 한계였고 인제 그게 어떤 우리의 운명이라고 할까. 뭐 그런거였으니까 뭐 어쨌든 아쉽다는거 만큼은 제가 얘기할 수 있어요. 미진하고 아쉬운 거 같지 않았나. 그래서 어떻게 하면 혁명이 혁명다워 피를 흘려야한다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박정희를 그, 가만 뒀어도 부마 항쟁하고 이런 거로 봐가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되며는 일단 독재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있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 과정이 없이 넘어가버렸거든. 그러니까 박정희가 다시 영웅이 되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박정희가 된거고. 그리고 한 측면, 경제적인 거래든지, 이겨야 된다는거래든지, 기득층이 되야 된다든지 이쪽만 강조하고. 그러니까 뭐 또 다시 고은 선생님 얘기하자면 나하고 인터뷰하면서 동의했던 게 그런 박정희를 존경하는 그런 거보다, 교황 프란시스코나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이 나라를 다스렸으면 그 그, 영향력과 그 깊이와 진폭은 달랐을 아니냐 이거야, 나는. 그쪽 측면에서. 그니까 아직 우리가 그런 대통령, 가령 뭐 막연하게 얘기하면 김구 선생이라든지, 아까 이부영 같은 사람, 이런 사람. 근데 지금도 또 있어. 손학규 같은 사람도 대통령, 우리 같은 사람이 원하는 대통령은 손학규 같은 사람이거든요. 양심적이면서도 지식인이고 욕심없고. 자기 희생할 줄 알고. 근데 현장판에 가서는 그런 사람이 못 견디잖아요. 손학규 같은 사람. 김무성. 이건 비교해서 미안한 얘기지만 어떻게 김무성이 같은 사람이 손학규를 밀어냅니까. 우리가 볼 때. NLL 국가 원수가 한 얘기 그걸 없애자 안 없애자를 떠나서 그거 선거 때 막 이용해놓고 말이야. NLL 없애자 그랬다고, 그래놓고 조사하니까 뭐 찌라시 보고 한 얘기라 말이죠. 어떻게 제 1당 여당의 당수지 그러니까, 대표가 되기 전이지만.그런 사람의 수준이 찌라시 갖고, 그런 대통령 발언을 그렇게 할 정도로 그게 얘기가 됩니까? 경남지사하던 김 누구에요? 최고의원. 개헌발언 한 경남지사 누가 했죠? 김태호. 김태호란 사람이 경남지사하고 총리까지 인준 받을 뻔한 사람이에요. 김무성이가 중국에서 개헌 발언을 했는데 우리 박대통령이 싫어하니까 바로 사과, 자기가 뭐 신중치 못해서 이랬다고 사과하고 들어갔다고요. 그랬더니 김태호는 말이죠, 최고의원 사표내고 그랬다고. 충성할려고, 박근혜한데. 그러더니 도로 들어갔어요. 그 사이에 김무성이가 김태호 사무실에 가서 야, 니 요즘 커졌나? 관둘 꺼가? 뭐 이런 식이에요, 자리도 비고 말이죠. 신문에 기사가 났어요. 그랬더니 그냥 뛰어나와서 형님. 아 이게 조폭 수준이지. 이게이게 국민이 바보입니까. 근데 국민이 그걸 모르는 것 같애요, 그 수준들을. 나라가 어떻게 그 수준에서 운영돼야 되요? 진짜 해외에서 이렇게 볼 때는 하, 이게 한참 또 가야겠구나, 아부하고 충성하는 놈이나 그걸 깡패 식으로 다루는 당 대표나 그걸 보도하는 언론이나 그거에 분개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나 일반 지식인들. 나라가 어떻게 될거에요. 여기서 볼 때는 관심 ㅇㅇㅇ141110육길원01_02:16:22 이거 참속상하다, 아예 이거 덮구 말이지 관심을 갖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럼 80년 때하고는 얘기가 다르지만 말이죠.
면담자 : 87년 한국일보에는 당시 87년부터 언제까지 좀 계셨던 건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편집국장으로 2000년까지 있었구요, 고 다음에 2001년서부터 조선일보,동아일보로 옮겼는데 사주가 같았어요. 일 년 만에 경영란으로 망해서 한국 일보로 다시 들어온 게 아니라 한국일보에서 나를 다시 영입해가지고 논설위원으로, 파트 타임 잡, 그러니까 이제 월급을 많이 줘야되니까 나이도 들고 매일 출근할 수는 없고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나와서 큰 기사, 사설 쓰고 칼럼 써달라고 한 게 그직을 십 몇 년 했어요. 2012년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12년동안 논설위원이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세미 리타이어(semi retire 반 은퇴) 하고서 12년 한 거죠.
면담자 : 그러고 나서.
구술자 :말이 풀타임이지, 뭐 그 뭐, 그 ,아, 파트타임이지 풀타임 한 거와 전연 다른게 없이 신문 열심히 열독하고 공부하고 써베이(survey) 하고 자료 모으고 칼럼 쓰고 그거는 똑같은 노메러 왓풀타임 오아팟타임(No matter what, full time or part time: 전업이든 시간제든 상관없이) 그거는 그냥 언론인으로서 다른 건 안 했으니까 예. 뭐 여행 좀 많이 하고 좀 쉬고 그랬을 뿐이지 하는 일은 신문기자라고 봐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사회에서도 이 커뮤니티에서 n나를 대기자로 생각하고 뭐 좀 큰일이래든지 또 누가 뭐 큰 인물이, 사람이, 손님이 왔고 그럼 꼭 원로 언론인으로 대접해서 만나게 하고 그런 생활은 계속됐죠.
면담자 : 그, 12년이면 인제 한국일보 그만 논설위원을 그만 두신 해가...
구술자 :두고 이거 제가 만든거에요. 제가 이거 시카고 타임스. 이게 다음 주일 11월 15일 토요일날이 창간 일주년이에요. 난 어제 그제 창간 했는 줄 알았는데 벌써 일년이 됐는데요, 어제 그제 조광동씨하고도 점심먹으면서도 얘기했지만 이게 시카고 언론사에 혁명적인 신문이에요. 혁명적이다, 레볼루셔너리(revolutionary)한. 어떤 면에서냐? 인기 면에서요. 이거는 공짜신문인데요, 주관지라 .광고갖고 유지되는 신문이예요. 글로써리, 식당 이런 데 뿌리는데 늦게 가면 신문을 못 볼 정도로 불티나게 들고나가요. 그래서 우리가 주간지를 직배까지 해요. 여기 보면 여기 나오잖아요. 주간지가 직배하는 시스템이 없어요. 미국에서 일간지처럼 받아보는 거에요. 시카고 트리뷴지에다가 배달료만 일년에 삼십불 쯤 내면요, 이게 집앞에까지 일주일에 한번씩 딱딱 들어가요. 그래서 지금 부수가 제일 많고 열명이면 열명이 다 읽을 거 많고 신문이 다 좋다. 그래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혁명적이란 얘기를 해요. 근데 내가 그 얘기를 출판 기념식에서도 했더니 인사말이 있으니까 거기서 헐라고요. 여러분이 성원해주셔서 그렇게 성장했대는거. 그리고 광고도 보통 광고 직원들이 마케팅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마케팅하는 것보다 갖고 오는 사람이 많아요. 내가 보기에 그렇게 특출하게 잘 만든 것도 아닌데 단 시일 내에, 단 시일 내에 굉장히 성장한 신문이에요.
면담자 : 그 12년도에 어찌 보면 인제 한국일보를 그만두시고 선생님이 이제
구술자 :아니 12년이 아니라
면담자 : 2012년까지 논설위원 하셨다고.
구술자 :12년, 12년. 그러니까 작년까지도 계속, 내가 12년이라고 그랬죠? 아니 13년. 지금 14년이죠. 왜냐하면 이게 하기 1년 됐는데 이거 하기 한달 전까지도 한국일보에 나가서 글썼어요. 논설위원으로. 고문, 고문 겸. 논설위원 겸 고문.
면담자 : 인제 한국나이로 하면 선생님 춘추가벌써 일흔
구술자 :다섯. 일흔 다섯 1940년생이에요. 은퇴할 나이죠. 한국은 사오정인데 상상할 수도 없죠
면담자 : 다시 인제 시카고 타임즈라는 곳에 주필...
구술자 :주필이지만 제가 취재도 하고 인터뷰도 이렇게 하고 칼럼도 쓰고 그 다음에 편집, 제목까지 제목도 다 달아줘요. 거의 큰 거 제목은 제가 달아줘요. 제가 제목 다는 장기를 가졌거든요 미다시, 타이틀, 제목을 내가 이렇게 달아요. 이런제목을 달아주고. 이런 거 일간신문에서도 여기서도 모도 안 해요. 못해요. 본사 눈치보느라고. 이런 것. 뉴욕 타임스에 이렇게 나왔다는 거 우리는 하잖아요. 독자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면담자 : 새로운 언론들을 시카고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한국일보 같은 거 말구요.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은 언제부터 쫌 가지고 계셨나요?
구술자 :아니요,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면담자 : 시카고 타임즈
구술자 :나는 한국일보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해픈 투비(happen to be: 어쩌다보니) 이거를 해보겠다는 사람이 내 처남. 우리집사람의 동생이 자기가 신문을 해보겠다고 하는데 매형이 좀 도와줄 수 있냐고. 어, 나는 이제 나이도 들었고 제가 십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했거든요 콜론 캔서(Colon Cancer). 근데 지금 캔서 프리(cancer free: 완치)에요. 캔서 때문에 난 죽진 않아요. 딴거 때문에 죽겠지. 왜냐면 캔서는 나은 거니까. 그러니까 늘 몸이 괜찮냐고 물어보거든요. 근데 몸은 괜찮다 그런데 나이도 그렇게 이게 내가 제작 일선에서는 못 뛸 것 같고 좀 칼럼이나 써주고 뭐 편집에 대해서 쪼금 코칭을 하는 건 해도 내가 못하겠다 그래서 출발했는데 출발하고 보니까 내가 코를 낀 거예요. 내가 그냥 볼 수가 없드라고.
면담자 : 발행인이
구술자 :발행인이 우리 처남. 처남이 아니었으면 내가 조인 안 했어요. 이게 얼마나 고생이 된대는 걸 제가 알기 때문에.
면담자 : 매주만큼의 이만큼의 분량을 신문을 찍어서 만들어 내놓으면, 기사도 지금 보니까 굉장히 좀 많이 들어가 있는데
구술자 :기사 많이 들어가요. 칼럼도 들어가고. 또 한국에서는 가져오는 것도 있고 한국에서는 현대라는 주간지를 갖다가 전제 하죠. 뒷부분을. 우리가 그쪽을 잘 모르니까. 그쪽은 이렇게 많이 할 수가 없으니까. 여기까지.
면담자 : 추구하시는 어떤 상이 있으신가요?시카고 타임즈는 이런 언론이 쫌 되고 싶다는.
구술자 :하여간 재미있고 유익한 거 보도하고, 그 다음에 또 정의, 맨날 얘기하는 거지만. 신문사들이 맨날 불평부당하면서 불평부당 안하거든요. 자기 회사의 인터레스트, 이익을 위해서 별 짓을 다한다고요. 우리는 그것만은 하지 말자. 진짜 불편부당하게 하자. 억울한 사람 편에 많이 들고 그 다음에 나는 또 어두운 것보다 밝은 거 희망적인 것 이런 휴먼 스토리를 좀 많이 다루고 싶구요, 그 시가 있는 신문, 신문 같은 시. 시같은 신문 이런 걸 지향하고. 그런걸 무슨 캐치프레이즈처럼 안 달아도 독자들이 알아요. 느낌으로 해서. 내가 신문 좋아하는 것 중에 또 멘트로 잘 이용하는 얘기는요. 한국일보를 창업한 장기영씨가 한국일보를 상업지로 만들면서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썼거든요. 그건 무슨 말이냐하면 신문은 나쁜 목적으로는 누구도 이용할 수 없지만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신문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신문을 가지고 매니퓰레이션(manipulation: 이용) 하고 히용하고 그 나쁜 목적으로 그러면 이건 이건 공기가 아니거든요. 내가 무슨 공기래는게 사회의 그릇으로서 또 뭐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얘기하듯이 신문 없는 정보, 정보없는n 신문, 어느 걸 택하겠느냐? 이런 정보 없는 신문, 이런 진부한 얘기가 아니라 적어도 페어(fair)하고 정직하자 이거에요. 읽을 거리 많고 그렇게 어려운거 아니에요. 그러고 신문이요 다분이 영감적인 것도 많아요. 밸류 같은 것도 아, 이거가 크다, 하면 신문 전문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해요. 오래 신문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면담자 : 이게 주간진데 한번 발행할 때 어느 정도 발행을 하십니까
구술자 :7천부 발행해요.
면담자 : 7천부 발행이요. 시카고 이 지역에...
구술자 :이 지역에. 여기 인디아나 가까운데 아이오와, 샴페인 대학교 있는 데 스프링필드 이런 데 보네요. 디트로이트도 보내지, 글로써리 몇 군데. 이 우리 처남이라는 친구는 인제 업무 사이드, 광고, 직배 같은 거 이런 거는 내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우리 그 발행인 아이디어에요. 직배 시스템. 이 친구가 세일즈를 했기 때문에 이런 거에 아주. 특징이 이런 거 광고 안하거든요. 집안 가정 것들 이게이게. 주간지는 더군다나 안 주는데. 이게 한미은행에 LA에 있는. 주간지에다 여태 광고한 적 없는데 갖고 왔어요. 뭐 그런 식이에요. 뭐 내가 쓴 칼럼인데 급허게 쓰느라고. 제대로 안 됐거든. 광고도 많은 편이에요. 현집이 깨끗하잖아요. 주간지가 삐라 같은 그런 게 없어요. 이거는 우리 일주년 행사 굉장히 성대하게 하드라고요. 그리고 이 독자투고도 아무나 안 내줘요. 선별해요. 여기는 여기 일간지 신문들이 독자 투고 보며는요, 습작하는 사람들 글 막 실어요, 대가인것처럼.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든. 어느 정도 수준이 있어야 되는데. 신문은 아무렇게나 맨들기에는 너무 귀중하다는 걸 잘 몰라요. 신문 제작자들이. 이렇게 짜깁기 해갖고 면 메꾸고 광고 해서 뭐 수입 올리믄 되는 줄 아는데 다 나오는 게 아닌데 열정도 있어야 되고, 정의감도 있어야 되고, 역사의식도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무슨 아이고, 월급이 작은데 근무시간이 그런데 그러면 신문사에 들어오면 안 되요. 어떠한 조건에서도 신문은 열심히 만들어야되고, 정직하게 만들어야 되고, 재미나게 만들어야 되고 그게 몸에 배어야 되고 그런 열정으로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 미국에 들어오셔서 거의 뭐 40년 정도가
구술자 :40년 이상 신문사에. 인앤아웃은 아까 좀 있었지만.
면담자 : 언론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렇게 해오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좀 있으시다면 앞으로 난 이거...
구술자 :신문은 인제 좀 접고 제가 책이 좀 많아요. 책이 아주 많은데. 두 달 전에 좀 먼데로 이사를, 먼데도 한 옛날 살던 데서 십분, 십오분. 리버티로 이사왔어요. 좀 멀어요. 그래서 인제 농장도 있고 이렇게 숲속인데 집에 한 여섯 채 있고 쪼금 커요. 인제 거기서 음악 듣고 책 쓰고 그 다음에 뭐 그런 거 하고 여행 많이 다니고 그 다음에 인제 그 동안에 여기 저기 잡문도 쓰고 다시 좀 자서전 정리도 하고 이제 좀 슬로우 다운 해야죠. 그니까 다시 무슨 봉사를 하겠달지 신문에 종사하겠다든지 그런건 인제 할 만큼 했어요. 지겹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라 아...나도 쉬어야 되니까. 나도 쉬어야디니까. 오늘 정기 체크업(check up: 검진) 이라 내과 의사 만났는데 딴땐 혈압이 120에 70이었는데 이번에 136에 80이라고 그더라고요. 많이 올랐잖아요. 그래서 역시 신경을 써서 그런가하는 생각도 들고. 요새도 제가 한 한 시간쯤은 옛날엔 뛰었는데 아픈 다음에는 그냥 걸어요, 좀 걷고, 수영 한 30분 하고. 태권도 일주일에 두 번 하고 근데 태권도는 자꾸 쉬고. 이사 갔기 땜에 도장이 멀잖아요. 그럼 그쪽으로 바꾸든지. 쉬든지. 해서 운동 열심히 하고, 책 많이 보고, 글 많이 쓰고 살았으면 해요. 그거 접고 좀 또 내면의, 안의 좀더 충실하고 싶어서 그래서 헨리 쏘로우(Henry Thoreau) 글 같은 거, 법정 글 다 대개 읽었지만 다시 좀더 음미하고. 법정 스님이나 또 왜 그런 거. 또 성경도 좀 가까이 하고. 그러고 살라고 그럽니다.
면담자 : 그 한국 나이로 하면 인제 올해로 선생님께서 춘추가 75
구술자 :아니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도요, 내가 저기 앉아서 저거 치는 아가씨, 한참, 굉장히 젊잖아요. 인제 피는 꽃인데 어제 같아요, 저랬을 때가. 어제 같애. 인생 그냥 지나가더라구요. 인생 지나가. 이거 딴 얘기지만. 나 스스로를 내 나이를 못 믿는 거예요. 나는 아직도 한 4,50대겠지 하고 사는 거예요. 직업 자체가 그렇지만. 어디 취재 갔는데 내가 뒹굴더래요. 나는 몰르고 그랬지. 열사람이 뭐 얘기한걸 받아썼는데 사진이 없어 하나하나 찍으려니까 밑바닥에서 뒹구는 거예요.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고. 나는 몰랐는데 남들이 딱 관찰한 거에요. 저 연배 드신 분을 이렇게 만들고 말이지. 근데 이게 인제 이 나이 더 지나서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마지막 불꽃을 태운 거죠.
면담자 : 미국에서 지내신 게 인제 절반 이상이 선생님 인생에.
구술자 :미국에서 산 시간이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많죠.
면담자 : 절반 이상이
구술자 :여기가 어떤 의미에서 고향이죠.
면담자 : 그래도 끊임없이 이런 언론 활동을 하시면서 한국의 뭐 민주주의나 민주화나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을 그쪽으로 갖고 계시는 부분인데
구술자 :버릴 수 없죠.
면담자 :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우리의 역사, 한국에 대한 소회라든지. 아까 방금 쫌 해주신 말씀과 유사할 수 있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선생님의 지나온 삶에 대한 소회를 마지막으로 간단히 해주시고 이 인터뷰를 좀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그러죠. 내 개인적인 소회 아님 한국 역사에 대한 거?
면담자 : 다 포괄적으로. 나눠서 말씀해주셔도 되고요.
구술자 :하여간 나이가 상당히 많은데도 지금도 현역으로 열심히 뛰었고, 후회가 없고. 또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뭐. 내가 조국을 비판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거고. 조국이 잘 되기를 바라고 내가 사실은 아까 제목 다는 데에 귀재라고 했는데 아...한국 남북통일 이런 신문을 한번 맨들어 보고 싶었는데 그건 우리 세대에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애요. 그거는 우리 세대에 이루지 못했드래도 내 생애에는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게 꿈이고 그 다음에 남은 생애는 정말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즐겁게. 매일 집에서 파티를 하고. 내가 친구가 많아요, 마당발이라. 파티하고 여행 많이 다니고 좋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노래듣고 책 보고 음악 듣고 또 그러고 싶어요. 이러고 뭐 통일을 얘기하니까 딴 얘기가 더 이상 할 게 없네요. (웃음)
면담자 : 뭐 지금 정정하시니까요. 연세에 비해 굉장히 정정하신대요.
구술자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하루가 다르다고 그래서 내일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면담자 : 선생님 방금 하신 말씀 다 선생님 됐으면 좋겠습니다. 긴시간 이렇게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감사합니다. 아무 소득 없이.
면담자 : 아닙니다, 그래도 말씀을 굉장히 잘 해주셔서. 저희가 좋은 조사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여행 중에 건강하시고 좋은 일 하시는데 언제 또 한국에 가면 김영진 의원하고 같이 식사하고 그래요. 아시는지, 모를 수도. 아무튼...어떻게 이번에 원내로 못 들어가셔 가지고...좋은 때가 있겠죠.
면담자 : 오늘 긴 시간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 또 구술일정이 있으시다니까 여기까지 하죠.
면담자 : 이상으로 육길원 선생님의 구술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병헌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이병헌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1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글렌뷰

□ 녹취록

면담자 :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이병헌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담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장, 어,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아침 9시 40분입니다. 예, 선생님 반갑습니다.
구술자 : 반갑습니다.
면담자 : 그 일단 선생님 쫌 태어나셨던 연도하고 고향을 좀 말씀을 좀 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예, 1947년 6월 6일생이구요 전라북도 임실이 고향이에요.
면담자 : 전북 임실...1947년 6월 6일이 호적생일인가요?
구술자 : 예, 그러니까 그래.
면담자 : 실제, 호적나이하고 실제 나이하고 연세하고
구술자 : 다르니까요.
면담자 : 그럼 실제 연세는 뭐 생년월일은 어떻게 되십니까.
구술자 : 실제는 1944년 6월 6일 생이죠.
면담자 : 44년. 3년 정도 늦게 올라갔네요, 호적이. 그러면 해방되기 전 해, 전 해에 태어나셨네요. 44년에 태어나셨으면.
구술자 : 그쵸.
면담자 : 너무 어렸을 때라 뭐 그
구술자 : 거기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요.
면담자 : 해방, 뭐 광복에 대한 기억은 좀 없으실 것 같고. 그 형제분이 어떻게 되십니까.
구술자 : 3남 2녀에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몇째시고요?
구술자 : 장남이요.
면담자 : 혹시 부모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어떤 좀, 선생님 아버님께서는 뭐 농사일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구술자 : 네, 상업을 하셨죠.
면담자 : 그 다섯 식구를 이렇게 좀 키우시는데 뭐 경제적으로 크게, 어렸을 때 좀 어떠셨어요?
구술자 : 아주 어려웠죠, 어려웠죠. 예. 그 어려웠던 시절 호박 따가지고 호박죽 먹었던 기억이 있고 그, 쑥 캐가지고 그 밀가루에 버물려서 그 먹었던 기억이 있고. 아주 힘들게 어렵게 살았죠.
면담자 : 형제간에 어렸을 때는 많이 다투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구술자 : 그런 일, 그런 건 없었고요.
면담자 : 나이차이가 좀 있었습니까? 아니면 뭐 장남으로서 그래도 쫌 이렇게.
구술자 : 3남 2녀 였는데요, 그렇게 뭐 2,3살 차이 쭉, 그렇게 차이가 나죠.
면담자 : 형제들과는 잘 어렸을 때는 잘 지내고
구술자 : 네 잘 지냈죠, 네.
면담자 : 가장 큰 장남 형이고 오빠고 해서 뭐 동생들 군기를 잡는다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구술자 : 그런 건 별로 없었던 것 같애요.
면담자 : 그 선생님 그러면 한, 한국 나이로 따지면
71세
면담자 : 일곱 살 정도에 인제 6.25 한국전쟁이 인제 좀 일어났는데 그때 6.25에 대한 좀 기억은 있으신가요?
구술자 : 기억이 그냥 총 매고 지어 다니던 기억, 그리고 국민 학교 때 북진북진 통일통일 휴전 반대 그 구호를 외치고 행렬했던 그런 기억만 있어요.
면담자 : 국민 학교 들어가서 6.25가 일어났나요, 아니면 6.25 가 일어나고 난 다음에 학교에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 그 전일걸요. 6.25가. 그 학교 다니기 전에.
면담자 : 혹시 그 국민 학교는 어디 국민 학교를 다니셨습니까?
구술자 : 성수 국민 학교
면담자 : 임실에 있습니까?
구술자 : 네 임실군 성수 국민 학교.
면담자 : 49년, 50년 한 그 정도에 입학을, 50년 정도에 입학을 하신거네요.
구술자 : 그랬을 거에요.
면담자 : 그,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물론 인제 호남지역은 그렇게 뭐 피해가 많지는 않았다고 저는 좀 들었긴 했지만 이런 전쟁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뭐 피난을 좀 갔다거나 그런 기억은 없으십니까?
구술자 : 예. 그런 기억은 없고 하여튼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거. 그런 기억은 있어요.
면담자 : 예. 뭐 특별히 어렸을 때 뭐 국민 학교 시절에 기억나시는 일화 같은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뭐 그런 건 없구요. 행진했던 것 북진북진 통일통일 휴전반대 그, 그거는 뚜렷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애요.
면담자 : 중학교는 어디에 입학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 전라남도 화순중학교.
면담자 : 어, 전북 임실에 계시다가 화순으로 이사를 가신건가요?
구술자 : 네 그랬었어요
면담자 : 이사는 언제 오시게 된 건가요?
구술자 : 중학교 때니까 한 60년대. 정확히는 모르겠는대요.
면담자 : 가족이 전부 화순으로?
구술자 : 예. 그렇죠
면담자 : 화순 중학, 전남에 있는 화순 중학교에 입학하셨고 그럼 고등학교까지 여기서 다니셨나요?
구술자 : 고등학교는 광주로 이사를 해가지고요, 조대 부고.
면담자 : 아 조대 부고. 또 그러면 조대 부고에 입학하신 게 한 1960, 60년인가요, 59, 60? 63년 정도 되신 것 같은데.
구술자 : 네 그 정도.
면담자 : 그 중학교 때 그러면 이제 60년 4.19가 그때 있었던
구술자 : 근데 저는 시골이라 참여를 안 했죠.
면담자 :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뭐 어디에 좀 관심이 많으셨나요? 선생님께서는. 좀 꿈이라든지 그때 당시에 뭐 중고등학교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좀 있던 분들도 계시고 좀 그러는데 선생님은 주로 관심이 어디에 있으셨는지?
구술자 : 정의를 굉장히 제 생활 신조로 삼은 것 같애요. 중학교 때도 그 선생님들이 잘못이 있으면 지적을 해버리고. 그런 정도의 정의감은 좀 투철했던 것 같애요.
면담자 : 주로 그런 에피소드 같은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에...중학교 시절에 그 학생회장 부회장이 도장을 가지고 결제를 해야만이 그 예산 지출이 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그 도장을 학생회장이 가져야 되잖아요. 부회장이 가져야되고. 그런데 그 도장을 선생님이 가지고 있어가지고 맘대로 찍고 그냥 예산 승인을 해버리고 쓰고 그런 일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따졌죠. (웃음) 그런 정도.
면담자 : 그래서 그게 어떻게 좀 잘...
구술자 : 네 시정이 됐죠. 선생님이 잘 못한 거니까. 저한테 잘못된 거라.
면담자 : 그러면 그 고등학교 다니실 때는 뭐 다른 어떤 특별한 기억같은 것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기억...
면담자 :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다든지 아니면...
구술자 : 어 그건,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어요. 못했고. 저 JYC 활동을 했어요.
면담자 : JYC활동이요?
구술자 :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화순 광업소 광부가 6명이 한뻔에 그 침몰되가지고 죽었거든요. 근데 JYC 단원들과 같이 광주 시내 모금운동을 해가지고 화순 광업소 위문 공연을 그, 했어요. 굉장히 기억에 남고.
면담자 : 그 JYC라는 단체, 동아리,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좀 잠깐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주니어 레드크로스(Junior Red Cross)라고 하는데요, 그 봉사활동이죠. 학생 봉사활동.
면담자 : 그럼 인제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나서는 어떤 일을, 뭐 대학으로 진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대학 진학은 안 했어요.
면담자 : 사회 생활을...
구술자 : 사회 생활을 했죠.
면담자 : 졸업, 고등학교 졸업 연도는 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구술자 부인: 68년
구술자 : 68년? 제가 좀 학교를 늦게 다녔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가지고, 예. 68년 정도.
면담자 : 68년 정도에 졸업을 하시고 바로 직장 생활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 예, 상업, 상업을 했죠.
면담자 : 어떤 일을 하셨나요?
구술자 : 조류, 조류를 제가 취급했어요. 새
면담자 : 아, 새요. 네. 그 일을 쭉 하시다가, 하셨던겁니까? 아니면 주로 뭐 하시는 일이...
구술자 : 예. 그 일을 하다가 인제 이민 왔죠.
면담자 : 이민은 언제 여기 오시게 되셨나요?
구술자 : 76년도 1월 달에 여기 왔거든요
구술자 : 76년 1월이요.
면담자 : 뭐, 그 생활을 하시다가 이민을 이렇게 결, 이민을 가야겠다 그런 계기가 있으셨나요? 이민을 결정하게 된 계기랄까 그런?
구술자 : 별로 형편이 넉넉지 못하니까 좀 잘살아보기 위해서 미국에 온 거죠.
면담자 : 그때 뭐 미국에 어떤 연고가, 아는 분이 계셨나요?
구술자 : 예. 제 여동생이 시민권자여가지고.
면담자 : 여동생이 먼저 미국에 오셨던 거네요.
구술자 : 예. 그렇죠.
면담자 : 그때 당시에는 다들 저희, 우리나라가 못 사는 나라였다보니까 여기저기 많이 해외로 산업, 흔히 그때 박정희 정권 때 산업일꾼이라고 해서 간호사들도 많이 파견하게 되고 독일 같은 경우는 광부들도 이렇게 많이 파견하게 되고 그런 좀 상황이었었는데 여동생분은 뭐 여기에 직업으로, 직업인으로 파견이 되셨나요?
구술자 : 그냥 이민으로 왔어요.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 76년
구술자 : 1월달
면담자 : 이시면 우리 나이로 서른 셋 정도 됐을 땐데 결혼은 그 전에?
구술자 : 그 전에 해가지고 왔죠. 한국에서.
면담자 : 연애, 연애 했죠.
구술자 : 아, 중매결혼 아니고 연애결혼
면담자 : 그때는 연애결혼이 그렇게 흔했었나요? 중매, 저희 아버지 세대들 보면 중매결혼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구술자 구술자 부인: 연애 결혼을 많이 했었어요.
면담자 : 아, 그래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사업하다, 사업하시면서 만나셨나요, 아니면 뭐...
구술자 : 학교 다닐 때부터 같은 집에, 그 제가 자취를 했거든요. 근데 거기서 만나가지고. 나한테 잘해주시더라구요. 그래서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했죠.
면담자 : 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자취를 하셨나요?
구술자 : 예. 자취 했죠.
면담자 : 집이 광주였는데
구술자 부인: 아니 화순
면담자 : 아 화순이는 집이 오셨고 선생님은 유학, 광주로 유학을 오신건가요?
구술자 : 네, 고등학교 때.
면담자 : 기억이 맞으십니까? 기억이 서로 다르면 매우 곤란한데 (웃음)
구술자 부인: 제가 더 정확할거에요.
구술자 : 정확해.
면담자 :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때 뭐 이민을 오실 때는 사모님하고 두 분만 건너오신건가요? 아니면 슬하에 자녀들이 계셨나요?
구술자 : 둘, 남자 애들 둘 데리고 왔죠.
면담자 : 남자 애 둘. 처음 그, 들어오셨을 때 시카고로 처음 들어오셨나요?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오셨나요?
구술자 : 아이오와, 아이오와에 쪼끔 살다가 시카고로 왔죠.
면담자 : 죄송합니다, 어디?
구술자 : 아이오와
면담자 : 아이오와. 어디에 있는 건간요? 제가 미국 지리를 잘 몰라가지고.
구술자 구술자 부인: 시카고보다 서쪽 미시시피 서쪽에 있어요.
면담자 : 아, 들어오셔서도 그렇게 좀 뭐 인제 그런 경제활동을 하시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셨을텐데요..
구술자 : 예. 처음 이민을 왔을 때 공장에 심부름꾼으로 일을 했죠. 기술도 없고 영어도 못하니까
면담자 : 어떤 공장이었나요?
구술자 : 그 스크루, 그 비스라고 하나요? 스크류. 나사못 만드는 공장이었죠.
면담자 : 처음에 좀 들어오셔서는 다른 생활 뭐 다른 민족들 언어도 좀 안 통하고 어려움이...
구술자 : 어려움이 많았죠. 왜냐면 기술도 없죠, 경험도 없죠, 간단히 말해서 공장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거에요. 헬퍼, 헬퍼로 들어가가지고 거기서 한국 분들은 영리하잖아요. 눈여겨봐가지고 기술을 배워서 기술자가 된 거요. 그, 그래가지고 인제 사는 거죠.
면담자 : 지금도 뭐 좀 그런 게 있습니다만, 70년대 당시만 해도 그, 특히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좀 그런 부분들이 보이지 않게 있었을 것 같긴 한데. 좀 그런 차별이나 서러움이나 그런 건.
구술자 : 예 차별이 있었죠, 분명히. 영어를 못하니까, 영어를 못하니까. 근데 저희 공장에서는 굉장히 대우를 받았어요. 왜냐면 한국분들이 열심히 노력을 하고 일을 열심히 하잖아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굉장히 크레딧(credit: 신용)이 좋았어요. 한국분이면 누구든지 데리고 가면 그냥 취직 시켜줘 버리고 그런 정도로 참 신임이 두터웠어요.
면담자 : 지금 말씀하신 그 나사못을 만드는 공장은 아이오와에 있었습니까?
구술자 : 아니요, 시카고, 시카고였어요.
면담자 : 처음 아이오와에서는...
구술자 : 거기서는 쪼끔 살다가 그냥 이렇게 잡도 없고 그러니까 큰 도시로, 시카고와 왔거든요.
면담자 : 그 뭐, 누님이, 아니 여동생이 여기 계시, 계셨다고는 하는데 처음 들어왔을 때 뭐 집이라든지, 사는 집이라던지 그런 부분들은 어떻게 해결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 어, 이제 방 얻어서 살기 시작했죠. 아주 싼 방. 얻어가지고 저는 밤일하고 와이프는 낮일하고 그렇게 해서 인제 돈을 쪼끔씩 모아가지고 집을 사고 그 다음에 인제 조금 더 모아서 장사를 시작했죠., 사업을.
면담자 : 그럼 시카고로 오셨을 때도 76년인가요? 아니면 76년 1월에
구술자 부인: 76년 그 아이오와는 시골이기 때문에요.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어요. 그니까 어떤...
구술자: 영어를 못하니까
구술자 부인: 거의 백인들이 사는 시골동네였기 때문에 저희가 76년 7월 달에 시카고로 왔어요.
면담자: 실례인 질문인지 모르지만 사모님은 어떤, 그 밤일을 하시고 낮일을 하셨다고 했는데...
구술자 부인: 76년만 해도 이, 거의가 오며는 처음부터 공장에 가서 일할 생각들을 하거든요. 그러니까는 이, 특수한 널스(nurse) 되시는 분들은 오셔가지고 이제 시험공부, 아예 시험공부를 하셨고. 그러지 않는 경우는 그때는 무슨 한국 사람들의 상관이 많이 그, 되어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하니까 미국 공장에 들어가는 게, 그때는 미국에 오면 그래가지고 인제 돈을 조금 모으시며는 세탁소로 쪽으로 이렇게 진출을 많이 하실 때고 그때는, 76년도만 하더라도 세탁소도 그렇게 많이 하신 분들은 없었고 거의가 다 공장에 가서 생활할 때니까 저희도, 저도 인제 낮에는 공장에 가서 일했고 남편도 밤에는 공장에 가서 일했고 애들이, 어린 애들이 둘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야 베이비시터 나가는 것도 우리가 절약할 수가 있고, 그래가지고 살았죠.
구술자: 어렵게 살았죠
면담자 : 그때 시카고에, 아이오와에 계시다가 시카고로 옮기신 이유가 물론 인제 아이오와는 워낙 작은 도시고 그런데, 시카고, 굳이 시카고로 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술자 부인: 시카고가 가장 가까운 큰 도시였어요.
구술자: 잡도 많고
면담자 : 그때 당시 오셨을 때 여기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좀 있으셨나요, 상당수?
구술자: 있었죠
구술자 부인: 한국인들이 꽤 있었죠 그때 말이 한 2만명 됐으니까
면담자: 그 때 당시만 해도 한인 사이의, 사회, 한인들끼리의 교류가 있었습니까
구술자 부인: 있었어요. 한인 사회, 한인, 한인회도 있었고
구술자: 한인회도 있고 있었죠.
구술자 부인: 한국일보가 있어가지고 한국일보에서 연말이이며는 한 번씩 영화를 상영했던 것 같아요. 네이슨 하이스쿨(Nathan Highschool)이라고 큰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그러며는 그때 시카고에 사시는 한국 분들을 전부 만나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었어요.
면담자: 선생님께서는 76년에 이렇게 시카고로 오셔가지고 인제 그런 공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몇 년 정도 공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개인사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구술자: 한 10년 일을 했죠. 기술자가 되어가지고 돈도 제대로 받고 한 10년 일하다가 비즈니스를 시작했죠.
면담자 : 면담자 : 그러면 공장에서 일을 하시는 사이에 어찌보면 80년 광주를 맞이하시게 된거네요?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 쫌 여쭤보겠는데요, 처음에 광주에, 80년 5월에 광주에 대한 소식이나 그런 것은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구술자 : TV, TV 보고 알았죠. TV에 나왔으니까.
면담자 : 미국 방송이었죠?
구술자 : 그렇죠, 미국 TV죠. 그때는 한국 방송은 없었으니까.
면담자 : 그 미국 그런 뉴스나 방송에서 나왔던 광주 문제에 대한 보도 형태라고 해야 되나요? 어떻게 좀 미국 언론에서는 광주 문제를 좀 보고, 바라보고 있었는지 좀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영어를 잘 이해를 못하니까 뜻을 정확히 모르지만은 그 그냥 막 폭력적인 것, 던지고 뚜드려 패고 그런 게 나왔거든요. 그걸 보고 제일, 정말 분개했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80년 그때가 5월일거야
구술자 부인: 5·18이니까. 이 미국 테레비에서요, 그러니까 광주 시민들을 나쁘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그렇게 무차별 그, 폭행하고 공격하고 그러는데 너무나도 화면이 리얼했어요. 정말 그 광주 시민들을 구타하고 광주 시민들한테 이, 막 잔인하게 하는 모습을 저희는 그대로 다 봤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저는 또 광주사람이고 하면서 굉장히 분노를 느꼈구요. 이, 정말 그렇게 억울하게 광주 시민들이 당하고 있는, 글구 제 친정 식구들도 다 광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 그래서 굉장히 분노를 했고 저희가 그 방송을 보면서 굉장히 광주 시민으로서 그리고 광주가 그때 당시에 많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요. 저는 태어나서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살다가 이렇게 미국으로 와가지고 광주의 그 모습을 보니까 굉장히 많이 아팠는데 그때 인제 저희가 그 뉴스랑을 보면서 5·18이 5월 18일엔가 났잖아요? 한 일주일 후엔가 그 주일날 저희들이 광주 분들한테 연락을 해가지고 그때 당시에 로렌스에 있는 알바니 뱅크(Albany Bank) 파킹랏에서 저희가 시위를 했어요. 저희가 시위를 하면서 막 플랭카드도 쓰고 전두환 찢어 죽여라, 뭐 전두환이 화형시켜라 하면서 저희가 시위하고 데몬스트레이션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구술자: 예. 그때 지금 다 가고 몇 명 남은 사람들만 찍고. 그때만 해도 없이 살기 때문에 카메라 가진 사람들이 없었어요..
면담자 : 아 이게 80년, 네.
구술자 부인: 그때 그 데모했던, 알바니 뱅크 파킹랏에서 데모했던 사람들 몇 명이에요.
구술자: 다 가고 몇 명 남은 것만 좀 찍은 거예요.
(사진제시)
면담자:선생님이 어디계신가요?
구술지: 여기여기
면담자: 가운데 계신 분?
구술자: 파란옷 입고. 와이프도 있고 애들도 있고
면담자: 아아, 예.
구술자 부인: 앞에 있는 쪼그만 남자애들 둘이가 저희 아들. 그리고 그때 그 유모차에 타고 있던 애가 벌써 34살 먹은 청년이구요.
면담자: 그, 당시에 인제 선생님께서는 물론 여기 오셔서 열심히 살아가기, 경제활동을 좀 하고 살아가시기 위해서 공장에서 일도 하시고 그런 인제 활동들을 하셨는데, 한국의 정치 상황 그때 박정희 정권 말기였었고 인제 70년대 후반이면 말기였었고 한국의 정치상황이라든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서도 여전히 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관심을 가졌죠. 그 유일하게 시카고 여기 영사관 앞에서 데모한겁니다.
(자료사진제시)
구술자 : 없이 살아가지고, 사진을 많이 남겼어야 되는데 사진기 가진 사람, 그때 당시 그렇게 없었어요.
면담자 : 죄송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못찾겠어서 그런데 선생님 어디에?
구술자 : 여기요, 여기.
면담자 : 예. 너무 젋으실 때 사진이어가지고 제가.
구술자 : 영사관 앞에 데모 이거 뒤에 써졌어요. 이것도 내가 한 게 아니라 누가 보내준 거예요. 유일하게 남은 건 그것, 그것밖에 없어요. 데모도 많이 했고 서명도 많이 했고.
면담자 : 이게 보면 4.13 개현, 보류, 개헌 유보 규탄 시위라고 되어 있는데 이때가 그러면 4.13 개헌이면 78년인가요, 9년인가요? 한 그쯤...
구술자 : 그 정도 될 거에요.
면담자 : 5·18전에 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선생님 그 TV를 통하여 처음으로 그걸 접하게 되었라고 했는데 이 시카고에서도 제가 그런 대규모 시위가 방금 말씀하신 로렌스 쪽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근데 그렇게 조직적으로 시위를, 시위를 개최를 어떤 식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가지고 쫌 그 시위가 일어나게 된 건가요?
구술자 : 그 시위는 주로 그 UIC(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대학생들이 주동이 됐어요. 그 어른들이 아니라 융학생들이, 그 UIC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가지고 그 시위를, 민주 단체하고 같이 했죠. 근데 그때는 누가 신문도 나지도 않고 했는데도 그렇게 많이 모였어요.
면담자 : 어느 정도 모였었나요? 대략적으로요.
구술자 부인: 그런 거 안 나왔어.
구술자 : 아, 신문에 그때 6백명 인가 그렇게 모였다고. 그 전두환 화형식도 했었어요, 공원에서.
면담자 : 이때 로렌스에서 첫 시위가 일어났던 때가 언제인지혹시 기억하시나요? 몇 일인지.
구술자 부인: 5·18 나고 일주일, 아무튼 계속 한국 시위가. 한국의 뉴스도 계속 5·18
구술자:그때 5월 달일거에요.
구술자 부인: 광주 사태가 미국에서 보도 되고 있을 때 시위는 5월, 아무튼 5월은 넘기지 않았어요. 5월달에 했어요.
면담자: 주로 그때 시위에서 뭐 이렇게 주로 인제 한국인들이 인제 모여 갔겠지만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이렇게 하셨는지요.
구술자:전두환 찢어죽여라 그런, 이 구호도, 이거 하나 프랜카드가 하나 그걸꺼에요. 근데 지금 오거는 그, 학살하지 말라고 들고 있죠, 또 하나. 그게 그걸꺼에요. 전두환 찢어죽여라고 까지 썼으니까. 플랜카드를 지금 요리 들고, 들고 있잖아요. 요 우게 그렇게 써졌을꺼에요, 아마. 예, 개를 썼는데. 하나는 이렇게 쓰고. 다 가고 나머지 몇몇이만 찍은 거에요. (웃음)
면담자 : 그때 LA 같은 경우도 보면 뭐 그 대규모 시위가 뭐 6월 1일, 8일 해가지고 LA에서도 좀 일어났었는데 그때 보면 공식적으로 그때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었지만,
구술자 : 없었죠.
면담자 :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었지만 호남 사람들이 모여서 그걸 할 때, 그, 그 때 당시는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었지만 호남향우회라는 명칭을 그때부터 썼던 것 같아요. 정식적인 단체는 아니었지만 그 이제, 단체명을 넣기 위해서. 시카고에서 선생님도 인제 호남향우회, 이쪽 지역에서 회장을
구술자 : 창립 멤버죠
면담자 : 네, 그때 당시 뭐, 시카고에 호남향우회라든지 그런 지역 어떤 한인단체가 있었던 건가요?
구술자 : 근데 77년도에 창립했거든요.
면담자 : 아, 호남향우회가요?
구술자 : 호남향우회가 미주에서 제일 먼저 창립했어요. 시카고에서.
면담자 : 아, 77년에 창립을, 초대 회장님이신가요?
구술자 : 아니죠. 그때는 총무, 한 8년간을 총무를 했어요. 나이가 어리니까, 30대니까.
면담자 : 그때 처음 77년도에 창립됐을 때 여기 시카고에 호남향우회, 호남지역의 분들, 향우회에 가입 되신 분들이 한 몇분 정도 되셨나요?
구술자 : 가입이 아니라 그냥 여기는 가입이 없이 전부 호남인이면 누구나 다 회원, 그렇게 개방 됐었거든요. 근데 인제 주로 임원진들이 활동을 하고 했었죠. 초대 회장이 김성곤 회장님.
면담자 : 여기 시카고에 좀 거주했던 호남분들은 한, 수가 어느 정도 됐을까요?
구술자 부인: 연말파티하고 하면
구술자: 영남향우회하고 비슷하죠. 근데 많죠, 다른 타도에 비해 그, 분들보다는 호남이 많아요. 영남 호남이 많아요. 그래가지고. 근데 그 호남 향우회가 있어도 그렇게 그 단체명의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5·18 행사에 참여하거나 그런 게 없었어요. 없었기 때문에 주로 한청련 주최 호남 향우회 후원 이런 식으로 했는데, 영사관하고 연결이 되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아요. 저 혼자, 저 혼자. 그니까 총무 8년을 하다가 뭐 회장, 부회장, 이사장 고문, 안 한 것이 없이 했는데 제가 10주기에 회장을 맡아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한청련 주최 호남 향우회 후원, 이게 군사 독재에서 발원한 바지 않아요, 광주 5·18 행사를. 그게 한이 맺혀가지고 10주기 때 범교포적으로, 이 행사를 제가 치렀던 거죠.. 이거, 이건 제가 드렸죠?
구술자 : 예,예.
면담자 : 다른 지역 뭐 이렇게 다. 연합해서 이게 신문에서도 정말 성곡, 성공적 마감이라고 타이틀을 붙였잖아요. 이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예요. 왜냐면 평통 회장 겸 한인회장을 내가 참석하게 만들었으니까. 영사관에서 얼마나 부총영사가 전화를 하고 만나자고, 한번만 만나달라고. 우리는 뭐 공무원이지 않습니까. 예? 대단히 정말 영사관 그 자존심 꺾어버린 거죠. 상상도 못할 일을 한 거예요. 전미주역에서 이렇게 그 군사독재시절에 이렇게 행사를 한 데가 없을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참여를 안 해. 영사관하고 평통 회장하고는 완전히. 그거 아시잖아요? 감히 어떻게 상상도 못할 일을 해낸 거예요. 그러지만 사람들이 볼 때 아, 다 참석해서 했네, 한인회도 참석했네, 그런 정도로 알지 깊은 뜻을 몰라요, 제 뜻을 몰라요, 왜 이렇게 했는가를. 이렇게 해, 함으로 해서 5·18이 인제 순수한 민주화정신이 깃든 단, 행사다, 하는 인식도 가지게 되고. 그 전에는 그 몇 명 참석도 않고. 왜냐면 한청련이 그때 당시에는 반국가 단체로 인정받았잖아요. 그래서 나쁘게 말하면 반정부 단체, 지금같이 빨갱이 종북 이런 얘기는 없었으니까. 그 종북, 그 저 반정부 단체 해가지고 사람들이 안 와요. 사람들이 참여를 안 해요. 그 뒤로 인제 내가 하니까 각 도민회 참석하고, 한인회장 평통까지 이렇게 참석하고 하니까 인식이 달라진 거죠. 확 달라진거죠. 그래서 신문에서 그때 당시에, (자료 제시) 10주기 때 신문에 이렇게 낸다는 것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아닙니까? 이렇게 크게 신문에 내준, 내준다는 것은 진짜 힘든 일이죠, 그 정도로 썼으니까.
면담자 : 이게 지금 시카고 인가요?
구술자 : 그렇죠. 시카고. 10주기때 행사 이렇게 끝나고 이렇게 해준 거에요. 이거 엄청난 거죠. 군사 독재 시절아닙니까? 노태우때.
면담자 : 다시 쫌 80년 5월 상황으로 좀 돌아가서요, 로렌스 지역, 정확히 그 시위가 일어났었던 지명이 뭔가요? 로렌스, 뭐 어떤 로렌스라는 이 지명이 지역 이름인가요?
구술자 : 네, 그때 당시에는 한국인들이 거기, 그쪽으로 많이 몰려 살았어요.
면담자 : 시위 장소는 그럼...
구술자 : 알바니 뱅크라고 뱅크 파킹랏에서 했거든요.
면담자 : 이게 계속 연속적으로 그 이런 항의 시위가 있었나요? 아니면 일회로...
구술자 : 그때 일회로 끝났죠. 일회로 끝나고 1주기 추모식을 민주 단체가 있었어요, 거기, 거기서 주최를 했죠.
면담자 : 호남향우회는 인제 후원이라...
그때 당시에 호남향우회 후원은 없었고 조선대학 제가 추모사를 읽었거든요. 그런 정도 였지 호남향우회가 있기는 있었어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를 안 했어요. 영사관하고 그냥 굉장히 광고 동창이고 뭐 이런 식이 되니까. 저 혼자만 악쓰는 거죠, 총무가. 힘이 있어야죠, 총무가 힘이 없잖아요. 회장이 힘이 있고 그런 식이었어요. 호남향우회라고 해서 그때 당시 적극적으로 그런 거 없었어요, 조직적으로.
면담자 : 선생님께서 그 호남향우회 회장이 되신 게 언제였었나요?86년 7년 그 정도였나요?
구술자 : 제가 두 번을 했거든요. 10기 11기 두 번을 했어요. 80, 88년부터 92년까지 4년간 했을 거에요.
면담자 : 그러면 이제 10주기 행사를 이렇게 범동포적으로 이렇게 다 같이 진행을 할 때 선생님께서 회장을 하신거네요.
구술자 : 제가 회장이니까. 감히 엄두를 못 내죠.
면담자 : 그 10주기 이 추모제를 범동포적으로 기획하시게 됐던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구술자 : 그 계기는 제가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한청련 주최, 호남향우회 후원. 그러니 한이 맺힌 거죠. 동포들의 인식도 완전히 반정부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 또 군사 독재시절이잖아요. 전부 아부하려는 사람만 있지.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어요. 그래서 한이 맺혀서 제가 그렇게 크게 기획을 했던 거예요.
면담자 : 그 다른 좀 단체들이 이렇게 같이 하자고 이렇게 했을 때 거부반응을 보인다거나 그런 건 없었습니까? 아무래도 그때 당시만 해도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영사관의 압력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구술자 : 분명히 있었죠, 분명히 있었죠. 여기서 지금 평안도민회 한군데만 제가 후원으로 못 넣었어요. 거기는 철저하게 반대를 하더라고요 평안도민회가 빠졌어요. 제가 전화를 했는데 아주 선을 완전히 그어버리더라고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는 다 들어가어요. 설득을 시켰죠. 이 평통 회장을 설득시켰다는 거는, 이거는 대단히 어려운 거에요, 영사관하고 어떤 관곈데. 평통 회장 겸 한인회장이 참석을 했잖아요. 그거는 제가 힘들었어요. 그러지만 해냈어요. 그니까 일반 사람들은 이것보면 그냥 많이 참석을 했네, 이 정도지만 저는 깊은 뜻이 있었어요, 깊은 뜻이.
면담자 : 그럼 이렇게 많은 단체분들이 후원해주시고 하면 이게 규모도, 추모제에 참가하셨던 규모도
구술자 : 2백여명 참석했다고
면담자 : 보통 그럼 이런, 해마다 인제 추모제를 쫌 계속적으로 해오긴 했지만 10주기 이렇게, 그 전까지는 뭐 한청련이 인제 주최로 진행됐었고 10주기 때는 이렇게 그, 다같이 범동포적 화해가. 근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또 이게 계속적으로 지속이 돼었었나요?
구술자 : 제가 회장 할 때는 그렇게 됐지마는 아무래도 숫자가 적어지고 또 활동하는 그 회장단들이 쪼끔 나하고는 쪼끔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쪼끔 축소되고. 그 점점 인제 지금에 와서는 쪼끔 더 잊혀져 가는 그런 행사가 되고 있어요, 사실.
면담자 : 물론 이제 이건 인제 한국사회, 지금 한국사회도 좀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동포 사회도 그런 좀, 북한 남한 이렇게 따지는 뭐 이렇게 이념, 그런 이념보다도, 약간 그 한국, 남한 안에서도 약간 좀 친정부적인 성향과 조금 인제 반 정부적인, 독재정권에 반,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그 걸로 나눠져있는 성향이었나요, 동포사회도. 그런게 좀 강했었나요?
구술자 : 이 동포 사회는 심하죠. 이 시카고 유독 더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지금, (자료 제시) 참 시카고 지역이요, 이 전면 광고를 뭐 이것이 한두 번 낸 것이 아니에요. 전면광고를. 이런 식으로. 이, 지난번에 민주연대 만나셨지? 저녁에.
면담자 : 그니까 그 한국도 지금 쫌 비슷한 것같아요. 매년 쫌 그런 사람들의 호응이나 관심이나 열기가 식어가.
구술자 : 쪼끔씩 줄어드는 것 같아요. 5월 17일날 광주 금남로에서 저희는 대대적으로 전야제, 5·18 추모 전야제를 하는데
구술자 부인: 나는 갔다왔어요 30주년. 그래가지고 그 상도 받아가지고 왔거든요
면담자 : 근데 갈수록 전야제를 딱 가보면 금남로에 나와있는 시민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 같애요. 쫌 그런 것이고 요즘 인제 또 정권이 바뀌면서 워낙 이런 민주화 운동을 했던 당시의 이런 것들이 이게 탄압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좀 그래서. 좀 이게 많은 힘든 일이 한국에서도 똑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뭐 LA, 아니 LA에서도 쫌 그런 느낌을 받긴 받았었는데 시카고에서도 좀 그런 동포사회의 문제들로 인한 갈등들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좀 그런 부분들은 좀 그런 행사를 주최하고 했던 관심을 가져주셨던 선생님 입장에서는 좀 아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좀 그랬을 것 같은데.
구술자 : 아쉽죠. 그런, 어디까지나 그 한국 민주화를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이고 그런데 그 뜻을 이해를 못하고 한다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이죠. 슬픈 일이고. 저는 뭐 앞으로도 계속 참여를 할 거고 관심을 갖게 될 건데. 참 아쉬운 점이 많아요. 시카고 지역도 한국 옛날 그 정책이 군사 독재가 뭐 반정부로 몰아붙였는데 지금은 빨갱이로 몰아붙이려고. 신문에 그렇게 흐름이 그렇게 흐르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그 참여를 하거나 뭐 북한을 왔다갔다 하거나 뭐 민주화 단체라고 해서 활동을 하면 빨갱이로 몰아버려요. 그러니 설 자리가 없죠. 참여를 했던 사람들도 빨갱이란 말 듣기 싫잖아요. 참여했다가 빠져버리고. 굉장히 그런 상태에요, 지금. 그런데 인제 그, 친북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가 문제는 문제에요. 왜냐면 그 윤길상씨라고 하는 분이 회장인데, 그 단체가 6.15도 장악을 하고 있어요. 6.15. 또 시카고 지역 같은 경우는 민주연대도 그 사람들이 장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시카고 지역에서는 빨갱이 단체로 알아요. 빨갱이 단체로. 내가 우려되는 것이 지금 그 뭐, 우리 5·18재단이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람들을 혹시라도 쫌 취재를 하거나 그 기록으로 올린다는 거는, 기록으로 올리는 건 좋겠지마는, 이미지가 굉장히 나쁠 거에요. 왜냐면 재향군인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를 했어요. 3명이 북한에 가서 충성서약을 하고 왔다. 그 멤버가 민주연대 멤버에요. 나는 이 사실을 알려만 드리는 거니까 참작하시라고요. 북한을 오고 가는 거는 저는 통일을 원하기 때문에 저는 얼마든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또 그분들이 북한을 갔다와서 정보도 많이 줘요. 제가 알기론 그래요. 그런데 충성 서약을 했다는 것은 이거는 쪼끔 경계를 해야되거든요. 제 자신도 그래요. 그 사람들이 하는 행사나 이런 거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허지만 충성 서약을 하고 와가지고 동포 사회에서 활약을 한다면 이거는 쪼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닝에요? 그게 현실이예요, 사실이예요. 시카고 지역이. 동포 연합이라고 하는 단체가 윤길상씨가 회장인데 시카고가 굉장히 제일 활성화 돼있어요. 친북 단체죠. 시카고 지역이 제일 활성화 있어요. 그래가지고 6.15도 둘로 나눠버리고. 둘이에요. 미국 위원회도 둘이고 이 시카고 지역도 둘이에요. 저도 그 뭐, 초대 공동의장을 했고 했지만 그런 현실이예요. 그러니까 동포 사회에서 인정을 받겠어요? 못 받죠. 그니까 몇몇 사람 때문에 이게 물의를 일으킨 거예요. 이미지를 확 바꿔버린 거에요. 할 말이 없잖아요. 할 말이 없잖아요.
면담자 : 알겠습니다. 선생님, 다시 좀 5·18로 관련된 이야기로 좀 돌아가서 그 이후에 80년 이렇게 당시에 로렌스 그쪽에서 알바니아 뱅크 주차장에서 시위를 하고 그 이후에, 그 이후에는 5·18관련된 어떤 좀 활동들이 시카고 지역에서 있었나요? 예를 들어서 위령탑 뭐 건립 위원회, 추진 위원회 그런 것도 제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구술자 : 5·18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정식으로 있었죠.
면담자 : 그게 언제 생긴건가요?
구술자 : 그게 제 생각에 한 82년도? 5·18, 83년도 정도 조직을 했어요.
면담자 :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뭐 위령탑 건립, 그게 꼭 시카고 뿐만 아니라 미주 전체에 좀 생겼던 건가요?
구술자 : 그게 그런 조직이 아니었고 시카고 지역을 위주로 해서 우리 단독으로.
면담자 : 그걸 어디에 5·18 위령탑을 어디에 세우기 위한 목표, 목표라면
구술자 : 광주
면담자 : 광주에요? 이게 뭐 쫌 어느 정도 모금운동...
구술자 : 모금운동 했죠. 그래가지고 김대환씨가 회장이고 제가 부회장이고. 그 다음에 서재정이라고 지금 교수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이 총무고.
면담자 : 이 모금 운동을 여기에서 좀 하셔가지고 이게 좀 성공적으로 좀 뭐가...
구술자 : 많이는 안 걷혔고요. 제가 알기로는 그때당시 2천불 미만일거에요. 한국으로 홍남순 변호사님한테 보냈어요,
면담자 : 근데 이게 홍남순 변호사님한테 보내시고 어떤 형식으로 이게 사용이 되었는지는 혹시 또 알고 계신가요?
구술자 : 사용 내력은 모르죠. 그리고 그 뭐, 받았다는 고맙다는 얘기도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일단 우리 목적은 위령탑 건립을 추진해달라는 의미로 모금을 해서 보낸 거죠.
면담자 : 쫌 이런 게, 어찌 보면 좋은 어떤 뜻에서 이렇게 모금운동도 하고 했는데 어, 위령탑 건립에 쫌, 목적이 위령탑 건립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실질적으로 위령탑 건립이 광주엔 안 됐단 말이에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 모금 한 것을 어떻게 쫌 사용을 했는지 쫌 이런 궁금증이라든지 그런 뭐 홍남순 변호사가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게 전혀 없나요?
구술자 : 전혀 없죠. 고맙다는 편지 한 장도 없었으니까.
면담자 :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가요?
구술자 : 그렇죠 답이 없었으니까. 근데 보내기는 분명히 보냈죠. 우리 단체 명의로 보냈죠. 근데 10주기 때 그 즉석에서 모금한 돈, 1불, 2불씩 해가지고 566불인가 그거는 명노근씨한테 보냈어요 그랬더니 광주 일보 편집국장님이 참 고맙드라고요. 편지까지 써가지고 영수증까지 해가지고 보냈더라고요. 광주일보 앞으로 보냈었거든요. 공해성씨라고 그분을 제가 30주년에 식사라도 한 끼 하려고 찾았더니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공해성 편집국장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 광주 일보 신문에 내주고 또 영수증 까지 보내주시고 또 편지까지 써가지고 보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정말 그분은.
면담자 : 그 인제 선생님께서는 뭐 시카고 지역의 호남향우회 회장도 하시고 또 제가 듣기로는 시카고 민통연합?
구술자 : 민통연합 부회장. 젊었을 때니까 부회장.
면담자 : 또 하시고 방금 얘기하는 10주기 때 이런 행사도 주도적으로 하시고 하셨는데 제가 민통연합에 대해서는 제가 내용을 좀 잘 몰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 좀 한번 좀 여쭤볼려구요. 선생님께서 이런 5·18부터 해서 민통연합 부회장님도 하시고 이런 인제 동포 사회 운동을 열심히 좀 참여를 하게 되었, 되시는데, 지금도 뭐 활동들 쭉 하고 계시고. 이게 선생님이 예전부터 이런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좀 가지고 계셨나요? 아니면 하다보니까 이런 방향이 선생님을 이렇게, 이런 운동을 하게끔 이렇게 이 사회가 만든건가요? 아니면 선생님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좀 있으셨나요?
구술자 : 원래 정의감이 좀 투철한 것 같아요, 제가 판단하기에. 그러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 성격이고 또 바른 말을 제가 분명히 해요.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그렇게 참여를 했던 것 같아요.
면담자 : 민통연합이라는 그 단체는 어떤 단체인가요, 선생님.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요?
구술자 : 어,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그 인제 세미나도 하고 데모도 하고 서명도 받고 그런 일을 주로 했죠.
면담자 :이게 이것도 좀 전국적 미주 지역 전국적 인간요?
구술자 : 네, 전국적인 조직이었죠. 민통연합.
면담자 : 정식 명칭이 뭔가요? 민주화...
구술자 : 한국민주화, 거...민족통일 그냥 줄여서 민통연합이라고 그러는데요
면담자 : 민족 통일 뭐 연합회 그런...
구술자 : 촉진회인가 그랬을 거에요.
면담자 : 여기서 부회장을 하셨다는 거죠? 이게 몇 년도에 설립된 단체인가요?
구술자 : 아마 김대중씨 오시고 난 뒤로 한 84년? 시카고 지역은 그랬을 거에요. 그리고 전국조직은 그 전에 그 조직이 됐을거예요. 미주 지역 전체는.
면담자 : 이 활동들을 하시면서 그, 이런 유사한 쫌 이렇게 민족운동 단체들에 이렇게 그때 80년 후에 생겨나게 되지 않습니까, 한청련이라든지 한겨레라든지. 물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뭐, 친북단체니 하는 그런 비판도 받기는 했지만 그런 민족 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단체들 간의 관계는 쫌 어땠나요? 상호간에 관계가.
구술자 : 관계들은 뭐 좋았죠, 좋았는데 뭐 그렇게 엄청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단체는 별로 없었고. 그냥 그 활동을 가끔 허고 그러는 단체로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반정부단체가 최고, 최고 나쁜 얘기였어요. 지금같이 빨갱이 종북단체 라는 말은 전혀 없었어요. 반정부단체.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뭐 행사를 하거나 할 때 장소를 빌리잖아요? 영사관이 어떻게 알아서 이걸 방해를 해요. 빌려준다 했다 안 빌려줘요. 장소 빌리기도 어렵고 포스터 같은 거를 그로서리에 붙이잖아요? 금방 떼어버려요. 왜냐면 장사가 안 되니까. 반정부 단체로 인식을 해버리니까. 또 영사관 하는 일이 그런 일이었고 그러기 때문에 참 일하기가 힘들었어요. 예. 그런대도 뭐 지금까지 쭉 나름대로 활약을 했고, 5·18도 유지를 쭉 해왔고. 명맥은 유지해왔어요. 그러나 97년도에는 우리가 5·18 행사를 범동포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냥 뜻이 있는 몇몇 분들만 모아가지고 또 영사관에서 그 연락이 왔어요. 김대중씨가 대통령도 되고 호남분들이 좀 자제하고 자숙하는 분위기가 좋겠다, 그래가지고 몇몇이 모여서 그냥 그날을 기리고 공식적인 행사는 안 했어요. 딱 한번 97년도. 그러고는 계속 연이어 왔죠.
면담자 : 지금도 매년 5·18이 되면.
구술자 : 아 그럼요 호남향우회를 적극 참여를 하게끔 만들었고 인제 마당집하고 같이 하죠.
면담자 : 예전에 비해서 그런 좀 지금 행사는 호응도랄지 그 교민사회의 관심이 좀...
구술자 : 완전히 이미지가 달라졌죠. 10주기 한 뒤로 이미지가 달라진 거예요. 뭐 한인회장도 참석하고 한인회에서 허고 뭐 평통회장도 참석하고 각 도민회 후원이 되니까. 인식이 달라진거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지금까지 한청련 주최 호남향우회 하면 그거는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잖아요.
면담자 : 그, 선생님 좀 개인적인 이야기로 좀 다시 돌아가서요. 아까 공장에서 일하고 일하신 게 한 6년 정도 일하셨다 하셨죠?
구술자 : 한 10년 했죠.
면담자 : 10년정도일하셨나요? 85,6년 그 정도까지 일을 하신거고 그 이후에 인제 선생님은 어떤 좀 일을 하시게 됐나요?
구술자 : 비즈니스 했죠..
면담자 : 흔히 뭐 부동산 세탁소 뭐 많이들 하시는데 어떤 일을?
구술자 : 고기를 취급했어요. 사우스에서 고기. 고기 흑인들 상대로 고기를 파는 그런 비즈니스를 했죠.
면담자 : 잘 되셨습니까? 이게
구술자 : 몇 년간은 잘 됐었어요. 매상도 뭐 하루에 만불 정도 파는, 그때 당시 만불이면 큰 돈이에요. 전화도 뭐 네 대나 놓고, 좀 무리하게 해서 크게 시작을 했었는데 몇 년동안은 잘 되다가 비즈니스가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였거든요. 근데 인제 정부에서 푸어러 스탬프(poorer stamp)라고 가난한 사람들한테 줘요. 6백불 7백불 이렇게 주며는 그분들이 식구가 많애요. 흑인들은 주로 식구가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고기를 사다가 한 달에 한 번씩 프리저에다 넣어가지고 먹고 또 다음달에 와서 사가고. 그런 시스템이었거든요. 근데 정부에서 인제 예산을 줄이니까 비즈니스가 완전히 슬로우가 되더라고요 쪼끔 고전을 했고.
면담자 : 지금은 혹시 어떤 활동을?
구술자 : 지금은 그 비즈니스 안하고 인제 리타이어 했죠.
면담자 : 그 은퇴하시기 전까지 이 사업, 이 비즈니스를 계속...
구술자 : 계속 하다가 그, 리타이어 했죠.
면담자 : 지금은 선생님께서 쫌 사회활동을 하고 계시는 부분들이 쫌 있으신가요? 관여하는 뭐 단체라든지. 쫌 뭐 어디 고문으로 계신다든지.
구술자 : 호남향우회 고문이고요.
면담자 : 지금 호남향우회분들은 한 몇분 정도 여기서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구술자 : 활동은 임원들이 하고요. 사실은
면담자 : 소속되어 있는 호남향우회 분들이 한...
구술자 : 소속된 이사, 한 오십명, 이사들. 임원 이사회 해가지고 한 오십명 참여 하고 있고 인제 그분들이 주로 활동을 하지요.
면담자 : 지금도 꾸준히 뭐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 추모 행사는
구술자 : 예. 그 행사는 준비룰 하고 있죠.
면담자 : 매년?
구술자 : 매년. 완전히 그 사업으로 매년 하고 있죠.
면담자 : 주로 인제 행사를 하면 어디 뭐 강당이나 어디 걸 빌려서 하시나요?
구술자 : 인제 계속 한인회관에서 해요. 의미 있잖아요, 한인회관에서 하는 것이. 옛날에는 한인회관 어림도 없죠 근데 지금은 한인회관에서 계속 해요.
면담자 : 그, 어...지금 이건 좀 여담인데요. 시카고에 좀 한인들이 얼마나 좀 지금 현재 거주하고 있나요? 선생님 막 첨에 오셨을 때는 뭐 2만, 3만 그렇게 말씀을 하셨었는데요.
구술자 : 지금은 한 20만 정도 된다고 그래요 말이 많이 늘어났죠.
면담자 : 뭐 한인 규모로만 놓고 보면 뭐 시카고가 미국에서 거의 세 번째 정도 차지한다고 그러더라구요.
구술자 : 세 번째죠
면담자 : 상당히 많은 수가 지금 있는데...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그럼 호남 향우회 활동 외에는 지금 다른 뭐 활동들, 지금 현재도 민통연합이라는 단체가 조직 활동을 하고 있나요?
구술자 : 활약을 않고 있어요. 활약을 안 해요. 안 하고 민주연대가 있는데 거기 고문을 하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에 고문 사퇴했어요. 참여는 하고 있죠, 지금도.
면담자 : 그니까 이런 관련 민족운동이라든지 통일운동이라든지 사회 운동에는 지속적으로 쫌 참여는 하고 있지만 쫌 인제 거리를 쪼끔씩 두고 계신다구요.
구술자 : 왜냐면 잘못나가고 있으니까요. 6.15도 제가 참여를 해요. 참석은 해요. 6.15 공동 거기도.
면담자 : 그, 선생님이 쫌 생각하시기에 지금의 우리 시카고 지역에 한정해서, 시카고 지역의 동포사회 운동, 꼭 시카고 지역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렇게 미주 사회의 한인들의 그런 운동들이 쫌 어떤 방향으로 쫌 선생님 입장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좀 나아가야 나갔으면 하는지 그런 바람들이 좀 있습니까?
저는 남북한 통일이 되야된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해요. 대개들 보며는 통일에 대한 관심이없고 오히려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 통일 얘기 하고 북한 얘기를 하면 빨갱이로 몰아부쳐 버리고. 이런게 정말 안타까워요. 그래선 안 되잖아요. 우리 민족, 같은 핏줄, 같은 언어, 우리 통일이 돼야 되요. 통일이 돼서 우리 후손들한테 정말 남북한이 하나가 되는 그런 계기를 만들어야 되요, 우리가. 그 의무가 있어요. 근데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요. 그게 참 안타까워요.
면담자 : 쫌 쪼금 다른 이야기기는 한데 물론 인제 통일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 인제, 인제 강조를 쫌 하신 부분이 있고 그것에 대한 중요성을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 한국에 사는 국민들이 공감을 할 부분이라고 생각, 일부를 제외하고는, 통일을 반대하는 일부 세력이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님이 방금 하신 말씀을 동의하고 동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통일운동 쫌 이외에 다른 운동적 측면에서는 좀 어떤 부분을 보완해나가야 한다고 선생님 좀 보시는지요. 지금 그니깐 지금 이념적으로 좀 갈려 있는 좀 한인사회의 분위기도 좀 선생님께는 좀 못내 아쉽다고 이렇게 말씀을 좀 하신 부분도 있고. 또 인제 어떤 분들은 인제 저희 한인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의 역사가 백년이 좀 넘어간다라고 말씀을 하셨고 대부분 인제 저희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이민 일세대, 그렇게 형성이 되고 그 안에서 1.5세대, 2세 뭐 3세까지 지금 있는 형국인데 그 이후에 그런 그 한인 2세, 3세에 대한 그런 교육문제의 부분, 그 어떻게 한인 2,3세대에 대한 어떤 그런 교육을 실시할 것인가에 대한 동포사회의 인제 그런 고민들도 좀 있는 것 같아요. 미국인으로는 키우고 싶지만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인으로 태어나야되지만, 그 조국에 대한 어떤 그것을 좀 심어주고 싶다, 뭐 인제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 그러는 것 같아요
구술자 : 네. 대단히 중요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글 교육 시켜야되고요. 한글 교육 시켜야 되고뭐 한인회 총연합회에서 뭐 미국 국가를 먼저 부르잖아요, 또 태극기를 미국 국기로 바꿔서 달자, 태극기가 어디로 가고 미국 국기가 어디로 놔야하는지도 몰라요. 그 점에 대해서 청와대에 비서실에 편지도 보내고 그랬는데요, 어ᄄᅠᇂ게 하라는 지시가 없어요. 이 태극기는 항상 앉으면 오른쪽에 놔야되거든요. 근데 두서가 없어요. 오른쪽에 놨다 왼쪽에 놨다,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요. 또 애국가, 당연히 불러야되요. 태극기. 분명히 미국 국기보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기 위해 온거지, 우리는 한국 사람이에요. 한인 행사에 우리 태극기가 먼저예요. 나는 항상 그걸 강조를 해요 영사관에 그 얘기도 했더니 뭐라그러냐면 이 공관에서 한인들 행사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다, 이거에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기본적인 우리나라 애국가나 태극기는 외국에 살수록 더 지켜 나가야되요. 지켜나가야 되요.
면담자 : 그 한글교육 내지는 인제 조국의 어떤 정체성 교육이 2세들에게도 쫌 필요하다 좀 이런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구술자 : 아 그럼요. 한글교육 정부차원에서 지원해줘야 되고 한국말 그, 우리가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되요. 그리고 나는 그, 무궁화를 지금 현재 한 천 육백 그루를 시카고 지역에 나눠줬어요. 우리나라 꽃이에요
면담자 : 아 그 부분에 대해서 쫌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 신문을 통해서 봤는데 예. 무궁활를 기르쳐사지고 그런 운동을 하셨다고요.
구술자 : 우리나라 꽃이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죽을 때까지 보급을 시키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지금 현재까지 한 천육백 그루 나눠줬어요. 네.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요. 8.15 행사에 4백 그루를 가져갔는데 뭐 나는 나와서 보니까 다 나가버리고 없어요. 다 나눠줘버리고 없어요. 그 정도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동포 사회에 있고 굉장히 그 참 기분이 좋더라고요 . 그래서 앞으로 계속
면담자 : 지금도 계속 기르고 계신가요?
구술자 : 지금도, 내년 6.7월달부터 인제 또 분양을 할거에요.
면담자 : 천 몇 백그루를 이렇게 심으시려면 땅이 굉장히 넓으셔야 될 것 같은데 (웃음)
구술자 : 이게 그, 처음에는 3,4년, 5년 막 그렇게 되니까 막 컸는데 씨가 떨어져 갖고 일년 되면 그 못자리 하면 모 있잖아요, 그렇게 하듯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굉장히 많이 나와서. 그래서 그렇게 크게 힘들지도 않고. 우리나라 꽃이니까 또 외국땅이고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우리나라 꽃이라는 것 그 자체만이라도 좀 알려주고 싶고.
면담자 : 지금 슬하에 자녀분들은 그 두분 남... 아들 두분 이게 미국 오셔가지고는 더...
구술자 : 더 없었어요
면담자 : 지금 슬하의 자녀, 아들들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구술자 : 지금 42이고 38이고 나이만 많이 먹었어.
면담자 : 다 미국 오기 전에 이렇게 했는데 아주 그래도 어렸을 때 들어와가지고 한국에 대한 기억은 전혀...
구술자 : 없죠.
면담자 : 없을 것 같은데 방금 이렇게 말씀하신 그런 한국인 2세에 대한 어떤 선생님은 어떻게 교육을 집안에서 시키셨나요? 아들들에 대해서.
구술자 : 교육을 시켜도 저희가 마음 먹은 대로 안 되더라구요. 미국식으로 살려고 하고 또 이해가 잘 안 되고. 또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까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잖아요. 좀 그게 애로점이 있는데 비교적 착실하고 뭐 잘 자랐고 잘 살고 있어요.
구술자 부인: 한국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얘네들이 자기는 한국사람이라는 거 그 뿌리는 확실하게 있는데 근데 그 생활적인 그 사고방식의 차이는 저희 큰 애가 한국을 두 번 갔다 왔거든요, 저희 큰 애가 한국을 두 번 갔다 와가지고 하는 소리가 한국 사람은 쪼끔 엄마 아빠한테 들은 것보다 예의가 없고 그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이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잘못 같은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인정하고 솔직히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서 조금 이렇게 안타까움이 있는데 그 근본 자기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에는 구술자 부인을 하지 않아요. 자기가 미국에서 살고 있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도 자기는 한국 사람이고 앞으로 태어날, 둘다 싱글이에요.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앞으로 자기들이 결혼을 해서 자기한테 애들도 그 뿌리는 한국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인제 이 어떤 면으로 보면 주이시(Jewish)들은 몇 년을 살아도 철저하게 주이시화를 시켜가지고 자식들을 시키잖아요. 그런 점을 오히려 좋게 이렇게 하고 그러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좀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런 면도 있더라고요.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도 조리있게 핵심만 짚어서 해주셔가지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쪼끔 일찍 끝나는 것 같애요. 근데 저희 마지막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어찌 보면 이곳에 이민오셔가지고 지금 생활하신 게 한국에서 생활하신 것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생활을 하신 것 같은데. 지금까지 이렇게 쫌 살아오시면서 선생님이 이 안에서 그 이민 이후의 활동들을 하시면서 좀 지금까지 이런 저런 활동들, 5·18 관련 활동들도 하셨고 뭐 민통 활동들도 하셨고 그 이후에 호남향우회 뭐 6.15 뭐 그런 거 다 참여하시고 꾸준히 이런 그 동포 사회 운동, 민족운동, 통일운동에 관여하고 계시는데 그동안 이렇게 쭉 그런 생활을 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좀 지나온 인제 일정 정도 은퇴 하시고 그걸 좀 고문의 입장에서 어찌보면 이렇게 쫌 어른의 입장에서 그걸 바라봤을 때 지나온 그런 선생님의 활동에 대한 쫌 소회랄까, 쫌 그 부분들 좀, 이런 점은 쫌 아쉬웠었던 것 같고 이런 점은 쫌 잘 했던 것 같고 이런 점은 쫌 앞으로 더 이렇게 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참 좋을 것 같다, 뭐 인제 그런 생각하시는 삶에 대한 좀 소회가 있으시면 말씀을 해주세요.
구술자 : 제가 그동안에 참 40여년 간을 시카고에 살면서 광주 10주기 추모식을 성대히 참 치렀다는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도 하나는 유학생 박태훈씨 구속. 이분이 저하고 같이 5·18 행사에 많이 협조를 했고 활동을 했고 했던 똑똑한 유학생이었는데 한국에 가자마자 구속을 시켰잖아요. 거기에 대한 그 4개 항의 질의를 해가지고 총영사관으로부터 응답을 받았거든요. 근데 11날 제가 썼는데 12날 써가지고 총영사관에서 이렇게 답을 보내왔어요. 그때 당시에 유학생들이 많이 유학을 왔는데 그거는 너희들, 잘못하면 다 구속시켜 이런 겁주는 그런 케이스거든요. 이게 이 4개 항에 다 나와 있어요. 이렇게 영사관, 제가 질의응답을 해가지고. 이런 것도 깅장히 제가 볼 때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유학생들한테 겁주는 거죠. 그리고 제가 국가보훈처에 그 박근혜 대통령 5·18에 참석해달라고 보낸 거에요. 예. 답이 왔었고. 영호남 화합차원에서 이 광주시립 무용단을 초청해가지고 공연했잖아요. 박금자 그 단장이 우리 호남의 딸, 광주의 딸, 아들들이 해외 공연을 그렇게 원했어요. 근데 LA나 뉴욕, 시카고 한인회 뭐 이런 데 다 컨택을 했어도 그 숫자가 많고 또 발레가 그때 당시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잖아요. 다 노했어요. 내가 비즈니스 시작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이게 광주의 아들딸, 애국 공연을 한번 시켜야되겠다, 와이프 하고 상의를 해가지고 와이프가 또 흔쾌히 승낙을 해가지고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성대히 치러줬어요. 이것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영호남 화합. 주지사도 오고 성대히 치러줬는데 이런 것도 굉장히 참 중요한 거고. 하여튼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참여하고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을 해요. 앞으로 제가 민주연대도 참여를 하고 대화를 하고 일을 해보지만 세대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저는 태극기 같은 거, 애국가 같은 건 정말 꼭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부정해버리는 그런 애들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참 실망도 했고 한명숙 총리가 왔는데 태극기를 세워라, 그거 필요없다, 한국에서는 이런 거 요즘 안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버리고 했을 때 이 1.5세, 2세들이 앞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고 나갈 것인가 염려스럽기도 하고 굉장히 참 걱정스럽기도 해요. 우리가 1세대가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줘야 되는데 제가 볼때는 참 아쉬움이 있고. 앞으로 쪼끔 신경을 써야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면담자 : 예. 뭐 지금까지 하신 말씀 중에서 쫌 보완하고 싶은 말씀이나 더 추가적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좀 있으시다면요.
구술자 : 5·18 재단에 제가 한 10년 전인가, 제가 전화를 한 번 한 일이 있어요. 해가지고 해외지역에서 이렇게 해년 마다 5·18 행사를 하고 그 하는데 5·18 재단에서 단체나 개인에게 감사장이라도 하나씩 보내주는 것이 어떠냐, 하니까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세요. 그 둘이만 아세요. 그 얘기 허시면 안 되고. 혼자만 하셔도 되 (OFF) 자료를 제가 보내드렸어요. 이런 식으로. 그랬더니 보고 나중에 전화를 했더니 별로 한 일이 없다고 그래버려요. 별로 한 일이 없다고. 같은 말이믄 아 행사라도 치러주시고 그렇게 외국에서 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얘길 했으면 저도 흡족했을건데, 감사장 안 줘도 좋고 그 감사장 바라고 한 사람들 하나도 없어요. 그러지마는 제가 광주 사람으로서 봤을 때 유족회나 5·18 재단에서 너무 한 것 같아요. 이렇게 어렵게 장소도 빌리기 어렵고 포스터도 붙이면 떼어버리고 이 반정부단체로 몰려가면서까지 이렇게 해주면 뭔가 쫌 표시가 있어야할 것 아니에요. 근데 전혀 없었거든요. 지금까지도 없었죠. 예. 그래서 제가 실망을 했어요. 실망을 했고. 제가 정수만 회장님한테 제가 또 전화를 했어요. 어떻게 된 건지 참 유감스럽게 생각을 해요. 5·18 재단에서는 알고 있는데 이렇게 행사를 하고 있는 걸 전혀 몰라요. 외국에서 하고 있는 걸 전혀 몰랐대요. 전혀 몰랐대요. 이거 정말 우리끼리 있으니까 얘기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아이고, 그러십니까? 이거 해외에서도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렇게 자료를 보내주니까 깜짝 놀라면서 정수만 회장님이 정동영씨한테 추천을 해가지고 30주년 5·18 행사 도청 앞에서 상을 주신 거에요. 그리고 광주 가서 여론을 들으니까 웬 단체들이 그렇게 많고 서로 헐뜯고 저 실망을 했어요. 그때 가가지고.
면담자 : 30주년때? 4년 전이네요.
구술자 : 실망을 했어요. 제가 참 여기 시카고 지역에서는 자랑스런 호남인상도 받은 사람이에요. 인정을 해줘요, 호남 향우회, 민주화, 5·18 이런 것들을 전부 종합해가지고 자랑스런 호남인상도 저 후배들한테 받고. 한 사람인데 내가 실망했어요. 그래선 안 되잖아요.
면담자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죄송스럽게 좀 생각을 합니다. 이 부분들 선생님께서 방금 말씀해주신 부분들이 저희가 앞으로 좀 풀어가야 할 과제 부분인 것 같아요
구술자 : 조금 더 신경을 쓰고. 그 종이 한장이라도 좋잖아요 왜 못합니까? 그거를. 그러면 그렇게 함으로 해서 더 활성화되고 할거 아닙니까? 그런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전혀. 위령탑 기금을 보냈어도 잘 받았다는 답장 하나가 없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가...
구술자 : 둘이만 알아요
면담자 : 아니 이런 것들을 늘 고민을 하고 지금 좀 저희들도 이런 것들을 좀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부분들을 고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도 저희 인제 위에 이사장님들이나 상임이사님도. 쫌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희가, 선생님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 것 같아요. 좀 더 이걸 내부적으로 어떻게 좀 할 수 있는가 고민을 좀 더 해서 좀 뭔가를 찾아보기 위한 노력들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술자 : 더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죠. 5·18 재단이. 유족회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뭐 늦게나마 이렇게 찾아주신 거는 참 고맙게 생각하고 참 뜻이 있는 자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면담자 : 아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가지고 소중한 말씀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구술자 :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면담자 : 예. 이상으로 이병헌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철규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조철규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1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글렌뷰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에 관한 조철규 선생님의 구술 녹취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오후 2시 34분입니다. 선생님, 먼저 반갑습니다.
구술자 : 반갑습니다. 수고하십니다.
면담자 : 먼저 태어나신 해하고 어디에서 좀 태어났는지 좀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고향
면담자 : 예, 언제 태어나셨고, 고향이 어디신지.
구술자 : 태어난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팔상리 820번지
면담자 : 1941년?
구술자 : 1941년 3월 30일
면담자 : 이게 실제 태어나신 날인가요?
구술자 : 실제는 1940년
면담자 : 아, 실제는 1940년.
구술자 : 용띠, 호적에는 41년처럼 되어 있지
면담자 : 예. 40년 3월 30일날 태어나셨구요.
구술자 : 네
면담자 : 예전에는 쪼끔씩 호적하고 실제 나이하고
구술자 : 나도 그 일년은 빨리 한 거라고 그러드라구. 옛날에는 일 년은 지나야 호적 했다고.(웃음)
면담자 : 어렸을 때, 예전에는 많이 그렇게 했다고.
구술자 : 호적에는 원 나이는 40년 용띠인데 호적에는 41년생이야
면담자 : 선생님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형제나 누나나.
구술자 : 가족관계가? 어 9남매에 내가 8번째에요.
면담자 : 형제들이 많으셨네요. 8번째
구술자 : 9남매의 8번째, 그러니까 4남 5녀, 아, 4남 5녀 중에 4남 째.
면담자 : 예. 막내아들
구술자 : 남자로는 막내고 내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죠.
면담자 : 9남매를 다 이렇게 키우셨으면 그 정도라면 아버지께서 좀 경제적으로 좀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어렸을 때 뭐 해남에서 농사를 짓고.
구술자 : 예, 농사, 농사하셨지.
면담자 : 농사를 뭐 크게 지으셨나요?
구술자 : 농사를 그래도 농촌에서는 뭐 밥술이나 먹는다고 그랬으니까. 왜냐며는 그, 그때만 해도 국민 학교는 몰라도 중학교 가기가 어려웠는데 하튼 맨 큰 위에 누님은 두 분은 그런 교육을 못받고 일찍 시집을 갔지만 그리고 그 밑에가 세 번째가 남자 형님인데 그분은 일제 그 징용에 끌려가서, 아버지가 가야되는데, 붙잡혀 가야되는데 아버지는 자식들이 있으니까 그때 큰 형이 조규두인데, 조규두. 스무 살, 스무 살 때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그때 압록강 댐인가 춘천댐에 투입됐다고 노무자로. 그랬는데 그때 거기서 왜 두들겨 맞았냐며는 그 일본 감독관들이 군인들이 그 노무를 시키는데 너무 세게 시키고 그러니까 인제 댐볐나봐, 얻어맞고, 또 대항하니까 얻어맞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발길에 채이고 그래가지고 늑막염이 걸렸어. 늑막염이 걸려가지고 일을 못 시키니까 내보낸 거야. 집에 왔는데 집에서 그때 늑막염 치료를 했는데 내가 그때 4살인가 5살 때입니다. 해방되기 전이니까. 근데 그때, 그때는 페니실린이 없었다고 해요. 페니실린이 없을 때야. 그러니까 늑막염이니까 항생제를 먹으면 좋은데 그게 없으니까 집에서 그, 좋은 뭐 한약재 같은 거, 이런 걸로 먹이고 그랬는데. 근데 결국은 그 늑막염으로 집으로 와서 일 년인가 치료하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내가 5살 땐가 그러는데 그 기억이 나죠, 장례 치르고 근데 그때 갔다 나오면 결혼시킨다고 뭐 이렇게 다 예단도 준비해놓고 그랬는데 큰아들이고, 아들로서는 큰 아들이거든. 그러니까 부모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래서 돌아가시고 그러고 그 밑에 형님서부터는 이제 고등성경학교를 갔지, 목포로. 중학교는 해남서 나오고. 그러고 고등 성경학교로 두 형님 가고 그 후에 누님도 고등성경학교를 갔어. 그때는 신학교가 없었어요. 신학교 서울로 가야되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신학교 대신에 고등 성경학교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주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성경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까지 나오셨나, 그러고서 고등성경학교 목포 가서 가고. 정명여자중학교, 내 바로 위에 누님은 정명여자중학교를 갔고. 그러니까 정명여자중학교 옆에가 고등 성경학교, 그때 미국 그 힐 선교사가 그때 했고. 근데 그때 나는 국민 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됐어. 기억에. 국민 학교 1학년 때. 그렇게 해서 해방이 되고 그렇게 해서 내가 5학년 때 6.25가 났고. 5학년 때. 그리고 이제 내가 중학교를 그때는 국가고시를 봤어요.
면담자 : 죄송합니다만 국민 학교는 어디 국민 학교를 나오셨나요?
구술자 : 옥천 북 국민 학교
면담자 : 해남에 있는 건가요.
구술자 : 옥천면 북 국민 학교 2회 졸업생이에요.
면담자 : 해남군에 있는 거예요?
구술자 : 해남군 옥천면 옥천 북 국민 학교, 북 국민 학교 2회 졸업생.
면담자 : 중학교는 ?
구술자 : 그래서 인제 이미 형님들이나 내 누님이 목포 가서 인제 전셋집 얻어가지고 목포 가서 학교 다니니까 나는 국민 학교 졸업하고 그때 국가고시 봐가지고 나는 인제 광고나 그리 가려고 집에서 그랬는데 그때 뭐가 왔냐면, 노회에서 아버지가 장로였거든. 그니까 목포 노회에서 그때 인왕규 목사님? 그때 노회장인가 그래요. 교회로 편지가 온 거야. 그 문태, 영흥중학교가 일본 사람들 왜정 때 뺏겼거든 문태고등학굔가한테 넘어갔는데 그걸 다시 찾아가지고 해방 되고 나서 시작을 하는 거야, 영흥중학교를. 그러니까 전부 각 목포 노회에서 교회로 편지를 한 거야 전부들 자녀들 중학교 가려면 인제 꼭 보내야 된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장로니까 나를 당장 못 보내잖아. 그니까 목포 중학교 합격이 됐어. 그때가 나는 광고 간다 그러니까 광고는 또 별도로 집어넣어야 되니까 하숙해야 되니까 목포 형님들한테 가라고 그래서는. 목중에 가서는 합격 됐는데 아버지가 장로고 그러는데 어떡해. 그래서 할 수 없이 영흥중학교, 그래서 영흥중학교 내가 그래서 1회 졸업생이 된 거야. 1회 졸업생.
면담자 : 영흥중 입학 했을 때가 그러면 50?
구술자 : 에고 그때가 19, 1985년 1985년? 그때는 서기 안 썼어.
면담자 : 아 단기로, 그때는. 한국 전쟁 끝나고, 5학년 때 한국전쟁이었으니까 끝나고
구술자 : 동란이 5학년 때였거든? 그니까 나 6학년 하고 졸업하고 갔으니까
면담자 : 예, 한 53,4년 그 정도 됐겠네요.
구술자 : 천구백한, 국민 학교 졸업하고 나면 아홉 살이고, 여섯살에 국민 학교 들어갔으니까.
면담자 : 아, 여섯 살에 들어가셨습니까.
구술자 : 여섯 살에 국민 학교 들어갔어. 여섯 살에 들어가서 여섯 살 육년 하고 12학년, 6년, 여섯 살에 육학년, 열두살, 열두살 맞나, 몇 년도가 되겠나 이러면...
면담자 : 53년 정도 되겠는데요.
구술자 : 몇 년도 되겠지, 서기로 하면
면담자 : 1953년 정도
구술자 : 53년?
면담자 : 예예.
구술자 : 53년이며는 휴전되전 해잖아.
면담자 : 예, 휴전 되던 해.
구술자 : 아니지, 휴전되던 해에는 내가 서울로 갔거든. 휴전 되고
면담자 : 5학년 때가 그럼 52년인데요, 그럼 1952년이고 5학년때 6.25가 일어났으면 5학년 때가 1950년이었구요.
구술자 : 그랬어요? 그러면 1950년?
면담자 : 그럼 6학년때가 1951년, 중학교 1학년 때가 1952년. 예.
구술자 : 하튼 중학교를 목포로 갔으니까, 영흥중.
면담자 : 예. 영흥중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시고 고등학교는 어디로?
구술자 : 인제 그리고 고등학교는 서울 오산,
면담자 : 서울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요?
구술자 : 응, 서울 오산. 이북에서 피난 온 학교 있잖아요 오산, 다섯 오, 묏 산, 오산.
면담자 : 서울로 올라가신 계기가 뭐 공부를 하시기 위해서
구술자 : 왜냐면 그렇지, 왜냐면 형님들이 신학교를 서울로 갔거든 누님들도 그러고. 목포에서 고등 성경학교 마치고. 그러니까 나는 또 서울로 따라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중학교를 3학년, 하튼 그래서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지. 그러니까는 그때 서울로 간 때가 휴전되고 그 다음해인가 그래. 1959년에 내가 졸업했으니까 57년, 8년, 9년, 고등학교 3학년이니까. 서울로 가서 내가 1955년도든가? 오산학교를 1959년에 졸업했거든. 한 학년을 내가 쉬었어. 맞아 중학교 한 학년을 쉬었어.
면담자 : 그러면 맞습니다.
구술자 : 한 학년 쉬고 서울 가서 56년에 고등학교 들어갔나? 56년, 57년, 58년. 어, 59년에 졸업했으니까.
면담자 : 예. 그럼 형님들, 누님들하고 같이 인제 거기 계시니 서울에 계시니까 올라가서 학교를 다니시게 된 거네요. 고등학교는요.
구술자 : 근데 같이 있지는 못했지. 형님들은 신학교 기숙사에 가 있었고, 누님은 또 그 지금 순복음 신학교, 그때 순복음 신학교 서울 서대문 로터리 그 방송국 밑에 순복음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 신학교가 거기 있었어요. 그때 조용기 목사가 동기야, 누님하고. 그 조용기 목사님 사모님 누구, 아이구 차자실(김성혜와 혼동) 목사님인가? 그분도 순복음신학교 계통이고 그리고 에, 성서 신학교라고 서대문구 송월동, 그니까는 영천 독립문 가기 전에 오른쪽에 송월동에 성서 신학교가 있어요. 그리스도의 교회 성서 신학교라고. 인제 그리 갔거든, 두 형님은 그리 가고. 누님은 순복음 신학교로 가고, 누님 두 분은. 그래서 나는 인제 와가지고는 잠깐 몇일동안은 기숙사에 있었지만 고등학교 인제 들어갈 때는 어, 나와서 하숙을 했지. 보광동에서. 보광동 129번지 용산구 보광동 129번지 조남중 씨 집에서 내가 하숙을 했지요.
면담자 : 아직도 그 번지를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구술자 : 아 뭐 그렇지, 거기서 내가 하숙 했고.
면담자 :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그, 서울 고등학교 생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들 쫌 있으신가요, 50년대 후반 그때.
구술자 : 그때 이제 1955년도에 내가 그때 서울에 있었어요. 하여간 서울에 가서 일년을 쉬었던가 그래요. 55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해공 신익희 선생님이 한강 한강 노량진 한강 백사장에서 선거 유세가 있었거든. 근데 그때 어ᄄᅠᇂ게 거길 갔어. 갔는데 그때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그러고 그때 그 끝나고 호남선 타고 가다가 서거했다는 거거든. 그때. 그때가 아마 55년도일 거야. 그 기억이 나고, 거기 갔던 기억이 나고. 그러고 인제 4.19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면담자 : 그 다음년
구술자 : 졸업하고 하튼 내가 사회 생활 할 때 4.19가 났어요. 근데 내가 왜 인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를 안 갔냐 하며는, 집에서는 아부지나, 내가 오산학교 간 것도 나를 집에서는 막내고 그러니까 그 신학교 보내가지고 선교사님 통해서 미국 유학 보내서 아주 좋은 목사 만드려고 오산학교 보냈어요. 왜 오산학교를 보냈냐, 오산학교 설립자가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시고 또 거기 조만식 선생님이 오산학교 교장이셨고 또 함석헌 선생님이 오산학교 출신이고, 또 한경직 목사님이 오산 출신이시고 최초의 순교자 되시는 그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 출신이세요. 그러고 그때 주기철 목사님 형님인 주기, 주기용 장로님이 오산학교 교장이었다고. 그러니까는 아버지가 오산학교를 꼭 보낸 거예요, 저를. 그리 가서 공부해야 된다고. 나는 그때만 해도 그런 걸 몰랐죠. 그러고 학교를 졸업했는데 일반 학교를 갔으면 좋은데 신학교 가라고 서울 신학교, 연동 나루터에가 있었어요. 서울 신학교에다가 미리 등록해 버리신 거야. 그니까 나는 인제 고등학교 때, 어렸을 때는 인자 신앙생활을 뭐 뱃속에서 그 뭐 복중세례를 받았다고 그래야하나. 난 몰랐는데 국민 학교 어려서 4학년 때 뭐 주기도문 십계명, 뭐 요한복음 3장 16절 달달달달 외우고 그러고 학습 받고 그러고 자랐거든.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 맨들라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좀 2학년 까지는 잘 뭐했는데 고3때 가서 내가 머리 길러버리고 어 이거, 담배도 피고 아이들 따라서, 인제 교회도 안 나가고 그랬어. 그래 나는 서울대학 가려고 그러고 주기용 장로님도, 교장 선생님이 오산에서 서울대학 갈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러니까 꼭 가야된다 그러고. 아, 그랬는데 신학교에 갖다 입혀논것이야. 그니까 내가 인제 고등학교 때려, 졸업장은 받았지. 때려쳐뻐리고 저는 이럴 때는 내가 돈 번다, 죽어도 신학은 안 간다고. 그러고 그때만 해도 내가 그래, 형님들 한테 내 주먹을 믿으라고.
면담자 : 그럼 선생님은 그 신학교가 아닌 무얼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꿈이. 다른 꿈이 쫌 있었나요?
구술자 : 아니, 나는 신학교가 아니고 뭐 솔직한 얘기로 서울대학교 가서 법대 가가지고 나는 정치인, 정치인 할라고 그랬지. 솔직한 얘기로. 정치 계통으로 나갈려고 했지. 근데 인제 절대 안 된다고 그러니까 뭐 내가 어떡해, 그래서 내가 신학교도 안 가버린 거야. 등록금 다 내놓고. 했는데. 가 봤어. 가서 내가 한 한 달쯤이나 들락날락 했어. 근데 영 뭐 아니야. 꼭 감옥에 들어온 것 같고. 아니라고 나는 이건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형님들처럼 그렇게 안 산다. 난 내 마음대로 산다, 그랬거든. 이러고서 내가 이럴 바에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 그러고 그때만해도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됐거든. 그때가 자유당 인제 말기, 말기 때 아닙니까. 4.19 나기 전이니까. 그래서 내가 인제 학교 때려치우고 그때 내가 뭐했냐면 그 보광동하고 이태원하고 가깝잖아요, 용산에 삼각지, 8군 그거 다 끼었잖아요. 거기서 내가 학교를 댕기고 그랬으니까 삼각지, 이태원, 뭐 보광동 한남동, 용산 쪽으로는 훤하지. 그래서 내가 인제 돈 벌길을 어떻게 찾았냐며는, 아, 그리고 4. 19가 났지. 인제 내가 학교 나와서. 학생으로서는 참가 못했는데 그, 그거는 뭐 학생 신분으로는 참석 못했지마는 참가했지. 왜냐며는 오산고등학교 2학년 후배가 그때 재학중이었어, 고3이었는데. 이성화라고 이성화가 고등학교 그때 고3 그 규율부장인가 그러고 그랬는데 청와대, 경무대 들어가서 학생 대표로 들어가서 이승만 박사하고 담판 지은 사람이야. 하야. 학생 대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거든. 후배였는데 나하고 잘 알아요. 내가 제일 사랑했고. 학교 댕길 때. 그 놈이 앞장 서서 했거든. 청와대, 그 경무대 가서 담판 지은 아이가 있었고, 그러니까 나는 학생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 광화문에 그런 걸 전부 다 목격했지. 그러고 4월 19일, 18일 서부터 고대 사건, 서울에 있었으니까. 고대 사건에서부터 18, 19, 26일까지 뭐 계속되었거든. 그런 거를 인제 다 목격했지. 그러고 나는 이제 학생 신분은 아니었으니까. 4.19를 내 눈으로 서울에서 다 본거야. 현장을 그 장면을 어떻게 다 묘사는 못 하지만 그런 걸 다 봤고. 경무대 앞에 지금 그 광화문에가 옛날 그 중앙청 청사가 있었거든요. 광화문이 그때는 없는 것 같앴어. 광화문이 없었을 거야, 아마. 뜯어져버렸나 없었을 거야. 지금은 거기에 그 높은 건물이 있었거든 하얀 청사가 있었어요. 광화문 자리에가. 그리고 이렇게 효자동 돌아서 전차 종점 돌아서 이렇게 올라가면 경무대가 있었거든요. 거기까지 갔었지, 그때. 휩싸여, 휩싸여서 막 갔었지. 거기 경무대 들어간 거는 인제 후배가 들어가고. 그때 오산 학교 아이들하고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나는 학생 모자는 안 썼지만 같이 거기 합류하고 그랬지. 걔하고 같이. 그런 기억이 나고. 근데 걔를 인제 미국에 와서 또 사연이 커요. 평양 가서 걔를, 통일대회 갔는데 만났는데 LA에서 또 LA대표로 왔더라고 그래서는 2007년도에 평양 통일 축전에서 만났어요. 걔를.
면담자 : 2007년도에요?
구술자 : 걔를 거기서 만났어요. 아이구. 그때 4.19를 그렇게 목격했고. 그러고 나는 그때 뭘 했냐. 그때는 한국에 물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자가 이 생활 용품이라든가, 이런 것이 8군 PX에서 흘러나왔어요. 8군 PX에서. 하다못해 뭐 우유 같은 것, 뭐 커피, 뭐 맥주, 뭐 오렌지 주스라든가 이런 것들은 전부 미군을 통해서 그 당시에 이태원에는 외인 주택이 있었고 한남동에 외인 주택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태원은 미국 사람하고 그 결혼해서 사는 분들이 이태원에 많이 살았고. 그러니까 남대문 시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그 미국 상품들이 전부 이태원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거기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 장사가 괜찮았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는 내가 그때 인제 그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 거기서 내가 살았기 땜에 그 훤히 알았잖아요. 그러고 그거 시작하면서 뭘 배웠냐며는 이, 택시 운전을 배웠어요. 택시 운전을, 그때는 찌프차를 가지고 운전을 배웠는데 내가 왜 찌프차 운전을 할 줄알았냐며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학비를 대줘서 했지마는, 2학년, 3학년은 내가 가정교사를 했거든 그때 가정교사를 할 때 삼일제약이라고, 삼영톤 만드는, 원기수하고 삼영톤 만드는 회사가 그 용산 한강로 2가에 있었어요. 그 용산 우체국 그 뒤에. 그 아들이 오산학교 내 동기였다고. 근데 지 동생 때문에 가정교사가 필요한데 내가 또 공부를 잘 했거든. 그래서 가정교사를 들어간 거예요, 그 집에서. 그래서 그 집에서 2,3학년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가정교사 했는데 그 집에 차가 있었거든, 찌프차가. 근데 그거 많이 타고 댕기잖아요, 어떤 때는 학교 끝나면 시간 없으면 가서 데려가고 그 후에 인제 집에 세워놓고. 내가 상당히 지앙시러웠거든 그니깐 인제 집에서 그 찝차가 지금은 열쇠 이렇게 꼽고 하지만 그전에는 이 키가 여기 달려있다고, 여기 붙어있다고. 그래서 요렇게 돌리면 키가 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는 발동을 어떻게 거냐면, 지금은 키가 돌리면 발동이 걸리지만 저 발바닥 밑에가 악세레다하고 이렇게 보단을 이렇게 꽉 밟는다고. 보단을 밟고 악세레다 밟으면 발동이 걸린다고, 키를 넣고. 근데 그런걸 봐가지고 내가 운전을 발동을 걸어버린거야, 없을 때. 그러고 인제 시동이 붙어 있으니까 그래가지고 그 운전을 배운 거야. 운전수 인제 밥먹으러 가든가, 차는 못 가지고 가거든. 집에다 세워놓고 가거든. 그럼 나는 어떤 때는 늦게 타고 난 다음에 늦게 끝나고 저녁 먹고 올 때도 있고 놀다 올 때도 있고 그러거든. 그럼 인제 그 차에 가만히 가가지고 발동 걸고 그때는 시프트 식이니까, 이거 다 봤거든. 1단 2단 3단 4단 이렇게 하면 빽업, 해보니까 되더라고. 그런데 그 운전을 배운 거야.
면담자 : 운전을 독학으로 배우셨네요.
구술자 : 그렇지. 그 인제 운전을 배웠어. 그래가지고 하루는 인제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나를 태우러 왔는데 사정을 했지, 아저씨, 아저씨 나 이거 다 아니까, 알어, 그 사람이 알어, 내가 그때까지 자동차 건드렸다는 거 알거든. 그니까 이제 나한테 자꾸 툭 치면서, 너 이제 자동차 그만 건드려, 늘 그랬거든. 하루는 학교 운동장 오는데 내가 한번 해볼 수 있다고, 된다고 할 수 있다고 그랬더니 안 된다고 그래. 아 이거 학교 운동장이고 그러니까 한번 해보자고 사정을 해서 아 해보니까 아 진짜 운동장에서 되드라고. 어, 자전거 타듯이 그랬더니 나 등어리 치면서 너는 이 자식이아, 별것이야. (웃음) 그래서 운전을 배웠거든. 그 이제 이태원에서 그 장사를 하는데 택시를 많이 이용하잖아요, 그때는. 그 물건을 예를 들어서 미국 사람들하고 사는 가정에서 그 물건들이 흘러 나온다고. 근데 그거를 인제 또 거기 가게에다가 갖다 팔아요 상점하는 사람이, 저 물건을 수집을 한다고. 그럼 그 상점에서 갖다가 또 남대문 시장에다 냄기고 그런다고. 이런 걸 알았거든. 나는 이걸 어떻게 했냐믄, 직접 집으로 댕기면서 그 미국 사람들하고 사는 그 아주머니들한테 찾아가서, 나 이거 고학생인데 그때만 해도 학교는 졸업했지만 이거, 모 이거 쓰고 다녔거든. 쪼금만 달라고 이러니까 나한테 조금씩 달라고. 어. 그래서 인제 첨에 쪼금씩 시작했어. 근데 그게 괜찮더라고.. 그래서 인제 자동차를 많이 쓰거든. 차에 다가 싣고 남대문에 가야되고. 그래 그때 인제 그 이 찌프차를, 찌프차, 하여튼 찌프차를 어떻게 구입을 했냐하면 그때는 그 군대에서 흘러나오는 그 차들을 이 자동차 공장에서 시발 택시도 안 나왔을 때야, 막 이렇게 두들겨 맞춰가지고 맨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는 어떻게 친구 동업자하고 같이 이렇게 만나가지고 우리가 차를 하나 맨들자, 이거 너무 자동차 비용이 많이 나간다. 하긴 자동차를 하나를 조립을 했어. 조립을 해가지고. 그 때는 넘바도 없어도 그 충무로 공장에 가며는 번호판 하나 찍어달라고 하면 찍어준다고 가짜. 똑같아. 서울 자 몇 번 하고 찍어준다고. 무조건 차량에 그거 붙이고 댕기는거야 밤낮 댕기는 것도 아니고 물건 나갈 때만 저녁에 나가고 들어오고 세워났다 저녁에 나가고. 이런식으로 하니까 자동차비가 완전 절약되잖아. 그래서 인제 좀 돈 좀 벌었어요. 음. 그래가지고 거기서 에, 그러니깐 60년대에 그러고 났는데 혁명이 났어. 60년도던가? 혁명이.
면담자 : 5.16이요? 61년에
구술자 : 61년에 났죠. 4.19 나고서 그 다음해로, 4.19가 1960년에 났고. 그러고 바로 그 다음해에 혁명이 났거든. 그때는 이미 내가 그 자동차 씽씽씽 몰고 댕길 때거든. 그때는 좀 돈도 좀 벌을 때고. 그게 잘 나갔는데 5.16이 나더라고. 그래서 이제 나는 뭐 이태원에서 나쁜 짓 한 것은 없는데 아이들 각출해 합자 조합해가지고 그 장사 한 것 밖에 없는데, 잡으러 댕기는거야. 그게 잡으러 댕기는 이유가 뭐냐 그랬더니 나를 인제, 그 여럿이 우리가 모여가지고 합자 장사를 했잖아요, 자동차도 만들고. 그런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피해야지. 그때는 뭐 막 뭐 어디만 가면 잡아 넣고 뭐 삼청 교육대 가고, 아니 삼청 교육대 아니고 덕수궁. 덕수궁 가서 실컨 두들겨 맞고 나오고 그러고. 하여튼 그런 사람들 청사났더라고.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그래서. 그때 마침 형님들이 나를 어디다가 데려다줬냐면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다 갖다 집어넣더라고, 삼각산 제일 기도원. 너 괜히 뭐 니가 깡패는 아니고 그러지만 니가 자동차 몰고 다니고 또 그런 장사 하고 어, 그랬으니까 잘못 하면 뭐한다고. 그래서는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다가 그리 너버렸어요. 거기가 제일 안전하다고. 그래서는 어디 갈 데도 마땅치 않고 그 난리는 또 피해야 되겠고. 그래서 거기 가서 한 5.16 나고서 그 해에 한 몇 개월 피했어요. 그해 가을에, 겨울 되기 전에 나왔으니까. 겨울이 와서. 그러고 나오니까 뭐 또 조용하고 다 끝났더라고. 그래서 다시 뭐 그 장사 하고.
면담자 : 같은 일을 또
구술자 : 그렇지. 그 장사 했는데 인제 그때 그게, 그때는 그게 상당히 컸어요, 그 장사가. 왜냐며는.
면담자 : 한달 수익이 어느 정도 되셨습니까? 많이 돈 많이 버셨다고 그러시는데.
구술자 : 5.16 나고도 괜찮았는데 한 십년 인제 5.16 나고도 괜찬했어요. 5.16 나고 또 화폐 개혁도 있었거든. 그게 인제 발전되 가지고 어, 돈 무척 벌었어. 근데 그때는 이런 그런 물건만 아니라 전자제품. 그때는 에, 트랜제스타, 래디오, 육석, 칠석 뭐 이런 거 나올 때야. 처음으로. 트랜지스타. 그때만 해도. 휴대용, 그런 거. 하튼 뭐 면도날, 뭐 볼펜, 뭐 전축, 전축. 그때는 한국에서 맨든 게 없었거든, 맥주도 못 맨들었어요. 8군 PX 나오는 거 고관대작들 전부 거기에서 갖가 사먹고 그럴 때라고. 그러니까 뭐 물품도 전부 PX 제품 뭐 불티나지. 남대문 도깨비 시장으로 나가며는. 그게 이런 거 큰 걸로 손 댄 거야. 그게 그거는 인제 어떻게 했냐면 미군들이 사와야 되거든. 근데 이제 그게 미군들도 한계가 있잖아. 사는 게. 일 년에 하나면 하나. 그니까는 그 미국사람들하고 사는 인제 부인들하고 통해가지고 그 미국 사람들을 인제 이용한 거야. 그 사람도 돈 버니까. 그 사람들은 안 걸리고. 그래서 그때는 인제 내 차 있겠다, 동두천 가면 동두천 7사단 PX가 있어요. 또 문산 가면 1 기갑사단 PX가 있어요. 또 춘천 가면 또 쪼끄만 거기도 쪼끄만 게 있어요. 또 왜관을 가면 왜관에 거기가 왜관 거기가 무슨 그,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송 물자가 왜관으로 들어와. 왜관에서 어디로 가냐며는 부평, 부평 에스캄(ASCOM: Army Support Command)이라고 부평 미군 기지가 있어요. 에스캄이라고. 거기가 보급기지야. 배에서 왜관으로 왔다가 왜관에서 부평 에스캄으로 온다고. 에스캄에서 각 인제 부대, 미군 부대로 물품이 배달이 되지. 그래서 판매가 되는데, 그 장사를 하다보니까 그걸 알게 된 거지.
면담자 : 선생님 왜관이라는 곳이 뭐 지명이름인가요?
구술자 : 지명 이름이지.
면담자 : 뭐 인천 그쪽 근처인가요?
구술자 : 왜관이 경상
면담자 : 동해 쪽인가요?
구술자 : 아니지, 아니지 경상남도 쪽이야. 경상남도쪽. 왜관, 왜관.
면담자 : 왜관이라고, 예, 이거 확인해보겠습니다.
구술자 : 경상남도쪽이라고.
면담자 : 예. 거기에서 왜관에서 들어와서 부평 쪽으로 이렇게 가나요?
구술자 : 그렇지, 왜관이 거기가 태평양 배도 들어오면 왜관에 전부 내리게 되지. 그 왜관에서 인제 부평에스캄 기지로 가고 인제 부평에서 전부 다 각 부대로 배송되는거야. 그 장사하다 보니까. 왜냐며는 나중에는 어떻게 하냐면, 그 개인적으로 부대를 통해서 그 조금씩 빼는게 이게 인제 신통치 않으니까 나중에는 어떻게까지 번졌냐며는 바로 왜관에서 배송되는 거를 인제 어느 정도 받았고 거기까지 이르렀지. 또 부평에서 각 PX로 가는 거, PX 책임자하고, 말하자면 결탁해서 중간에서 어느 정도를 인제 내려주지. 그믄 인제 그게 쉽잖아. 그러니까 인제 돈 버는 액수가 더 많아졌지. 그렇게 해가지고.
면담자 : 그럼 그때부터 주로 상대한 사람들은 미군 이었나요?
구술자 : 미국 사람이지.
면담자 : 영어는 그때부터 고등학교 때부터 잘 하셨나요?
구술자 : 고등학교 때 영어를 뭐 100점은 못 받았어도 99점, 98점은 맞았으니까. 왜냐믄 미국 유학 보내서 그러니까 영어를 잘하라고 해서 영어를 좀 잘 했어요. 그때만 해도. 근데 그래서 하튼 그런 식으로 해서 하는데 그게 인제 대결이 어떻게 되냐며는, 5.16 그 나고 나서 인제 그 십년 사이에 이 군사 주체 사이에서도요, 에, 그거를 그 산하 조직들이 이거를 뺏어가고 했어요. 그 사람들도. 나도 했지만 나 혼자만 한 게 아니거든. 다른 사람들도 했거든. 근데 거기에 누가 끼어들었냐면 5.16이 나고 나서. 이, 내 생각이야. 5.16 그 백그라운드 가진 사람들이 이것도 손 댔다고. 돈줄이 없으니까. 그때는 돈줄이 없었거든요. 한국에 딸라(Dollar)가 없었어요. 그 이태원에서 나오는 딸라가 딸라 수입원이었다고, 그 당시만 해도. 알아요, 그만큼 한국이 그때는 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니까 군사 정부에서도 돈이 없으니까 별짓 다 했잖아요. 그때 그 처음으로 새나라 자동차 들여온 것도 김종필씨가 그렇게 해서 들여온 거고. 돈 몇푼 벌려고. 그니까는 이런 데까지 손 안 댈수가 없죠. 그래서 걔네들이 인제 쎈데 뭐가 나한테 들어오냐면은 자꾸 그 용산 경찰서 정보부에서, 형사과에서 나를 제동을 거는 거야 인제. 자꾸 붙, 말하자면 추적을 해서 못 하게 하는 거. 왜냐면 그때는 이렇게 돈 안 줄 수가 없거든. 정보국과 형사계에. 다 이렇게 일부러 온다고 그럼 이렇게 줘야 돼. 용돈 줘야돼, 용돈 주고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며는 그, 걸리잖아. 특정 외래 판매 금지법이 있고., 그때. 특정외래 판매 금지법이 생기고 외환 관리법이라는 게 있고 아무나 외환을 못 가지고 있어요. 그때는 그런게 5.16 나고 생겼거든. 그니까 우리는 나는 달러도 가지고 댕겨야 되고 외래품을 사고팔고 하는 그거 하잖아. 그니까 안 걸릴 수 없지. 그러니까는 그렇게 돈을 안 쓸 수가 없잖요. 그래서 인제 돈을 좀 벌만큼 벌었어요. 근데 제동이 들어오는 거야 그걸 자꾸 견제를 하는거야. 그래서 아, 내가 눈치 챘어. 이게 어, 인제 어마어마한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들어와서 이걸 다 뻇어가는거야. 그래서는 안 되겠더라고. 잘못하다가. 그래서 뭘했냐며는 그 이태원에다가 브라질 제과점을 내가 냈지. 브라질 제과점. 이태원 산 13번지에 브라질 제과점을 냈어요. 집을 세 얻어 가지고. 예, 그게 인제 제과점을 하면서 그 미국 사람들이나 그 외인 주택에 사는 일반인들도 빵 많이 먹는데 부대에서 나온 빵도먹지만 케익, 제과점 하면서 케익 직접 공장에서, 쪼그만 공장을 가지고 직접 다 맨들어냈거든. 그리고 뒤 홀에서는 맥주도 팔고.. 그러니까는 저녁에는 미군들 나와가지고서, 그때만 해도 이태원에 클럽이 없었어요. 내가 그 후로 클럽이 막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그랬지. 내 가게 뒤에서 쪼끄만 홀 하나, 이거 반만한 홀 하나 이거 두고서는 그럼 저녁에면 와서 부인들하고 와서 술 마시고. 퇴근하고 나와서. 그리고 뭐 전축 이렇게 틀어놓으며는 이만한 여기 반만한 홀이지마는 거기서 춤도 추고. 그래서 돈을 그때 좌우지간에 차로 싣고 댕긴다고 그랬어. 자동차로 싣고 댕겼어. 그때 잊어버리지도 않아. 거북선 그려진 돈 오천원짜리 그게 그때는 가장 큰 돈이었거든. 그러고 그 전축 같은 거, 트랜지스터, 래디오, 또 홈세트라고 있었어요, 홈세트. 커피 세트. 이 박스로 이렇게 나와요. 6인조, 8인조, 12인조 커피 팟, 잔 뭐 이렇게 전부 포함된 거. 박스야. 그때 그거를 구할라고 이 줄서가지고 있었어. 서울에서 있는 사람들이. 그거 뭐 많이 취급을 하니까 그런 데서 돈을 많이 벌었지. 근데 잘 나갔어요, 그때는. 자가용도 정식으로 정식으로 넘버 붙여서 탑차 타고. 그러고 인제 그때만 해도 위장 남바라고 있어요. 뭐 판사는 뭐라든가. 검사 넘버라든가. 이거를 카피를 해가지고 세를 준다고. 그때는 그때만 해도.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원남바가 있는데 그때는 카피를 만들어서 세를 줘. 그럼 자기들은 얼마 안 쓰거든. 출퇴근 하고 그럼 나는 인제 밤에 쓰고. 그러니까 떠블을 붙이고 댕겨도 모르잖아, 그때만 해도. 그러니 그때는 내 넘버가 있지만 그런 번호를 달고 댕기면 걸리지 않잖아. 그러고 또 심지어는 별판짜리, 별판. 찦차 앞에다가, 그땐 탑차거든. 별판을 딱 달고서는 똑같이 커버를 씌우고. 댕기거든, 그때는. 장성이 타면은 커버를 벗기지만 안 탈 때는 씌우거든. 그러믄 그때만 해도 그 운전수들이 후생사업이라 해가지고 그 별판을 빌려준다고. 세를 놨어요, 그때만 해도. 그믄 때로는 또 그 별판 달 때도 있어요. 문상이나 종로 구청 들어갈 때는 별판을 달지. 자가용 번호판을 떼고. 별판을 딱 달고 씌운다고. 그믄 인제 옆에다가 군복 딱 입고 말이지, 썬글라스 딱 끼고 앉혀놓고 들어가서 운전하고 들어가는거야. 그믄 의정부 쩌 미아리 고개 가면은 거기가 검문소가 있었구요 또 의정부 가기 중간에 또 검문소가 있어요. 미군 검문소가. 그믄 인제 별판 달고 군복 입고 그러믄 통과거든. 그럼 들어가서 그런 물건을 싣고 나오는 거야. 짚차, 츄레일러, 트레일러에다가. 싣고 위에다가는 뭐 겨울에는, 봄에는 봄배추 가을에는 가을배추 이런거 당당하게 싣고 갔거든. 그런데 거기서 나오면 이렇게 뭐 보지 않고 통과 시키고. 나중에는 그 인제 또 한국사람들 그럼 눈치가 빠르잖아. 합동근무하거든 한국 헌병하고. 그믄 인제 눈치 채가지고 그러믄 그때 또. 그때는 돈이면 안 통하는게 없으니까. 그러믄 그때 한국 헌병. 미국 사람들도 좋아하거든 다 먹고살자고 하는거다하고. 그러니까 검문소도 인제 다 어, 통과되는거야. 처음에는 그냥 했도 나중에는 뭐. 하튼 돈을 무척 벌었는데. 그시기, 그때 시련을 그렇게 지나갔어요. 그일 후에 무슨 일이 있었냐, 71년에, 71년에 대선이 있었거든 7대 대선아. 7대 대선, 김대중선생하고 박정희하고. 그때 처음으로 대선이 있었는데. 내가 선이 형님들로 해가지고 어떻게 닿았냐면 용산 신민당, 용산 지구당, 청년 조직부장이 된거야.
면담자 : 신민당이요?
구술자 : 용산지구당. 왜냐면 내가 청년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거든. 그 장사를 하니까. 그러고 더군다나 뭐 목포에서 온 아이들 또또 광주에서 왔다고 그러면 찾아오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서울로 와가지고 그믄 그때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이 뭐 솔, 상당히 많았어요. 몇 십명, 내가 정확히는 말 안하지만. 그래서 그 아이들을 내가 쫌 많이 데리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형님들이 와가지고 이러이러하니까 형님들이 그때는 신학 나와서 다 목사였거든. 누님들도 인제 신학 나오고 결혼해가지고 매부들도 목사고. 게 인자 형님들이 그러라고 하니까 그렇게 했지. 그때 내가 너무 돈이 많을 때니까. 그때 내가 부동산 사논 게 지금도 서울에 남아 , 시골에 다 남아있죠, 한 육만평. 지금도 임야 전이 남아있죠, 영암에. 지금도 내 이름으로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그때 주민등록번호가 살아있어요. 그래서 주민 등록, 내 이름으로 토지세가 나오니까, 해마다. 어, 주민등록은 없어도 전철 고속, 인천공항에서 고속버스 탈 때 내가 찍어보니까 주민등록번호 찍어보니까 떨어지더라고요. 왜냐면 세금을 내거든. 내 이름으로 임대를 줬지마는 내 이름으로 있고 주민등록이 살아있잖아요. 번호가. 그러니까 내가 없는데 주민등록이 없지만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그 농지세 토지 그 등기에도 등기부등본이나 확인해 내 주민등록번호가 들어가있거든. 또 농지세가 나온 거 내 주민등록번호, 내 조철규 이름으로 나오거든. 그래서 내가 그 전철 타는 데에 찍어보니까, 내 주민등록번호 찍으니까 떨어지더라고. 어? 근데 근래에 와서는 그거 찍으니까 안 되고 주민등록을 갖다 이렇게 갖다 대라고 되있어요. 주민등록을 갖다 대야지 주민 등록 없으면 안 되, 이거 찍어가지고는 안 돼. 그래서 인제 거기 가가지고서는 나 나라에 세금을 낸, 세금 낸 사람이라고. 그럼 주민등록 번호 대라고 그래. 그믄 주민등록번호 4633016... 바로 대거든, 내꺼니까. 그믄 찍어보면 떨어지거든. 그럼 ○○○○ 141111조철규01_00:47:30 찍어준다고. 지금도. 그게 지금도 살아있어요. 그때 인제 돈 벌 때 쫌 그런 거 해놓고 서울에도 좀 해놓고 그랬는데. 형님들이 그 와서 그러는데 그러고 김대중 선생은 내가 목포에서 중학교 댕길 때 김대중 선생이 목포 계셨어요. 목포 노총? 노동, 어, 노총이라고 있어. 노총. 그러고 그때 그 차병원 딸하고 결혼했다고 그랬던가. 그 형님들하고 그때 알고 지냈거든. 큰 형님하고, 지금 돌아가신 큰 형님하고. 그래 어렸을 때 내가 봤어요, 김대중 선생을. 집에도 오시고 그랬으니까. 그랬는데 형님이 와서 그러니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그래 내가 그때 인제 그걸 가지고 아이들하고 좀 뒤에서, 앞으로 나설 수는 없잖아. 깨놓고. 왜냐면 그 장사도 하니까. 그렇게 했는데 대선이 끝났잖아요. 끝났는데 4월 27일이던가? 29일이던가? 하여튼 내 일기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떨어졌는데 그때 백만 표도 안 돼. 백만 표도 아니고 몇 십만 표였어요, 그때. 그게 그때 떨어졌어요. 여기서는. 그래서 인제 그날 아이들하고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몰라. 아주 아이들하고 밤늦게까지 내 집 뒤에 홀 있으니까 하튼 뭐 맥주고 양주고 있는 대로 먹고 하여튼 그때 백 여명이 왔나봐. 뭐 나하고 같이 있는 아이들도 많지만. 그 외에 뭐 목포에서 와서 용산에 있던 아이들. 다 내가 그때는 돈을 뭐 뿌리고 댕겼으니까. 그리고 인제 집으로 왔지. 가가지고서는 내 일기장을 일기에다 썼어요. 술에 취해가지고. 내 그 내용은 술 취해가지고 인제 너무 분하니까 쓰고서는, 선생이여 뭐 낙심하지 마시오. 우리 다시 칼을 갑시다. 이렇게까지 인제 썼는데, 이 사람들이 이걸 알았어요, 내가 앞에 나서서는 안 했지만. 저놈이. 그때는 정보국이 굉장할 때에요. 그래서 내가 그때 느낀 거는 나도 그때 뒤에서 다 했지마는 선거 운동을 해도요, 딱 저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다 하면 그땐 고무신 돌렸다고 말해요, 고무신. 전라도 사람이다 하며는 입 뻥끗도 안 해. 아예 포섭하려고 하지도 않아. 저 사람이 무조건 전라도다 그러면 일절 저 사람 딱, 포섭 밖이야. 다른 데 뭐 충청도라든가 뭐 강원도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인제 포섭을 하지 그 사람들 선거 전략이 그 당시 그랬어요. 그때 그 조직이라는 게 내가 그날 투표를 갔는데 내가 이태원에서 그렇게 오래 살고 보광동에서 오래 살고 이태원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주소가 이태원, 이태원에서 살 때인데 가니까 그 선거인 명부에 이름이 없는 거야.
면담자 : 선생님 이름이요?
구술자 : 그렇지. 내가 거기서 그, 거주하고 증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그때만 해도 젊었을 때니까 거기서 또 가만히 물러날 수 없잖아. 한바탕 소란이 났지. 동회에 가가지고 동회에 투표하러 갔는데. 투표도 못했어. 선거인 명부에 빼버린거야. 그러니깐 인제 완전히 고의적인 거야. 그런 사람들이 나뿐이 없겠냐말이야, 그런 사람들이 나뿐이 없겠냐구요. 어징간해서 저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많았거든. 에, 전라도에서 그때 막 서울로 많이 막 올, 무조건 올 때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살면서 그냥 신고하고 어, 살았다고 그럼 내가 투표 하고자 했는데 이리 가가지고 없어서 투표 못한 사람도 많았다고. 나뿐만 아니라. 나 같은 사람도 그랬는데. 그래서 그날 그 일기 썼는데 나중에 어느 날 얼마 한 달인가, 일기 쓸라고 보니까 일기장이 찢겨졌어. 일기장이 찢쳐졌어, 한 반? 중요한 부분이. 그래서 인제 이상하다 그랬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알았냐며는 중앙 정보부에서 그, 내 방에 들어와 가지고 그 가져간거예요. 찢어간 거예요. 그걸 내가 확실히 확인을 한 거예요. 말하자면은. 그러니까 나는 인제 꼼짝없이. 인제 감출 수가 없게 됐잖아. 그 후로. 얼마 못 가서 71년 그, 71년 10, 그러고 인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러고 내가 인제 이태원을 떠나게 되요. 그 후로. 그 후로 왜 내가 떠났냐면. 제과점을 하며는 빵공장 빵을 구워야 되잖아요. 식빵돟 구워야되거든요. 뭐 생케익도 만들어야 되고 빵을 구워야되거든요. 그래서 인제 진열해야되고 매일 구워야되요. 그러고 이제 그 물품, 음료수랑 맥주 같은 것도 들어왔다 들어오고 또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매일, 매일 주고 한자리 깔아놓고 이렇게 거래가 되거든. 또 빵 하는 재료도 밀가로 같은 거, 설탕 같은 거, 버터 같은 거, 이렇게 들어면 늘 선불 주는 게 아니거든. 쓰고 또 주고 쓰고 주고 하는데 이것도 차단되더라고. 아 뭐 물건이 와야 빵을 굽고 뭐 술이 와야 팔고 그러잖아요, 음료수. 그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는데 나중에는 기술자, 빵 굽는 기술자까지 온다간다 말도 없이 나말도 없이 안 나와 버린 거야. 그 집에 찾아가면 없고. 그 부인한테 물어보면 모르겄어요, 무슨 급한 일 있다고 나갔는데요. 그래서 인제 내가 그때 깨달은 거지. 아하. 이게. 그래서는 일 년 버텼나. 일 년도 채 못 버텼어요. 그 다음해에. 다음 해에. 뭐 비어를 살 수 없게 되더라고.
면담자 : 그런 그게 어찌 보면 그런 활동들을 전면에서 나서서 한건 아니었고 뒤에서 이렇게 조용히 도와주기만 했는대도 이렇게.
구술자 : 그렇지, 그렇지.
면담자 : 누가 뭐 밀고를 했을까요. 뭐 어떻게.
구술자 : 아이들을 하도 많이 데리고 있었으니까. 왜 정보부에서 그걸 모르겠어요. 내가 그때 돈 뿌리고 내 자가용 굴리고 그럴 땐데. 그러고 그것뿐만 한 게 아니라 또 부동산도 손대고 그랬거든. 그래서 현아사업주식회사라고 주식회사 맨들어 가지고 거기 아이들 한 여남은 명 이렇게 담당하게 하고. 부동산, 71년도 그때 문 닫기 전에 내가 부동산에 손댔고 압구정동 그 아파트 질 때, 처음에는 용산에 외인아파트가 생겼고 그 다음에 한강 건너서 반포에가 반포아파트가 생겼어요. 그래서 반포에다가 맨션부동산이라고 내가 하나 오픈했죠. 또. 맨션 부동산이라고 반포에다가. 반포아파트 단지 안에다가. 그러고 거기서 그 위에 압구정동에 인제 또 개발될 때에요. 압구정동에. 압구정동에 그래서 압구정동 분양도 그 반포 맨션 부동산에서 들어가고 그랬죠. 그래서 근데 인제 이 이태원에서의 그 장사는 더 이상 하믄 안 되겠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파악을 한 거지.왜냐며는 물품 그렇게 대주는 사람들이 물품 떨어졌다고 안 대주지, 밀가루 설탕 뭐 그냥 그러지 할 수가 없잖아. 가게 맥주도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없다고, 맥주가 도매상에 없다고 안 대주니까 장사를 못하잖아. 그래서 결국은 내 스스로 그것을 접었죠. 접고 낙향했어요. 내 고향으로.
면담자 : 그래서 이런 이유들이 좀 모아져서 아, 이제 한국에서는 살 수 없겠다 이민 결정을 좀 하셨겠네요.
구술자 : 그래서 낙향을 했는데

면담자 : 선생님 잠시만요, 테잎 좀 갈고...<TAPE 교체>

면담자 : 낙향해서 쫌 고향에서 인제 하셨나요?
구술자 : 서울에서는 아무래도 그, 가게 문을 닫고 거기서 괜히 어정거렸다가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날더러 형님들이 그러더라고. 시골 가서 있어라. 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1969년도엔가 미국에 카더 39대 카더 대통령 때에 이민법이 통과가 됐어요. 이민법이. 그래서 그때 70년 부터선가 인제 그 가족초청 이민이, 미국에서 시민권자가 초청하게 되면 그게 시작하게 됐다고. 미국 법이 통과가 됐다고. 그러믄 그때 누가 썼냐면 내 그 처남이, 내 처가, 방종엽이라고. 내 처갓집이 서울이거든. 연세대학교 2학년 때 하키선수였는데 하키선수로 미국 유학을 와가지고 눌러 앉았어. 안 오고. 그 때만해도 자유당 때에 미국 유학 온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믄 장 차관들, 뭐 국비생. 국비생 아니면 장차관, 빽있고 돈 있는 사람들. 근데 그때 처갓집이 서대문구 서소문동 방장성씨 하면 서대문구 소방서 서장도 하고 어, 서울 시의원도 하고. 그 서대문 갑부였지요. 그게 서대문구 그 중앙일보 가기 전에 지금 삼성빌딩 말고 그, 방장성씨거든 이름이 그니까는 석삼자 이룰 성자, 삼성빌딩이라 7층 빌딩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로 법원 뒷문, 중앙일보 올라가기 전에. 근데 그 둘째 아들이 미국 와가지고 그 연대 2학년때 하키 선수로 미국와가지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때 같이 온 친구들이 한국일보 여기 시카고 여기 지사장 했던 아이고 이름 잊어버렸다. 김 누군데 그 친구. 근데 인제 그 이민 문호가 개방되니까 고향에 가서 이민 갈 준비를 하라 이거야. 형님들이 네 입장으로서는. 그렇게 해서 여길 떠나는 게 좋겠다. 여기있다가서는 뭐 아무래도 니가 가만 있을 거 아니고 활동해야 되고 하는데. 미국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너는 좋다 그래서 고향에 갔는데. 마침 내가 그때 또 그, 그때는 내가 잘 나갈때라 군대를 안 갔어요. 영장 나온 거 다 돈으로 해결하고. 근데 미국 올라면 병역, 병역필이 있어야되잖아, 병역필이. 병역필이 없었잖아. 그러니까 인제 고향에 가서 방위병, 방위병 하면서 인제 병역필을 하고 또 고향에 가서 할 게 없으니까 마을에서 이장하라고 해서 이장하고. 또 새마을 지도자 하라고 해서 새마을 지도자를 했죠. 왜냐며는 새마을은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이거든. 그니까 그거는 내 고향을 위해서 내 동네를 위해서 해야하는 일이니까 열심히 했어요. 새마을 지도자 4년 하고 이장 4년 하면서 군수 표창까지 받았으니까. 해남군수 박관주? 새마을 사업 열심히 하고 이장 새마을 사업 열심히 했다고 표창까지 받았어. 그러고 또 새마을지도자 하려면 그 새마을 학교 가서, 광주 가서 교육 받아야 되거든 한 일주일, 그거 받아야되니까 그거 받고. 그러고 이제 병역문제 해결하고 그러고 인제 이민 초청장 신청을 하니까 초청장 보내줘서 이민 수속을 고향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인제 75년에 이민 수속이 거의 다 끝나고 여권이 다 나오고 했는데 비자를 인제 다 받았어요. 식구가 여섯 식구가. 2000, 그러니까는 75년 11월 28일 날 아이들하고 와이프는 그때 들어오고. 왜 같이 못왔냐그러면 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은 그 출국 허가를 받아야 되는데 출국 허가가 안 나와. 내가. 비자는 다 나왔는데. 대사관도 비자가 다 나왔거든요. 그래서 인제 여권까지 다 나오고 그러면 출국 신고, 본적지가서 출국신고 해야 되고 또 이주 허가도 받아야 되고, 보사부에 가서. 마지막으로 인제 공항에서 출국 이주 허가 받고 해야 되는데 이주 허가가 안 나와. 고향에 가서 출국한다고 신고 했거든. 그러고 인제 그거 가지고 가서 이주 허가를 이민으로 이주 간다고 해야되는데 그게 안 나와. 그래 얼른 생각했어. 아, 이건 뭐가 있다, 그러고서는 아이들하고 먼저 보냈지. 와이프하고. 11월 28일날 그러고서 나는 한 40일 후에 40일 후에. 내 혼자 해결하는 게 낫잖아. 같이 안 가고 해결하는 것보다. 그래 먼저 보내고. 나 혼자 남아가지고 그 출국 허가 안 나오는 거를 결국은 해결을 했어. 해결을 하고 1월 10일 날 나는 와가지고 합류를 했지.
면담자 : 처음에 오실 때 시카고로 바로 오셨나요? 아니면 다른 지역을, 미국으로 처음 들어오실 때 어디로 먼저 가셨나요?
구술자 : 하와이로 왔지 그때는. 하와이로. 하와이 들려서 입국하고. 입국 수속하고 그러고 LA로 와서 LA서 내가 그때 라스베가스였거든. 라스베가스. 그러고 라스베가스에서 있다, 한 2년 살다가.
면담자 : 처음 정착한 곳이 라스베가스신가요?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그쪽에 그 아까 말씀하신 처남, 처남 분이
구술자 : 조뱅, 방종엽이 조뱅. 방상엽, 그 방씨들이 처갓집 식구들이 전부가 거기 있었거든. 또 우리 장인도 거기 이민 와서 있었고 장모님도 계셨고. 처갓집 식구들이 다 와버렸으니까. 그니까 내가 거리 갈 수밖에 없죠. 그러고 내가 인제 시카고로 온 것은 음, 77년에 내가 시카고로 왔죠.
면담자 : 한 일년 정도 후에 이쪽으로 오셨네요?
구술자 : 그렇지, 한 일년 몇 개월 있었죠.
면담자 : 시카고는, 그 라스베가스에 있을 때는 어떤 일을 좀 하셨습니까?
구술자 : 카지노에서 딜러. 잡이 좋아요. 카지노에서 토니온 블랙 잭 하고 또 키노 딜러도 하고 어 내가 또 그런 거는 소질이 있었잖아요, 그 전에 내가 잘 나갈 때, 이태원에서 잘 나갈 때는 자가용타고 어디를 댕겼냐면 인천가면 올림푸스가 있어요, 올림푸스 호텔이라고. 올핌푸스 호텔도 카지노가 있었고. 또 워커힐 가며는 워커힐에도 카지노가 있었어요. 그때. 워커힐 오픈해가지고. 그래서 그런 데 많이 놀러다녔지. 그건 많이 봤거든. 그니깐 인제 라스베가스는 그 도박도시잖아요. 24시간 오픈을 해요, 24시간. 호텔이고 카지노고 24시간 오픈이니까 일도 3교대로 돌아가요 8시간씩 3교대면면 3,8은 24시간이잖아. 3교대로. 거기서 그 잡이 괜찮아요, 괜찮았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노름을 하게 되잖아. 젊었을 때 그것도 해봤잖아. 한국에 있을 때 그걸 해봤잖아요. 했으니까. 근데 뭐 돈은 리밋(limit)이 있잖아요. 여기서는 월급 탄거, 월급 타는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땅덩어리 들고, 집은 다 두고 왔거든. 형제간들 벌라그러고 집도 주고. 그러고 몸뚱아리만 왔어요. 남들은 뭐 정리해가지고 오는데 그 뭐 내 조상들의 내 조국이잖아 그게 팔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대로 두고. 그딴 것도 없고. 난 미국가서 나이가 있으니까 뭐 새마을 운동한다, 한번 부딪쳐본다. 그러고 내 살던 집도 누님한테 주고. 다 그대로 놓고 왔어. 그래 여기서는 돈이 있어야 노름을 하지 노름을 못하잖아. 그게 인제 노름을 그렇다고 땅 팔아서 할 수도 없는 거고. 안 되겠더라고. 월급 타가지고 그 뭐, 이민 생활이 외롭잖아요. 그러니까 갈 데가 없잖아요. 24시간 오픈인대다 갈 데가 없으니까 거기서 일해가지고 팁도 받고 돈은 많은데 쓸 데가 없어. 그러면 가서 또 끝나면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거 한잔 하거든. 그러는데 안 되겠더다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여기서는 아이들을 내가 넷 데리고 갔잖아. 아, 거기를 떠나야되겠다고.
면담자 : 그때 들어가셨을 때 그 처가, 선생님의 처가 식구들 말고 한국인들이 한 어느 정도 거주를 좀 하고 있었나요, 라스베가스에서?
구술자 : 그때면 몇 천명된다고 했어, 한 삼천명. 라스베가스에.
면담자 : 다 이민자들인가요?
구술자 : 이민자들. 그때 이민자들이 누구, 어떤 사람이었냐며는, 나처럼 형제초청으로 온 사람 케이스는 많이 귀했어요. 솔직한 얘기가. 거의가 미국 사람들하고 결혼해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초청하신 분들이 거의였다고. 그때 한 2,3천명 된다고 들었어요.
면담자 : 그래서 인제 쫌 애들 교육도 있고 선생님 생활도 좀 해야되는데 아무래도 좀 그런 노름, 도박 쪽으로 좀 빠지는 것에 대한 위험성도 있고 쫌 해서 옮기시겠다고 생각을 하시게 됐다라는 거죠?
구술자 : 그렇죠. 거기서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것을 인제 내가 결심을 했어요. 근데 거기에다가 또 아버지나 형님들이 늘 그 편지를 하시는 거야.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산다고 했더니 늘 편지를 하시면서 너는 그게 아니다, 기도한다. 이러니까 그게 인제 그때 되니까 옛날 그 인제 이민 와서 외롭고, 많이 한국에서는 펄펄 나르고 그러다가. 자연히 좀 외롭고 인제 그러더라고 옛날 생각이 나고. 또 아이들은 커가지. 그래서 인제 거기를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시카고로 왔는데.
면담자 : 시카고, 굳이 뭐 인제 가깝게 LA도 있었을테고 이렇게 했을 텐데 시카고로 이렇게 오시게 됬던 계기가 있으신가요, 왜 그때는 당시에 LA에 한인들도 많이 있었고.
구술자 : 아, 왜 또 시카고로 왔느냐? 나를 초청했던 그 조뱅이 여기 한국일보 지사장이었던 김용우?용우야, 친구가. 그때 한국일보 지사장이 김용운데 경기중학교 어, 그, 동창이거든. 김용우가, 한국일보 지사장이. 그래서 또 이 조뱅이 이민 초기에는 아마 여기도 좀 이 시카고를 좀 거쳐갔다고 그랬는데. 왜 조뱅이 나를 이리 보냈냐면 여기 그 자기 친구도 있고 또 자기가 여기다가 뭘 해놨냐면은 쪼그만 그 세탁소. 세탁소를 자기 친구 동생인가 뭐 아쉬운 소리를 해서 돈을 좀 해줬는데 뭐 세탁소가 차려가지고 한다고 하니까 돈을 좀 이민와가지고 빌려줬나봐. 그런데 인제 돈은 안 받고 하니까 회수를 못하니까 내가 인제 상의를 했지. 나는 여기들 떠나고 싶다. 아이들하고. 아이들 장래를 보고 해서도 여기를 떠나고 싶다. 인제 그런 상의를 하니까 그런 관계가 있으니까 여기 가서 그럼 세탁소를 해라.
면담자 : 오셔서 세탁소를 시카고에서 운영하신 거네요?
구술자 : 네. 그리고 이제 77년도부터서는 세탁소하면서 그때만해도 여기와가지고는 교회를 나간 거예요. 여기 와가지고. 아이들하고 인제 신앙생활을. 옛날로 다시 돌아간 거예요. 시카고 와가지고. 그래서 그 때만해도 인제 70년대에 여기 와가지고 인제 교회 댕기면서 세탁소하면서 그거 밖에 없죠, 여기서는. 그러고 인제 세탁소 하니까 먹고 사는 거는 둘이, 둘이 하니까. 이 프레스 하나 사람 쓰고 또 바느질하는 아줌마 파트 타임으로 와서 하고 와이프가 카운터 하고 나는 인제 세탁기 기계돌리고 대리는 사람, 다림질 하고 그럼 좀 고단해도 수입이 괜찮아요. 그래서 다른 거 하는 거 보담. 두 사람 인건비가 나오는데 세탁소 하며는. 남의 일 아니고 내일이니까 또 일요일 날은 쉬고. 인제 그거 좀 하면서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 인제 섬기고. 이민 생활 갈 데가 없으니까. 인제 그러다보니까 여기서 살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80년, 아, 79년. 가 있어봐, 박통이 79년 10.26 사태가 난거야. 여기 시카고 와서 살 때. 궁정동 사태가 났다는 것을 그걸 여기서 들었고. 그때 참 기분 묘하대. 여기서 그 소리 들으니까. 그랬는데 바로 이어서 또 12.12 사태. 같은 해. 뭐 그 막, 정승화 막 체포되고 전두환 소, 그 소장? 소장이 육광구? 육광구 뭐 보안사 보안사령관 쳐, 이게 막 나오는데 나오는데 흥분되더라고. 여기서 그런 소식을 들으니까. 이야. 이거 그 그렇게 해서 김재규가 그렇게 한건 좋은데 전두환이가 그렇게 하는 게 이게 인제 좀 걱정이 되더라고. 야, 이거봐라 이렇게 되면 이거. 이게 아닌데. 어, 그랬는데 그 다음 해에 80년 인제 광주사태가 터진 거여.
면담자 : 어떻게 처음 이걸 접하게 되셨습니까 5·18
구술자 : 어떻게 해서 내가 5·18을 알게 됐냐면 여기서 미국, 미국 그 아이들이 아이들이 미국 테레비을 보다가, 나, 아부지, 저기, 학교에서 들었다고 그러든가? 그래서 인제 5·18이 났다는 거를 접하게 됐지. 그래가지고 내가 서울에, 서울로 전화를 했어요. 양경식 목사라고 서울 매분데. 서울 동작동에 있는 누님한테 내가 전화를 했어요. 아니 여기서 들으니까 광주, 광주에서 그 무슨 큰 일이 났다는데 광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데 그러고 전화를 물어봤어, 어떻게 된 거라고 그랬드니 아 알았다, 그것 때문에 매부가 지금 광주 내려간다고 갔는데 장성 가서 장성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 있다고 지금 전화가 왔다. 그러시는 거야. 그러고 뭔 말을 할라니까 전화가 끊어져버렸어. 그때는 왜그랬냐면 전화가 직통이 아니에요. 교환을 여기서 미국에서 전화 걸면 교환해서 바꿔 줘야되요. 이렇게 연결해줘야되요. 그 전화 교환에서 그거를 받고 끊어버린 거예요. 갑자기 전화가 거기까지, 매부가 광주, 급하게 광주 간다고 가셨는데 장성 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서 길이 막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고. 그 얘기하고났는데 전화가 끊어져버리더라고. 그 인제 그 이후로 전화 연결이 안 되는 거야. 인제. 계속 전화를 해도. 그래서 인제 광주 사태가 터진 줄 알았어요. 그러고 그 사태가 인제. 또 그, 그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 마음은 솔직한 얘기가 정말 날개 있으면 날라라도 가겠는데. 뭐 만사를 제쳐놓고 그냥 가서 부딪치고 싶은데 그래서 전화 했는데. 응? 그렇지 않아도 매형이 광주 내려갔는데 장성 가서 못 가고 응, 길 막혀서 못가고 지금 장성 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고. 그러니 뭐 이거 미치지. 이야. 그때 또 참 그 마음은 너무 답답하고 아, 어떻게 그냥 할 길이 없더라고. 5·18 그렇게 광주에 났다는데.
면담자 : 그 당시에 시카고에서도 로렌스(Lawrence) 그쪽 예전에 한인타운 있던 데가 로렌스 지역인가요? 그쪽에서 뭐 항의시위 같은 걸 조직하고 했다고 하는데 혹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좀 알고 계신가요?
구술자 : 그때는 그런 단계가 아니었어요. 왜냐면 내가 시카고를 와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회 계통으로는 늘 그 내가 인제 남선교회도 맡고 그러면서. 내가 감리교 다니거든. 어, 교회 연합회니 뭐니 해서 남선교회 연합회다 늘 미딩(meeting)을 갖거든요, 한달에 한번씩도 있고. 이렇게 해서 쭉 보면 내가 시카고를 인제 파악을 하기에는 그때 80년대 그런 일이 났을 때에 뭐 로렌스에서, 우리는 이제 교회에서, 교회에서 목사님하고 할 길이 없으니까 기도회를 했지. 기도하자 해서 기도회. 장철우 목사. 그땐 아이, 철야기도 했어요. 그때. 철야기도. 몇 일을 철야기도를 했어요. 밤을 새우면서. 낮에는 일을 하니까 일 갔다 오면 모여가지고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 기도, 새벽에까지 기도 하고 새벽에 잠깐 눈 붙이고 나가고 한 며칠을 3일 철야 기도를 하자고 그래가지고.
면담자 : 이게 80년 5월이었었나요?
구술자 : 그러지, 광주 사태 나고 나서. 여기서는, 나로서는 할 길이 그거 밖에 없었어요. 또 교회에서 그랬고 교회에서도 그랬고. 많은 교회들이 그랬어요. 그래도 그러고 인제 거기가 형편이요, 여기 시카고 사정이 어떻게 됐냐면 내가 그때 파악을 했는데요. 시카고 와서 시카고를 인제 파악을 했는데 교회를 댕기니까 남선교회나 여선교회, 와이프는 여선교회를 하고 교회 연합회 여선교회, 남선교회를 통해서 시카고를 이렇게 판단하기를 내가 어떻게 판단을 했냐면 이, 또 내가 다른 정보도 입수를 했고. 군사 박정희 때서부터 시카고에다가 교두보를 내린 거예요. 미주 거점 지역을 시카고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왜냐며는 LA도 호남 사람들이 많고 뉴욕도 그렇고. 호남사람들이 주도를 했어. LA나 뉴욕은. 아마 호남이 우세하고 LA, 뉴욕도 그러고. 근데 이 시카고가 그러지 못해서 5.16 정부에서 시카고에다 교두보를 내렸는데 어느 교회 어느 목사님이 미국 온지 오래됐거든, 50년대 자유당 때 미국에 오신,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그런, 내가 누구라고 지명 안 하는데 그 교회 그 목사님이 거기에 중심, 중심이다. 그 교회가. 그렇게 내가 정보를 입수를 했지. 그래서 시카고에다가 5.16 군사 정부 때서부터 미국을 그, 미국을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그랬거든. 근데 그 후로 그 광주 사태가 나고 79년 10.26 사태가 나고 12.12 사태가 나고 광주 사태가 나고 이렇게 됐잖아요. 이렇게 됐는데 그런 상황이야. 시카고가. 인제 그 후로도 확인이 됐지만. 그런 것으로 내가 파악을 했다고. 내 정보 수집으로는. 그런데 그때는 인제 그렇게 지나가고 광주 사태 후로 인제 김대중 선생이 이렇게 됐잖아요. 그 사형구형까지 받았잖아요. 그 5.16때 71년 참 그, 뭐야 그 뭐야,
면담자 : 71년이요?
구술자 : 내가 75년 내가 이민 오기, 김대중선생이 그 일본 가서 잡혀가지고 온 게 내 이민 갔다 온 이민 떠난 후죠 아마.
면담자 : 그때가 72
구술자 : 전이었나?
면담자 :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73년
구술자 : 전이었는가? 박통때 그랬으니까. 맞다. 71년 대선 끝나고 일본으로 가 있었거든. 그때 험했거든, 그때. 일본으로 가있었거든. 그래 일본서 그때 이래 해가지고 배타고 이렇게 오는 거를 헤리콥터 미국 FBI에서 알고 헤리콥터 띄워가지고 만류했다. 그때는 그럼 내가 이민 오기 전이야. 71년 대선 아마 끝나골꺼에요. 맞아요. 그러고 여기는 80년 사태 나고 또 그때 시카고에서의, 글쎄 그거는 내가 못 들었어요. LA에서 뭐 로렌스에서 모여가지고, 모여서 했다면 호남사람들이 어디 술집에서, 술집에서 술 한잔 하고 울분을 터뜨렸겠지않았나 하지 않았나.
면담자 : 한국인, 당시 유학생들을 좀 중심으로 좀 그런 활동들을, 항의 집회 같은 것들을 하러 뭐 5월 한 마지막, 어느 날짜는 자세히 모르겠는데 그때 좀 한국, 여기 왔던 한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술자 : 그때는 유학생들이 없죠. 없어요. 조기유학생이라는게 조뱅, 내 처남, 그 한국일보 사장 김용우, 그 몇몇이지. 그만한 유학생들이 여기가
면담자 : 아무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선생님은 잘 좀 모르시는 부분이네요.
구술자 :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벌써 뭐 뭐 시위를 했다구요?
면담자 : 항의 집회를 뭐, 로렌스 어디 식당, 식당? 식당 주차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은행 주차장.
구술자 : 은행 주차장?그런 일이 있으면 벌써 그때만 해도 한국일보가 있고 조선일보가 있었거든요.여기 일간지가. 한국일보 조선, 조선은 인제 없어졌지만 그때는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도 그때 있었을거야 아마. 중앙일보가 그후로 들어왔나? 하튼 한국일보는 처음부터 있었으니까. 근데 그런 거 나면 신문에 나거든. 그믄 여기서는 그때는 신문이 모든 정보의 그거였는데. 나는 그런 모르는 사실, 있었는 걸 모르는데. 그거는 내는 모르겠어요.
면담자 : 네. 그럼 선생님은 쫌 이렇게 선생님이 다니시던 교회 내에서 그 5월 한 3일정도 철야기도회를 같이 하고. 그때 쫌 기도회를 같이 진행, 좀 기도회에 참석하셨던 분들, 같이 기도회를 하셨던 분들이 좀 많이 되셨나요? 철야기도를 같이 하셨던 분들이 숫자가 좀...
구술자 : 그때 그 장로님들하고 목사님하고 그 교회 임원들 뭐 많아봐야 한 60명? 철야기도니까 그렇게 많이 참석 안 하죠. 60명 내 생각에는